제64차 文化遺産踏査 南漢山城(3-3); 守禦將臺-至和門-로터리
(92) 守禦將臺 -京畿道有形文化財 제1호-
將臺는 將帥의 指揮所로 남한산성의 서쪽에 있는 主峰 淸凉山(해발 483m) 頂上部에 있는
수어장대는 성안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는 二層 樓閣으로,
원래 單層樓閣으로 축조하고 <西將臺>라고 부르던 것을 英祖 27년(1751) 留守 李箕鎭이
王命으로 二層 樓閣으로 증축하고 바깥에는 <守禦將臺>, 안쪽에는 <無忘樓>라는 扁額을
걸었으며 西臺라고도 불렀다.
남한산성 5개의 將臺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장대이다.
(93) 守禦將臺 정면
(94) <守禦將臺> 편액 -筆者는 모르겠다.- (*下澣=下旬 *澣: 열흘 한)
원래는 ‘西將臺’로 남한산성의 守禦를 맡았던 守禦廳(前, 左, 右, 中, 後의 5官이 소속되었음) 중
右營將이 陣을 치고 있었던 곳이며, 丙子胡亂 때에는 남한산성 전체의 指揮所였다.
(95) 守禦將臺 右側面
현 건물은 憲宗 2년(1836) 廣州府 留守 履坦齋 朴綺壽가 改建한 重層의 樓閣 建物로
그 형태와 구성이 우리나라 傳統木造建築物 中 특이한 例에 속한다.
(96) 守禦將臺 추녀
(97) 수어장대 앞마당. 담장과 매바위
(98) 매바위
山城 築城의 총 책임자는 李曙, 西北城은 覺性 碧巖大師가 이끄는 僧兵들이, 동남쪽은
李晦가 나누어 쌓았다.
각성대사는 공사를 완공하였으나 이회는 私財를 팔아 경비를 충당하며 축성해도 地勢가
험하여 축성공사가 늦어지고, 경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工事經費를 酒色에
蕩盡하였다는 誣告로 누명을 썼으나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고 “내 罪가 없다면 매 한 마리가
날아갈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斬首 당했다.
그런데 이회 장군의 목을 베자, 그의 목에서 매 한 마리가 튀어나와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회 장군이 쌓은 성은 견고하고 과학적인 築城技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誣告였음이 드러나고, 이후 사람들은 이회 장군의 목에서 나왔던 매가 앉았던 바위를
‘매바위’라 부르고, 이 바위를 神聖視하게 되었다.
(99) <守禦西臺> 刻字
원래 ‘매바위’에는 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는데 日帝强占期에 일본인 관리가 바위
위의 매 발자국을 보고 참 신기한 일이라고 여겨 그 매 발자국이 찍힌 부분을 도려내 떼어 가
지금은 사각형의 자취만 남아 있다고 한다.
(100) 無妄樓
英祖 27년(1751) 廣州留守 李箕鎭이 增築한 守禦將臺 內便 門樓로 扁額이 2층 樓閣에 있어
1969년 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편액을 새로 설치하여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無妄樓는 丙子胡亂 때 仁祖가 三田渡에서 淸 太宗에게 항복했던 三拜九叩頭의 치욕과
瀋陽에 8년 동안 볼모로 끌려갔던 鳳林大君이 王位에 올라 北伐을 꾀했으나 限을 풀지
못하고 昇遐한 孝宗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英祖가 이름 지은 것이라고 한다.
(101) ‘無妄樓’ 편액
무망루의 뜻은 '無忘' 즉 '잊음이 없다',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102) 雩南 李承晩 大統領 記念植樹 -檀紀 4286년(西紀 1953년) 9월 6일-
(103) 度支部 測量 小三角點 -광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7호-
大韓帝國 末期(1908~1910초) 度支部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경기도와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 地籍細部測量에 기준이 되는 三角點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庚戌國恥 이후 朝鮮總督府에서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韓半島에 일제히 三角點을 설치하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하여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을 ‘舊小三角點’이라고 했다.
탁지부에서 설치한 구소삼각점은 현재 전국에 10여점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地籍史的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遺物로 三角點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鄕土文化遺産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곳 수어장대에 설치한 구소삼각점은 장대(將坮)라고 부르며 머리부분에 ‘+’자가 새겨있고
모서리에는 ‘度支部’라고 陰刻되어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所在: 경기도 廣州市 中部面(南漢山城面) 山城里 815-1(地目: 史跡地)
-緯度 37˚ 20’ 37” 445 / 經道 127˚ 10’ 32” 180 / 海拔高度 495.34m
(104) 수어장대 아래에 있는 소나무
(105) 淸凉堂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
李晦와 그의 妻妾을 모신 祠堂으로 李晦는 南漢山城의 동남쪽 築城工事 책임자였으나
誣告한 謀略으로 斬首되었으나, 그 후 죄가 없음이 밝혀져 西將臺 옆에 祠堂을 짓고 그의
넋을 달래게 하였다.
6∙25전쟁 때 燒失되어 다시 지었다.
본채의 전면에는 李晦의 肖像畵가, 좌우에는 碧岩大師와 李晦 妻妾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원래의 것은 6∙25전쟁 때 분실되어 그 후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였다)
*李晦의 부인 宋氏와 유씨 부인은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三南地方에서
수집해온 쌀을 모두 松坡江에 던지고 물로 뛰어 들어 自決했다고 한다.
쌀을 던진 송파나루 앞은 ‘쌀섬여울’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들이 자결한 漢江과 炭川이
만나는 위치 옆 舞童島 근처에서는 궂은 날이면 女人네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하며,
이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蠶室洞에 府君堂[호구부인당, 애기씨당]을 세웠는데 1971년
잠실개발로 철거되어 이야기로만 남아 있다고 한다.
(106) 淸凉堂 앞 향나무
(107) 수어장대 앞 담장, 바깥쪽
(108) 祭壇
(109) 守禦將臺 서쪽 城壁
(110) 南漢山城 女墻(牆) (*墻: 담 장 *牆: 담 장)
女墻은 體城壁 위에 설치하여 敵의 화살이나 총탄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으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이라고도 하며 古語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렸다.
여장 1타의 길이는 3~4.5m, 높이는 70~135cm 정도이며, 3개의 銃眼이 설치되었는데
가운데는 近銃眼, 양쪽에는 遠銃眼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111) 제6暗門(西暗門)
수어장대에서 서남쪽 100m 거리에 있는 해발 474m 지점의 제6암문은 성벽이 淸凉山
정상에서 서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크게 돌면서 曲城의 형태를 이루고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부분에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북동쪽의 돌출된 성벽이 敵臺機能을 하도록 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側面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元(本)城에 설치된 12개 暗門의 바깥쪽 開口部는 대부분 虹霓式이나 제6암문은 제2암문과
더불어 平据式이다.
仁祖 15년(1637) 1월 23일 밤에 습격해 온 淸兵을 물리친 곳이라고 이 암문 부근을
‘西暗門 破敵地’라고 한다.
*敵臺: 城門 양 옆에 외부로 돌출시켜 옹성과 성문을 敵으로부터 지키는 네모꼴의 臺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南漢葯水泉과 乳一泉약수를 거쳐 松坡區 巨餘洞, 馬川洞에 이른다.
(112) 守禦將臺에서 至和門에 이르는 城壁
(113) 守禦將臺에서 至和門에 이르는 城壁
(114) 天柱寺 터
남한산성에는 10군데의 寺刹이 있었는데, 그 중 天柱寺를 포함한 8개 사찰은 本城 안에,
東林寺는 蜂巖城 안에, 靈源寺는 漢峰城 근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 사찰들은 徵集된 僧軍의 宿食과 산성을 방어하고 훈련을 겸한 軍幕寺刹의 역할을
했으며, 舊韓末까지 유지되었다.
天柱寺도 仁祖 때 남한산성을 축성하면서 건립되었으며 日帝가 1907.08.01 城內의 무기와
화약을 收去하면서 寺刹도 모두 폭파∙파괴하였다.
守禦將臺 남쪽과 迎春亭이 있는 天柱峰 사이 작은 계곡에 山城에 가깝게 있는 天柱寺에는
<南漢誌>에 樓 앞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주춧돌과 맷돌만 남아있다.
(115) 天柱峰 정상의 迎春亭 -2012.09.29 사진-
天柱峰 정성에 있는 六角亭 亭子로 원래 至和門(南門) 아래에 있던 것을 옮겼으며
이곳에서는 서울 남쪽과 경기지방이 잘 보인다.
(116) 至和門(南門) 안쪽
山城의 서남쪽 鞍部(해발 370m)에 있는 지화문(남문)은 仁祖 2년(1624) 남한산성을
築城하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正祖 3년(1779) 성곽을 改∙補修 할 때 改築하고
<至和門>이라고 命名했다.
지금의 門樓는 花崗石 長柱礎石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 柱礎石을 대부분 새로
보충하여 門樓를 복원하고 2009년 正祖의 글씨를 集字하여 扁額을 걸었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中心門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으로 산성터널이 개통되기 이전에는 차량이 山城驛까지 통행하였다.
(117) 至和門(南門) 虹霓
丙子胡亂 때 仁祖가 漢陽都城의 水口門을 빠져 나와 松坡江(현재 石村湖水가 있는
前 漢江本流)을 건너 徐欣男의 등에 업혀 이 문을 통하여 남한산성에 入城하였다.
*남문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342번도로 또는 능선등산로를 따라 전철 8호선 山城驛으로
가고, 산성역에서 더 西進하면 성남 壽井區 靈長山(해발 193.6m) -望京庵을 거쳐 전철
분당선 嘉泉大驛에 이르고, 남문에서 계곡을 타고 白蓮社를 거쳐 은행골로 내려가면
山城遊園地에 이른다.
(118) <至和門> 편액
(119) 至和門(南門) 바깥쪽
(120) 보호수 -경기 성남 23(2006.06.20 지정)-
樹齡 450년(지정 당시)의 느티나무로 나무높이 14m, 가슴높이둘레 143cm로,
城南市 銀杏洞 山 143-2번지에 있으며, 이곳에는 보호수 4구루가 있다.
(121) 南門 바로 안쪽 台原 옆에 있는 碑石 群
*비석의 종류
墓碑, 陵碑, 神道碑, 紀蹟碑, 記念碑, 巡狩碑, 旌閭碑, 頌德碑, 愛民碑, 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남한산성 碑石群에 있는 비석들은 頌德碑, 愛民碑, 永世不忘碑이다.
(122) 南漢山城 碑石 群 -2012.09.29 사진-
至和門(南門) 동쪽 아래에는 18~20세기에 세운 30基의 비석이 있다.
본래 있던 19기의 비석과 남한산성 行宮 復元에 따라 이곳으로 옮긴 11기를 포함하여
30기의 비석을 한곳으로 옮겨 정비하였다.
이곳에 있는 비석은 歷代 廣州留守 및 守禦使, 府尹, 郡守의 碑로 在職할 때 백성들을
정성스럽게 돌보아 治定을 잘 했거나 善政을 베푼 분들에게 백성들이 그들을 追慕하여
세운 碑로 廣州留守를 거쳐 領議政을 지낸 沈象奎의 碑도 있다.
(123) 南漢山城 碑石 群, 사진 왼쪽 끝이 興宣大院君 永世不忘碑이다. -2012.09.29 사진-
<留守兼 守禦使 朴公之秀善政碑” 등 비석이 있으며 이곳 이외에도 송덕비와 그 비문은
池水堂 동쪽과 國淸寺에도 있다.
원래 頌德碑는 官職에 있으면서 백성들에게 恩惠와 敎化를 끼쳤을 때 百姓들이 그를
추모하여 비를 세워 功德을 기리는 것으로 功績을 심사하고 임금의 허락을 받아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頌德의 뜻을 기리는 碑로 遺愛碑, 紀功碑, 殉節碑, 忠烈碑 등이 있다.
(124) 興宣大院位大監 永世不忘碑 -2012.09.29 사진-
<興宣大院位大監永世不忘碑>가 있는데 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이 廣州府나
南漢山城과 어떤 관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125) 萬海紀念館 -2010.11.19 사진-
남한산성에 萬海紀念館을 건립한 것은 山城築城에 八道僧侶들이 참여하는 등 護國精神이
서린 聖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126) 萬海 韓龍雲之像 -2010.11.19 사진-
*萬海(卍海) 韓龍雲(1879~1944)
충남 洪城 출생, 兒名 裕天, 俗名 貞玉, 法名 龍雲, 法號는 萬海이다.
書堂에서 漢學을 배우다가 東學農民運動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 雪嶽山 五歲庵에
들어갔으며, 시베리아와 滿洲 등을 여행하였다,
1905년 百潭寺로 入山하여 俗世와 인연을 끊고 蓮谷禪師를 恩師로 出家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때 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一員으로
참여하였다.
독립운동가 겸 승려, 詩人으로 일제강점기 때 詩集 <님의 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으며 주요 저서로
<朝鮮佛敎維新論> 등이 있다.
(127) 行宮 남쪽에 있는 石物들
(128) 로터리에서 본 行宮 地域. 뒤는 守禦將臺가 있는 淸凉山 정상이다.
(129) 午餐場所 <두부공방>
(130) 즐거운 시간
(131) 正三品 前議官 石公世煥 淸德不忘碑
(132) CAFÉ 반월
(133) CAFÉ 반월에서
(134) CAFÉ 반월에서
(135) CAFÉ 반월에서
(136) CAFÉ 반월, 오늘의 모든 행사를 마치다.
(137) 돌담을 따라 산성로터리 버스정류소를 향하여….
(138) 남한산성에 핀 땅채송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