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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로딘 4중주가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
[ 푸시킨과 <에프게니 오네긴> ]
푸시킨은 18세기의 마지막 해인 1799년 모스크바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출생과 소년시대의 흔적인 모스크바에는 남은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러시아 최대의 시인은 일생의 실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 푸시킨 동상
생가를 잃은 대신 모스크바에는 푸시킨 문학박물관이 있습니다. 크로포트킨스카야 거리 12의 2번지와 흐루시초프카야 거리의 모퉁이에 있습니다.
푸시킨 박물관은 전시품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이 작품 <에프게니 오네긴>과 <스페이드 여왕>에 관한 것들입니다.
한 전시실에는 '오네긴 코너'라는 것이 있습니다. 푸시킨의 대표작 <에프게니 오네긴>의 주인공을 기념하는 장소입니다. 오네긴이 가공의 인물이므로 주인공이 쓰던 실물이 있을 리 없는데, 잉크병 등이 놓인 커다란 책상을 하나 갖다 놓고 오네긴의 것이라고 상상을 강요합니다.
* 모스크바 푸시킨 문학박물관
실제로는 알렉산드르 1세가 쓰던 책상입니다. 앞에 놓인 걸상은 나탈리아 골리치나라는 여인의 것. 나탈리아는 <스페이드의 여왕>의 주인공이 된 여성입니다. 걸상 위에는 푸시킨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주문해왔다는 기다란 담뱃대, 또 곁에는 '다치아나의 소지품'이라 하여 <에프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이 쓰던 가상의 물건 등을 유리상자 속에 모셔 놓았습니다.
부채, 바느질그릇 등 당시 귀족 집안 딸들이 사용하던 것입니다. 한 명작을 불후화하기 위해 주인공을 구상화하는 노력이 우습기보다는 갸륵하기만 합니다.
반면 벽에 초상으로 걸린 여인은 <에프게니 오네긴>의 모델이 된 실재 인물입니다.
먼저 마리아 라에브스카. 나폴레옹 전쟁 때 이름난 라에브스카 장군의 딸로, 1820년 푸시킨이 예카체리노슬라브에 추방되었을 때 이 장군 일가가 시인을 코카서스와 크리미아 여행에 데리고 갔고, 이 때 15세의 마리아에게 푸시킨이 반합니다. <에프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다치아나는 이 여성이 그 모델이라고 합니다.
또 올가 맛손. 페테르부르크의 예술계에 널리 알려졌던 여자로, 1817년 푸시킨이 여러 편의 시를 이 여자를 위해 썼습니다. 이 올가가 <에프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다치아나의 여동생 올가의 원형이었다는 것을 레르나프라는 푸시킨 연구학자가 최근에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이브노치아 이스토미아. 무용가였고, 역시 <에프게니 오네긴>에 등장합니다. 이 여자 때문에 두 남자가 결투까지 했고, 푸시킨의 결투 취미는 이 때부터 생겼습니다.
* 박물관 내 푸시킨 밀랍인형
푸시킨 박물관에 보관된 각종 자료는 10만 점에 달한다고 합니다. 주로 그림과 서적들입니다. 그 방대한 양에 푸시킨의 크기를 느낍니다. 그의 육필 원고들은 모두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문학연구소(푸시킨 관)에 따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안내인의 설명에 의하면 푸시킨의 기념관(또는 박물관)은 러시아 전국에 22군데나 있다고 합니다. 시인은 남방 추방 때문에 서남부 러시아의 각지를 돌아다녔고, 그의 발길이 머문 곳마다 발자국에 물 고이듯 기념관이 생겼습니다.
푸시킨의 기념상은 도대체 몇 개쯤 될까요. 그 숫자를 정확히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뿐 아니라 구 쏘련 땅 각 공화국의 수도에는 반드시 푸시킨의 동상이 있고, 군청 소재지마다 반신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도시에는 꼭 1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페테르부르크 같은 곳에는 5개나 됩니다.
기념관이나 기념상 외에도 웬만한 도시에는 푸시킨의 이름이 붙은 학교나 광장이 반드시 있고, 전국 2만 개의 중등학교에는 푸시킨 코너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街)는 이 도시에서 가장 자유스럽고 활기 있는 거리입니다. 아르바트 광장에서 외무성 건물 옆까지 폭 20m 가량에 길이 1,200m의 길이 직선으로 뻗어 있습니다. 보행자 천국으로 차가 일절 다니지 않습니다.
이 아르바트 가의 53번지. 연한 녹색의 2층 집이 푸시킨의 신혼의 집입니다. 푸시킨의 집으로서는 모스크바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입니다. 1986년 2월 18일(그의 결혼날) 기념관으로 개관되었습니다.
* 푸시킨 생가
이 기념관에는 부인 나탈리아의 얼굴을 초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미모가 빼어납니다. 이 미모가 대시인을 죽였습니다. 나탈리아의 여동생 에카테리나의 초상도 보입니다. 나탈리아의 스캔들 때문에 결투 사태가 벌어져 결국 푸시킨을 쓰러뜨린 당테스, 그는 그 2개월 전에 이 여자와 결혼하고 있었습니다.
* 생가 건너편의 푸시킨 부부 동상
차르스코에 셀로는 페테르부르크 남쪽 교외에 있습니다. 1937년 푸시킨 100주기 때 이 곳의 학습원에 다닌 것을 기념하여 푸시킨 시로 마을 이름이 개칭되었습니다.
시내로 들어서자 푸시킨 가가 나오고 그 길 한쪽 모퉁이에 선 건물이 '키타에프'의 집입니다. 푸시킨은 1831년 2월 모스크바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학습원 시절의 즐거운 추억 속에 신혼생활의 첫 여름을 보내기 위해 차르스코에 셀로에 온 적이 있고, 그 때 세 들었던 이 집이 기념관이 되어 있습니다.
푸시킨이 다닌 학습원(리체이)은 에카테리나 궁전 한쪽 끝에 붙은 부속건물입니다. 학습원은 1811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귀족 자제를 위한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설립했던 곳이고, 이 해 12세로 입학한 푸시킨은 제1기생이 됩니다. 그는 여기서 6년의 과정을 마치는 동안 청춘기를 보내면서 대시인으로 성장합니다.
* 예카테리나 궁전 안에 있는 푸시킨 동상
학습원은 4층짜리 건물입니다. 푸시킨의 명성에 값할 만큼 참관객들이 앞에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학습원은 혁명 후 문을 닫고 일반인의 주거로 쓰이다가 1968년에 푸시킨 기념관 연맹 소속의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푸시킨은 학습원에 입학한 직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1815년(16세) 푸시킨이 초급반 3년 과정을 마치고 진급시험을 치르는 자리에서 자작시 <황제촌의 추억>을 낭독하여 당시 시단의 원로이던 데르자빈의 격찬을 받은 것이 푸시킨의 탄생이었습니다. 그 영광의 방이 3층에 아직도 있는 큰 홀입니다.
* 가까이서 본 동상
이 해에 대시인 주코프스키가 소년 시인의 명성을 듣고 학습원으로 몸소 찾아왔고, "이 소년은 러시아 문학의 희망이다"라고 그 뒤 어느 편지에 썼습니다.
뒷날 푸시킨은 <에프게니 오네긴>.의 유명한 제8장 서두에서 이 학습원 시절의 시신(詩神)의 내방을 회상하게 됩니다.
이 학습원에서는 개교일인 10월 19일이면 지금도 해마다 성대한 행사가 열립니다. 또 푸시킨의 생일인 6월 6일에는 문학 축제가 펼쳐집니다.
푸시킨이 <에프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한 것은 황제에 대한 저항시 때문에 남방으로 추방된 시절 키시뇨프에서였습니다. 키시뇨프는 구 쏘련땅의 남서부에 위치한 몰다비아 공화국의 수도입니다. 75만 인구의 이 도시는 푸시킨이 체재할 당시 주민이 4만이었습니다.
* 키쇼니프 지도
구시가지의 옛 길의 하나인 안토녜프스키 가의 19번지. 하얀 벽의 초가가 푸시킨 기념관입니다. 19세기 초의 집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안은 좁다란 방이 두 칸뿐입니다. 고가(古家) 옆에 전시실 건물이 따로 하나 세워져 푸시킨과 그의 시대에 관한 각종 자료들을 펼쳐놓고 있습니다. 이 기념관은 푸시킨이 1820년 키시뇨프에 도착한 후 최초의 두 달동안을 지낸 집입니다.
푸시킨은 그 후 키시뇨프의 여러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가 <에프게니 오네긴>을 기필 한 것이 정확히는 키시뇨프를 떠나기 약 석 달 전인 1823년 5월 9일 밤이었습니다. 이 <에프게니 오네긴> 제1장의 집은 불행히도 자취조차 없습니다. 푸시킨은 이 작품을 그의 감호를 맡았던 인소프 장군의 집 관리인인 알렉세이프의 집에 있을 때 쓰기 시작했는데, 그 집 자리가 지금 신시가지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 키쇼니프의 집
푸시킨이 <에프게니 오네긴>을 7년 만에 완성한 곳은 볼디노 마을입니다. 여기에 아버지가 결혼 선물로 사준 영지가 있었습니다. 볼디노 마을은 모스크바 동쪽의 니제고로드 주에 있습니다. 볼디노에는 영지의 집이 여러 번 불탔으나 수리를 하여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고, 매년 10월 초면 '볼디노의 가을'이라 하여 시낭독 등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 집 내부
푸시킨의 고향은 두말 할 것 없이 미하일로프스코에 영지입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프스코프로 가는 열차는 바라샤바 역에서 떠납니다. 기차가 느려 프스코프까지 250km를 5시간 걸려 달립니다.
여기서 미하일로스코에까지는 남으로 120km. 이 가도의 일부는 푸시킨이 마차를 타고 다니던 길입니다. 키 큰 가로수가 늘어선 차도는 들판 가운데로 나서 폭이 넓고 곧기는 하지만 포장이 더덕더덕입니다.
차는 2시간 만에 푸시킨스키 에고리 마을에 들어섭니다. 푸시킨 성역의 입구입니다. 숲길을 지나니 공지가 트입니다. 매년 6월 6일 푸시킨의 생일에는 이 곳에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려 3,4일간 계속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미하일로프스코에 영지 입구입니다. 길 옆에 유명한 반항시 <마을>의 한 구절이 팻말로 꽂혀 있습니다. '곱사등 다리'라는 하얀 다리를 건너서 사과나무 과수원을 지나면 푸시킨이 살던 집이 나옵니다.
미아일로프스코에의 영지는 푸시킨의 외증조부인 에티오피아 출신의 흑인 아브람 간니발이 황제의 시종으로 있으면서 하사받은 땅이었습니다. 푸시킨은 학습원 졸업 후인 1817년(18세)과 1819년에 찾아와서 시골 풍경과 농촌 생활에 취했습니다.
남방으로 추방된 후 오뎃사에서 영지유폐라는 칙령을 받고 이 곳에 칩거하기 시작한 것이 1824년 8월. 이 때부터 2년 간 머물렀습니다. 자유의 몸이 된 후에도 여러 차례 방문했고, 마지막으로 온 것은 시인이 죽기 전해인 1836년 어머니의 장례식 때였습니다.
* 오데사 추방 중에 살던 집
어머니의 소유가 되어 있던 영지는 이 해에 푸시킨과 두 동생 것이 되었으나, 시인은 동생들 몫을 사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푸시킨으로서는 이 곳이 고향인 셈이고, 그래서 여기가 푸시킨의 성지로 되어 있습니다.
푸시킨의 영지 저택은 방문객이 장사진입니다. 어느 방에서나 <에프게니 오네긴>의 시행(詩行)들이 발에 밟히는 기분입니다.
작은 뒷방 하나는 <에프게니 오네긴> 제4장에 자세히 묘사된 대로입니다. "오네긴은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 혼자서 당구를 친다"던 당구대도 있습니다. 서재 또한 <에프게니 오네긴>에 나옵니다. 책상과 의자는 푸시킨이 쓰던 것입니다.
기념관을 나서면 바로 옆의 조그만 오두막이 고명한 유모 아리나의 집입니다. 유년시대부터 푸시킨의 유모이던 아리나는 푸시킨이 대시인이 되고 나서까지도 그의 시에 영양(營養)을 준 여인입니다. 처음에는 농노였으나 자유의 몸이 되고도 푸시킨 가(家)의 한식구로 남아 있었습니다.
미하일로프스코에 시절 푸시킨은 이 유모의 방을 늘 찾아와 옛 이야기와 민요를 들었고, 그것을 문학으로 재생시켰습니다. <에프게니 오네긴>에 나오는 다치아나의 유모는 이 아리나가 모델입니다. 프스코프 시내의 푸시킨 공원에는 푸시킨과 유모가 나란히 손을 잡고 동상으로 서 있습니다.
푸시킨 문학이 러시아 문학의 어머니라면, 결국 한 유모가 러시아 문학의 젖줄이었던 것입니다.
기념관 뒤뜰에 서면 소로치 천 너머로 숲과 들판이요, 푸시킨 시에서 "2개의 호수가 보인다"던 큰 쿠차네 호와 작은 말라네츠 호가 양편으로 한눈에 들어옵니다. 왼편의 말레네츠 호 쪽으로는 이웃 마을 트리고르스코에로 가는 오솔길이 나 있습니다.
트리고르스코에는 옛날의 여지주 오시포바 울프의 영지입니다. 저택은 혁명 때 농민들이 불태운 것을 1962년 수복하여 이 집 또한 기념관입니다. 기다란 단층집 하나가 넓은 정원을 앞에 두고 외따로 서 있습니다.
과부이던 여지주에게는 두 딸이 있었고, 이 딸들이 푸시킨의 영지에 놀러와 시인과 친해졌습니다. 시인도 이 집에 자주 왔습니다. 그 큰딸 안나와 작은딸 지지가 바로 <에프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다치아나와 올가 자매의 모델입니다. 큰딸이 작품 속의 다치아나처럼 정숙했고 푸시킨은 사랑하여 평생 결혼을 안했다고 합니다.
트리고르스코에 영지의 정원은 넓이가 38ha나 됩니다. 정원 속의 소로치 천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나무벤치가 하나. '오네긴의 벤치'라 부릅니다. <에프게니 오네긴>에서 오네긴과 다치아나가 사랑을 속삭이는 장소로 설정된 자리입니다.
이번에는 스비아토고르스키 수도원. 푸시킨스키에고리 마을 입구, 푸시킨의 동상 바로 건너편입니다. 동상 앞에서부터 수도원 쪽으로 가는 길가에 꽃장수 아낙네들의 줄이 깁니다. 수도원의 앞뜰에 푸시킨의 동상이 있고, 여기서 양쪽 계단이 위쪽의 성당으로 인도합니다.
계단 입구에 "내가 어디서 죽더라도 내 마을 가까운 곳에 묻어다오"라는 푸시킨의 시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계단을 오르면 성당 옆의 전망대처럼 높다란 곳에 대리석 오벨리스크가 우뚝합니다. 푸시킨의 무덤입니다. 많은 꽃들이 놓여 있습니다.
푸시킨이 죽을 때까지 최후의 6년을 산 곳이 페테르부르크입니다. 푸시킨은 평생 페테르부르크에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던 집으로 갑니다.
옛 차르(황제)의 왕궁인 에르미타즈 궁전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 모이카 운하요. 그 운하로의 12번지에 푸시킨 기념관이 있습니다. 운하변의 좁다란 정문을 들어서니 안은 넓은 마당입니다. 한복판에 푸시킨의 동상이 선 안뜰 둘레를 거대한 3층 집이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
* 푸시킨 동상
이 집은 원래 볼콘스키 공작의 저택이었는데 푸시킨이 1836년 9월. 2년 예정으로 아래층 방 2개를 빌렸습니다. 그러나 비명의 죽음으로 실제로 거주한 것은 4개월밖에 안 됩니다. 이 건물은 1925년에 이미 방 한 개가 푸시킨 기념실이 되었고, 시인 주코프스키가 남긴 그림에 따라 1937년 집을 복구한 뒤 1949년 푸시킨 탄생 150주년 때 정식 기념관이 되었으며, 1987년부터는 아예 방이 11개나 되는 건물 전체를 기념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푸시킨이 아내 나탈리아의 부정을 밀고하는 익명의 편지를 전해받은 것은 이 집에 살 때입니다. 결국 그는 아내와 밀통한 프랑스 출신 사관 조르주 당테스와 결투를 하게 되고 그 때문에 죽습니다.
* 부인 나탈리아
이 결투와 관련된 전시물로는 결투 조건 문서와 상대자인 당테스의 편지 원본, 푸시킨이 결투 때 입고 끼었던 조끼와 장갑(장감 한 짝은 푸시킨의 무덤 속에 넣었다고 합니다) 등등. 서재에는 그가 숨을 거둔 밤색 나무소파, 그의 절명 시간인 하오 2시 45분에 시인 주코프스키가 바늘을 세워둔 시계, 데스 마스크, 여러 화가들이 그린 시인의 임종 모습 그림 중 한 장.
* 푸시킨을 죽인 당테스
결투로 중상을 입은 푸시킨이 이 집으로 옮겨져 절명하자 한 청년이 뛰어 들어와 고인의 머리카락 한 묶음을 베어달라고 했습니다. 그 한 청년이 뒷날의 이반 투르크네프였습니다. 투르게네프는 이 머리카락을 평생 간직하고 있다가 그의 사후 되돌려져와서 지금 푸시킨의 데스 마스크 옆에 놓여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처음 나올 때 마차 속에서 수도에 닿으면 존경하던 푸시킨이 마지막 숨을 거둔 집부터 찾아가야지, 그가 결투로 쓰러진 장소도 가봐야지 하고 마음먹었습니다.
당시 결투장은 당시는 교외였다지만 지금은 지하철이 다니는 시가지 변두리입니다. 초르나야레치카 역에서 내립니다. 역 안에 푸시킨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역을 나서서 개천가를 따라가다가 철길을 하나 건너면 공원이 나옵니다. 공원의 나무들은 키 큰 참나무 고목들이 200년도 훨씬 넘은 수명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 결투 장소 기념비
푸시킨을 쓰러뜨린 총 소리를 저 나무들은 들었을 겁니다. 시인은 쓰러지고 그 자리에 석주(石柱)가 일어섰습니다. 1837년 1월 27일 하오 깊은 적설 위에 선혈이 붉던 자리에 100년 뒤인 1937년 후손들은 오벨리스크를 세웠습니다.
이 기념비의 한쪽 면에는 작가 레르몬토프가 이 때문에 추방을 당하게 되는 유명한 시 <시인의 죽음> 첫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명예의 수인(囚人)인 시인이 죽었다 / 소문에 명예를 훼손당한 시인이 / 가슴에 총알과 복수의 원한을 안고 / 자랑스러운 고개를 숙였다.”
[ 알렉산드르 푸시킨과 <에프게니 오네긴> ]
러시아의 근대 문학은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현대 러시아어 또한 푸시킨이 출발점입니다. 러시아 문학의 발전은 천재적인 국민시인 푸시킨의 등장으로 새로운 장(章)이 열렸습니다.
그는 러시아 근대 문학의 창시자, 러시아 현대 문장어의 완성자로서 러시아 문학을 일거에 세계문학의 수준에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푸시킨의 창작영역은 서정시와 서사시는 물론 소설, 희곡, 문학 비평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운문소설 <에프게니 오네긴>은 러시아의 국민적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 문학의 고전으로 지금도 러시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걸작입니다.
<에프게니 오네긴>은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남자 오네긴을 향한 순진한 소녀 타치아나의 열정적인 첫사랑과 그 사랑을 거절했다가 아름다운 숙녀로 성장해 남의 아내가 된 타치아나를 갈망하는 오네긴의 비극적 사랑을 그렸습니다.
* 클라우디오 아바도 지휘로 듣는 차이코프스키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의 폴로네이즈
첫댓글 재능있으나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등져던 두 천재, 푸시긴과 챠이코프스키의 생애, 그의 작품으로 작곡한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 2막의 왈츠와 3막의 폴로네이즈를 좋아했는데. 이렇게 또 들려 주시어 감사합니다. 또 한 밤에 '안단테 칸타빌레'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고맙습니다.
류대감! 이번 글에 푸시킨의 고향인 미하일로프스코에 관련 사진을 찾느라고 무지 고생을
했는데...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나고 말았네요. 신경쓰느라 얼마 안남은 머리카락만
빠져버렸고...천재 푸시킨이 결투같은거 하지않고 좀더 살았다면 보다 훌륭한 걸작을 인류
에게 선사할 뻔 했는데, 근데 사진에서 보듯이 와이프 나탈리아가 무척 미모이기도 했지만
바람둥이 기질이 농후했다고 합니다. 또한 차르 정부에 반항적이었던 푸시킨에 대한 음모가
개입되었다는 설도 있지요.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