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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덕화만발(德華滿發) 원문보기 글쓴이: 김덕권
*德華滿發*
이해와 이해가 모일 때
도반 동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세상에는 사소한 오해로 그 정겹던 사이가 멀어지는 일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한 번 만 물어보고 한 번만 이해해주면 그런 일은 없을 것인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꽤 오래 된 얘기입니다. 제가 당시 교무님의 심부름으로 봉투 두 개를 들고 원불교 중앙총부로 가져 간 적이 있습니다. 봉투하나는 수도원 어느 원로법사님에게 갖다드리고, 또 하나는 남자원로원 법사님들의 공양비(供養費)로 전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충실하게 제 임무를 수행했죠. 근데 나중에 사단이 났습니다. 제가 그 봉투 하나를 중간에서 슬쩍 배달사고를 냈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바람결에 전해져 온 것입니다.
도반 동지 여러분! 사실은 그 봉투 두 개가 모두 원로 법사님이 출간하신 책값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교무님이 대금을 그 법사님과 원로원으로 나눠 보내드린 것이죠. 아마 나머지는 추후에 보내드리려는 생각이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그건 배달사고가 아니라고 나중에 간접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의혹이 해소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그렇게도 저를 모르셨다니요! 설사 제가 배달사고를 내었더라도 우리 교무님이나 제게 전화로 한 번 물어만 보셨더라도 그런 오해는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의 관계도 이렇게 성겨지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도반 동지 여러분! 그로부터 이 오해로 인해 그 분과 저의 사이는 쉽게 메울 수 없는 사이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마 지금껏 서로 소통이 없는 것을 보면 그 오해가 아직 풀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 어른의 자존심 때문인지, 혹 제게 얼굴을 볼 수 없어 그랬는지도 모르고요. 하여간 오해는 무섭습니다.
도반 동지 여러분! 그러나 이해는 오해와 달리 아름다움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해가 안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해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간의 관계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작은 말인 것 같지만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크게 다가올 때도 많습니다. 사랑은 해도 하나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해를 하면 누구나 쉽게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반 동지 여러분! ‘이해’라는 단어는 폭이 넓고 깊어 나이가 들어야만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다양성을 인정하면 더 많은 사람과 사물과 사연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해’는 아름다움의 시작인 것입니다.
도반 동지 여러분! 언젠가 친구들 모임에서 한 사람이 뜻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5-3=2’와 ‘2+2=4’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 어렵게 생각이 들지 않는 계산이라 쉽게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의 설명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5-3=2’란 어떤 오해(5)라도 세 번(3)을 생각하면 이해(2)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랍니다. 그리고 ‘2+2=4’란 이해(2)와 이해(2)가 모일 때 사랑(4)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기발하죠? 그리고 천만 옳은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오해할 때가 있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오해는 대개 잘못된 선입견, 편견, 이해의 부족에서 생기고 결국 오해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5-3=2’는 아무리 큰 오해라도 세 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풀이가 새삼 귀하게 여겨집니다. 사실 영어로 ‘이해’를 말하는 ‘understand’는 ‘밑에 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이해라는 것입니다.
도반 동지 여러분! 이해와 이해가 모여 사랑이 된다는 말은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랑은 이해인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이해와 이해가 모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삶은 ‘가까운 타인’의 삶으로 전락해 버린 듯싶습니다. 낚시 바늘의 되 꼬부라진 부분을 ‘미늘’이라고 부릅니다. 한 번 걸린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이 미늘 때문인 것입니다.
도반 동지 여러분! 우리는 가까운 타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미늘을 감추고 살아가는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너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오해라는 벽 앞에서 모두가 타인이 되곤 합니다. 정말 ‘5-3=2’와 ‘2+2=4’란 단순한 셈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와 서로를 가로막고 때로는 멀리 떨어뜨려 놓은 온갖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풀어 버립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사랑’에 이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도반 동지 여러분! 우리말에 ‘옳다’는 말을 한문으로 바를 ‘정(正)’이라고 씁니다. 중생이나 불보살이나 모두 인간이라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 번 멈추는 것입니다. 즉 <正=一+止>가 옳고 바르다는 얘기입니다. 멈춰 생각하면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요란하던 마음이 고요해지면 생각이 맑아집니다. 그때서야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한 번 멈춰 둘러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면 그것은 바른 것이고 오해가 아닙니다. 아마 그때서야 상대방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일거나 이해가 싹트는 것이 아닐 런지요?
도반 동지 여러분! 말 한 마디에도 죄와 복이 왕래(往來)합니다. 그래서 말 한 마디라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하물며 오해를 사실인 것 같이 발설하면 그 죄 무엇으로 감당할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눈을 자기가 보지 못합니다. 거울이 제 자체를 비추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중생은 아상(我相)에 가려 제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시비(是非) 만봅니다. 그러나 우리 공부인은 자타를 초월하여 자기를 살피므로 자타의 시비를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와 이해가 모일 때가 사랑입니다. 우리 이해로 사랑을 키워 가면 어떨까요?
원기 96년(2011) 7월 21일 덕 산 합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