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
1. 머리말
6.25사변으로 어른들을 여의고 갓난 때부터 외롭게, 서럽게 자라야 했고, 배고픔과 때로는 죽음의 연단을 거치는 삶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많은 이웃 분들의 사랑과 보살핌, 은혜를 입었다. 나는 결코 우연한 만남과 보살핌은 아니라고 본다. 주님께서 나를 향하신 특별한 보살핌의 간섭이요, 주님은 친히 나의 부모가 되어 주셨고, 결코 나를 떠나지 않으셨고, 내가 눈물 흘릴 때 주님도 같이 눈물 흘리셨고, 내가 배고파 할 땐 주님도 배고파하시며, 외로운 나를 늘 최고의 보호자를 부모대신으로 부치셨고, 늘 최고의 일터와, 학벌과, 섬길 수 있는 일터도 주시고, 가장 낮은 미천한 자리에서 억울한 (갑질)과 곤욕을 당하게도 하셔서 이웃들의 억울하게 받는 고통들도 이해하도 록 하시며,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고 섬길 수 있으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정다운 이웃이요, 벗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서 부모도, 돈도, 빽도 아무것 도 없는 나를 성심껏 도와주신 고마운 분들을 추억하며 감사를 드린다.
2. 왕고모님(고모할머니)
왕고모님의 이름은 석말희이다. 99세에 경주에서 소천 하셨다.
왕고모부께서 경찰간부였었고, 두 분 다 친정인 우리 집안을 위해서 애를 쓰셨고, 아버지가 고등고시 공부하도록 사주신 유일한 유산인 두꺼운 일본법서들이 한 궤짝이 되었다.
고모할아버지가 안동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재임 시에 공비토벌 차 경찰들 인솔하여 출동하시다가 임하면 천정리에서 공비들 20여명의 기습으로 총상당하시고 안동도립병원에 입원 치료받으시는 중에 간호부인 어머니와 보호자인 아버지와의 만남으로 내가 출생하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경감으로 승진하여 대구경찰서 사찰주임으로 옮기면서 아버지도 대구전매청에 취업, 가족이 생활하던 중에 6.25사변으로 인한 보도연맹 건에 의해서 아버지는 경산 코발트 탄광에 끌려가서 총살당하시고, 어머니는 나와 돌 때 사진 찍은 한 달 후에 간호부로 일하시던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자녀가 없는 왕고모는 어릴 때 나를 키워주셨고, 대구에 계시면서 경주에 내려오시면 나를 찾아서 도와주셨다. 내가 복지시설에서 중, 고교를 다닐 때도 학교나 복지시설을 찾아오셔서 소고기곰탕으로 보신도 시켜주시고 용돈을 주시곤 하셨다.
내가 울릉도에서 20세 어린나이에 공직생활을 할 때 들어오셔서 몇 달간 지내시다가 나가시고 대구로 이동한 후에는 결혼 할 때까지 같이 지내셨다. 철저하게 청결과 경우 바르심과 정직과 율법이 강하셔서 누구하고도 함께 생활하기가 힘드셨고 나도 매일 꾸지람 듣는 게 일상이었다. 가정교육을 할머니한테 철저하게 배운 것 같다.
함께 생활하시면서 학, 석, 박사학위 등의 졸업 식나 축하연 등에서 가운을 입으시며 행복해하셨고, 대구 인터불고 호텔에서 팔순 잔치를 해드리고, 92년부터 경주에서 아파트와 전원주택을 마련하여 우리 가족이 내려가서 할머니를 모시다가 나중에는 사정상 양노원에 모시고 99세에 소천 하셨다.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해주신 고마운 왕고모님이셨다.
3. 채 봉희 보모선생님
복지시설의 보모님으로 헌신하신 기도의 어머니셨다. 자그마한 키에 목소리가 너무도 다정, 다감하셨다. 병들어서 복지시설을 나가신 후 서울에서 교회전도사로 계시면서도 늘 기도해주시고 옷가지 등이랑 챙겨주셨다.
내가 울릉군에 산림공무원으로 재임하며 술을 마시며 방황, 방탕하고 있을 때 들어 오셨어 며칠 지내시다가 떠나실 때 부두에서 떠나는 여객선을 바라보며,그렇게 회개의 눈물을 펑펑 울다가 술을 끊고 이사 짐을 산중턱 초가집 단간 방으로 옮겨서는 가까운 기도원에서 매일 새벽기도회에 기도하며 출근하다가 보름정도 지나서 대구 달성군청으로 4급 을로 승진과 함께 발령 나는 기쁨을 얻었다.
미국에 가셔서 목사 사모가 되신 후에도 미혼인 나를 미국에 대리고 가시려고 애를 스시다가 교통사고로 소천 하셔서 큰 슬픔을 체험했다.
4. 최 종련 국장님
경북도청에 계시다가 대구시청 국장으로 계셨던 실력과 청렴과 사랑과 인정이 많으셔서 고교 졸업 직 후의 69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으신 사랑과 격려와 배려를 아끼지 않으신 나의 생애 최대한 고마운 후원자이시다. 영남 대 법대 선배님이시기도하다.
68년, 고교3년 때의 공직시험합격은 했으나 69년 졸업 후에도 발령이 나지 않아서 경북도청 산림과 임정 계를 찾아서 지원한 울릉군에 자리가 없다기에 “책도 없이 어렵게 합격했는데”하면서 눈물을 글썽 그렸다. 당시 인사담당자로서 산림보호 직으로 전직시험을 치도록 선처하여 주셔서 합격했다고 소식을 주시면서 울릉에 입도 하도록 하셨다.
출장차 경북도청을 찾으면 늘 “성공한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으셔서 늘 공부하는 자세를 가질 수가 있었다. 자택에도 초대하셔서 가족도 소개하여주시며 신축자택설계서도 보여주시기도 하셨다.
경북도청 감사과에 계실 때 울릉에 감사차 오셔서는 당시 이모군수님께 “석 홍, 공부할 시간을 많이 주라”고 하시며 “왜 승진 안 시켜 주느냐 하셔서 가신 뒤에 군수님께서 승진 장을 주시면서”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도 해주시고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한 겨울에 고급내복을 보내 주셔서 흰 눈이 덮인 추운 겨울날 자취 방 앞 우물에서 찬물에 목욕하고 감사하게 입었다.
대구로 이동한 후에도 늘 격려해주셔서 통신대학을 거쳐서 영남 대 법대 학, 석, 박사과정을 수업하고, 신일대학 전임 교수 때 90년 9월의 신진수 이사장님의 배려로 [석홍교수 법학박사 및 목사안수 축하연] 때 대구시 국장님으로 재임 시에 축사를 하시며 칭찬을 해주셨다.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가족이상의 사랑과 믿음을 가지시고 사모님과 함께 성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생애 최대의 고마운 분이시다.
5. 신 진수 장로님
신 진수 장로님은 신일대학(현 수성대학교) 설립자겸 학장, 이사장님을 하셨고, 교육학박사로서 국회의원을 두 차례 지내신 분으로서 나도 출석하여 주일학교 반사 등을 열심히 봉사했던 대구제일교회 장로님이시다.
82년에 신일대학에 시간강사로 첫 강의 후에 일찍이 연구실 책상을 주시고, 10월에 학생주임 83년 3월에 전임강사로 임명하여 주셨다. 그리고 학장실 바로 옆에서 기획주임으로 돕게 하시며 수업과 교목실을 돕게 하셨다. 무법하게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원에서 1년 수업을 마친 후 자수하니 2년간 휴직하여 신학공부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며 월요일 주야 수업을 마음껏 하도록 선처하여 주셨다.
신학대학원3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 논문학기에 복직을 허락하셔서 기획과장으로 이사장실 옆에 두시고 미군부대와 만포장 등의 맛 집으로 동행케 하셔서 먹 거리를 챙겨 주시기도 했다.
88년 3월부터 3년간 경영학과장, 91년 3월부터 2년간 취업보도과장, 94년부터 교목실장 등의 중요보직을 주셔서 지도케 하셨고, 특히 경영학과장시에 장남을 미국유학 보내기 전에 1년을 우리 학과에 맡기셔서 훈련하게도하셨다.
김영삼 정부의 학원정치인 사정으로 억울하게 영어의 몸이 되시고, 대학도 불법으로 주택업자에게 넘어가서 대법원의 최종판결에서 [설립자의 동의 없는 학원인도계약의 원천무효 확정판결]로 지금도 교육부의 {학원분쟁조정위원회}에 의한 임시이사 8명의 파송으로 조정 중으로 빼앗긴지 20여년의 너무 많은 세월동안 대학을 회수함에 지치신 안타까움을 느끼며 암수술과 투병 중으로 입은 은혜에 전혀 보답도 못해 드리고 기도할 때마다 위해서 간구드릴뿐이다.
6. 조 정호 지도교수님
조정호 지도교수님은 서울 법대 출신으로 노태우 대통령과 경북고등동기로서 영남대학 교무처장, 총장 직무대리 등으로 수고하신 학자이시다.
법대 야간부로 주경야독할 때 부산으로 졸업여행을 갔다가 경주 등을 거처 올 때 과 대표를 도와서 섬기는 모습을 보시고 학사졸업논문 제출 시에 “너는 내가 지도교수를 해주겠다고 하신 후에 석사 박사과정까지 15여년을 지도교수로서 보살펴 주셨다. 인정이 많으시고 내가 고생을 하는 것이 안타까우셔서 올 추석에 집을 찾았을 때, ”자네는 왜 그리 안 풀리노?“ 신앙을 가지더라도 너무 깊이 빠지지 말고 적당하게 믿어라”하시며 걱정해주셨다.
7. 강 성수 월성국교 선생님
나는 경주 월성국교 35회 졸업생으로 강성수 선생님은 5,6학년 때 담임이셨다.
우리 가정이 가장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의 담임이라서 나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당시 월사금을 제대로 못 내어 늘 독촉을 하셔야했고 월사금미납으로 학교를 일주일간 가지 않아서 집으로 자전거를 타시고 가정방문을 하셨고 졸업 비를 못 내어서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는데 2여년 후에 복지시설에 입소하여 중학교복을 입고 있는 나를 우연히 반월성에서 만나서 “학교에 오라”고 하셔서 보관해 두셨던 졸업장을 주셨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내가 대구 달성군청에 근무하며 영대 대학원을 다닐 때 우연하게 대구시내 길에서 만나서 집에 오라하셔서 가니 보관하고 계시던 내가 졸업한 때의 졸업앨범을 주셨다.
90년 9. 29일 날 신일대학교수와 경영학과장시에 설립자 신이사장님이 마련해 주신 인터불고 호텔에서의 [석홍 교수 법학박사학위 및 목사안수 축하연]에 오셔서 내가 눈물을 글썽이며 선생님의 애정과 사랑을 소개하며 인사시켜드렸다.
2004년의 <내라도>하며 <기독당>의 공천으로 출마한 17대 총선 때 관내에 계신다면서(가장 자랑스런 제자)라는 편지와 함께 선거를 도우시겠다는 편지를 받고 그 이후는 수소문해도 알 수가 없다.
8. 이 병희 울릉 군수님
70년 초에 울릉군청에 근무할 때 승진 장을 주시면서 “석 홍이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시며 집 건축으로 인한 주민과의 폭행사건에도 관사를 찾아서 “죄 송합니다”고 용서를 구함에도 “치료비는 왜 물어 줬느냐? 이야기 들어보니 순 나쁜 놈이던데” 하시며 오히려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다. 후에 대구 시 수성구청에 근무하며 영남대 대학원을 다닐 때 대구에 자택을 찾아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으나 소식을 알 수가 없다.
9. 성애원장 유 금순 어머님과 김 용성이사장님
복지시설 경주 성애원의 원장어머님으로 7여년의 시설에서의 생활과 대구로 나와서 줄곧 생활하는 동안에도 늘 사랑을 받았다. 법대 졸업 때도 오시고 결혼식 때도, 박사학위를 받을 때도 경산 영남대학까지 오셔서 축하해주시고, 당뇨로 고생하셔서, 민물고기(잉어 붕어, 피라미 등)를 좋아하셔서 가끔 식, 낚시하거나 초망으로 잡아서 요리하여 드리기도 했다. 대구에서 개척교회를 어렵게 할 때 계명문화대학에서 성서강의를 수업하고 있는 중에 전화로 “내려오라”고 하셔서 가니 200만원을 주셔서 고맙고 죄송했다.
김용성이사장님은 우봉복지법인의 이사장으로 한국의 사회복지계의 거물이시다. 한국노인회 회장을 역임하셨고 모교 강남대학교에서 사회복지명예박사학위를 받으실때 나도 초청되어서 참석하고 계기가되어서 대구에서 목회하며 50이 넘어서 강남대학교 사회복지전문대학원에 다니고 석사학위와 사회복지사자격을 취득하였다.
대외적으로 많은 복지사업을하시고 일본 등 출장이 많으시니 큰 만남은 적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박사학위논문비로 금일봉을 주셨으며 대학전임으로재직시에 나보고 "복지시설장을 맡아해보겠느냐"고도하시며 내가 영적인 어려움을 겪고 15년의 전임교수 사직을 하였음을 아시고 경주 모자원인 애가원에서 매주일 금요일 저녁에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토록 허락하심으로 목회를 대비한 훈련을 시켜주셨다. 2년후에 낙원교회를 창립할때도 많은 헌금을 해주셔서 누구보다 내가 은혜를 많이 입었다. 2003년, 3월에 소천시에는 경주 나자레원에서 장례예배때 내가 눈시울을 적시며 {조사}를 했었다.
10. 김 치영 목사님
김치영 목사님은 귀인같이 잘생기셨고 박식하시기로 교계 따라올 분이 없었다. 주로 우수한 최고두뇌인 경북고, 경북여고생들 크리스챤들에게 영어원서 등으로 지도하시며 신사중의 신사요, 인격이 너무나 훌륭하셨고, 학자이셨다. 동산병원 원목과 신학교 학감 등으로 주로 봉사하시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의 한 밀알 교회를 담임하셨다.
내가 공직과 대학원을 다니며 교회 출석하는 나의 외로운 가정형편을 아시고 동산간호대학이나 경북여고 출신 등의 최고의 가정과 처녀들을 신부 감으로 소개하여 주시며 결혼 시키시려고 애를 쓰셨다. 부모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소천하시기까지 변함없이 사모님과 온 가족이 나에게 사랑을 배푸러 주셨다.
11. 영적최고지도자님
10년 이상이나 말씀, 찬양, 기도 중심으로 육적, 마귀 적 <옛사람>에서 영적, 생명적 하나님의 성품인 <새사람>으로의 자기 갱신을 위한 집회를 통한 끊임없는 자아처리의 훈련 이였다. 나는 초기부터 지난날의 공직, 교직, 법학전공 등의 경험으로 기획, 총무, 교육부, 지역관리 지역장 등등의 보직을 맡아서 봉사하며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시골교회에 목회하러 간다고 본부를 떠난 후에 현풍 창고교회를 하면서 이웃동료 목회자들로 부터의 왕 따와 핍박 등으로 인한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견딜 수가 없어서 배신하고 떠났던 본부 간부에게 간청함에 흔쾌히 “올라오라”고 허락하심에 “살고 봐야겠다,” 하고, 교회고, 처, 자식이고 모두 던져 버리고, 집회에 오니 15평의 아파트와 매월 생활비 50만원도 주시고 오리털 잠바 등 필요함을 챙겨주셨다. 2010년 12월의 장폐쇄 증과 대장암수술비 전액과 병문안도 오시고 사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특히 감사함은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고 내면에 심한 열등감과 공황과 눌림으로 고통스러울 때 최고지도자님께서 집무실을 나오셔서 비서실을 찾은 나에게 한참이나 집회 중에 영상으로 촬영한 {천국의 진주성}등의 영상을 친히 보여주시며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셔서 어려움을 당하던때의 최고지도자님의 극진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일반 교회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무한한 주님의 사랑과 용서함]을 늘 체험하며 우리도 그 모습 속에서도 바뀌어 감을 늘 감사드린다.
12. 고산 둘째 처형
처갓집은 7남매로 아내가 막내이다. 어른들이 딸3, 아들3낳으시고 늦게 딸 얻으신지라 아내는 귀공녀로 자랐고 사랑을 많이 받았다. 처가는 장인어른의 부지런하심으로 7남매를 고등, 대학 등 다 공부시키시고, 큰 과수원 등 수 만평의 농지도 가지셨다.
그러나 살아계실 때 장남에게 다 물려주시고, 우리가 <처가>라고 가끔 들려도 어른들은 장남, 며느리 눈치 보시며 농산물 하나 마음대로 제대로 챙겨 주시지 못하셨다. 장로 권사님이신데도 큰처남과 처남댁은 교회출석도 않더니만 3남매도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큰 처남댁의 <급성폐암>진단의 시한부선고를 받은 후에는 회심하여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예수님, 열심히 믿고 교회에 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소천하신 후에는 큰처남과 조카들도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가 장인, 장모님 살아생전에도 좀 떨어진 의성군 봉양면에 살고 있는 둘째처형과 동서는 주위의 별명이<성인군자>로 큰 농사를 지어 시면서도,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담임목사를 잘 섬기며 우리가 가끔 들리면 처갓집서 못해주는 양식, 재래된장,꿀, 채소 등 아낌없이 차에 실어준다. 동지간의 정이고 사랑 이였다. 그 6남매(4남2녀)는 모두 대학을 나와서 큰 회사나, 은행, 교사 등등 취업도 척, 척 다들 모범, 우수멤버이다, 손자들도 서울 대. 이화여대 등등 축복을 받은 집안이다. 자녀들이 효성과 우애도 지극하고, 만복을 누린다. 성경말씀의 실체를 볼 수 가있다.
13. 김 경희 권사님
10년간 홀로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꿈의 소녀의 언니이다, 초등학교 와 경주모교회의 후배로서 참 순수하고 인정이 많다. 울릉에 있을 때 간호대학 다닐 때 울릉의 외로울 때 위로 편지도 보내주곤 했다.
내가 대구로 나온 후에는 소식을 몰랐고, 신일대학의 전임교수를 휴직하고 서울에서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천호동에서 우연하게 작은 여동생을 만나서 소식을 알고 가끔 만나서 차도, 식사도 나누며 늘 격려와 위로를 해 주었다. 따뜻한 성품은 모성애를 느낄 만큼 순수하고, 격이 없고, 친구 같이 부담 없는 위로를 가져서 늘 편안하고, 고마웠다.
내가 대장암 수술 후에 항암치료 받을 때 여동생 “순“과 초청하여 서울서 식사 대접을 하기도하고 수년전 텃밭에 키운 당뇨에 좋다는 돼지감자와 칼치김치를 담아서 조금 선물한 이후에는 지금은 소식이 없으나 살아계신 어머님과 형재들이 남과 같지 않는 집안 같은 따뜻한 감정으로 주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늘 비는 고마운 마음이다.
14. 노 숙희 여사님
김치영 목사님의 한 밀알 교회 반주자로 경북여고와 경북대학교 간호과를 나아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한 수재였고 마음씨 착한 교우였다.
교육자 집안의 2남3녀의 다복한 가정 이였다. 대학원 다니며 달성, 안동, 대구 수성구청 재직 시의 2여년을 김목사님의 권으로 부족한 나를 위하는 진실하고 궁휼한 마음으로 기다려주고 부모님과 남매들 친, 인척 분들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시고 “식구하자”고 친 가족처럼 환영하여 주심에 그 고마움은 내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늘 홀로니까 결단이 힘들었고, 결단하고 서울 가서 만나면 부담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늦게 또 박사과정에 입학 후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싶어서 서울의 근무처를 찾아서 광화문 앞 식당에서 만나서 “지금은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고맙다”고하니 “혼자서 공부하려면 너무 힘들 건데”.라고 오히려 동정했다.
한달후 훌륭하고, 잘생기고, 가정환경도 좋은 감리교단 목사님과 결혼식 소식을 들었다.
아들을 낳아서 돌 때 친정에 온 걸 알고 돌 반지를 갖고 고마운 친정집을 찾았다.
이 후에 성남 시에서 초교 교사를 하는 시누이를 소개하는 등 내려 올땐 차비를 챙겨 주기도하고 참 훌륭한 모습, 고마운 모습으로 지금은 미국에서 이민 가서 아들을 훌륭하게 자랑스럽게 잘 키우고 잘 살고 있다고 김치영 목사님 사모님께서 전해주셨다. 나도 인간인지라 어렵고 괴로움을 당할 때 마다 특히 우울증, 공황장애로 해매일 때 왜 그때 허락하여 함께하지 못하였는가가 얼마나 후회되었는지 모른다.
15. 박 우호 회장
대구에서 통신대학의 동문으로 열심히 살아온 [두래 모임]이 30년째 매달 모임을 갖고 있다. 내가 대학교수로 있을 때 모임을 주선했는데 어느 회원보다 굴곡이 많았다.
어려울 때마다. 힘을 실어주었다. 김진우, 박덕수, 이동수, 이동철, 김경환, 공해영. 박우호, 이병식. 이재구, 이인식. 곽정영, 석홍 12명이다. 나는 오산에 있으면서 정기모임에는 참석이 어려워 가끔 참여한다, 비록 작은 성의지만 어려울 때 박우호 전 대구, 경북 통대동문 회장의 격려와 가끔, 따뜻한 격려와 차비를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성의와 인정이 늘 고마웠다. 아들이 한의사이고, 개인택시를 지금까지 열심히 해온 것으로 안다.
16. 황 신청 목사
왕권의 가족이 500여명이 10년 이상 자기갱신을 위해서 함께 찬양, 기도, 말씀으로 매주 월, 화, 수요 집회에 전국에서 참여하고 있다. 유독이 전북 익산에서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황신청(본명 황광연)목사가 나에게 늘 대접 하고, 어려울 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며 무엇이든지 내가 하는 일은 믿고 성원함에 늘 힘을 얻는다. 정말 고마운 순수하고 착함을 볼 수 있다.
왕권에는 그 외에도 주 베드로 목사, 방성복 목사, 김군식 목사, 김영규, 홍희헌 목사님 등이 늘 격이 없이 상담의 대상이고 어려울 때 힘을 실어주는 특별한 고마운 분들이다.
또한 고려대 상대출신으로 아들들이 서울 대 출신으로 잘 되어있는 오집사님이 순수하시면서 내가하는 일을 권면, 평가도 하시고, 늘 격이 없는 대화상대로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는 고마운 모습이다.
17. 앞산 셋째동서
대구시청에서 모범공직자로 정년퇴직하신 앞산 헌네 집 셋째 처형과 (동서: 정승길)는 4남매의 자녀들과 더불어 나 한테 참 고맙게 하신다. 역시 (성인군자)로 겸손하시고, 예절 바르시고, 누구에게나 호인이시다. 내가 교수사표 등등 어려운 일을 저질러서 수습할 때마다 앞장서서 힘스주시고 내가 5년 전에 대장암 수술 후 입원하여 있을 때에도 두 차례나 찾아보며 위로금을 주기도 했다. 참 고마운 신실하신 처형과 동서이시다.
18. 배 효전 목사
창원 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배목사는 경북고와 영남대를 늦게 자력으로 공부한 아버님이 농촌교회 목회자 출신이시다. 신실한목사로서 강한 믿음과 실력과 사랑과 섬김의 누구보다 자랑할 수 있는 가까운 배울 점이 많은 목회자이다.
대구 제일교회에서의 교우로의 만남의 시작은 서울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3년을 같이 수업하였고, (아모스)라는 5명의 경상도 친한 동기로 모임을 특별하게 가지면서 내가 개척교회 때의 지속된 후원과 성원, 친교와 위로 권면 등등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어려운 처지의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우정을 변치 않았다. 아모스의 멤버 중 최동환도 주로 남양주 마석 등 변방에서 목회하며 변함없는 격려와 협조 위로를 아끼지 않는 신실함에 늘 고맙다.
20. 김 상철 친구
경주 모자원에서 생활하며 문화중이나 중 고등을 같이 다닌 윤일조, 송재용, 성애원의 전명석 친구와 더불어 늘 친한 형재 같은 우정을 아끼지 않는다.
6.25동란 전후 새대로서 가난과 배고픔을 같이 겪으면서 복지시설에서의 생활을 체험하였다는 동질감으로 누구보다 혈맹의 정이 있는 것 같아서 고향에 내려가면 같이 막걸리 잔을 나누며 우정을 나누는 격이 없이 어울리는 참 벗이다.
20. 윤 의현 친구
구미교회 장로인 윤의현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훌륭하신 어머님으로 훌륭한 모범적인 믿음의 삶을 살아왔다. 문화 중고 동기로서 학교에 재학 중에도 친하게 벗했고 울릉도 있을 땐 출장 나오면 의례히 내 집 같이 기숙하였다. 격이 없는 상담과 권면을 나누었고. 어머님께서는 나를 친아들처럼 사랑해주셔서 늘 고마운 어머님이시고 차를 갖고 경주 등으로 내려 갈 때는 경주 아화 천촌에 홀로 살고 계시는 친구 어머님을 찾아뵙는 다.
21. 울릉도 주재만 가족
20여세의 어린나이에 외로운 섬, 울릉도에서 군청 산림공무원으로 4여년 재직 시에 방황하고 괴로워할 때 한 가족처럼 위로와 격려를 아기지 않았던 주서방 내외였다. 토요일에 거주하는 봉래폭포앞 주 서방 자택을 찾지 않으면 섭섭하셔서 어린 아들을 대리고 군청을 찾아서 같이 짜장면 등을 나누었다. 외로운 나를 처재와의 인연도 생각하신 것 같다. 2015년 여름까지 11번째의 울릉도 방문은 의례히 주 서방 댁에 여장을 풀었고 한 가족처럼 지내고 있는 고마운 인연이다. 아들 성준이는 내가있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구미에서 회사원으로 잘 살고 있다.
22. 전 득렬 목사님과 [문목회 동문목사님들]
12년 전에 창립준비위원장과 초대 총무를 맡아서 수고를 조금 보탠 바는 있으나 어려운 나의 개인 사정으로 교단에서의 재명, 암수술 등등으로 참석조차도 못하고 있었으나 선배이신 같은 고향 경주중앙교회출신이시며 해병대 장교출신으로 서울의 큰 교회를 담임하시는 전득렬 목사님의 헌신적인 물심양면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전국에 130여명의 동문목회자들이 열심히 목회현장에 계시는데 그 중 수십 명의 동문 목회자들이 정례적으로 모임을 갖고 보람 있는 친목, 모교 장학금 및 세례식 등을 지금까지 잘하고 있음을 감사드리며 지금은 나도 함께 참여를 노력 하고 있다. 멀리 여수에서 열심인 회장을 역임한 박남인 동기목사나 산청 농촌교회에서 빠지지 않고 도우시는 선배 장성덕 목사님도 감사하고, 권용근 영남신학대학 직전 총장, 손달익 증경 총회장, 정연수 포항장성교회 원로목사님, 이번에 회장을 맡으신 인천의 성결교단에서 큰교회로 목회 성공하신 이동원 선배목사님, 그 외 열성이신 이종휘, 전인수, 여러분들의 동문목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3. 나자레원 송 미호 원장님
송미호 원장님은 나의 복지시설에서의 삶과는 관련은 없지만, 김용성이사장님 살아생전에 나자렜원이나 성애원 등 복지시설을 찾아뵐때는 늘 반겨주시며 안내도 해주시고 노인들을 위해서 특히 재단 법인이 어려울때 일본과 정부 관계기관 등을 다니시며 헌신을 아끼지 않으셨다. 개인적으로도 2002년 대구에서의 구의원 출마 때 금일봉을 보내주셨고, 2004년도 기독당으로의 17대 총선 출마 때에도 격려금을 보내주셔서 보답도 드리지 못하고 늘 죄송한 마음이다.
작년 6.4지자제 선거 때에도 어려울때 복지시설 지인 모 원장님께서 격려금을 보내셔서 요긴하게 보태었는데 안타깝게도 10월경에 지병으로 소천하셔서 늦게 후에야 소식을 전해 듣고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송미호원장님은 평생을 홀로 결혼도 마다한체 신학과 복지를 전공한대로 복지시설의 영혼들을 위해서 구령과 복지에 전념하시며 성공적으로 모범적인 복지시설의 운영으로 법인 산하의 고아원, 양노원, 모자원 등의 복지시설의 놀라운 발전을 볼 수 가있었다.
2. 결 론
내가 66여년의 인생길을 살아오면서 은혜 입은 고마운 분들이 이외에도 해아 릴 수 없다.
선배이신 허 상수 전 문화고교 교장님과, 이 원갑 이사장님, 김 은도 전교장님, 윤 경록 전교장님과 김 승환 전교장님과 현임의 김 진한교장님과 교사 선생님들, 김 태중 은사선생님을 비롯한 은사님들,
친구인 이달우, 송효섭, 김경호, 김상태, 김석수, 김삼용, 이석태, 이종희, 안영기,김재문, 김상연, 함재선, 표경희 등등 문화 중 동기 친구들과
서울의 강선이, 최상열, 전명석, 송재용, 유석희 등의 문중 동기 친구들,
큰고모와 적은 고모도 나를 잘 키우신다고 어릴 때 매질도하시고 나무라시며 어렵게 생활하심에 고마움을 잊을수 없다. 그러한 엄격한 가정교육이 없었더라면 얼마든지 잘못될수있었기 때문이다.
소천하신 장인 우남출장로님, 장모 박계화권사님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도 결코 잊을수없다.
특히나 나의 아내와 남매에 대한 감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집 세고, 독불장군인 나에게 시집와서 화병 들릴 정도로 스트레스 받으며 고생한 아내와 스스로 자립하여 개척해 나가는 아들 민국 이와 보살펴주지 못한 딸 민영이가 미안하고 고맙기만 하다.
남은 삶이라도 보은의 마음으로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공심>으로 궁휼과 성실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러한 보호자요 우정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함과 영광을 드릴뿐이다.
(P.S : 부족한 저를 중앙당 정치위원 및 지역위원장으로 허락하여 주신 60년전통의 부활(민주당)의 강신성대표님과 김민석의장님과 사무총장님과 대변인 등 모든 중앙당 간부님들과 당원동지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를드리며 결코 (사심)을 버리고 나라와 민족, 특히 어려운 서민들과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살신성인)으로 충성과 사명을 다 할것을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잘되셔야 할텐데요
목사님 처럼 털털하고 솔직한 사람도 드물지요
고맙습니다 못난것뿐입니다 오늘도 알바현장에서 20대 손주뻘되는 정식직원한테 욕도얻어먹고 저도 "야 임마 니는
애비도 어미도 없나? 배워 처먹은게 그게 다냐"?하고 욕을 해댔지요. 참 세상살이가...........장유유서고 윤리도덕이 메말라가니 정치군들 부터가 저 지경이니....김학성선생님 않 그렇습니까? 세상이 서글퍼요.....교육제도 정치풍토가 먼저 좀 바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