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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同名異人 그 엄청난 소동
이원우 아우구스티노(동벡성요셉성당)
* 경남 밀양 출신/ 초등학교장 정년퇴임/ 전 유네스코 부산협회 부회장/ 전 부산북구문인협회장 및 문화예술인협회장/ 전 천주교부산교구 은빛사목지원단장(노인학교 강사 발굴 및 지원)/ 전 초량시각장애복지관 노래지도+웃음치료 강사(가톨릭재단)/ 전 오순절 평화의 마을(삼랑진) 자문위원
* 현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직전 회장 신달자. 현 김수복)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원(회장 배계선)/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이사장 김지연)/ 한국문인협회 회원/ 대한가수협회 회원(회장 김흥국)
* 저서: 소설집 <연적의 딸 살아 있다(평화의 마을 이야기)> 등 2권/ 수필집 <승리의 길 멀고 험해도(천주교 신앙 체험)> 등 15권 기타 3권
*수상: 황조근정훈장/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봉사 본상)/ 부산 교육상/ KNN 문화대상/ 화쟁포럼 문화(문학) 대상/ 허균문학상/ <한국수필> 제정 청향문학상/ 부산수필대상/ <문예시대> 문학대상/ 부산가톨릭문학상/ 부산북구문학상
* 굵은 글씨는 가톨릭 관계
먼저, 이아무개라 하자. 이 이야기의 주인공 말이다. 본명은 몇 줄 뒤에 밝히기로 하고….
그는 문단에 이름을 낸 지 제법 오래인 위인이다. 40여 년이라면 이아무개가 그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셈이다.
하지만 그는 글재주가 하도 부족하여, 아직도 헤매는 중이다. 여기저기서 외면을 당하는 한갓 아둔패기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그가 한 번 된통 혼이 난 적이 있었다. 문단의 거목인 어느 큰스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그에게 일갈한 것이다.
“수필과 소설 두 가지를 쓴다고? 당신 처지엔 하나만 해도 버거울 텐데. 쯧쯧, 여생도 얼마 아니 않소? 소설에 전념하구려.”
그에게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고통이요 곤욕이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를 연신 훔치면서 돌아 나오고 말았다. 한데 신통하게도 그분의 지적에 순식간에 스스로 동의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줏대가 없다며 채찍을 자신에게 내려치지 않았고말고. 참, 그의 본향은 부산이다.
어쨌든 양자택일. 그가 앞으로 소설에 매달리기로 한 동기다.
세상엔 참 우연의 일치가 많다. 그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대구에 사는 것도 그렇다. 아니 이 경우엔 차라리 필연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는데, 동명이인의 이름이 이선우(가명)이다.
위 이아무개는 이선우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지면을 통해 알기는 한다. 이아무개와 이선우 수필가는 한자도 이름이 같다. 오얏 리, 착할 선(善), 비(雨)! 완벽하게 같은 이름을 쓴다.
이아무개와 이선우는 경주 이 씨 종친이고, 이아무개가 나이 일곱 살쯤 더 먹었다. 중시조 거(居) 자, 명(明) 자 할아버지의 38세손이니 (同 行列)이란 사실 앞에서 어느 누구인들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 참, 오얏 리가 아니다. 오얏이 자두로 바뀐 지 오래니 ‘자두’ 李라 하자, 하하.
경주 이 씨 종친회 문학회가 있는데, 이선우는 부회장이고, 이아무개는 그냥 회원이다. 문단에는 이아무개가 먼저 나왔다. 나이 차이만큼 7-8년? 뭐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 슬쩍 넘어가기로 한다. 경력이 문제가 아니다.
둘은 문단에서의 비중이 그만큼 차이가 난다고 모두가 치부하리라. 이선우가 저만큼 앞서 나갔다. 당사자인 이아무개조차 완벽하게 동의를 할 참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이선우의 명작에 ‘수의(壽衣)’라는 게 있다.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죽어서 잠시 걸치는 그 베옷에 사람들이 너무 매달린다는 그런 내용의 수필이다. 수필다운 수필이고말고. 한데 이아무개는 그런 차원의 글과는 거리가 먼, 소위 신변잡기를 벗어나지 못해서 탈이다.
이런 일까지 있었으니 황당하다. 이아무개가 가르쳤던 제자들이 자기 모교의 카페에다, ‘수의’를 그래도 올린 것이다. 스승의 글이라고 치켜세워 주면서. 덕분에 이아무개는 본의 아니게 제자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 남백송과 복수미(여 가수/ 가요무대 출전 수회)의 카페에도, 어느 제자가 그 작품을 실었으렷다? 그걸 읽은 제자 친구들이 엄청난 댓글을 달고, 이아무개에게 전화를 해 주는 것이었다.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아니라는 토를 다는 것도 한두 번이다. 나중에는 숫제 지치고 말았다. 이아무개는 이래저래 이선우로 인하여 울며 겨자를 몇 번이나 먹은 셈이다.
다시 한 번 고백. 실제 이선우는 문향이 드높은 수작을 빼어내는데, 이아무개는 그에 못 미치니 낭패라는 거다. 이선우는 조용한 성품에 선비다운 일상을 보낸다. 그에 비하면 이아무개는 홍길동처럼 뛰어다니기만 하고 실속도 없이 허송세월하고 있다.
이제 이아무개도 여기까지 적으면서 갈팡질팡했다. 혼란을 느끼기도 했고. 그래 둘 다 ‘이선우(李善雨)’ 하자. 큰선우와 작은선우라 구분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이다. 아니면 전주(前者) 혹은 후자(後者)로 하려 해 봤지만, 그 놈 者 자가 마음에 안 들어 이 시도는 포기한다.
큰선우와 작은선우의 기막힌 인연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둘 다 교장 출신이란 점이다. 큰선우는 초등학교에서, 작은선우는 중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 초등과 중등? 뭐 그게 그거다. 큰선우는 부산, 작은선우는 대구가 마지막 임지다. 지적(咫尺)이나 다름없고, 두 음절로 말하면 같은 영남이다.
얽히고설킨 이야기가 한둘로 안 그친다. 막상 졸고에 손을 대려하다 보니 큰선우 자신마저 쓴웃음밖에 안 나온다. 큰선우는 놀라 바빠질 아니 기절초풍할 사건 하나만은 맨 끝에 덧붙일 각오를 한다. 또 다른 우선 충격 일화들을 몇 개 들어 보자.
일흔이 가까워 큰 선우는 부산에서의 모든 걸 정리하고 서울 근교로 올라왔다. 낯선 곳에서 청승맞게 울기도 많이 했다. 그 심경을 부산의 문우들이나 교육 동지들에게 이렇게 표현했다. '나그네 설움' 실창(實唱)으로.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네”
상대가 나머지를 메꾸어 화답한다.
선창 고동 소리 옛 임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그러다가 그가 만든 트로트(요즘은 '한국 가요'라 한다.) 곡 가사가 하나 있다. 그게 ‘나그네 설움’ 못지않게 애절하다. 큰선우는 즉석에서 곡을 붙여 누구에게나 쏟아 놓는다. 짐짓 흐느끼는 목소리를 내며….
울면서 고향 떠나 타관에 와서/ 십년 세월 참으며 지내왔건만/ 여태껏 낯설구나 골목조차도/ 오늘도 어김없이 방황하는 나(1절)// 애당초 귀향일랑 생각 않아서/ 여기서 영원히 눈감겠다고/ 입술을 깨물면서 다짐했었지/ 하지만 이 한겨울 고향 그립다(2절)
제목은 ‘타관의 겨울나기’. 물론 십년이란 좀 과장된 거다. 하지만 그런 과장(誇張)이 있어야 가요가 생명을 얻는다. ‘육 년’이라 고집하면, 지나가는 개도 웃으리라.
한데 그런 그를 붙잡아 준 것은 성당이었다. 그는 가톨릭신자였던 것이다. 이사하고 몇 달 뒤에서야 주일 미사에 참예했더니, 주임신부가 소개했다.
“이선우 아우구스티노 가족이 이번에 부산에서 본당으로 전입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교우님들이 따뜻하게 맞아 주세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고, 여기저기서 알은체를 했다. 큰선우의 눈시울이 젖었다. 한참이나 그 자세로 서 있다가, 그는 이윽고 자리로 돌아왔다. 손수건으로 못다 흐른 눈물을 훔쳤다. 귀갓길, 도로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고 나서 몇 주가 지난 뒤였다.
주일(主日) 교중 미사가 끝나고 나서 귀가하려는데, 자그마하지만 이목이 반듯한 자매가 큰선우를 찾아온 것이다. 자매는 큰선우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저, 이경숙 마리아라고 합니다.”
“아, 예. 반갑습니다. 한데 왜 나에게 인사를 하는 거지요?”
“뭐 여쭤 볼 게 있습니다. 혹시 본관이 경주(慶州)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저도 경주 이 씨입니다. 저 성가 합창단에서 조그만 일을 맡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육부장이기도 하구요. 처음 인사하셨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성함이 같아서요. 모습도 비슷하십니다. 키도 그러시구요. 가운데 한자를 어떻게 쓰시는데요?”
“착할 善 자지요. 하지만 착하지 못합니다.”
“이를 어쩌나, 돌아가신 아버지와 한자도 성함이 같으시군요. 아버지를 뵙는 느낌입니다.”
거기까지 듣던 주위의 교우들 몇몇이서 박수를 보냈다. 새로운 모녀가 생겼다며 축하한다는 뜻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말고. 큰선우의 아내와 다른 가족들도 기뻐하였다. 파(派)가 다른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하자. 아니면 기절초풍이라도 했을는지 누가 아나?
집에 와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큰선우는 적이 놀랐다. 그 자매의 이름이 이경숙이라 했으니까 말이다. 큰선우의 아내 이름이 배경숙 아닌가. 배경숙의 남편이 이선우이고, 이선우는 이경숙의 돌아가신 아버지다?
모두를 또 다른 충격 하나. 이경숙의 남편 성이 배(裵) 씨라는 것. 배 씨는 본관이 분성 하나뿐이라서 하는 말이다.
그로부터 낯섦을 타는 큰선우의 가족들에게 이경숙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추태균 아마또 형제가 성가대 지휘자인데, 둘이서 의논하는가 싶더니 큰선우로 하여금 부활절에 성가대에 합류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도 도중 몇 마디 몇 마디를 솔로로 부르라는 거다. 너무나 인기 있는 ‘내 발을 씻기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 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이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중략)……먼 훗날 당신 앞에 가거든 나를 안아 주소서
26사단 불무리 성당이다. 서 있는 병사는 최진형 학사, 그 옆은 내 손자 박종빈 바오로. 겸손한 그 학사가 참 좋다. 이젠 제대해서 복학 준비를 하고 있다. 불무리 성당에서,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장병들 앞에서 주님께 봉헌했다. 그동안 필리핀에 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6개뤙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연습을 하였다. 고음 처리도 제법 되는 것 같아 큰선우는 안도하면서 며칠을 보낸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란 사자성어가 변함없는 진리였을까? 큰선우가 잦은 소변이 왜 그런지 용인 세브란스에서 갔더니, 과장이 조직 검사를 받으라는 것이다. 의사는 기계로 여남은 군데 살점을 떼어 넸다. 그 아픔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는 중에도 큰선우는 의사에게 물었다.
“오늘 바로 성당으로 올라갈 수 있겠습니까? ‘내 발을 씻기신 예수’ 연습해야 하는데요.”
“큰일 날 말씀입니다. 며칠 동안 움직이기조차 힘들 겁니다.”
그래서 정말 큰선우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저승에 먼저 간 그의 ‘임’을 위해 교우들 앞에서 주님께 봉헌하고 싶었던 복음 성가였기 때문이다. 이경숙 마리아에게도 한없이 미안했다. 큰선우는 밤새 앓으면서 진통제로 버텼다. 그리고 20일 뒤 마침내 그는 강남 세브란스에서 전립선암 수술을 받는다. 물론 그는 부활절에조차 성당에 못 나갔다.
수술 후 예후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한 달 만에 성당에 갔더니 이경숙 마리아가 딸이라며 한 소녀를 데려와 인사를 시켰다. 엄마보다 더 예쁜 얼굴에 미소가 아름다운 대학 1학년생. 배영현!
그로부터 딱 2년 뒤 큰선우는 서울 남산 자락 ‘문학의 집’에서 열여섯 번째 콘서트를 연다. 전립선도 없는 장애의 몸으로 말이다. 일찍이 유례없었던 일이라 치켜세워 준 이는 소수였다. 나머지는 촌로가 주제 파악을 못 하는 짓을 한다면서 수군거렸고말고. 쟈니리와 박수정 가수협회 이사, 복수미(KBS 가요무대 수회 출연) 등이 우정 출연하는 가운데 배영현이 와서 피아노 반주를 했다.
종교 간의 화합을 도모한다며 저지른 거창한 시도 하나. 대신 복음 성가 ‘살아계신 주’(복음 성가는 개신교가 원류?)를 큰선우가 봉헌했다. ‘내 발을 씻기신 예수’는 성가대 지휘자 추태균 아마또 형제가, 찬불가는 보덕 선사가 절창했다. 보덕 선사는 불교 한 종파의 종정(宗正)이다.
아쉬운 점 하나. 큰선우의 아내 배경숙과 가족들은 불참할 수밖에 없었던 것. 모두가 임을 잃는 슬픔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배영현의 어머니 이경숙 자매와 교우들이 자리를 빛내 주었으니, 그 함수를 어떻게 풀까? 실용 음악을 공부하는 영현이가 피아노 반주를 맡아 주었다. 그러고 보니, 큰선우의 동명이인 소동(?)은 그야말로 큰 은혜로 귀결된 셈이었다 치자.
한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일, 그러니까 큰선우의 크고 작은 열여섯 번째 콘서트장인 남산 자락의 ‘문학의 집’에서 정말 믿지 못할 일이 일어났으니….우선 사단장 신인호 소장(지금은 교육사령부에 가 있으니 實名을 들먹여도 괜찮겠지)이, 큰선우가 맺어온 모부대와의 인연을 생각하여 준(準) 전시 중이지만 26사단 각 예하대의 모범 병사 30여 명을 보내 준 것이다. 그걸 전제로 해야 이야기 실마리가 풀린다.
장내를 가득 메운 총 200여 명이 다 같이 일어나서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 부사단장을 비롯한 장병 일부는 단상에서, 나머지는 단하에서. 약간 뜸을 들인다는 마음으로 큰선우가 한마디 던짐으로써 장내 분위기가 바뀐다.
“저는 일흔 중반이 내일모레입니다. 한데 남산이 어디 있는지 그것도 여태 몰랐었습니다. 그리고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며 평생 애국가와 더불어 살아 왔습니다만, 과연 그게 사실일까 하는 의아심에서 헤어나지 못했지요. 어제 저는 일부러 남산을 답사한다며 작심하고 올라갔지요. 몇 걸음 안 가서 수많은 소나무를 발견하고 환호했습니다.”
다음 ‘사단가’를 제창하는 차례.
물론 군복을 입은 큰선우와 이경진 주임원사, 박참 중위(성악 전공) 등 26사단 장병 30여 명이 단상에 올라섰다. 큰선우는 그들을 하나씩 호명했다. 그런데, 세상에 이럴 수가! 이선우가 두 명씩이나 있는 게 아닌가? 계급은 일병과 상병…. 모두가 웅성거리고 야단이 났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너무나 철저한(?)우연의 일치 앞에 큰선우는 되레 할 말을 잃었다.
큰선우는 얼마 뒤 26사단 불무리 성당에 가서야 비로소 대중 앞에서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자기 목소리로 봉헌할 수 있었다. 사단장은 그날 마침 미사에 빠졌지만, 참모장 선우우용 대령과 헌병대장 통신대대장 및 장병 120명들이 그의 복음성가 한 곡을 들었다. 큰선우가 신상옥과 약간의 갈등(?)을 겪고 있을 때였다. 보란 듯이 열창했을 때, 만감이 온통 교차했고말고.
두 사람의 동명이인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련의 일들이었다. 그 함의(含意)가 무엇일까?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큰선우와 또 다른 더큰선우(이경숙 자매의 아버지는 선종한 지 오래다. 그가 큰선우의 형님임은 물론이다), 그 가족들 사이의 난마(亂麻)는 쾌도(快刀)로써 자를 게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풀어 나가야 하리라.
그에 못지않은 ‘소란’도 있다. 이건 눈물겹다고 예고라고 해야겠다.
세상에 장애인 아닌 사람은 없다. 그 정도만 차이가 날 뿐, 누구든지 불편함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큰선우는 중등(中等) 정도의 심리(적) 장애가 있다. 특유의 교만과 떠벌이….창피한 고백은 여기서 그치기로 하자.
그가 며칠 전에 김광석의 딸 서연 양이 잠들어 있는 유토피아 추모관에 갔다 왔다. 아니 걔가 거기 안장된 것은 큰선우 자신도 잘 몰랐었다. 그가 신해철 추모비 앞에 서서 사진도 찍고 취재 수첩에 뭘 끼적거리는데, 상무가 달려온 것이다. 물론 서로 아는 사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큰선우는 서연 양의 ‘현주소’가 거기임을 알 게 된 것이다. 여담(?)이다. 신해철의 3주기가 바로 코앞이다. 26일인가 그럴 거다. 큰선우는 5백 명이 모인다는 당일 북새통을 이루는 가운데서의 취재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선수(?)를 친 것이다.
잠깐 김광석의 부인, 그러니까 서연 양의 어머니가 하던 말을 기억해 보자.
“내 딸은 ‘장애우’가 되어서 생전 왜곡 날조된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큰선우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자기 소생을 장애우라 한다? 큰선우는 일갈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딸에게 ‘장애우’라니…. 장애인 협회에 가서 장애우라 말해 보라. 삿대질을 당한다. 그렇게 ‘장애인’이라 불러 달라고 호소했는데, 서연의 엄마마저 외면한단 말인가! 아니 뭐가 뭔지 모르는지 모른다.”
하기야 양승태 대법원장은 청문회 떄 한 술 더 뜨더라. ‘장애우’도 아니고 ‘장애자’라 하다가 여야 의원들로부터 뭇매를 맞았잖은가?
하여튼 장애인이라 하고서 이야기를 풀어 가자.
서울 근교에 올라오기 전에 큰선우는 3년 동안 삼랑진읍 오순절 평화의 마을에 한 달에 두어 번 다녔다. 별 재주가 없으니, 대부분이 장애인인 그들 틈에서 섞여 노래나 부르고 떠드는 게 고작이었다. 자신이 분양받아온 삽살개가 새끼를 낳으면 그 뒤차꺼리나 하고. 가족 들이 그에게 붙이는 호칭은 다양하다. 할아버지, 형제님, 교장선생님, 아저씨, 오빠….
거기서 큰선우가 봉사활동했다고? 오해하기가 십상이리라. 실상은 자신도 '봉사'라는 말에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다는 데에 있다. 그 오순절평화의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데서 조금 떨어진 삼랑진읍 사거리 송지 장터! 평화의 마을은 그의 잔뼈가 굵은 그곳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어서라는 게 정답이다.
고향에 가고 싶을 때 거길 찾았다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그 뒷동산에 있는 큰키나무 한 그루 밑에 자신의 유택을 마련하려고 했었는데, 이제 영 글러 착잡하다. 그의 임이 잠든 유토피아 추모관으로 가야 할 당위성, 그걸 어길 수 없는 것이다.
하여튼 거기 박희정(가명)이라는 두 가족이 있다. 남자와 여자이고 나이는 비슷하다. 50대 초반? 어느 날 여든 살 가까운 할머니가 찾아왔다. 복지사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미안합니데이. 자슥 새끼를 맽기 놓고 애미 노릇 몬한기라. 박희정을 면화 왔십니더.”
직원은 근무한 지가 얼마 안 되는 터라, 둘의 정확한 신상을 몰랐단다. 그래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머릴 짧게 깎은 박희정 손을 잡고 나왔다. 그런데 둘은 한참이나 서로 바라보기만 한다. 다만 할머니가 하는 말이 이렇다.
“아이고 가시나야, 십 년 만에 만난데이. 얼굴이 부었구나. 아니 살이 찐 것가? 머리는 머슴아도 아니고 그기 뭐꼬? 엄마도 모르겠나.”
“…….”
할머니는 기가 차서 할 말을 잊었다. 그때 그 소식을 들은 부장이 또 다른 박희정이 있다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리고, 그 박희정을 데리고 별실로 들어왔다. 순간 모녀는 서로 알아보고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 그러고 보니 큰선우도 그 둘의 모습이 비슷하다고 기억한다.
그 오순절 평화의 마을에 큰선우를 너무나 빼닮은 가족이 있었다. 수필가 이선우처럼 이름 한자(漢字)도 똑 같다. 다만 나이 차이가 한참 난다. 정신 지체라는 장애를 가지고, 욕심이 많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그 선우….두 선우는 정이 들 대로 들었다. 그런데 걸핏하면 평화의 마을 선우는 정신이 없다보니 착각을 하는 것이다.
“형님, 우표 좀 사 주이소.”
고 하는 것은 상태가 아주 좋을 때다. 가끔은 이럴 때가 피차 낭패다.
“아우구스티노 씨 왔능교?”
평화의 마을 선우가 직원들이나 복지사들한테 야단이나 싫은 소릴 들을 때 큰선우의 마음이 아프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 선우를 세워 놓고 이선우 씨라며 소리를 높인다 치자. 그 앞에 선 큰선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말고.
평화의 마을 선우는 아무리 타이르거나 꾸짖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장애를 갖고 있어서다. 그야말로 쇠귀에 경 읽기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안 하면 다른 가족의 피해가 엄청나니 어쩌겠는가?
평화의 마을 선우는 왜 그렇게 봉지 커피를 좋아하는지 수시로 졸라댄다. 그러나 그건 약과다. 제일 좋아하는 건 우표다. 그걸 여남은 장씩 손에 쥐어 주면 며칠 못 가 다 떨어졌다며 울상을 짓는다. 보내는 사람도 이선우 받는 사람도 이선우, 그렇게 뒤죽박죽이 되어 자칫하면 자기가 쓴 게 자기 앞으로 배달된다. 마을에 우체통이 하나 있으니 그걸 활용은 하는 데에 있어 서로가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걸로 이해하자.
그 선우는 정신 병원에 몇 번 드나들길 계속했었다., 대여섯 해 전에 그리로 가서는 돌아올 줄 모르는 그가 큰선우는 그립다. 글쎄 다시 만날 날이 있으리라, 기대를 할 따름이다.
여담 하나. 큰선우가 어떻게 해서 얻게 된 노래방 반주기를 야외에 설치해 주었더니 맨날 거기 붙어서 노래를 부르던 평화의 마을 선우였다. 그래도 박자며 가사가 제법 맞았으니, 음악이야말로 지구촌 만인 공통 언어랄 수 있는 것이다. 그와 언젠가 노래방 반주기 앞에서 열창을 하던 곡이 기억난다.
베사메 베사메 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 꽃 지던 밤에/ 베사메 베사메ancy/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다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기도 한 이 '베사메무쵸’야말로 격조 높은 노래다. 스페인 아니 멕시코 노래라던가? Kiss Me Much의 뜻. 소프라노 조수미가 이걸 부르던 때의 감격도 잊을 수 없다. 평화의 마을 이선우도 ‘베사메무쵸’를 부를 줄 안다? 하나 이상할 것 없다. 언어(言語)니까. 그들은 어지간한 성가대원들보다 노래를 더 잘한다. 뒤숭숭하지도 않다. 그런가 하면 한번 신들렸다 치자. 이런 게 튀어나오기 예사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아니요 아니요 멋쟁이 기생들 장구 소리가 오동동 그침이 없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냐
빗자루를 기타처럼 연주하는 형제자매들도 흔하다. 때맞추어서 마을에서 놓아기르는 수탉 한 마리가 암탉들을 불러 모은다. 꼬끼요…모두가 한가로운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미사 때 어떤 형제는 떠들면서 수녀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물론 주의를 시켜도 그는가끔 수녀들의 손을 억지로 잡는다. 하지만 평화의마을 선우는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신부의 강론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그가 그립다. 그는 지금. 정신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다.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갖는다. 기적처럼 그가 좋아져 퇴원해서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치자. 큰선우는 평화의 마을 그 선우를 평화의 마을 목욕탕에 데리고 들어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나왔다가 바닥에 누이고 싶다. 그러곤 때를 빡빡 문질러 주려는 것이다. 녀석의 손이 못 미치는 은밀한 곳까지 깨끗하게 씻어 준다면 좀 좋을까?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들르던 북구청장 부인의 말이 오늘 따라 큰선우의 귓전에서 맴돈다.
“자매들에게 목욕 봉사 한 번 못했습니다. 여간한 체력이 아니면 그 일은 힘들 거라 생각이 되어서요. 제 팔다리가 아프기도 하구요.”
하나뿐인 동생이니 큰선우가 그 녀석에게만은 목욕 봉사가 가능했었다. 돌이켜보면서 그는 후회를 하는 거다.
어쨌거나 큰선우는 가을에 평화의 마을에 간다. 그런 가족들을 진정으로 보살펴 주는 김수진 원장 신부를 보고 싶어서라도. 예수님이 따로 없다. 가족들이며 직원들이 뛰어나오면, 모두가 어울리고 왁자지껄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겠지.
팔순 까지 살아 있으면, 칠순 때처럼 돼지 몇 마리나 잡고 같이 즐기는 것으로 미리 작정했기 때문에 이번 큰선우의 발걸음이 가볍다. 칠순 때도 자장면 한 그릇 따로 먹지 않고, 거기 가족 340명과 하루를 지낸 그다.
큰선우는 거기가 좋다. 거기서 한두 끼 먹고 나오면 살이 더 찐다는 사실 하나. 그걸로 글쎄 설명이 될는지. 다른 하나의 우스갯이야기. 큰선우는 거기 가면 폭식을 할 만큼 점심을 많이 먹는다. 어느 부원장 신부는 거기 부임했다가 거기 가족들과 식사를 같이 못해 끝내 다른 곳으로 갔다는 후문과는 대비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운동회! 숭진초등학교 25명 전교생 어린이와 장애인(부랑인?-이 말 어감이 참 안 좋다) 50여 명이 합동 가을 운동회를 열고 있다. 그리운 그곳!
사족밖에 안 될 동명이인 이야기가 두 개 있다.
이선우 치과의사, 이선우 내과전문의. 둘 다 큰선우보다 몇 살 아래다.
이선우 치과원장은 가운데에 먼저 先 자를 쓴다. 경주 이 씨니 같은 항렬임은 두 말하나마나. 큰선우가 교장으로 있을 때 그는 교의(校醫)였다. 퇴임 후에 보니 큰선우의 이웃으로 와서 개업을 했기에 좀 들락거리게 되었다. 한데 어느 날 멀쩡한 큰선우를 당뇨 환자로 취급하는 것이다. 잇몸이 약간 부어 치료하러 갔었는데….
이선우 내과의원장은 부산고등학교 네 해 후배다. 허태열인가 조갑제와 동기 동창일 것이다. 큰선우가 사경을 헤맬 때, 그가 주치의였다. 찌푸리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리까지 굽히며 몇 달 다녔는데, 이선우 원장은 병을 잡지 못하더라. 당감동에서 이름난 명의가 까짓 위장병 하나-비록 상태가 심각하다 하더라도-에 헤매다니 싶어 절망한 게 큰선우다.
70명의 의사가 포기하고 나자 큰선우는 심지어 ** 수련원에 몸을 맡기기도 했다. 몇 달 다니면서 백 수십 만 원의 회비만 날렸다.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죽는’ 흉내만 내는 그 프로그램이 성업 중이었을 때였다. 말이야 얼마나 근사한가? 마음수련원.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여럿으로부터 결국 수모만 당하고 돌아왔다. 차라리 굿을 하는 게 낫다 싶었다. 울면서 당감동 선우를 원망했다.
그가 마침내 삶을 포기하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는 자가(自家) 치료에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이윽고 몇 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병마를 찔러 쓰러뜨린다. 그리고 그놈을 발밑에 깔아뭉갰으니 그가 든 무기는, 외형(外形)이 없는 ‘노래’! 지금은 그래서 어디서든지 그는 그 노래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큰선우는 아직도 가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초청을 받아 간다. 환자들에게 그는 서슴없이 다가서는 것이다, 부산에서처럼! 몇 마디 뒤 사설(辭說)을 늘어놓고서는 그가 어김없이 잽싸게 내미는 건 ‘노들강변’이다..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 무정세월 한허리를 칭칭 동여서 매어나 볼까/ 에헤에요 봄버들도 못 믿으리 ‘로다’/ 푸르른 저기 저 물만 흘러 흘러서 가노라
대한민국 방방곡곡의 노인학교를 다녀봤기 때문에, 노래(민요)야말로 노인들의 언어라는 걸 수도 없이 체감한 그다. 쿠알라룸푸르 한인회에서 소개 받은 몇 몇 노인들도 어김없이 ‘노들강변’을 부르더라. 한데 위 가사 중 ‘로다’가 치료약의 ‘진액’이다. 평범한 노인들은 거의 백 퍼센트그 부분의 음정을 올려서 부른다. 원래는 그 음정이 낮아야 하는데….
그가 그걸 반복해서 가르치다 보면, 여기저기서 박장대소가 터진다. 그도 배꼽을 잡을 수밖에. 하지만 다음에 가면 또 도로아미타불이다. 그게 바로 치료의 과정이다. 엄청난 영험이 있다. 해서 의사야말로 엉터리랄 수밖에.
이제 와선 큰선우는 두 선우 의사에게 원망도 없다.
큰선우는 당뇨로부터 자유롭고, 임플란트를 몇 개 해 넣었을 뿐 치아가 튼튼하다. 왜 치과 선우가 그랬는지? 그의 기본 자질이 의심스럽다. 모래를 삼켜도 소화된 만큼 위장이 끄떡없으니, 당감동 내과 선우의 명성도 한갓 물거품보다 못한 것 같다.
하여튼 둘 다 큰선우를 보고 형님이란 호칭을 썼었다. 치과선우는 항렬, 내과 선우는 학교 선배로서의 예우를 고려해서 그랬던 것이다.
이제 동명이인으로 인하여 힘든 일을 겪은 진짜 이야기는, 예고한 대로 서두와 바로 직결시킨다. 이선우는 둘 다 수필가(隨筆家)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았었는가? 그걸로 이 자전 소설이라 폄훼 받기 뻔한 이 졸작은 매듭을 짓는다.
현 주소지로 옮긴 지 몇 년 뒤에 큰선우는 경기도 몇 개 문학 단체에 가입을 한다. 연말에 책 한 권씩 내는 게 거의 전부인….그도 여기저기 소설과 수필을 번갈아 냈다. 중독자(中毒者)의 본성을 여실히 드러낸 거다. 하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그는 다시 한 번 좌절감을 철저하게 맛본 것이다.
거기에 동명이인이란 요상한 필요충분(?) 조건이 개입했다고 얼버무린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동명이인’이 참으로 아연실색할 일을 연출했으니, 그 앞뒤 사연이 이렇다. 그래 적자.
책을 받고서 일을 참 잘하는구나 싶어 탄복했다. 한데 필자 소개란에 큰선우가 아니라 작은선우의 약력이 올라가 있는 게 아닌가! 그가 화를 된통 내는 것과 출판사에서 사과를 정중하게 하는 것으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하지만 그는 한탄했다.
“아, 나는 정말 하잘것없는 작가구나. 내가 쓴 건데,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동생 작품으로 소개되다니….”
그런데 다음해는 바로잡아지는가 싶더니 그도 한 번뿐이었다. 한 해 건너 뛴 호에 실은 소설(수필인지 모르겠다) 필자로 전전년(前前年)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그나마 천만 다행으로 작년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번 호에도 소설을 내놓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다만 출판사에 일침을 놓는 걸 잊지 않았다.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었지만. 이참에 큰선우는 자기 이름 아니 약력을 찾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저러나 문단에선 데뷔 연도를 따져 늦은 사람이 이름을 바꾸든지 필명으로 대체한다던데….큰선우는 우여곡절 끝에 소설가협회에서 '이선우 lee'로 통하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자. 작은선우에게도 미안한 노릇이기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하나의 숙제가 있다. 손해 배상을 받아야 하겠는데, 아직 상대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는 꼴 아니고 뭔가?
괌 최초의 성당 아가냐 주교좌 성당이다. 거기 예수님, 본당 예수님과 다르시지 않다. Jesus lives in his House! 성전에 들어가서 나지막이 '살아 계신 주'를 봉헌했다.
지금 바치는 화살 기도 주님/ 이근양 원로교우(예비역 장군)의 부인이 아픕니다. 얼른 쾌차하도록 다 같이 기도하오니, 얼른 자유롭게 다니도록 은총을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롤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壓尊法에 의해 이근양 장군과 부인의 존칭을 생략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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