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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 온라인 글 등록 마당 스크랩 <유 근> 얼어붙은 한강물 위에 배를 띄우다
이윤점 추천 0 조회 54 14.11.18 19: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유 근>

얼어붙은 한강물 위에 배를 띄우다

 

 

유근(柳根)은 조선 중기문신으로 명종 4년(1549)에 태어났다.

자는 회부(晦夫)이며 호는 서경(西坰)이요,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유영문(柳榮門)의 아들, 참판 유창문(柳昌門)의 조카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젊고 유능한 문신들을 위한 수양·연구 시설)에 뽑히고, 임진왜란 때 승지로서 임금의 수레를 따라가 호성공신 진원부원군(扈聖功臣晉原府院君)으로 봉호를 받았으며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며 1627년에 죽었다. 유근은 특히 문장에 뛰어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승려 겐소가 사신으로 오자 그를 맞이하고 접대하는 선위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뛰어난 관료로 인정받아 위기를 면하다

그러나 그의 관직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로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건저문제란 말 그대로 임금의 후사를 세우는 문제이다. 당시 선조에게는정실 왕비 소생의 자식이 없었고 후궁 소생의 왕자만 여럿이 있었다.


자연히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 선정 문제에 잡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은 이로부터 발생할 문제를 방지하고자 이산해 등 동인들과 상의하여 후궁 소생 중에 왕세자를 정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산해는 그 약속을 어기고 선조가 특히 사랑했던 인빈(仁嬪) 김씨의 오빠 김공량과 결탁하여, 인빈에게 정철이 왕세자 책봉을 건의하면서 김씨의 소생 신성군(信誠君)을 죽이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이말을 들은 김씨는선조에게 울면서 이 일을 고해 바쳤다. 선조는 이 일로 크게 노하여 정철이 왕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자 정철을 좌천시키는 등 이 일과 관련된 서인들을 모두 외지로 내쳤다.


유근도 이 일로 정철과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좌천될 위험에 처했다. 하지만 유근의 재능을 높이 샀던 선조는 그를 외지로 내치는데 반대하며 그를 두둔해 주었다. 조선시대에 후계자를 세우는 문제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관료로서 그의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청렴한 조선 관리의 유능함을 입증하다
그의 진가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란 속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대궐에 들어간 유근은 형조 참판에 임명되고 이어 충청 감사로 나갔다가 곧 오도병마 부체찰사(五道兵馬副體察使)에 임명되었다. 이때 명나라에서는 조선의 거듭되는 요청에 못이겨 군대를 파병하면서 산동(山東)의 군량 수백만 석을 운송하여, 선천(宣川)·철산(鐵山) 사이에 풀어 놓았다. 그런데 이군량미를 배로 한강까지 운반하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책임이었다.


때는 이미 늦가을로 접어들어 바람이 거셌다. 바다 길이 위험하여 조정의 대신들이 군량미를 운반하는 문제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마침내 좌의정 윤두수(尹斗壽)가 아뢰기를,
“이 일은 유근이 아니면 처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여 임금이 직접 유근을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 군량을 운반하는 책임을 맡은 관리)로 임명하고 이 일을 맡겼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일을 맡은 유근은 보통 배를 만드는 널판보다 더 두꺼운 널판으로 큰 배를 많이 만들었다.

어떤 이가 너무 둔해서 운행하기 어렵다고 염려하니 유근이 답하기를,
“뒤에 보면 자연히 알 것이다.”하였다. 드디어 그 곡식을 50여 척에 나누어 싣고 배마다 군관(軍官)이 타고 기(旗)와 북을 설치하고 일제히 떠났다. 그때는 이미 추운 겨울이어서 한강이 거의 얼어붙어 있었다.
얼어붙은 한강물에 보통의 배보다 더 두꺼운 널판으로 만들어 둔해질대로 둔해진 배를 띄운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비웃을 일이었다.
명나라 장수는 사람을 보내 강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 조정에서는 이로 인하여 군량미를 제 때에 옮기지 못할까봐 걱정하였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집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루동안 50여척의 배가 조수를 타며 돛을 달고 출발하였는데, 이때 군관이 각각 깃발 밑에 서서 북을 울리고 고동을 불며 뱃사람들을 일제히 독촉해서 강의 얼음을 깨고 차례로 용산(龍山)에 도착했다. 선판(船板)이 두껍기 때문에 얼음에 부딪혀도 배가 상하지 않아 무사히 닻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비로소 탄복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이 모습을 보고 그의 지략을 칭찬하니선조가 크게 기뻐하며 유근을 표창하여 품계를 올리고 군관 이하는 등급에 따라 벼슬과 상을 주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온 일은 매우 어렵게 성사된 일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환관들의 부정부패로 국가재정이 허약해진데다, 지방 곳곳에서는 수해와 가뭄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틈을 타고 일어난 민란과 반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나라 조정에서는 거듭되는 조선의 지원군 요청에도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명나라 원군의 파병이 성사되어 이들의 군량미를 옮기는 막중한 일이 유근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그는 언 강물 위에는 배를 띄울 수 없다는 어려운 상황을 과감히 역으로 이용하였다. 늦가을이 되면 강물이 언다는 사실을 예측하고 선판을 두껍게 제작하여 현대의 ‘쇄빙선’ 역할을 하도록 배를 만든 것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과감힌 발상으로 군량미를 무사히 옮길 수 있었고, 그를 비웃던 명나라 장수들에게도 ‘조선관리’의 유능함으로 신뢰감을 주어 그들이 조선을 위해 싸우게 하는데 원동력이 되게 하였다. 악조건 속에서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과감한 창의성을 발휘한 그는 조선 청백리의 진일보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홍보담당관실 하홍순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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