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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운의 왕 단종 / 충신 엄흥도
조선 6대 임금인 단종(端宗1452~1454)이 영월로 유배된후 복위운동이 일어나자
왕위를 찬탈한 단종의 숙부 세조에 의해 17세에 사약을 받고 영월 동강에 버려진다,
엄흥도(嚴興道): 당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자는 3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월 호장으로 (위키백과 인용)
忠과 義를 생명처럼 여기는 엄흥도에 의해 영월 동을지산(현재 장능)에 장례를 치렀다,
그후 그의 아들셋과 함께 영월을 떠나 문경으로 막내는 울산으로 흩어져 이런 이유로 영월엄씨들이 강원도 영월과 지금의 경북 문경지역에 많이 살게된다.
훗날 엄흥도는 200여년이 지난 1668년에 송시열의 상소로 복관되어 그의 자손들이 비로서
등용될수 있게 되었고 영조때 萬古忠臣으로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지고 공조참판에,
고종때 공조판서에 추증이 되었다.
★ 세조 자신의 업보 때문인지...
두아들이 요절하고 말년에 악몽에 시달리고 악성 피부병(문둥병)으로 고생하다 죽음 !
善行者 天之以福, 惡行者 天之以罰 !
하늘에서 세번 불러서 낳았다는 ★ 성삼문(成三問), 아호 - 매죽헌(梅竹軒),
(위키백과)
매화나무의 지조와 대나무처럼 올곧은 절개를 지켜, 聖君 세종대왕의 고명을 받들어
탐욕의 세조 일당의 회유를 뿌리치고 세종의 직손 어린 단종을 끝까지 따르다
순절한 조선 충절(忠節)의 대명사 ! 만고의 충신으로 길이남아 정신적 귀감이 된 인물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는 두임금이 있을수 없다"
" 忠臣 不事二君 ! ” 고려의 충신 정몽주와 함께 조선조 대표적 충신 !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성삼문의 忠節의 詩> "북소리 치며 이목숨 재촉할때 고개드니 해는 서산에
지누나 황천길에 한주막도 없다하니 오늘밤은 어디서 쉬리," (끝까지 어린
단종에게 충절을 지키다 새남터에 끌려가며 죽기직전 지은 최후의 시 ! ) ★★★ 시류에 편승하고 개인의 출세와 부귀 영달만을 쫓는 현대 물질만능 세태에서 "정몽주 성삼문 엄흥도" 같은 義를 命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충신들의 역사적 인물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와 교훈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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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엄씨가헌
엄씨의 시조: 엄임의(嚴林義) 본래 중국인으로 고려말 사신 대표로 왔다가 본국에 정변이 일어나
귀국치 않고 왕의 권유로 영월에 정착,본관을 삼아 世系를 이어왔다.
조선조 최대 슬픈 역사인 단종 ! 성군 세종의 직손…
엄씨가헌: 누구든지 단종의 시신에 손을대면 3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어명에도 불구하고
장능에 수습한 엄흥도는 “좋은일을 하여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 (爲善被禍 吾所甘心)
는 유훈을 엄씨 가헌으로 남겨 후손들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엄문3절; 영조조에 충신에 엄흥도, 고기가 먹고십다는 병고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허벅지를
도려내어 대접한 효자 엄민도, 남편이 죽자 함께 죽어 절개를 지킨 열녀에 목치중의 처 엄씨 부인 !
시문의 대가; 중종때 시문에 능한 “엄흔”의 가곡원류”,
“선으로 패한일 보며 악으로 이긴일 보았는가 이 두즈음에 취사아니 명백한가
평생에 악한일 아니하면 자연 유성하리라.”
그의 현손 “엄집”은 문과급제 판서,, 좌참찬, 정2품의 청렴의 대명사였다.
육영사업: 조선조 마지막 왕인 영친왕 이은의 생모 고종의 순헌황귀비 엄비는 개화기 교육자로, 명문 양정, 진명, 숙명학원 설립.
독립운동: 선조유업을 받아 안중근의사와 함께 경흥에서 왜군을 격파한 엄인섭,
만주에서 한총련 결성, 친일거두 이영로를 사살, 순국한 열사 엄순봉, 등, 독립운동 가문,
엄씨특성; 인구조사에 의거, 전체 0.3% 로 총 249성씨중 제49위로 비록 적은 성씨지만
정직, 청렴, 온순한 반면 불의는 참지 못하는 강직성이 특성이다. 엄씨 후손의 좌우명,
<배는고파도 정신이 고파선 안된다.>
동양 最古의 은행나무 * 단종이 묵은 어소를 향해 절하는 듯한 일명" 엄흥도" 소나무 /청령포
수령이 1,200년(통일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영월엄씨 상징, 높이 36m, 둘레가 18m,
(한국성씨 총람 / 정리 문과공파26대 손 다복 엄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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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과 노래에 능한 엄씨(유명인사)
우리나라 엄씨의 시조는 엄임의(嚴林義)이다. 그는 중국 한(漢)나라 의 사신으로 새로운 악장을 만들어 여러나라에 전파할 때 정사(正使)로 와서 고려조에 호부원외랑 (戶部員外郞)을 지냈고 강원도 영월에 정착, 영월엄씨의 시조가 되었다.
'엄할 엄'(嚴)은 위에 '입구'가 두 개 붙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영월엄씨 가운데는 특히 언어의 마술사, 화술의 달인들이 많고, 노래를 잘 부르는 성악가와 가수가 많다.
한국의 수 많은 앵커 가운데 가장 매끄럽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아마도 앵커 엄기영씨가 아닌가 한다. 취재차 경비행기를 탔다가 추락한 후 유일하게 살아난 기적의 사나이 !
해외특파원의 원조(빠리), 바바리코트의 대명사, 방송계 최장수 앵커, 한국언론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서울대 출신으로 언론인 대상을 수상하였다.
"엄앵란" 사극영화 단종애사 에서 단종비 정순왕후 외, 16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청룡영화제 인기스타상을 세 번이나 탔고,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등을 받은바 있다.
코미디언 가운데 말을 가장 빠르고도 재미있게 잘하는 이는 두 말할 것 없이 따발총 개그맨 엄용수씨다.
성악가 중 경희대학교 음대 교수인 테너 엄정행씨. 그가 부른 선구자, 비목, 가고파, 나물캐는 처녀, 보리밭, 떠나가는 배, 그리운 금강산, 희망의 나라로 등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가수겸 배우, 탈랜트로 활동하는 연예인도 있다. 다재다능한 엄정화, 엄태웅 남매가 그 주인공들이다.
2002년 MBC드라마 '황금마차'에 데뷰한 이래 여러작품에 꾸준히 출연하여 끼를 보이고 있는
엄지원 역시 입담이 좋기로 소문이 나있다.
영월엄씨 가운데 이토록 청산유수처럼 말을 잘하는 능변가, 달변가가 많고 성악가, 가수 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순전히 중국에서 새로운 악장을 만들어 예술(음악) 대사로 우리나라에 전파하러 왔던 시조 엄임의의 DNA를 대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편집, 수정 보완 / 원글 : 푸른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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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비 정순왕후 청룡사 (2016, 1, 26 방문, 다복 엄유호)
조선 최대의 비극적인 왕후 !
단종비(妃) 정순왕후는 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에서 60여 년을 홀로 지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단종을 그리워하며 망부(亡夫)의 한을 안고 서러운 삶을 살았던
절개와 충절의 상징이다.
단종(조선 6대 임금 端宗1452~1454)이 왕위를 찬탈한 단종의 숙부 세조에 의해
17세에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자, 궁궐에서 추방당한 정순왕후 송씨부인
(단종보다 1살 위)은 동대문 밖 숭인동 산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18세에 과부가 된 송씨는 머리를 깎고 시녀를 데리고
정업원에 머물며 평생 동안 아침저녁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소복하고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 영월을 향해 통곡했다하여 ‘동망봉(東望峯)’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조정에서 마련한 거처도 거절하고 정업원에 머물렀다.
그리고 자줏물 들이는 염색업으로 여생을 때묻히지 않고 살았다 해서
그 골짜기를 지금도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서울 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의 한 지봉인 동망봉에 위치한 청룡사(靑龍寺)의 전신이다.
(참고 : 동쪽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서쪽 인왕산(仁
영조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한 '동망봉(東望峰)'이란 석 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부터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산이 깨어져 나가 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절벽만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정업원터(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호)는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송씨
(定順王后 宋氏, 1440∼1521)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碑)로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유산정보 자료 인용)
관련사진 : 현지촬영 (다복)
조선조 최대의 비극의 왕과 비 단종과 정순왕후
(다녀온 길 / 전철 1호선 동묘 환승 6호선 1정거장 지나 창신역 하차, 오른쪽 언덕 200 m 청룡사)
코스 : 청룡사(정업원) - 비우당 (자주동샘) 청룡사 윗길 우측 300m 쌍용2차 APT 정문 옆 명신초교 원각사 아래)
- 200m 낙산공원 <마을버스 3번>
동쪽방향 >> 청룡사 좌측 200m 동산 - 동망정 - (동묘: 관우사당) 여인시장터 - 영도교(청계천 7가)
우화루
단종이 영월로 떠나기 하루 전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묵은곳, 대웅전 마주 보는곳 위치)
정업원 구기
영조친필 현판 "前峰後巖 於千萬年" 앞의 산봉우리여, 뒤 언덕의 바위여, 천만년 영원하여라.
동망봉(東望峰)동망정 / 동묘앞역 사거리에서 보임
단종이 죽은 후 그녀는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일 아침 집근처 동망봉(東望峰)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는데 그녀의 울음소리가 산 아래 마을까지 들렸고
마을 여인네들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동망정
단종을 그리워하며 동망봉에서 동쪽 영월을 바라보던 절개와 충절의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며 매년4월 추모제)
(동망봉 앞에서 필자 2016,)
지금은 숭의공원 / 체육공원(동망봉 정상)
청룡사 윗길 언덕 30m 지점에서 본 동망봉
정순왕후가 생계를 위해 염색을 하던 곳(낙산공원 방향 200m 청룡사 좌측 윗길)
자주동샘 빨래터
18세의 정순왕후가 이 샘에서 빨래를 하면 신기하게 자주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물이 끊겨 흔적만 남아 있는데 단종 비(妃)의 애환이 서린 곳.
뒷 뜰에 자주동샘이 있는 "비우당"
서울 낙산 동쪽 비탈에 위치한 비우당(庇雨堂)이는 조그만 초가집, 근근이 비를 가린다는 뜻으로
조선의 실학자인 지봉 이수광이 이 집에서 백과사전 '지봉유설'을 지었다.
지방에서 과거를 보기 위해 올라온 선비들이 조선 사대부의 청빈함을 느낄 수 있는
이 집을 들러본 후 청빈함의 사표(師表)로 삼았다고 한다.
가끔씩 재벌가의 재산다툼, 총리, 장관 후보들이 청문회에서
패가망신 하는 것을 보면, 비우당의 검소한 삶과는 너무나 비교가 된다.
전철의 경우 창신역 3출구 300여m 오른쪽 언덕위 청룡사
청룡사 정업원 뜰 소나무 / 슬픔에 젖은 정순왕후(송씨부인)의 무언의 벗이었을 듯...
단종의 유배, 죽은 영월 청령포의 관음송, 장릉의 소나무가 생각나게 해주는 !
동망봉에서 내려다 본 청룡사 (동망봉 주위사방엔 고층아파트 숲)
일제때 채석장 (동망봉 남쪽방향)
당시 여인 시장터 / 현재 동묘 벼룩시장
서울 동묘옆 숭신초등학교앞 여인시장터 / 왕방연의 시 (영월 단종 유배지 청령포 건너 맞은편)
어명을 집행하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비통한 심정을 달래며 지은시
(청령포 맞은편에 위치 / 예놋다의 뜻은 “흘러가는구나”)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부인이 영원히 이별했다는
영도교(永渡橋)
만남의 의미 오작교의 반대 격 / 청계천 7가, 동묘 아랫길, 다리위에는 잡상인들만 ...
단종과 송씨부인(단종비 정순왕후)의 애절한 이별의 장소 "영도교" 다리 아래엔 마침
무심하게 청둥오리 한쌍이 다정하게 유영하고 노니는데...
단종과 송씨부인의 넋이 환생한 것은 아닐런지...
사랑으로 맺어진 두사람 !
자신들의 권력과 탐욕을 위해 말살 희생시킨(세조 일파) !
18세 꽃다운 정순왕후의 64년간의 어린 단종(17세)을 그리며
한맺힌 인고의 세월을 보낸후 82세에 눈을 감음 !
동묘(東廟) : 전쟁의 신 관우(關羽)사당
남양주의 정순왕후 사릉 (思陵) / 금곡역에서 가까움
평생 단종만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하여 사릉 !
가는길 : 상봉역에서 경춘선 방향 - 금곡역 하차 23번버스
55번 마을버스하차 / 사릉과 전통 수목 양묘장이 있다.
善行者 천지이복 惡行者 천지이벌
★ 세조
자신의 업보 때문인지...두아들이 요절하고,
말년에 악몽에 시달리고 악성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죽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 !
한명회(韓明澮) / 두딸 요절 / 부관참시
수양대군의 모사(謀士)꾼으로 딸 넷 중에 둘을 왕비로 만들었다.
그 중 셋째 딸은 세조의 아들 해양대군(뒤에 예종)에게 시집갔는데,
예종비가 된 후, 14개월 만에 산후병으로 단종이 승하한 같은 나이, 17세에 요절(夭折)하였다.
또 넷째 딸은 세조의 손자 성종비로 보냈는데 19세에 역시 제 명에 못살고 요절 하였다.
한명회 사후 연산군 때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때에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에서 꺼내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거는 형)를 당했다.
한확(韓確) / 객사
단종을 겁박하여 왕위를 내놓게 한자로, 그 누이는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여동생은 명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갔기에 빛도 되고 한도 되어 가슴 아파 하였다.
그가 외교통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라 우겨서
명나라의 세조 왕위 승인을 받아오는 중도에서 객사해버렸다.
기타 :
한양도성 사적 제 10호
낙산(駱山)은 산의 모습이 낙타 등처럼 볼록하게 솟았다고 해서 낙타산(駱駝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낙산은 태조 3년 한양을 수도로 정하면서,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을 감싸는 네 산 가운데 하나로, 동쪽 경계인 낙산의
능선을 따라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 성벽을 쌓아 한성을 감싸고 있다.
창신역 - 청룡사 - (비우당, 자주동샘) / 쌍용2차 APT 앞) - 낙산공원 <3번 마을버스>
비우당에서 200m 언덕 정상의 낙산공원에서 본 남산
낙산공원에서 본 북한산
서울의 4 진산(鎭山)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쪽의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쪽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동쪽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서쪽 인왕산(仁
<현지답사 감상문>
- 끝 -
자신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베트남 보트피플 96명을 구조한
★ "전제용" 선장
살신성의 ! 19년만의 만남 ! 현대판 쉰들러 리스트, 제2의 엄흥도 !
조선조 충신 엄흥도, "독일"의 쉰들러, "르완다"의 폴 루세 !
( 2차대전때 독일출신 사업가로서 천명이 넘는 유태인을 구해낸 오스카 쉰들러,
1994년 발생한 아프리카 중부 르완다 내전때 1,200여명을 구한 “밀 콜린스” 호텔
매니저 “폴 루세” )
<출처 : 유투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