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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뢰아에서 전도
행 17:10-15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행 17:10-15 / [베뢰아에 간 바울과 실라] 그날 밤으로 신도들은 서둘러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 베뢰아에 닿자 두 사람은 늘 하던 대로 그곳 회당에 가서도 설교를 하였다. 11)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는 훨씬 마음이 틔어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설교를 들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가 가르치는 말이 진실인지 알고자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12)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헬라의 상류계급 귀부인들과 남자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 전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거기까지 몰려와서 소란을 피웠다. 14) 신도들은 급히 다시 바울을 해변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그대로 그곳에 남아 있었다. 15)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아덴까지 그를 안전하게 바래다 준 뒤 속히 실라와 디모데도 뒤따라 와달라는 바울의 전갈을 가지고 베뢰아로 되돌아갔다.
바울 일행의 데살로니가 선교는 그 도시의 불량배들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느끼면서도 성공리에 끝났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일행들을 다시 베뢰아로 인도하셨습니다.
베뢰아의 성공적 전도(10-12) 데살로니가에서 박해를 받은 바울과 실라가 박해를 피하여 밤중에 베뢰아로 갔습니다. 베뢰아의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편견이나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보다 자유스러운 사고와 신앙이 있었으며, 아무리 이질적인 지식, 이론, 철학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받아들이고 포용하려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들인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었으며 저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여기 ‘신사적’이란 말은 ‘좋은’이라는 말과 ‘출생’의 합성어로 ‘선한 품성’을 뜻합니다. 바울의 설교 내용은 어디로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도’가 전부였는데, 이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으며, 성경 그 자체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자를 얻게 되었는데 이방인 개종자들 중에는,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유력한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핍박(13-15) 바울의 회당전도는 이방선교의 효과적 전략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마다 회당예배에 참석하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셨던 방법의 계승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당 전도는 전도자들에게 있어 유대인들의 표적이 되어 핍박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쉽게 전해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약 80km나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쫓아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여 전도 사역을 방해 하였습니다. 마치 바울의 1차전도 여행 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살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따라와서 바울 전도를 방해하고 돌로 치던 것과 같습니다(행 14:19-20). 이런 유대인의 완악한 태도는 복음에 대한 오해와 영적 무지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엡 4:17-20). 그렇지만 이러한 박해는 오히려 복음을 신속하게 여러 지방으로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생명과 사명을 아끼는 신자들이 바울의 신변을 호위하고 아덴으로 가게 하였으며, 곧이어 실라와 디모데까지 보내기로 했습니다.
적용: 바울의 선교여행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페르시아에서 생산되는 양탄자는 전 세계가 알아주는 명품 중 하나입니다. 어떤 것은 예술적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안고 천문학적인 가격이 매겨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뽐내는 예술과 문화의 결정체에도 잘 찾아보면 반드시 흠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페르시아 양탄자에서 발견되는 흠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탄자를 제작하던 장인이 일부러 남긴 것이라고 합니다. 결점 없는 양탄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고 여기는 그들의 장인 정신이자 철학이 담긴 흠입니다. 그리고 이를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호크마 주석
=====17:10
밤에 형제들이 - 읍장들이 보석금을 받고 조건부적으로 야손의 일행을 석방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바울일행의 데살로니가 체류는 양측 모두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야손이 읍장들에게 끌려갔을 때 아마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의 어느 비밀장소에 숨어 있었을 것이고 낮보다는 다소 안전한 밤이 되서야 소수의 새로운 개심자들의 길 안내로 데살로니가를 떠날수 있었을 것이다. 베뢰아 - 데살로니가 남서쪽 약 80km 지점,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위치했다. 당시 이 도시에는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는 하였으나 정치적으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17:11
더 신사적이어서 - '더 신사적'의 헬라어 '유게네스'(* )는 비교급의 형태로서 '가문이 좋은', '출신이 좋은', '고귀한'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베뢰아 사람들이 모두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 출신이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편견 없이 객관적 자세를 나타내 보였고 또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 파세스 프로뒤미아스) - '프로뒤미아스'는 '열심히', '자신해서', '준비된' 등의 뜻이며 '파세스'는 '모든'이란 뜻으로 베뢰아 사람들은 모든 준비된 마음과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하여 말씀을 받았음을 나타낸다. 말씀은 준비된 마음 밭에 떨어졌을 때 좋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마13:3-8).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 '상고하다'의 헬라어 '아나크리노'(* )는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는 등의 뜻을 내포한다. 이는 종종 사법적 심문(審問)과 관계되어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열심을 다해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고 살펴 그 본의를 다시금 잘 새겼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헬라의 철학사상, 그리고 그들의 생활체험 등을 바탕으로 바울의 설교를 깊이 비고 검토하여 복음을 진리로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17:12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 - 상류사회에 속해 있으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미쳤던 헬라인들을 가리킨다. 그 중에는 유대교로 개종했던 이방인들과 이교도를 믿던 사람들도 다소 있었을 것이다. 복음은 헬라인과 유대인의 구별없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보여주는 구절이다(롬1:16). 한편 바울의 아시아 여행에 동반했던 부로의 아들 '소바더'도(20:4) 이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17: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소동케 하거늘 - 베뢰아에서 선교활동의 소식이 데살로니가의 사악한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베뢰아까지 달려왔다. 이들은 똑같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소동을 일으켰으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이 소동의 무리에 베뢰아 사람들이 가담하였다는 언급이 없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이는 바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은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적어도 바울 일행에 대해 적의(適意)를 나타내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17:14
바울을...바다까지 가게 하되...거기 유하더라 - 데살로니가에서 온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하여 베뢰아 도시 안에 안전하게 거할 곳이 없어진 바울은 그곳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베뢰아를 떠난다. 바울이 바다로 나가 정확히 어디로 갔는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메돈(Methone)이나 디움(Dium)이나 피드나(Pydna)로 갔을 것이다(Longenecker, Lenski).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보다는 다소 위험이 적다고 판단되었던지 베뢰아에 계속 체류하여 아직은 성장이 미약한 그곳 교회를 보살폈던 것 같다.
=====17:15
바울을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 바울이 다른 곳을 두고 하필 아덴으로 갔던 이유는 이곳에 언급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아덴이 베뢰아에서 가장 가까운 선교 장소여서인지(Haenchen), 아니면 마게도냐가 안전해지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선교활동을 계속하려고 해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마게도냐의 대부분을 여행했기 때문에 새로운 선교장소를 택해야 했고 그래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아덴을 선택해 그곳을 찾아갔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가장 좋을 듯하다(Lenski). 실라와 디모데를...속히 오게 하라 - 바울이 아덴으로 갔을 때 디모데가 베뢰아에 남아 어떤 일들을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의 행적을 서신서와 비교해 보면 다소 윤곽이 잡힌다. 바울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난다(살전3:1). 그러나 바울은 다시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파송하고(살전3:2), 실라는 마게도냐(추측컨대 빌립보일 것이다)로 파송한다. 이 사이에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갔으며(18:1),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난다(18:5;살전3:6).
< 설 교 >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인명진 목사 / 행 17:10-15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도시를 방문하거나, 특정한 나라를 방문 했을 때, 그 지역에서만 느껴지는 고유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그곳에 살고 있는 현지인들은 잘 모르지만 그 도시를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금방 다가옵니다. 한 도시에 대한 첫 인상은 빌딩이나, 경제수준이나 외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 다른 평가를 하게 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 씀씀이에 따라 좋은 인상을 가지기도 하고, 나쁜 이미지를 가지기도 합니다.
한중일 세 나라의 이미지를 비교해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일본은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예의가 바른 민족입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저들 스스로도 말하기를 “우리에게는 타테마에라는 겉모습과 혼네라는 진심이 따로 있다.”했습니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세계에서 미안합니다. 스미마셍가 말을 가장 많이 하는 민족이지만 진정으로 사과할 줄을 모르는 민족이 일본입니다. 문화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토는 일본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국화와 칼”이라 했습니다. 겉으로는 고고한 국화이지만 속마음은 칼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주 공평한 것 같고 느긋합니다. 다른 것도 포용할 줄도 압니다. 그러나 실리 앞에서는 전 세계에서 제일 천부적인 민족입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댓놈이 번다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중국 사람의 핏줄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돈이 흐른다는 말까지 나와 겠습니까?
반면에 우리나라 한국 사람은 어떻습니까? 세 나라 중에 가장 흥분을 잘 하고 거친 민족처럼 보입니다. 일도 잘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고, 민첩합니다. 반면에 욕도 잘 하고, 술도 많이 먹고, 싸움도 잘 하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속마음까지 다 주는 정이 깊은 민족입니다. 다른 이질적인 것인 것까지 하나로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민족입니다. 평가하는 제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팔이 안쪽으로 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성경에서도 어떤 특정한 지역에 대한 이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레데인”은 거짓말쟁이라는 이미지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섬나라인 그레데인은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신뢰감을 주지 못했던 사람 같습니다. “소돔 사람”소돔라이트 하면 동성애자라는 이미지가 새겨져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 하면 천박한 사람들, 문란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갈릴리에 대한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인 것만 알았습니다. 이때는 그는 서슴지 않고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하면서 갈릴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습니다. 우리는 눈에 비춰지는 이미지로 그 도시 사람을 도매금으로 평가하곤 합니다. 이러한 평가는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그곳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일과 생활관습과 전통들이 남겨놓은 흔적입니다.
그런데 지역이나 민족뿐만 아니라 특정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독특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다종교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습니까? 긍정적인 이미지로 본다면 종교적 열심이 대단하여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 어디서나 찬송하고 사람이 죽어도 찬송하는 사람들, 환경 앞에 좌절하지 않고 이겨나가는 진취적인 사람들, 새로운 세계와 문명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 부정적인 이미지로 본다면 자신의 종교적 가치관으로 다른 종교를 비판하는 독선적인 사람들, 말은 잘 하지만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깍쟁이, 전도라는 명목으로 무례함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 한번 싸웠다 하면 서로 화해할 줄 모르는 속이 좁은 사람.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진 한국교회 성도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면 우리 갈릴리교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로 비춰지고 있습니까? 나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이미지로 보여지고 있습니까?
지난 1주일 동안 제가 묵상했던 주제가 우리 갈릴리교회는 이 지역사회와 한국사회에서 어떤 이미지로 비춰질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앞으로 우리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심어주어야 할까를 동시에 생각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긍정적인 이미지는 감추어지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신뢰감을 잃어버리고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큰 과제는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는 것입니다.
오늘의 현실에 응답하는 교회의 이미지를 묵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교회가 베뢰아 교회였습니다. 베뢰아 교회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유럽으로 건너가서 빌립보와 데살로니가를 거쳐 베레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세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만난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했고, 오히려 죽이려 했습니다.
그 다음날 밤에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몇 년 전까지 사용했던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이것이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비교된 베뢰아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평가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편협 되지 않고 마음이 넓게 열려서 새로운 것을 수용할 줄 아는 포용력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과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들은 같은 혈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기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편협하고 충동적이며 시기심이 많고 폭력적”이었고, 베뢰아 유대인들은 “공정하며 편협 되지 않고 마음이 탁 트인 진지한 모습”이었습니다.
항구도시인 데살로니가는 무역이 활발한 상업도시였고, 그곳의 많은 유대인들은 무역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산이 빠르고 물질적인 이해관계에 밝았습니다. 그들은 손해가 되느냐에 이익에 되느냐에 따라 선악을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약간의 해라도 미친다고 생각되면 언제나 분노하며 즉각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한두 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습관화 되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헬라 귀부인들까지 믿음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불량배를 돈으로 매수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오히려 바울을 “천하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라고 관가에 고발까지 했습니다. 아주 질이 좋지 못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40Km 떨어져 있는 베뢰아 사람들은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그곳의 유대인들은 마음 문이 활짝 열려져 있어서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분별력이 있었고,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같은 유대 혈통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전혀 달랐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 이었습니다. 인격적인 성숙함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경청하며 말씀을 생활에 적용했습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정중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신사적이고, 편견을 갖지 않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었다.”,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진지하고 규모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직하며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베뢰아 교회의 성도와 같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데살로니가 유대인과 같이 조금만 생각이 다르면 금방 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극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 양쪽 끝에서 공동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치 앞도 나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인정하여 평화를 만드는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역할입니다.
자, 그러면 베뢰아 교회는 어떤 이미지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먼저,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신사적이다 하는 말은 옷을 잘 입어 겉모양이 아름답다는 뜻도 아니고, 저들이 귀족이라서 신사적이라 말씀한 것도 아닙니다. 이 신사적이라는 말을 New Living 영어성경은 “open mind"라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열려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들을 때 온 마음을 다 열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비록 번성한 항구도시에 살고 있었지만 저들의 마음은 폐쇄적이었습니다. 바다는 열려져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습니다. 문화는 개방되었지만 세계관은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으로 둘려 싸여 있는 작은 내륙 도시에 불과한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를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여행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여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의 손잡이는 바깥에 달려 있어 들어가는 사람이 문을 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방문부터 시작해서 차문까지 여러 문의 손잡이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문은 손잡이가 밖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안에 달려져 있어서 바깥에 있는 사람이 절대로 열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이 마음의 문을 억지로 열지는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말씀이 저들 위에 역사했습니다. 저들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사람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물을 먹는 것은 오직 자신의 입을 열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은혜 받는 것도 마음의 문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신사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과 가치를 판단하도록 맡기는 것이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베뢰아 성도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서 하나님이 주시는 새 세계를 받아들였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신사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서로에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문을 열고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마음 문을 닫고 있으면 혼자 있는 것보다 더 외롭습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신사였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신사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말씀을 집중적으로 받았습니다.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서 들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공부를 잘하는 비결도 별것 아닙니다. 얼마나 집중하는 훈련이 잘되어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주위가 산만하다는 것은 공부할 때 딴 생각하고, 집중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신앙생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 잘 듣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들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듣더라도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한 말씀이라도 놓치기 아까워하면서 들어야 합니다.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 달콤하다고 믿고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이 말씀이 내 속에 있는 불안과 염려를 이기게 만들고, 이 말씀이 내 인생 전체를 지배하게 되고, 나중에는 영적인 권세가 생겨 모든 환난을 능히 이기는 자가 됩니다.
영어성경은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whole attention". 모든 주의 다 기우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마음을 다해서, 내 온 인격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온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이 내가 알지 못하는 속사람까지 정화시키고, 내 영혼을 정결하게 만듭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그 말씀이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바로 여기에서 삶과 인격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세 번째로 저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 하였다고 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과 현실에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말씀은 듣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들은 말씀을 내 삶에 적용시키면서 이것이 내 인생에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꾸만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기 때문에 우리 앞에 발생한 일에 대해 해석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무슨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발생한 사건은 동일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사건을 해석하는 눈이 다릅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지만 판단은 눈 뒤에 있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저들의 눈 뒤에는 성경의 가치관이 항상 있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자기 지식이나, 경험으로 판단하고 해석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사건이 해석이 되질 않으면 “재수가 나빠서”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지식이 없는 사람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그래서 운수에 인생을 맡깁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해석하다가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으면 자기 뜻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것을 묻습니다. 그래도 해석이 되질 않으면 “뜻이 있겠지” 하면서 판단을 유보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요, 이것이 성경을 내 인생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건강한 인생입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인생에 적용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성도와 교회가 되었습니다.
네 번째로, 베뢰아 성도들은 너그러웠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교리로 무장되어서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식도 팔아버렸고, 인간의 도리도 던져버렸습니다. 이런 것을 교조주의라 말합니다. 한국교회가 이 교조주의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천재지변을 당한 사람들을 보고서 하나님 믿지 않아서 하나님이 심판했다고 너무도 쉽게 정죄해 버리지 않습니까? 상식을 잃어버렸고, 예의를 잃어버렸고, 인간다움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을 정죄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샘에서 길어올린 사랑과 정의와 인애와 긍휼의 생수를 메마른 땅에 공급하는 것인데 이것이 너그러움입니다.
저 옛날 다윗에게 이런 너그러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오랜 적대관계였던 암몬 왕이 죽었습니다. 적대관계지만 왕이 죽으면 통상적으로 조문사절단을 보내지 않습니까? 다윗은 신하를 보내어 암몬 왕을 조문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암몬 왕 하눈이 조문사절단이 자기 나라를 정탐하러 왔다고 수치를 주어서 돌려보냅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수염을 깎이고, 입고 있던 바지도 중동볼기까지 잘렸습니다. 긴바지를 다 잘라버리고 팬티처럼 입혀서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때 다윗의 너그러움이 드러납니다. 창피를 당하고, 형편없는 몰골로 왕 앞에 부끄럽게 설 신하들의 마음을 배려했습니다. 자신도 화가 나지만 어려움을 당한 신하들의 마음을 다정다감하게 헤아려 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여리고에 머물게 했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아래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고, 너그러움으로 대하는 신사였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감추어진 신사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베뢰아 성도들이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이요, 다윗이 신사입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 보다 다윗보다 더 신사적인 사람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추어진 신사적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박해하던 유대인들이 백리나 떨어진 베레아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원수 갚지 않았습니다. 왜 대응하지 않았습니까? 백리까지 쫓아와서 자신을 박해하는 유대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한테 비한다면 당신들은 그래도 약과요! 나도 한때는 교리에 갇혀서 사람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에 틀에 갇혀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국경선을 넘어 다메섹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극성스러움이나 지금의 저들의 극성이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성질로 보아서는 한판 붙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대항하거나 응징하지 않고 그대로 아덴으로 내려갑니다. 바울은 왜 극렬한 유대인을 피해 아덴으로 내려갔을까요? 빌립보 감옥에서처럼 기적을 기대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영적인 전투를 하지 않고 신사적으로 피했을까요?
그것은 바울을 박해하는 사람이 이방인 아니라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교리에 갇혀서 패쇄적이어서 그렇지 저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방사람들의 눈이 있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싸운다. 같은 민족기리 싸운다. 이렇게 볼 것이 아니겠어요? 대응하고 싸우다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것 같으니 신사적으로 물러난 것입니다.
같이 싸워서 이긴다고 한들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교회와 성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피한 것입니다. 바울은 남들이 비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손해 볼 줄 아는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교리에 갇혀서 인간다움의 정도를 잃어버린 독선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가슴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을 대하십시오. 양 극단에서 자기주장만 관철시키는 굳어버린 한국 사회에서 서로 소통시키면서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기꺼이 손해 볼 줄 아는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신사적 이미지로 평화를 만드는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베뢰아 전도
김영규 목사 / 행17:10-15
바울의 베뢰아 전도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17:10-12)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10)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이 난동을 부릴 때에, 야손을 비롯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과 실라를 즉시 피신시켰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서남쪽으로 약60마일(약96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 당시 마게도냐를 넷으로 나눌 때에 제3지역에 속하는 곳에 베뢰아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베뢰아는 올림피안 산맥의 동쪽 자락과, 에게해에 이어지는 평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로부터 베뢰아까지 걸어간 길은, 이그나시안 도로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데살리를 거쳐서 아가야 지역으로 가는 길입니다. 베뢰아의 현재 이름은 VERRIA이며, 인구는 약 1만 8천에서 2만 명 정도이고 그 중에 유대인은 약 2천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보다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베뢰아 사람들에 대해서 한 마디로 신사적이라고 평가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11) 물론 누가나 바울이 접한 사람들은 베뢰아 시민 전체는 아닙니다. 유대인 회당에서 만난 일부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고 헬라인도 있습니다. 누가는 이들 일부 사람들만 대하고도 베뢰아 사람들 전체의 성향을 신사적이라고 평가합니다. “ou|toi de; h\san eujgenevsteroi tw'n ejn Qessalonivkh/,”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인 만큼 전도에도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12) 다수의 유대인들, 그리고 높은 신분의 귀부인들과 남자들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신사적인 태도에 대해서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신사적”이란 말은 헬라어로 “eujgenhv"”인데, “eu\”(좋은) “givnomai”(출생)이란 뜻입니다. 즉, 출신이 좋다는 뜻인데, 고상하다는 의미로도 의역되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fair-minded” (NKJV), “noble character”(NIV), “open minded”(NLT)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공정한 마음, 고상한 성품, 열린 마음의 뜻입니다. “신사적”이란 단어는 원문상에 비교급(eujgenevsteroi)으로 되어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신사적이란 의미입니다. “These were more noble than those in Thessalonica,” (KJV) 감히 지역적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출신 배경에 따라 보다 더 신사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출신이란 어떤 가문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지역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집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신사적입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불량배를 동원하여 바울과 실라를 괴롭혔지만, 베뢰아에는 그런 유대인이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이나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혈통이 같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지역 사람들의 배경이 신사적이기 때문에 거기 사는 유대인들도 신사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출신에 따라서 보다 더 신사적이 된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출신을 따지자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이 사는 집단이 신사적이면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신사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왜 어떤 집단은 신사적이고 어떤 집단은 천박할까? 그것은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상이나 가치관, 도덕성, 생활 습관 같은 문화적 배경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사람들의 매너, 교양, 언어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보세요. 부모가 부부싸움 하면서 소새끼 말새끼 하면서 욕하면 애들이 소꿉장난 하면서 그대로 따라 합니다. 자기 남편에게 이 무슨 “인간아!” 하면서 대들고, 아내에게 “야, 너” 하면서 막말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왜 욕이 없으면 말이 안 되고, 험악한 말만 사용합니까? 학교 또래 집단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이 당연한 줄 알아요. 그만큼 어떤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해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처한 사회적 환경도 그렇습니다. 현재 우리의 언어, 예절, 윤리, 도덕성은 과거 우리가 자랄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천박해졌습니다. 현재 40대 이하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가 과연 얼마나 천박해 졌는지 전혀 몰라요. 왜냐하면 과거 사회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천박해졌을까요? 언어가 천박해지고, 행동이 천박해지고, 생각이 천박해진 때가 언제일까요? 저는 그 때를 칼라 텔레비전이 보급되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광고주가 프로그램을 좌우하게 된 상업방송 시대가 되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교양이 무너지고, 예절이 무너지고, 언어가 저급해졌습니다.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도덕성이 무너지고, 교실이 무너지고, 사제지간이 무너지고, 부모자식이 무너지고, 모든 인간관계가 개 등급 되었습니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세요. 어디를 보나 패턴이 똑 같습니다. 인기 프로그램이란 게 별 유익도 없는 남의 사생활 얘기 들춰보면서 희희덕거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는 우리 애들까지 그런 프로를 보면서 시간 보내는 것이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방송 매체의 속성이 뭡니까? 남의 안 좋은 면을 들춰내고 흠잡는 일입니다. 이런 속성에 물들면 항상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안 좋은 일만 들춰내고, 비판만 하는 비뚤어진 인간상이 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현대인들은 방송의 집단 최면에 걸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세상 집단에서 빠져나와야 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6:14,17-18) 그렇다고 세상 밖으로 탈출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내가 속한 집단에서 구성원들의 생각을 건전하게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사상을 바꾸고, 삶을 바꾸도록 앞장서서 어떤 역할을 해야만 됩니다. 나는 내 자식들이 가진 사상, 가치관, 사용하는 언어, 매너, 생활 방식의 거의 모든 것이 나를 닮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가 아버지로 있는 가정 속에서 어떤 삶의 방식을 몸에 익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속한 정윤교회의 분위기, 예를 들면 우리 교인들의 신앙 모습, 생활 태도, 가치관, 예절, 봉사 자세와 같은 일반적인 모습이 나를 닮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는 삶을 공유하고, 삶의 태도를 공유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이 신사적인 집단이 되도록 일정한 역할을 감당해야만 됩니다. 내가 속한 가정을 신사적인 공동체로 바꾸세요. 내가 속한 직장을 신사적인 공동체로 바꾸세요. 내가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신사적인 사람들로 바꾸세요. 그래야만 거기 속한 모든 사람들이 신사적인 사람이 됩니다. 특히 신앙생활의 모습에서 신사적인 사람들이 되도록 역할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베뢰아 사람들처럼 내가 속한 공동체에 “신사적”이라는 별명이 붙도록 만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받아들임
그러면 베뢰아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신사적입니까? 본문에 보면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합니다.
첫째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열린 마음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11)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ejdevxanto to;n lovgon meta; pavsh" proqumiva" ”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in that they received the word with all readiness of mind, ”(KJV) “they received the message with great eagerness”(NIV) 잘 준비된 마음, 혹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수용적인 자세, 일단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장 원하고 원하신 것은 경청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수 3:9) “하나님의 음성 곧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라 들으라”(욥 37:2)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시 81:8)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사 28:2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 55: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너희는 제발 내 말에 경청해다오! 내 말을 좀 들어라!
요즘 사람들, 열렸다는 말, 소통이라는 말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남의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 주로 남에게 내 말 좀 들으라고 목청을 높입니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은 들으라는 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조용히 경청합니다. 특히 요즘 사람들은 다원주의 사상을 좋아합니다. 다양한 소리를 들어라! 온갖 잡소리를 다 열린 마음으로 듣습니다. 그런데 유독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귓잔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그 쪽 방면은 처음부터 귀를 막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슥 7:11-12)
듣지 않고 내 말만 하는 시대, 경청이 없는 시대, 도대체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시대, 말하는 사람은 많고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시대, 이런 시대에 하나님 말씀에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 합니다. 베뢰아 교인들은 사람의 소리보다 하나님 말씀에 열린 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상고함
베뢰아 교인들의 신사적인 면, 두 번째는 성경 연구입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 “kaq! hJmevran ajnakrivnonte" ta;" grafa;"” 그들은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덮어놓고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감정에 휩싸여 판단력 없이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꿈을 꾸거나 무슨 귀신의 계시를 받고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황당한 경험을 믿는 믿음도 아닙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누가 말한 사설을 듣고 믿는 믿음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두철미하게 성경을 근거로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기독교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특별 계시입니다. 성경은 문자로 기록된 성문법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알아야 될 최소한의 모든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이 뻥 뚤린 것처럼 시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내가 구원 받은 사실도 물론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내가 젊은 시절에 인생을 놓고 고민하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명쾌하고 간단하게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의도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는 어떤 곳인가? 우주의 기원은 무엇이며, 생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장차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중대한 모든 질문에 대하여 성경은 간단명료한 해답을 전해줍니다. 성경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이 없으면 자신도 알 수 없고, 세상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인간,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 성경이 말씀하는 역사의 종말, 성경이 말씀하는 재림과 심판, 성경이 말씀하는 천국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당연히 성경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베뢰아 교인들의 장점은 바로 성경을 연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연구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ejrauna'te ta;" grafav")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이 구절에서 상고한다는 말(ejrauna'te)을 여러 번역에 다양한 단어로 번역합니다. 파고들다(공동번역), 연구하다(새번역), search(KJV, NASB, RSV, NLT), diligently study(NIV) 등등. 본문 11절의 성경을 상고한다(ajnakrivnonte" ta;" grafa;")는 말은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한다는 뜻입니다. “and examined the Scriptures every day to see if what Paul said was true.”(NIV) “and searched the scriptures daily, whether those things were so.”(KJV)
베뢰아 교인들의 성경 연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매일매일 일과적으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 “kaq! hJmevran ajnakrivnonte" ta;" grafa;"” “and examined the Scriptures every day ”(NIV) “and searched the scriptures daily,”(KJV) 성경은 매일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요 음성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매일 성경 묵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제 저녁 저는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적용을 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 24장 1-10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눈에 두 종류의 무화과가 다민 광주리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는 처음 익은 듯 한 극히 좋은 무화과였고, 다른 하나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입니다. 이것은 두 종류의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한 것입니다. 좋은 무화과는 바빌론 포로로 잡혀갈 백성들이고, 나쁜 무화과는 본토나 애굽으로 피신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거부하는 백성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는 사람이 좋은 자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게 수로 주시는 모든 징계를 항상 달게 받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성경 말씀을 매일매일 묵상하면서 그 때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오늘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제 11월과 12월 매일성경이 보급됩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매일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 진정성을 성경으로 검증했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11) 과연 바울이 말한 것이 사실인가? 과연 성경에 있는 것을 얘기했는가? “to see if what Paul said was true.”(NIV) “whether those things were so.”(KJV) 오늘날 소문난 설교자들이 많습니다. 케이블 TV를 통해서 하루 종일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가 이어집니다. 어떤 교인들은 본 교회 목사님 설교보다 TV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가끔 처음 교회에 나오신 어른들이 제게 칭찬을 하십니다. “목사님, 오늘 연설 최고입니다!” 우스개 소리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 설교가 듣기 좋은지 아닌지를 평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전하는 설교가 과연 성경 말씀인지 아닌지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설교는 넘쳐나는 데 성경 말씀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8:11-13) 오랜 만에 만난 동창이 목사인 내게 자랑했습니다. 나도 요즘 교회에 나간다! 그래서 잘 됐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고리타분한 성경 얘기를 안 해서 좋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런 얘기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의 진정성은 성경을 말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자가 성경을 말하고 있는가? 설교자가 지금 성경대로 얘기하고 있는가? 설교를 들으면서 무슨 인간적인 위로를 받으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 음성을 그대로 듣는 훈련을 하세요. 성경대로 설교하는가? 설교를 성경으로 검증하게 된다면 최고의 영적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베뢰아 교인들의 신사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양향모목사 / 행 17:10-15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가,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사는가 하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것이고 이 세상을 떠나서도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을 상속받아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엄청난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도 사탄의 종이 되어서 사탄이 시키는 대로 죄나 지으면서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이며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사탄과 함께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인생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가 있을까요? 이 믿음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 편에서 어떤 대가를 지불하거나 어떤 위대한 일을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은혜를 베푸셔서 선물로 주실 때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한 사람인 우리만 아는 비밀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베풀 사람은 미리 다 정해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창세전에 미리 다 예정을 하셔서 구원받을 백성을 미리 다 선택해 두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만 하시고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도록 이러저런 조치들을 다 취하여 주셨습니다.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태어날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때에 들을 수 있는 장소에 태어나게 하십니다. 복음을 들었을 때도 택함을 받은 사람은 그 복음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살펴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때도 아무 때나 아무 곳에나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아시아에서 때로는 유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이 세상에 보낼 때 그들 마음속에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심성을 주신다는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무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고 간절한 마음을 주셔서 그 너그러움과 간절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본문 10절에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설명하자 몇 명의 유대인들과 수많은 헬라인들과 적잖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바울과 실라를 시기하여 붙잡아서 당국에 고발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을 찾기 위하여 바울이 기거했던 야손이라고 하는 성도의 집에 들어가서 뒤졌지만 바울은 찾지 못하고 야손과 그 형제들을 읍장에게 끌고 가서 가이사가 아닌 예수라는 사람을 로마의 왕이라고 하는 반역자라고 고발을 합니다.
그 틈을 타서 바울과 실라는 다른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서 야밤에 데살로니가를 떠나서 베뢰아라는 도시로 오게 됩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80키로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당시의 수도였고 큰 도시였지만 거기에 비하면 베뢰아는 교통의 중심지도 아니고 상업도시도 아니고 아주 작은 도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쫓기다 보니까 작은 도시로 도망을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도망을 가서 아무 도시나 들어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아래 하나님의 백성에게 지금 거기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바울을 거기 보내신 것입니다.
바울이 베뢰아에 도착을 해서 또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는 성경을 많이 공부한 유대인들도 있었지만 데살로니가에서처럼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회당에 와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베뢰아 회당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모아 두시고 거기서 미리 성경을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곳에 급하게 파송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인천하고도 여기 구월동에서 함께 모였습니다. 구월동이 고향인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인천 토박이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멀리서 가까이서 이렇게 모여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이북에서 오신 분도 계시고 소흑산도에서 오신 분도 계시고 부산에서 대구에서 하동에서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여기까지 모이게 하셨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기에서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시대에 참 믿음을 볼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여기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시려고 특별히 여기 모이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을 세우시고 그곳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들이 모여들게 하십니다. 여기저기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에 그런 교회들을 세우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확신합니다. 여기에 복음이 선포되고 우리가 그 복음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확신을 갖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본문 11-12절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베뢰아에 있는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 그곳 회당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특별하게 베뢰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마음이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고 또 그 말씀이 정말로 그러한가를 성경을 살펴보면서 확인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앞서 말씀을 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사람을 창세전에 선택을 하시고 선택받은 백성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시기나 태어나는 장소도 조정을 하신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그 장소에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은 그들이 태어날 때 그들의 심성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심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분들은 비교적 마음이 착하십니다. 마음이 더 너그럽고 하나님을 찾는데 간절하고 신중하게 생각할 마음을 주십니다.
1) 더 너그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마음이 더 너그럽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더 너그러워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한 사람들의 차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시기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경건한 마음 즉 하나님을 섬기려는 그 마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베뢰아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그럽다고 했는데 여기서 너그럽다는 말은 단순이 마음이 넓고 이해의 폭이 넓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다로 번역을 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 성경은 “신사적이어서”로 번역했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든지 가문이 좋지는 않아도 심성이 착해서 세상의 사람들처럼 악하고 버릇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예의 바르고 생각도 바른 신사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독하고 악한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만하기 때문에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너그럽고 착할수록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거나 신사적인 사람이 예수님을 더 잘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태어날 때 다른 사람들보다 비교적 착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주십니다.
2) 간절한 마음을 주십니다.
간절한 마음은 무슨 일을 할 때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특별히 이 간절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열심, 열정이란 말을 참 좋아합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부지런한 사람 열정이 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잘 삽니다. 그러나 그런 열정이 없이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사는 사람은 본인도 힘들고 주변의 사람들도 힘들게 합니다. 열심을 내되 어떤 일에 열심인가도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열정을 가지고 악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도 있고 자기의 욕심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악한 일만 아니면 모든 일에 열심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열정을 신앙을 위해서 쓰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가장 귀한 일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자신을 위한 가장 귀한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 설교를 대강 적당히 듣는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들을 때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진리를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날마다 성경을 상고할 마음을 주십니다.
설교를 들을 때 열심히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로 그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뜻인가를 곰곰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사가 앞에서 설교를 하면 무조건 옳은 말인 중 믿고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해도 아멘하고 받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아무렇게나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이야기도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합니다. 때로는 그런 자기의 경험담이 성경과 반대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나는 서쪽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하나님은 천국으로 오라고 하시지만 내 생각에는 이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고 하지만 나는 인간의 공로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들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강단의 현실입니다.
교회가 바로서기 위해서는 성도님들이 성경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목사가 설교할 때 무조건 아멘만 하지 말고 정말로 그러한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고 바로 선포하는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바르게 선포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특별히 선택해 주시고 우리 속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좋은 마음들을 주셨습니다. 너그러운 마음도 주시고 뜨거운 열정도 주시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할 마음도 주셨습니다. 이 좋은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 열심히 들으시고 성경도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리를 바로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믿음은 좋은 것이니까 무조건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왕이면 믿음이 굳건할수록 좋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약점을 노리기 때문에 믿음을 강하게 해서 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식으로 알고만 믿어도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다가 뜨거운 마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믿으면 더 좋습니다. 더 나아가서 믿음을 삶에 실천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면 더 좋습니다. 그냥 지식으로만 믿는 외줄로 된 믿음을 가지면 여러분이 믿음을 놓치고 방황하기 쉽습니다. 마음의 확신 삶의 경험 이런 것을 더해서 아주 든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은 너무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믿으면 좋고 안 믿으면 그만이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믿음만큼은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믿음을 굳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본문 13-15절에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이 데살로니가에까지 전해지자 바울을 잡으려고 했던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무리들을 이끌고 80키로 떨어진 베뢰아에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거기도 더 이상 있지 못하고 바닷가까지 도망을 해서 사람들의 인도를 받아서 아덴으로 떠났습니다. 복음을 들고 세상 끝까지 가는 것이 바울의 사명이고 그 과정에서 아덴도 거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베뢰아를 떠나 아덴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악한 일에 쓰임을 받는 유대인들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받았고 그 성경을 줄줄 외우도록 공부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께 충성을 한다고 생각했고 해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임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받아서 그것을 가지고 오히려 악한 일에 쓰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창세전에 선택해 주셨습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우리를 보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좋은 마음들도 주셨습니다. 너그러운 마음과 열정과 성경을 상고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좋은 것들을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일에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도 잘 하시기 바랍니다.
형편없는 설교에서 은혜를 받으려면
행 17장 10~14절 / 이재철목사
이번주 설교 제목을 보면서 조금 의아했습니다. 형편없는 설교?? 우리 교회에 해당되는 설교가 아닌 것 같아서요. 매주마다 엑설런트 한 설교를 먹고 마실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그게 바로 멀리서도 열린문까지 나오는 이유겠죠?
그렇다고 적용할 것이 없느냐.. 그건 아니죠. 적용 거리가 너무 선명하네요.
하나!! 다음주는 앞자리 다툼이 치열할 듯. 빨리 와야 앉겠죠? 예배시간 10분 후에 오셨던 분들~~ 다음주엔 예배시간 10분 전 어때요?
둘!! 문구사에 수첩에 많이 팔리겠는데요.. 으흐흐~~~
이번주도 승리하는 한 주 되시길...
♬ 파송의 노래 ♬
너의 가는길에 주의 평강 있으리 평강의 왕 함께 가시니
너의 걸음걸음 주 인도하시리 주의 강한손 널이끄시리
너의 가는길에 주의 축복 있으리 영광의 주 함께 가시니
네가 밟는 모든 땅 주님 다스리리 너는 주의 길 예비케되리
주님 나라 위하여 길 떠나는 나의 형제여
주께서 가라시니 너는 가라 주의 이름으로
거친 광야위에 꽃은 피어나고 세상은 네안에서 주님의 영광보리라
강하고 담대하라 세상 이기신주 늘 함께 너와 동행하시며 네게 새힘 늘 주시리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 일은 성령의 개입이 없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영적 능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특히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설교를 듣다보면 형편없는 설교도 있습니다. 형편없고 지루한 설교도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설교를 통해 은혜 받는 것에 대해서 설교자는 자신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듣는 자는 듣는 자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똑같이 준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는 하나님 말씀을 좋게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베뢰아 교회 성도의 모습입니다.
바울이 베뢰아로 내려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성도 있고 글 쓰는 능력도 뛰어났지만 설교는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형편없는 설교를 듣고도 베뢰아 사람들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 어떻게 하면 형편없는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①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11절)
간절한 마음 = 열린 마음(open mind)
이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실까'를 생각하며 말씀을 받았습니다.
편견을 가지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거부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직접 와서 말씀하셨을 때도 거부하였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성장합니다.
마 13장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씨는 똑같지만 어느 마음 밭에 뿌려지냐에 따라 결과가 다릅니다.
☞ 길가 :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귀가 와서 다 쪼아먹어버립니다.
☞ 돌밭 :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잠깐 깨닫다가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말씀의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 가시떨기 :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헌신도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내 삶에 적용된 말씀으로 변화되지 못하고 이 세상 욕심과 걱정에 쌓여있는 사람입니다.
☞ 좋은 땅 :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 어떻게 하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 앞자리에 앉으십시오.
앞에 앉으면 예배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늦게 오는 분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메모를 하면 졸리지 않고 집중이 잘 됩니다. 내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풍성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② 베뢰아 사람들은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11절)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였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여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나누면 됩니다.
우리 교회는 목장 모임을 통해 이런 것들을 하고,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설교를 훼방하였습니다.(13절)
내가 은혜를 못 받으면 은혜를 받은 사람까지 훼방하는 자가 됩니다.
◈ 은혜를 받고 기쁠 때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지만 어느 순간 은혜를 잊어버렸을 때는 설교 말씀이 나를 치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사람에게 상의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들으십시오.
㉡ 설교하신 분을 만나서 솔직하게 얘기하십시오.
㉢ 그렇게 해서도 안되면 교회를 옮기십시오.
내 영이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 까지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십니다.
신사적인 그리스도인
행 17장 10~14절 / 백장흠목사
“신사의 나라” 하면 영국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신사”란 무엇을 말합니까? 어린시절에 아무나 입지 못하는 멋있는 양복을 입고 좋은 구두를 신고 머리를 잘 단장한 남자를 ‘신사’라고 불렀습니다. 신사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품행과 예의가 바르고 학적인 덕과 기품을 갖춘 사람 그리고 지위와 재산이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뵈뢰아 교인들이 신사적인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하는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살전1:2-4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말하는 게 있는데 1) 믿음의 역사 2) 사랑의 수고와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하였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는데 믿음이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믿음이란 입으로 ‘믿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역사하였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일 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데 가만히 있겠습니까? 즉 행위가 따른다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고 행동하였습니다. 말 없이 믿고 행하는 이들이 있다면 자랑스러운 교회입니다. 사랑이 있었는데 사랑은 수고합니다. 아들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게 손자라고 합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업었습니다. 그런데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다. ‘무겁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금기로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보다 작은 돌맹이를 업고 있으라고 하면 아마 웬만한 사람들은 화를 낼 것 입니다. 그러나 손자를 업고서는 화내지 아니하고 “내려놓으세요” 그러면 “괜찮아. 조금 더 있다가 내려놓을게” 그럽니다. 왜? 사랑하기에 수고도 수고라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은 수고와 희생입니다.
소망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말로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다른 이들이 갖지 않은 꿈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는 ‘힐튼‘ 이라는 고급 호텔이 있습니다.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습니다. 이 호텔이 있기까지는 미국의 택사스 주의 어떤 작은 호텔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힐턴‘이라는 소년이 어느 날 신문에 ’아스토리아‘라 는 거대한 빌딩의 사진이 실린 것을 보고 그 빌딩 사진을 오려서 자기 침대의 머리맡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이러한 빌딩을 건축할 수 있다‘ 라는 꿈을 키우며 생활하였답니다. 그가 장성한 이후에 바로 세계적인 체인을 가진 호텔 주인이 되었습니다. 우리 가슴에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꿈과 소망을 가졌다면 인내하여야 합니다. 소망이 있기에 기다립니다. 참습니다. 농부가 농사하면서 기다립니다. 어느 시기를 기다립니까? 가을을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돌보고 곡식이 잘 되어있으면 그렇게 기뻐합니다. 소망이 있기에 참고 기다리는 교인들을 보면서 바울은 칭찬하였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이 소문났다고 하였습니다. 소문이 나야 합니다. 조그만 음식점도 잘 한다고 소문이 나면 됩니다. 교회도 소문이 나야 합니다.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모였답니다. 사랑이 많답니다. 그런 좋은 교회가 있답니다. 어디에 있답니까? 서울 강남에 있답니다. 그 교회 옆에 양재역이 있다고 그럽디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런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노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더 많이 모인다던지 예산이 많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신사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신사적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였습니까?
1. 말씀을 받을 줄 안다고 하였습니다.
건강한 신앙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에 의하여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기분이나 감정은 순간마다 가치가 달라집니다. 오늘은 좋지 아니하였으나 내일은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하여 살아가면 잘못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초대교회 사명을 다하고 성공적인 신앙을 지킨 이들은 말씀을 받았고 그대로 산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전할 때마다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베드로 같은 이에게도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바울에게도 그러하였습니다. 행19: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은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말씀에 의하여 살고 말씀을 전할 때에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으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적의 사람이 됩니다.
말씀은 영적인 거울과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여줍니다. 말씀에 의하여 회개하게 됩니다. 거울을 보지 않으면 무엇이 약점으로 묻어있는지 모릅니다. 여자분들이 어디에서든지 거울을 자주 봅니다. 식사가 끝나도 바로 거울을 봅니다. 사람이 그런대로 성공적으로 살려고 하면 자아발견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성공이란 무엇을 얻었다던지 무엇이 된다는 것보다 먼저 자기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자기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말씀’이라는 거울에 의하여 보게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필요로 하는 존재인가?’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1) 말씀을 받을 줄 안다고 하는 것은 겸손하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겸손은 생명입니다.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까? 교만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교만하여서 믿지 못합니다.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교만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겸손하면 덕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존경합니다. 정근모 장로님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지방에 계신데 점심시간에 되면 모든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인사를 나누고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니까 그 교회 신자들이 자랑을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하면 말씀을 잘 받습니다. 언제나 “아멘” 하는 분들은 겸손하신 분들입니다. 겸손하니까 시험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스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부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반응이 없으면 답답할 게 아닙니까? 다시 목소리를 높여 부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왔다”라고 하십니다. 나와 관계가 없다고 거절하는 말입니다. 그래도 부르짖습니다. 그 때 어린아이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때 그 여인은 “옳습니다. 옳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얼마나 겸손한 말입니까?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여도 겸손히 받아들일 때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 되어라(마15:21-28). 딸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겸손을 받아들일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구하는데 갖고 있어야 할 성품에 대하여는 기도하지 아니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겸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소질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성공하는 데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조건 환경이 좋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품도 중요합니다.
(1) 진취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고비와 난관, 제약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달려 나가려고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진취적인 사람은 비록 바로 눈앞에 어둡고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밝고 긍정적인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주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2) 개방성 입니다. 열린 마음, 열린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분명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좋은 생각을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3) 과학적인 사고입니다. 냉정한 이성을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4) 겸손입니다. 자기가 한일에 책임을 질 줄 압니다. 잘못했으면 잘못됨을 인정하고 사과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로부터 장점을 배웁니다. 예수의 마음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표현되는데는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라 하였습니다.
2) 말씀을 받았다 함은 사모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장’하면 같은 음식을 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자꾸 권하면 오히려 곤혹스럽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맛있게 음식을 먹습니다. 말씀은 누가 받습니까? 영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신앙인입니다. 몸이 쇄약 하면 맛이 없을 뿐 아니라 고역스럽게 생각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면서 받아 들이는 신앙인들이 모인 뵈레아 교회는 건강하고 신사적인 교회였습니다.
3) 순종하려는 자세를 말합니다. 말씀을 받는다는 말은 바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데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의무적인 순종입니다. 두려워서 순종합니다. 종이 상전 앞에서는 무조건 “예. 예.”하는 순종입니다. 순종 안하면 불이익이 오기 때문에 하는 순종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순종은 눈가림하기 쉽습니다. 볼 때에는 잘하는 것 같이 하게 됩니다. 이런 순종은 자신도 그렇고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이기심에 의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흥정하여 맞으면 순종하고 아니면 안합니다. 가장 좋은 순종은 무엇입니까? 사랑하기에 순종할 때입니다. 무엇을 주시던지 아니 주시던지 순종합니다. 이 때의 순종은 기쁨이 있습니다. 평안합니다. 은혜가 넘침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말씀을 받고 상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였다는 말입니다. 젊은 판매원이 어느날 농사하는 이를 찾아가 책을 선전합니다. 이 책을 구입하셔서 읽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농장 경영법, 돈 버는데 온갖 정보가 들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난 농부의 대답인 즉, 그 책에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실천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몰라서 사랑하지 아니합니까? 기도가 무엇인지 몰라서 기도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실천이 문제입니다. 실천하기 위하여 말씀을 듣고 받을 줄 알았으니 진정으로 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2.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믿는 이가 많아지는 게 교회의 바람입니다. 생각하여 봅시다. 어떻게 하여 믿는 자가 많아졌을까요? 전도하였다는 말입니다. 전도는 계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조직을 하고 태신자를 의무적으로 정하게 하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성령충만하게 된 이후에 성도들이 뜨겁게 전도하였습니다. 주후 63년경에는 복음이 로마로 들어 갔습니다. 당시 로마의 황제인 정신병자에 가까운 네로는 자신이 ‘신’이라고 자기 자신을 숭배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인들은 철저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잔인하게 그리스도 인들이 죽었습니다. 화형에 처하고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을 피하여 ‘카타콤’이라는 지하 무덤에 숨어서 생활하였습니다. 원래 카타콤은 로마 왕족의 무덤입니다. 지하 무덤의 4층,5층에 내려가 믿음을 지켰습니다. 카타콤의 길이가 700키로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길을 잃으면 찾지 못합니다. 그런 곳에서 살면서 전도의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면 물론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더구나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면 살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숨어서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믿는 자가 많아지는 교회는 신사적인 교회입니다. 이 말은 전도의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사명을 다하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던 시절에는 사명보다는 권리 주장을 하였습니다. 신앙 안에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섬김의 권리가 있으면 있지요. 대접 받을 권리도 없습니다. 다만 사명만 있을 뿐입니다. 봉사하고 섬기는 사명입니다. 전도하여야 할 사명이 있을 뿐입니다. 의무에만 전적으로 힘쓰는 데는 말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내 책임을 다 하지 못한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이 의무를 다하는 교회, 그 의무 중에 전도의 의무를 시행하는 교회가 신사적인 교회입니다. 믿는 자가 많아졌다는 말은 불신자들이 몰려온다는 말입니다. 어떤 교회에 신자가 모여 들던가요? 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좋은 소문이 난 교회입니다. 전도하는데 입으로 하는 것 보다 힘 있는 방법은 생활에서 보여주는 전도입니다. 불신자들은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지 정통보수 신앙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알고 보는 것은 바로 생활입니다. 예수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겨우 3년 사역을 하였지만 양향력은 2천년동안 세계 모든 인류에게 변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노래를 작곡하신 일도 없고 소설, 수필을 쓰신 일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때문에 위대한 라파엘,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다빈치 같은 화가가 생겼고 단테 밀튼 같은 유명한 시인들과 하이든, 모차르트, 헨델, 바하 같은 훌륭한 음악가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활을 통하여 변화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삶에 있어서 사랑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는 미움을 받아도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 보세요. 믿는 이들이 단결하고 서로 사랑하여 보세요. 봉사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면 불신자들이 보면서 ‘예수 믿으면 그렇게 되는구나’ 그들이 스스로 교회를 찾아올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럽니다. “그 사람 믿음은 좋은데 성질이 틀렸어. 그 사람 기도는 많이 하는데 가정 생활은 왜 그리 엉망이야.” 이게 문제입니다.
어느 읍 소재지에 300여명이 모이는 교회가 있는데 목사님은 아침 조기축구를 합니다 축구하는 분 가운데 그 지역에 유지급에 해당하는 분이 있습니다. 자연히 목사님이 전도하였습니다. 도무지 듣지 않더니 어느 날 주일에 그 분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기쁨으로 환영하고 예배 후에 식사를 같이 하면서 대화하는 중에 “제가 그렇게 권유하였더니 드디어 나오셨군요.” 라고 말하니까 그 분이 정색을 하면서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 나온 게 아닙니다. 교회 옆에 사시는 정 모 집사님이라고 나이 많으신 분 계시지요?” “예.” “그 분 때문에 교회 나왔습니다.” “그 분이 전도하던가요?” “아니요. 전도는 무슨 전도입니까?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분이 아침마다 저의 집 앞과 동네의 길을 다 청소 하더라구요. 언제인가 내가 하려고 마음먹고 나가보니 먼저 했더라구요. 그분에게 감동을 받고 교회에 나오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더랍니다. 목사님은 크게 감동을 받았답니다. 전도하는데 복음 제시를 하여야 합니다. 복음제시는 물론 복음이요, 말씀입니다. 우리는 생활 제시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추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교회로 올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존경받는 선생 즉, 랍비가 있었습니다. 랍비의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한 동네에 무조건 큰 소리를 지르는 빵 가게 주인이 이사 왔습니다. 이 사람은 회당 안에서도 주위 사람을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데 빵은 점점 크기가 작아졌습니다. 그 때에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샀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은 랍비를 찾아와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사람들이 왜 저를 자꾸 피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언제나 선하게 살려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 때 랍비는 무어라고 하였는고 하면 "그대는 말을 적게 하고 빵은 크게 만들면 그 때 사람들이 좋아할걸세." 라고 해주었답니다. 교회는 말없이 실천함으로 믿는 자가 많아지는 신사적인 교회가 된답니다.
3. 귀인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귀인이 누구입니까? 높은 사람입니까? 돈 많고 권력있는 사람이 귀인입니까?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거룩한 신앙적인 면에서 보면 귀한 사람은
1)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예수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누구를 귀하게 여깁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귀합니다. 내 남편이 귀합니다. 내 자녀가 귀합니다. 귀한 이유는 내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는 존재입니다. 이제는 귀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은 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행상의 아들로 태어난 청년이 있었습니다. 가난에 한을 품고 무섭게 일했습니다. 야심찬 사업가로 변신한 그의 인생 철학은 "나를 위해, 돈을 위해"였습니다. 그 청년은 미국 석유업의 90%이상을 차지하는 세계적인 대부호로 성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를 심하게 착취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존경심이 아닌 돈 때문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의 나이 53세에 몸과 마음은 심하게 망가져 있었습니다. 심한 노이로제와 소화불량, 무력감과 악몽 등으로 의사의 최후진단은 죽음을 준비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그 때 대부호는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라는 구호로 인생관을 바꾸었습니다. 거액을 기증해 시카코 대학을 설립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 귀한 사람으로 수명도 연장하고 복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바로 록펠러입니다. 이런 귀한 사람이 많아야 신사적인 교회입니다.
2) 매이지 아니하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돈에 매이지 아니합니다. 돈에 매인 사람은 추하게 삽니다. 예수의 사랑에 매이고 끌려 사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3) 다른 이들에게 해를 주지 아니하고 덕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귀한 사람을 보세요. 남에게 유익을 줍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른 이들을 편하게 해줍니다. 지도자를 도와줍니다. 누가 보아도 귀인입니다. 이런 이들이 많아야 신사적인 교회입니다.
말씀을 받을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믿는 자가 많아지도록 행동으로 전도합시다. 우리 스스로가 귀인들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 주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21세기 신사적인 교회가 되게 합시다. 아멘.
깁슨이라는 사람은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거부가 되었습니다. 어느 경제인 모임에서 물었습니다. "빈손으로 거부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청중은 대부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게는 세 가지 신조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둘째, 술을 마시지 아니한다. 셋째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 세 가지를 지키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거야 우리도 모두 아는 사실이 잖습니까?" 깁슨은 웃으면서 "그렇습니다. 아는 사실을 당신들은 실천하지 아니하였을 뿐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는대로 실천합시다.
신사적(紳士的)인 교인?
행 17장 10~15절 / 서금석목사
오늘 본문의 중심지는 베뢰아입니다. 베뢰아는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있는 도시로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90여km 지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베뢰아는 '많은 물줄기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베뢰아 주위에 천연적인 샘들도 많았고 경관 역시 매주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생명의 위협에 놓여있었고 이를 걱정한 형제들이 그 밤으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베뢰아에서도 두사람은 유대회당으로 들어가 말씀을 통해 예수가 구세주인 것을 증거합니다. 바울일행이 전하는 성경말씀을 듣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단지 '그들 가운데 몇 명만이 믿었으나'(4절) 베뢰아에서는 헬라인 중에서
그런데 또 문제가 생깁니다.
13절을 함께 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일행을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90여km떨어진 베뢰아까지 좇아와 베뢰아에서도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하나 유의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사람들은 바른 얘기, 정당한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도 선동하는 얘기에는 쉽게 동요하는 것을 봅니다. 바울일행을 향한 유대인들의 박해 - 대단하지 않습니까?
끈질기지 않습니까?
일찍이 유대인들은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지였던 안디옥과 이고니온, 루스드라까지 좇아와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쳐 실신시켰지 않습니까?
반대하면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나 못하게 하면 되는데 왜 수십km 떨어진 곳까지 따라다니며 반대합니까? 우리 생각 특별히 춘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쉽게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갖은 핍박과 위협 속에 처했던 바울 역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랫지 않습니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어갈 때 뒤에서 돌 던지는 사람 옷지키고 있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우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일주일 걸리는 다메섹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일주일이나 걸리는,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합니다. 반대를 해도 그렇게 철저하게 반대를 합니다.
대단한 것은 바울 일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차전도여행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이고니온에서는 돌에 맞아 실신했다가 깨어난 후 다시 자신을 돌로쳤던 사람들이 머무는 성을 향하여 걸어들어가지 않습니까? 2차 전도 여행에서는 빌립보에서 그렇게 두드려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몰래 도망을 나와야 했습니다. 베뢰아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게 당하고서도 다시 회당으로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좇아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시끄러워지자 베뢰아의 신도들이 실라와 디모데는 남겨두고 바울만 피신시켜 아덴으로 보냅니다. 재밌는 것은 바울일행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은밀하고, 소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핍박하는 유대인이나 핍박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 모두 - 생각해 보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유대인 박해자나 바울 모두가 그토록 끈질기게 옥신각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앙입니다. 유대인들도 자신의 신앙때문이고, 바울도 자신의 신앙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나 바울은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믿음의 확신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잘못되면 사람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왕 믿으려면 철저하게 믿읍시다. 제대로 믿읍시다. 잘못된 것을 믿으면 외양은 같아 보이지만 결말은 엄청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본문 전체가운데서 11절 한 절만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곳 사람들보다 더 많이 믿고, 더 잘 믿었습니다. 12절입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헬라귀부인들과 남자들도 많았습니다. 바울이 유독 베뢰아에서만 열심히 전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왜 베뢰아에서의 결신자들이 다른곳보다 많았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11절에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紳士的)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며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서 몇가지 의미를 찾아 생각하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신사적(紳士的)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 보니 신사란 '예절이나 품행이 바르고 교양이 있어 젊잖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원어를 보면 '신사적인' 「유게네스테로이(ευγενεστεροι)」는 '출신이 좋은', '가문이 좋은' '고귀한' 의 의미로 상류층 사람들이 보여주는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더 신사적' 이라는 단어가 새번역 성경에는 '보다 마음이 넓어'로 번역되었고 공동번역에는 '마음이 트인'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영어성경에도 'open-minded'(J.B)로 표현되었습니다. 여기서 '신사적인'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몇가지 의미를 생각합니다.
① 먼저는 천성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성품, 심성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의 성격이 후천적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대개는 천성적입니다. 어떤 사람보면 술 잘먹는 사람있지요? 말술먹고도 끄떡없어요. 타고난 체질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기 좋아보이는 온화한 성품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거칠고 세상낙 좋아하고 예수 믿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 믿고 거듭나는 경험을 하려면 시련도 겪고 매도 맞고 더 아파야 합니다. '신사적'이란 태어날때부터 바탕이 좋고 인간성이 좋은 사람을 말합니다.
② '열린 마음' '넓은 마음'을 뜻합니다. 'open-minded라는 말 많이 쓰지요? 열려있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상대방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상대방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다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세상 사는 것 참 쉽지 않아요. 때때로 사람이 얘기하는 것 듣고나서 한참후에 왜 그 사람이 그 얘기를 내게 햇나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형광등입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 피곤합니다. 본문에 '신사적'이란 말의 의미는 편견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받는 마음입니다. 내 경험, 내 지식, 내 주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추진력은 잇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진리에 대하여 마음문을 열지 못하는 편견에 사로잡힌 불쌍한 사람입니다. 누가 무슨 얘기를 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열린 마음아닙니까? 특별히 말씀을 들을 때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목사가 왜 저런 설교를 할까?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잣대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자신은 구태의연한 모습을 고집하면서도 언제나 남을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함께 축구경기를 보면 금방 티가 납니다. 열린마음을 가진 사람은 쉽게 우리편과 상대편의 전력이나 장·단점을 어설프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지켜봅니다. 우리편을 일방적으로 응원하지도 않습니다. 상대편 공격수의 수준높은 플레이를 칭찬하는 여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피곤합니다.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감놔라, 대추놔라, 혼자 북치고 장구칩니다. 이런 사람과 함께 축구를 보면 이길 경기도 집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데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 귀가 따갑지 않겠습니까? 따가운 귀를 긁느라고 경기에 전념하지 못하니 질수 밖에요! (결혼을 앞둔 미스들은 결혼하기 전에 남자친구와 꼭 축구경기를 보세요. 그 남자가 열린마음인지 닫힌 마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있는 사람은 대화해 보면 압니다. 진솔하게, 있는대로, 느낀대로 대화할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말 하면 이런 오해, 저말하면 저런 오해가 걱정되서 이말 저말 다 빼버리고 쓸데없는 얘기, 생명력 없는 농담이나 하다 헤어지지 않습니까? 정말 좋은 관계란 아무말이라도 다 할 수 잇는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보면 상대방의 말을 정직하게 받지 못해요. 일단 의심부터 합니다. 나쁘게만 봅니다. 어두운면만 봅니다. -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신사적인 사람은 상대방에 대하여 긍정적을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좋은점, 좋은 기억만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고 끝까지 들을 줄 압니다.
춘천중앙의 여러분.
열린 마음, 있는 그대로 듣고 받을 줄 아는 성도가 됩시다. 너무 재지 맙시다. 너무 따지지 맙시다. 편견을 접으세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열린 마음, 있는 그대로 듣고 받을 수 있을 때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잇습니다. 신사적인 성도가 됩시다.
2.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베뢰아 사람이 신사적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하면서 먼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열심히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표현했습니다. 희랍어 '간절한 마음'은 파세스 프로뒤미아스(πασησ προθυμιασ) 인데 프로뒤미아스(προθυμιασ)는 '열심히' '자신해서' '준비된'의 뜻이고 앞의 파세스(πασησ) 는 '모든'이란 뜻으로 '모든 준비된 마음과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하여"라는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집중적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란 full attention- 집중해서- concentration의 의미입니다. 말씀을 받되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 수요일(15일)에 수학능력고사가 있었습니다. 한달후면 발표가 있고 발표와 함께 전체 수석합격자, 남,녀수석합격자,계열별 수석합격자가 발표되고 또 반드시 수석합격자의 인터뷰기사가 TV와 신문에 떠들썩 할 것입니다. 수석합격자들이 하는 말 가운데 꼭 들어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특별히 과외공부하지 않았다'는 것과 함께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했다' 그리고 꼭하는 소리가 "공부시간에 집중해서 공부했다,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선생님 말씀 들었다" 아닙니까? 수년동안 신문 뒤져보십시오. 틀림없습니다. 공부잘하는 것 별것아닙니다. 얼마나 집중해서 공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허둥대는 학생들의 공통적인 모습은 영어공부했다, 수학공부했다. 국사공부했다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잘하는 사람은 맥을 잡고 일관성잇게 공부하지만 못하는 사람은 시험에 이것도 나올 것 같고, 저것보면 저것도 중요해 보이고, 그래서 이 책 저 책을 메뚜기 옮겨다니듯 이동하며 공부합니다. 이런 공부가 얼마나 기억에 남겠습니까? 많이 공부한 것 같은데 막상 시험문제를 딱허니 받아놓고 보면 이 문제가 국사책에서 나온 것인지, 국어책에서 나온 것인지 마구 헷갈립니다. 집중하는 것이 비결입니다. 큰아이가 중학교 3학년때 속초에서 세계잼버리 대회가 열렷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진학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만 다른 경험도 필요하다 싶어서 보냇습니다. 그러나 이 녀석이 돌아와서 쉽사리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며칠 놀고나서 마음잡고 공부하겠다' '휴가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일하겠다' - 마음대로 됩디까? 안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말씀을 듣던 사람이 집중해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할때도 언제나 설교 생각뿐입니다. 신문을 보아도 대화를 나누어도 머릿속에는 언제나 말씀전할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여러편의 설교를 준비해야 할때가 있는데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외부강사가 설교하는 주간에 한주 쉬고나면 다시 warming-up하는데 여간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입장에서만 아니라 듣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0월에 부산제일교회(감리교)와 서울 평강장로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햇습니다. 두 교회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을 빨아들일 듯 듣더라구요. 집중해서 들어요. 조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어요. 하품하는 사람 물론 없구요. 집중해서 들으니까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은혜가 돼요. 은혜받아요. 때로 어떤 교회는 그렇게 산만할 수가 없어요. 말씀 전하기도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땅만 좋으면 무슨 씨를 뿌리든지 다 잘자라요. 열매도 풍성하게 열립니다.
여러분. 때로 설교들으면서 딴 생각할때가 있지요?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말있지요. 예배후 친구만날 생각, 운동할 생각, 또는 설교자와 논쟁하려는 생각으로 듣는다면 믿음이 생길 수가 없어요. 설교들을 때 집중해야 합니다. 마치 배고픈 아이가 엄마젖 빨 듯 갈증난 사람이 한모금의 물을 마시듯 사모하며 갈급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부흥회한다고 하면 몇시간 거리에서도 교파와 교회를 가리지 않고 모였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설교테이프, 비디오 테이프, 라디오방송, 케이블TV에서 언제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말씀을 들을 수있다는 사실이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사라지게 합니다. 오히려 홍수속에서 진짜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당한 것처럼 수많은 말씀들 속에서 정작 영혼은 메마르고 텅텅비어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내가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는 내가 나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한 말씀 들어도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니 아무리 말씀이 넘쳐나야 나와 무슨 관계가 있고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겟습니까? 성경읽는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제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사모하는 마음, 집중해서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잠이 안와 불면증의 고통을 호소하니까 믿음 좋은 권사님이 뭐라 대답한 줄 아십니까? "잠이 안오면 성경을 보세요, 성경보면 잠이 잘 옵니다" 성경을 수면제 정도로 아는 사람에게 말씀이 무슨 은혜가 되고 무슨 능력이 되겠습니까?
신사적인 베뢰아 교인들이 어떻게 했다구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더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 - 꼭 명심하셔야 할 것이 있어요. 예배시간에 늦지 말아야 합니다. 허겁지겁 겨우 와서 '말씀을 간절히 받더라' 그렇게 되겠습니까? 여유있게 조용히 앉아 하나님 앞에 "제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말씀을 받을 준비하는 사람이 바로 간절히 말씀을 받는 사람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더라"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은 말씀이 사실인가 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하므로" 먼저 주목해야할 단어는 '날마다'입니다. 마음 내킬 때 한번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봐요. 날마다 들어요. 매일같이 반복해서 성경을 상고합니다. 상고(詳考)란 무슨뜻입니까? 새번역 성경에서는 '자세히 공부했다'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에서는 '연구했다'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상고하다'는 말 '아나크리노(ανακρινω)라는 뜻은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는 의미로 영어의 'examine'에 해당합니다. 베뢰아 교인들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스스로 성경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과 실제 성경이 어떻게 연관되어져 있는지를 자세하게 연구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말씀 듣고 성경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먼저는 하나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주일예배에서 설교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듣고 나서 '오늘 설교가 괜찮았어' 라든지 '은혜가 됐다' 라든지 하는 정도로 끝이 아니라 집에 가서는 반드시 주보사이에 있는 속회공과와 성경본문을 펴놓고, 가능하다면 교회 homepage에 올라있는 그날의 설교 본문을 눈으로 보면서 하나 하나 집어 가며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아 이것이 바로 그 말씀이구나' '아 이런 뜻이 있었구나' 운동선수들 있지요? Golf치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골프를 다 치고 나서 목욕하고 기분좋다하고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indoor연습장에 가서 그날 잘 되지 않은 것을 연습하고 확인합니다. 운동 잘하는 사람과 열심히 해도 잘 안되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끝이 예배끝이고 한주간 말씀끝이고 성경도 한 주간 던져 두었다가 주일 아침에 먼지털어서 들고나와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설교듣고 다시 집에 와서 직접 찾아보고 확인해 보고 나아가서 같은 본문이라도 매일 읽고 반복해서 의미를 되새기면 신앙이 분명해지고 튼튼하게 자라게 된다는 말슴입니다.
옛말에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編意自現)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책이라도 백번을 읽으면 그 뜻이 확연해 진다는 말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설교듣는 것으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면 큰일입니다. 설교와 성경을 읽고 읽고 계속적으로 내 삶의 일부분으로 함께 나눌 때 신앙의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읽고 읽다 보면, 묵상하고 연구하다보면 누구나가 성경의 진리와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오늘 말씀을, 성경의 본문을 내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적용입니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적용해서 내 삶과 인품이 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박사면 뭐합니까? 인품이 변해야지요. 생활이 변해야지요. 성경의 말씀을 내가 전적으로 믿는다면 오늘 내가 내 집에서, 내 직장에서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묻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날마다 상고했다는 말은 단순하게 연구했다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맞는다면 구체적으로 말씀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신사적이란 단순히 젊잖다는, 지적(知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믿는대로 행하며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무슨 생각하십니까? 말씀을 - 듣고 - 깨닫고 - 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11절에 비교급을 사용했지요?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 이라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아주 못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도의 결과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믿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좇아와서 소동을 하자 신도들은 다시 바울을 아덴으로 보냅니다. 핍박도 끊임이 없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쉬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타고난 성품도 좋았고 열린 마음이어서 어떤 말씀이든 그대로 받앗고 열등의식으로 비비꼬지 않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집중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날마다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이 아닙니다. 날마다입니다. 들은 말씀과 성경을 대조해가며 어떻게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그대로 살것인가를 매일같이 생각하며 행했다는 것입니다.
춘천중앙의 교우들이 베뢰아 성도처럼 신사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신사적인 성도이다" 열린마음 /집중해서 /날마다 연구하며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행 17장 10~15절 / 신성종목사
마음의 문이 열리면 개인은 물론 온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믿습니까?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이 열려서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을 수 있기를 먼저 축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 전도했지만 적의에 가득 찬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더 오래도록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쪽으로 50마일 떨어진 베뢰아로 전도지를 옮겼습니다. 다행히 베뢰아 사람들의 마음의 문이 열려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들었고,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데살로니가 다음 선교지인 베뢰아에서의 선교의 결과를 보면서 우리의 가정에도 베뢰아에서의 사람들처럼 마음의 문이 열려서 그들이 받았던 그런 복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1. 바울이 베뢰아로 간 이유는?
10절에 보면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서 밤에 베뢰아로 도망을 갔습니다. 바울을 우리는 비겁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베뢰아로 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는 대로 선교도 해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전도의 열심을 가진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위성만을 가지고 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끝까지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를 고집했다면 그는 거기서 죽었을 것입니다. 큰 열매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베뢰아로 전도 지를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는 대로 전도방법이나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망원경식 성경 연구]란 책을 가지고 세계적으로 말씀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그것이 큰 역사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비용도 별로 들이지 않고, 그러나 큰 효과를 거두고 있는 이 방법은 21세기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선교 방법입니다. 중국에서 이 선교 방법이 큰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번에 러시아와 페루에서도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께서 문을 열어주는 대로 그의 선교지를 옮겼다는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시는 대로] 가정을 이끌어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Fatherless America]라는 책이 미국의 교육계에서 많이 읽혀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가정의 사 분의 일이 무너지고 있고, 나머지 가정도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왜 가정이 무너지고 있습니까? 돈이 인도하는 대로 가정이 가고 있고, 쾌락이 인도하는 대로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고, 각자의 생각대로 가정이 흩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가정이 다 같이 한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아주 드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가정의 회복입니다. 지금 우리는 가정회복의 운동을 벌여야 우리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가정은 한 마디로 말해서 행복을 맛보는 시음장이요, 행복을 만들어내는 공장이요, 행복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상실한 우리들에게 대용으로 주신 이 땅의 천국이 바로 가정입니다. 또 가정은 가장 작은 교회입니다.
미래학자인 토플러는 [미래의 충격]이란 책에서 이 정보화 시대에는 많은 가정이 붕괴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의 작전 중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가정의 파괴 작전입니다. 결혼에는 누구에게나 사춘기가 아닌 [사추기]라는 위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빈 둥지의 허무]를 느끼는 40대 후반에 가장 많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자녀들을 키워놓고, 남편은 직장에 빼앗기고, 여자 혼자서 느끼는 이 [사추기]는 이혼의 위기입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회당에 있는 [메노라]의 촛대처럼 가운데 촛대가 가장 자리에 있는 촛대와 서로 연결되어 기름을 공급해줄 때 불은 계속해서 꺼지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남편의 제사장적 사명이 없이는 가정은 불이 꺼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항상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가정은 3 단계를 통해서 진행됩니다.
(1) 밀월단계, (2) 현실단계, (3) 수용단계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정들은 어떤 단계에 있습니까? 10대의 부부는 [꿈속에서] 그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20대는 서로가 [신이 나서] 살고 있고, 30대는 서로가 이혼하고 싶어도 [자식 때문에] 참으면서 살고 있고, 40대에는 서로가 [체념하며] 살고 있고, 50대는 서로가 가엽고 [불쌍해서] 살고 있고, 60대는 [서로가 필요해서] 살고 있고, 70대에는 그 동안 해준 것이 [고마워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어떤 단계에 있든지 중요한 것은 성령의 등이 꺼지지 않고 있으면 그 가정은 계속해서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그러면 베뢰아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의 문이 열렸는가?
이 비결은 우리 가정에 축복의 문이 열리는 비결과 교회의 축복의 비결을 말씀해줍니다.
(1) “더 신사적이어서“
베뢰아 사람들은 성품이 더 종교에 관심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의 문이 열리려면 우리 가정들이 더욱 종교적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요즈음 많이 언급되는 아이큐(IQ)나 이큐(EQ)만으로는 안됩니다. SQ, 즉 Spiritual Quality가 없이는 인간의 본질적인 만족을 누리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영성의 개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영성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를 축원합니다.
(2)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즉 베뢰아 사람들은 [수용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용성이 없이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아무리 주셔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수용성이 있는 분들은 다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이 닫혀있는 분들은 불행하게도 은혜를 받지 못하고 그냥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 밭입니다. 길가 밭이냐, 돌밭이냐, 가시밭이냐, 아니면 옥토냐에 따라 열매의 결과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길가 밭처럼 많은 사람들의 발이 우리의 마음을 짓밟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돌밭처럼 흙이 얇아서 금방 말라 버리지도 않기를 바랍니다. 가시밭처럼 받아는 들이는데 금방 가시에 찔려 상처받고, 시들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도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이 될 수 있습니까? 가시밭은 성령의 불로 태워버려야 하고, 돌밭은 성령의 다이나마이트로 폭발시켜 갈아버려야 하고, 길가 밭은 성령의 쟁기로 갈아야 합니다. 그러면 막혔던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3) “이것이 그런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즉 베뢰아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에 따라 얻는 것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돈 벌기도 어렵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사업이란 그래도 눈에 보이기 때문에 자기가 서있는 위치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추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진리의 추구는 경쟁자가 많지 않습니다. 의학이나 공학이나 기술처럼 이해관계가 되는 것은 경쟁이 심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리 추구는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쟁의 대상이 있다면 나 자신과의 경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면 세상에서 승리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타인과의 경쟁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난 후부터 40년이 넘도록 성경을 상고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부분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제 생전에 성경의 모든 진리를 다 터득하지는 못하지만 이미 터득한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쁩니다. 물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은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의 음성을 듣게 되고, 지혜와 능력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을 여러분들과도 함께 소유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마음 밭이 열려졌을 때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12절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마음 밭이 열리면 말씀의 비료로 인해서 믿음이 성장합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그냥 주시지만 그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은 말씀의 비료입니다. 그 후에는 열매가 맺혀집니다. 성령의 열매 중에 첫 번째가 믿음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열매가 많이 맺혀지기를 축원합니다.
계시록 3: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주님과의 가까운 친교의 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예화) 홀만 홀트의 그림 /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주님)
그러나 13절에 보면 원수들의 연합전선을 볼 수 있습니다. 적들은 서로 싸우면서도 서로 연합전선을 핍니다. 먼저 주의 종들을 괴롭히고, 핍박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 때에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원수이면서도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서로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명자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특히 저같이 선교를 자주 가는 사람들은 항상 생명의 위험이 따릅니다.
(예) 저는 몇 년 전에 패루에 선교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저의 집사람이 신경이 너무 예민해서 걱정이 되어 말씀을 성도들에게 미리 못 드렸습니다만 페루는 대단히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제가 가기 전 날에 우리 한국 선교사 한 분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6사람의 테러단에게 잡혀서 가지고 간 모든 것은 다 빼앗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페루에서는 아주 예사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제가 페루에 도착해서 차를 타고 가는데 저를 초청한 양 선교사가 네 거리의 붉은 불에도 그냥 정지하지 않고, 그냥 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여기는 밤에 네거리 붉은 신호에 함부로 섰다가 30여명의 아이들 떼를 만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제가 묵고 있었던 집의 바로 앞에 강도가 와서 주인과 싸우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작은 구멍가게인데 권총을 가지고 들어가서 난동을 부린 것입니다. 경찰은 있어도 구경만했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페루는 후지모리가 물러간 후에 완전히 질서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사명자들을 돌보아줍니까?
교회들이 분란이 일어나는 것은 사탄과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게 제일 걱정되는 것은 교회 안에 기도의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의 성막을 보면 24시간 촛대에 불이 절대로 꺼지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불은 꺼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금요일이 되면 안타까울 정도로 괴로워집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하니까 모두들 구경만 하고, 기도를 더 안 합니다. 이제 우리들은 사명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화요일에 모이는 중보의 기도 팀이 있지만 점점 형식화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제 바라기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믿음이 성장하고 놀라운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기도의 문이 열리고, 선교의 문도 열리고, 사업의 문도 열리고, 행복의 문도 활짝 열립니다.
(예 화) 저는 왜 잉카문화의 꽃을 피웠던 2500만의 인구를 가졌던 잉카 제국이 왜 한 시간 만에 망하였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쿠스코에 가서 여러 권의 책을 읽고 살펴보면서 그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한 나라의 멸망은 물론 교회의 성쇠에도 꼭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잉카 제국의 멸망은 첫째로 문자가 없음으로 인해서 역사의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내적 분열로 인해서 힘이 약화되었기 때문이고, 셋째는 인티(지금은 솔이 돈의 단위)같은 우상숭배와 종교적 도덕적 부패로 인해서 망했던 것입니다.
제가 설교 때 많은 철학과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수몰 비즈니스를 해도 역사의식이 없으면 망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국은 제2의 경제적 후퇴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의식이 전혀 없이 싸우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역사의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흩어져 없어지고 맙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가 베뢰아 사람들처럼 마음의 문이 열려서 하나님의 귀한 축복을 한없이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 위에선 신앙
피종진목사 / 행 17:11~14
본문 11절을 보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의 말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바울이 한 말이 사실인지를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즉 복음을 잘 수용하고 그것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신사, 즉 귀족들로 여기십니다. 우리는 신앙의 근거를 철저히 성경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할 때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유혹과 환난이 올 때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는 성도는 세상의 유혹과 환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며,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선 신앙은
첫째, 산 신앙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2) 살아 있고 힘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개며,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감정까지 알아내며 감동을 줍니다. 말씀이 있는 성도는 절대로 신앙이 퇴보되지 않습니다. 힘들어 넘어질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힘과 소망을 주고 붙잡아 일으켜주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5장 20절을 보면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산 것은 움직이고, 성장하며, 열매를 맺습니다. 산 신앙에는 반드시 아름다운 복음의 열매가 맺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2장 14절을 보면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사는 성도는 악한 자와 싸워 반드시 이기게 됩니다.
우리가 산 신앙인으로 살아가려면 매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혹시 믿다가 낙심한 분이 계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믿음을 일으켜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합니다. 복잡한 일이 생겼을 때 자기 혼자 생각하고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읽다가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을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을 바로 갈 수 있도록 비추어주는 등이고, 목적지를 바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길입니다. 실패와 좌절, 근심과 걱정, 아픔과 슬픔, 괴로움과 고통, 고난과 역경 등 어둠의 요소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행하는 자가 되려면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8절을 보면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시험이 올 때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요한일서 2장 17절을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하나님의 보장을 받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축복과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①영생의 축복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성경을 상고하며 사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②기쁨과 즐거움의 축복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렘 15:16)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영혼 깊숙이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반드시 영혼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③모든 질병에서 치유를 받는 축복입니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예수님은 말씀으로 병든 자, 귀신들린 자, 고통 중에 처한 자들을 치료해주셨습니다.
④생활의 축복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28:2)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가정과 건강, 대인관계, 생업,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시는 생활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신 28:3~6).
사랑하는 여러분! 항상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산 신앙이 이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행하며, 하나님의 축복과 승리의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상고함
행 17장 11절 / 임진남목사(예본교회)
하나님은 자신이 살아계시고 계속해서 그 창조세계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것을 모든 피조물들 속에 두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사망의 정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변명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올바로 이끌림 받기 위해 보다 더 나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의 길로 인도 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백성들이 이리저리 방황하거나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그들 주위에 안전한 울타리를 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은 곧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음성입니다. 성령께서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성부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가르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릇된 신앙의 형태를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 살펴보면 먼저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의 전통이나 유전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구약의 율법을 통해 가르쳐 주셨지만 유대인들은 그릇된 성경의 해석과 적용으로 구약의 종교를 그들 자신들의 행복과 복락을 위한 것으로 전락 시켜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자기들의 행복과 번영을 위한 것으로 여겼고, 백성들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유대교는 이런 인간중심적인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구약의 큰 정신과 사상을 변질 시켜버렸고, 도리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그 열심이 실상은 하나님을 가장 대적해 버린 집단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고 하면서 어느새 인간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부와 명예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전통을 자랑하며 교회의 직분을 소유한 것에 명예를 갖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행위를 드러냅니다. 사람이 보는 앞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행합니다. 입술과 행위가 다르게 위선적으로 살아갑니다. 결국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는 결과를 낳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다른 방식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에 중에 가장 위험한 부류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기가 깨닫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 듯 보면 신앙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자기 신앙이 이미 정립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하는 방식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성경책을 폈는데 그 날의 내용이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딱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날 실천해보려고 노력도 합니다. 이렇게 한 결과를 놓고서 그것이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말씀하신 음성이라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고, 하나님과 교제했으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좀 더 기도를 남들보다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맞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에 걸맞게 운영해 나간다고 하는 보다 큰 틀속에서 성립되는 것이지 그렇게 매순간마다의 상황속에서 변하는 주관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헌법의 원리에 비추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헌법은 한 나라의 국법이요 국가의 질서와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보통 헌법이라고 말할 때에는 큰 골격을 말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의 원칙하에서 제정된 산하기관의 여러 가지 법들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례로 헌법에 국민의 4대의무가 있다면 이것과 관련한 법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납세의무면 이것과 관련한 법들이 있습니다. 지방세법도 있고, 주민세법도 있고, 갑근세법도 있고 교육세법도 있습니다. 이런식으로 사회전반적인 모든 산하에 법들이 제정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통틀어 헌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한 사람의 국민이 대한민국에서 살게 된다면 그는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권리를 누리고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때로는 교육을 받는가 하면 군에도 가고 장사도하고 결혼도 하고 , 집도 짓고 자동차도 사고 여행도 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과정 전체속에서 항상 큰 원리와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헌법의 정신을 지키고 그 원리에 맞추어서 살아가단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나라의 헌법을 지키고 준수하며 보호와 혜택을 받고 자기가 그 나라의 국민인 사실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게 될 때에 그는 어느 때에 무엇을 하든지 어떠한 나이에 있든지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간에 항상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생각하고 또한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국가가 나아가고 있는 전체적인 국가의 방향에 맞추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공장을 설립하여 공장을 운영하려고 하면 거기에 필요한 모든 법 절차를 따라 설립하고 운영하면 됩니다. 이 때 업무를 보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면 도로교통법을 준수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원자재를 사기 위해서는 상거래법을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가체제와 관계를 맺는 것이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의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어느 날 헌법책을 펴고 읽었는데 그 부분이 근로기준법에 대한 내용이라고 해서 아! 오늘은 내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날이구나!!! 이렇게 하면 내가 국가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여 근로기준법을 지킨다면 이 사람은 국가를 이루는 한 구성원으로 잘못된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에게 주신 말씀도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성경계시전체를 통해서 그 한 말씀 한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성경책을 폈는데, 부모를 거역하는 자녀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정말 죽여야 하는 것입니까?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고 해서 독을 마셔도 된다는 말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 뱅이를 명하여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읽고 감동이 되었다고 병원에가서 병든 자들을 향해 주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하면 되는 일인지요? 성경을 읽어가는 도중 감동이 된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서는 안됩니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답게 존재해 나감에 있어서 교회가 교회답게 나타나는데 이바지하게끔 해주는 성경의 깨달음이라는데서 비로소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상관없는 자기 독선적인 하나님의 임재방식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항상 전체로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한 부분을 통해 깨닫는 지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항상 전체라고 하는 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고 할 때 바로 이러한 방식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치든지 안 펼치든지를 떠나서 항상 말씀하십니다. 국가의 헌법이 우리의 삶 전반에 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듯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법에 전반에 걸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설교자가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회중들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게 귀에다 대고 직접 자기 음성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 말씀에 순복하며 감사함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성경 전체와 관련하여 가르치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상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경을 버리고 성령의 계시를 좇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기존의 모든 신학이나 교리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에 장애가 된다며 오히려 하나님이 초대 교회에 성령으로 나타났다면 지금 이 세대에도 역사하실 것이라는 논리로 성령의 음성 듣고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령은 성경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며 만약 성령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인 성경에 예속된다면 하나님이신 성령의 능력이 제한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치욕거리가 된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원 자자이신 성령께서 자기자신을 동시에 다르게 변하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속에 나타난 성령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로 인도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성경에 자기자신을 계시해 놓으신 그대로 언제나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쉽게 말한다면 성령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시면서 그 분이 어떤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16:13을 보시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말하지 않고 말씀으로 전해 받은 것을 성령께서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내주하신 성령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종류의 교리를 조작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미 안정된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게 만드는 그런 분이 아니시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로 기록된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우리 마음속에서 인처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장래일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신 부분을 잘못 이해하여 우리에게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일이 성령을 통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잘못된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상에서 두 제자의 마음을 열어주셨는데 이는 그들이 성경을 던져 버리고 자기들 스스로 뭔가 새로운 영에 의해 지혜로워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고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바르게 알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바울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명령하면서도 말씀이 없는 허탄한 생각에 빠지도록 성도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언이 멸시당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그 순간 성령의 빛이 소멸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안에 거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동일한 성령이시며 그의 말씀을 통해 성도들을 독려하시고 날마다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잘못된 신앙의 형태는 바로 초대교회시대 뿐만 아니라 기독교 2000년 동안 지금까지 교회안에 나타나고 있는 이단인 영지주의 입니다.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마이클 호튼은 “미국제 영성에 속지 말라”라는 그의 책을 통해 오늘날 이 땅위에 있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유는 인간에 대한 낙관과 성공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 갖가지 영적인 체험을 인정하는 방법론이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가는 오직 성경이라는 사상과는 아주 거리가 먼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오직 성경이 아니라 오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수단을 무시한 채 자기만족을 위한 정서가 만연해지고 있습니다. 자기소견에 좋을 대로 자신의 힘과 경험을 의지해 하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마치 사사시대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소견대로 죄악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학자의 말처럼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휩쓸고 있고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경향이 바로 이러한 자기방식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영지주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면 더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다서를 보면 자기방식대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가인의 길로 행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다시말해 가인이 드렸던 믿음과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자기방식의 예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또한 불의의 삯을 위해 발람의 길로 행하며 탐욕 품고 있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와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 는 고라의 패역을 좇습니다. 결국 이러한 자기방식의 신앙은 짐승과 같은 본성을 가지고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발람-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는데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돈에 이미 마음을 두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 거짓 선지자들은 이렇게 우리의 신앙을 좀먹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모른다면 여러분의 목사님에게 물어보라.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다.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는가?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지 못한 오류에서 사람의 전통과 유전을 지키는 신앙으로 변질 된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나름대로 신앙생활 한다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지식의 결여와 전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성령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잘못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록한 성경을 무시하고 새로운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방식과 자기소견대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드는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교회를 바르게 섬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이루는 다른 형제들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무례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텅빈 수례바퀴처럼 말만 요란하고 순종하는 모습은 없어지게 됩니다.
또한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자기공덕을 자랑하는 행위자가 됩니다. 결국 죄악을 도구로 삼고 하나님과 다시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당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베뢰아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행17:11절에 나타나고 있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을 상고하고 “이것이 그러한가?”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듣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이러한가 항상 상고 하며 그 말씀이 하나님께서 성경전체를 통해 계시하시는 말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항상 생각하고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설교자를 통해 은혜의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는 성경을 단지 읽는 다고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읽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단지 성경을 읽는다면 이러한 모습처럼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에 의해 그리고 계속적으로 이어져온 믿음의 선진들의 성경해석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해석을 기초로 하여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나 여러분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야 하는데 그 참된 뜻을 알기 위해 먼저 부름을 받은 목회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고 증거하지 않으면 성도들이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깨달음 없이 자의 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상고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받는 사람들
행 17장 11~12절 / 김남준목사(열린교회)
Ⅰ. 본문해설
사도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때의 일이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하였지만 성령은 그들의 선교를 마게도냐에서 이루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빌립보로부터 내려와서 데살로니가로 이르렀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매우 포악한 성격의 핍박자였기에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라는 곳으로 옮겼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달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커다란 열매를 맺었다.
Ⅱ. 말씀을 받은 결과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은 결과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에는 베뢰아에 사는 유대인이 많았고 또 그곳에 사는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믿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면 그들의 태도가 어떠하였기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였는가?
Ⅲ. 말씀을 받은 베뢰아 사람들
A. 너그러운 사람들
첫째는 그들은 너그러운 사람들이었다. 이전 한글개역 성경에는 ‘신사적’이라고 표현하였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표현이 ‘좋다’라는 말과 ‘태생의, 천생의’라는 말이 결합한 단어로 나타난다. 베뢰아 사람들은 좋은 태생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좋은 태생의 사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로마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로마인은 인간이란 원래 선한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란 원래 인간의 선한 본성이 충족한 사람이며 최대한 공정하게 다른 사람의 의견을 편견 없이 판단하는 이성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가장 첫 번째 비결은 신사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라고 자신의 이성을 사용해서 생각을 하며 받아들이고,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은 믿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너그러운 태도이다.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이해를 통해서 온다. 그렇기에 산란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에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집중된 올바른 태도를 갖아야 한다.
B. 말씀 받는 사람들
둘째는 그들은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말씀 받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내 자신을 붙들고 있는 상태가 말씀을 받은 상태이고 말씀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정확한 지식과 지식에 대한 이해, 거룩한 감동이 합쳐져서 우리 마음이 붙들린 상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다. 그때에야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 명료해지고 그 길로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솟구친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서 정동을 일으켜서 계속 일어나도록 우리는 매일매일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은 성령님이 하신다. 그러나 성령님 혼자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태도를 사용해서 일하신다. 그래서 한순간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릴 수 없다는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C. 상고하는 사람들
셋째는 그들은 상고하는 사람들이었다. 들은 바 설교를 듣고 마음으로 만족한 게 아니라 이것을 성경에 비추어 보고 더 상세히 알고자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설교는 듣고 나서 설교자의 독창성에 박수를 치고 싶은 설교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고 성경을 다시 자세히 살펴 보고 싶게 만들어준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 앞에서 자기가 너무나 부족하기에 하나님을 굳게 의지해야겠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설교가 좋은 설교이다.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주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사람들인가? 예배에서 은혜를 받으면 일주일 동안 성경을 더 가까이함으로 새로운 의미를 깨닫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예배를 통해서 일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친숙해지는 일이 없이는 여러분의 일생이 견고해지지 못함을 기억하라.
Ⅳ. 결론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죽음은 절망이다. 어떠한 인생의 위기를 만나더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시련의 때일수록 출렁거리며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여야 한다. 그때 그 말씀이 우리를 그 구덩이에서 이끌어내는 밧줄이 된다. 우리에게도, 세상에도 희망이 없다. 우리의 참된 희망은 말씀하시는 신실한 하나님께 있다.
베뢰아 사람들
박재신목사 / 행 17:11-14
우리에게 탐험가로 알려진 리빙스톤의 주의 복음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바쳐 선교했던 선교사입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몸은 그가 태어난 영국에 장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그가 사랑했던 아프리카에 묻혔습니다. 원주민들은 아주 조그마한 아프리카 부락의 키 큰 나무의 아래쪽에 구멍을 뚫고 그들이 사랑하였고 존경했던 사람의 심장을 안치시켰습니다.
만약 당신의 심장이 일생동안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곳에 장사된다면, 거기는 어디라고 생각됩니까?
당신의 지갑 속이요? 아니면 직장 사무실의 적당한 자리 아래입니까?
지금 이 시간 당신의 심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배는 주님께 심장을 바치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치지 않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마음을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잘 살펴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의 극심한 방해와 핍박으로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베뢰아로 옮긴 후 베뢰아서 만난 베뢰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베뢰아 사람들....” 이라고 정했습니다.
베뢰아는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볼 때 그다지 중요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뢰아의 사람들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사적인 사람들
본문에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베뢰아 사람들을 “신사적인 사람들”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누가의 눈에 신사적으로 비쳐졌을까요? 신사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유게네스” 는 고상한 인품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국어 사전에는 “몸가짐이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교양이 있고 인격적이며 흠이 없이 깨긋하고 부지런하며 근면한 사람을 흔히 일컬을 때에 붙이는 명칭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말하는 신사적이란 의미는 그런 윤리적인 측면에서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성경이 말하는 신사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의 믿음에서 세 가지의 특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용성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까 사람들보다 수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선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도망치다시피한 바울과 실라를 따듯하게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드렸습니다.
바울이 베뢰아 사람들에게 전한 메시지도 틀림없이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것과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십자가에의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오래동안 헬라의 철학과 다신론의 우상 숭배에 찌들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조상 대대로 믿어 온 자기들의 종교와 다르다고 들어 보지도 않고 거부감을 가지고 배타하지 않고 아주 정성을 다하여 마음을 열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 라고 했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가 아니라 수용적인 태도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라는 평가를 들은 것은 바로 사람과 말씀에 대한 수용성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을 잘 받아드린 그들을 하나님은 신사적인 믿음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수용적인 마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들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은 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항상 수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열린 마음, 그것이 바로 수용적인 태도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수용적인 사람은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압니다”
한 젊은이가 대중 연설과 웅변술을 배우려고 소크라테스를 찾아갔습니다.
그 젊은이는 이 위대한 철학자에게 자신이 소개되는 순간부터 유창하게 계속 이야기를 쏟아 내놓았습니다. 그 젊은이가 너무 오래 이야기하는 바람에 소크라테스는 한마디도 그에게 가르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손을 젊은이의 입으로 가져가 말을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여보게 젊은이! 자네에게는 수업료를 두 배로 받아야 할 것 같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불평을 했습니다.
"수업료가 두 배라구요? 대체 왜 그런 거죠?"
소크라테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답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일세, 자네를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려면 자네에게 두 가지 원리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네. 첫째는 혀를 자제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고 두 번째는 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기 때문일세."
잘 듣는 사람이 신사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귀와 한 입을 주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말하는 것의 두 배만큼 듣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성경 구절의 처음 두 가지 명령을 순종한다면 세 번째 명령은 자동적으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한다면 자연히 성내기는 더뎌질 것입니다.
연구에 의하면 듣는 방식에는 네 가지 기본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판단하며 듣는 사람"
- 이런 부류의 사람은 미리 자신의 마음을 정해 놓고 진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평적이고, 부정적이며 선입견에 사로잡혀있습니다. 17%의 인구가 이런 부류에 속합니다.
"질문하며 듣는 사람"
- 이런 부류의 사람은 경청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은 대화에서 중요하지만 곧 쓸모 없어집니다. 26%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조언을 하며 듣는 사람"
- 더 많은 수(35%)의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신속한 평가를 내릴 만큼 충분히 듣고 나면 상대방이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조언을 상대방과는 상관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접근해갈 때 생기는 문제점은 무슨 조언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느라 너무 바쁜 나머지 실제로는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당신은 상대방이 하는 말 전부를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감정이입을 하며 듣는 사람"
- 22%만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접근법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기분까지도 알아내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의 음색이나 얼굴 표정, 제스쳐와 같은 비언어적인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입니다.
이번 주에는 귀로만 듣지 마시고 눈으로 들으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뭔가 새로운 것을 얻게될 것입니다.
남의 말을 수용적일때 그 사람이 신사적이며 하나님의 말슴을 수용적일때 그 사람의 믿음이 자라고 은혜를 받게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쳐야 할 것 중에 한 가지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예식장에 갔을 때 예식에 참여하는 태도입니다. 주례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는 고사하고 자신이 축하하러 온 신랑신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습니다. 주례자가 주례를 하든 말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떠듭니다.
음식점에서 오찬을 하면서 회갑연 예배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의도 예절도 하나도 없습니다. 도무지 시끄러워서 설교를 못할 정도로 떠들어댑니다. 사회자가 주의를 주고 주례하는 사람이 축하하러왔으니 축하하는 의미에서 좀 조용할 것을 부탁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어디 가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신사는 남의 말을 경청해주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경박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남의 말을 많이 하고 자기 말만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경청하는 자세를 갖지 못합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신사적인 모습은 말씀에 대한 수용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입니다.
둘째는 간절성입니다.
“더욱 간절히” 번역된 헬라어 엑테네스테론(ἐκτεγἐστρογ) “열심히 또는 진심으로” 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들은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은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히 있는 믿음이 신사적인 믿음입니다.
갈 4:18절에 보면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 119:123절에서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눈이 피곤할정도로 사모하였다는 것은 눈이 피곤할 정도로 읽고 연구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렇게 사모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은 만족하게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시 107:9절에 보면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듣는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 간절성입니다.
셋째는 갈구성(渴求性)입니다.
갈구성이란 갈급성 즉 목마름 성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하여 목말랐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진리를 찾았습니다. 본문에서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하여 목마름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영적인 목마름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찾는데 마음이 열린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말을 경청했을 뿐 아니라 그들은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무조건 믿은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심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신사적인 믿음입니다.
마 5:6절에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주리고 라는 페이나오(peinao)는 '궁핍하다', '심한 굶주림으로 고통 당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목마름이라는 단어 디프사오(dipsao)는 '진짜 목마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구성 즉 목마름이 있는 것이 신사적인 믿음입니다.
저는 우리교우에게서 이런 특성이 발견되기를 기대합니다.
인격적으로 교양이 있고 흠이 없이 깨긋하고 부지런하며 근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이 세상 사람들보다 신사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영적인 면에서 신사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수용성을 가집시다. 그리고 간절성을 가집시다. 목마름을 느끼고 진리를 찾는 믿음이 되어 그 누구보다도 신사적인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장 11절 / 강성찬목사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의 말을 듣고, 돌아가서 그 설교가 과연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를 상고했습니다. 그 결과 적지 않은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습니다.
'상고하다'(아나크리노)는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는 등의 뜻을 내포합니다. 이는 종종 사법적 심문과 관계되어 사용되었으나 여기서는 베뢰아 사람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열심을 다해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고 살펴 그 본의를 다시금 잘 새겼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은 구약성경을 통하여 얻은 지식과 헬라의 철학사상, 그리고 그들의 생활체험 등을 바탕으로 바울의 설교를 깊이 비고 검토하여 복음을 진리로서 받아들였다고 봅니다.
성경주일을 지키며 성경을 상고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성경을 상고
베뢰아 사람들은 모든 준비된 마음과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하여 말씀을 받았음을 나타냅니다.
말씀은 준비된 마음 밭에 떨어졌을 때 좋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마 13:8)고 합니다.
똑같은 복음이고, 똑같은 설교였으나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거부했고,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베뢰아인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을 경청했고, 그 뜻을 곧 이해했습니다. 말씀 듣기를 매우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류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고, 사도들의 약점을 잡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말씀을 잘 받아들였고, 그것에 대한 공정한 해석을 했습니다. 복음에 대해 완고하지도 않았고, 편견을 갖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말씀을 받으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마음은 옥토였던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23)
말씀을 받고 순종함이 복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대학에 들어가면 차를 사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아들은 대학에 합격했고 아버지에게 차를 사 달라고 졸랐습니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키는 조건으로 아들에게 성경을 주면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 안에 차보다 더 좋은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화가 나서 대학 근처에서 하숙을 하는 동안 집엘 가질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고 불평을 하면서 대학 4년을 보냈습니다.
졸업을 할 때가 되어 하숙 생활을 마치고 짐을 싸는데 선반 위에 아버지께서 주신 성경책이 먼지에 쌓여 있었습니다. 아들은 먼지를 툴툴 털면서 무심코 그 성경책을 뒤적거리니 그 속에서 종이 쪽지 한 장이 떨어 졌습니다. 그 종이는 자동차를 사고도 남을 만한 액수의 수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수표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기한이 넘어 버렸습니다. 아들은 그제야 성경을 읽으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아들은 4년 동안 아버지를 미워했던 자신의 우둔함을 애석해 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신이 원하던 차가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아버지는 몇 년 동안 그 수표가 사용되지 않은 것을 알고 아들이 졸업하고 집에 돌아 왔을 때 놀랄만한 선물을 주려고 차를 사 놓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을 다시 나눴습니다.(못난 아들/멋진 아버지-디럭스바이블)
우리는 어떠합니까? 아버지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서 복은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불만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다시 한번 살피며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성경을 상고 하며 성경에 약속된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됩시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
베뢰아 인들은 바울이 성경에 근거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그 증거를 구약에서 찾았기 때문에, 그들도 성경에 의뢰하여 바울의 복음 설명이 진실한가, 꾸밈이 없는가,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진리의 표준이고, 기초입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베뢰아 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성경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철저히 성경에 의해 비판받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성경적인 신앙을 정립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때로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생명까지도 요구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국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합니다. 영혼의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 육체의 생명을 잃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철저히 따라야 합니다.
어떤 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책을 한 권 선물 받아 신이 나서 읽어보았지만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몇 장을 읽고 나서는 한쪽에 밀쳐놓고 말았습니다. 몇 달 후 그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 서재에 있는 어떤 책의 저자의 이름이 당신의 이름과 똑같답니다."'그 책 이름이 뭔데요?" 그가 물었습니다. 그녀가 대답해 주자 그가 말했습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요. 그 책은 바로 내가 썼으니까요." 다행히도 그는 그녀에게 그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질 않았습니다. 그녀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 책을 찾아내 먼지를 털어 내고 처음부터 끝까지 샅샅이 읽었습니다. 그 책은 그녀가 이때까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 되었습니다.(가장 재미있는 책- 예화뱅크)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면,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책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말씀의 내용에 대한 비췸을 줌으로써 우리는 더욱 더 그를 사랑하게 됩니다.
6·25전쟁 때 한 국군부대원들이 인민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그 중에는 로버트 헤이리라는 스물두살의 미국인 청년이 있었습니다. 포로들은 마을로 노역을 나갔다가 밭에서 연초를 뜯어와 담배를 만들어 피웠습니다. 그들은 종이를 구하지 못해 안달이었습니다. 포로들은 로버트의 성경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한 포로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성경을 요구했으나 로버트는 성경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로버트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한국인 병사에게 가족사진과 성경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국인 포로는 ‘로버트의 성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굶주린 늑대에게 고깃덩이를 내던지듯 성경을 내놓았습니다. 포로들은 그것을 담배 말이 종이로 쓰기 위해 나눠가졌습니다. 얼마 후, 미군의 반격으로 이번에는 인민군들이 포로가 됐습니다. 포로들은 모두 인민군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머니에 ‘찢긴 성경’을 지닌 포로들은 국군으로 인정받아 모두 살아났습니다.(성경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다.-임한창-인터넷 목회 정보)
찢긴 성경이 아니라 심비에 새겨진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며 영원한 생명의 복된 자리에 함께하는 모두가 됩시다.
믿는 사람이 많고
베뢰아 유대인 중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는 말씀의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롬 10:7). 완악한 마음에 믿음을 심어 주기 원한다면 모든 인간적인 노력보다도 바로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기에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어떤 성경 주석이나 설교도 일체 없이 오직 성경 한 권을 읽는 것만으로 원시인들이 구원을 받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선교사를 통하여 들을 수 있습니다.
미국 남부에서 있었던 일인데, 부부 두 세 사람이 함께 성경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아마추어 성경 공부입니다. 그런 단순한 공부였지만 그들은 기쁨을 발견하고 생활이 변하여서 나중에는 삼십 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수십 명의 선교사들이 배출되었고, 특히 치과 의사 부부가 한 달에 4만 불씩 벌던 직업을 버리고 몇 백 불의 월급을 받으면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성경을 가르치는 운동을 하러 다닙니다.
한 부인은 글을 읽을 수 없어서 하루에 오백 원의 품삯을 주며 성경을 읽어 줄 사람을 고용했는데, 읽어 주던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그 부인보다 더욱 신실하게 되었다고도 합니다.(성경의 운동력 -디럭스 바이블)
평생 성경 한번 일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성경을 일고 알 때 신앙은 더 빨리 자라는 줄 믿습니다.
성경이 늘 함께 해야 합니다
150여 년 전 웨일즈의 한 마을에서 어느 주일 아침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찰스라는 목사님이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암송구절을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한 명의 어린이도 암송하지 못하자 이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목사님은 항상 암송을 잘 해오던 메리에게 외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메리 역시 암송을 못하고 자기 자리에서 머뭇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이유를 묻자 죄송합니다. "목사님, 이번 주간은 날씨가 매우 나빴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 나빴었지. 하지만 날씨가 나쁜 것과 성경 암송을 못해 온 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목사님이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성경책을 갖고 있지 않거든요. 윗마을에 성경을 가지고 있는 집이 단 한 집 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항상 그 집에 가서 외워야 할 성구를 찾았었어요. 그런데 이번 주에는 매일 비가 왔기 때문에 엄마가 거기에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찰스 목사는 매우 놀라서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에서 집에 성경책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까." 어린이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웨일즈 말로 된 성경책은 드뭅니다. 또 있다 해도 매우 비쌉니다. 목사님" 학생 중에서 좀 나이가 많은 소년이 말했어요. 목사님은 무언가 생각에 잠기시더니 "난 여러분이 아무도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여러분 각자가 모두 성경 한 권씩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찰스 목사는 좋은 생각을 해냈습니다. “런던에 가서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 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웨일즈 말로 된 성경을 인쇄할 성서협회를 시작해야겠어." 이렇게 해서 찰스 목사와 그의 친구들은 영국과 외국 성서협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지금도 성경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많은 성경을 보내고 있습니다.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많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 남자들도 귀부인들과 함께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들도 상류 계급의 인사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부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남편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했을 것입니다(고전 7:16).
성경의 능력은 남녀의 구별을 뛰어 넘습니다.
윌리엄 4세가 죽는 날 밤 궁중에 있던 처녀가 이튿날 왕으로 간택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그녀는 64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영국의 번영은 이 빅토리아 여왕 때 성취한 것입니다. 영국기 아래 해가 지지 않던 때도 빅토리아 여왕 때였습니다. 일찍이 인류의 역사상 빅토리아 여왕만큼 위대한 왕도 드물 것입니다. 그녀는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즉시로 무릎을 꿇고 성경을 폈습니다. 잠시도 자신의 품에서 떠나지 않았던 성경을 놓고 '주여, 내가 여왕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치를 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해결했고 기도로 정치를 했습니다. 인도의 왕자 한 사람이 여왕께 "그렇게 정치를 잘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성경을 펴 들고 "바로 이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왕의 지혜-디럭스바이블)
말씀은 결코 어떤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접하기만 하면 모든 인간은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변화됩니다.
일본의 악명 높은 한 도박사가 세계를 누비며 도박으로 많은 돈을 벌었는데 태평양을 건너오며 자기 손을 바라보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이 손의 기술!'하면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갑판 위에서 한 소녀가 읽던 성경책을 펴보던 중 마태복음 5:30에 시선이 갔습니다. "네 오른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는 이 말씀에 감동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계속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을 쳐다봐도 "찍어버려라" 파도치는 바다를 보아도 "찍어 버려라" 밥을 먹는 시간에도 "찍어 버려라" 들려 오는 바람소리도 "찍어 버려라"하는 소리였습니다.
이러한 음성에 그는 일본 대판에 내리자마자 도끼를 구입하여 도끼로 자기 손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흐르는 피를 보고 신음하는 청년을 붙들어간 순경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목사님께 인도하였고 목사님은 악명 높은 도박사로 하여금 세계에서 유명한 전도사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성경의 위력-디럭스 바이블)
성경은 이렇게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주미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김명배란 이는 교회의 젊은 집사였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즉시 서울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을 끝냈습니다. 큰형은 의사로서 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돈도 잘 벌었고, 둘째형은 사업가로서 윤택한 생활을 했다. 또한 막내인 그는 외무부 공무원으로 해외 근무를 많이 했다. 장례식이 끝난 며칠 후 어머님이 남기고 가신 재산을 처리하자고 해서 삼 형제가 식구들과 함께 한 방에 모였습니다. 큰 형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머님이 남기신 재산은 공무원으로 제일 어린 막내가 책임지는 것이 어떠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막내가 나섰습니다. "형님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재산은 당연히 장자이신 큰 형님이 맡으시든지 아니면 사업가이신 둘째 형님이 맡으셔야지 어찌 막내가 그것을 맡습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라고 자기 의사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큰 형님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어머님이 평생에 보시던 성경책입니다." "야, 그것은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당연히 장자에게 와야지." 그러자 둘째형도 "반드시 장자에게만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니...." 하며 자기도 성경책을 마음에 두었노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형님이 재산을 맡으시고 성경책은 둘째인 저에게 주십시오"했습니다. 그때 막내인 그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두 형님들은 언제나 어머님이 묻혀 계신 고국 땅에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언제나 해외로 떠도는 몸이니 어머님을 모시고 다니듯 어머님의 성경을 가지고 다니며 읽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이처럼 성경은 후손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약속한 책인 것이다.(어머님이 보시던 성경책)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공을 상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믿는 역사가 나타나되 헬라의 귀부인들에게서도 믿음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경주일을 지키며 성경을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을 상고 하며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는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가 보여준 신앙생활의 7대 운동②말씀운동
행 17장 11~14절 / 피종진목사
우리가 많은 모임에 참여하지만 예수의 이름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은 한 시간, 아니 100일을 앉아 있어도 진정한 영의 평안과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누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의 기초요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모두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오늘은 초대교회가 보여준 신앙생활 중에 말씀운동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인들보다 더 복음을 편견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저들이 이렇게 하나님 말씀 운동을 전개하였을까요?
첫째,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절) 즉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기 위하여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간절'이란 말은 헬라어에 보면 '열망하여 사모한다, 심히 매우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말씀을 열망하면서 사모하였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심히 매우 좋아했습니다. 우리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좋아해야 합니다.
시편 119:131에 보면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으면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표현했을까요? 시편 119:40에도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이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할까요?
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을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②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68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받고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은 바로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은 읽는 자에게 복이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여기에서 '읽는 자'라는 말은 자기 자신이 읽는 것도 의미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읽어주는 자'를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사람은 분명히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을 뿐 아니라 이 성경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읽어주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생기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성경 말씀은 바로 천국 가는 길과 인간이 바로 사는 길,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귀한 줄 알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잘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열심히 읽어야 됩니다.
어떤 분은 말라기 성경만 읽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집사님은 항상 말라기만 읽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이왕 한 번 못읽을 것 구약 끝엣 거라도 한 번 읽고 말겠다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열심히 읽으면 그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체험해야 됩니다. 성경 말씀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만 특혜를 준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약속이고, 선물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자기의 것으로 되어질 때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 로마서 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을 읽다가 놀라운 삶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유럽의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모니카가 그를 위하여 10년 동안이나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가 로마서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는 말씀을 읽다가 뒤집어졌다고 합니다. 스펄젼은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읽다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그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 되어 우리에게 은혜와 복이 되어질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 속에서 인생의 삶의 의미를 깨닫고 내가 해야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지시를 받고, 그리고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야 됩니다. 이 세상의 어떤 베스트셀러라도 우리 인생의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 한 말씀 한 말씀 속에 하나님의 역사와 생명이 약동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늘 성경을 펴들고 있으면 하늘 나라가 열리고, 여러분 앞길에 복의 길이 열리며, 기쁨이 생수처럼 솟아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하신 많은 말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경에 약속된 이 모든 약속이 다 여러분의 것이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명한 스펄젼은 '성경을 애독하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준수하라. 하나님의 율법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사랑하라.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정말 성경을 애독하고, 성경을 준수하고, 성경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약속이 우리의 소유가 될 줄로 믿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가서 축복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찾아서 읽게 했습니다. 그래서 심방대원들은 열심히 성경을 찾아 읽으면서 '아멘, 아멘'하고 은혜를 받는데, 막상 은혜 받아야 될 주인 집사는 설교를 다 끝나갈 때까지도 뒤적거리다가 성경을 덮으면서 큰 소리로 '내 성경에는 이사야가 없네'라고 하더랍니다. 이런 집사처럼 되면 안되지요. 성경을 덮어두지 말고, 늘 펼쳐서 읽고 사랑하고 자랑하며 다른 사람에게 읽어주는 생활을 해보세요. 생각밖에 좋은 일이 생기고, 형통한 일이 생기게 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느 사회나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된 나라는 하나님의 보장이 있습니다.
셋째,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고 매일 매일 즐겨 읽었습니다. 여러분, 밥을 먹는데 하루에 한 달 분을 다 먹었다고 해서 한 달 동안 밥을 먹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했듯이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접해야 됩니다. 우리는 발길 하나 하나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호흡하는 순간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순종하는 생활이 이어져야 됩니다.
밥을 먹지 않아서 육신이 기갈된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된 것은 더 비참하고 더 괴롭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이 없는 기갈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는 먹을 양식과 물이 없어서 굶주리고 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온다고 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요, 악한 대적 사단을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엡 6:17). 그래서 우리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시 1:2). 오늘 여러분,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때 마음껏 읽으세요. 들을 수 있을 때 마음껏 들으세요. 이 말씀을 순종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순종하세요. 그래서 우리 하나님 말씀 안에 정말 초대교회처럼 새로운 말씀운동이 일어나야 됩니다.
넷째, 성경말씀을 열심히 증거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13절)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마가복음 16:15,16에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디모데후서 4:2에도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우주 공간에 인간이 잘 살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라디오와 TV, 인터넷, 위성 등 메스미디어를 통해서 다양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서 때로는 인간이 만든 모든 과학 기술을 동원시키기도 합니다. 로마가 전쟁을 하기 위해서 길을 넓게 잘 닦아 놓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도로를 통해서 복음을 신속하게 전하는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지구상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땅끝까지 전하는데 조금도 지체하거나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마음과 생명과 물질을 다 바쳐서 이 말씀운동을 오대양 육대주에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곳곳마다 확장되고, 죽어가는 저 영혼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생함을 얻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멸망 받을 영혼들이 구원받게 되고, 죄악으로 만신창이된 영혼들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며, 성경말씀을 열심히 증거함으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말씀운동을 일으키시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테네 사람들
행 17장 13~21절 / 김영규목사
베뢰아에서 아테네로
오늘은 바울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전도하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이 베뢰아에서 아테네로 가게 된 이유는 본문에 간략히 설명합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서 바울의 전도를 훼방했습니다. 바울은 부득이 베뢰아를 떠나 아테네로 향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13-15)
우상이 가득한 도시 아테네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우선 혼자 시내 구경을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문화 도시 아테네는 어떤 곳일까? 바울의 기대는 짧은 시간에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바울은 흥분하고 마침내 복음을 들고 곧장 변론에 나서게 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16-17)
아테네는 당대 최고의 문명 도시입니다. 로마 시대에도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 도시로 꼽혔습니다. 아테네의 역사는 주전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테네란 이름은 아테나(미네르바) 여신에게 바쳐진 도시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주전 478-431년경 정점에 이르렀다가, 주전 431-404년까지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쇠퇴하기 시작하고, 주전 338년에 마게도냐의 빌립에게 정복되고, 주전 146년에는 로마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戰禍를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바울 당시 아테네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자유도시로서 상당한 문화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아테네는 문학, 예술, 웅변, 철학, 건축 등의 모든 분야에서 당대 최고였습니다. 정치적인 민주주의의 요람이었고, 철학적으로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에피큐로스, 제노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이런 아테네 거리를 거닐면서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름다운 조각 작품들과 건축물들에 감격하고 감탄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찬란한 문명에 감명을 받기는커녕 바울은 오히려 그들의 모습에 격분했습니다. 본래 바울은 예수 믿기 전부터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제1계명과 제2계명이 몸에 밴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아테네 거리에 널려 있는 신전과 신상들을 보면서 흥분한 것은 당연합니다. 네로 시대에 아테네 광장에 서 있던 공중 우상이 300개였고, 기타 신상들은 3만 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페트로니우스는 아테네 거리에는 사람보다 신이 더 많다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아테네와 고린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귀신에 매여 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문명이 발전된 곳에 타락이 많은 것은 인간의 죄악성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바울이 본 아테네는 찬란한 문명 도시가 아니라, 영적으로 타락한 우상의 소굴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문명인인 아네테 사람들의 넘치는 우상숭배를 바라보면서 이런 판단을 내립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복음의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그는 두 장소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 회당이고, 둘째는 아고라 광장입니다. 유대인 회당에서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고라 광장에서는 헬라 시민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17절에 “변론했다”(dialevgomai)는 말은 “토론했다”(disputed, reasoned, argued, debated)는 뜻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베뢰아 사람들과 달리 복음을 순순히 듣지 않았습니다. 묻고 따지고 질문했습니다. 부득불 논쟁 형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철학자들과의 만남
아테네 전도에서 바울이 만난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 유명한 두 철학의 추종자들입니다. 바로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입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18) 이 두 철학 사상은 당대뿐만 아니라 현대 사상의 두 가지 큰 흐름을 보여줍니다.
첫째로, 에피쿠로스(BC 342-270) 철학입니다. 에피쿠로스는 사모스 출신의 철학자인데, 그의 사상을 따르는 자들을 에피쿠로스학파라고 합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기초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기초한 유물주의 사상입니다. 이들은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신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는 것, 즉 신의 섭리도 부정합니다. 영혼 불멸도 믿지 않습니다. 영혼도 단지 물질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는 현세적인 삶의 쾌락입니다. 쾌락이야말로 지상의 선입니다. 물론 에피쿠로스가 처음부터 말초적인 쾌락을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그가 가르친 쾌락은 육체적 욕망을 채우는 쾌락이 아니라, 이성적 즐거움입니다. 즉, 정신적으로 모든 고통, 욕정, 죽음의 공포, 미신적 공포를 극복한 마음의 안정(αταραξι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이성적 쾌락이나 육체적 쾌락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감각적 쾌락주의로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행복 지상주의는 바로 에피쿠로스적인 면이 많습니다. 영혼 문제에 관심이 없습니다. 현세적인 안락함과 만족이 삶의 전부입니다. 현세적 지위, 현세적 재물, 현세적 명예, 현세적 성공, 현세적 기쁨이 삶의 목표입니다. 이들에게 천국 얘기 해 봐야 관심도 없습니다. 영혼 얘기 해 봐야 씨도 먹히지 않습니다. 오직 관심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영혼이 중심입니다. 현세보다 천국이 지상 목표입니다. 장차 다가 올 천국을 위해 세상에서의 고난을 기꺼이 당합니다. 육체적으로 곤고해도 영혼의 기쁨으로 견딥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쾌락주의는 복음의 적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현세 축복주의로 흐르는 것은 분명히 잘못 된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 기독교는 에피쿠로스의 제자들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자신을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스토아 철학입니다. 스토아 철학의 시조는 키프로스 출신의 제노(BC 340-265)입니다. 스토아란 말은 아테네 아고라 서편의 장식 회랑(스토아)에서 제노가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자연을 따라 살라는 것이 모토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자연이란 바로 인간의 내재하는 이성(로고스)을 의미하며, 이성에 의해 완전한 자기 통제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들은 범신론적 神觀을 갖고 있었으며, 신은 우주의 영(WORLD SOUL)이라 했습니다. 이들은 국경이나 계급, 신분을 초월하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자유정신의 세계 국가(COSMOPOLICE : WORLD STATE)를 기대했습니다. 이들은 도덕적 열의와 높은 책임감을 가진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점에 있어서 그들은 에피쿠로스 추종자들과는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설명하는 한 시인의 구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번역하면,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首長” 정도의 말입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자기가 주장하고 통제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연법에 의존하는 인간 이성주의, 지성주의, 도덕주의가 바로 스토아 철학입니다.
스토아 철학이 비록 도덕과 책임을 내세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에피쿠로스 사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인간 자신이 삶의 통제자요 주관자가 된다는 점에 있어서 동일합니다. 성경의 사상이 뭡니까? 우주의 중심에 인간이 있지 않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인간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닙니다. 주관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은 피조물일 뿐입니다. 인간의 위치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왜 세속주의로 흘러갑니까?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잘못 되어 가는 겁니다. 오늘날 예수쟁이들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내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면 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을 도우미 삼아 고난을 비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을 잘 움직이는 신자가 믿음이 큰 것으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믿음이 큽니까? 내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는 사람이 믿음이 큽니까? 내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살도록 놔두시나요? 지금 주님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주님을 조종하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헬라철학의 중심은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우리 신앙과 정 반대의 사상입니다. 우리는 교만한 인본주의와 싸워야 됩니다.
철학자들의 반응
철학자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보세요. 이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 전하기 때문이러라.”(18)
첫째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바울을 “말쟁이”라고 합니다. “말쟁이”란 말은 헬라어로 “spermolovgo"”(아페르몰로고스)인데, “씨를 쪼는 자”, 즉 참새처럼 이말 저말 주워듣고 지껄이는 사람을 가리켜 얕잡아 하는 말입니다. 아테네 철학자들은 바울을 시장 바닥에서 떠드는 개똥철학자 쯤으로 생각했습니다.
둘째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 전하기 때문이러라.”(18) 아테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신을 전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들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할 때에 어떤 신화를 얘기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예수 이름을 전할 때에 헬라인들이 그들의 신을 전하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합니다. 즉, “예수”라는 명칭이 헬라어의 “이아시스”(healing)란 의미로 이해했고, “예소”(이오닉 식으로 건강의 여신을 가리키는 말)라는 말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하니까 신통한 치유의 신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든지 철학자들은 바울의 말을 깊이 듣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단지 사이비 철학 정도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데리고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갔습니다. 아레오바고(to;n #Areion Pavgon)라는 말은 아레스(마르스)의 언덕이란 뜻입니다. 아테네 시내에서 보면 아고라 북편, 아크로폴리스 서편에 있는 바위 언덕입니다. 아고라에서 올라가는 16계단이 있고, 위는 평평한 마당입니다. 헬라 전설에 의하면 마르스가 그의 아들 넾튠의 살인자를 재판한 곳이라 합니다. 이 장소는 주로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헬라 사람들은 재판을 어디서 하든지 아레오바고 법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장소에 바울을 끌어다 세운 것은 일종의 모욕입니다. 재판하는 장소에서 다른 신을 전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에서 다른 종교를 전하는 것은 금지 사항이었습니다. 프로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소크라테스 등이 이런 사유로 아레오바고 법정에 세워진 역사가 있습니다. 물론 로마 시대에 바울이 아레오바고에 선 것은 재판 법정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장소에 바울을 세운 것은 다분히 조롱이 섞인 대접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원한 것은 무엇인가?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17:19-21) 뭔가 가장 새로운 것을 보여 달라! 무슨 새로운 소식은 없는가? 무엇이 가장 새로운 사상인가? 무엇이 가장 새로운 패션인가? 무엇이 가장 새로운 종교인가? 무엇이 가장 새로운 작품인가? 새로운 것을 찾는 인생들이 바로 아테네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세계 최고의 도시들이 추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최신 유행의 사상, 최신 유행의 패션, 최신 유행의 예술, 최신 유행의 정치, 최신 유행의 학문!
새로운 것을 찾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주 간단한 해답을 주십니다.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1:9-10) 모든 상품 선전들을 보세요. “뉴” “네오” “新” “새” 등등의 접두사가 붙어 있지만 출시 순간에 이미 새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새롭다는 의미에서 붙인 모든 新사상은 이미 다 한 물 간 낡은 사상이 되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뜻이 뭡니까? 해 아래라는 말은 곧 하나님 없는 지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 세상! 하나님 없는 세상에 새것은 없다! 그렇다면 새것은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히 새로우신 분입니다. 인생에 새로운 게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거듭난 인생이 새롭습니다. 주심을 모신 영혼이 새롭습니다. 주님을 모신 삶이 새롭습니다. 생명이 새롭습니다. 감정이 새롭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지식이 새롭습니다. 새로운 사랑, 새로운 정의, 새로운 기쁨, 새로운 소망!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이 인생은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새것을 찾지 마세요. 오늘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 가지가 다 새로워지는 영적 체험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