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직원 24시
얼마 전 집으로 두툼하고 묵직한 소포가 배달되어 왔다.
짐을 풀어 보니 “한국 종합농협 50년사” 라는 책 두 권이었다. 순간 평생 내 직장 이었던 농업협동조합을 회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직업의 종류는 1만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 많은 직업 가운데 내가 농협 직원으로 30년의 세월을 보낸 아득히 먼 추억이 떠 오르는 것 이었다. 30대에서 50대까지 내 인생의 황금기를 함께 보내며 애환의 추억이 서린 직장 이었다.
돌이켜 보니 반 세기전 일이었다. 나는 농협 중앙회장의 사령장을 들고 충청남도 모 군 농업협동조합을 찾아 갔다. 학교를 나와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며 맞은 직장 이었기에 가슴 벅차고 기대가 컸었다. 가정과 학교가 생활공간의 전부이었던 내게 직장의 사무실 분위기는 낫설고 신기하며 인상적 이었다. 책상과 자리가 배치되고 담당업무가 주어지며 농협직원 30년의 길이 시작되었다. 직장생활이 익숙해지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농협 직원에게는 사무실 안에서 하는 일과 사무실 밖에서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 내가 하는 일은 다른 은행에서도 하는 은행 업무였다.
농협 직원이기에 내게는 사무실 밖에서 일과시간을 떠나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은행 문을 닫은 이후나 휴일에도 농촌 지역으로 출장을 나가야만 했다. 이동조합(里洞組合)이라 불리던 단위농협이 있었던 때다. 농협 직원들은 몇 개의 이동조합을 담당해야만 했다.
‘이동조합 육성’ 기치를 내걸고 출자금 조성운동을 벌리던 시절이다. 현물 출자로 받은 쌀자루를 메고 농촌 들녘을 걷던 추억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른다. 농촌에 가을 추수기가 되면 농협 직원들 에게는 더 큰 일거리가 생긴다. 농사철에 대출해 준 영농자금을 받아야 했고, 비료 농약 등 농용자재 외상대도 수금을 해야만 한다. 그 당시의 농촌 경제란 빈곤이 대명사였다. 가난한 농민 조합원에게서 돈을 받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농협직원은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분주하게 농촌으로 출장을 나간다. 가가호호농가를 방문하고 농민 조합원을 만나야 한다. 그날의 자금회수 실적은 부진해도 밤늦게 사무실에 들어선다. 출장 결과를 상사에 보고하고 수금 실적부진에 대한 꾸지람을 듣는다. 사무실을 나서 동료들과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며 탄식을 했던 시절은 지금 회상해 보면 낭만 이었다.
농협 직원의 승진시험 제도는 엄격하고 공정했던 것 같다. 시험공부를 위해 가장이 집을 나와 여관에 숙소를 정해놓고 지내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어렵게 공부해 승진시험 합격을 하면 근무지는 무조건 지방으로 가야만 했다. 옛날의 농협직원은 승진을 하면 누구나 이산가족이 되어 지방에서 근무를 했다.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전근을 기다리며 애를 태우던 안타깝던 날도 있었다.
30년 걸어온 농협직원 길이 모두 끝나고 그리던 고향에 왔다. 지금의 단위농업협동조합은 옛날 이동조합이 아니었다. 반세기 전 보다 농촌 사정은 크게 바뀌었고 단위농협의 위상도 옛날 보다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농민 조합원에 대한 농협 직원들의 친절과 봉사 정신은 상상을 초월한다. 농협 직원들이 현지를 순회하며 농산물을 직접 수집하고 판매한다. 판매대금은 농민 조합원 통장으로 입금이 되었다. 비료 농약 등 각종 농용 자재는 거의 모두를 직원들이 농가나 현장으로 운반을 해 준다.
노인 조합원들 경노잔치는 늘 푸근하고 즐겁다. 여행 취미활동 등 조합원을 위한 각종 사업들이 옛날에는 상상하기도 힘든 업무였다. 조합원들 애경사에는 자기 집안일처럼 단위조합이 압장서 일을 해준다. 특히 조합원이나 그 가족의 사망에는 장례절차 모두를 조합과 직원들이 도와주고 있었다. 조합을 내방한 노인 조합원을 내 부모처럼 진심으로 모시는 조합장을 여러 차례 본 적도 있다. 눈이오나 비가오나 먼 거리의 조합원 집까지 승용차로 직접 모시는 조합장의 진심과 성의에 잔잔한 감동을 받기도 했다.
농업협동조합은 농촌과 농민 그리고 농업을 모태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기관이다. 농업과 농민은 국가의 경제발전과 성장에 크게 이바지 했음에도 다른 부문보다 불리한 여건에 처해있다. 농산물을 단순한 상품으로 취급하는 건 불행한 일이다. 농식품 이라는 상품 뒤에 가려져 있는 논과 밭, 숲을 포함한 생태계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의 농업협동조합은 분명 농업인의 지위와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농민 조합원의 삶과 지위가 향상되어 국민 경제의 균형있는 발전에도 기여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행정과 농협과 손발을 맞추는 일들이 많은데....
그 분들의 노력, 특히 경제사업을 하시는 분들의 노고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모든 노고들이 농민들도 잘 알아 주었으면 합니다...^^
농민을 위한 농협 농민들에 삶의 가치를 높혀주는 소중 한 곳 30여년 동안 애쓰셨습니다.^^
농촌에 태어나서 농협에 몸을 담고
농민의 애환만큼 농협인도 힘들었지
그립다 30년 세월 속에 고이 담긴 내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