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산령 너머 파수로
어제가 상강이었지만 우리 지역은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 지리산이나 서부 경남 산간 지대는 서리가 내려 초목이 시들고 단풍색이 짙어갈 테다. 시월 하순 주중 수요일 여항산 미산령 임도를 따라 걸으면서 가을을 장식하는 야생화들을 살펴보려고 길을 나섰다. 날이 밝아온 아침에 마산역 광장으로 나가니 노변엔 주말이 아님에도 과일과 채소를 펼쳐 오가는 손님을 맞았다.
번개시장 들머리 김밥을 사면서 길목에 부추전을 구워 파는 할머니가 보이질 않아 주인아주머니에게 여쭈니 몸이 아파 쉰다고 했다. 할머니가 어딘가 골절상을 입어 당분간 일을 할 수 없다는 얘기에 마음이 쓰였다. 고령인 분은 넘어져 뼈가 손상되면 회복이 더뎌 고생하는 경우를 더러 봤는데 어서 일상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할머니가 굽던 전은 이웃 가게에서 맡아 구워 팔았다.
정한 시각에 출발한 진전 둔덕으로 가는 76번 농어촌 버스를 타고 어시장과 댓거리를 거쳐 마산 시내를 벗어났다. 교외로 나가자 들녘은 추수가 진행 중이고 산에는 아직 단풍이 물들지 않았더랬다. 진북 행정복지센터에서 진전면 소재지 오서에서 양촌과 일암을 거쳐 대정을 지나니 승객들은 거의 내렸다. 의산 보건진료소에서 술인방과 골옥방을 거쳐 종점 둔덕에서는 나 혼자였다.
나를 내려준 버스 기사는 현지 주민으로 동구에 나와 기다리던 할머니 셋을 태워 곧장 돌아나가고 나는 오곡재로 가는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하늘은 맑고 공기가 상쾌해 걷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산 중턱 갈림길에서 미산령으로 가는 비포장 임도로 들어 청청한 소나무가 선 산모롱이를 지났다. 당국에선 뒤늦게 임도 길섶 예초 작업을 마쳐 멱이 잘린 풀이 흩어져 시든 채였다.
임도 가장자리의 풀은 잘려 나가도 조금 떨어진 언덕에는 잎줄기가 온전한 풀들은 철을 잊지 않고 꽃을 피워 반가웠다. 먼저 눈에 띄는 꽃은 연보라 쑥부쟁이로 개체수가 많아 언덕이 화사했다. 산중에는 군데군데 노란색 이고들빼기꽃과 보라색 꽃향유가 흔했는데 늦가을까지 꽃잎을 볼 수 있지 싶었다. 간간이 참취가 피운 하얀 꽃은 보였으나 마타리나 뚝갈 꽃은 저물고 보이질 않았다.
해발고도를 점차 높여 가자 건너편은 암반 능선 여항산이 서북산으로 이어졌다. 낙남정맥 가운데 비교적 산세가 험하고 고산지여서 정상부에는 단풍이 엷게 물드는 낌새가 보였다. 버스를 타고 들어왔던 둔덕은 깊숙한 산골로 저 멀리 바깥 광암 바다에 이르기까지 산들이 겹겹으로 에워싸 물러갔다. 진동만 바다 바깥은 거제의 섬들이 한 번 더 둘러싸 산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았다.
미산령에 다다르자 노랗게 핀 산국이 반겨주었다. 예초 작업 때 멱이 잘린 잎줄기는 꽃이 달린 채 시들어 갔다. 고갯마루 미산정 정자에 올라 배낭에 넣어간 삶은 고구마와 역전 번개시장에서 마련해 간 김밥을 먹으며 남쪽 바다로 향해 뻗어가는 산세를 바라봤다. 산마루로 오르면서 폰 앵글에 담은 꽃을 몇몇 지기들에게 날렸는데 향기는 같이 실어 보내지 못함이 유감이었다.
한동안 머문 정자에서 일어나 미산령 북향 비탈로 내려섰다. 전방이 탁 트인 아득한 곳은 가야읍 말이산 고분군과 악양 들녘 남강 하류는 남지에서 낙동강과 만났다. 미산봉과 상데비봉의 북향 꼭뒤는 응달이어서 아까 남향 산등선보다 단풍색이 짙어 보였다.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오는 길섶에서는 오를 때와 같은 야생화들을 만났는데 꽃잎이 희디흰 구절초를 더 볼 수 있었다.
미산마을에 이르자 곶감 산지답게 노란 감이 달린 과수원이 펼쳐졌다. 농부들의 손길에 수확이 시작되었는데 곶감으로 깎아 덕장에 말린 뒤 바깥으로 팔려 나갈 테다. 동구 밖으로 나가 가야로 나갈 버스 차편은 시간이 맞지 않아 파수를 거쳐 함안역으로 걸었다. 어느 농가 삽짝에 추명국과 장미가 늦게까지 피운 꽃을 보면서 진주에서 동대구로 가던 열차를 타고 창원으로 왔다. 23.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