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전투는 시간싸움입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프러시아군에 대한 압박감에 나폴레옹도 심리적으로 몹시 초조했던 싸움이죠. 그는 그루쉬원수를 끝까지 믿었지만 그루쉬는 엉뚱한 곳에서 와브르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네이원수는 총 5마리의 말을 바꿔탑니다. 4마리는 적의 총탄에 의해 죽게되죠. 그리고 프랑스군 손실은 사망,부상,포로 모두 합쳐 4만 2천정도입니다.
동맹군은 도합 2만여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이는 약간의 오차가 있겠지만 거의 정확하다 보시면 됩니다. 제가 여러자료중에서 얻은것이니까요..
워털루전투는 다른 전투와는 다르게 시간이 중요합니다. 오전 11시반정도에 나폴레옹은 우구몽성채로 제2군단 레유장군으로 공격케하고 동시에 네이원수의 지휘하에 중앙 라에생뜨농가와 좌측 빠블로뜨농가로 제1군단 엘른장군으로 공격케 합니다.
하지만 우구몽이란 곳은 단단한 성채로 앞은 과수원이 이어져있어 수풀이 무성한지라 공격자는 시야가 확보키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백병전과 우구몽에 딸린 성당이 있는데 거기에 주인이 몇번씩 바뀌었지만 결국은 공략에 실패합니다.
1차 라에생트와 빠블로뜨에 대한 공격도 실패합니다.
대략 1시가 좀 넘은시각 나폴레옹은 정찰병으로부터 프러시아군이 프랑스군 좌측으로 접근이라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따라서 모든 지휘관들은 다급해질수밖에 없었구 치열한 공방전중에 영국군 웰링턴은 다가오는 프러시아 4군단장 뷜로우 에게 프랑스군측면을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는 후퇴할수밖에 없다라고 메세지를 전합니다. 사실 뷜로우는 본대가 아닌지라 병력수가 그리 많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찰나 그는 정지상태로 사태추이를 보고만 있었죠. 프러시아 총지휘관 부뤼셀의 명령서가 도착합니다. 즉 수가 없더라도 영국군의 뜻에 따라 프랑스군을 공격하라는 메세지죠.
이와 함께 웰링턴은 진지를 조금 뒤쪽으로 이동시킵니다. 이때 네이원수는 마병 제4군단장 밀하우드장군의 주력 흉갑기병대와 제3 마병군단장 켈레르만원수의 지원 병력 주력 카라비니어스와 흉갑기병대 그리고 드라곤과 근위경기병등 의 기병대 거의 5천여명이라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일라우나 모스크바전투 이후 대기병대의 돌격을 감행합니다. 이때가 3시 45분정도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군 진지는 몽쌩장고지 밑에 포진했는데 총 13개의 방진을 구성하고 2선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선은7개 2선은 6개 방진과 60문의 대포들.. 그런데 중요한건 바로 방진 앞 한쪽에는 깊은 절벽(대개 4미터정도라 추정되고 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겁니다.
기병대가 돌격을 할때 그중 거의 1천여명의 병사들이 이 절벽으로 떨어져 죽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기병대가 아니죠. 그들은 1선을 돌파하여 60문의 대포를 노획하지만 결정적으로 그것들을 부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영국군 본진 절반이상이 부숴지고 파괴되었는데 이때 웰링턴은 서머셋장군의 근위 용기병 1400여명을 투입시킵니다. 따라서 기병대는 앞에는 보병 뒤에는 기병을 맞아 처절한 승부를 5시까지 혈전을 펼칩니다. 근위용기병은 금새 800명으로 줄어들죠.
사실 프러시아군은 이미 4시에 프랑스군 좌측 프랑스느와지역으로 공격을 감행 나폴레옹은 제6군단 로보장군을 투입 시킵니다. 이 지역 전투는 밤 9시까지 이어지는데 6군단이 패퇴되자 나폴레옹은 청년근위대를 투입시키지만 잠시 버티다 결국 전멸당합니다.
앞서 네이의 기병대돌격에 영국군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는데 당시 네이는 나폴레옹에게 보병지원을 요청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프러시아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어 보낼 여력이 없었죠. 하지만 네이의 기병대는 패퇴되지만 네이원수는 기여코 저녁 6시 라에생트를 탈환합니다.
아까 청년근위대가 버티고 있을시점 나폴레옹은 바로 이때 영국군 본진을 공격하리라 생각하며 잔여근위대 오천여명 이들은 대개 정예 올드근위대인데 이들을 이끌고 돌격을 감행합니다.
이때가 저녁 7시정도, 하지만 이미 어느 투항장교를 통해 비밀이 누설되어 영국군은 매복을 하고 있었으며 근위대는 영국군의 일제사격에 패퇴됩니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각 6시30분정도에 프러시아 지텐의 기병대가 돌격을 감행합니다.
저녁 7시30분 영국군은 일제히 앞으로 전진공격을 하자 전체적으로 프랑스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8시쯤 프러시아 3군단이 노도와 같이 공격을 감행하자 마침내 패색이 짙어지구 나폴레옹은 9시에 전장을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일부 근위대방진 캉브론장군등 은 방진을 지키고 있었으며 그들은 결국 몇명을 빼고는 적의 포화에 전멸합니다.
당시 패인은 바로 근위대투입시기를 놓친 것이 가장 큽니다. 다른 기상조건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수 없으나 네이의 첫 요청시 근위대를 투입시켰다면 영국군을 돌파할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네이원수의 판단착오도 큰 결정적 요인이지만 당시 공격자입장에서는 약간의 착오를 범할수 있을정도로 영국군은 퇴각비스무리하게 진지를 옮긴게 사실이구 또한 네이는 기여코 라에생트를 탈환했으니 단지 그만의 잘못만은 아닐 겁니다.
많은 군사학자들은 영국군의 공격보다는 차라리 다가오는 프러시아군에 대한 견제를 더 비중을 두었다면 결코 패배하지는 않았을거라 논의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건 19세기 역사에서 나폴레옹은 이전투를 이길수 없다는 일종의 무언가가 있기도 합니다. 왜냐면 워털루전 리니전투에서 블뤼허를 죽일수 있는 기회에서 그는 구사일생했구 명령혼선으로 인한 전투에 참가못한 잔여군단이 존재했다는 거죠. 만약 드루에장군 이사람은 네이원수의 직속부하인데 나폴레옹의 명령은 그가 우회하여 프러시아군의 측면을 강타하라는 건데 명령혼선으로 인해 그는 두전투에 참여를 못한게 결정적으로 프러시아군이 재생할수 있었던 셈이됩니다.
또한 백일천하 당시 참모장 베르티에가 자살합니다. 당연히 참모장이 없으면 안되니 지휘관중에 술트원수를 참모장으로 기용하죠. 하지만 술트 본인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만 결국은 참모역할을 하게됩니다. 술트 비록 스페인에서 웰링턴에게 지긴했지만 당시 병력문제로 인한거지 전술적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지휘관으로서 그의 능력은 다부와 함께 뛰어난 원수죠. 하지만 참모장으로서 베르티에를 대신할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베르티에였다면 그루쉬가 올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근위대를 이끄는 몰티어원수가 그만 전투전에 바로 지병으로 전투에 참가를 못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근위대를 이끌사람으로 드루오 장군 을 임명합니다. 이사람은 뛰어난 포병장군으로 엘바섬에까지 나폴레옹을 따라간 사람입니다. 전방에서 포병을 이끌어야 하는데 어쩔수 없이 후방 근위대를 이끌었죠.
만약 그가 전방에서 포병을 이끌었다면 상황은 달라질수 있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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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윗글처럼 기병,포병,보병의 유기적 결합공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만약 기병대공격중 네이의 요청을 나폴레옹이 받아들여 근위대를 투입했다면 결정적인 승부처가 되었을 겁니다. 이는 많은 군사학자들이 내린 결론이죠. 물론 프러시아군이 있었지만 그때는 청년근위대가 막아내고 있었던 시점이구 제 생각으로는 차라리 우측 우구몽공격 병력 제2군단을 일부만 견제하고 프러시아군방어에 투입하거나 아니면 네이원수에게 보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겁니다.
어쨌튼 워털루전투는 그다지 크지 않은 전장에서 벌인 전투로 때맞추어 온 프러시아군과 끈질긴 방어를 펼친 영국군과 벨기에,독일군 여러 잦은 실수를 되풀이했지만 역시 대단한 공격을 했던 프랑스군 역사에서 승자는 동맹군이었지만 모든 병사들에게 그 공이 돌아가야될 것 같군요..
전날밤 폭우가 쏟아졌는데 웬걸 아침에 보니 햇살이 눈이 부셨죠. 사실 오전일찍 전투를 그상태에 시작한다해도 기동력에 문제가 생겨 별효용가치가 없었던 거죠. 당연히 조금 땅이 말라야 되는데 그래서 11시 반경 첫 포격이 시작됩니다. 비가 안왔으면 당연 날이 뜨자마자 공격했었을것이구 프러시아군이 도착하기전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겁니다..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근위대 올드근위대는 네이의 요청시 투입가능했다는 것이죠. 그시점 프러시아군을 청년근위대가 버티고 있었을 시점이었으니까요.. 근위대를 투입해 대번에 영국군 본대를 돌파했다면 프러시아군도 공격을 계속할수는 없었을 겁니다..
아니면 워털루시 프러시아군은 병력이 점점 증가되니 거기에 주력을 두고 영국군은 견제만 했어도 충분히 이길승산은 있었죠. 그렇게보면 프랑스 우측인 제2군단을 너무 우고몽공격에만 매달리게 한게 어쩌면 실수라고도 할수 있을 겁니다..왜냐면 영국군은 우고몽방어에 병력을 가장 적게 배치했습니다. 중앙과 좌측에 비해서요..
첫댓글 혹시 자료 있으시면 아부키르만 해전도 올려주실수 있을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자료가 변변치 못해서요~~ 부탁드림~~!!!
아부키르만 해전요, 제가 정리해서 좀 자료가 방대해서 정리가 필요해요, 정리되는데로 간결하게 올려드릴께요..
좋은자료 캄솨~^^
나폴레옹은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네 원수에게 보병을 보내지 못한게 맞습니다. 네의 실책도 실책이지만 워털루 최악의 인물을 꼽아보라면 저는 주저없이, 그루쉬 ㅆㅂㄹㅁ
그리고 오전 11시 정도나 되어서야 늦게 전투가 시작된건 전날 비가 와서 포병방열이 지체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전날밤 폭우가 쏟아졌는데 웬걸 아침에 보니 햇살이 눈이 부셨죠. 사실 오전일찍 전투를 그상태에 시작한다해도 기동력에 문제가 생겨 별효용가치가 없었던 거죠. 당연히 조금 땅이 말라야 되는데 그래서 11시 반경 첫 포격이 시작됩니다. 비가 안왔으면 당연 날이 뜨자마자 공격했었을것이구 프러시아군이 도착하기전 프랑스군이 승리했을 겁니다..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근위대 올드근위대는 네이의 요청시 투입가능했다는 것이죠. 그시점 프러시아군을 청년근위대가 버티고 있었을 시점이었으니까요.. 근위대를 투입해 대번에 영국군 본대를 돌파했다면 프러시아군도 공격을 계속할수는 없었을 겁니다..
나폴레옹은 유독 근위대를 투입하는걸 여러전투에서 꺼려하는걸 볼수있습니다. 보르디노전투시에도 근위대투입을 해당원수들이 요청하지만 나폴레옹은 투입을 안하죠. 나폴레옹전술의 특징은 예비대가 있는상태에서 적을 공략하는 것인 만큼 그는 예비병력을 항상 아끼었죠..
아니면 워털루시 프러시아군은 병력이 점점 증가되니 거기에 주력을 두고 영국군은 견제만 했어도 충분히 이길승산은 있었죠. 그렇게보면 프랑스 우측인 제2군단을 너무 우고몽공격에만 매달리게 한게 어쩌면 실수라고도 할수 있을 겁니다..왜냐면 영국군은 우고몽방어에 병력을 가장 적게 배치했습니다. 중앙과 좌측에 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