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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이다. 오늘 축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라테라노 대성전을 지어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성전은 ‘모든 성당의 어머니요 으뜸’으로 불리면서 현재의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거의 천 년 동안 역대 교황이 거주하던,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각 지역 교회가 로마의 모(母)교회와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고자 라테라노 대성전의 봉헌 축일을 지낸다.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고,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따름 노래 “성전 오른쪽에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7,1-2.8-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복음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22
13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에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과
환전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16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이르셨다.
17 그러자 제자들은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라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생각났다.
18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20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21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학교나 병원이 더 성전다운 성전이 될 수 있는 이유
저는 라떼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이나 성 베드로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낼 때마다 ‘하느님께서 이 큰 성전들을 짓기를 원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성전을 짓기 위해 돈을 걷어야 했고 그것 때문에 개신교가 생겨나는 계기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라떼라노 성전 앞에는 거지로 사는 수도원의 회칙을 승인받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올라온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전의 크기에 놀라는 모습이 청동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그 모습은 절대 ‘성당 멋지다!’라는 모습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도 커다란 성전을 짓고 빚을 갚고 또 유지보수 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쓰는 것보다는 성전의 더 본질적인 의미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양원역’은 우리나라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기차역이자 가장 작은 기차역입니다. 물론 허구가 가미되긴 하였겠으나 양원역이 세워지게 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기적’(2021)입니다.
천재 준경의 목표는 단 하나, 마을에 기차역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을이 작아 기차가 서지 않기에 마을 주민들이 굴을 지나고 다리를 지나다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준경은 천재인데 일부러 꼴찌를 합니다.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사실 공부 때문에 갖게 된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를 좋아하는 국회의원의 딸이 있습니다.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라희는 그의 능력을 발휘해 볼 것을 종용합니다. 그러나 준경은 오로지 마을에 기차역을 만들기 위해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물론 라희가 이것도 도와줍니다. 그러나 준경은 라희에게 더 가까이는 다가가지 못합니다.
준경의 누나 보경은 동생과 함께 살면서 동생의 친구가 되어줍니다. 동생은 누나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도시로 나가지 않았고 시골집에 누나와 함께 삽니다. 준경은 누나가 섭섭해 할까봐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말도 못 합니다. 아버지 태윤은 기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인데, 아들을 지나치다 보아도 아는 척도 안 합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둘은 서먹하기만 합니다.
어느 날 대통령이 그 지역에 역을 만들어도 좋다는 허가를 해 줍니다. 하지만 돈은 지원해주지 않습니다. 준경은 자신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평탄하게 하고 손수 역을 세우려 합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도 도와줍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첫 민자역인 양원역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태윤은 기차역을 통해 아들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준경의 어머니는 준경을 낳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누나 보경도 사실은 준경이 환시를 보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교 1등을 해서 상을 받아 올 때 기차 때문에 다리 난간에서 몸을 피하다 동생의 트로피 때문에 물에 빠져 죽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죽었고, 누나도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은 준경을 그 집에 잡아놓고 있었습니다. 준경이 그렇게 만들려고 한 양원역은 어떻게든 그런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은 의지였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누나도 죽게 했다고 생각할 줄 알고 아버지께 칭찬받기 위해 만들기로 한 것이 기차역입니다. 그는 기차역만 있었어도 자신을 낳다가 엄마가 죽을 필요가 없었고 누나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는 천재성을 펼칠 수도 없고 결국 자신을 믿어주는 라희에게도 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 태윤은 고등학생 아들이 자신이 기뻐할 것이라 믿어 손수 만든 작은 간이역을 들어가 보며 모든 것을 준경에게 말해줍니다. 사실 태윤이 일만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준경을 낳을 때 집에 늦게 도착해서 준경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누나 보경이 죽을 때도 기차를 몰던 기관사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상을 받을 때 자신만 즐기면 아내에게 미안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이 운전하겠다는 것까지 뿌리치고 누나를 보냈던 것입니다.
준경의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에 아버지도 큰 책임이 있었기에 준경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인데, 준경은 아버지가 자신을 원망하는 줄 알고 괴로워했던 것이고 아버지의 칭찬을 듣기 위해 역을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준경이 다시 꽃필 수 있도록 기차를 태우고 차를 몰아 나라에서 주최하는 수학 경시대회에 나가게 해 줍니다. 준경은 전국 1등을 하여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준경은 드디어 누나와 엄마의 숨결이 깃든 집을 떠날 수 있게 되었고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양원역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드는 공간이었고 자신 안에 있는 죄책감을 아버지가 해결해 주어 이전의 자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 안에 세워야 하는 성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그런 성전을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모든 죗값은 당신이 다 치러놓았으니 하느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께서 머무실 작은 간이역을 만들지 않는다면 주님은 영원히 우리의 무서운 심판자로 외부에 서서 계십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예수님께서는 이 돈으로 성전을 짓기를 원하실까, 학교를 짓기를 원하실까?’를 생각하셨던 것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떠올려야 우리가 어떤 성전을 지을지 알게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학교를 세우는 것이 성당을 짓는 것보다 주님께서 더 기뻐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행위 안에 주님께서 이태석 신부님의 마음에 자리를 잡으시는 것입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내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를 원할 때 내 안에 성전이 세워지고 주님께서 머무실 공간이 마련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들어오시고 주님께서 “너는 죄 없다.”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또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와 하나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머무실 우리 마음 안의 작은 간이역, 그런 성전을 만들어야 합니다. 큰 성전을 벽돌로 지었다고 주님께서 오지 않으십니다.
성전을 지을 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산다면 우리의 성전은 벽돌로 된 커다란 건물이 아닌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줄 학교나 병원, 유치원이나 무료급식소 등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건물이 마치 양원역처럼 우리 내면 성전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미사를 하면 어떻고 병원에서 하면 어떻습니까? 이런 성전이 오히려 진정 내 안에 주님의 공간을 마련하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전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 안에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이웃사랑을 실천하려는 마음으로 지어지는 양원역과 같은 참 성전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저는 신부가 되고 나서 수영을 배웠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배우는 수영이기에 쑥스러움이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실력이 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발차기를 해도 앞으로 가지 않고, 또 왜 이렇게 물을 많이 먹게 되는지…. 그럼에도 수영 강사에게 묻지 못했습니다. 쑥스럽기도 했지만, 그저 열심히만 하면 잘할 줄 알았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새로 왔습니다. 저 못지않은 초보였습니다. 그런데 강사에게 계속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강사는 아주 친절하게 또 쉽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저와 몇몇은 강사가 여자 수강생만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요.
계속 강사에게 물어보던 이 자매님의 실력은 날이 갈수록 늘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만에 중급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중급반에 가서도 그곳 강사에게 계속해서 수영에 관해 물어보는 것입니다.
실력의 차이는 ‘혼자’와 ‘함께’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늘 주변과 소통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실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혼자서 높은 경지의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특히 주님과 또 이웃과 함께해야지만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세속을 내쫓는 성전정화의 행동과 유대인 지도층과의 논쟁을 볼 수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에 맞춰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듭니다.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치니, 사람의 수만큼 동물이 성전 주위에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동물시장처럼 북적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성전은 완전히 시장터로 변한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제물용 동물을 사려면 돈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환전상들 또한 들끓었습니다. 종교적인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에 성전은 재건 중이었기에, 공사판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모습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채찍을 휘두르고, 탁자를 엎어 버리는 폭력 행위를 하십니다. 이 모습이 유다인들과의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잘못된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올바른 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 자기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또 자기의 편함을 위해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며 올바르게 살지 못하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주님의 뜻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무는 인생에 의미를 더하는 일이다(엘리 위젤).
라테라노 대성전 외부.
목적은 성격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자기 성격이 이렇게 되었다면서 과거 사건을 일으킨 대상에 대한 적의를 표현하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 사건의 트라우마로 좋은 성격을 세상에 보이지 못하고 그래서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격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것일까요?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자신의 성격으로 이런 업적을 세운 것일까요? 자신의 성격에 근거해 판단해서 결정했고, 이를 위해 노력해서 위대함을 드러낸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은 분명히 성격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확고한 목적 의식이 없다면 어떤 성취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성격으로 성취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연연하며 성격 탓을 하기보다 나의 목적으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어렵고 힘든 일로 지금의 어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목적을 바라보면서 지금 어떻게 살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미래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를 향한 내 삶의 목적은 어떻게 됩니까?
라테라노 대성전 제대.
첫댓글 저녁미사에 주임신부님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겸손함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며 그림까지 보여주셨는데 정말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교황님의 의자에 걸인을 앉히시고 그의 발을 씻어주시는 모습에서 섬김을 받으러오지 않고 섬기러왔다는 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 신부님도 그런 따뜻한 마음으로 신자들을 보살피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