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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아덴 설교
행 17:22-34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행 17:22-34 /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자 바울은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연설하였다. `아덴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매우 종교심과 신앙심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23) 나는 시내를 다니며 여러분들의 많은 제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쓴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신이 어떤 신인지도 모르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부터 내가 그분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해드리겠습니다. 24)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25) 또한 인간의 손으로는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채워 드릴 수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분 자신이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만족하게 채워 주십니다. 26)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의 조상인 한 사람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서부터 인류를 온 세계에 퍼져 나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나라가 흥하고 어느 나라가 망하며 언제 그렇게 될 것인가를 미리 다 정하시고 그들의 영토도 정하셨습니다. 27) 이 모든 일을 행하신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누구와도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중의 한 사람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29) 그러니 하나님을 인간들의 손으로 금이나 은이나 또는 돌을 깎아서 만들어 낸 우상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30)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의 무지를 참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든지 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설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31)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분을 통해서 ㄱ) 공정히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써 이 일을 맡기셨다는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ㄱ. 시9:8(참조,시 96:13, 98:9) 32) 바울의 말이 부활에까지 이르자 사람들이 비웃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는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나중에 더 자세한 것을 듣고 싶소'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33) 바울은 토론을 끝냈다. 34) 몇 사람이 바울을 따라 신도가 되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시의회 의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부인과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아덴 안에 있는 종교, 도덕에 관한 문제를 강론하고 재판하던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설교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설교(24-25) 아덴 사람들은 헬라적인 신관에 따라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들뿐만이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신들에게도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혹여나 자신들이 알지 못해서 부지중에 제사에 빠져 저주를 받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참 신이신 하나님을 소개하며,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천지를 주관하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나라마다 민족마다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신들을 섬길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만을 섬겨야 합니다(전 12:13). 또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시며,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심판에 대한 설교(26-31)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의식처럼 아덴 사람들은 자신이 아티카(Attic) 본토의 흙으로 창조되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온 인류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한 혈통(창 1:26-27)임을 강조하면서 오직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음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보여주고 있으며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통해 사람들이 자연만물을 통해서라도 어렴풋이나마 창조주를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금이나 은이나 돌로 만든 우상을 섬길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참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심을 통해 공의로우신 심판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들은 자들의 반응(32-34) 바울의 설교를 통해 대부분의 아덴사람들은 바울을 조롱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종말론적인 심판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체면과 나약한 결단력이나 의지력 때문에 다음 기회에 듣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헛된 철학과 우상숭배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적용: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전하여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독서 현실은 어떠할까요? 1년간 일반 도서를 한 권이라도 읽는 사람의 비율은 성인이 60%, 학생이 92%로 각각 나타났습니다. 성인의 40%는 1년에 한 권도 안 읽는다는 말입니다. 독서의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특히 유아와 청소년의 독서는 그들에게 많은 지적 소산을 안겨줌과 동시에 다양한 창조력을 키우고 풍요로운 감성을 보살펴줍니다. 한국인들의 독서 시간은 하루 평균 6분, TV 앞에서는 2시간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제 하루 20분만 독서에 투자하면 안 될까요? 1년이면 300페이지짜리 책 12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풍성한 인생의 코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호크마 주석
=====17:22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 바울이 이 곳에 선 것은 죄인으로서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서나 혹은 철학자들 앞에서 철학을 강의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다만 바울은 주어진 모든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포자로서 그곳에 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순간도 복음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잃어버린 적이 없는 증 인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 영역 성경 KJV는 이 부분을 '너무 미신적이다'(too sup-erstitious)라고 번역하고, NIV는 '매우 종교적이다'(very religious)라고 옮긴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종교성이 많다'고 한 것은 그들의 도시에 신전과 신상들이 많았던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바울의 이 말은 그들의 경건함이나 종교적인 성향에 대한 칭찬(Chrysostom)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그들의 무분별한 미신적인 태도에 대한 비난으로 이해됨이 더 합당하다(Calvin, Luther).
=====17: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 아그노스토 데오) - 이러한 유형의 비문을 증거하는 것들이 있는데, 2세기의 지리학자였던 파우사니아스(Pausanias)는 팔레룸에서 아덴으로 가는 길에 '이름은 있고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제단'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버가모에 있는 한 비문에도 '알지 못하는 신'이 새겨져 있다(Bruce, Longenecker, Blaiklock, Marshall, Meyer). 그러나 이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비문의 내용이나 비문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Longenecker, Haenchen). 이는 아덴 사람이 가진 신관의 한 유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신들이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아직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신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긴 단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그 도시를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종교심을 갖고 있었던 듯하다(Blaiklock). 바울은 이러한 헬라적 배경을 토대로 하여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즉 여느 때와 같이 유대의 역사를 언급하거나 구약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그의 설교를 시작하지 않고 아덴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기초로 하여 그와 아덴사람들과의 접촉점을 마련하였다.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알게 하리라 -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촉점으로서, '알지 못하는 신'을 언급하는데, 아덴 사람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절대자를 표현하기 위한 것 같다. 바울은 이러한 '막연한 신관'을 가진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을 계시하고 있는 창조(24절), 구속(25-30절), 부활(31절)의 신관을 도입하여 제시하고 있다.
=====17:24
우주와...만유를 지으신 신께서 - 하나님은 헬라의 많은 신들 중에 주신인 제우스처럼 여러 신 가운데 있는 신이 아니라 유일하신 분이시다. 아덴에는 약 30,000이 넘는 신들이 있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러한 신들 중에 하나로 포함하지 않도록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시며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심을 명백히 했다. 이 세상에는 그 어느것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다른 것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또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과 관계없이 생겨난 것도 없고 그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분은 우주와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도 관여하시고 인류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신다.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 '손으로 지은 전'은 바울이 처해 있던 상황과 비교하여 본다면 쉽게 '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떠올릴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지은 것이 틀림없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봉헌할 때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한 바 있다(왕상8:27).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국한될 수가 없으시다. 그분은 전지전능(全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다. 아덴 사람들은 그들의 도시국가와 또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많은 신전과 사원 안에 수많은 신들을 소유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소유될 수 있는 분도 아니며 그러한 신들과 같은 부류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 아덴 사람들은 신들의 항구한 기쁨과 행복을 위해서는 인간들의 희생 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신상에 음식을 갖다놓고 옷을 입히고 또 좋은 장소에 그 신상들을 안치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심으로 인간의 희생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헌금과 헌물을 드린다 하여 더 많이 응답하거나 기뻐하시지도 않는다. 그분은 무엇이 필요하다 생각될 때 우리의 도움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는 분이다. 왜냐하면 그는 완전하고 충만하사 자신 안에서 모든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만큼 충족하신, 이른바 유복적 속성(有福的 屬性)을 지닌 분이기 때문이다(딤전1:11;6:15).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호흡을 한치도 연장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명과 호흡'의 주인이시다.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 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에 반대하여 인류는 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한 혈통과 한 조상을 가진 후손임을 언급하고 있다(Bruce, Longenecker). '한 혈통으로'(한글개역, KJV)라는 번역은 '여스 헤노스 하이마토스'(* )라고 되어 있는 후대의 사본들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사본들( , A, B등)에서는 '하이마토스'(* )가 생략되어 있고 단지 '여스 헤노스'(* , 피)라고 기록되어 있다. 많은 번역본들이 이를 따르는데(현대인의 성경, NASB, RSV, NIV 등), '한 사람으로부터'(from on 또는 from one man)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한 사람'은 아담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임이 분명한데,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인류의 하나됨이라는 사상은 바울 신학의 바탕이 되고 있다(롬5:12-21;갈3:28). 이러한 하나됨은 죄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구속으로 인해 회복되었다(Bruce).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아덴 사람들에게 성경적인 인간관을 피력하고 있다.
연대를 정하시며...경계를 한하셨으니 - '연대를 정하셨다'는 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정해주셨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또한 14:17에 근거하여 볼 때 계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D.E.Haenchen). 본절은 24절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알지 못하는 신'은 곧 하나님으로 창조주이시며, 그는 시간을 만드사, 사람을 시간의 흐름속에서 살게 하셨고 나아가 모든 민족들이 살 수 있는 공간적인 경계까지 정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시편 기자와 모세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시편 기자는 '주께서 땅의 모든 경계를 정하셨으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라고 노래했다(시74:17). 또한 모세도 모든 민족들의 경계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정해졌음을 교훈하고 있다(신32:8).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는 사상에 근거하여 아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17:27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 '더듬어 찾다'는 뜻의 헬라어 '프셀라파오'(* )는 '만지다', '느끼다'는 뜻으로 '소경이 무엇인가 열심히 더듬어 찾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영적으로 어두움의 상태에 놓여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방황하는 것을 묘사한다.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을 쫓아 다녔지만 그들로부터 영혼의 갈급함이나 구원의 문제를 해결받지 못했다. 이들이 믿고 따르던 신들은 오히려 그들을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었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범신론적 사상, 불가지론 또는 회의론 등은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17:28
그를 힘입어...기동하며 - 이 구절은 크레타(Creta)의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 des, B.C.6세기)의 4행시 '크레티카'(Cretica)에도 나온다. 제우스의 아들 미노스 (Minos)가 그의 부친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바울은 당시 아덴인들에게 익숙했던 이야기를 통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을 증거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소생 - 이런 표현은 길리기아 시인 아라투스(Aratus, B.C.315-240)의 시 '패노메나'(Phaenomena)에 나온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클레안데스(Cleanthes, B.C.331- 233)의 시 '제우스에게 드리는 찬송'(Hymn to Zeus)에도 나타난다. 바울이 이곳 외에도 희랍의 시를 정확하게 몇 차례 인용한 사실로 미루어(고전15:33;딛1:12) 그는 희랍의 학문이나 문학에도 능숙했으리라 짐작된다. 이렇듯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與件)을 이미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희랍적인 지식들을 복음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했으며, 희랍 세계의 시를 인용하여 복음을 증거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철저히 복음적이며 성경적이었다.
=====17:29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여길 것이 아니니라 - 바울의 이 말은 스토아 철학(Stoicism)의 범신론적인 의미에서 한 것이 아니다. 스토아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에 의하여 존재할 수밖에 없고,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본성'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연 그대로의 운명을 아는 사람이 현자(賢者)이고, 현자는 또한 신과 같은 자라고 한다. 이는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보는 것이고,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관, 인간관과는 배치된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용어인 '신의 소생'이라는 싯구를 사용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셩경적인 인간론의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창1:26,27). 따라서 자연물(금, 은, 돌 따위)로 만들어 놓은 신들은 인간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인간보다 뛰어난 신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논증의 독특함을 알 수 있는데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참 신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 바울의 설교는 하나님의 구속의 점진적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절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선포와 절단에의 촉구로 옮겨가고 있다. '알지 못하던 시대'란 바울이 이미 루스드라에서 '지나간 세데'(14:16)라고 표현한 말로서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드러나기 이전에 가리킨다.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의 헬라어 '휘페리돈'(* )은 '보지않다', '간과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며 또 심판보다는 가급적 회개의 때를 기다리는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우상 숭배 행위마저 참고 견디시며 자신을 자연을 통해 계속적으로 계시하셨다(14:16;롬3:25). 그렇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고 그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고 그 복음의 메시지가 온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신'은 그 정체가 드러났고 아울러 '알지 못하 던 시대'도 끝이 났다. 회개하라( ,메타노에인) - 이는 '메타노에오'(* )의 현재 능동태 부정사로서 계속적인 명령의 뜻을 내포한다. 이 회개는 삶의 태도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데 여기서는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를 그치고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 구절이 하나님의 용서와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가르치는 바울 사상에 걸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에도 회개에 대한 강조점이 여전히 나타난다(살전1:9,10).
=====17:31
정하신 사람 -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서 언급하신 것 같이(막14:41;눅17:24)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면서 아울러 온전한 인성(人性)을 지니고 세상에 오셨고 인류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 본절에서 심판주를 '사람'이라고 굳이 표현한 것이 다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심판주란 의례히 초월적 위엄과 권세를 지닌 분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계18:8). 그러나 이 표현은 후반절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이란 구절과 연결되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즉 본절은 인자의(죽으심과) 부활이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곧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바울의 설교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이 설교를 두고 한낱 철학적 강변 또는 자신의 지식과 언변에 대한 자랑에 불과하다는 평을 내리거나 그의 아덴 사역이 실패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사실 바울이 아덴에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거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바울은 아덴에서 분명한 성과를 보았다(34절). 바울은 자신의 화려한 사역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최고로 여기며(빌3:8)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모든 노력을 기운인다. 결국 바울의 아덴 사역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아울러 그의 이 설교는 결코 철학적 강변이 아니다. 이 설교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가 샛별같이 빛나고 있다.
======17:32
저희가...기롱도 하고...다시 듣겠다 하니 - 부활이란 주제는 역시 아덴 사람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었으나, 몸의 부활에 관한 사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들은 육체를 속되고 악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만 아니라 부활 또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고전1:18). 시인 에스킬루스(Aeschy- lus, B.C.525-456)가 '사람이 일단 죽으면 티끌이 인간의 피를 빨아들이며 결코 부활은 없으리라'고 노래한 바 있듯이 본문의 아덴인들은 바울의 설교를 조롱과 비웃음으로 일축(一蹴)해 버리면서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단의 사람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더욱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듣기를 요청했고 그들 중 몇몇은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17:33
바울이...떠나매 - 바울의 설교는 대부분의 청중들에게는 거부되었지만, 몇몇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더이상 아레오바고 광장에 머무르기를 거절하였던 것 같다. 아마 바울은 공공장소에서 연설할 수 있는 자유나 권한이 있지 않았던 듯하며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랬더라도 다행히 그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Haenchen).
=====17:34
몇 사람이...믿으니 - 여기서는 세례를 주었다거나 예배를 드렸다거나, 또는 장로를 세원다는 등의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소수의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고 하는 이 간략한 언급에는 이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결코 신자의 수가 많고 적음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근거하고 있는가이다. 바울은 이곳에서 아덴 선교의 복음의 씨를 심은 것이다. 디오누시오 - 이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후기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아덴의 첫 감독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첫 개종자가 대개 그 지역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던 사실과(고전16:15,16) 조화를 이룬다.
< 설 교 >
하나님에 대한 3대 정의
행 17:22-25 / 이한규 목사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레오바고는 아덴의 최고 의사당 같은 곳이다. 거기서 바울은 아덴 사람의 성향에 맞춰 철학적인 접근 방식으로 전도 설교를 했다. 그래서 설교를 “아덴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큰 죄인이오. 도처에 우상이 너무 많소. 속히 회개하시오”.라고 시작하지 않고 이렇게 시작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언뜻 보면 상대를 배려하는 느낌을 준다. 비록 그들이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모욕감을 주면서 설교를 시작하기보다 먼저 그들의 종교심을 인정해 주었다. 실제로 아덴 사람들은 종교심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3만 이상의 신이 있었고 아덴 자체가 거대한 신전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그들은 종교적이었다. 그들에게 설교하면서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표현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1.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 23절을 보라.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아덴 전도를 위한 지혜와 전략을 얻기 위해 먼저 아덴 지역을 자세히 살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설교에서 ‘알지 못하는 신’은 누구인가? 당시 아덴 사람들은 수많은 신을 섬겼다. 그 신들 중 어떤 신이 빠져 그 신으로부터 저주받을 것을 염려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모시는 신전도 세웠다.
왜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 얘기를 꺼냈는가? 하나님은 ‘실체가 모호한 하나님’이 아니라 ‘실체가 뚜렷한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반전의 효과를 통해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지금도 뚜렷한 실체로 존재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그 실체를 확신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희미하게 인식하면 우상숭배에 빠지기 쉽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앉고 일어섬도 다 아시고 나를 최선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
2.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만물을 짓고 주관하시며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크고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24절).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진심으로 믿으면 자연의 오남용도 일종의 죄임을 깨닫게 된다. 자연을 오남용하면 점차 사람을 오남용하는 지경에 이른다. 과학문명의 발전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펼쳐지기에 인간의 편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자연 활용은 불가피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심은 잃지 말라.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진실로 믿으면 자연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고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게 된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 의식을 가지면 자연과 환경을 자신과 분리된 하위 객체로 여기지 않음으로 자연과 환경의 역공을 예방하는 지혜도 얻는다. 더 나아가 성육신의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는 은혜도 생긴다. 광대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심지어는 우주도 품지 못한다. 그런 하나님이 성도의 품에 안길 정도로 스스로를 축소시키고 성도와 친밀한 교제를 하시니 얼마나 큰 은혜인가?
3. 풍성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풍성하신 하나님이다(25절). 하나님은 주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바치라고 하는 것은 더 많이 주시려는 조치다. 때로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하나님은 나를 향한 멋진 생각과 계획을 금방 철회하지 않고 회개하면 늘 현재의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 주고 새롭게 일으켜 주신다. 영혼 속에 결핍과 공포 의식을 자꾸 심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의지하게 만드는 이단 교주의 미혹을 이기게 하는 강력한 면역제는 하나님의 풍성하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하나님만 바라보라.”라고 하는 명령은 결국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믿으라는 암시가 담긴 명령이다. ‘오직 예수’라는 말은 ‘성령 충만’이란 말과 사실상 같은 말이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는 말씀과도 큰 의미에서 같은 말이다. 하나님을 믿어도 아직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들면서 자신이 그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단 교주에게 미혹되지 말라. 인간적인 선행과 수행과 고행은 물론 많은 기도, 많은 은사, 많은 성경 읽기보다도 더 앞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행 17:22-34 / 서영성 목사
본문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일을 적고 있습니다. 그가 베뢰아에서 전도하면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는데 데살로니가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두고 혼자서 아테네에 갔습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아직까지도 철학계에 영향을 미치는 현인들을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물론 바울이 아테네에 왔을 때는 과거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영향력은 여전하였습니다. 또한 지성과 문화를 자랑하는 아테네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도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도시를 둘러보았습니다. 바울이 아테네로부터 받은 첫 인상이 어떠합니까? 온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였습니다. 태양의 신, 달의 신, 바다의 신, 대지의 신, 우레의 신, 바람의 신, 포도주의 신에 이르기까지 기능별로 다양한 신들을 섬기면서 행여나 빠진 영역이 있을까 우려하여 방어 장치로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설치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Pantheon(萬神殿)의 여러 신들의 제단을 돌아 마지막으로 ‘알지 못하는 신’ 제단에 향을 피운 후에 신전을 나왔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의지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알지 못하는 신’의 정체를 밝혀주려고 하였습니다. 한국에도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국 장로교회 초대 목사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를 대표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길선주 목사. 기독교인이 되기 전 그는 도교에 심취하여 오랜 기간 선도 수행에 전념하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도사로 불렸습니다. 웬만한 시내는 건너뛰었고 통나무 목침도 한 주먹에 부술 정도였습니다. 따르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1893년 경 선교사와 조선인 전도자들이 평양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도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길선주가 이를 배척할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는 새 종교를 알아오라며 제자 김종섭을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김종섭이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와서는 오히려 길선주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김종섭은 교회신문인 <그리스도신문>과 전도책자 <이선생전>, <천로역정>등을 길선주에게 갖다 주면서 읽어보라 하였습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길선주는 예수교에 대해 ‘닫혔던 마음’이 조금씩 열렸습니다. 바뀐 김종섭의 생활태도를 보고 ‘어쩌면 예수교가 참 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20년 넘게 신봉해온 선도를 버리고 새 종교로 옮겨가자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김종섭은 고민하는 길선주에게 기도해 보라고 했습니다. 길선주는 자신이 섬기고 있던 삼령신군(三靈神君)에게 “현재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예수도가 참 도인지 거짓 도인지 알려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없었습니다. 김종섭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삼령신군께 기도하니 어떠하오?” “번민만 날뿐이오.” “그러면 이번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보시오.” “어찌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리오?” “그러면 아버지란 칭호를 빼고 그저 상제(上帝)님이라 부르며 그분께 기도해 보시오.” ‘상제’로 바꾸어 기도한 지 사흘 때 되는 날, “예수가 참 구주인지 알려 주소서” 기도하던 중에 옥피리 소리와 총소리가 방 안에 진동하고 공중에서 “길선주야!”하는 소리가 세 번 들렸습니다. 그 순간 길선주는 자신도 모르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를 살려 주소서”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방성대곡하며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교인” 길선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예수의 도’를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종교 심성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그 정체를 몰라 모호하게 섬기던 신이 누구인가를 밝혀주었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 마음속에 익명으로 존재하던 신이었습니다. 그분은 ‘삼령신군’이 풀 수 없었던 의혹을 해결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제일 먼저 회당을 방문하여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아테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먼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을 벌이는데 그중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금욕적이고 범신론적이며 사후의 심판과 내세를 부정한 반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창조를 부인하고 생명의 발생이라든가 운명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역시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 가운데 몇몇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며 비꼬았고 또 몇몇은 “외국의 낯선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면서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말쟁이로 번역된 spermologos라는 단어는 ‘씨앗을 줍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씨앗을 주은 다음에 집에 가져와 분류도 하지 않고 여러 곡식이 뒤섞인 추수를 거두는 어리석은 농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을 체계 없이 여기저기서 조금씩 주워 모은 지식을 말하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들어 그가 전하는 새로운 가르침에 대하여 토론을 하기 위하여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그리스인들의 전쟁의 신 ‘아레스’의 언덕을 의미합니다. 로마인들은 이 신을 마르스라고 부릅니다. 아레오바고는 아고라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도중에 있습니다. 아레오바고가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바로 서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만약 바울이 동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말을 했다면 각종 신을 섬기는 파르테논을 마주 보면서 설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약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전도사역에 적용하기 원합니다.
아레오바고 설교
사도행전에는 9편의 바울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는데, 오직 아레오바고 설교만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행해졌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상황과 그곳 사람들의 관심사에 맞게 설교를 시작하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1. 맹목적인 종교성과 우상숭배 지적(22-23절)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가 관찰한 내용을 가지고 설교를 시작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종교심이 많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때는 종교를 향한 열심이 있다는 뜻이고 부정적으로 볼 때는 지나치게 미신적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또한 자기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보았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공통적으로 신에 대한 지식이 있으며 그것은 복음의 진리로 승화되기 전에는 언제든지 미신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들이 가진 신에 대한 지식을 설교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바울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단을 언급하자 아테네인들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 낸 우상에 비할 수 없는 참신이심을 하면서 그들의 우상숭배의 잘못됨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우상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들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보다 더 우선순위를 가지고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우상을 아울러 섬길 수 있습니다. 그 우상이 취미, 도박, 정욕, 마약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녀나 일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끌려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대를 종교적 다원주의 세대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성경은 말하지만 세상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전하는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비판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관용을 베푸는 듯한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베드로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전에는 각종 이방신을 섬기는 죄를 참으셨으나 이제 더 이상 우상 숭배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부터 삶과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2.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소개(24-29절)
헬라인들은 많은 신들을 섬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한분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주과 그 가운데 존재하는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시며,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는 주재자가 되신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신들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올림피아의 신들은 항상 무엇인가 부족합니다. 사람처럼 서로 질투하고, 사람처럼 자기의 부족한 것을 상대에게서 빼앗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신들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하고 증거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은, 태초에 한 사람을 만드시고, 그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있는 모든 민족과 족속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과 족속의 연대를 정하시고, 그들의 삶의 영역을 정하셨습니다. 민족과 족속의 연대를 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민족의 흥망성쇠를 정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거주의 영역을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로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기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특정한 민족을 편애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 있는 사람은 모두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찾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고 부르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기에 그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설교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시 이방종교의 신관과 하나님을 비교하면서 공통점을 찾아 청중을 설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절대 주권자이심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에 대하여 인간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밝힙니다. 창조주와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우리가 할 것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섬겨야 하는데 이는 심지어 그리스 시인들조차 그 진리를 언급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는 부분은 Epimenides의 ‘Cretica’에서 인용하였고,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부분은 Aratus가 쓴 ‘Phaenomena’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두 구절 모두 제우스신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지만, 바울은 그것들을 창조주 하나님에게 적용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민족들을 다스리시고, 자신을 계시하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구하도록 하신 것이라고 증거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예배를 요구하신 것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과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 하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그 복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까지 달리셨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한 심판 선언(30-31절)
바울은 하나님을 먼저 소개한 후 자연스럽게 구속사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참된 길은 오직 예수의 사역을 믿는 것이며, 그를 생명의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까지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으니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기에 범한 죄를 회개하라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약 회개하고 그분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합니다. 부활이 심판의 근거라고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전합니다. 비록 바울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십자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헬라 문화의 심장부에서 복음을 상황에 맞게 전파합니다. 종교다원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만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참 신임을 선포한 바울의 믿음과 열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께서 죽으신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 확실한 일인 것처럼, 주께서 세상 만민을 심판하기 위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이 확실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주님의 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레오바고 설교의 특징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이루어진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구속사를 성취하신 분이요,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 온통 널려진 우상을 보고 흥분은 했지만 정작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는 듣는 이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지혜롭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종교성을 인정하고 그곳 시인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폭넓은 접근을 했습니다. 복음전파는 영적인 전투이므로 말씀으로 강하게 도전해야 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상대방을 이해하며 부드럽게 다루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이라는 놀라운 보배를 상황이라는 질그릇에 담아 청중들의 상황에 맞도록 적절한 변화를 주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은 복음적인 설교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와 죄를 정죄하고, 회개의 필요를 보여주며, 심판의 확실성을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구원을 제시했습니다.
* 바울의 사역은 성공적입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보통 호의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와 적대적인 반응을 가진 무리로 나뉩니다. 아테네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조롱을 하였는데, 이는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하다는 헬라사상에 젖어 있어 낯선 부활 교리를 잘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미련한 것으로 비쳤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을 더 요구하며 결단을 미루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학문처럼 이해하고 배우려고 했기에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심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아레오바고 관리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인과 그 외 몇몇이 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이름만 거론되니 숫자로만 보면 바울의 아테네 사역은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사역은 실패한 것일까요? 실패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고린도 전서 2장 2절을 근거 삼아 그러한 논리를 폅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노라” 바울이 아테네에서 논쟁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다가 별로 열매가 없었기에 자기의 사역의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는 쓸데없는 논쟁을 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겠다는 것으로 추측성 해석을 합니다.
물론 회심한 사람의 숫자만 보면 바울의 사역이 대단치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기에 숫자에 상관없이 그 사역은 효과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회심한 이후로 언제나 성령이 충만하여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이 얼마나 놀랍게 확산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의 전도로 회심한 디오누시오는 아테네 교회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가 40여년 후인 96년 도미티안 황제 때 순교를 당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의 전도는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네네 사람들은 바울의 하나님을 부인하고 무익한 우상들로 가득 찬 그들의 판테온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 위에 선 그 날 이래 복음에 반응하는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바울을 버린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불신자들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과 부의 우상, 술과 마약의 우상, 정욕과 부도덕의 우상, 권력의 우상, 힘과 건강의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같은 설교를 기대합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설교만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설교를 듣기를 원합니다. 감동을 주는 설교, 자기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는 설교를 원합니다. 죄를 지었으니 회개하라는 설교는 별로 환영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선포되는 메시지를 아멘으로 화답할 뿐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모든 성경을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해석하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현실이나 청중과 타협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현세기복적인 메시지나 철학적, 윤리적 메시지를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을 아침마다 묵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가르침은 한때는 풍미했으나 그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시켰습니다.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판단하는 가에 달려 있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가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적인 목표의 성취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어떻게 전합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전해야 합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삶의 필요나 관심을 접촉점으로 삼아 주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바울처럼 항상 성령에 인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전하려는 열정과 지혜가 균형을 이룬 삶을 살아야 합니다. 먼저 각자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면서 구원을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전도의 열매를 많이 거두시기 바랍니다.
창조주 하나님
행 17:22-28 / 김영규 목사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사람들
본문은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한 설교입니다. 바울이 보통 유대인 회당에서 행한 설교와는 패턴이 전혀 다릅니다. 보통 유대인들에게 행한 설교를 보면 구약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설교를 듣는 청중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도 전혀 몰랐고,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설교를 했을까요?
본문을 봅시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2-23) 바울은 우선 아테네 사람들의 풍부한 종교심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22) “종교심이 많다”는 말은 헬라어로 한 단어입니다. “deisidaimonevsterouj"”(데이시다이모네스테로스)라는 말인데, “dievdw”(두려워하다)라는 말과, “daivmwn”(신, 혹은 귀신)이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직역하면 신들을 두려워한다는 뜻인데, 비교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욱 신을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지구상의 어떤 종족들보다도 더 종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의 이 말에 대해서 상반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성을 칭찬하는 의미에서 한 말이라는 해석입니다. 당신들은 정말 종교심 하나는 알아줘야 되겠습니다! “in every way you are very religious.”(NIV,RSV) 그들의 장점을 치켜세우면서 좋은 기분으로 말씀을 듣게 하는, 말하자면 웅변적인 수사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아테네 사람들의 과도한 종교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해석입니다. 당신들의 종교심은 과도한 면이 있습니다. “in all things ye are too superstitious. ”(KJV) “How extremely religious you are in every way.”(NRSV) 바울이 좋은 뜻으로 한 말인지 혹은 비판적인 뜻으로 한 말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바울이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이 다음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23) 알지 못하는 신에게! “!Agnwvstw/ qew'/.”(UNKNOWN GOD) 아니, 아는 신만 섬기는 것도 힘든데,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깁니까? 일설에 의하면 이런 제단의 기원에 대하여, 주전 6세기에 아레오바고에 큰 질병이 유행했는데, 이 때에 구레네 사람 에피메니데스가 와서 이를 구원하고 많은 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렸는데, 그 때에 혹시 빠진 신이 있을까 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희고 검은 양들을 놓아 “!Agnwvstw/ qew'/.”(UNKNOWN GOD)라는 제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이란 칭호가 대문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알지 못하는 신들이 섬김의 대상으로 일반화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다니? 바울이 볼 때에 기가 막힌 일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섬기는 미신의 대상들이 다 그렇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산신령, 용왕님을 섬겼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뚜막 귀신, 장독대 귀신, 대들보 귀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칠성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어떻게 존재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성품이 어떤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느냐구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게 다 미신의 특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깁니다. 알지는 못하지만 섬기는 것은 아주 열정적입니다.
바울은 이제 설교의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알지 못하는 그 신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 여기에는 아테네 사람들의 지성적인 자만심에 대한 도전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들은 그렇게 철학을 많이 공부하고, 그렇게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도대체 알지도 못하는 신을 섬기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아테네 사람이 아니면 다 바바리안이라고 해서 야만인 취급하지 않습니까? 그런 지식인들이 신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섬깁니까? 이제부터 내가 알려줄 테니 잘 들어보시오!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바울은 우선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24) “oJ qeo;" oJ poihvsa" to;n kovsmon kai; pavnta ta; ejn aujtw'/,” 우주(kovsmon)와 만물(pavnta)의 기원은 인간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이 말씀에는 헬라 사람들의 우주 만물에 대한 다양한 철학을 비판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은 우주(kovsmo")와 만물(pavnta)의 기원을 다양하게 주장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우주의 근원은 물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공기라 하고, 어떤 사람은 원자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물질세계가 보다 상급의 세계로부터 유출되어 생성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튼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확실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첫째로,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써 존재한다! 둘째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다! 이와 같은 창조 사상은 유물론자들인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이나, 이성론자들인 스토아 철학자들 모두를 반박하는 내용입니다.
우주 창조에 이어지는 내용은 인간 창조입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26) “ejpoivhsevn te ejx eJno;" ai{matov" pa'n e[qno" ajnqrwvpwn katoikei'n ejpi; pa'n to; proswvpon th'" gh'"” “And He has made from one blood every nation of men to dwell on all the face of the earth,”(NKJV) 인류의 기원 역시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에 “한 혈통으로 만드사”란 구절은 “한 혈통에서 만드사”로 표기해야 합니다. 한 피로부터 인류가 퍼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피에서 모든 족속을 만드셨습니다. 즉, 한 조상 아담을 만드시고 그로부터 만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그리스 사람들, 특히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은 다른 혈통, 특별한 족속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모든 종족(pa'n e[qno" =all ethnics)이 하나의 피로부터(ejx eJno;" ai{matov" =from one blood)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인간(a[nqrwpo")인 이상 인종, 혈통, 종족 차별이 없습니다. 다 혈액형을 보면 ABO 식 인간의 혈액형입니다. 종족이 다르다고 소나 돼지 피를 수혈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또한 사람을 만드신 인간의 창조주이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두 번째 항목은 하나님의 우주 만물에 대한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동시에 철저한 통치자이십니다. “천지의 주재시니”(24) “oujranou' kai; gh'" kuvrio" uJpavrcwn” “He is Lord of heaven and earth,” 주재라는 말은 주인이요 통치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요 통치자이십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여러 신들이 각기 자기 맡은 분야가 있습니다. 하늘은 제우스, 바다는 포세이돈, 지하 세계는 하데스, 불은 헤파이토스, 애정은 에로스, 술은 바쿠스, 전쟁은 아레스, 뭐 이런 식입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신의 통치를 크게 개의치 않고 살았습니다. 바울 당시 아테네 사람들이 좋아하던 두 철학 사조가 그렇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나,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신의 통치를 부정합니다. 그들은 유물론이나 운명론을 믿었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시고, 인간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바빌론 왕 느브갓네살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한 후에 자만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대단한 왕국을 세웠노라고 자랑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잠깐 정신이상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미쳐 있다가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오히려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가로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단4:30-34) 핵심적 내용은 하나입니다. 온 천하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인류의 통치자이십니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몇 가지를 제시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제공하고 살립니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5)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도록 생명을 주십니다. 생명은 생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우주 가운데 지구를 제외하고 생명체가 없거니와, 생명이 자연 발생한 사례가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지구상의 선물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생명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요6:48)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4) 우리 육체의 생명도 하나님이 호흡하게 하시면 살고, 호흡을 거두시면 죽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의 공급도 하나님 선물입니다. 인간이 먹고 사는 양식이 어디서 옵니까? 다 땅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비로 자라나고 생산됩니다. 만일 곡식의 씨앗을 뿌렸는데 생명이 없어 싹이 나지 않는다면 인류는 다 굶어 죽습니다. 생명과 호흡, 만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모든 인생들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과 거주지를 정해주십니다. 한 인생이 얼마나 오래 살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수명을 결정하십니다. “온 땅에 살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26) “oJrivsa" protetagmevnou" kairou;" kai; ta;" oJroqesiva" th'" katoikiva" aujtw'n”(26) “and has determined their preappointed times and the boundaries of their dwellings”(NKJV) 뿐만 아니라 거주지도 정해주십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의 이사 심방을 자주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서 산다는 것이 우연한 선택의 결과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결과입니다.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월세가 되었든 자택이 되었든, 강남이든 강북이든,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결과임을 깨닫고 감사해야 됩니다.
수한과 거주지 경계를 정하는 것은 개인뿐만이 아닙니다. 한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는 하나님이 정해주십니다. 지구상에서 지금까지 어떤 왕조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나라도 국경선이 무한정 지속 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국경선이 다 달라요. 하나님은 지금도 각 나라와 민족의 연대를 정하시고, 국경선을 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인간 활동의 능력을 제공하십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28) “!En aujtw'/ ga;r zw'men kai; kinouvmeqa kai; ejsmevn” “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NASB) 이 부분은 크레타 출신의 유명한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시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의 시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당신을 위해 무덤을 만들었네. 오, 거룩하고 높은 이여. 그테타인은 항상 거짓말쟁이요, 악한 짐승이요, 배만 위하는 게으른 자들이라네. 그러나 당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살아있고 영원히 거합니다. 당신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 에피메니데스는 제우스 신을 위해 이 시를 지었습니다. 헬라인에게 제우스는 평범한 다른 신들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우스는 지상의 사소한 것들을 관여하는 신이 아니라, 천상에서 신들을 지배하는 통치자 격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제우스를 힘입어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제우스를 신으로 인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제우스를 힘입어 산다고 생각한 것을 바로잡아, 참 창조주시요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적용해서 말씀을 한 것뿐입니다. 에피쿠로스 같은 유물론자들은 인간은 신을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단 한 순간의 생존까지도 하나님께 의존하여 숨 쉬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가까이 개입하십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7) 하나님은 어떤 인생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자녀이든 아니든, 적어도 그들의 모든 생존에 개입하고 계신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돌아오라
그러므로 이제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것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첫째로,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 숭배를 버려야 합니다.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24-25) 하나님은 신전을 거처로 삼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각종의 신전을 지어 그 신들이 거기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전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대하6:18) 하나님은 신전에 거주하는 신이 아닙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주 위에 계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도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하나님 신상에 무슨 도움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50:12) 오늘 내가 하나님을 섬기든지 말든지 하나님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요해지시거나, 하나님이 더 커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 신상에 상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우상들을 먼저 제거해야 합니다. 필요 없는 신전을 짓는 일에 피땀을 흘리는 일이 필요 없습니다. 각종 신상을 새기는 일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물질적 형상이 필요 없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런저런 명칭의 신전들이 다 쓸데없습니다. 그것은 다 인간이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섬기는 각종의 우상들도 그렇습니다. 종교성이 있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원주의 사회라서 다 허용은 됩니다만, 그렇다고 다 진리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사회든지 자유와 개방이 극대화 되면 반드시 우상과 도덕적 해이로 멸망한 것을 봅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우상 미신으로 채운다면, 도덕적 해이가 오고 반드시 타락합니다. 오늘 우리는 내 주변에서 먼저 이런 우상과 미신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내가 해야 될 일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야 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27) 원문상에 보면 찾아(seek), 더듬어(grope), 발견함(find)의 순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열심히 더듬으면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케 됩니다. 찾아, 더듬어, 발견하라는 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표현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내게서 멀리 계시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유심히 관찰하면 하나님이 계심을 곧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정도를 알게 된다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자세한 것을 안다는 뜻은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1-3)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 계시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삶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내 삶을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있습니다. 내가 어떤 가문에 태어난 것, 내가 어떤 부모를 갖게 된 것, 내가 어떤 혈액형을 갖고, 어떤 모양으로 태어난 것, 내가 가진 국적, 혈통, 인종, 이 모든 것들 가운데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계절의 변화, 모든 동물과 식물, 생명체들의 생존 방식,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만일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존재하며, 원인 없는 결과들이라고 한다면, 가장 비과학적이고 비지성적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지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라고 한 것은 상당한 아이러니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기의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신 계시, 즉 성경에 의지해서만이 인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만물을 관찰하고 더듬어 찾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자기 주변을 살피면서 하나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첫 단계에 들어선 사람입니다. 오늘 겸손히 자신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게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이 너무나 큰 특권이요 축복임을 또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매일의 삶을 통해서 깨닫고, 하나님과 친히 교제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믿는 하나님
행 17:22-29 / 손상률 목사
사람을 「종교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영적 욕구를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성의 도시로 불리는 희랍의 수도 아덴에서 당대 최고로 명성을 떨치던 철학도들을 앞에 놓고 하나님을 논증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행한 종교 강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도 그 현장에는 동판에 새겨 놓고 기념을 삼고 있습니다. 22절에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시작된 그의 연설은 그 곳 사람들의 종교적 성향이 거리마다 붙어있는 각 종 신의 이름을 보아서 신을 찾고자 애쓰는 영적 욕구를 짐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된 종교적 성향은 제 나름대로 숭배의 대상을 찾아 거기에다 마음을 쏟고 정성을 드리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1:20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2-23절에는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만 섬겨야 되는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게 되는 것은 범죄 하므로 지식과 판단이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서 그래도 어디엔가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자연을 숭배하거나 조상을 숭배하는 헛된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계시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건전한 종교적 성향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도록 일러주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실체를 바로 알고 증거 하는 사명에 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Ⅰ. 영원하신 자존자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3:15에는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 할 나의 표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26:4에는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고 하였습니다.
1. 유일하신 하나님
「하나님」이라는 말은 "전능하다"는 뜻과 함께 유일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말 「하나님」도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로 표현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0:1-3에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이란 여러 가지 우상 숭배하는 것을 뜻합니다(출20:4-5).
그것은 참 신이 아닌 거짓 신이며 그 행위는 헛된 일입니다. 이사야 40:18-19에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섬겨야 됩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신 6:4-5).
사도 베드로도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설교하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4:12).
2. 스스로 계시는 분
하나님은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들처럼 외부의 어떤 세력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3:14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스스로 계신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前提)가 됩니다. 마치 수학이나 기하학에 있어서 공식이 전제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로 우리에게 인식될 때 비로소 인간과 만물의 근원을 알게 되는 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3.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적인 표현으로써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작용을 갖는 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부르며 그 앞에서 여러 가지 종교 의식을 행하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반응도 감정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신을 찾는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기의 의지를 나타내 보이시고 적극적으로 반응하시는 분입니다. 사사기 6:25-32에 보면 기드온이 도끼를 들고 가서 바알의 신당을 모두 훼파해 버렸는데 그 일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자기 아들을 변호하면서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삿6;3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지는 정서를 발휘하십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시고(고후5:14), 노하기도 하십니다(민11:1). 질투하기도 하시고 미워하기도 하십니다(출20:5). 오래 참으시며(롬2:4), 그가 기뻐하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입니다(시18:20).
Ⅱ.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할 때 이는 모든 면에서 부족이 없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설명할 때 하나님께서 안 계시는 곳이 없으시고, 모르는 것이 없으시고, 못하는 일이 없으시다는 뜻으로 표현합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때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의도하시는 선한 목적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자유롭게 행하십니다.
로마서 11:36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1. 창조주가 되십니다.
창세기 1:1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0:26에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24절에도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은 이미 있는 소재를 가지고 개조 하셨다거나 재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신 완전창조요, 절대적인 창조입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뒷받침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시인하고 확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11:3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2. 역사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본문 말씀 26절에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개인의 영혼을 관리하실 뿐만 아니라 민족과 혈통, 그리고 국가와 세계까지 그의 영역 안에서 이를 관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 세계에 공존하며 번영하게 하고자 하는 축복의 약속인 동시에 하나님 자기가 의도하시는 바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년대와 국경을 정해 주시고 이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그 본분을 잘하게 되면 복을 주셔서 형통케 하시지만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길을 가거나 하나님의 목적을 위배하게 되면 징벌하여 멸망케 하십니다(신30:15-18).
이처럼 하나님께서 상선벌악(賞善罰惡) 하시는 간섭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세상에 정의가 살아 있고 죄와 불의가 배척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영광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중에도 자기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사야 43:21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이나 다른 사물에게 또는 헛된 우상에게 돌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실망하신 나머지 진노하시게 됩니다. 이사야 42:8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4:9에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Ⅲ.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주님 기도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축복을 약속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지음 받은 모든 사물이나, 인간이 다 창조 주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가 되는 사람은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43:4에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1. 사랑과 아낌을 주십니다.
말라기 3:17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안다고 하였습니다(마7:11).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세상에서 부름 받은 그의 자녀들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요3;16).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독생자까지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그 이상으로 총애하신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신뢰와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추어 놓고 인간 나라를 경영하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뜻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 또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일을 이루어 가는 주역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엡1:4-5).
구약시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그 후손들에게 특별한 관리를 하셨습니다(신8:1-10). 또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하시고(행13:22), 그의 생애를 지키고 인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 들이요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에 참여하여 그 일을 이루게 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요긴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손바닥의 보배처럼 아끼시고 특별관리를 하십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특별한 은사를 공급하십니다. 부지 중에라도 죄악에 손을 대거나 실수하는 경우가 있으면 이를 깨우쳐 주고 회개하게 하십니다(히12:5). 환난과 역경에 시달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이를 극복하게 하고 승리하게 하십니다(슥4:7).
3. 영광스러운 기업을 주십니다.
로마서 8:17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영광스러운 기업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이루어지는 그 과정이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먼저 고난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은 지극한 영광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빌2:6-11).
이 문제에 있어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4:17-18).
문화와 종교 그리고 공허함
서윤발 목사 / 행 17장 22~31절
최근에 우리 교회에 새로 오신 집사님 한 분을 통해서 제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친한 친구 한 사람과 다시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이슬람교가 국교로 되어 있는 터어키에 나가서 7년째 사역을 하고 있는데 아주 어렵게 그곳 정부의 허락을 받아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터어키라는 나라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밝히고 살아가기도 어려운 나라입니다.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그런 나라에 교회를 세우고 그리스도인들을 모으게 되었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사실 서로가 그렇게 귀한 줄 몰랐는데 이렇게 막상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서 복음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하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 이제는 '이 사람이 그렇게 귀한 사람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런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특히 제 동기들 가운데는 어려운 지역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 친구처럼 이스람교를 국교로 하는 지역에서 몰래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여자의 몸으로 아프리카 오지까지 가서 온갖 풍토병과 싸우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어느 국가라고 밝힐 수 없어서 선교지 소개를 할 때는 그저 A국이니, B국이니 하며 말해야 되는 그런 국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국내에서 함께 생활하다가 복음을 전하러 어려운 지역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소식을 한 번씩 접하게 되면 정말로 가슴이 뭉클해지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또,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도 각자가 자기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러나 항상 이런 선교사들의 소식들을 우리가 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지만 지금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지금도 복음이 땅 끝까지 확산되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기억하게 되고 또 복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최근의 선교사는 아니지만 복음을 이방 지역으로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애쓰고 수고하며 전 생애를 다 바쳤던 바울이라고 하는 성경에 나타난 선교사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Ⅱ. 바울의 선교
바울은 본래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자기 핍박하던 그 예수님을 믿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사도가 된 뒤에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심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다른 사도들은 거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바울은 자기도 유대인이지만 주로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번에 걸쳐서 지중해 연안을 여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가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과거에 바울 자신이 바로 그렇게 복음을 방해하는 세력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 보니까 옛날의 자기처럼 복음을 방해하는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런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들이 있다 할지라도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는 그 날까지 전도와 교육의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바울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은 유대세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지중해 전역에 까지 확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선교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모두 28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지만 그 중에 절반 이상이 바울의 선교여행에 관해서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본문의 내용도 바로 그렇게 바울이 두 번째로 세계전도여행을 하는 중에 일어난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Ⅲ. 아테네
바울이 두 번째 세계전도여행을 할 때는 주로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했는데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그 중에서 아덴 이라고 하는 곳에 들렀다고 했습니다.
이 아덴이라는 곳은 아테네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테네라고 하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곳입니다. 문화와 운동과 철학의 도시 아닙니까?
이 도시는 바울이 이 곳에 도착하기 4-5백년 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기원전 5세기에 이미 전성기를 누린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기원전 5세기경에 벌써 음악당이 있었습니다. 운동경기장도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 운동경기장의 좌석이 6만개였다고 합니다. 지금 사직 운동장의 좌석이 몇 개입니까? 그렇게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음악당과 운동장 말고도 많은 웅장한 신전들과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도시는 기원전 5세기 경에 세계 제일의 도시였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이곳에서 고대의 문학이나 미술이나 철학같은 그런 문화들이 다 자라났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바로 이곳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모든 지식인들은 다 이곳에 몰려들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바울이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과 쟁론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이 과거에 번역이 된 것이라서 이렇게 표기를 했는데 요즘 말로 하면 에피큐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민주주의의 본산입니다. 우리나라도 민주공화국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이 아테네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 도시가 어떤 곳인지를 우리가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독재적이던 로마의 네로 황제도 이 도시만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이 도시는 고대세계에 있어서 정말로 인간 정신문화의 집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이런 도시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떠했겠는가?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도시에 바울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이 도시에 들어서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웅장함? 설레임? 너무나 놀랍게도 바울이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 받았던 그 첫 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웅장함과 위대함과는 좀 다른 것었습니다. 이 도시에 도착하면서 바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 온 것이 무엇이었는가? 우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이라고 사람들이 조각을 해 놓은 그런 신상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 얼마나 신상들이 많았으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그것부터 보였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바울이 말하기를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고 했죠?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아테네에는 어디에나 신전이 있었고 신상들이 있었는데 아테네의 공공장소에 세워놓은 신상의 수만 해도 30,000개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파르테논이라고 하는 유명한 신전이 있었는데(그 신전의 모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신전에도 신상들을 30,000만개나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아테네는 그리이스의 수도로 남아 있는데 지금도 인구가 약 400만명 정도 됩니다. 면적이 부산보다 조금 더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산 길거리에다가 30,000개의 거대한 석상을 세워놓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온 도시가 석상들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고층빌딩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신상을 세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겠습니까?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아테네에 그렇게 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도시의 이름이 아테네인데 이 도시의 이름 자체가 '여신'의 이름입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우상을 많이 섬기고 종교적인 사람들인지 심지어는 23절을 보면 바울이 이 성을 돌아다니다 보니까 어떤 제단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그렇게 새겨 놓은 것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온갖 신들을 섬기면서 혹시라도 자기들이 알지 못해서 섬기지 못한 그런 신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 가지고 그런 일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제단 하나를 더 만들어 놓고 그 제단에다가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그렇게 써 놓았다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있는 신이란 신은 자기들이 다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종교성이 많다. 물론 이 말은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경건하게 산다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뭔가를 섬기고, 뭔가를 향하여 끊임없이 빌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심정은 강하다는 것입니다.
Ⅳ. 종교적 존재 - 인간
사실 이 종교성, 종교적인 성향. 이런 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동물과 전혀 다른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해서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또는 '이성적 존재'라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만으로는 사람과 동물을 완전하게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며 거의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종교적 존재'(Homo Religius)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종교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창세기1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내적 이미지)을 따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靈)적인 존재이시듯이 우리도 영적 존재로 만들어졌고, 하나님께서 인격체이시듯이 우리도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를 찾는 것과 동일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지만 죄로 인하여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으니까 어뚱한 신들을 만들어 섬긴다는 것입니다. 롬1:22-23---▷"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신처럼 만들어서 섬깁니다. 짐승의 모습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깁니다. 벌레 모양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또 그것을 섬깁니다.
이 아테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보다 종교성은 많아가지고 뭔가를 섬겨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니까 온갖 것들을 다 신으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많은 섬기고 있다해서 그곳에 만족이 있었습니까? 어떤 약속의 보장이 있습니까? 생명이 있습니까? 역사가 나타났습니까?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수 많은 신들을 섬기지만 그 속에 아무 것도 분명한 것이 없으니까 이들의 심령은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신을 찾고 있지만 여전히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전통으로 남아있던 인간 정신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전통의 문화들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잠시 잠깐 동안은 즐거움을 줍니다. 자부심을 주고 의미를 줍니다. 그러나 돌아서서 보면 거기에도 만족이 없습니다. 약속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도시야말로 정말로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해서 뭔가 더 확실한 것이 없을까?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그런 초라한 내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Ⅴ. 바울의 메시지
바울은 이 도시에 발을 디뎌 놓으면서 분노했다고 했다. 왜요? 인간 정신 문화라는 것이, 그리고 이들이 갖다 놓은 그 수 많은 신상들이 이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들을 죽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분노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곳에서도 회당을 찾아가고, 시장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당시 시장에는 자유연설대라는 것이 있어서 누구나 나가서 연설을 하도록 되어 있었고, 누가 연설을 하면 자연히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토론을 하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것 전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집약된 복음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 이렇게 신전이 많지만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은 이렇게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으신다.
2)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3)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시고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시다.
4)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고
5) 인류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
6)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원하시고
7)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8) 아테네의 시인중에서도 사람을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노래한 사람이 있었듯이
9) 우리는 다 하나님의 소생이다.
10) 그러니 사람이 손으로 만든 우상을 섬기지 말고 회개하라.
1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13) 그 부활이야 말로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확실한 증거다.
바울은 이렇게 복음의 사실만을 증거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의 사실들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아테네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문화를 발달시키고 그렇게 많은 신들을 섬겨왔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사역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들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 사역을 믿는다면 영생을 얻으리라는 확실한 약속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이 이들과 쟁론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들과 말싸움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문화를 가지고 자부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그 내면에서부터 고민하고 죽어가고 있던 이 아테네의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그 약속을 전달한 것입니다. 얼마나 분명한 것입니까?
그럴 건데요, 그럴 수 있는데요, 이럴 수도 있는데요, 저럴 수도 있는데요... 만약에 복음의 내용이 이렇다면 여러분 확신하며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평생을 통해서 주님의 그 말씀을 따라가려고 하는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글쎄. 일단 와봐. 잘 될 수도 있겠지. 보장은 못한다." 주님이 그러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요14:6절---▷"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추측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어떤 논리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선포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그 사건 앞에서 우리가 회개하고 따라 오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그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시는 너무나 분명한 약속입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며 주님 안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다면 제일 먼저 복음에 대해서 더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더 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기 바랍니다.
Ⅵ. 아테네와 우리시대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보면 사실은 2000년 전의 아테네와 너무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테네는 다른 어느 지역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듯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재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된 지식과 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문명이 발달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 발달한 모든 문명들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만 켜기만 하면 집에서도 편안하게 앉아 가지고 하바드 대학의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을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이제 과거의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가리켜서 이 때 까지는 현대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부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를 더 현대라 부르지 말고 후기 현대라고 부르자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 만큼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달하고 달라진 시대지만 이 시대속에는 2000년 전, 아테네의 사회와 너무나 비슷한 또 한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뭡니까? 바로 우상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영적인 시대' 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이제는 영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런데 그 영적이라는 것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그런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무당과 풍수와 점성술과 고대종교들을 각색한 수 많은 종교들이 지금 이 발달한 시대에 수도 없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1973년도에 우리나라에 정식 등록된 무당의 수가 30,000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5년 뒤에 무당의 수가 80만명이라고 합니다.
이게 뭘 말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에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평강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비적인 것,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말로 신비한 것이고, 정말로 새로운 것들입니까? 아닙니다. 과거에 수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따르다가 멸망하고 버렸던 것들을, 다시 주워가지고 재생시킨 것들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인들 마저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종교, 이렇게 발달한 사회속에서 오직 복음만을 믿으며 산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너무 독단적이야, 기독교는 너무 자기 주장만 해. 그런 생각들 속에서 다른 어떤 신비한 것들을 향해 마음이 끌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자기의 사상을 가지고 이것이 길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제시하는 그런 이론들 앞에서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신비한 효험이 있다고 하면서 소개하는 그런 수 많은 거짓 종교들의 이설들을 듣고 마음이 쏠리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이 무엇인가요? 멸망인 것입니다.
Ⅶ. 결 론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발달한 아테네에 바울이 첫 발을 디디면서 분노했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발달한 문화가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발달한 지식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닙니다. 수 많은 우상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참 진리를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마세요.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만들어 주신 생명의 길입니다. 여러분, 다른 것들을 기웃거리지 말고 이 복음안에서 영생의 선물을 얻고 진정한 위로를 얻고 평강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이 아테네에서 담대하게 그 복음만을 증거했던 것 같이 우리도 이 시대 가운데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함으로서 생명을 나누어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먼곳에 가서 복음 전하지 못하고, 내 생애의 시간을 다 바쳐서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우리의 삶의 좌표를 그렇게 맞추어서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화인이냐? 신앙인이냐?
행 17장 22~31절 / 오정호목사
최근 정부 주도로 청와대의 경비구역안에 있는 남대문 반대편의 숙정문이라고 하는 북대문이 있는데, 거기에서 굿을 하려고 하다가 양식 있는 국민들과 기독교계의 반발로 취소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입니까? 인공위성이 날아다니고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살면서도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일을 자행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고사를 지내는 것을 과거의 전통이며 문화라고 말합니다. ‘IT강국이다, 혹은 문화 강국이다’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영적인 지식이나 상태는 형편이 없습니다. 문화라고 하는 미명하에 미신적으로 치우치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은 시대마다 반복적으로 일어났었습니다.
우상이 잔재한 문화속의 복음
사도바울은 혈혈단신으로 우상의 도시 아테네에 머물렀습니다. 아테네는 여신 아데미에서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입니다. 아테네에는 많은 신들과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문화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적인 욕구가 강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복음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시대의 풍조와 유행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는 국제도시였습니다. 흩어져있던 유대인(디아스포라)들이 살았던 국제도시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성이 많았습니다. 이들의 종교성은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것을 문화로 치부했습니다. 우상숭배를 전통속에서 내려오는 문화로 치부하면서 살았습니다. 아테네사람들의 문화성과 종교성은 우상으로 인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문화의 도시였지만 뜨거운 복음을 가진 사도바울의 눈에는 그 도시는 구원이 필요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전통문화 미명아래의 우상숭배
전통문화를 살린다는 미명아래 많은 우상들이 다시금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영적인 무지가 이 시대를 우상의 도시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상은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지난여름에 비가 오는데도 이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날이 손 없는 날이었답니다. 그래서 이삿짐센터를 불러서 난리가 났었습니다. 우상 숭배하다보면 영의 눈이 감기게 되어 영적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명절이면 홀로 교회 다니시는 분들은 제사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사는 우리의 전통의 것이며 기독교는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합니다. 제사는 삼국시대에도 없었고 고려 시대에도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정책을 실시하면서 고려말엽에 들어온 중국의 성리학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제사 제도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황실만 제사를 실시했습니다. 평민들은 어림도 없었습니다. 제사는 황실의 특징이었습니다. 소위 종묘사직을 세우고 그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다가 조정에서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아 나라에서 권장한 예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점차 문화화되고 종교화되었습니다. 이 내력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제사 지내는 것은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가운데 오백년 가진 역사입니다.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효를 기초로 하는 복음
명절의 제사제도로 부딪칠 때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불효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존중하는 마음으로 잘 섬기고 공경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 나가 자기친족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라고까지 했습니다. 성경에 부모공경에 대한 교훈은 참으로 엄격합니다. 상식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 생각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분명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부모님께 그리고 가족들에게 최선의 섬김과 공경을 다함으로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실 때 부모님께 최선의 효를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죽은 이후에 귀신이 되어 제삿밥을 먹으러 오는 것과 같은 일은 없습니다. 우상숭배는 영적무지가 만들어낸 소산일 뿐입니다.
우상문화를 변화시키는 복음
사도바울은 우상의 도시 아테네에서 홀로 서 있었지만 복음에 대해서 분명하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영적인 무지로 인해 우상을 섬기는 것의 잘못을 알게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왜 존재합니까? 복음의 진리를 지역주민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교회는 존재합니다. 왜 한국의 교회가 존재합니까?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영적인 무지를 깨우치고 우상숭배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라고 한국교회는 오늘도 복음의 진리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에 대해 깨우치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상숭배로 만연한 이들에게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은 우주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며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17장 24절)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은 피조물입니다. 우상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우상재물에 관해 설명하면서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고린도전서 8:4-6)’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상은 피조물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사도행전 17장 25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금이나 은을 녹여서 만든 생명없는 우상과 생명을 친히 주시는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에 대해 모두 알지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개념조차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참 하나님을 전해야 하며, 우상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고쳐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시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생명되시고 우리에게 호흡주시고 만물을 주신 그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은혜와 선물을 주시기 원하는 주님이십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모두를 한 혈통으로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신앙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윤리입니다. 신앙이 없이 윤리와 문화만 강조하면 거기에는 인간의 본성만 남게 됩니다. 아무리 문화인이 되고 교양인이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구원이 없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신의 소생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와 주님의 힘을 입어 살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앙의 명문가문을 이루기까지
저의 증조모님부터 우리 가문이 예수를 믿게 되어서 이렇게 아름답게 복음의 가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고향에 방문할 기회에 어르신의 산소에 갔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산소앞에서 생각했습니다. 제가 성장했던 곳은 안동 밑에 있습니다. 유교가 셉니다. 지금도 안동에 가면 갓 쓰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곳에 가련한 여성이 시집와서 예수 믿는다고 얼마나 핍박을 받았겠습니까? 옛날의 교회는 동네마다 있는 것이 아니라 십리 이십리씩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핍박속에서의 홀로 시작한 믿음의 생활이 후손들을 복되게 했습니다. 바울의 전도로 디오누시오와 다말이라는 여자가 복음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 후손이 복을 받게 됩니다.
전후좌우를 둘러봐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거든 ‘주님 제가 우리 집안에 아브라함이 되겠습니다. 제가 우리 집안의 사도바울같이 쓰임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문을 믿음의 명문 가문으로 세워 가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
행 17장 22~31절 / 김충식목사
사도행전에 나타난 설교는 주로 베드로와 사도바울의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첫 설교가 매우 중요한 설교이며, 바울의 설교는 사도행전 17장에 나타난 아레오바고 설교가 유명하면서도 특징이 있는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나 바울을 비롯한 복음전도자들은 복음에 대한 큰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나타내고 싶어 했습니다. 이 시대도 문화와 문명이 발전되고 사상이 많이 변천했지만, 그리스도인은 생명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하면 증거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베드로나 바울과 같이 주님을 분명히 보여드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고 송구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를 보면 차이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게 할 수 있을까? 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를 증거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만 그 안에도 차이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가?를 증거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메시아이시기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믿음의 대상이 되시며,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확실한 답과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주님이시고,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시며,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기초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를 역설합니다. 바울은 하나님만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철학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만, 결과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사변적이면서 세상적인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하게 하나님을 가르친 것은 전도 여행을 하는 중 아테네(Athens)를 들어가보니, 파르테논 신전(Temple of Parthenon)을 비롯한 많은 신전들과 우상들이 있고, 신상들이 시내 도처에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바울은 격분하여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아테네는 최고의 학문과 철학, 예술, 문화를 자랑하였으며, 종교성이 대단한 도시였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종교성으로 우상숭배도 극심했으며, 특히 철학적으로는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 school)와 스토아학파(Stoicism)가 있었는데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을 최고의 덕으로 여기며, 신앙적으로는 무신론을 주장하는 학파입니다. 이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관심을 갖고, 어떻게 하면 인생을 더욱 즐기며 재미있게 살 수 있겠는가?에 전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사후세계도 믿지 않습니다. 오직 현재의 삶을 즐기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반면에 스토아학파는 운명론자입니다. 지성적이면서 도덕론자입니다. 여기에 모든 것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자(汎神論者)입니다. 그들은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지성적임데도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운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두 철학 사상이 양대산맥을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무신론자들이 있는가 하면 범신론자들이 있습니다. 당시 아테네에는 공식적인 우상이 300개나 되었고, 신상들이 무려 30,000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볼 때에는 아테네는 문화와 철학이 상당히 번창했던 반면에, 영적으로는 부패하고 죽은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무신론자나 범신론자 및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이 시간에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기에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온 우주에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강조합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시며, 온 인류의 역사와 우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만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를 막론하고 신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에서라도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공사를 할 때에,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고사라도 지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불안하고 무언가로부터 보호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하고, 무엇인가를 의지하고 싶기에 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신앙하는 신이 참 신이든, 거짓 신이든 상관없이 하나는 믿고 싶은 것입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자처하는 이들도 막상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신을 찾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위대하신 절대자가 계신 것 같고 그것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신이 참 신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너희들에게 참 신을 가르쳐주겠다. 너희가 만든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을 보았는데, 그 신이 바로 참신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라는 단을 새긴 것은 혹시라도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어서 그 신을 섬기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 해서 만든 것인데, 바울은 이것을 접촉점으로 하여 신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과 유일한 참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소생이기에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합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하며, 29절에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말씀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아담의 후예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족의 조상들이 다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씨와 박씨의 조상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이 다르다면 미국인과 우리의 생김이 달라야 하며, 아프리카인과 우리가 달라야합니다. 물론 다른 것이 있기는 합니다. 그들은 코가 높고 우리는 코가 작고, 그들은 피부색이 하얗거나 검은데 우리는 황인종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모습만 약간 다르지, 인간의 모든 구조는 똑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그들도 생각하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그들도 느낍니다. 젊은 남녀들이 만나면 서로 좋아하고 사랑할 줄 알며, 부모와 자식들은 가족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공동의 선과 악이 무엇인지를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만약에 인류의 조상이 다르다면 미국인들은 원숭이처럼 생기고 우리는 고양이처럼 생겨야 하며, 아프리카인들은 ET처럼 생겨야 할 것 아닙니까? 어떻게 똑같은 모습과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인류의 조상이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인류의 조상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리스도인은 어린 아이라도 인류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가 곧 아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소생이기에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며칠 전 월간잡지 「리더스」(Readers)의 글을 읽는데 「그가 그립다」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읽지 않고 제목만을 보면서도 인간은 자신의 뿌리를 그리워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멀리 떠나있으면 부모를 그리워합니다. 가까이 있을 때에는 모르고 살다가도 멀리 있으면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이 부모입니다. 자신의 뿌리가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유도 그 곳이 자신이 출생한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민을 가서 오래 사시는 분들은 한국을 그리워합니다. 그들의 뿌리가 한국이기에 그리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소생이기에 인간의 뿌리인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찾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그립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립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뿌리가 하나님이기에 바울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권면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다 같은 소생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구분이 됩니다만 그래도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소생이기에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만이 인생을 축복해주실 수 있기에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하실 수 있으시며,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면서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진정한 구원의 축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성경 본문 25절을 보면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8절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호흡하게 하시며, 만물을 주셨다고 합니다.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는 것입니다. 물이 필요할 때 물을 주시고, 공기가 필요할 때 공기를 주시고, 식사가 필요할 때는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이기에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 수 밖에 없고, 하나님 안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궁극적으로 책임지시고 축복해 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서 행복하고 축복된 삶을 산다고 할 지 모르지만, 누구의 인생이든 먹구름이 끼이고 앞이 캄캄하며 절벽과 같은 것을 만나는 삶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뒤돌아보면 그때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함께 하시고, 축복하신 것을 경험합니다.
어느 분들이 고아원을 방문했는데 어떤 소녀가 손수건을 한 장 들고 울면서 서있는 것입니다. 고아원을 방문한 일행 중 화가가 한 사람 있었는데 소녀에게 ‘왜 이렇게 울고 있느냐?’ 하였더니 ‘어느 분이 손수건을 선물해 주셨는데 그만 잘못해서 손수건에 잉크를 떨어뜨렸어요’ 합니다. 소중히 여기는 손수건이 흉하게 되어 소녀는 슬퍼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화가는 소녀에게 ‘그 손수건을 일주일동안만 빌려줄 수 없겠느냐’ 하였습니다. 소녀는 흔쾌히 허락하였고, 일주일 후에 손수건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손수건을 보니 더 아름답고 예쁜 손수건이 되었습니다. 잉크 떨어진 것을 중심으로 화가가 그림을 그려서 더 아름다운 손수건이 된 것입니다. 인생도 살면서 먹물이 튀기기도 하고, 잉크가 떨어지기도 하고, 엉망진창된 삶을 살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 때마다 찾아오셔서 ‘네 인생을 나에게 잠깐 빌려주지 않겠니?’하시며,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고, 가치 있고, 축복된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테네에 있는 여러 신들 즉 제우스(Zeus), 포세이돈(Poseidon), 바카스(Dionysos), 비너스(Venus) 등 수없이 많은 신들이 우리를 축복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인류를 궁극적으로 인도하시고 축복하실 수 있는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전한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참신이시며,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소생이며, 하나님만이 인생을 궁극적으로 축복하시는 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치면서,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일을 위해 정해진 한 사람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 정해진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미 자연 세계나 역사를 통해서 희미하게라도 신의 존재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풍광이 좋은 곳을 가면 ‘조물주가 계시구나, 하나님이 계시구나’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미국 서부지역 요세미티(Yosemite) 지역에 갔을 때에 엄청난 바위 밑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때는 설악산이나 오대산을 가서 하나님의 신비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장가계나 계림의 기묘한 자연 경관을 보면서 하나님의 오묘한 창조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복음을 접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듣지 아니하여도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으로는 희미하게만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살겠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아레오바고 설교를 마칩니다.
아테네를 여행해보신 분들은 파르테논 신전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 밑으로 조금 내려가면 커다란 둥근 바위 광장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곳에서 주로 재판을 했는데 소크라테스(Socrates)도 그곳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곳이 철학적인 논쟁이나 기타 변론을 하는 장소인 아레오바고입니다. 아레오바고에 모인 사람들은 바울을 말쟁이나 미개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었고, 그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축복된 삶을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지금도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기를 소망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이 연상되어집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
행 17장 22~34절 / 신성종목사
미국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father's day를 지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세 아버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를 낳아 길러주신 [육신의 아버지]가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신앙을 길러주시는 [영적인 아버지인 주의 종들]이 있고, 끝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해주시고 인도해주시며 사랑해주시는 [영원하신 아버지인 하나님]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날의 공적인 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dandelion(민들레꽃)입니다. 이 민들레는 밟으면 밟을수록 더욱 자라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품과도 같아서 민들레를 아버지의 꽃으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의 영원하신 아버지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말씀의 배경
바울은 아덴의 아레오바고라고 하는 법정에 끌려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아레오바고라는 말은 헬라의 군신 아레스의 동산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과연 그가 전도를 할 수 있는가를 재판을 받게 되는 자리에서 오히려 전도를 하였습니다. 조금전에 봉독한 말씀이 바로 그 증언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1) 본문 22절에 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22절에서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그들의 종교성을 먼저 지적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이큐(지능지수 intelligence quotient)인데 이것은 태어날 때가 가지고 태어납니다. 선천적입니다. 둘째는 이큐(감성지수)인데 이것은 태어난 후부터 이루어집니다. 후천적입니다. 셋째는 에스큐(영성지수)인데 이것은 중생한 후부터 형성됩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은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가장 근본적인 세 가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의 근본]을 알 수 없고, 둘째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의 사명]을 깨달을 수가 없고, 셋째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참 행복]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배의 대상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그냥 [하늘]이라고만 불렀습니다. 23절에 보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말은 경배의 대상을 바로 알지 못한 채 섬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사기 2:10절을 보면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는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2. 그러면 우리가 믿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본문에 보면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24절에 보면 “우리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신”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라는 말이요, 또 그가 모든 것을 다 창조한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도 세상의 잘못된 신들, 자기들이 만든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돈과 집과 재물과 직위와 명성과 자동차와 옷과 교육과 정부와 종교와 자신을 믿고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했습니다. 딤전 1:17절에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2) 또 우리 하나님은 25절에 보면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필요로 하신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헌금과 봉사를 필요로 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참으로 자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필요해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을 창조하셨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를 위해서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의 25절입니다.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다시 말하면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십니다.
(3) 다음으로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주재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또 26절에 보면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연대와 경계를 정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란 말씀입니다. 생명의 길이도 하나님이 정하셨고, 심지어 거주의 경계도 하나님의 정하셨습니다. 너는 어디서 살아라 하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주택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샀다고 착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보약 먹고 운동을 많이 한다고 그것으로 우리의 생명의 연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정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하면서 그의 뜻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이 역사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이 하늘 저 멀리 계셔서 우리와는 관계가 별로 없는 분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7절에 보면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믿습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셔서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문제를 다 맡아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이 신앙이 없으면 그 사람은 형식적인 신앙인이요, 죽은 신앙인이요, 최소한 병든 신앙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창조하셨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찾고 그를 알라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번에 보면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계시고, 성경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이 우주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 즉 성경의 지도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만이 찾을 수 있고, 말씀을 통해서만이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안다(yada)는 개념은 [깊은 관계]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알 수 있고, 그와 깊은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요 17: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영생이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 영생입니다.
(2)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란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영원하신 아버지십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아버지의 날을 맞아 육신의 아버지를 위하듯이 오늘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 것을 깨닫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풍성히 받기를 축원합니다. 2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기를 축원합니다.
(3) 그러면 오늘의 우리들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30절에 보니까 [먼저 회개]입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회개의 이유가 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자에 대해서 알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회개가 무엇입니까? 회개는 [토해내는 것]입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예 화) 이유식 할 때의 아이들(먹으라는 음식은 먹지 않고, 상 밑에 있는 콩나물 대가리와 단추를 먹는다)
회개를 성경적으로 좀더 말씀을 드리면 크게 두 가지 면에서 해야 합니다. 첫째는 부정적인 면에서 해야 하고, 둘째는 긍정적인 면에서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면에서의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고, 긍정적인 면에서의 회개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슬퍼하고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후에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회만 하고, 그만 자살하였습니다.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반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다처럼 슬퍼하고 후회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회개하여 다시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회개는 마음의 변화와 함께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는 것은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깊이 모르고 있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3. 끝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궁극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3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하는 궁극적인 것, 즉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두 가지를 준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였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셔서] 왜 믿어야 하는지의 증거를 남겨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궁극적인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믿게 하여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준비하신 이유를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자유는 우리들에게 있지만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 자신이 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신 것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말씀입니다. 또 주님의 부활은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구원을 받고, 우리의 부활의 보증수표인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1)
행 17장 22~34절 / 서금석목사
들어가면서
교회에서 정한 교회력(교회달력)은 대림절(대강절)부터 시작됩니다. 대림절이란(Advent) 도착(Arrive)을 뜻합니다. 공항이나 대합실에서 오기로 약속되어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다시 오시기로 약속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가 바로 대림절입니다. 대림절 첫째 주일이 교회의 신년 정월 초하루가 되는 셈인데 대림절 첫째 주일은 해마다 11월30일에서 가장 가까운 주일로 11월27일부터 12월3일 사이의 어느 한날이 됩니다. 대림절 동안은 네 번의 주일을 지키게 되는데 그 기간은 짧게는 22일간 길게는 27일간으로 금년의 대림절은 12월3일부터 시작해서 성탄전야인 24일까지로 22일간이 됩니다. 대림절의 의미는 크게 세가지입니다. 2000년전에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회상하는 것과, 지금도 우리의 마음과 삶의 현장에 새롭게 임재해 주시며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에도 주님께서 임재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과, 마지막때에 영광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가 바로 대림절입니다. 대림절 기간 동안 주님께서 말씀으로 영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해 주시기를 사모하며 은혜의 시간들이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내용입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는 유명합니다. 유명한 만큼 관심도 많고 설교에 대한 시각도 다양합니다. '아레오바고'는 '아레스의 언덕'이란 뜻인데 '아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는 전쟁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는 '아레스'신에게 제사하던 곳이었는데 후에는 공개강연장으로도 사용되었고, 주로 12명으로 구성된 재판을 하던 곳으로 사용되었기에 사람들은 재판을 어디서 하든지 아레오바고 법정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연석으로 된 계단을 오르면 돌로된 광장이 있습니다.
오늘은 먼저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내용인 하나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바울 설교의 결론 등을 짚어보고 다음 주 설교에서는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에 대한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은
1. 창조주(創造主)이시요 천지(天地)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24-25)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主宰)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4, 25절에서 바울의 분명한 하나님 관(觀)에 대항 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모든 의욕을 잃고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좀처럼 탈진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외출했던 루터가 집에 돌아와 보니 부인 폰 보라 여사가 상복을 입고 잇었습니다. 깜짝놀란 루터가 묻습니다. "어떻게 된거요?" 부인이 말합니다. "루터의 하나님은 죽었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게요?" "여보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당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침울하게 있을 수는 없어요. 당신이 그토록 힘이 빠져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보니 당신의 하나님은 죽은게 틀림없지 않소?" 그말은 들은 루터는 벌떡 일어섰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헬라신들의 우두머리는 제우스 신입니다. 그러나 제우스 신 역시 헬라의 여러신들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아덴에는 약 3만이 넘는 신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여러신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제우스 신이나 헬라 사람들이 섬기는 3만개가 넘는 신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고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꼭 묻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분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구하라고 보내시는 하나님께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뭐라 할까요?' 물었을 때 하나님이 뭐라 하셨어요? '나는 스스로 있는자'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으려 합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녀들과 같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가 있나요? 인간이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하나님이 없어지나요? 하나님 무시한다고 하나님이 무시당하십니까? 바울은 먼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많은 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야 있겠습니까? 아주 어린아이가 어떻게 부모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겠어요? 그러나 부모가 어린아이의 모든 것을 돌보고 양육하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수준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입니다. 그러나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세상이 그냥 굴러가도록 버려 두시지 않고 주관하시고 섭리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구경만 하시지 않습니다. 방관하시지 않으십니다. 주재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손으로 지은 집'이란 무엇을 가리킬까요? 아레오바고 언덕 위쪽을 보면 '파르테논 신전'이 보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다 해도 그것은 인간이 지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하나님께 봉헌하며 드린 기도가 생각나십니까? 열왕기상8:27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아무리 대단한 건물이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이 지은 건물에 사시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사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 성전에서는 거룩한데 세상에서는 그렇지가 못해요. 이 세상 모두가 다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신전이나 성전에 국한 될 수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상숭배하는 사람들 - 신에게, 귀신에게 먹을 것, 재물 가져다 바칩니다. 그거 받고 노여움 풀고 복달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제사아닙니까? 예배는 달라요. 우리가 하나님을 도울 수 있습니까? 오만입니다.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도울 수가 있어요. 교회다니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것입니까? 헌금하는 것 하나님 위해서 합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도움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분입니까?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지 마세요.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도 결국 자신을 위해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부족 때문에 사람의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사람에 대하여 설명하는 동안만이라도 호흡을 멈춰 보십시오. 심장은 하루에 103,689번 뛰고 피는 하루에 2억6천8백만km를 달립니다. (서울 부산이 500km라면 하루에 26만8천번 왕복하는 것입니다) 숨은 하루에 23,040번 쉬고, 750개의 근육이 움직이고 손톱은 하루에 0.000115cm만큼 자라고, 머리카락은 0.04285cm자라고, 잠자는 시간빼고 하루에 33.000번 정도 눈을 깜빡이고 두뇌는 700만개 세포가 운동하고... 숨차시지요? 호흡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호흡못하면 한 순간도 살수가 없습니다.
2. 사람과 역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26)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年代)를 정하시며 거주(居住)의 경계를 한(限)하셨으며"
26절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몇가지 더 설명하고 잇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했을까요? 당시 아덴 사람들은 그들이 아티카(Attic)본토의 흙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자랑한데 대해 바울은 인류는 모두 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한 조상, 한 혈통의 후손임을 강조합니다. '한 혈통으로'는 '한 사람으로부터'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한 혈통이었던 인류가 왜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지게 되었습니까? 인간의 죄때문이지요.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겠다는 욕심과 교만 때문에 언어와 문화와 혈통이 달라졌지만 본래는 한 사람 - 누구?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인간을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인간에게 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말씀입니다.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죄가 들어온 후에 본래는 엉겅퀴와 가시를 냈습니다. 남자는 땀흘려 일해야 했고 환경은 오염되어 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문제 해결의 길은 - 오염된 환경, 땅 문제등 -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사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역사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 속에서 함께 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십니다. 27절 후반절입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바울이 왜 이 말을 했을까요?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은 이 땅과 만물 사람을 창조하셨을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역사를 관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당시 희랍의 에피쿠로스 학파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다구요? 신(神)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간의 역사를 전혀 간섭하지 않으니 있긴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바울은 바로 이점을 바로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3. 인간이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하나님(27-29)
"27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민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考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가 잇는 분입니다. '혹 더듬어 찾아'라는 표현은 어두움에서 무엇을 찾는 것 같이 불확실한 일 같지만 불가능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게서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우리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분이지만 그러나 가까이 계시기에 만날 수 잇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도 만나지도 못하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못된 곳, 엉뚱한 곳에서 만나려 합니다. 29절 말씀처럼 신을/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가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들어낸 - 한마디로 우상에서 만나려 한다는 것 -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는 찾는데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어요. 잘못된 곳에서 하나님을 찾아요. 하나님은 사람 손으로 바쳐진 제물이나 받아서 먹고 사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수많은 신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생명도 없는 우상숭배 -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을 때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였습니다. 아버지가 잔치집에 간 사이 동네사람이 아버지가 파는 우상 앞에 제물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어릴때부터 영성이 뛰어난 아브라함은 작은 우상은 다 부수고 큰 우상의 손에 몽둥이 하나를 쥐어주고는 제물을 큰 우상 앞에 놓았습니다. 돌아온 아버지 데라가 화가 나서 어찌 이리되었느냐고 묻자 우상들이 제물을 서로 먹으려고 싸움하다가 큰 우상이 모두 부숴 버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말합니다. "우상이 무슨 생명이 있다고 저희들끼리 죽이고 말고 하겠느냐?" 때를 놓치지 않고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생명없는 우상을 왜 섬깁니까?" 하나님을 찾으려면 만나려면 제대로 알고 바른 곳에서 찾아야지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만족, 자기 중심에 빠져서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까 만나지 못합니다.
신명기4:29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이사야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때에 그를 부르라" 호세아10:12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起耕)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마음밭을 갈아엎고 간절히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비처럼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요한계시록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만족을 구하려 합니다. 물질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참된 만족과 행복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우리 안에 예수님 모시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면 그곳에 천국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만나면 평안이 있습니다. 하나님 만나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찾고 찾으면 만나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자 마자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분은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 되는데 예배 중에 붉은 십자가와 아기가 자기에게 확 달려와 얼떨결에 받고 보니 아픈 어깨가 다 나았습니다. 십자가와 예수 한꺼번에 확신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 부활의 주님 만나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참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만나주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찾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나는 일입니다.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도 온몸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에 대해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4. 바울 설교의 결론
⑴ 회개하라
30절을 함께 봅니다. "30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던 시대'-어떤 시대를 말합니까? 복음이 전해지기 전, 예수가 이땅에 오시기 전에는 잘못된 것이 있어도, 혹 우상숭배가 있었더라도 미련함과 실수를 용서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다르다 이겁니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고 듣지 못해서 우상을 숭배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참아주셨다. 잘못하긴 했지만, 무지해서, 몰라서 그랬기에 참으실수가 있었지만 이제는 복음이 확실히 전해졌고 따라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되었기에 아무도 예외없이 꼭 해야 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 회개해야 합니까?
⑵ 심판이 있기 때문에
31절을 함께 봅니다.
"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公義)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회개해야 할 몇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날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심판합니까? 재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심판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대통령도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심판대앞에 서야 합니다. 누구든지 반드시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히브리9: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마지막 심판이 있음을 믿습니까? 사도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누가?-믿는 성도들이)더욱 불쌍한 자리라" 심판을 통한 천국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열심히 믿는 것 자체가 헛된 것이요 믿는 성도들이 불쌍하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심판도 하나님 나라도 분명히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심판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로 예수를 죽은 자가운데서 살리신 - 예수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분명하게 만나지 않았습니까? 예수는 분명하게 부활하셧기에 분명한 심판주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심판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회개하고 철저하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정리하면서
오늘 설교는 퍽 딱딱한 내용이었지만 그러나 꼭 필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시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는 계시지 않고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있어서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은 인류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분. 또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한 혈통으로 지으시고 땅에 살게 하시고 역사를 주셨다 사람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는데 찾을 의지가 약하던지 엉뚱한 곳에서 찾기 때문에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부활의 주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시니 반드시 회개하고 예수 믿고 구원얻으라 하는 것이 바울 설교의 결론입니다.
우리 모두 회개하고 거듭난 구원의 삶을 삽시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2)
행 17장 22~34절 / 서금석목사
들어가면서
헬라인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두 개의 자루를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하나는 앞에 달고 다니고, 하나는 뒤에다 매달고 다니는데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계속 집어 넣습니다. 그리고 뒤에 메고 다니는 자루에는 자기의 허물을 집어 넣고 다닙니다. 뒤에 있는 자루가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허물은 자기에게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앞자루는 남의 허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의 허물만 보고 이러쿵 저러쿵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분별한 비판은 상대방에게 심각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서로를 비판하게 되면 올바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비판에서 오는 인간관계의 단절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이 직면한 최대의 위기는 "관계의 위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최대문제는 바로 무분별하고 공격적인 비판과 깊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비판은 인간관계를 무너뜨리고 나아가서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줍니다.
그러나 비판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건강한 목적을 위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역사 발전과 사회 발전을 위해서 건전한 비판은 꼭 있어야 하고 또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선입견과 감정을 떠난 비판은 당사자와 비판하는 사람 모두에게 좋은 것입니다.좋은 비판은 사람들로 하여금 한 단계 더 발전하도록 하는 좋은 자극과 도전을 주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감히 바울의 설교를 조심스럽게 평해보려고 합니다. 사실 설교자체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기시 되어왔습니다. 또 바울은 기독교 역사가 낳은 최고의 신학자요 전도자요 설교가였습니다. 그런 바울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얘기한다는 것은 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강해를 하면서 이 부분에 와서 그냥 넘어가려니 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에 인간이 범할 수 밖에 없는 실수와 한계가 있었습니다. 바울 같이 위대한 전도자에게도 실수와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사실은 - 오해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시행착오를 즐기는 것은 아니니까 - 어떤 면에서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좋은 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과 시행착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함께 찾아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실제적인 도움을 받아봅시다.
1. 바울설교에서 배워야 할 점들
(1) 회중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22절) 22절을 봅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오늘 본문 22절부터 31절까지가 바울이 아덴에 도착하여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아덴은 '희랍의 눈이요 예술과 웅변의 어머니'로 알려진 도시였습니다. 헬라철학과 문화에 능했던 바울은 이러한 아덴에 대단히 흥분도 했고 기대감에 벅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류 문화와 역사발전에 기여한 두 개의 큰 기둥을 든다면 하나는 헬라 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히브리 사상입니다. 두 개의 기둥에도 정통한 바울이 그중 하나인 헬라사상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도시 아덴에 왔으니 어찌 큰 감회가 없었겠습니까? 바울은 은연 중에 자기가 배웠고 알고 있는 철학의 실력을 한번 저들과 당당히 겨루어 보고 싶은 마음의 충동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레오바고에 서서 당대의 내노라하는 철학자들과 변론하게 됩니다. 물론 바울이 전도의 방법으로 변론을 택한 것은 그리 바람직한 전도방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변론에 앞서 아덴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방법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아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바울이 선택한 훌륭한 방법은 바로 '칭찬'과 '인정'이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凡事)에 종교성이 많도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바울이 아덴에서 많은 신전과 신상을 보고 한 말 같은데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칭찬'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일단 다양한 종교성에도 긍정적인 자세로 출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호기심 많은 모습에 대해 책망이 아니라 일단 '칭찬'과 '인정'으로 출발합니다. 바로 이점이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바울이 가지고 잇는 배워야 할 점입니다.
바울은 덮어놓고 아덴 사람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긍정하는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전투적으로 싸워야 할 상대로서가 아니라 구원해야 할 상대로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 싸워야 할 상대와 구원해야 할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른지를 아시겠지요? 싸움의 상대와는 철저하게 싸워야 하고 구원해야 할 상대와는 철저하게 마음을 돌이키도록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원해야 할 상대와 싸우려 한다면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아덴 사람들이 우상숭배 많이 한다고 버릴 수야 없지 않습니까? 바울이 3차에 걸쳐 그 많은 지역에 선교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간단하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 중심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니 상대방에 대하여 칭찬할 여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헐뜯고 깎아 내리기 바쁜데 어느 세월에 칭찬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교와 전도는 언제나 전투하듯 해서는 않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대상은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이며, 우리가 기도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입니다.
유명한 중국의 성도인 윗치만 니의 간증 가운데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중국의 예수 믿는 한 성도의 논에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있는데 마침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한 밤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자기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이 다 빠져 나가곤 했습니다. 그 성도의 바로 옆에 있던 이웃집의 논에서 밤새도록 그 성도의 논에 고여있던 물을 다 빼 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튿날 이웃에게 가서 따지고 이웃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논에 고여있던 물을 다시 자기 논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자신의 논에 물을 다시 끌어왔지만 그 마음 속에 도무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며 기도하던 이 농부의 마음 속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날 밤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새벽녘이 되어서 자기 논의 물을 빼어서 이웃의 논에 물을 대어 주었습니다. 이일이 계기로 이웃집 농부는 감동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좋은 이웃으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지 않는 이웃을 전도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덮어놓고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들의 닫힌 마음이 열립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전도방법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2) 복음 전도를 회중의 관심사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23절)
.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시작함에 있어서 아덴사람들이 이해할 수 잇는 주제부터 시작합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의 화두(話頭)는 '알지 못하는 신'(An unknown god)이었습니다. 당시 아덴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아덴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 사상에 대단히 수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수용적인 태도는 그들이 섬기는 우상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자신들이 알지 못해서 섬기고 있지 않지만 분명히 또다른 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알지 못해서 섬기지 못했다 하더라도 섬기지 못한 것 때문에 화를 당할 수 잇다고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덴 사람들의 우상 중에는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우상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아덴사람들의 관심에서부터 설교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잇었습니다. 바울 자신의 관심사를 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신앙체험과 복음보다는 먼저 상대방의 호기심 관심을 가졌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울의 모습에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언제나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내가 좋으면 상대방도 좋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내게 필요없으면 상대방도 필요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좋은 인간관계,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관심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남자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정화목의 비결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만큼 고객의 취향을 잘 분석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1월14일은 한해를 잘 계획하고 시작하라고 다이어리(Diary 日記帳)를 선물하는 '다이어리 데이'(Diary Day)라고 합니다. 2월14일은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발렌타인 데이'(Valentine's Day). 3월14일은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하는 '화이트데이'(White Day), 그래도 여기까지는 좀 알겟는데 4월14일도 있어요. 무슨 날인지 아세요? 이성친구가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짜장면을 먹는 '블렉데이'(Black Day)라는 얘기를 듣고 참 별난 날도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11월11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11월11일은 '빼빼로 데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저는 빼빼로 데이가 무슨 날인가 생각했데 알고보니 11월11일이 1자가 네 번 겹치는 날이라 과자 빼빼로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더라구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빼빼로 만든 회사에서 상품 팔려고 낸 아이디어 같은데요. 속보이는 상술(商術)이긴 하지만 참 기발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도 자신들의 물건을 팔기 위해 고객들의 취향과 관심에 대해 그렇게 연구하는데,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도 복음이 필요한 이웃들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 준비없이, 열심만 가지고 전도한다고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도대상에 대해 연구하고 기도하고 전도할 때 전도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3) 상대방 수준에 맞춰 전도했습니다.
어떤 교인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같은 교인이 앞자리에 앉아 같이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서로 기도하고, 인사도 하고, 가다가 식사때가 되어서 한 교인이 도시락을 꺼내 먹고 있었습니다. 앞에 앉아 있던 교인이 생각하기를 같은 교인이니 조금 잡수시라고 인사라도 하지 않겠나, 나누어 먹지 않겠나 하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혼자만 먹는 거예요. 그래서 앞에 앉아 도시락 먹고 있는 교인 들으라고 혼잣말처럼 말합니다. '성경에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도시락 먹던 교인이 대꾸합니다. '성경엔 다른 좋은 말씀도 있습니다. '십계명에 보면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혼자 도시락을 먹던 사람이나 그것을 보고 삐진 사람이나 피차 일반입니다. 수준이 맞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수준이 맞을 때 쉽게 친해집니다. 그래서 동향인들은 쉽게 친해지고, 직업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잘 모입니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수준을 고려했습니다. 아덴은 당대 제일의 철학이 발달한 곳이었고 따라서 수많는 철학자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라서 그 도시의 많은 사람들의 지적 수준도 대단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철학적 수준에 맞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레오바고 설교내용이 그렇습니다. 28절을 보면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헬라 시인의 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수준에 맞춰 전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요즘 눈높이 교육이라는 TV 광고 보셨지요? 눈높이가 중요합니다. 교회학교 설교하는데 천지창조가 어떻고, 인간의 죄성이 어떻고, 종말이 어떻고 하면 아이들이 쉽게 이해하겠습니까? 새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하루에 30분씩 성경 꼭 읽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나오라 하면 어떻겠습니까? 성숙한 신앙인들도 어려운 것을 새신자들이 쉽게 감당하겠습니까?
바울은 어디를 가든지 그곳의 형편과 수준에 맞게 행동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겐 유대인들에게 맞는 언어와 행동을 했고,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에게 맞는 적절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아덴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철학적인 지식을 염두에 두고 철학적인 방법으로 다가갔습니다. 바울이야말로 눈높이 교육을 몸으로 실천한 위대한 교육자요 전도자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 9:22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표준새번역) "…나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2. 바울 설교의 문제점들
(1) '알지 못하는 신'(An unknown god)의 정체
바울은 아덴사람들의 '알지 못하는 신'에서부터 자신의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아덴사람들이 말하는 '알지 못하는 신'은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덴사람들은 바울의 말처럼 종교성이 많았습니다. 아덴에는 우상이 넘쳐났습니다. 사람의 수보다 우상의 수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모자라 이름을 모르는 '알지 못하는 신'까지 만들었습니다. 아덴사람들이 섬기는 신 중에 혹시 빠진 신이 있다면 그 빠진 신이 진노할까봐 겁이나서 미지의 신까지도 섬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동남아에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예수 믿겠느냐?' 했더니 싑게 믿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기분이 좋아서 얼마후에 예수 믿겠다한 그 사람 집에 갔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 사람이 섬기는 신들이 많이 있는데 맨 마지막에 '예수신'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다른 우상들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다른 우상과 함께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만, 세상사람들은 유일신 신앙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우상에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아덴사람들도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있을까봐 '알지 못하는 신'으로 명명햇습니다. 좀 복잡하게 설명했습니다만 쉽게 정리하면 '아덴 사람들이 말하는 '알지 못하는 신'은 기독교신앙이 고백하는 하나님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을 들어 하나님을 변증하려고 했습니다. 참 무모하고도 힘든일입니다. 아덴 사람들도 확실치 않은 우상을 철학적 방법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결국 바울의 변론은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전도는 결코 철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과 고백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분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인데 이 믿음은 변론을 통해 증명하려 했습니다.
(2) 철학적 전도의 한계 - 복음의 선포가 부족
바울은 아덴 선교에서 너무 그들의 지성을 의식한 나머지 철학적 방법으로 접근하여 변론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복음은 선포입니다. 복음은 증명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그 자체가 능력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복음을 전하여야 했는데 변론했습니다. 철학적으로 이 경험 때문인지 그는 디모데전서 6장 20절에서 '변론을 피하라'라고 했고 디모데후서 2장 23절에서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했습니다. 디도서 3장 9절에서는 변론은 무익한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아덴에서의 변론이 바울에게 얼마나 뼈아픈 상처와 아픔을 남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성경구절들입니다. 우리도 바울의 실수를 종종 되풀이하지는 않습니까? 상대가 학식이 높다면 우리는 그들의 지적 수준에 맞게 전도하려고 자기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전문용어를 써가며 복음을 전달합니다. 체계적이고 지적인 전도가 아니면 공부 많이 한 사람들을 전도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전도는 꼭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복음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무슨 어려운 신학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 설교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농부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이해했습니다. 학식이 없던 백성들도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뜻과 천국의 비전을 선포하셨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복음의 선언이 필요하지, 결코 철학적이고 전문적인 방법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복음자체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의 변론 이후에 바로 복음이 능력이라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후에 이러한 자신의 깨달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2-24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2:2을 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능력이라는 말로 '두나미스'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다이나마이트가 바로 이 '두나미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폭탄이 떨어지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무너진다.'라는 무언의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죄악과 사치의 상징이었던 당시의 로마에 복음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고 바울은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복음이 곧 능력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세대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한국 교회사에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 아버지는 점쟁이었습니다.
길거리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관상을 봐주고 돈을 벌었습니다. 어느날 길을 지나가던 한 집사가 백낙준의 아버지를 보고 한마디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그런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할텐데 그 짓 빨리 그만두고 예수나 믿으시오." 그때 그는 눈을 흘기면서 '너나 잘 믿어라. 재수 없게 왜 떠들고 가'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잠을 자려고 누워있는데 집사님이 한마디 던진 말이 계속 귀에서 맴돕니다. '그런짓 하다가 당신도 망하고 자식들도 망해' 잠을 자도 그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그는 모든 것 을 다 청산해버리고 예수를 믿었는데 그 아들이 연세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지나가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위대한 인물을 낳았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의 능력 앞에 겸손해 집시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믿지 않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그 복음이 능력이 되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으시요,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단순한 선포 - 선포에 능력 있음을 믿고 담대하게 전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
행 17장 24~28절 / 정근두목사(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올 들어 두 번째 이웃 초청 잔치는 지난 월요일 밤으로 막을 내렸습니다만 오늘 설교는 이번에 처음 오신 분들을 마음에 두고 하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에는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전파자 사도 바울이 헬라 문명의 근원지인 아테네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그 나름대로의 종교를 갖고 사는 헬라 사람들에게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합니까? 사도행전 17장 27절 말미에서부터 읽어봅시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달리 말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존재하느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한다면 거의 틀림없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일 것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타락한 다음부터 하나님을 그들의 생각 저 끝으로 몰아내었습니다. 그 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이라도 한다면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분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세상에서 나만 존재하듯이 나를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하실 때는 마치 여러분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처럼 대하십니다. 밝은 달이 비취는 물가에 서면 달빛이 마치 여러분에게만 비취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엄청 크셔서 한 부분이 여기 있고 다른 부분은 저기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의 전부가 여기에 있고 또한 그의 전부가 저기에 있습니다. 아니 모든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여기 한 청소년이 있습니다. 청소년이라기보다는 사실 청년입니다만 그는 자기를 아직 청소년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마마보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집을 떠나 도망하고 있습니다. 형이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길도 없고 시외버스도 없던 시절입니다. 손에 도로 지도 한 장도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만 그 방향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떠오르는 해를 보고 방향을 감지했기에 해가 지면 가던 길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들판에서 잠을 자야하지만 캠핑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텐트도 없고 베개도 없기에 돌을 하나 골라서 베개 삼아 잠들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맨 꼭대기에 서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이 청년 야곱은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야말로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구나.”라고 두려워하며 고백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날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하신다면 그 지점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그 때 했던 고백을 우리는 어디서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을 만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지순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다른 성경을 보십시오. 사막의 광야에 한 늙은이가 있습니다. 나이는 꽤 되었지만 노인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나이 80세였지만 아직도 생각과 체력이 젊은이와 같았습니다. 수 년 동안 양을 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실 당대의 최고 학부출신이기도 합니다. 당시 세계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과학자로서 그는 멀리서 일어나는 현상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가시덤불에 불이 붙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막에서는 덤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은 가끔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지금 특이한 것은 덤불이 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당대의 과학도답게 그 현상을 가까이 가서 관찰하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 덤불로 다가서고 있을 때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어떤 곳이 거룩한 곳입니까? 예배실 가운데 여기 강대상이 위치한 곳입니까? 대사원이나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거기 사막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만나주시는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사막, 그 어느 곳이나 다를 바 없지만 어디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곳은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을 살펴보십시오. 한 소년이 장막에서 잠을 자려고 하고 있습니다. 장막이란 텐트로 만들어진 교회당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구조가 조금씩 바뀌기도 했겠지만 그 때는 예배당 어딘가에 봉사자들이 먹고 자는 숙소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배처소에는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았던 시간입니다.
어딘가에 한 늙은 제사장도 막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입니다. 지금 어린 소년, 아직 학교에 갈 나이도 안 된 어린 소년도 거기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습니다. 청소를 하고 창문도 열고 닫기도 하는 일을 돕던 소년이 막 잠자리에 누워 잠이 들려고 하는 찰나에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늙은 제사장에게로 달려가서 말합니다. “불렀습니까?” “아니, 부르지 아니했다” 다시 잠자리에 들어 잠이 들려는 순간 또 한 번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갑니다. 성막에는 자기와 엘리 제사장외에는 아무도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불렀습니까?” “아니 부르지 아니했다. 가서 자거라” 또 다시 잠 드려는 순간 세 번째로 “사무엘아, 사무엘아”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서 묻습니다. “부르셨습니까?” 그 때 늙은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알아채고 “다시 부르거든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라고 일러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소년 사무엘을 찾아 왔습니다. 소년 사무엘은 잠자리에서 누워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알려주시지 않았던 때의 일입니다.
보십시오. 잠자리, 바로 거기가 사무엘이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이라고 하면 조용하고 거룩한 곳이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의 성전은 결코 조용하고 엄숙하고 그럴듯한 분위기가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거기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장소입니다. 오늘날 대성당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임에 틀림없습니다.
성전 안으로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짐승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들어가지 아니하려고 울고 시끄럽게 떠들며 발버둥 칩니다. 죽은 짐승의 시체하며 뿌려진 피, 게다가 돈을 바꾸며 짐승을 파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범벅이 된 장소가 구약 시대의 성전입니다.
그런 시끌벅적한 성전으로 한 사람이 들어섭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짐승들이 떠드는 곳에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다.” 천사들의 찬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이사야는 만나 뵙게 됩니다.
그는 절망합니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뵈었으니 죽게 되었다고 탄식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가지고 날아와서 그 입술을 정케 합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는 사죄의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습니다. 특별한 장소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존귀하신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순례의 길을 걷다가, 여행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묵상하고 적용해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웃 초청 잔치가 인연이 되어서 오늘 다시 예배당을 찾은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이 진리를 묵상해 보십시오. 이 동일한 진리를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모든 성도 여러분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이전과 동일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시는 여러분, 이 사실은 여러분이 짓는 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짓는 모든 죄악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행한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으로 내어 뱉는 말들, 여러분의 행동으로 짓는 죄들은 모두 하나님의 눈앞에서 행해진 것들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한 거짓말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행한 죄악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하나님,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 그 분의 눈앞에서 행한 죄악입니다. 여러분은 주일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그날을 기억하여 안식하며 거룩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 분의 면전에서 행한 행동의 사악함을 기억하십니까?
선생님이 없을 때는 아수라장이 되는 초등학교 교실 상황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오시면 한 순간에 조용해지는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린아이들도 선생님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달리 처신합니다. 떠들다가도 선생님이 오시면 조용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것을 보시는 그 분의 목전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팔을 펼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숨결보다 가까이 계십니다. 그처럼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무관심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지를 인식하기 바랍니다.
천국을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칭송합니다. 수천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서 환호합니다. 모든 천사들이 그 서열을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40년 넘도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생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는 죄악을 생각해보십시오. 팔 벌리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악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60년 동안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를 거부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심장의 모든 박동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찌 나이든 사람뿐이겠습니까? 개구쟁이 소년을 보십시오. 그에게 재능과 활력을 부어주신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불경건이며 사악한 죄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은 그처럼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속이려고 듭니다. “누가 나를 지켜보랴?”고 죄를 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양심이란 감시 카메라가 없으면 더욱 악을 행하기에 담대해 집니다. 인간의 양심은 너무 부패해서 가까이 계신 하나님조차 감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의 호흡을 주관하시며 먹고 입을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속이려드는 사악한 인생을 보십시오. 그러나 모든 인생은 펼쳐진 책과 같이 하나님 앞에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읽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의 행동과 생각, 그 동기를 보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도피할 곳은 천지간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놀라운 진리이지만 동시에 무척 감격적인 진리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모은 돈을 들여서 소위 성지에 가서 특정한 복장과 음악과 분위기에 접하면 하나님을 보다 손쉽게 만난다고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을 내려오게 할 필요도 없고 모셔 올릴 이유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특정한 장소에 가서 특별한 복장을 하고 특별한 사람을 만나서 특별한 음악과 예식에 동참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웃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진 놀라운 특권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합니까? 특정 지역이나 거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무감동한 여러분 자신의 마음자세입니다. 마음을 바꾸면 즉각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바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여러분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가 바로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언제나 여러분의 숨결보다 더 가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바로 여러분에게 사면장을 들고 다가서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통해 여러분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지금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단번에 응답하십니다. 그는 단번에 구원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단번에 주십니다. 단번에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예수께서 처벌받으셨기에 단번에 용서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새로운 삶을 사셨기에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됩니다.
부르짖기만 하면 그 어떤 사악한 죄인이라도 용서를 받습니다. 진실로 믿고 부르짖는 순간에 용서하십니다. 그 어떤 죄인이라도 사면장을 받게 됩니다. 복음은 진실로 매우 좋은 소식입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가까이 계신 하나님에 관한 소식은 이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삶의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성도답게 고상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세상을 사는 보통 사람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꼭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경건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그 분을 통해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가까이서 보고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은 바뀝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 말하는 모든 것들, 세우는 모든 계획들을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을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를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광채가 우리 삶에서 비췰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특별한 사람만 드릴 수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컴퓨터에 몰두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람들을 다루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그 무엇에 몰두해 있어도 여러분의 의식은 다른 것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도 누군가 다가서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일에 빠져 있어도 누군가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 생애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생애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 분을 언제나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그 분을 통해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환난 날 우리가 만날 도움이십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 것입니다.
일반적인 주부들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크게 많이 바깥을 나가 다닐 일도 없습니다. 대부분 집안에서 반복적인 일을 할 것입니다.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그릇을 씻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집안 손질을 하곤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사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꼭 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는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망각했을 때입니다. 보십시오. 광야에서 양을 치는 일이란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거기에서 만나셨습니다.
성소의 문을 열고 닫고 마루를 청소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사무엘을 만나셨습니다. 가장 평범하고 무료하고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감동으로 몰아가는 놀라움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도 기대와 감격으로 낙관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을 특별한 감격과 기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 하나님과의 내밀한 교제가 우리의 영혼을 환희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이 복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전하는 설교가 기쁜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그 분을 통해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위로가 됩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 무엇이 여러분의 위로가 될 수 있습니까?
죽음 다음에 무엇이 펼쳐질 지 아무도 말해줄 수 없을 때 진정한 위로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외에는 무엇이 우리를 위로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그 분을 통해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는 놀라운 사실만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양향모목사 / 행 17:24-25
제가 여러분에게 우리가 가진 믿음의 위대성을 이야기 하고 그 믿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로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믿음을 강조한다고 하니까 그냥 입술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합니다.
저를 위시해서 오직 믿음을 중요하게여기는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흉악한 죄인이고 또 똑 바로 살기에 얼마나 연약한가를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내 죄가 너무 흉악하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하여 영원한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내가 너무나 불쌍한 인생이기 때문에 이런 나를 죄에서 멸망에서 구원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무나 감격스럽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연약한 나를 다시 똑바로 살아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가 아니라 연약함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를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임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오직 믿음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복음을 믿는 믿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할 때 거기에 전제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고 왜 그것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는가를 알려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해서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그것을 믿는 믿음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주로 설교하는 목사는 성도들이 이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전제하에 그 결론인 복음을 설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뿌리가 되는 구약성경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알고 구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는 믿음이 복음을 믿는 믿음에 포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설교하는 것을 보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방민족에게 갈 때 먼저 그곳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들어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설교를 할 때는 바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고 구약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로 복음을 이야기하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들이 알고 있는 구약성경의 내용을 상기시키면서 그 뜻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구약성경을 많이 공부하고도 그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설명을 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가 그렇습니다. 아레오바고에 모여 있는 아덴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종교심이 있어서 이런저런 신들을 섬기고 있었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도 있었지만 정말 알아야 할 참신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신을 대하는 방법도 잘못되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이해를 하도록 설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중에도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방신들 중에 한분처럼 생각하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도 이방신을 섬기는 방법과 비슷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홀히 여기고 구원의 길을 이방 신을 섬기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한 설교의 내용을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간단하지만 바르게 알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천지의 주재시니
본문 24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은 우리가 믿는 모든 믿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고 우리의 믿음의 시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왜 창조주가 되시는지 어떻게 창조주가 되시는지 설명하거나 증명하지 않습니다. 당연하고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아니시라고 하면 우리가 믿는 모든 믿음은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을 안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공격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과학이라는 것을 동원해서 이 우주 만물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겨서 진화된 것이라고 퍼뜨립니다. 그러나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진화론이 과학이 아니고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을 믿도록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창조나 진화나 다 같이 과학적 근거가 없는 믿음이라고 한다면 창조는 훨씬 더 과학적이고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20절에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천지만물을 보면 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우주만물은 그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라는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우주만물의 조화가 너무나 세밀하고 너무나 기묘하기 때문에 이 우주를 바라보면서 이 우주 만물이 우연히 생겨서 저절로 진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과학자가 말하기를 우주 만물이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하는 것은 큰 점보 비행기를 부속 하나하나 볼트나 너트까지 다 분해해서 모래사장에 흩트려놓았는데 부품 스스로가 다시 헤쳐모여서 다시 비행기로 조립이 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주 만물은 저절로 생길수도 없고 저절로 이렇게 기묘하게 조화를 이룰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이렇게 완벽한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이시라고 했습니다. 우주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주 만물은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천지의 주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할 때 물론 예수님도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주님이라는 뜻으로 씁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분도 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구원의 주재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최우선적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사람이 먼저입니다.”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보다 어떤 제도보다 자연이나 동식물보다 사람이 먼저이고 사람이 좋게 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좋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먹고 마시고 행복해하는 도구로 사용하도록 주셨습니다. 우리는 만물을 다스리고 활용하며 사는 만물의 주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먼저라고 할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보다 먼저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 위에 오를 수는 없으며 사람의 뜻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하나님의 뜻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또 사람이 먼저라고 할 때 조심할 것은 구원도 사람의 행함이 먼저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 편에서 사람의 방법으로 사람의 행위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한 일부 기독교인들이 구원에 관한 일도 하나님의 뜻보다는 인간의 뜻을 앞세워서 엉뚱한 길로 가게 만듭니다. 사람이 행한 알량한 아주 작은 눈에 보이는 선행을 가지고 마음 속 깊이 있는 추악한 죄를 가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흉악한 죄인이며 인간의 행위로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시지만 그 뜻을 거역하고 사람의 선행이나 고행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신칭의의 구원은 즉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천지의 주재 구원의 주재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복음에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 있다는 이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24절 하반절과 25절에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이 하나님이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을 만드신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엉터리로 신을 섬겼습니다. 아덴 사람들은 신이 그들이 만든 신전에 계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전을 어머 어마 하게 아주 화려하게 만들어 놓으면 거기 신이 들어와서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들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엄청난 신전들을 지었지만 바울은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나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말합니다.
사실 다윗이 하나님이 계실 성전을 건축한다고 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쾌히 승낙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다윗의 손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지만 내심 성전건축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만 계신다고 생각하거나 성전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될까봐서 그런 형상자체를 좋아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도 그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지은 건물에 하나님이 머물러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서 오히려 나쁜 짓만 하고 잘못된 성전제사 때문에 나라가 망합니다. 몇 번이나 성전은 허물어졌고 예수님도 성전에 돌 하나라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무너질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화려한 성전을 짓는다고 면죄부를 팔고 타락을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교회당을 성전처럼 건축하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교회가 교인들이 함께 예배를 드릴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회당 건물을 너무 신성시 하여 필요이상으로 크고 화려하게 짓고 또 무리한 건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그로 인한 부작용이 있는지 모릅니다.
신전이나 성전이나 교회당이나 사람의 손으로 지은 그런 건물 안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영광을 위한 자기 자랑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전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며 또한 무엇이 부족하여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만 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신이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이야기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치라고 강요를 하고 그것을 챙겨서 자기들이 가졌습니다. 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신으로 만들거나 신이 사람이 가진 것을 착취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귀신들은 철저하게 사람의 것을 착취하는 신들입니다. 귀신이 뭐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차려주는 제사상을 받아먹어야 산다고 하겠습니까? 무당들은 무엇을 하든지 돈을 뜯습니다. 돌아갈 노자 돈이 없어서 귀신이 못 돌아간다고 돈을 요구하고 뭘 많이 바쳐야 장래일도 말해주고 복도 준다고 가르칩니다. 결국은 그 돈이나 음식들은 다 귀신이 아닌 사람들이 가져갑니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들이 성전에도 교회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소나 양이나 짐승의 피나 제물을 좋아하신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를 생각하고 자기가 죽을 대신 짐승의 피를 흘린다는 제사의 본래 정신은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뭐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의 손으로 잡아 드리는 짐승을 잡수시는 분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신약시대의 헌금도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교회가 교회의 일원인 성도들을 위해서 교회 안에서 한 몸 된 형제자매들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교회 앞에 내어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헌금은 내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나라인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헌금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앞서 인용한 25절 하반 절에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무엇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생명도 호흡도 만물도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 생명은 우리가 가진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이고 호흡은 육신의 생명을 좌우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살아 있는 생명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우리 육신이 숨을 쉬고 살아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육신의 호흡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살아 있는 존재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명과 호흡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필요한 모든 만물들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우주나 지구나 태양이나 공기나 물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세운 공로나 선행이나 그런 것을 자랑하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아무리 자랑스럽고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거기에 하나님을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만물 가운데서 행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 공로로 돌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삶 우리의 믿음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이방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오해를 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천지의 주재이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
행 17장 28~34절 / 김영규목사
인간은 신의 소생이다
지난주에는 바울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설교 중에 22절에서 28절 상반절까지의 말씀을 전해드렸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을 소개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첫째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주를 통치하시는 섭리의 주인이시다. 특히 인간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인간 세계를 철저하게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오늘은 거기에 이어서 세 번째 주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바로 전 인류를 심판하시는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심판하십니다. 심판을 얘기한 것은 구원의 필요성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우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부터 말씀합니다. 인간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알아야만 왜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을 하시는 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28) 바울은 이 구절에서 유명한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의 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라투스는 바울의 고향 길리기아 출신으로 제우스 신을 위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우리 모두 제우스와 함께 시작합시다. 오, 인간들이여, 결코 그를 언급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길에는 제우스로 충만합니다. 모든 인간들의 모임에, 바다에나 항구에나 제우스로 충만합니다. 모든 방면에 우리는 제우스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소생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의 싯귀 중에 인간은 신의 소생이라는 부분을 인용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그리스 사람들의 인간관을 그대로 채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인간은 신의 소생이라는 생각을 인용했을 뿐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요? 성경의 인간관은 창세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형상”(!l,x,)이란 말은 어떤 幻影이나 대리적 형태를 의미하는 말로, 흔히 image란 말로 번역합니다. “모양”(tWmD_)이란 말은 유사성, 즉 닮았다는 뜻으로 likeness란 말로 번역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어떤 점이 하나님을 닮았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격체라는 점,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라는 점, 의와 진리를 추구하는 도덕적 존재라는 점 등입니다. 이 중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영적 존재, 특히 도덕성을 지닌 영적 존재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생깁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표를 이렇게 설정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3:10)
인간의 인격성이나 도덕성은 인간의 위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 사이에 위치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계를 관리하는 위치에 놓여졌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6,28)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땅과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도 숭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에덴 동산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아테네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자신들을 신의 소생이라고 하면서 신과의 교제는 없고, 오직 돌이나 조각물 앞에 굴복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입니까? 신의 소생이면 신의 소생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창조주와의 교통 없이 피조물 형상을 숭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 모든 우상 숭배를 보세요. 거기에 하나님은 빠지고 오직 우상만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던 모든 신들은 다 짐승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태양신 라를 비롯하여, 호르스, 오시리스, 토트, 이시스 등등의 신들은 항상 독수리, 자칼, 코브라, 황소, 개구리와 같은 짐승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도 대개는 사람이나 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동양 사람들이 섬기는 용은 여러 짐승을 집합해 놓은 가상의 동물입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들이 신을 섬기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형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범죄행위입니다. 성경은 우상에 대해서 이렇게 조롱합니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115:4-8) 어떤 사람들은 반박합니다. 우상은 신이 아니라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신전에 만들어 놓은 신상들은 단순한 상징물이 아닌가? 그것이 스토아 학자들이나, 현대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성경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10)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괄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게 하며,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12-14)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도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15-17)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 나무의 얼마로 불을 사르고 그 숯불 위에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사44:18-19)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단순히 우상숭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형상이 바로 도덕적인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우상과 미신은 인간의 이기적 마음을 부추기는 방편들입니다. 도둑놈, 깡패, 사기꾼, 난봉꾼도 다 섬기는 미신이 있어요. 그렇다면 그들이 믿는 대상은 도덕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경고하신 내용이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이고, 둘째는 도덕적 타락, 그 중에서도 간음죄, 성적인 타락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타락에 대해서 참고 견디십니다. 그러나 무한정 참으시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오늘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심판의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천하를 심판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바울은 오늘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인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즘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강조하는 것이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은 벌도 주시지 않고 마냥 죄를 눈감아 주시는 하나님으로 잘못 가르칩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보세요. 하나님은 죄를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심판의 결정판은 세상 종말의 심판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31)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역사 심판과 관련하여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로, 역사의 종말이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세상에는 두 가지 역사관이 있습니다. 첫째는 순환적 역사관이고, 둘째는 선형적 역사관입니다. 순환적 역사관이란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 사상입니다. 우주 만물이나 인간 역사는 끝없이 반복된다는 생각입니다. 선형적 역사관이란 성경의 역사관입니다. 우주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하나님의 창조로 세계가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우주의 심판과 종말로 이 세상은 끝이 나고 하나님이 재창조하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됩니다.
인류 역사의 총체적인 심판은 바로 이 종말에 집행됩니다. 현재에도 심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의 눈에 잘 띄이지 않을 뿐입니다. 개인의 범죄나 민족과 국가의 범죄나 반드시 처벌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에 하나님은 계약대로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영적 사망이라고 합니다. 노아 시대 인류는 전 지구적인 홍수로 거의 전멸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패륜으로 말미암아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했습니다. 바벨탑 시대 사람들은 언어 혼잡과 인간 상호간의 소통의 단절이라는 원천적인 벌을 받았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도 일종의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유럽 인구 중에 전사자가 9천만 명이나 되는 대살상이 일어났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3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이고, 둘째는 기근이고, 셋째는 전염병입니다. 어쩌면 현 세대 인류는 이미 이런 심판을 이미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중세 페스트나, 천연두, 혹은 암을 고치면 다른 병은 없습니까? 에이즈가 생겨나고, 신종 플루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됩니다.
그러면 언제가 종말입니까? 열두 제자들도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1:7) 그러나 반드시 때가 있습니다. 성경의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아주 확고합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2:4,9)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2:5,16)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2-3)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3: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4:17) 현재 종말이 더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참고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 뿐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은 아주 공의롭습니다. “천하를 공의로 심판” 하십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가장 크게 외치는 불평은 바로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점입니다. 정치인, 사상가, 철학자, 교육자, 모두가 외치는 구호는 평등입니다. 기회가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 그러나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바로 인간 자신의 죄악성에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반세기 동안 실험한 게 뭡니까? 평등한 사회 만들려고 하다가 망한 거 아닙니까? 차별화 되기를 원하고, 높아지기를 원하고, 남보다 잘나기를 원하는 인간이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자기 모순입니다. 천하에 인간은 완전한 공평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역사의 종말에 가장 공평한 하나님의 심판이 집행됩니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시9:8)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시96:13, 98:9)
셋째로, 심판자가는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류에게 구원자가 정해져 있듯이 심판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심판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심판을 주관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신 동시에 심판자가 되십니다. 그의 첫 번째 오심은 구원을 위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 오심은 심판을 위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27-30)
회개하라 명령하셨다
이제는 마음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우상 숭배를 하면서 어영부영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과거의 불신앙과 죄악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인지? 저는 지금 철학 강의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과거 우리의 죄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과거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우리는 대개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무신론자, 범신론자, 아니면 불가지론자였습니다. 이것은 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엄청난 모욕입니다. 엄연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살았는데 괜찮겠습니까? 인간들은 무시당했을 때 가장 화를 냅니다. 네가 나를 무시해! 그런데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살았다면 하나님께 벌 받지 않겠습니까? 가만히나 있으면 50점은 됩니다. 우상, 미신, 살인, 간음,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살았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아주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아테네 사람들의 과거는 무식의 시대였다고 선언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30) 여기 알지 못하던 시대란 말은(crovnou" th'" ajgnoiva") 무식의 시대란 뜻입니다.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과거에 무식의 시대에 살고 있었소!”라고 하면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발할 겁니다. 내가 왜 무식한가? 세상적으로는 유식하시겠지요.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끼를 꼬박 먹었으니 얼마나 유식합니까? 농담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다 무식한 시절이었습니다. 세상 지식의 무식이 아니고, 영적인 무식입니다. 대학교를 나와 박사 학위가 여러 개 되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식쟁이들이 지금도 세상에 가득합니다. 오늘 자신을 보세요. 내가 아직도 무식의 시대에 있는지?
무식의 시절에는 하나님이 대하시는 방법이 다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는 죄에 대하여 철저하게 간섭하시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죄에 대하여 상당히 관용적으로 대하십니다. 좋게 말하면 관용이고, 나쁘게 말하면 내버려 두는 겁니다. 놔둬도 망할 사람들을 굳이 간섭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6,28) 오늘 말씀에도 보면 무식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십니다. 간과하셨다는 말은(uJperidw;n : 본문, 롬3:25) 못 본척(overlooked) 지나치셨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에는 “눈을 감아 주셨다”고 했고, 표준새번역에는 “그대로 지나치셨다”고 했고, 현대인의 성경에는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고 했습니다. 영문성경에 보면 God winked at(KJV), overlooked(NIV, NASB, RSV, NLT)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영적으로 무식한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잠시 눈 감고 계셨습니다. 묵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행14:16) “묵인”이란 말이 바로 내버려둔다는 뜻입니다. “ejavw” 영어로 하면 let it be!
그러나 무식이 마냥 허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식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 지식도 그렇잖아요? 세상에서 무식한 것이 남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만, 결코 자랑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영적인 무식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세상에서 수치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인간으로서 자랑스런 것은 아닙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창조주를 모르는 것은 무식 중에 상무식이고 인생에 결정적인 불행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영적 무식쟁이들에 대해서 이런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영적으로 무식하면, 반드시 망한다! 영적 무식은 인생 멸망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충만할 때 최고의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후에 누리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을 알고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34)
그러므로 이제는 결단합시다. 영적 무식에서 벗어나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아는 자리로 돌아오세요. 오늘 하나님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명령(paraggevllw)은 사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공개적으로 다 알도록 내려진 공식적인 명령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입니다. 회개하라!(metanoei'n) 돌이키라! 인생의 방향을 바꾸라! “tou;" me;n ou\n crovnou" th'" ajgnoiva" uJperidw;n oJ qeo;" ta; nu'n paraggevllei toi'" ajnqrwvpoi" pavsin pantacou' metanoei'n” 이전의 사상, 가치관, 사고방식을 통째로 버리세요. 무신론, 범신론, 불가지론, 우상숭배, 미신적 사상들, 다 버리세요.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는 과거에 무신론자였습니다. 우상과 미신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뜻을 알지 못한 무식쟁이였습니다. 내 인생이 내것인 줄 알고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살았습니다. 이제 내가 과거에 하나님 뜻을 거스리고 살았음을 인정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이제 오늘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믿습니다.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여 내 마음에 오셔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시고, 내 인생을 다스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영적 무식쟁이로 살지 마세요. 하나님 자녀로서 축복된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양향모목사 / 행 17:29-31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하면 사람들은 오해를 합니다. 저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무조건 믿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무조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은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믿음을 최고라고 하는지, 왜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인지를 바로 알고 믿습니다.
또 사람들은 우리들을 우리가 아는 지식에 아무런 증거도 없는 것인데 무조건 믿는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그 사실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거기에 대한 여러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 창주주가 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죄가 있는 자를 심판하시고 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에 대하여 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제일의 증거입니다. 성경말씀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역사들을 기록한 책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뜻을 바르게 알게 해주시는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이 확실한 증거입니다. 내 속에 그것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신 것이 증거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시작 된지 2천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사탄과 그 세력들이 무수히 그 증거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했지만 진리를 거부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무신론자들이 우리를 비웃고 반대하지만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 설교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증거를 보고 증거가 있다고 해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믿음에는 확실하고 믿을만한 많은 증거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시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본문 29절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덴 사람들은 종교적인 면이나 철학적인 면에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들의 신관이나 철학들은 아주 잘못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진 잘못된 신관을 이야기 하고 그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 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바로 앞 절의 말씀을 빗대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28절 하반절의 말씀에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라고 하신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주전 300여 년 전에 아라투스(Aratus, B.C.331-240)라는 유명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헬라 사람으로 천체에 관한 시를 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쓴 시 중에 “우리는 그의 소생이니”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덴 사람들도 그 시인을 잘 알고 있었고 이 시의 구절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그의 소생”이라고 할 때 ‘그’는 고대 로마의 최고신이라고 믿었던 ‘주피터’.(제우스와 동일 신)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주피터가 가장 중요한 신이라고 믿었고 그들 자신들은 주피터의 소생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주피터가 참 신이 아니고 하나님이 참 신이시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바르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그 시인이 말한 것처럼 신의 소생이라고 믿고 있고 우리도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소생으로 믿는다는 것을 먼저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기 소생이라는 말은 자녀라고 번역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신이 창조하시고 지으셨다는 의미에서 그의 소생이라고 합니다. 너희들 주장대로 주피터 신이 인간을 창조했든지 우리가 믿는 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든지 어쨌든 신이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어떻게 인간의 손으로 신을 만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을 동원하고 사람의 머리로 고안을 해서 만든 것을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인간의 태도를 지적하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도 지으시고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에 힘입어서 살고 기동하고 존재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신을 만들고 신을 부리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신이라고 만들어놓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향이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주 만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소원이나 들어주시는 분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와서나 하나님을 믿는척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면서 하나님을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곁에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로봇을 많이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청소로봇을 보았는데 너무너무 편리합니다. 가만히 두면 자기가 알아서 다니면서 청소를 한답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자기 스스로 자기 집에 들어가서 충전을 하고 나서 다시 청소를 한답니다.
그런 로봇을 보면서 걱정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중에 로봇을 너무나 지능이 좋은 로봇으로 만들다가 보면 로봇이 로봇을 만든 주인을 무시하고 주인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인간에게 반항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들을 많이 합니다.
인간들은 이미 그 경지를 넘어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나 똑똑하게 만드시고 너무나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바로 배반을 하고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조정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며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주인이시고 나의 모든 것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인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증거들,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세상 만물이 이를 증언하고 과학적인 증거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본문 30절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원칙은 죄를 범한 사람은 반드시 죽이시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내리신 그 원칙으로 인해서 죄를 범한 모든 인간들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 수명을 정하시고 죄를 지어도 그 수명대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그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게도 하십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모두다 그들에게 주어진 장수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지은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죄를 범하는 사람마다 바로 즉결 심판을 내리시지는 않으십니다. 흉악한 죄를 짓는 사람이라고 해도 버젓이 잘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 오히려 더 잘 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간과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간과라는 말은 우리 사전에 “큰 관심 없이 대강 보아 넘김”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에서도 그냥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죄를 짓는 것을 다 보고 계시지만 못 본 것처럼 그냥 넘어가신다는 것입니다. 못 보시거나 몰라서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넘어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시기를 “알지 못하던 시대”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 주셨습니다. 구약시대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하나님을 알리시고 이방인들에게는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엄히 벌을 내리셨지만 이방인들에게는 관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시대가 지났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어디든지 다 회개를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아닌 세계 어느 곳이든지 다 회개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세계만방으로 퍼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다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거의 다 퍼진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를 하면 다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서 벌을 내리거나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를 받고 더 복을 받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단순히 하나님 앞에 와서 이것저것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세상에 나가서 죄를 지어놓고 교회에 와서 잘못했다고 빌면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그 죄의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는 그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사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죄가 얼마나 흉악한 것인가를 알고 그 죄의 습성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진리를 알면서도 진정한 회개가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을 흉보는 사람들은 진정한 회개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살펴보고 나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아는 사람은 남의 흉을 보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 아니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흉보고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그것을 말해서 고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사람도 진정한 회개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환경을 핑계대고 이런저런 자기의 사정을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가 죄를 지어도 간과하십니다. 못 본 척 하고 그냥 지나가십니다. 그렇다고 그냥 죄를 지으면서 살면 안 됩니다. 철저하게 회개를 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디에 사는 사람이든지 어떤 형편에 처한 사람이든지 다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이 회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개만이 유일한 살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본문 31절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우리가 다 회개하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악해지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도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 하나님은 안 계시는구나,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심판 할 날을 정하셨고 그 심판의 날이 가까이 오기 때문에 그 심판의 날이 이르기 전에 빨리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를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는데 그 심판하실 분이 누구신가도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 정하신 사람으로 천하를 심판하실 것을 작정하셨는데 그분이 예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할 분을 정하셨는데 그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리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 대신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도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믿음만 가지면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도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셔도 되고 구원을 하실 때도 천지를 창조하실 때처럼 말씀으로만 해도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렇게 힘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셨을까요?
우리 같은 인간들이 감히 그 높은 뜻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짐작하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서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사형을 당할 흉악한 죄를 지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셨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며 우리 모든 인간들이 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고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사 한 가운데 우뚝 서서 우리가 믿는 믿음의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그냥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알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더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도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이 믿음에는 너무나도 많은 확실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증거들을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 귀한 믿음 이 위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다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년수와 거주지
행 17장 24~27절 / 김원효목사(켈거리순목음교회)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아덴) 전도시에 한 설교문입니다. 그는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신’을 소개한다고 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뭔가 부족하여 인간으로부터 항상 뭔가를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도리어 부족한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애들아, 나 배가 고프다. 그러니 나를 위해 제사상을 거하게 차려다오. 그리고 내가 돈도 부족하니 헌금도 좀 해다오.”라고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부족한 우리들에게 양식과 건강도 주시고, 각종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재료와 지혜도 주시고, 이것저것 모든 것을 다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은도 금도 다 내 것이니라.”(학2:8)고 하셨고, 돈도 주시는 하나님이시오, 돈을 벌 수 있는 재능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신8:18) 고로 너희는 내게 와서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가 좋은 것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뭔가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구하여 충분히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쁨이 충만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그리고 1900년간 세계 여러 나라에 뿔뿔이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에다 다시 나라를 건설하고,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정해주신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시온입니다. 그래서 그들 유대인들에게는 시온이즘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어디에서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정하신 그곳에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북미 캐나다 앨버타 캘거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캘거리에서 살 건가요? 혹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사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혹은 미국에서 사실 분도 있을 것 같고요. 또 여기 캐나다 타 도시로 가서 사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도시로 갈 겁니까? 저의 경우는 몇 년 전에 하나님께로부터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오랫동안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9년째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래 살라고 하셨기에 당장은 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님이 부동산과 건축업을 하셨습니다.
저도 아버지의 그 피가 있는지 자꾸 새 집을 짓고 싶고, 새로 집을 꾸미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집을 생각해 보고, 이사를 가볼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생각들을 포기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지금 사는 집에서 오래 살라고 했으니까요. 하나님께로부터 계시 하나를 받으니까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거주의 한계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집에서 오래 살려고 하면 집의 모기지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은행 모기지 빚이 23만 불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종종 스트레스가 생기지만 하나님이 여기서 오래 살라고 했으니까 “아하, 이 문제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겠구나!”라는 믿음이 옵니다.
외국 땅에서 살다 보면 부모는 나이가 먹고 은퇴가 가까워지고 반면 자녀는 성장하여 타도시의 대학을 간다던지 혹은 타도시에서 직장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종종 가족들이 거주의 한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 딸이 BC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오고 최근 거기에서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만간 BC로 이주를 해야 합니다. 딸은 부모인 우리에게 말합니다. “같이 BC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이다 보니 혼자 외국의 타도시에 사는 것이 염려가 됩니다. 옆에서 지켜주며 같이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에게 계시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오래 살라는 것입니다. 즉 너는 이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도 하나님이 여기서 좀더 목회를 하라는 계시도 있었습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처럼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답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도 “앞으로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 “언제까지 이곳에서 혹은 그곳에서 살아야 하나?“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인도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안타깝지만 한국의 이민 교회마다 가족 식구들이 떨어져 사는 기러기 가족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남편은 한국서 홀로 살아야 하고, 아내와 자녀는 여기서 살아야 할까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시는 하나님께 물어보십시오. “하나님, 우리 가족이 앞으로 어디서 살아야 할까요?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아야 할까요?”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는 임은미 선교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처음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겠다고 하니까 조용기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아프리카는 힘들고 위험한데 여성으로서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곳이 저에게는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아하, 그래요?”
여러분, 하나님이 각자 살라고 하는 그 장소가 있습니다. 거기서 살면서 주의 일을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이 살 곳을 지정해주셨습니다. 어디이지요? 에덴동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렌트비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곳의 모든 과실도 공짜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단지 선악과만 먹지 말라는 한 가지 조건만 지키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가시와 엉겅퀴에 이리저리 찔리며 수고로이 노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인류는 최상의 거주지인 에덴동산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각자 민족끼리, 가족끼리 하나님이 정해주신 곳에서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특히 인류는 바벨탑 사건 후에 언어에 따라서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 12:1)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거주의 경계를 정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 각 지파마다, 가족마다 거주의 경계를 정해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엄격히 말씀합니다.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 것이니라.”(신27:17)
즉 하나님이 정해준 거주지의 경계를 함부로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준 거주지에 대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16;6)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캐나다 영주권을 신청할 때 아주 애먹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부터 이제까지 살았던 모든 거주지의 주소를 적어야 하고 그 년수까지 적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집은 한국에서 이사를 아주 많이 다녔습니다. 영주권 서류의 적어야 할 칸이 모자라서 따로 종이를 마련하여 적어야 했습니다.
여기 캐나다 캘거리에서는 23년간 5번 이사를 했습니다. 지금의 사는 집은 9년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셔서 앞으로도 계속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기도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딸은 어디서 누구와 얼마간 살아야 합니까?” 이것을 미리 알면 참 좋을 텐데요. 그지요? 그러면 집 얻기도 쉬울 테고...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겁니다. “저희를 땅에 거하게 하시고,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시는 하나님, 딸이 거할 지역과 집을 정해 주세요.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간 살아야 할 지 년수도 정해주세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친히 찾으시고”(신1:33)
즉 하나님은 우리가 거할 장막을 친히 찾아주시고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년수와 거주의 경계를 정해주시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그곳에서 보람되게 주의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27절) 즉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아예 우리 안에 영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동고동락하고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외국 땅에서 혼자 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멀리 떠나 있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나를 떠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토록 나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과 거주지를 늘 함께 하며 영원토록 함께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