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 라는 말은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장소나 사람에 대해 해당되는 말로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사막에 가 본 적이 없고 영화나 그림, 또는 사진에서 각인된 바가 없이 그냥도 그리웠으며 가고 싶었다.
때마침 동화와 동시를 쓰는 몇몇이 몽골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경비도 그다지 비싸지 않은 편으로 5박 6일에 일백삼십만 원이라고 했다.
딸아이들도 가는 쪽으로 밀어붙이기에 나는 떠나기 한 달여 전부터 밑반찬으로는 무엇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을지, 옷은 몇 벌이나 가져가야 할지, 또 약은 무슨 무슨 약을 챙기는 것이 좋을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였다.
그 무렵, 오른쪽 다리가 통째로 아픈 데다가 이따금 저리기까지 해서 그것이 걱정이긴 했다. 그리하여 몽골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인 7월 30일에도 물리치료를 받았고 진통제와 파스, 하다못해 등산용 조립식 지팡이까지 여행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러저러 7월 31일 토요일 저녁 6시 반 경, 인천 국제공항에서 밤 12시 반에 떠나는 몽골행 전세기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시간은 넉넉, 청량리 역 광장에서 7시 15분에 떠나는 공항 버스를 타고 9시가 조금 못 되어 도착. 일행을 만났다. 평소에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 않은 후배들이 여럿이라서 서먹서먹했으나 곧 그럭저럭, 이냥저냥 어울려 들었다. 함께 떠나게 된 이들은 문삼석 선생님, 경주에 계시는 시인 조동화 선생님, 그리고 이영 선생님, 그리고 이규희 씨, 이상배 씨, 이동렬 씨, 동렬 씨 부인, 김관식 씨, 관식 씨 부인, 정영애 씨, 영애 씨 동료, 원유순 씨, 안선모 씨, 김춘옥 씨, 위정현 씨, 고수산나 씨, 일본인 하기모리 씨, 이지현 씨, 이붕 씨 그렇게 열아홉 사람이었다.
빠뜨리고 온 칫솔이며 몇 가지를 사는 동안, 입국 수속이 완료되어 이제 곧 떠나겠지 했는데 몽골 쪽 날씨 사정으로 다음 날 아침 아홉 시가 되어서야 전세기는 뜨게 된다는 것이었다.
‘원, 이럴 수도 있다니…….’
딸들에게 이제 떠난다, 어미가 없어도 잘들 하고 있어라, 맹맹해진 목소리로 작별 전화까지 했건만. 어쨌든 하룻밤을 보내야 했으므로 사우나에서 잠을 자기 위해 공항 지하에 있는 한 사람 앞에 1만 5천 원 하는 사우나로 이동, 샤워만 겨우 하고는 밤을 거의 새워야 했다.
이튿날 아침, 공항 식당에 들러 아침 한 끼니. 그리고 9시경 몽골행 전세기에 탑승했으니 아아, 이제 정말이지 떠나는구나! 내 자리는 바로 창 옆, 좋아하는 구름 구경을 실컷 하겠구나! 이영 선생님과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이영 선생님은 한 스무배 쯤을 더 좋아라 했다.(메롱!)
그런데 1시간 30분 가량 날았을까. 떠나온 인천공항으로 되돌아간단다. 약간 어이가 없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오, 해피 데이, 비행기를 좀 더 오래 타게 생겼구나!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 뒤 3차 시도. 기내식을 먹으면서 내려다본 몽골은 숲이라든지 들판이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되다만 산야의 꼴로 눈에 비쳐졌으니 그날따라 날씨가 우중충 어두운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3시간 반 만에 마침내 울란바타르의 허름한 공항에 도착. 짐을 찾고 대절 버스를 이용하여 도심의 호텔에 들었다. 호텔에 들기 전, 가이드의 안내로 울란바타르 시내와 광장, 우체국, 음악당, 발음하기가 수월치 않은 자이상 산 전망대에 올라 울란바타르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전망대는 중일 전쟁 당시 몽골을 위해 전사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우리 나라 서울로 치자면 한강에 해당한다는, 흐르는 물의 양으로 보자면 우리 나라 강의 지류만도 못해 보이는 툴가강도 보았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이태준 선생(독립 운동가) 기념 공원에 들렀는데 작은 들꽃만 눈에 많이 띄고 대체로 초라한 편이었다. 1914년 몽골 후레에다 동의의국 병원을 개설했고 몽골의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를 지낸 조선의 명의였다고 했다.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는 방년 25세의 소박하게 생긴 처녀 체첵 양. 울란바타르의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는데 말이 좀 서툰 편이었으나 퍽 성실해 보였다. 울란바타르에 머무는 동안 일행을 버스에 태우고 다닐 기사 이름은 아기. 30세 안팎의 남자였다.
울란바타르의 수흐바타르 광장에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애국지사 수흐바타르의 동상이 말을 타고 서 있었다.
날씨는 줄곧 흐려 있거나 부슬부슬 비가 내려서 맑은 하늘과 볕은 볼 수가 없었으며 밤 10시가 넘도록 어두워지지 않는 하늘은 괴이쩍기까지 하였다.
끝으로 민속 공연장을 들러 돌아온 호텔에서의 첫날은 위정현 씨와 있게 되었는데 사우나에서의 첫날처럼 나는 또 잠이 쉽지 않다가 새벽 무렵에야 간신히 눈을 붙였다 떴다.
8월 1일에는 경비행기를 타고 남고비 사막을 가기로 한단다.
‘사막…… 끝없는 모래 벌판…….’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뛰었다.
2. 설레임
8월 1일 점심 무렵, 경비행기를 타고 남고비로 향하기 위해 전날 도착했던 울란바타르 공항으로 다시 나갔다.
그 전에 자연사 박물관에 들렀는데 거대한 별똥별과 공룡 뼈와 박제된 순록 등을 보았다. 아침은 호텔에서 먹었고 점심은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식집에서 뷔페로 먹었는데 여행을 위해서라도 어쨌든 먹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리 아플 것을 걱정해 진통제를 먹어 두어야 했으므로 끼니는 거르지 말아야 했다.
점심 뒤, 우리 나라 지방 공항보다 못한 작은 공항 건물, 그곳에서 여권 체크를 하던 중 일행 가운데 한 명이 여권을 분실한 것을 알았다. 잠깐 가방 위에 놓아 두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경찰이 오고 그녀는 대사관으로 가서 새 여권을 발급받아야만 했다. 그녀를 혼자 놓아 두고 가는 일은(더구나 사막에서 3박을 할 터였는데) 우리 모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의 절친한 동료인 정영애 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속상해하였다.
날씨는 전날과 달리 화창하게 밝았다. 어떻게 이처럼 볕이 맑고 뚜렷할 수 있단 말인가. 얼굴이 그을리기로 얼마나 그을리랴. 볕은 날카로울 만큼 투명하였고 하늘 빛깔은 선명한 코발트블루!
경비행기에 탑승키 위해 공항 버스가 움직일 무렵, 여권을 잃어버린 이의 동료, 영애 씨는 공항 버스에서 서둘러 내렸다. 동료를 두고 차마 혼자서만 사막 구경을 나설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여행 가방을 경비행기에 이미 실은 뒤면서(나 같았으면 ‘그건 어차피 네 팔자야!’그러면서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북유럽인인 듯한 관광객들을 포함, 50여 명을 태운 경비행기는 활주로를 달려 사막 위를 1시간 반 가량을 날았다.
“저기 거뭇거뭇하게 보이는 것이 무어냐?”
다시 나란히 앉게 된 정현 씨와 나는 경비행기 창으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거뭇거뭇한 것을 숲이다, 라고 단정짓기에 이르렀다.
“멀리서 보니깐두루 숲이 아조 검게 보이누만.”
“그런데, 어째서 마을은 안 보이는 거지?”
확신으로 그득한 두 얼굴은 창 밖을 내려다보면서 내내 희희낙낙. 그때 뒤에서 동렬 선생이 말했다.
“숲이 아니라, 구름 그림자라오.”
오오, 설마!
“저것 봐. 저기 코끼리 모양 구름의 그림자가 코끼리 아냐?”
좀 창피하고만.
이차저차 사막 가운데에 마련되어 있는 활주로 같지 않은 모래 벌판에 안착, 남고비 사막에 이르렀다. ‘고비’ 란 ‘생물이 살 수 있는 땅’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여권 체크를 하는 동안 주변에 핀 꽃을 보았는데 꽃 빛깔이 퍽이나 선명했다. 우리 나라의 과꽃과 비슷한 생김의 꽃과 키가 크지 않은 해바라기 등.
일행은 다시 세 대의 쿠로건(러시아 차를 개조한 승합차)을 나눠 타고 1박을 하게 될 겔(gel)로 향했다. 내가 탄 쿠로건은 오래된 낡은 차여서 차 문이 쉽게 여닫히지 않아 일일이 기사가 내려와 밖에서 열어 주어야만 차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쿠로건을 운전하는 기사에게 마음 쓸 겨를이 조금도 없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밭, 아아, 사막! 가없이 멀게만 보이는 모래 구릉. 공연히 울고 싶고나!
우리는 제1캠프까지 100리 가량 되는 거리를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침내 겔에 도착한 일행은 지평선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편을 갈라 달리기를 하는 등, 사막과는 전혀 상관없는 놀이에 잠깐 빠져 들었다.
이규희 씨, 위정현 씨, 나 그렇게 셋이 한 조로 배정된 우리 겔은 15호. 겔은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를 엎은 위에 천막 등으로 비바람과 강한 햇빛을 가린 듯한 모양인데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아늑했다. 내 자리는 겔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 침대. 나는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두 다리를 들어 올린 다음 말했다.
“그대들, 나처럼 발을 천장에 닿게 할 수 있수? 못 하지? 나는 닿고도 남는다우.”
쓸데없이 긴 다리를 자랑하고 있는 밖으로 모래 바람이 휭휭 불었다. 낮과 달리 기온도 뚝 떨어져 마치 우리 나라 늦가을 날씨 같았다.
겔 뒤에 마련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고, 이미 밤 열 시가 넘었는데도 밖은 또 어둡지 않고. 겔 문 앞에 하염없이 앉아 멀리 풀밭을 찾아 나갔다가 묵묵히 줄을 지어 돌아오는 염소 떼를 보게 되었다. 마치 성자의 모습처럼 경건해 보였다.
‘……사막. 막막하고나, 사막이라니…… 아아, 사막.’
다음 날 아침, 겔 밖으로 나설 일이 새삼 두렵기까지 했으니.
3. 뼈의 노래, 뼈의 울음
몽골 사람들은 주로 양고기를 먹는다고 했다. 호텔에 머물렀을 때는 아래층에 마련된 홀에서 뷔페로 먹었는데 그때까지 양고기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오이지 비슷한 것만 찾아서 대강 먹었다.
사막에서 첫날은 빵과 티와 주 메뉴로 밥과 야채 볶음 따위가 나왔다. 일행이 싸 가지고 간 깻잎이며 김, 고추장 등이 곁들여졌는데 그걸 나눠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는 종이 팩에 든 소주를 스무 개 가량 가져갔는데, 짐이 되고 있어 일본인 하기모리 선생에게 모두 맡겼다.
사막의 첫날은 6호 겔(이영 선생님과 하기모리 선생님 방)에 모여 술타령을 하다가 뒤늦게 들어온 유럽 여행객들이 조용히 좀 해 달라고 말해 6호의 두 사람만 우리 방으로 오게 하여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자연 귀신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영 선생님 이야기가 사막 귀신은 화장실에 숨어 있으면서 ‘양고기 줄까, 비프 줄까?’ 말한다고 한다. 그 말은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활용되어서 ‘맥주 줄까, 소주 줄까?’ 등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제 숙소로 돌아가고 사막의 밤은 여지없이 깊어만 가는데……, 잠이 먼 나는 겔 밖으로 부는 바람 소리에나 귀를 기울였다.
‘아아, 별은 얼마나 또렷하게 빛날 것인가?’
그렇건만 처음 동해 바다에 갔을 적에 먼 수평선과 파도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듯이 얼굴을 들어 형형한 별빛을 올려다볼 수 없었으니.
‘딸들은 지금쯤 무얼 할까?’
사막에서 3박을 하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전날 호텔에 들었을 적에도 전화 한 통 하지 못한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럭저럭 날은 밝고 2캠프를 향해 떠난다고 했다. 2캠프에서 1박을 하고 다시 원래 있던 1캠프로 돌아가 1박 후, 울란바타르로 돌아간다고 했다(1캠프로 되돌아가 1박을 하는 까닭은 그곳에서 경비행기 활주로가 가깝기 때문이란다).
아침을 먹고 물병 한 개씩을 나눠 가진 우리는 전날 쿠로건을 함께 탔던 멤버끼리 다시 차를 타게 되었으니 운전 기사 빼고 나를 포함, 고정 멤버 여섯에 우리의 귀여운 가이드 체첵이 탔다 내렸다 했다.
일행을 나눠 태운 쿠로건 세 대는 모래 벌판을 끝도 없이 달렸다. 주행할 거리가 300킬로미터라고 하는데 나로서는 짐작키도 쉽지 않았다. 그런대로 차가 꽤 자주 지나다닌 듯 길이 나 있었는데 우리 쿠로건은 다른 두 대의 쿠로건을 슬금슬금 뒤따르다 문득 속력을 내 앞의 두 대를 바람같이 앞지르곤 했다. 오오, 드라이버 짱! 그때까지는 운전 기사의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아무런 말도 나눌 수 없었다. ‘땡큐!’라는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우리는 중간 중간 차에서 내렸는데 화장실에 가야 할 때와 캠프장에서 싸 준 도시락을 먹어야 할 때였다. 사막에 화장실이 있을 리 없고, 아무리 멀리 가서 볼 일을 본다고 한들 사방이 트여 있으니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남자들은 쿠로건의 오른쪽으로 여자들은 왼쪽으로 갈려 볼일을 보아야만 했다.
내가 탄 쿠로건의 운전 기사는 체격이 크고 햇볕에 얼굴이며 팔뚝이 붉게 그을러 있었는데 러시아 계열 몽골인 같았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수건으로 낡아 빠진 쿠로건 유리창과 지붕의 뽀얀 모래 먼지를 털고 닦았는데 그 손 움직임이 퍽 정성스러웠으며 공손했다.
일행이 차에 오르려 하면 차의 문을 열어 주어 모두 타도록 기다린 다음, 옷이나 다른 것이 끼지 않았는지 살펴본 후에 문을 닫아 주었다. 그런 다음 만족한 얼굴로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한결같았다(특히 차의 뒷문은 운전 기사가 열어 주고 닫아 주지 않으면 안 되도록 문제가 생겨 있었다).
나는 쿠로건에 타고 내리면서 그이의 검붉은 팔의 힘을 빌리고 싶구나, 생각했으나 말은 통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오래된 차라서 좌석 높이가 높은 데다가 오른쪽 다리가 시원찮아 그런 생각은 더욱 간절했다.
어쨌든 우리는 털털거리며 달리는 동안 염소 떼도 보았고 말도 보았고, 야생의 야크 따위도 보았다. 먹지 못하였거나 더위에 지쳤거나 다른 짐승의 먹이였다가 이제는 흰 뼈로 뒹구는 잔해들도 눈에 자주 띄었다. 뜨거운 햇볕과 모래 바람에 닳아진 뼈. 오, 뼈의 노래, 뼈의 울음……. 모래밭에 아무렇게 흩어져 놓여진 뼈를 스치고 지날 때마다 차에서 내려 흰 뼈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뼈들이 오래 간구해 왔을 기도의 말 한 구절을 듣고 싶었으니.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뼈마다 눈맞춤.
책에서만 본 신기루! 가도 가도 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까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잠을 자지 못해 헛것이 보인 걸까).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마을에 내려 변발을 한, 햇볕에 새까맣게 그을은 그곳 아이들과 사진도 찍고 가지고 간 사탕도 나눠 주었다.
가도 가도 모래 언덕…… 옅은 풀빛 초원…… 떼를 지은 말과 염소 떼…… 얼마간 달리자 최초의 공룡 생존 지대였다는 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너머로 옅은 녹색의 자크 나무 군락지가 보였는데 키는 무릎에 닿을 만큼 작지만 수명이 150년이나 된다고 했다. 자크 나무는 낙타와 말, 염소의 먹이로 없어서는 안 되는 식물이라고 했다.
또다시 달려 다다른 곳이 낙타 타는 곳. 낙타 30여 마리가 등에 안장을 얹고 서 있거나 앉아 있었는데, 낙타 탈 일이 그리 많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첫 인상의 낙타가 퍽은 믿음직스러워 보인 탓이기도 했다.
“낙타는 그게 그렇게도 맛있는 게냐?”
모래 언덕을 향해 가는 길에 대열에서 빠져 가시투성이인 자크 잎을 뜯어먹는 오, 배고픈 나의 낙타.
숙소인 2캠프로 가서 짐을 풀기 위해 다시 쿠로건을 타려는데 운전 기사가 다가와 문을 열어 주었다.
“쌩큐!”
마침내 나는 문을 열어 주는 운전 기사와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게끔 되었으니 바야흐로 ‘눈’이 맞은 것이었다.
4. 먹진 않아!
그리고 도착한 2캠프.
“그대들, 나처럼 발을 천장에 닿게 할 수 있수? 못 하지? 나는 닿고도 남는다우.”
짐을 풀기도 전에 자리에 누워 다시 한 번 시범을 보였으니. 새파란 하늘에 흰 구름 뭉게뭉게……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밖은 여전히 환했다.
식당은 겔 뒤로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한쪽은 유럽인들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우리는 식당 중앙에 있는 네모난, 가장 큰 테이블과 둥그런 테이블 셋을 차지했다. 가이드와 세 명의 운전 기사는 저희끼리 먹었다. 음식은 대체로 입에 맞았으며 양고기로 의심되는 육류는 그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저녁 뒤, 각기 자신의 겔로 돌아가 짐 정리, 옷 갈아입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던 중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인 조동화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가까운 데 산책이라도 나간 거겠지.’ 모두 그렇게 생각했는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밤 11시 즈음)했는데도 조 선생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자취를 감춘 지 한 시간 가까이가 지났건만 멀리까지 휑하게 뚫려 있는 벌판에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혹시 자신의 겔이 아닌 다른 겔에서 잠이 들고만 것 아닐까, 하며 이름을 부르며 찾아다녔으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금 멀리 나갔다가 길을 잃고 만 것은 아닐까, 세 대의 쿠로건을 풀어 사막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어떨까.
문득 지평선 아득히 걸어오고 있는 두 그림자. 혹시 저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찾는 조 선생님이 아닐까. 두 사람의 윤곽이 드러나길 초조해 기다렸으나 두 사람은 방목해 놓은 염소들을 몰아오기 위해 나갔던 몽골 노인 내외였다.
‘아아, 어떻게 된 것일까?’
일 분을 십 분처럼 초조해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아득한 지평선 끝으로 그림자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이에 확인 차 후배 몇이 달음박질해 나갔다. 우리가 찾는 이였다. 그는 멀리 바라다 보이는 모래 등성이를 다녀오려고 나섰노라고 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모래 등성이는 멀고 40분 가량 걸어가자, 안개인지 어둠인지 부옇게 내리면서 그 너머로 검고 커다란 개 두 마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노라고 했다.
가이드는 그것은 늑대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도 굶주렸을지 모를 늑대! 에고, 무시라! 우리는 천상 시인인 그이의 무사 생환을 축하하며 다시 술, 술, 술…… 술 끝에 잠.
이튿날은 전에 바다였던 골짜기도 보고, 계곡으로 들어가 수염수리도 보고 또 말도 타러 간다고 했다. 아침 아홉 시쯤에 겔을 나서기로 하였는데 돌개바람이 한 가닥 일기 시작하더니 심한 모래 바람으로 바뀌었다.
그처럼 사납고 심한 돌개바람이라니. 모래와 작은 자갈이 날아 이미 쌓인 모래 구릉 쪽으로 가서 쌓이고 또 쌓이는 듯했다. 모래 구릉은 마치 엷은 옷에 잡힌 주름처럼 섬세해서 한 폭의 커다란 조각 작품을 보는 듯했다. 바람도 그렇고 볕도 그렇고 염소 떼도 사람도 다 허투로 지나쳐 볼 수 없는 곳, 사막!
그처럼 바람이 불면 말 타러 가는 일 등의 일정이 바뀔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전날 낙타를 탄 일로 다리와 궁둥이가 많이 아파 말은 아마도 타지 못할 것이다,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하여 1캠프에서도 시도했던 도마뱀 사냥에 나섰다.
“이것 좀 보세요. 도마뱀을 잡았어요.”
잡힌 새끼 도마뱀은 내 손가락을 어떻게든 물어 볼까 하고 작은 톱니 이빨이 나 있는 주둥이를 한껏 벌리고 고개를 홰홰 돌렸다.
“온, 천만의 말씀을!”
도마뱀 등은 보호색으로 모래 빛깔을 띠고 있었는데 배때기는 뜻밖에도 도화지처럼 하얗고 깨끗했다.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게.
“먹진 마라. 이상교!”
동갑내기인 동렬 선생이 말했다.
“먹진 않아. 고추장이 없잖아.”
사실 도마뱀은 개구리보다는 먹음직스럽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처럼 황황하게 불던 모래 바람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갛고 새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그리고 말을 타기 위해 쿠로건에 올라탈 때 나는야 일당(일행)의 배려와 격려에 힘입어 조수석에 앉기로 되었으니…… 오호, 쾌재라!
자알 후우는 약간 어색하고 부끄러운 듯했으나 싫지는 않은 듯했다(순전한 내 짐작). 으음, 나도 물론.
쿠로건은 모랫길을 쉬지 않고 달렸다. 우리 쿠로건의 쉰 살 나이의 기사 자알 후우(가이드에게 물어 이름과 나이를 알아 냈다. 내가 누구냐.)는 이따금 손짓을 하며 차를 세우곤 했는데, 제 구멍을 들락날락하는 사막 쥐와 떼를 지은 산양 등이 달려가는 것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계곡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도 풀만 조금 나 있는 돌산을 많이 보았는데 토끼처럼 귀엽게 생긴, 우리 나라 쥐보다 몸이 조금 큰 사막 쥐를 많이도 보았다.
‘차에서 내려 사막 쥐와 좀 놀다 가고 싶구나!’
배낭에 오징어 포가 있었는데 그걸 좀 떨어뜨려 놓아 주고 싶었다.
‘사막 쥐, 사막 쥐…… 이름도 예뻐.’
야크라고 부르는, 마치 치마를 걸친 듯한 모습의 동물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쿠로건으로 수염수리 둥지가 있는 계곡에 가게 되었는데 둥지만 보였고 수염수리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수염수리보다 골짜기를 맑고도 얕게 흐르는 물이 더 신기했다. 몽골에서 귀한 것은 물이지 싶어서였다.
그곳에서 빠져 나와 마침내 말 타는 곳. 푸른 초원…… 낮이 길어 좋긴 좋구나. 그곳에서 열여섯 살의 한 소년을 만났으니. 이름이 ‘어훅’이라고 했다.
5. 몽골판 ‘소나기’
나는 처음부터 말을 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막을 달린 지 3시간여 만에 다다른 둥그네 계곡에 이르니 말을 아니 탈 수가 없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좁은 길로서 원래 붙어 있던 길을 둥그네라는 사람이 갈라 놓은 것이라고 했다. 계곡 양쪽으로 키가 작은, 이름 모를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곤 했는데 꽃 빛깔이 한결같이 선명했다.
말을 타고 들판을 지나 골짜기로 들어가 무언가 보아야 할 코스라고 하는데, 전날에는 낙타는 타지 않겠다는 이가 더러 있었건만 말은 모두 타겠노라고 했다.
‘낙타를 타는 여자가 말을 못 탈 것은 없지!’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도마뱀도 맨손으로 척척 잡는 여자가 아니더냐. 삼십 중반쯤의 몽골 여인이 내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아주었는데 내 말이 맨 꼴찌였다.
아아, 꼴찌고 선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말은 낙타와 달라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균형을 잡아야만 했는데 허리가 앞뒤로 턱턱 흔들리는 것이 영 불안하였다. 좌우로 기우뚱기우뚱 흔들리는 듯한 느낌은 더 안 좋았다.
‘이러다 균형이라도 못 잡는 날에는 좌로든 우로든 휘리릭 넘어가 크게 다칠 터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못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더하여 크게 다친 내 꼴이 떠오르는 데야.
“플리이스, 리턴.”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녀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에서 아예 내리겠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뒤따라 걸어오던 가이드 체첵이 옳다구나, 하며 내가 탔던 말을 잡아타고 일행의 뒤를 쫓았다. 멋진 폼의 체첵!
나는 혼자 고요하고도 밝고 명랑한 초록의 들판을 천천히 걸어 되돌아가고 싶었다. 사람이 있는데도 제 구멍을 분주하게 드나드는 사막 쥐와 고슴도치와 작은 새, 그리고 작게 핀 보랏빛 꽃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쉬엄쉬엄 걸어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고삐를 잡았던 여인이 곁을 떠나지 않고 내 곁을 나란히 걷는 것이었다. 내가 돌 위에 앉으면 저도 앉고 휘유, 한숨을 쉬면 저도 휘유…….
‘이 일을 어쩐담!’
그때, 말이 아닌 낙타에 올라탄 한 소년이 빈 낙타 한 마리를 이끌고 나타났으니! 그래, 운명이다. 낙타로 바꿔 타자꾸나. 몽골 여인에게 3달러를 쥐어 보내고 낙타로 바꿔 탔다. 나로서는 어찌 보면 그 몽골 여인을 보내기 위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에헤라, 갔던 길을 다시 가게 생겼고나.’
소년은 나를 낙타에 태우고 난 조금 뒤, 뒤돌아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며 꺼내 들여다보곤 어설픈 영어로 내게 말했다.
“캔유 수피크 잉글리쉬?”
“어 리틀.”
“마이 네임 이즈 어훅.”
“오, 아이 씨! 아임 글레드 밑유, 마이 네임 이즈 상교 리.”
“오, 향교 리?”
“예스, 예스.”
향교면 어떻고 양교면 어떠리.
“아임 식스틴.”
“아임 휘브티 쎄븐.”
오머나, 너무 많이 불렀나? 여하간 내 직업은 티쳐. 국적은 코리어…… 어어, 슬로리, 슬로리…… 내가 누구냐? 일행이 앞질러 간 길을 뒤처져 가면서 조금도 기죽지 않고 여유만만. 가던 중에 돌아오고 있는 일행 몇 사람을 마주쳤고 곧이어 남은 이들도 만났으나 소년은 돌아갈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임 쌤쌤. 슬로리, 슬로리, 스탑! 오, 슬로리…….
‘아니, 그런데 야가 어디까지 가려는 거지? 골짜기까지는 가지 않아도 되련만.’
게다가 굵은 빗방울까지 후두둑……. 어훅은 나를 낙타에서 내리게 하더니 개울을 건너 어딘가를 향해 잡아 이끄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나무 조각을 파는 두 소년을 보았는데 ‘마이 프랜드’라고 소개했다.
‘친구면 팔아 주어야 할 거야.’
그리하여 나무로 깎은 낙타 한 마리를 5달러를 주고 샀다. 그리고 더 들어가자 또 두 소년. 그들 또한 ‘마이 프랜드’였다.
‘친구면 팔아 주어야 할 거야.’
나무로 깎은 사막 쥐 한 마리를 또다시 5달러를 주고 건네받았다. 오오, 귀여운 사막 쥐! 그런데 좀 더 골짜기로 더 들어가자는 몸짓을 해 보였다. 그곳에 ‘마이 프랜드’가 또 있는 걸까.
‘일행이 기다릴 텐데, 얘가 왜 이러지? 혹시 외진 데로 데려가서 여권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닐까.’
티쳐답게. 좀 완강한 면모를 보여야겠군.
“리턴 투…… 그래, 리턴 투 아지트!”
아지트, 본거지. 원래 있던 곳 아지트. 맞잖아. 왜?
그 사이 개울물이 불어 건너려니 운동화가 젖을 듯싶었다. 어훅이 손을 내밀었다. 으흠, 몽골판 ‘소나기’로군. 둘이 각각 낙타에 올라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데 방금 전의 빗방울 대신 해가 쫘악, 났다. 말 그대로 쫘악. 비를 언뜻 머금은 연둣빛 풀밭과 바위, 능선은 얼마나 곱던지.
“어훅. 슬로리. 슬로리.”
나는 낙타 위에 올라앉아 어훅과 나란히 새파란 하늘과 뼈대가 보일 듯 투명한 볕살을 바라다보았다.
“어훅, 프리티 버드! 프리티 마우스! 프리티 플라워!”
골짜기를 벗어나기 전, 길가에 피어난 보랏빛 들꽃 무더기를 손으로 가리키자 어훅은 낙타에서 냉큼 내려 꽃을 꺾어 주었다.
마침내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거의 다다랐는데 어훅은 일행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내리게 했다. 아이고, 다리가 아파 돌아가시겠는데…….
“(하여간)어훅, 쌩큐, 베리머취야!”
고마운 값 10달러(어훅은 방학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라고 얘기 했다).
나는 쿠로건이 떠나기 전, 어훅에게 다시 한 번 고마운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소년은 산 위, 꽤 멀리 올라가 있는 것이 보였다.
“소변이 많이 급했나 봐요.”
체첵이 말했다.
어훅은 우리 일행이 다녀간 곳에 나를 데리고 가서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나는 물론 그곳까지 가지 않았으므로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며, 잠시였지만 성실하고 착한 이국 소년을 오해했던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진다).
“10달러면 어린 학생에게 과한 것 아니에요?”
고마운 표시였는데 공연히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으면 어쩌랴 싶어 체첵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아녜요. 이름이 어훅이라고 했나요? 개학하면 공부할 공책도 사고 책도 사고 그럴 거예요. 고맙습니다.”
체첵은 어훅 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우리는 그 길을 달려 다시 1캠프로 향했으니. 하루를 자고 난 아침 아홉 시경, 경비행기로 울란바타르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짐을 정리하던 중에 아무래도 한낮에 길에서 주워 들고 온 뼈다귀가 마음에 걸렸다. 말의 뒷다리 뼈인지, 낙타 앞다리 뼈인지, 염소의 오른쪽 뒷다리 뼈인지 도무지 알 길 없는, 뼛속이 드러나 보이는, 종아리 뼈로 짐작이 되는 기다란 뼈다귀. 시를 전공한 큰딸애에게 주며 ‘뼈의 울음’ 또는 ‘뼈의 노래’라는 제목의 시를 써 보아라, 아마도 내년 봄 신춘문예에 시 부문 당선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건넬 생각이었는데.
‘……당장 오늘밤이 문제야. 저걸 짐 속에 넣고 잠이 제대로 올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어둠 속에서도 희게 빛나는 뼈다귀를 짐에서 꺼내 겔 밖을 향해 집어던졌다. 그리고 잠들기 전, 겔 문을 삐긋 이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오오,별보다도 더 희게 빛나는 뼈다귀. 밖으로 나가 조금 더 멀리, 멀리, 겔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던져 놓았다.
‘네 있던 곳에서 바람과 비와 따가운 햇볕과 모래를 벗 삼는 것이 너를 위해 더 마땅할진저!’
자가 발전으로 켜진 밝지 않은 불빛 아래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사막 쥐, 그리고 도마뱀, 작은 곤충…… 사막은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했다. 밤하늘의 별조차 빛나게 살아나는 사막의 밤. 숲이 크게 자라 우거져 있지 않은 대신, 온통 모래 언덕인 대신 별은 더욱 크고 영롱하구나!
잠들지 못하고 있는 별들로 해서 나는 또 잠이 안 왔다.
6. 내 마음이 껍데기
날은 다시 밝았다. 일행은 서둘러 아침을 먹었다. 이르게 경비행기 편으로 울란바타르로 돌아가야 한단다.
전날 저녁, 양고기가 나왔으나 나는 한 점도 먹을 수가 없었다. 냄새조차 역겨워서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아침엔 가방에 남아 있던 구운 김을 몽땅 들고 식당으로 갔다.
‘몽골 사람들은 구운 김을 좋아할까?’
문득 든 생각이었다. 이제 곧 헤어져야 할 사람들. 핑계 좋구나, 그들 식탁에 구운김을 한 움큼 가져다 주었다. 그것도 자알 후우가 집어 들기 가까운 자리에(날 욕하지 말아요. 사랑에 빠지면 다 그렇게 되는 법이라우).
‘사막을 두고 떠난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 것인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모래알 한 개도 애틋하기 짝이 없다. 하늘 한짝도 서늘하였다.
‘뼈다귀들은 어쩌냐? 도마뱀은 또 어쩌냐? 사막 쥐는, 늑대에게 물려가다 간신히 살아나온 뒷다리 살이 벌겋게 벗겨진 염소는, 애교덩어리 털복숭이 양은 또 어쩌냐? 제대로 올려다보지 못한 별은, 또 남보랏빛 작은 들꽃은 어쩌냐? 아아, 자알 후우는 또 어쩌냐?’
나는 못 돌아간다, 라고 말하는 건 어떨까. 그렇게 되면 딸들은 누굴 의지하고 살아 가게 될까. 한창 성업 중인 인터넷 카페는 또 누가 접수하게 될까. 첫사랑 송재찬 선생은 또 어쩌나. 신문에는 가십거리로 실리겠지.
대한민국의 대 아동문학가 이상교가 몽골 여행 중 실종. 동행한 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쿠로건 운전 기사인 50대 초반의 검붉은 사나이와 눈이 맞아 도피 행각을 벌인 듯……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더니…….
어쨌든지, 사흘 전 경비행기에서 내렸을 때처럼 남고비 사막 착륙장의 꽃 빛깔은 유난히도 맑았다.
하늘은 흐리더니 오던 날처럼 오락가락 비. 탑승하기 위한 절차를 밟는 동안, 구내 매점에 들러 남고비 사막을 소개하는 작은 책자를 15달러나 주고 샀다(팁은 아깝지 않았는데 책 사는 돈은 아깝더라).
‘자알 후우 일행은 돌아가고 만 것일까?’
간간이 둘러보아 확인해 가면서 떠돌기 한 시간여, 울란바타르를 떠나 온 경비행기가 여행객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알 후우 일행은 새로운 여행객들의 가이드와 교섭, 일거리를 잡기 위해 분주했다.
표를 나눠 받고 탑승줄에 서고…… 나는 일행 가운데 맨 뒤에 섰다. 일행은 세 대의 쿠로건 기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고마운 인삿말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내 차례다.
“미스터 자알 후우, 쌩큐 베리 머취!”
이 일을 어쩌냐. 악수를 나누면서 그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는 낼 수 없었으니. 잠깐, 등에 배낭을 옆의 위정현 씨에게 맡기고 푸른 줄무늬가 세로로 쳐진, 짐짓 겉에 다시 겹쳐 입고 있었던 특대 사이즈 남방을 벗어 자알 후우에게 건넸으니.
“마이 프레젠트!”
그는 약간 멋쩍기도 하고 수줍어도 하는 표정으로 남방을 받아 팔에 들었다.
‘바이!’
배낭을 받아 등에 메고 경비행기를 향해 걸어가는 내 발걸음은 그리도 허전했으니.
‘내 마음의 껍데기를 그대에게 벗어 놓고 떠나노니.’
경비행기를 타고 울란바타르를 향하는 동안 하늘은 올 때처럼 맑고 명쾌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구름 그림자가 코끼리라든지 공작새로 보이지 않았고 기분은 울울, 잠에 곯아떨어졌다.
‘원래 있던 모습 그대로 아름답게 살아 있는 사막! 자알 후우는 야성이 살아 있는, 수줍은 한편 거친 다른 하나의 움직이는 사막이었으니, 우리 언제 다시 만나볼 수 있을 것인가? 영원하라, 내 기억 속의 사막이여!’
자알 후우. 그는 꾸미지 않아 거친, 생각이나 말이 쉬이 통하지 않아 애틋한 사막이었으니. 경비행기에서 자리를 찾아 앉은 고단한 눈 속으로 눈물은 고였다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모래 언덕에 일던 바람 한 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
첫댓글 나도 여행한번 잘했네~ 눈에 보이는듯..
저도요~^^
전에 한번 올렸던 건데 심심해서리 한번 더 올렸습니다. 몽골, 또 가고 싶어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