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사개특위에서 현행 사법제도에 대해 여러 개선책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사법체계는 어떠했을까? 국왕의 말이 곧 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사법이 행정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을 것이라고들 많이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먼저 조선은 수사권을 가진 여러 기관을 상호 견제시켜 사건의 조작이나 은폐를 원천적으로 막았다. 형조(刑曹)·한성부(漢城府)·사헌부(司憲府)가 삼법사(三法司)라고 불렸던 사법기관인데, 지금과 비교하면 형조는 법무부, 한성부는 서울시, 사헌부는 검찰에 해당한다. 의금부(義禁府)와 포도청, 장례원(掌隷院)도 수사권이 있었다. 그러나 수사 대상이 서로 달랐다. 형조·의금부·사헌부는 중대 사건을 다뤘고, 포도청은 강·절도 사건을 주로 다뤘으며, 장례원은 노비 도망 사건 등을 다뤘고, 한성부는 민사소송을 많이 다뤘다.
수사를 담당하는 삼법사(三法司)는 모두 대과(大科) 출신이었지만 판결을 담당하는 사율원(司律院)은 잡과(雜科)인 율과(律科) 출신이었다. 동일한 범죄에 동일한 형량이 부과되는 양형기준이 철저했던 조선 사법 시스템의 비결이 여기에 있었다. 대과 출신이 수사한 내용을 잡과 출신이 제멋대로 늘리거나 줄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잡과라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율과는 1차에 해당하는 초시(初試)와 2차에 해당하는 복시(覆試)를 통과해야 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 『대명률(大明律)』 『당률소의(唐律疏議)』 『율학변의(律學辨疑)』 같은 법전과 판례집, 그리고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寃錄)』 등이 시험 과목이었다.
특정 범죄에 해당하는 처벌 규정이 담긴 법조문이 정조(正條)로서, 이를 찾아 형량을 정하는 것이 조율(照律)이다. 딱 맞아떨어지는 정조가 없는 경우 유사한 조문을 끌어다 쓰는 비부(比附)를 실시하는데 실제보다 무겁게 판결하는 것이 실입(失入), 가볍게 판결하는 것이 실출(失出)이다. 비부에도 『예기(禮記)』의 “사면은 무거운 것을 따르고, 비부는 가벼운 것을 따른다(赦從重, 附從輕)”는 원칙이 있었다. 잡과 출신으로 구성된 사율원은 동일 범죄에는 가능한 한 동일 형벌을 적용해 구설에 오르는 것 자체를 피하려 했다. 그래서 국왕이라도 사율원에서 보고한 형량은 대부분 수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사법 시스템을 지금 그대로 재연할 수는 없겠지만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찾고, 같은 사건에는 동일 형량을 부과해 사법 정의를 실현하려 한 선조들의 의지를 되새길 수는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