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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고린도 전도
행 18:1-11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행 18:1-11 / [바울의 고린도 전도] 그후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갔다. 2-3) 거기서 본도 출신의 아굴라라는 유대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기 때문에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얼마전에 이달리야에서 쫓겨나 그곳에 와 있던 참이었다. 아굴라도 바울처럼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의 집에 묵으면서 같이 일을 하였다. 4)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온 후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는 일에만 모든 시간을 바치며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다. 6)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러한 바울에게 대들고 욕을 퍼부었고 예수를 모독하기까지 하였다. 바울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자 옷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말하였다. `당신들이 잘못한 책임은 당신들이 지시오. 이제부터 나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겠소.' 7) 그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은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지냈다. 유스도는 이방인이면서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 책임자 그리스보가 그의 온 식구들과 함께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많은 고린도 사람들도 예수를 믿고 침례를 받았다. 9) 어느 날 밤 주께서 환상으로 바울에게 말씀하셨다. `겁내지 말라. 계속하여라. 중단해서는 안 된다.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 될 사람이 많이 있다.' 11) 그래서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거기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7장에서 베뢰아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진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던 바울은 우상의 도시 아덴에서 힘들게 복음을 전하고 고린도로 이동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동역자(1-4) 바울의 아덴 전도는 힘들었습니다. 복음은 철학적인 논쟁으로가 아닌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니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큰 은혜를 예비하셨습니다. 좋은 동역자를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믿음과 헌신을 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것입니다. 이들은 바울과 직업이 같아 함께 살며 함께 일을 했습니다. 바울의 사역에 큰 힘이 되어준 동역자이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바울은 매 주 안식일에 회당에서 강론을 할 수 있었고 집중하여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로 가리라(5-11) 아굴라 부부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은 준비된 지원군을 보내 주셨습니다. 실라와 디모데입니다. 바울과 함께 했던 선교팀이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모인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의 현황을 보고했고 실라는 빌립보 등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를 가져왔습니다. 이제 바울은 전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을 했습니다. 한편 유대인 대적들의 비방 또한 거세졌습니다. 바울은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했습니다. 대적들은 바울의 이 말을 심각하게 들어야 했습니다. 에스겔서의 예언이기 때문입니다(겔 3:16-21; 33:4). 바울은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유스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 집은 회당 옆에 있었고, 회당장 그리스보에게 복음을 전하여 온 집안이 주를 믿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이 듣고 믿어 세례를 받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 두려워말고 침묵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년 6개월 고린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연출이셨습니다.
적용: 복음 외에 우리 인류를 구원할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대적하고 비방을 받습니까? 그래도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에 주님은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합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의 삶은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목적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후회하지 않고 목적이 있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멈추지 않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적이 있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주님을 만나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목적을 향하여 흔들리지 않는 전도의 삶을 산 사도 바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목적있는 삶의 모습이 어떠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호크마 주석
=====18:1
바울이...고린도에 이르러 - 고린도는 북쪽으로 중부 그리이스와 남쪽으로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를 연결시키는 고원 위에 위치했다. 이 도시의 동서쪽에는 각각 항구가 있어 전략상 요충지였다. 한편 이 도시는 B.C. 8세기에 크게 번성하여 B.C. 6, 7세기경에는 영화와 세력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B.C. 146년 고린도는 로마의 장군 무미우스(Mummius)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고 주민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B.C. 46년 로마 황제 시이저(Caesar)는 이 도시를 재건하여 B.C. 44년 로마의 식민지로 삼았고 B.C. 27년에는 로마의 아가야 행정 구역의 수도가 되게 하였다. 주민들은 대개 헬라인, 이탈리아 출신의 자유민, 로마군의 퇴역 장군, 상인, 정부 관리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도시는 특히 육상 및 해상 무역로가 집중되어 상업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해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며 이러한 윤택(潤澤)한 생활은 결국 주민들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 B.C. 5세기 초 고린도 사람들의 문란한 생활 때문에 '고린도 사람이 되다'는 뜻의 헬라어 '고린디아제스다이'(* )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이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아울러 이곳은 많은 이방 신전들이 있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다.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른 바울은 이 같은 사실들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우상 숭배의 중심지아덴에서의 경험을(17:16-34) 잘 분석하여 타락의 중심지 고린도에서 새로운 선교 전략을 세웠을 것이다.
=====18:2
18:2 아굴라...브리스길라 - 아굴라의 출생지인 '본도'(Pontus)는 소아시아 북부 지역에 있었다. 아굴라는 로마식 이름인데 로마의 기사나 호민관들 중에는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아굴라는 유대인 노예였다가 후에 로마에서 자유민이 되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브리스가 가문(gens Prisca)과 관계있는 유대인 여자와 결혼했을 것이라고 한다. 브리스길라는 브리스가의 애칭이다. 롱게네커(Longenecker)에 따르면, 아굴라에게는 기술이 있었고 브리스길라에게는 돈과 연줄이 있었으며, 이들은 공동으로 천막 제조와 가죽 수공 상사(商社)를 소유했고 또 이 상사의 지점이 로마와 고린도, 에베소에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가장 헌신적인 바울의 동역자들이었다(3, 18, 19, 26절 ; 롬 16 : 3 ; 고전 16 : 19 ; 딤후 4 : 19). 이들이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온 것은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글라우디오 칙령(49년)의 원인인 유대인 폭동의 주동자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만일 브리스길라가 로마 시민권이 있는 가문의 출신이라면 그녀는 글라우디오의 추방령에서 제외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남편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을 것이다. 본서나 기타 바울 서신서에서도 이들이 바울에 의해 개종된 자들로 언급되지는 않는다. 이로 보아 이들은 이미 고린도에 오기전에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던 것 같다(Zahn). 누가는 바울을 중심으로 본서를 기록하고 있기때문에 대체로 바울과 관계있을 경우에만 다른 인물들을 기록한다. 따라서 누가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 글라우디오 - 로마 제국의 4대 황제로서 그의 재위 9년(49년 경)에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追放令)을 내렸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따르면 이 추방령이 내려지게 된 동기는 로마의 유대인 사회 내에서 '크레스투스'(Chrestus)라는 사람의 선동으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자는 수에토니우스가 언급한 크레스투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고, 그 소동이란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문제를 두고 충돌한 사건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 년 후 로마의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도를 받고 회심하기도 했다는 본서 28 : 17 - 29의 기록 등을 고려해 볼 때 그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R.C.H.Lenski).
=====18:3
업(業)이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 크고 번창한 도시에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없이 새로이 전도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계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했다.바울은 전도 여행중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다(20 : 34 : 고전 9: 1 - 18 : 고후 11 : 7 - 12 : 살전 2 : 9 : 살후 3 : 7 - 10). 당시 천막은 바울의출신지인 길리기아의 다소 근방에서 산출되었던 염소의 피륙이나 기타 가죽으로 제조되었다고 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그들의 후손에게 전통이나 유산을 물려줄 뿐 아니라기술을 한 가지씩 가르쳐 주어 차후에 생계 유지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관습을 가지고있었다. 바울이 그런 기술을 어떻게 익히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는 낯선 곳에 당도(當到)하자 그의 기술을 사용하여 여비를 충당하기 위해 천막만드는 사람이나 가죽 기술자를 만날 수 있는 곳을 물었을 것이고 그런 계기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났을 것이다. 이들은 함께 일을 하고 함께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4
안식일마다 - 바울은 평일에는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장막 만드는 일을 하였고 안식일이 되면 으례히 그의 습관대로 회당에서 말씀을 전파했다. 쟈안(Zahn)의 견해에 따르면 당시 고린도에는 회당이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강론하고...권면하니라 -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한 사람들은 대개가 하나님을경외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아시아 지역에는 '흩어진유대인들'(diaspora)에 의하여 곳곳에 유대교 회당이 설립되었고 또 그들에 의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구약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흩어진 유대인들에게서 구약성경을 배우게 된 이방인들은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를 알게 되었고, 이로인해 율법의 조항을 부분적으로 준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회당 예배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이방인들이 율법을 준수하며 회당 예배도 참석하였지만 유대교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거나 완전한 개종자들이 되지는 못하였다.그것은 유대교의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에 의해 이방 민족을 무시한 데서 연유된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율법을 배우고 회당 예배에 참석한 이방인들은 유대교에서 명하는 '할례'를 받지 않아서 대부분의 유대인들로부터 부정한 자들로 여겨져 배척당하곤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모여있는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 한편 이때까지의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그다지 적극적인 형태를취하고 있지 않다. 즉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가 속히 와서 자신의 사역에 참여할 때까기는 이곳에서의 사역을 어느 정도 크게 확대하는 것을 자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사역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의 언급이 없다.
=====18:5
실라와 디모데가...내려오매 - 마침내 바울이 고대하던 두 명의 사역자가 당도했다. 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도착했거나 아니면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에서 먼저 도착하고 그 후에 실라가 빌립보에서 도착했을 것이다(Lenski).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자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신앙 생활에열중하고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지만(살전 3 : 6),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히 재림과 관련하여 약간의 혼란이 생겼다는 섭섭한 소식도 전하였다(살전 4 : 13 ; 5: 11). 바울은 이러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식을 듣고 나서 이에 대한 답장을 썼는데이 서신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혼란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두번째 서신인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였다. 한편 실라는 빌립보 교회의 소식과 그들이보낸 연보를 가지고 왔다(고후 11 : 9 ; 빌 4 : ]4, 15). 빌립보교회에서 보내준 헌금은 이 때의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시기 적절하고 유용한 것이었다. 빌립보교회의헌금으로 바울은 더 이상 생계 유지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고 오로지 말씀 전파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말씀에 붙잡혀 - 실라와 디모데가 온 후 바울의 회당에서의 말씀 증거는 안식일에만 있지 않고 지속적으로 있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현금덕분으로 장막 만드는 일에서 벗어나 말씀 준비에만 몰두했고 또 준비한 말씀을 전하는데만 전력 투구(全力投球)했다. 특히 '붙잡혀'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쉬네나케토'(* )는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이러한 사역이 고린도에 머무는동안 지속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18:6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 '훼방하거늘'이란 뜻의 헬라어 '블라스페문톤'(* )은 '신성 모독'이라는 뜻으로 바울의 선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난과 대적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명백한 신성 모독이었다. 특히 '대적하여'를 나타내는 '안티타쏘'(* )는 '반대편'이라는 뜻의 '안티'( )와 '정돈하다', '배열하다'는 뜻의 '타쏘'(* )의 합성어로서 유대인들이 바울의 반대 입장에서 전열을 가다듬어 게획적으로 대적하며 방해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대적과 훼방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같은 것이었다(13 : 46 -52).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사악하고 완악한 행동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을 향한 복음 전파에서 방향을 바꿔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옷을 떨어... 너희 피가...돌아갈 것이요 - 성경에서 '옷을 떤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엄숙한 맹세'나 또는 '저주의 행동' 등으로 받아들여졌다(느 5 : 13). 바울이옷에서 먼지를 떠는 모습은 이미 비시디아 안디 옥에서 그의 발에서 먼지를 떠는 모습을 통하여서도 비춰졌다(13 : 51). 바울이 이렇게 옷에서 먼지를 떠는 행동은 예수께서 12제자와 70인의 전도대를 파송하면서 그들을 영접지 않는 자들을 향해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명령하신 것과 유사하다(눅 9 : 5 ; 10 : 11). 이렇게 발이나 옷에서 먼지를 떠는 것은 초대 교회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마을에 들어갔다 나오면 으례히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는 모습과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발의 먼지를 떠는 것은 부정한 모든 것을 거룩한 곳인 자신들의 땅에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의도에서 취해진 행동이다. 즉 종교적으로 종죄되었던 이방인들의 영향력을 제하여버림과 동시에 자신들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행동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역이용하여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구원의복음과 무관(無關)하다는 사실을 그들의 방법대로 보여준 것이다. 한편 '너희 피가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라는 바울의 말은 겔 3 : 18 ; 33 : 4, 8 ;삼하 1 : 16에나타난 말씀이다. 아울러 이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기 위해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장담하면서 사용했던 말이기도 하다(마 27 : 25). 이는 결코 단순한 저주나 악담이 아니다. 이것은 살인자는 죽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또 그 책임에 따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
=====18:7
디도 유스도 -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찾은 곳은 '디도 유스도'(Titus justus)의 집이다. 디도는 로마식 이름으로 이사람이 로마 시민임을 나타내 준다. 추측건대 그는 B.C. 44년 로마 황제 가이사(Julius caesar)가 고린도롤재건할 때 이곳에 정착했던 로마인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한편 람세이(Ramsay)는, 디도는 그의 둘째 이름이고 유스도는 셋째 이름이며 그의 첫째 이름은 다름아닌'가이오'(Gaois)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이 디도가 롬 16 : 23의 가이오와 동일인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고전 1 : 14에서 바울은 그의 고린도 전도 초기에 개인적으로 세례를 준 '가이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회당 옆에 있던 유스도의 집은 고린도 전도 사역의 주사령부가 되었으며 고린도 교회의 최초 집회장소가 되었다.
=====18:8
회당장 그리스보 - 회당장 그리스보(Crispus)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고린도의 유대인 사회에 파문(波紋)을 일으켰음직하다. 여기서 그리스보가 고린도 선교 사역의 최초의 열매처럼 보이지만 고전 16 : 15에 의하면 고린도 최초의 신자는 스데바나와 그의 가족이었다. 그렇지만 고린도에서 바울이 세례를 베푼 사람이몇 안되는데 그 중 한 명이 그리스보였다(고전 1 : 14). 바울이 직접 그리스보에게세례를 베푼 것은 그가 회당장으로서 유대 사회에서 매우 비중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일것이다. 다른 일반개심자들에게 바울이 직접 세례를 베풀지 않은 이유는 그 사역을이미 실라와 디모가 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고전 1 : 14 - 17). 아무튼 그리스보의 걔심은 고린도 선교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수다한 고린도 사람 - 이들은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받아들인 이방인 개종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헬라인들과 로마인들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바울의 선교에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을 것으로 여겨지지 않기때문이다. 그리고 저자 누가는 유대인들이 이방지역에 거주한다고 해서 그들을 '고린도 사람들'이라는 형태로 부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방인 개종자들도 슷자상으로 많지 않으므로 '수다한'이란 의미 속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의식민지였기 때문에 많은 로마인들이 고린도에 거주했고 많은 헬라인들도 경제적인 것을 비롯하여 기타 이유들로 인해 고린도에 많이 드나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열심히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또 그들로부터 많은 결실을 거두었을 것이다. 이때의개심자들로는 유스도와 그리스보를 제외하고도 에배네도와 스데바나(롬 16 : 5 ; 고전16 : 15) 그리고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고전 16 : 17) 등 다수의 이방인들이 있었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고린도 서신에 따르면 고린도 교회는 대개가 이방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소수의 유대인들이 있었음을 알 수있다. 렌스키(Lenski)는 고린도 교회에있던 게바의 추종 세력들(고전 1 : 12)은 이 소수의 유대인들로 구성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듣고 믿어 세례톨 받더라 - 원문상 이 부분은 현재 분사와 미완료 과거형으로 구성된 구절로서 반복적인 행위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바울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으로 믿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겨났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고린도에서의 지속적인 부후 운동은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에게 온 이후에 일어난 결과이다. 이것은 공동사역(Team Work)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아덴에서 바울이 홀로 선교하던 것과 고린도에서의 공동사역을 비교해 본다면 공동 사역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18:9
주께서 환상 가운데 - 바울은 이미 여러차려에 걸쳐 환상 가운데 예수를 만난 적이 있었다. 다메섹(9:4)에서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된때를 위시하여, 드로아(16:9), 예루 살렘(22:17) 등지에서 그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환상 가운데 예수를 만나 위로를 얻고 힘을 얻었다. 그는 차후에도 환상 가운이 예수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된다(23:11;27: 23). 이렇게 때때로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는 바울이 그의 사역을 흔들림없이 굳건하게 수행하는데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두려워하지 말여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 고린도의 유대인들 회당장 그리스도와 같은 지도자급 인사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보고 바울에 대해 보복(報復)을 계획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바울은 그로 인해 큰 동요가 생기기 전에, 그리고 유대인들이 핍박이 적극적으로 가시화되기 전에 조용히 고린도를 떠나고 싶었을 수도 있다(16:19-19;17:13, 14). 바울은 고전 2:3에서, 자신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두러워하며 떨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심령이 위축되어 영적 위로와 격려가 꼭 필요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한편 본문의 말씀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주신 것과 유사하다(출 3:12; 신 31:6; 수 1:5, 9: 사 41:10;43:5; 렘 1: 8).
=====18:10
네가 너와 함께 있으매. 이 말씀은예수께서 부활 . 숭천하실 때 이 땅에 있는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약속으로 주신 말씀이다(마28:20).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을 의한 약속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바울이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오랜 선교 여행과 지속적인 말씀 전파 그리고 지속되는 유대인들의 박해와 위협으로 지치고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약속을 바울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심으로 그에게 위로를 주시고 있는 것이다.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리가 없을 것이니 - 이는 앞으로 바울이 전혀 박해를 받지 않거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이 앞으로도 어려움에 처할 것이며 고난도 당할 것이지만 그때마다 그와 함께 예수께서 계시사 그 어려운 상황을 넉넋히 극복하게 할 것이며 아무런 허도 받지않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12-17절). 내백성이 많음이라 - 여기서 이르는 백성은 곧 바울의 복음 증거로 구원허야 할 많은 고린도의 사람들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시기로 택정한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 성 내이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그의권속(券屬)으로 삼으셔서 그의 아들이 되게 할 것을 예정하셨다(롬 8:29; 엡 1:5).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선택과 사랑과 기쁘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엡 1:4 - 11;2:8, 9).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예정을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예정하셔서 구원하신자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개개인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개인 스스로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해야 하는 결단과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 바로 이 고린도 성 내에는 아직까지 바울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할 피택된 백성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다.
=====18:11
일 년 육개월을 유하며 - 1년 6개월의 기간에 대해서나 학자 간에 다소 의견에 차이가 있다. 즉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도착해서 그곳을떠날 때까지의 전체 기간을 말한다는 의견(Zahn, Haenchen, Longenecker)과 바울이 환상을 경험한 후 고린도에 머문 기간만을 의미한다는 의견이 있다(Robertson, Whitelaw). 여기에서 어느 것이 정확한의견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바울이 적어도 1년 6개월 고린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그는 고린도에 머물며 참으로 당사역을 수행헹다. 한편 롬 16:1 과 고후 1:1 을 살펴보면 고린도와 인접한 아가야와 겐그레아 항구까지 복음이 전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바울이 그러한 지방까지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추측할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바울은 주로 고린도 내에서 활동하였고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인접한 지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는 추측이 훨씬 더 타당하다(Lenski). 특히 '유하며'의 헬라어 '에카디세'(* ) '머물다', '거주하다'는 뜻으로 바울이 고린도를 벗어나지 않고 전도 사역을 지속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가르치니라 - 바울이 고린도 성 내에서 가르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바울 설교의 핵심은 항상 예수의 메시야되심에 관한 것이었다(17:31). 이 사실에 근거해 볼 때 화목을 이루신 예수를 전파했고 또 그를 믿는 믿음에 관해 가르쳤을 것이다.
< 설 교 >
바울의 재기
이필재 목사 / 행 18장 1~11절
우리들 각자 자신이 추진하는 일들이 계속 되어지는 것은 삶의 기쁨이요, 행복인데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이였던 아덴에서 그것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심히 낙심되었고 몸도 극도로 지쳐있었습니다. 사실 이때의 바울은 상당히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에 괴로움을 겪으면서 교회를 세우지 못하고 아덴을 떠나 고린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가서 아주 달라지는 내용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 그 내용을 성경에서 함께 찾아봅시다.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5절을 보면 아덴에서 겪었던 바울이 심경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아덴에서는 이것과 반대였습니다. 아덴에서 겪은 이야기는 ‘철학의 도시인 아덴에서 헬라 철학의 전공자인 이들 앞에서는 철학적 대결을 해야 그래도 내가 유식하게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 아닌가?’라고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철학적으로 대결한 것이 지난번 사도행전 본문에 나왔습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을 자인하는 말이 오늘 여기 고린도전서에 나온 것입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고린도에 와서는 말과 지혜에 아름다운 수식어를 쓰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철학을 말하려면 수식어를 수없이 써야 합니다. 아주 깊이 있고 논리적인 수식어를 연역적, 귀납적으로 꿰뚫어나가야 그게 철학적인 말이 됩니다. 최대로 구사할 수 있는 수식어를 쓰면서 설교했지만 이제는 아름답게만 꾸미는 말로는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덴에서 겪은 마음고생 때문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사실을 그냥 전하겠다. 이것만 내가 알리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말을 하고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지할 때, 그의 마음은 심히 약하여져서 담대해야 될 사람이 “심히 떨었노라”, 그러니까 벌써 성령의 능력은 내 영적인 속에서 약해졌다는 것을 자신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은 말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에 있다.”라는 결론을 가지고 이제 이렇게 완전히 복음적 사도의 변신을 한 겁니다.
바울의 아덴에서의 모습과 고린도에서의 모습은 아주 달라집니다.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내용을 보면 아덴에서 경험했던 것에 거의 반영하는 말이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낙심한 상태에서 찾아온 고린도는 매우 활발한 도시입니다. 그 당시에 75만의 인구가 살고 있던 항구도시입니다. 아덴이 학문과 예술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도시입니다. 이런 도시에는 두 가지가 많게 됩니다. 하나는 돈입니다. 거래가 많으니까 경제가 활성화되지만 돈으로 인해 또한 죄가 많아집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도시일수록 신전이 많은 것이 헬라 대도시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아프로디테, 앗시지 신전과 같은 세계적인 규모의 신전이 있는 지역을 찾아간 것입니다. 고린도에 온 바울은 마음이나 몸의 상태를 보아서는 ‘내가 또 실패하면 어쩌나’하고 도저히 전도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열심히 하다가 한번 딱 꺾여서 침체가 되면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 쉽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치료하는 전문 상담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의 경우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번아웃(Burnout)이라고 말합니다. 탈진이 되어서 목회하기가 아주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목회의 길을 가다가 좌절, 절망 같은 뭔가에 꺾여질 때가 있습니다. ‘어휴, 나는 이거 못하겠다!’ 그래서 그때는 사람이 망가져버리는 그런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는 거기에 대한 교육을 받고 전문가들이 상담치료를 하면 또 새로운 용기를 갖게 되는 겁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그런 경우를 만났습니다. 그랬는데 이 치료를 누가 하느냐? ‘안되겠다! 아덴에서의 경험 때문에 큰 사역자 하나가 좌절할지도 모른다!’ 해서 하나님이 바울 챙기기에 나섭니다. 바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몇 가지 위로의 사건을 고린도에 와서 만나게 됩니다. 낙심한 바울을 치료해서 다시 재기시키는 역사가 고린도 역사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 첫째가, 동역자를 만났습니다. 낙심이 될 때 내 일을 도와줄 수 있는 동역자의 만남은 정말 구세주와 같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창조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분야에 똑같습니다. 어느 교회가 영적 능력이 사라져서 망가지는 그런 교회가 될 수가 있지 않습니까? 목회자 하나를 잘 만남으로 교회가 치료가 되어 놀라운 영적 능력의 사역이 되기도 하고, 침체된 나라가 지도자 한 사람을 잘 만남으로 정말 진주와 같이 빛이 나는 나라로 발전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기도 하고 또, 내 자신이 그렇게 침체되었다가 어느 동역자를 만남으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만남은 중요한데, 아덴에서 실망한 바울을 하나님이 고린도에서 다시 챙겨서 일으키는 작업으로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동역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입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지만 로마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글라우디오 로마 황제가 어느 날 “이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다 내쫓아라!”라고 해서 고린도로 쫓겨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 선생도 유대인 아닙니까? 추방명령에 의해 쫓겨나 고린도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직업이 장막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고린도에 간 바울이 잘 생각한 것인지 잘못 생각한 것인지 ‘내가 어디 취직을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생활할게 없으니 마음이 낙심이 되어 ‘어휴, 이거 잘못하면 굶어 죽지 않을까?’라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취직을 하려고 일을 찾다 보니까 텐트 만드는 천막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였습니다. “아! 나는 이것의 기술자입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일을 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랬더니 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네, 그러십시오. 같이 일합시다.” 그래서 바울과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학교를 다닌 전문가이며 헬라철학을 전공한 헬라어, 유대어 언어학자입니다. 또한 산헤드린 공회의 72명 중에 한 사람으로 그 사회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최고로 출세한 사람인데도 천막 만드는 손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생활 철학입니다. 유대인들은 무슨 공부를 했던지 제사장들도 자녀들에게 손기술 하나를 가르칩니다. 안 가르치는 자는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 임무로 하는 것 외에 뭐든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기술 하나씩 습득하는 생활철학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 어디를 가든지 손만 움직이면 충분히 먹고 사는 것이 해결이 됩니다. 예수님은 무슨 기술이 있으셨습니까? 목수 기술이 있었습니다. 똑같은 겁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천막 만드는데 기술자입니다. 그래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보니까 굉장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당신 뭐하는 사람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 그러면 됐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위해서 열심히 후원을 할 테니까 바울 선생님은 그 일만 열심히 하십시오.” 그래서 이 만남이 바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바울 선생은 이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이 부부가 얼마나 바울에게 고마운 사람이었으며 바울에게 얼마나 큰 충성을 했느냐에 대해서는 로마서에 나옵니다. 로마서 16장 3~4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을 위해서 무엇을 내놓았습니까?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 이상은 없습니다. “이 바울을 위해서는 우리가 생명을 내놓고 일하자!”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에게 좀 문안하라. 그들은 나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했느냐 하면 내가 그들 때문에 고린도에 가서 용기를 얻었고 다시 사역자로 재기를 했고 지금까지 그들이 텐트 공장을 해서 벌은 돈을 나의 선교비로 다 주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복음의 사역자를 하는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의 마음은 목숨을 바칠 것만큼 나에게 충성을 했다.” 이 만남이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아덴에서 겪었던 절망적 분위기가 이들을 만남으로 용기가 나고, 경제적, 심적 도움까지도 받았습니다. 사실 바울과 아굴라의 관계는 피차 행복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후원받아서 선교를 많이 할 수 있었으니까 행복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대상을 만났다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행복인 것입니다. 만남 속에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다. 잘 만나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악연이라는 말과 인연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악연으로 만나서 ‘어휴, 안 만났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나는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렇게 또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에 두 번 실패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부인이 도망을 가서 실패를 했고, 또 결혼을 했는데 이번은 부인이 도망을 안가서 실패했답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자체가 행복이요, 힘이요, 용기입니다. 사람이 제일 행복을 느끼는 때가 언제입니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행복합니다. 바울과 아굴라, 브리스길라는 피차 인정했습니다. “당신들은 나의 선교의 제1의 공로자입니다. 목숨이라도 내놓고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니 이 사람들은 너무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래서 자기 생명을 바칠 곳을 찾는 답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섬겨도 괜찮은 어떤 주인을 만나기를 바라고 만났을 때는 생명을 바쳐가면서 싸워주고 일합니다. 이런 문화로 인해 일본 사람들은 내가 리더의 역할에 서는 것보다도 훌륭하지만 리더를 도와주는 것을 더 행복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회장 누가 되느냐, 우두머리 누가 되느냐 싸움은 우리보다 십분의 일도 안 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나섰을 때 옆에서 도와주는 것에 더 행복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몸 바쳐 충성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있으면 가장 열심히 합니다. 오늘 여기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이 하는 일을 보고 목이라도 내놓은 정도로 뭐든지 희생해서 도와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가서 에베소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곳에도 따라가서 또 도와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마지막에 로마로 갈 것입니다.” 바울이 이 말 하는 것을 듣고 먼저 로마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돕다가 바울을 돕는다는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주의 종을 만나 그가 하는 일을 위해 내가 몸을 바치는 것이 내 인생의 보람이라고 판단하고 죽을 때까지 그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다시 용기 있는 사역자로 만드는데 큰 힘이 되었고, 아덴에서 겪었던 실망을 고린도에서 위로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오늘 말씀에 회당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전도는 예수님 전도와 마찬가지로 회당을 중심해서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회당에서는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회당에서 바울이 전도를 하는데, 고린도에는 그 당시에 약 9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회당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가 구원이라고 열심히 가서 전했더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회당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쫓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원했습니다. 그러면 어디 가서 하느냐?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 여기에서 고린도 교회가 시작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하시고, 이방인 유스도의 집을 예비해 두셔서 그 집에서 오늘 말씀대로 1년 6개월 동안 살았습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그곳을 중심으로 해서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게 된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당한 핍박 가운데 유대인의 핍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바울을 제일 많이 도와준 사람도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장 핍박했고, 가장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떠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지금 대한민국에서 정부나 어떤 기관에서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도와주면 도와주었지 교회를 어렵게 하는 문화는 대한민국에서는 안 통합니다. 기독교가 가장 앞서가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선진국은 정부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이것 좀 도와주세요.” 합의해서 사회사업을 정부와 함께 추진합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가 양로원을 하나 세우겠습니다. 정부가 반 내고 우리 교회가 반 내서 합시다.” “노인 아파트를 하나 건축하는데 우리 교회가 100만 달러 내겠습니다. 정부가 100만 달러 내십시오.” 정부가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아, 그럽시다. 반씩 내서 우리 합시다.” 안 해주는 것이 없습니다. 사회사업은 같이 하자고 해서 도와줍니다. 그런데 교회 핍박의 문제가 뭡니까? 믿는 자끼리 복음 전파의 방해자 노릇을 서로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가 됩니다. 믿는 자끼리 방해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됨으로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고, 유스도를 만나 이방인이지만 그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고, 그 다음으로 회당장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게 된 겁니다. 지금 회당 출입을 금지 당한 바울이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라고 저주적인 발언을 합니다. “나는 이제부터 유대인이 아닌 회당 전도를 그만하겠다. 이방 전도에 문을 열겠노라.”라고 선언했는데 뜻밖에 회당장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 집안 식구들이 다 함께 세례를 받는 큰 열매를 얻게 되니 바울이 이 만남을 통해 큰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덴에서 겪었던 마음의 상처와 어려움이 고린도에 와서 몇 사람을 만남으로 다 해결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에 빠질 때 그냥 두십니다. 왜 그냥 두시느냐 하면 그것을 겪고 난 다음에라야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깨달을 수 있는 영적 능력이 내 영 가운데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이 넘친 곳에 위로가 넘치는 겁니다. 항상 하나님이 그렇게 일을 하십니다. 이 회당장은 상당히 권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쳐주러 가시는 장면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회당에서 쫓겨나서 실망하고 있는 바울한테 회당장이 와서 내가 예수를 믿겠다고 하며 온 집안 식구들이 세례를 받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개척교회를 해본 목회자는 누구나 똑같은 경험이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 인도하러 나가보면 개척교회니까 몇 사람 나와 있지 않잖아요? 그런데 어떤 뜻하지 않은 사람이 교회 문을 쓱 열고 들어올 때는 그 사람이 누구였던지 간에 목사의 마음에는 너무너무 예쁘고 너무너무 반가워서 가서 그냥 꽉 끌어안고 싶은 심정이란 말입니다. ‘어머나! 저 사람이 어떻게 교회로?’ 흥분해가지고 나갈 때는 ‘내가 뭐 줄 것 좀 없나?’ 이건 개척교회를 해본 목사만이 느끼는 심정입니다. 제가 부목사님들께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선교사의 경험과 개척교회의 경험을 하는 것이 목회자로서 훌륭하게 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그냥 큰 교회에서 왔다 갔다 하면 이런 것을 모릅니다. 교인들이 수천 명씩 모이는 교회에서만 목회를 하다보면 영혼 하나가 귀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개척 교회하라고 하면 자신 있습니다. 거기에 은사도 받았습니다. 저는 여태까지 다섯 교회를 개척했는데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이 너무너무 잘되었습니다. 지금도 교인 한명씩 한명씩 전도하는 것은 큰 교회를 목회하는 것이나 그것이나 내 마음속 기쁨은 같습니다. 교회가 없는 지역에 나 때문에 교회 하나가 생기고 한사람 두 사람씩 전도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기쁩니다. 또, 개척교회가 좋은 게 뭔지 아십니까? 사실 저도 갈보리 교회 올 때 얼마나 염려했는지 교인이 줄면 난 어떡하나? 그때는 볼 것도 없습니다. “어휴, 저 이 목사는 실력도 없어!” 이렇게 되면 목사는 의기소침해서 목회를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개척교회는 교인 줄 염려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 혼자 시작했으니까 일 년에 수백 퍼센트 교인이 증가됩니다. 열 사람만 나와도 1,000퍼센트, 두 사람만 나와도 100퍼센트 이렇게 되니까 거기에 대한 걱정이 없습니다. 한명 왔으면 그게 증가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교인이 100명 모이면 이것은 황무지에서 얻은 흑진주 같은 교인들입니다. 너무 예쁘고 너무 감사하고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온 기쁨이 말도 못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개척교회로 지금 세우는 거 아닙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만났고, 유스도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니 바울이 더 신이 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나는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신감이 넘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고린도에 가서 환상을 선물로 받습니다. 9~10절을 보면,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환상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하나님이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겁니다. 고린도에 와서는 하나님이 바울을 챙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낙심에 빠져있는 바울을 다시 용기 있는 사역자로 만드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그걸 믿고 하면 됩니다. 환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게 너무 좋은 것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가짜 환상을 볼 때가 많습니다. 또, 그냥 꿈 한번 꾼 것을 자기 맘대로 연결하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말 추리소설을 쓰는데 유명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체험한 신비적 사건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메섹에서 빛이 비추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음성 들었고, 빛 봤습니다. 유럽 넘어갈 때도 마게도냐에서 환상 가운데 유럽 사람들이 나타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환상을 보고 건너갔습니다. 그 다음에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바울과 실라가 찬송을 부르니까 옥토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려버리는 환상을 봤습니다. 오늘 네번째로 고린도에서의 환상! 나중에는 입신을 경험해서 삼층천에 올라갔다 내려왔습니다. 마지막에는 밀레노 섬에서 물리면 그 자리에서 죽는 독사뱀에 물렸으나 아무 해도 받지 아니해서 토인들이 바울을 보고 “이는 신이라! 사람이 아니다.” 이런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다 언제냐? 꼭 필요한때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용기를 주시고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을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내 백성으로 택함을 입었느냐? 너희를 책임질 것이다.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내가 너와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거기에 대한 믿음이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내가 왜 이 모양이야?’ 이렇게 자꾸 생각하면 성령을 근심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인도를 주시는데도 그것에 대한 영적 깨달음이 없으면, 성령도 그런 사람과는 일을 하기 싫어집니다.
이제 고린도의 바울은 이와 같은 몇 가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고린도에서 “십자가 외는 말할 것도 없고 알지 않기로 결심했어!”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까? 제일 교인이 많은 교회를 바울이 세우게 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환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는 상대가 누구이던지 상관없이 두려워말고 말하세요. 열매는 하나님이 거두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하고 “내가 말해봤자 저 사람은 예수 안 믿을 사람이다.” 내가 그냥 결정을 해버립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도 안 나타납니다. 내 믿음이 거기 밖에 안 가는데 ‘내가 아무리 기도해봤자 저 사람이 예수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다.’ 먼저 내 마음에 결론을 하고 말을 하니 그게 뭐가 되겠습니까? “말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심히 떨리는 약함을 가지고 의기소침해서 실망하고 낙담한 상태로 실패자의 모습으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린도를 찾아간 바울에게 하나님은 준비하셨다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유스도의 집을 주셨습니다. 회당장을 보내시고, 나중에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개인적 생활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가 시험을 받습니다. 시험 받을 때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길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내 개인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에 온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로의 사건이 오늘 예배 나오신 온 교우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바울의 선교 이정표와 그의 순례 과정을 저희들이 보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는 어떻게 바울의 선교에 나타났는가? 거기에 담긴 영적인 뜻을 저희들이 잘 해석함으로 그것이 내 개인적인 삶이나 교회 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기쁨과 행복이 있어지게 하시옵소서. 지금 현재 이 설교를 듣는 형제들 가운데 바울의 아덴과 같은 역사가 있다면 고린도와 같은 역사를 곧 준비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김삼환 목사 / 행 18:1-11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지만 대답을 잘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이겠습니까? 교회는 언제 시작이 되었으며, 교회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교회의 발자취는 누구에 의해서 걸어 온 것입니까? 이 세상의 권력과 부유함과 잘된 조직과 사상도 1세기를 넘기가 어려운데, 교회는 어떻게 2000년 동안이나 걸어왔습니까? 교회를 이끌어온 사령관은 누구이며 누구에 의해서 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까?
교회는 성령에 의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교회를 이끌고 가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원시인의 교회이든, 정글 인디언의 교회이든 교회의 주인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교회 안에 계셔서 성도와 교회 안팎의 일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며 인도하시며 길러주시며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며 응답하시며 부흥시키시며 교회의 사명을 다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의 교회를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어떤 핍박 중에도 성령은 교회를 지키시며, 어떤 환란과 전쟁으로 나라는 무너지고 권력은 바뀌어도 교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의해서 교회가 끊임없이 운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을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신비하고 신령한 사람인가? 구름 타고 다니는 사람인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인가? 기사와 이적이 엘리야처럼 나타나고 모세처럼 홍해를 갈라지게 하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성령의 사람인가? 우리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좋은 인격을 가지고 내 가정과 내 삶의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 칭찬 받는 사람, 자신의 할 일을 잘 감당하는 사람,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경배하며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복음을 증거하며 주어진 일에 열심을 다하여 살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고, 예쁜 처녀가 옆에 와도 조금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사람을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쁜 여자가 오면 마음이 움직여야 좋은 사람입니다. 예쁜 분이 옆에 와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런 특이한 체질을 가진 특이한 유전자가 흐르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하여 온 세계에 복음을 증거한 최고의 영적 지도자이지만 평생동안 고린도 교회에서 천막을 기우면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를 만나서 이 부부와 함께 평생동안 천막을 만들면서 열심히 일하고 복음을 증거한 것이 바울의 삶입니다. 바울이 특별히 신비하고 신령하게 산신령같이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이 자면서, 똑같이 생활하면서 복음을 증거한 삶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땅에 오셔서 어떻게 살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의 삶은 목수의 삶입니다. 부모 형제와 함께 고향에서 열심히 일하고 살았던 삶이 예수님의 삶이에요. 그래서 어떤 분은 '예수님은 손에 못을 박으셨지만 못 박히기 전에 이미 망치로 주님은 끊임없이 못 박히는 삶을 살아가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삶은 이런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 축복 받은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이런 삶입니다. 남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가르쳐 주는 스승이며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며,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영영 죽은 죄인입니다. 오늘 임집사님께서 불러주신 대로 '나 같은 죄인'입니다. 이 죄인이 아닙니다. 가장 쓸모 없는, 가치 없는, 볼 것 없는 흉악한 죄인, 영영 죽어 마땅한 죄인, 이 세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고, 이 세상에 나보다 큰 죄인은 하나도 없는, 내 죄가 제일 크고, 내 죄가 제일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 죄를 대신하여 주님이 죽으시고 내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미국 남 북 전쟁 때에 '스카피야'라고 하는 사병이 보초를 서고 있을 때 졸다가 붙들렸습니다. 여러분, 전시(戰時)에 보초의 역할은 참 중요합니다. 백 명이 자고, 천 명이 자도, 누굴 믿고 자는가하면 보초를 믿고 잡니다. 적군이 들어와 수류탄이라도 던지면 한 중대는 한 순간에 죽습니다. 그것을 누가 막아내느냐? 다 재워놓고 보초가 서서 지키는 거예요. 밤새도록 철저하게 지키는 거예요. 철조망이 있지만 적군은 철조망을 끊을 수도, 뛰어 넘을 수도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키는 거예요. 보초 한 사람이 잠이 들면 적군은 한 순간에 다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보초가 자리를 이탈했다든지, 보초 서는 사람이 존다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천명을 희생시키는 무서운 큰 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스카피야는 전날에도 보초를 섰는데 그 날 친구가 몸이 아파서 친구 대신 보초를 서다가 그만 졸려서 잠을 자다가 사령관에게 들켰어요. 그리고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어요. 어느 나라든지, 사형을 받으면 좋다는 분도 있지만 구명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어져 있습니다. 사형 폐지 운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나 친지들이나 친구들이나 학계에서 끊임없는 구명운동을 일으키지요.
이번에 미국에 흉악한 살인범에게도 구명운동을 일으키듯이 스카피야도 구명운동이 일어난 거예요. 이 청년은 자기의 죄도 아니고 친구 때문에 또 보초를 서다가 졸게 되었다고 대통령께서 사면을 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링컨이 그 소식을 듣고 스카피야를 사면 시켰어요. 스카피야 개인적인 운명은 대통령에 의해서 사인(sign)으로 사면이 된 거예요. 죽음에서 생명을 얻게 된 거예요. 어두움에서 광명을 찾은 거예요. 영영 죽을 사람이 자유를 얻은 거예요.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래서 주선을 하여 대통령 앞에 인사하러 가게 되었어요. 그냥 악수를 못하고 무릎을 꿇고 "각하,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면 좋겠습니까?" 그럴 때 링컨이 유명한 말을 했어요. "이 은혜는 갚을 수는 없습니다. 이 은혜를 갚으려면 훌륭한 군인이 되어 주십시오. 돌아가서 훌륭한 군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해 주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 주시고,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내 일터로, 내 고향으로, 내 위치로 돌아가서 훌륭한 학생이 되고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치인은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 훌륭한 정치인이 되고 농부는 훌륭한 농부가 되고 어부는 훌륭한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운전기사는 운전기사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생각하며 훌륭한 기사가 되기 위해 오는 손님에게 친절하게 하고 복음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은혜를 보답하는 길이요, 성령 충만한 삶인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나라는 이런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천사들이 땅에 많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천사들이, 농사 짓는 천사들이, 땅을 파는 광부의 천사들이 있어야 합니다. 이발소에서, 수영장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천사를 만나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면 '의사들하고 약사들하고 붙는다. 일년동안 길게길게 싸움을 했는데, 또 대판으로 한번 붙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의사, 약사는 사촌간입니다. 형제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보다 더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누구보다 더 이성적이어야 됩니다. 사람은 너무 감정적으로 기울어지면 안됩니다. 왜 공부시키는 줄 아세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삶을 살라고 공부시키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왜 좋은지 아세요? 감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신앙적이고, 인격적이고, 합리적인 좋은 생각을 갖고 살려고 예수 믿는 거예요. 오늘 우리 나라는 너무 감정적이에요. 노조와 경영자가 너무 감정적이고, 학생과 선생이 너무 감정적이에요. 요사이는 부부간에도 너무 감정적이고 부모 자식간에도 감정적이에요. 모두가 다 너무 감정적이에요. 불길같이 한순간에 죽이고 살리는 거예요. 말 한마디를 서로 못하는 거예요. 오늘 이 사회가 참 평화롭기 위해서는 너무 감정적으로 가지 않아야 돼요. 모두 내 삶에 감사하며 살아야 해요.
성령 받은 자의 삶은 이해하는 삶이에요. 관용하는 삶이에요. 감사하는 삶이에요. 이 은혜 때문에 범사가 다 편안해지고 원수가 없고, 이제는 그렇게 시기 질투할 사람도 없고, 이제는 그렇게 말 한마디에 흥분할 일도 없고 그래서 좋은 거예요. 그 전에는 조그만 것도 못 참고 이해를 못하다가 주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 은혜에 감사해서 내 성격이 온유해지고 어린아이 같아지고 순수해지고 이해하게 되고 아름답게 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의 삶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내 안에 오심으로 죽어야 할 나를 살리신 은혜를 생각하면 이제는 모든 일에 흥분하지 아니하고 감사한 거예요. 남편이 늦게 돌아온다? '그럴 수 있지. 남편이 집에 일찍 와서 뭐해?' 이런 마음으로 마음이 변하는 거예요. 부인이 바가지를 긁는다? '부엌에 바가지 소리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모두가 다 이해가 되는 거예요. 내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여자분들은 부엌에서 반찬을 합니다. 김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담그고 된장은 무형문화제급으로 만들고 고추장은 세계 챔피언 맛을 내는 거예요. 찌개 하나를 끓여도 맛이 꿀맛 같아요. 우리집 장은 누가 훔쳐갈까봐 겁이나요. 사람이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대요. '집에서 반찬 잘 만들어 먹는다' 이 세상에 이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어요? '저처럼 부족한 종이 설교해서 이 설교에 모두 은혜를 받는다' 세상에 이런 행복한 일이 어디 있어요? 내가 하는 농사, 꽃 한 송이라도 예쁘다 칭찬해 주고 모두 아름답게 보면 이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어요? 우리 모두 내 위치로 돌아가서 위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선사하는 이런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삶이에요. 이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나는 어려서 제일 궁금한 것이 가마 타고 가는 아가씨는 어떻게 타고 가나? 가마가 마을 앞에 오면 아주머니들이 나가요. 그러면 가마의 행렬이 멈추면서 가마문을 아주머니들이 열어 주어요. 남자들은 못 봐요. 그런데 저는 꼭 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어머니 사이로 들어가 가마 안에 있는 색시를 봤어요. 색시는 손에 하얀 명주수건을 갖고, 아래위로 예쁜 한복을 입고, 머리에 예쁜 것을 쓰고, 양쪽 볼과 이마에 빨간 연지 곤지를 도장 찍듯이 찍어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보니 울어요. '저렇게 잘 입고, 남자들이 메고 가는데 왜 울까?' 이해를 못했어요. 요사이 생각하니까 고생문이 훤해서 운 거예요. 그때는 조혼을 했고 부모 떠나서 멀리 산골로 결혼해 가니 안 울 수가 없지요. 성령의 충만한 삶은 어떤 삶일까? 성령 충만한 삶을 들여다보면 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하고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내 삶의 현장이 어디라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심으로 천국 같이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신 정진경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하셨어요.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인을 가려낼 수 있는 것은 그 은혜스러운 표정이라고 하셨어요. 성도는 얼굴이 은혜로워야 돼요. 만 명이 있어도 교인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그 얼굴이 은혜로운 거예요. 죽어야 할 나를 살려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은혜스럽고 즐거운 모습은 가장 훌륭한 추천장이라고 프렌시스 베이커는 말했어요. 어디에 어느 직장에 소개해도 내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사람은 은혜로운 표정의 사람이에요. 아무리 많이 배운들 얼굴에 은혜가 없어 보세요? 은혜로운 사람은 어디에 내어놓아도 사랑 받고 하나님 영광 드러낼 줄 믿습니다.
삶이 은혜로워야 됩니다. 마음이 은혜로워야 됩니다. 생활이 은혜로워야 됩니다. 말이 은혜로워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은혜 받았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아니면 나는 죽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이런 마음으로 늘 울어도 눈물로써 갚을 수 없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명일동 옆에 상일동이라고 있는데 그 곳에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계셨어요. 지금부터 한 15년 전에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청주 쪽으로 다녀오는데 상일동에 계시는 목사님이 옆에 앉은 목사님께 나는 창 쪽으로 가겠다고 자리를 바꿔달라고 하셨어요. 창가에 계신 목사님도 창 밖을 보는 것이 좋은데 기어이 자리를 바꾸어서 당신이 창가에 앉겠다고 하시더니 몇 분이 지나지 않아서 트럭에 받혀서 그만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먼저 그 자리에 앉았었던 목사님은 돌아가셨을 텐데 순식간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살게된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깜짝 놀란 것이지요. 딱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상일동에 김목사님이 돌아가셨어요. 그 다음에 그 목사님은 김목사님으로 인해 살게 되었으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고맙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그 가족들을 지금까지 돌보고 가족들을 볼 때마다 그 분이 생각나지요. 그 분이 아니면 내가 죽었을텐데…. 오늘 우리 성도들의 삶이 어떤 삶이에요? 그래서 불쌍한 사람을 돕고 고아를 돕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면서 '나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벌써 죽었을 텐데…' 이 마음으로 살아가면 언제나 감사한 것입니다. 볼 때마다 생각할 때마다 주님의 은혜 생각하니 우리는 겸손하게 되고 순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살려주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 이런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기 때문에 우리 성도의 삶은 복된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아주 어렵고 강퍅하고 너무 과격하고 사람이 무서워졌습니다. 이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강퍅하게 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 때문입니다. 우상 숭배의 문화가 발전하면 사람은 아주 강퍅해집니다. 거칠어집니다. 우상 문화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의 문화는 사람들을 얼마나 거칠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빈들의 마른 풀처럼 작은 불만 붙으면 그대로 활활 타게 됩니다. 요사이는 아이들에게도 말 한마디 못합니다. 그냥 자살해 버려요. 죽어 버려요. 노인도 자살해요. 강퍅해졌어요. 오늘 아침 뉴스를 보셨어요? 네팔에서 어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 줄 아세요? 30살 된 왕자가, 이 아들이 아버지 어머니하고 12형제를 다 죽였어요. 왜인지 아세요? 네팔은 어떤 나라인지 아세요? 세계 우상 숭배를 1등으로 하는 나라예요. 네팔의 왕은 법으로 다스리는 게 아니에요. 매일 점쟁이 말을 듣고 다스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날도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아들이 서른 살인데요 장가를 가려고 아버지에게 신부를 소개하고 결혼을 시켜달라고 하니까 아버지가 점쟁이 말을 듣고 반대를 한 거예요. 점쟁이가 왕에게 35살 되기 전에 아들을 장가 보내고 결혼 시켜 아이를 낳으면 왕실에 큰 화가 있다고 한 거예요. 왕에게 화가 미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점쟁이 말을 듣고 장가를 못 가게 한 거예요. 여러분, 남자 성도 여러분, 30살 되어봐요. 얼마나 장가가 가고 싶은지…. 그런데 5년을 기다리라고 하니 총을 쏘지 않고 견디어 내겠어요? 점쟁이 말 듣고 자신과 집안을 살리려 하다가 왕실이 다 망한 거예요. 우상 문화는 강퍅합니다. 아시아에서 우상을 제일 많이 섬기는 나라가 또 일본입니다. 일본 사람이 얼마나 강퍅합니까? 일본 사람은 자살을 제일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습니까? 할복을 해요. 칼로 그어서 죽어요. 우리는 죽어도 칼로는 못 죽습니다. 어떻게 무서워서 칼로 죽어요 목매어 죽지…. 일본 사람은 아주 잔인합니다. 강퍅합니다. 세계에 자살 제일 많이 해요. 자살을 해도 언제나 잔인하게 죽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강퍅하게 합니다.
오늘 성령의 단비가 부어져서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지길 바랍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 충만해야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가정, 부모 자식이라고 믿을 수 있는 줄 아세요? 요즈음 오늘 우리 나라도 얼마나 우상과 미신이 많아지고 점쟁이들이 얼마나 번성하는지 아세요? 교회는 부흥하지 않고 점쟁이는 얼마나 부흥하는지…. 이럴수록 강퍅해집니다. 우상 문화는 술 취하고 방탕한 문화예요. 우상 문화의 배경은 두 개예요. 하나는 강퍅하고 하나는 더러워져요. 마음이 더러워져요. 윤리 도덕이 다 땅에 떨어지고 음란하고 더러워져요. 오늘 이 더러움에서 돌아서는 길도 성령 충만이에요. 강팍한 마음에서 돌아서는 길도 성령 충만이에요. 성령 충만하면 누가 무슨 말해도 참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감사하게 되고 겸손하게 됩니다. 기쁨이 찾아옵니다. 삶의 즐거움과 환희가 찾아옵니다. 유명한 천지창조를 작곡한 하이든은 오스트리아 태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영혼 깊은데서 환희가 솟아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 마음에 거하시고 성령의 충만한 심령이 되어 늘 기쁨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환희가 충만하길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항상 하나님을 높이고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합니다. 위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왜?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오셨으니까. 인간에게 우상의 영, 사탄의 영이 오면 땅의 것을 찾아가지만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는 거예요. 우리의 생활은 복음을 증거합니다. 주님을 높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사도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있으면서 고린도 교회를 일으키고 또 에베소에 가서 에베소 교회를 일으키듯이 우리 성도들은 어디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를 증거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업을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의사를 하든지 교수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 증거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예수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민족이 삽니다. 남북이 다 잘 사는 길은 예수 믿는 길이에요. 가정 모두가 복음화 되어서 예수 믿는 계절이 이 나라 전체에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습니다. 어떤 죄에서도 용서함 받고 어떤 문제도 주 예수는 해결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됩니다. 남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부지런하며 근면해야 합니다. 바울 같이 열심히 일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겸손한 삶입니다. 부지런한 삶입니다. 세상사람 나를 부러워하지 않지만 나도 역시 주님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시면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면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모두가 다 나보다 잘 되는 것 같고 항상 차별에 대해 신경을 씁니다. 정치도 누가 차별하지 않나 그런데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왕이 나와 함께 하는데 그런데 신경이 쓰여지질 않아요. 차별하면 하는 겁니다. 학교에 가도 '누구를 선생님이 더 좋아하지 않나?' 신경 쓰고 학교에 대해 불평하고 선생님에 대해 불평해요. 교회에 나와도 목사님이 누구만 좋아하지 않나 이런 마음이 생겨요. 성령이 내게 충만하지 않으면 항상 불만이예요. 목사님이 누구 집에는 가고 누구 집에는 전화하고 우리 집에는 전화 안 한다고 불평을 해요.
교인 한 분이 늘 자랑을 했어요, 목사님은 퇴근하면 우리 집에 꼭 들려 간다고. 이 분이 또 과부예요. "우리 아이를 사랑하셔서 목사님이 집회하는 곳마다 데리고 가서 안수 기도 해준다. 해외 갈 때면 늘 우리 집을 거쳐간다." 교인들이 그대로 믿었어요. '왜 목사님은 그 집 아들만 사랑하고 그 집에만 가시나?'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요. 성령의 충만한 삶은 석류가 꽉 차 있듯이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차는 것입니다. 도무지 누구에 대해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없어져요. 할렐루야!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자녀들은 부모님에 대해서도 누구 집에 더 가고 누구를 더 사랑하다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런 마음은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키는 거예요. 아주 좋지 못한 마음이에요.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다 그래요. '이 우주에 나 보다 더 은혜 받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이런 마음 가지고 살아야 행복한 삶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바로 자기의 삶에 대한 만족합니다. 자기의 삶에 만족해야 되요. 내 영혼에 만족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한 가지 이야기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상추와 배추를 보면 깨닫는 게 많아요. 상추는 제 잘났다고 하며 잎이 꼭 하나씩 뻗어나가요. 절대로 상추는 뭉치는 법이 없어요. '내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그래서 색깔도 검어요. 시커멓든지 시퍼렇든지. 그런데 배추는 그렇지 않아요. 배추는 전부 서로가 모여서 잎이 전부 안으로 들어가요. '나는 부족하다'하며 서로 감싸주어요. '사랑해요, 감사해요' 전부 안으로 들어가서 똘똘 뭉쳐요. 어느 배추든지 그래요. 참 신비해요. 배추는 전부 하나가 잘 되요. 배추는 서로를 생각해요. 배추는 드러내지 않아요. 전부 다 감추어요. 겸손해요. 서로가 하나가 되어요. 나중에 보면 속이 노랗고 맛이 좋고 배추 속을 보면 신비한 궁궐 같아요. 배추는 김치를 담구어 일년 내내 먹는데 상치로 김치 담는 분 봤어요?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배추 같이 살아야 되요. 서로 감사하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겸손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생각해야 돼요. 서로 하나가 되고 서로 안아주고 서로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이제는 나 혼자 잘났다하며 상추처럼 빠지지 말고 전부 안으로 들어와서 감싸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
행 18:1-4, 롬16:3-5 / 김명혁 목사
지난 한 달 동안 여러분들과 함께 신학자들의 귀한 설교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부터 제가 설교를 합니다.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모릅니다.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큰 축복이고 말씀을 듣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란 주제로 설교를 하겠습니다. 별들 중에는 큰 별도 있고 작은 별도 있습니다.
1 한경직 목사님과 작은 별들
한경직 목사님은 큰 별이었습니다. 한 평생 설교와 삶과 봉사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한 큰 별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서 한국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평생 민족 복음화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큰 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의 강을 이미 건너간 피안의 삶을 사셨습니다. 통장과 집과 재산을 소유하지 않은 삼 무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만을 증거하시며 예수님처럼 사신 큰 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이 있었습니다. 소년 한경직이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 마을에서 자라며 그 동네에 있던 진광소학교에 다녔는데 홍기두란 선생님이 소년 한경직에게 다른 과목들과 함께 성경을 가르쳤고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 있던 반작교회에 다녔는데 반작교회의 우용진이라는 전도사님이 소년 한경직에게 성경과 기도와 찬송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홍기두 선생님과 우용진 전도사님이 소년 한경직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소년 한경직을 오산학교에 보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볼 때 마다 언제나 홍기두 선생님과 우용진 전도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홍기두 선생님과 우용진 전도사님은 소년 한경직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언제나 빠트리지 않고 말하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신의주 제2교회의 김기범 장로님입니다. 김기범 장로님은 한경직 목사님을 신의주 제2교회에 청빙한 장로님입니다. 김기범 장로님은 12년 동안 언제나 한경직 목사님을 후원하고 격려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경직 목사님의 의견에 따르지 않으려고 했을 때에도 김기범 장로님은 언제나 한경직 목사님 편에 서곤 했습니다. 사실 한경직 목사님이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를 신의주 제2교회의 부교역자로 청빙하려고 했을 때에도 김기범 장로님이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후에 어떤 사람이 한경직 목사님에게 어떻게 영락교회를 그렇게 훌륭하게 목회할 수 있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 때 한경직 목사님이 이렇게 소박하게 대답했습니다. "그저 전에 김기범 장로님이 하시던 말씀대로 목회를 했디요." 김기범 장로님은 큰 별을 만든 작은 별이었습니다.
2 사도 바울과 작은 별들
사도 바울은 큰 별들 중의 큰 별이었습니다. 한 평생 설교와 삶과 봉사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한 큰 별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예수님을 밝히 증거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소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큰 별들 중의 큰 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별 바울을 만든 작은 별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큰 별 바울을 만든 작은 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살던 이름 없는 하나의 신자였습니다. 물론 기도를 쉬지 않던 신자였습니다. 어느날 기도하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만나 그에게 안수 기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이곳에 왔는데 어떻게 내가 그에게 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명령은 단호했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다." 아니니아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사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고 사울은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주님께로 인도한 작은 별이었습니다. 홍기두 선생님과 우용진 전도사님이 소년 한경직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작은 별들이었던 것처럼 아나이나는 사울을 처음 주님에게로 인도한 작은 별이었습니다. 큰 별 바울을 만든 작은 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루디아도 디모데도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언제나 말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후원하고 격려했던 한 사람에 대해서 언제나 말을 했습니다. 마치 한경직 목사님이 김기범 장로님에 대해서 항상 말했듯이 사도 바울이 항상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의 동역자가 한 사람 있었다. 언제나 나를 후원하고 격려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부부였다. 내가 고린도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을 때,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이 너무 인색해서 아무도 나를 돕지 않고 있을 때, 그들은 나의 의식주를 책임지고 도왔다. 아니 그들은 나를 위해서는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 놓으려고 했었다. 내가 고린도에서 그리고 에베소에서 전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의 도움 때문이었다. 그들은 에베소와 로마에서 자기들의 집까지 내 놓아 교회를 만들었지. 아 나는 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이제 그들에 관한 성경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 만드는 것이더라"(행18:1-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라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희 교회에게 문안하라"(롬16:3-5).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부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16: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딤후4:19). 디모데후서 4:19의 문안은 의미심장한 문안입니다. 바울의 마지막 편지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서 한 문안입니다. 바울의 가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바울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던 사람들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였습니다.
3 바울의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롬16:3). 동역자란 후원자요 위로자요 협력자란 말입니다. 방해자도 있고 방관자도 있는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후원자요 위로자요 협력자요 동역자였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명칭인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동역자였고(고전3:9)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바울을 동역했는지를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도왔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인색했기 때문에 아무도 바울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손으로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와 선교비를 보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본래 장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과 함께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바울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책임지고 도왔습니다. 바울은 이제 생활비와 선교비를 걱정하지 않고 복음만 열심히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직업을 선택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직업의 목적을 어디 두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종류의 직업을 선택했고 그 직업의 목적을 전도자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돕는데 두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있어서 직업은 둘째였고 첫째는 바울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그들도 함께 떠났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행16:18). 마치 김치선 집사가 1945년 10월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38선을 넘었고 다시 1950년 6월 28일 김치선 집사와 이창로 장로가 한경직 목사님을 모시고 마포 한강을 넘었듯이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을 모시고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둘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전도를 도왔습니다. 제자훈련과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동역자가 되려면 담임 목사와 항상 함께 있으면서 교제를 나누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과 항상 함께 있으면서 제자훈련과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 다니면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했고 다음에는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나중에는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가이사랴로 갈 때는 바울이 아굴라 부부를 에베소에 남겨 두며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저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신학자 아볼로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을 들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셋째 아굴라 부부는 재물과 집을 내 놓고 목을 내 놓으면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목을 내 놓았다는 것은 몸을 내 놓았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집과 몸을 내 놓으면서 바울을 도왔습니다. 마지 부산 부전교회의 백남조 장로와 대구 서현교회의 정규만 장로가 재물을 바치고 집을 팔아서 바치면서 주님과 교회를 섬겼던 것처럼, 아굴라 부부도 재물과 집과 목을 내 놓으면서 바울의 선교 사역을 도왔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아굴라 부부는 자기 집을 교회처소를 제공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고전16:19). 로마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자기 집을 교회처소로 제공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또 저희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롬16:3,5).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삶을 돌이켜볼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직업적으로 도왔고 전도적으로 도왔고 재물적으로 육체적으로 도왔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김기범 장로님을 항상 기억했듯이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항상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큰 별을 만든 작은 별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작은 별들의 역할을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책에 아름답게, 누구누구의 동역자라고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롬16:3-5을 읽고 말씀을 마칩니다.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희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
행 18:1-4 / 조재진 목사
요즘 한국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교회는 많고 교인들도 많은데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훨씬 적었던 구한말에는 한국교회가 사실상 한국 민족을 이끌어 갔고 사회 변혁을 주도하였습니다. 3.1 만세운동에 대한 여러 평가들이 있지만 제 생각으로는 3.1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것이 그리스도인들이요,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고 성도들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40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대표 33인 중에 반정도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났지만 우리 주변의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저는 오늘 그 원인 중에 하나로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의 부족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헌신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보십시오 초대교회가 한 시대를 바꾸는 능력을 가진 것은 모이는 숫자나 교회의 크기, 혹은 성도들의 지식 수준이나 부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절대적인 헌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요즘 사도행전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 되어 가는 발자취를 더듬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이 때 쓰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 지역, 또는 한 도시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에 우리 가운데 초대교회와 같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복음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헌신된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위기는 바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헌신의 마음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사도행전 17장을 통해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도시에 가득한 우상보고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서 또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당시 철학자들과 논쟁도 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저 유명한 설교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덴에서는 제자도 세워지지 않았고 교회도 세우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가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로 와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는 고린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많은 제자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의 전도와 고린도에서의 전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왜 아덴에서는 많은 전도의 열매들이 일어나지 못했고 왜 고린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제자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혹시 아덴보다 고린도 지역이 복음 전하기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덴에서는 핍박이 없었지만 고린도 지역에서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또 아덴이 철학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도시입니다. 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그들의 생활은 매우 부유했지만 도덕적으로는 심히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비너스)라는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에는 1천명의 매음을 하는 성창(창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탕한 사람을 가리켜 "고린도인 같은 사람"이라 할만큼 고린도는 성적으로 음란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것은 바로 복음을 위해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복음에 헌신한 사람들이 소개되어 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과 같은 직업을 가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그리고 자기 집을 교회에 내놓은 디도 유스도, 또 회당장 그리스도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뢰아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에서 합류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과 함께 헌신된 사람들이 일어날 때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중요하지만 복음에 헌신하여 바울을 도운 일군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 이 민족가운데 가장 필요한 사람이 헌신된 일군들입니다. 일은 하지 않고 자기 이름만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민족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그런 말을 했지요. "지금 우리 나라엔 가마를 탄 사람이 필요하지 않고 가마꾼들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고린도에서 일어났던 복음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이런 헌신된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헌신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런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특별히 부부가 함께 헌신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의 헌신은 바울이 유럽과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놀라운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 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굴라는 본도라는 지역출신입니다. 본도란 흑해 부근의 지역입니다. 그에 비해 브리스길라는 로마의 명문가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로마귀족의 이름입니다. 또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는 유대인 말살정책을 폈던 로마의 황제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황제가 되고 난 이후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이 시기에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이름이 여섯 번이 나오는데 이들의 이름은 항상 함께 등장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따로 불리워지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한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우리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부부의 이상형이었다" 흥미있는 것은 이 부부에 대한 언급이 여섯 번 기록에서 네 번은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데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아마 브리스길라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두드러질 정도로 활동적이었고 헌신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굴라는 아내 브리스길라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헌신했습니다. 사실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은 유대인 남자에게 내려졌지만 로마의 귀족 출신인 브리스길라는 남편에게 헌신하고 남편을 따라 낯선 도시 고린도로 옵니다. 반면 남편 아굴라는 넒은 마음을 가지고 아내 브리스길라가 마음껏 활동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축복은 바로 고린도에 와서 사도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의 직업에 텐트 만드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사도 바울도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지 고민하다가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 부부를 만나게 되었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지만 아마 이 때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났던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낯선 도시 고린도에 왔을 때 아마 그들의 심정을 그렇게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그들에겐 고린도에서의 삶이 위기로 다가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의 만남은 이들의 삶을 가장 가치있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린도로 오기를 잘한 것이지요. 쫓겨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부부의 생애에 최고의 만남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는 너무 놀랍습니다.
말씀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과 만남은 이들 부부의 삶의 방향, 목적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정도 고린도에서 사역을 했을 때, 그 때 가장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갈수록 복음에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5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보십시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 고전2:1-5에 보면 당시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갈 때에 어떤 심정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아마 바울은 아덴에서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고린도로 오면서 오직 예수만을 말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면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보십시오 이 성경에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를 전도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들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된 첫 번째 사람들이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바울에게서 말씀으로 양육 받으면서 그들의 가슴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찼습니다. 모든 것을 복음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저는 이 부분이 참 좋습니다. 복음에 불타 올랐던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이들 부부에게 옮겨가고,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헌신된 마음이 이들 부부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기도하게 되고, 헌신된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함께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 부부가 얼마나 복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사도행전18:24이하에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볼로라는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당시 학문과 성경에 능한 자였습니다. 언변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기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이었고 성경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히 예수에 대해 설교는 했지만 여전히 요한의 세례, 즉 윤리적인 설교에 그치고 맙니다. 이들 부부는 아볼로의 설교에 가장 중요한 복음이 빠졌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냥 듣기 좋은 소리에 "아멘"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메시지,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되지 못하는 부분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아볼로의 설교에서 복음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들 부부가 성경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부분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아볼로를 초대하고 함께 교제를 하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도", 즉 정확한 복음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줍니다. 결국 이들 부분의 영향으로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의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평신도로서 설교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먼저 헌신해야 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고 훈련 받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양육받는 일, 예배에의 헌신, 기도에의 헌신, 제자훈련 등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헌신을 통해 좋은 믿음의 일군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말씀으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수여한 일이 없었습니다. 말씀으로 훈련받고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영향력을 잃어 가는 것은 말씀에 헌신한 사람들이 줄어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 와서 드리는 예배 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알기 위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해 1년이고 2년이고 시간을 바쳐 말씀을 배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적이 있습니까?
교회와 영적 지도자에 대해 헌신하십시오
브리스길라 부부의 또 다른 헌신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 특히 바울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세워졌고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교회에 헌신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것이었고 영적 지도자들에게 헌신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말씀에 헌신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그리고 주님의 사역자들을 철저히 섬겨야 한다는 의식이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울을 도와 로마가 복음화 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이 어느 정도 헌신했는지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18:18 이하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가게 되는데, 이 때 브리스길라 부부가 함께 동행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닙니다. 아예 이사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했을 때 이들 부부는 자청하고 나선 것이지요. 그래서 고린도에서의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의 사업도 정리할 수 있는 이런 용기와 결단을 가졌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이사하는 교우들 중에 "제가 이사하는 것은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섭니다" 아니면 "제가 이사하는 것은 교회에 좀 더 헌신하기 위해섭니다." 라고 신앙생활을 위해 이사한다는 분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또 직장을 선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면서 직장을 선택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직장은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직장이 주님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자기들의 삶의 현장까지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전16:19에 보면 바울이 로마에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아시아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라고 기록합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브리스길라 부부도 로마에 있었습니다. 이 때도 그들의 집에 교회가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들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나자 다시 바울과 함께 로마로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롬16:3에 보면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4절에 계속 말하기를 "저희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이들 부부는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아마 이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이여 당신을 위해 우리가 목슴까지도 내어놓겠습니다. 이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교회 안에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이 주의 종들에 대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감사한 일지요. 제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포기한 청년도 있었고, 오직 교회에 헌신하기 위해 직장을 옮긴 청년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교회 예배에 참석한 어떤 젊은 부부는 목사님과 함께 평생 선교하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돈버는 이유가 바로 선교하는 것이라고, "돈 벌어 선교비는 왕창 왕창 댈 테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당당하게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삶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울 뒤에 있었던 이런 평신도들의 절대적인 헌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신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에 헌신하려할 때 많은 장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장애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헌신의 장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 중심적인 자세입니다. 어떤 한 곳에 헌신하려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주님께 헌신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것은 자기계획, 자기 방법, 자기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버릴 정도로 그리스도가 귀하고 자기 계획을 버릴 정도로 교회와 주의 종이 귀하게 보일 때 헌신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에 어떤 농부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느 날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은 것입니다. 흔치 않는 일이지요.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중의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아내가 묻습니다."두 마리 중 어느 것을 드리지요?" 잠시 생각하던 남편은 "나중에 크면 결정하십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사색이 되어 부엌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여보 무슨 일이 있었어요?"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남편은 "방금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단 말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가 "아니 어느 것이 하나님의 송아지인지 정해놓지 않았잖아요!" 라고 반문하자 남편은 "아니요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흰 놈이 하나님의 송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런데 바로 그 놈이 죽었단 말이요!"
이게 사람들의 마음이지요. 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속에는 욕심과 탐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할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이익에 빠릅니다. 손익에 대한 계산 때문에 헌신하기를 주저합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는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헌신에 장애 되는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한 염려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헌신에 주저하는 이유는 염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동안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언젠가 "신앙과 돈"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설교가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때 나온 단어가 "청부" 즉 깨끗한 부자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분은 설교에서 아주 강한 감동을 받은 것이 바로 십일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100만원 십일조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보다 정확하게 십일조 하는 사람 100명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많은 십일조 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정확하게 믿음으로 십일조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대강 십일조 합니다. 월정헌금처럼 십일조 합니다. 작년에도 십일조가 10만원이었고 올해도 10만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5년 전에도 이분의 십일조는 10만원이었습니다. 저는 이해가 안됩니다. 물질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것이지요. 정확하게 십일조 드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헌신에 장애 되는 세 번째 부분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습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부부사이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식어가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이 불타오를 때는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헌신자가 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랑의 회복이 사명의 회복이며 헌신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시험에 빠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헌신된 사람은 사단이 흔들 수 없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좋은 목사도 필요하고 직분자도 필요하고 은사 있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필요한 사람은 헌신된 사람입니다. 예배에 헌신한 사람, 기도에 헌신한 사람, 그리고 교회와 교회 지도자에게 헌신된 사람을 통해 교회의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 헌신된 자로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행 18장 9~11절 / 이대성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요즈음 우리가 예배를 마칠때마다 늘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찬양이지요.
그 찬양의 가사를 제가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도 주의 부르심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실수가 없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네.
작은 나를 부르신 뜻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주의 길을 가리라. 때론 내가 연약해져도 주님 날 도우시니 주의 놀라운 그 계획을 나는 믿으며 살리.”
(찬양) “날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 신실하신 주를 찬양해.”
그렇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 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겠습니다.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나는 결코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만사를 주님께 다 내어 맡기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나아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도 주의 부르심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실수가 없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네.” 여러분! 이 찬양은 지금 이 순간 저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현실은 어둠과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습니다. 달려가야 하는 길은 굽이치고 또 굽이치며, 내가 세운 계획은 빗나가는 것 같고, 붙들고 있던 희망마저 다 스러져가는 지경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분의 약속의 성취는 전혀 예측이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점점 더 어둠이 깊어져 가는 것만 같습니다.
어쩌면 감옥에서 나오기 전까지의 요셉의 모습처럼, 실타래가 풀릴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고 오히려 더욱 꼬여만 갑니다.
이제는 조금 나아지겠지...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서 나아가지만 시간은 하염없이 속절없이 흘러만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 자체도 어느 순간 다 끝장 날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결코 이럴 수는 없는데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해도 철저히 외면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에 묵묵부답! 침묵하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 분의 사랑을 전혀 의심하지 않기에 지금 이 지경 속에서도 이 상황조차도 나는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 그 분을 굳게 믿고 신뢰하면서 묵묵히 계속 이 길을 달려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들 신앙의 대 전제는 이런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우리들 각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그 분은 당신의 자녀요 백성을 결단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며, 나름의 계획과 섭리를 가지시고 친히 그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 그 분은 절대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심에 실수가 없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그 분의 시간 계획표에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 소망과 내 바람대로 진행되어 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실수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면 사실 우리의 신앙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그 분의 사랑과 능력과 인격을 전혀 의심하지 않기에 우리는 지금 불확실성과 어두움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단코 희망을 잃지 않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에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함께 하시고, 또한 우리에게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하나님의 약속은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실하실 뿐만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변함없이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갑니까?’라면서 모세가 주저주저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 세계 선교에 대해서 제자들이 확신이 없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마태복음 28장 20절 하반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로씨(Lo)라는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힘이 들어서 어찌할 바 몰라 방황하다가 그는 영어 성경을 보게 되었지요.
바로 그 때 마태복음 28장 20절을 읽게 되었는데요?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의 이름이 성경책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Lo, I am with you always!”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Lo란 말은 ‘보라!’ 영어로는 ‘Look! See!’ 뭐 이런 뜻입니다. 로씨는 이 말씀에 크나 큰 힘과 위로를 받고는 다시금 힘차게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Lo, I am with you always!”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 각자의 이름을 한 번 넣어보시기 바랍니다. “OO, I am with you always!” “OO야, 내가 너와 늘 항상 함께 한단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나와 늘 항상 함께해 주시겠다는데 도대체 뭐가 걱정입니까?
오늘 본문 10절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대적자들로 인해 크나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밤에 주님이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힘을 주고 계십니다.
또한 여러분? 비록 사방에 대적하는 자들이 진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겐 ‘함께 살며 일하는’(3절) 동역자들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의 동역자들 중에 가장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증거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중에 몇을 보내어 함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에 디모데와 실라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도 와 있었습니다. 아굴라(“독수리”란 뜻)는 본래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유인이 되어 로마의 시민권을 갖게 된 겁니다.
브리스길라(브리스가라고도 부르는 데 뜻은 ”작은 노부인”이다)는 돈과 연줄이 많았고, 가죽 수공업을 했는데 로마와 고린도, 에베소에 지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들이 고린도에 온 것은 주후 52년에 내린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 때문입니다. 이에 부득불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오게 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남편 보다 이름이 먼저 쓰인 것은(성경에 6번 나오는데 4번 먼저 나옴. 행18:18, 롬16:3, 딤후4:19) 브리스길라가 초대 교회에 있어서 유력한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두 가지 면에서 큰 봉사를 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서 바울의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둘째는 집의 문을 열어서 가정 교회가 시작되도록 봉사했습니다.
브리스길라의 집은 당시 성도들 교제의 중심지였고, 아볼로나 바울 같은 주의 종들이 그 집을 중심으로 선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앞서 행하시면서 모든 일들을 진행해 가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호와 이레요,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그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당시 인간적으로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타의에 의해 로마를 떠나는 것은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만남을 주시고 그의 동역자로서의(롬 16:3)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당시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부자든 가난하든 자녀들에게 수공업 기술을 반드시 하나씩 가르쳤습니다. 이른 바 일인일기주의였습니다. 바울도 그로 인해 천막 수리업의 기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 바울이 천막 기술을 통해서 아굴라 내외와 함께 선교를 활발하게 하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하심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도무지 견디기 힘든 고난이 있으십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크고도 놀라운 섭리하심이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감사함으로 그 고난에 순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시고, 준비하고 계심을 믿고서 환난 중에 소망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환난 중에도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서 매순간 순간마다 범사에 감사하면서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이라는 두려움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든 인간은 ‘나 혼자다! 나 밖에 없다!’고 느껴질 때 급격하게 두려움이 몰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담대한 사도였음에도 인간의 가장 고통스러운 외로움이라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외로움이라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도대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분명 고독이라는 공격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을 제가 읽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여러분, 이 말씀을 역으로 풀어 보자면 사도 바울은 지금 두려워서 아예 말을 하지 못할 정도라는 겁니다.
본문에 기록된 ‘두려워하다’의 뜻으로 번역된 ‘fobew’(포베오)라는 단어의 원뜻은 ‘경악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냥 웬만큼 놀라는 그런 상태가 아니라, 지금 깜짝 놀라서 자빠질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도대체 왜 이런 경악할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까지의 선교 여정이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눈물겨운 여정이었습니다.
마케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히는 시련으로부터 시작해서 데살로니가에서의 박해, 베레아에서의 쫓겨남, 아덴에서의 참담한 전도 결과를 경험하고 나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사도 바울은 음란으로 가득 찬 도시 고린도에 도착하게 된 겁니다.
그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는 선교 동역자들은 아직 마게도냐에서 내려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고린도에도 여타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는 안티(anti)들만이 가득 존재했습니다.
18장 6절을 보니까 그들은 아주 강하게 대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사도 바울이 옷을 털 정도로 진저리나게 그를 괴롭혔던 대적자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 후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의 동역자로 돕게 되었고, 실라와 디모데도 바울에게 합류해서 힘이 되었지만, 고린도 항구 도시에 맨 처음 바울이 들어왔을 때에는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감히 입을 열 수도 없을 정도의 고독함과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사도 바울은 도무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입도 뻥긋할 수 없는 극도의 탈진 상태와 무기력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 한테는 아무도 없어!’ 이는 우리 인간이 느끼는 최고의 절망감이며, 고통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제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중 극도의 우울증과 무기력에 빠져서 한 동안 깊은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대표적인 사람을 언급할 때마다 단골 메뉴로 소개하는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850:1 대결에서 엄청난 승리를 경험했지만, 사악한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살해 명령에 그만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저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호렙산 기슭 브엘세바 골짜기로 피신을 합니다.
그곳에서 극도의 영적 탈진 상태를 맛보고 있었던 엘리야가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열왕기상 19장 10절 말씀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이렇게 탄식하던 엘리야에게 내린 하나님의 처방전은 무엇이었습니까? 열왕기상 19장 15절에서 18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 무슨 말입니까? 첫째, 아직 사명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아람의 왕으로 하사엘을 기름 부으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라. 그리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
둘째, 이를 위해 남은 자를 예비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이번에 열왕기상 19장을 묵상하면서 새롭게 느낀 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항목은 사명의 재확인이니까 당연히 커다란 감동이었겠지만, 두 번째 항목은 엘리야에게 그다지 큰 감동은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제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엘리야는 이미 믿었던 사람들에게 된통 당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죽기를 각오하고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850대 1로 싸울 때였습니다.
그때 갈멜산에 함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은 회색분자들이었습니다. ‘여호와를 택할 것인가? 바알과 아세라를 택할 것인가?’ 기웃거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엘리야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열왕기상 18장 21절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갈멜산에 있었던 사람들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영적인 전쟁과 긴박한 상황 속에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거나 입 맞추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엘리야를 도와 하나님이 참신이심을 전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려 했던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굴속에서 자기들만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했던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칠천명이 남아 있다 한들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께 나 혼자라는 사실에 대해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의 심정도 참으로 힘들고 어려웠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는 고린도의 우상과 음란함 그리고 유대인의 아성이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절벽에 서 있는 그런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두려운 나머지 침묵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만 기록하고 성경이 마감되었다면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주리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는 또 한 가지를 더 약속하십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께 이제까지의 영적인 두려움과 침체를 뒤로하고 두 손 들고 항복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1절입니다.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한 지역에서 일 년 육 개월씩이나 거주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케이스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서 3년을 거주했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장기간 거주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가 왜 일 년 육 개월이나 고린도에 머물면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을까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신 주님 말씀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가 정말로 힘들고 외로운 곳이었지만, 사도 바울은 주님 말씀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라는 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그 곳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면서 유럽 선교의 교두보를 더욱 힘차게 세워나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수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확신을 분명히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가 결코 잘못되지 않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복음이 세계 열방에 온전히 전파되는데 있어 결코 실수하지 않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 교회가 예수님의 참사랑과 섬김의 모습이 드러나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임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으로 안타깝게도 교회가 지금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어찌 하오리이까? 교회가 진정 주님의 교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하옵소서! 성도가 진정 주님의 성도가 되어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셨던 말씀이 오늘 본문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여러분, 저 이대성 목사는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주님께서 부족한 종 저 이대성 목사와 함께 할 동역자를 붙여 주시겠노라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도 이제 후로는 결단코 ‘나 혼자’라고 하는 약한 마음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안의 눈이 밝히 떠지지 않아서 단지 그걸 보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는 참이요 진리일진대 우리가 그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간구하다 보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영안의 눈을 밝히 떠서 주님의 비전을 똑똑히 목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영음의 소리를 확실히 분간해서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이 험한 세상을 담대히 헤쳐나감으로 마침내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열왕기하 6장 17절에 보면 엘리사의 유명한 기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람 왕이 엘리사 때문에 유다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도단을 에워싼 겁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가 새벽에 일어나서 이를 보고는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 때에 엘리사가 말합니다. 열왕기하 6장 16절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 순간 17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불 말과 불 병거로 당신의 자녀들인 저와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저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불 말과 불 병거가 여러분 눈에도 똑똑히 보이십니까?
지금 우리에게는 안팎으로 수많은 역경이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신 주님이 늘 함께하심으로 사탄 마귀의 세력을 넉넉히 물리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9절과 10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시작)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사람은 혹시 실수할지 몰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실수가 없으신 바로 그 주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험한 세파가 휘몰아치는 이 때에 사도 바울처럼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우리와 늘 항상 함께 하심을 믿고서 전혀 두려워하거나 침묵하지 말고 주님을 만나는 그 자리에 온전히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고린도에서
행 18:1-8 / 이동원목사
흔히 외국의 선교 전략가들이 한국인들의 선교 방식을 말할 때 ‘열정의 선교’라고 말합니다. 정말이지 우리 한국인들은 한번 불만 붙기만 하면 아무도 못 말리는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선교하는 민족입니다. 그것이 우리 한국 교회가 복음을 수용한지 불과 120여년 만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전 세계에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국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슴으로 선교하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선교를 비평적으로 언급하는 이들 중에는 한국 교회가 [전략이 없는 선교]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 선교에는 가슴은 있는데 머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 전문가들이 전략 없이 무조건 가서 부딪치는 선교 방식을 말할 때 영어로 ‘korean way of doing mission’ 즉 ‘한국식 선교’라는 말을 합니다. 저는 이 말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받아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서구 교회들이 수많은 회의를 반복하며 과연 그 선교지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하며 어떤 결론도 도출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국 선교사는 벌써 선교지에 가서 말뚝 박아놓고 교회를 시작해 놓고 보는 그 저돌적인 모험성, 그 개척성이 오늘의 한국 선교의 성과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선교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보다 효율적인 선교 열매를 위해서 진지하게 선교 전략을 고심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서구 선교는 한국인들에게 열정을 배워야만 한다면 거꾸로 우리 한국인들은 서구 지도자들에게서 전략을 배워야만 할 때가 된 것입니다. (목회자 사랑의 순례에서의 유머어느 초년 목사님의 축도) 요새 우리에게 필요한 것, 바로 전략입니다. 우리의 선교의 최고의 귀감은 바울 사도입니다. 그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전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로 하여금 1세기 범세계적인 초대 교회의 기초를 놓게 한 비밀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선교 전략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고린도 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 사도의 제2차 전도 여행의 사실상 마지막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린도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지도) 물론 바울은 고린도에서 떠난 후 잠시 에베소를 들리지만 에베소는 경유만하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올 것을 언약하고 그는 선교 여행의 출발지였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행18:21-22) 그러나 그는 제2차 전도 여행중 가장 오랜 시간을 고린도에 머물며 괄목할만한 선교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고린도라는 도시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 고린도를 변화시킨 바울의 선교 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1. [도시 선교] 전략입니다.
도시 선교(Urban mission)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인구가 집중하는 도시에 우리의 선교 역량이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농촌에도 섬 지방에도 부지런히 선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구가 집중하는 대 도시의 복음화 없이는 세계 복음화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중요한 선교 자원과 선교 역량은 도시에 집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뚜렷한 한 변천 현상을 가르쳐 ‘도시화’(urbanization)라고 말합니다. 1850년에는 전 세계에 100만 이상의 인구가 사는 도시가 겨우 4개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에는 225개, 2000년대에 들어서며 500개가 되었습니다. 소위 1,000만 이상의 인구가 사는 거대 도시(megacity)는 1950년까지는 런던과 뉴욕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25개 도시(수도권 포함)가 되었습니다. 세계 인구 사전에 의하면 1위가 동경(3천3백 8십만), 2위가 서울(2천3백 9십만), 3위가 멕시코(2천2백9십만)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구 학자들은 서기 2030년이 되면 세계 인구가 81억이 될 것인데 그 중 60인 50억이 수도권에 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이것을 메가시티 트렌드(megacity trend)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학자들도 이런 메기시티 트렌드에 따르는 세계 복음화 전략을 가장 중요한 미래 선교전략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래 전에 이 중요성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 소위 그레코 로만 세계의 3대 도시는 로마, 고린도, 에베소였습니다. 당시 로마 인구가 약 100만, 고린도 시는 절정에 인구 75만을 거느리고 있었고 에베소가 50만이었습니다. 바울은 아직 로마에 갈 상황이 못 되었고 그렇다면 바울이 어디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요? 그렇습니다. 에베소와 고린도였습니다. 에베소에서 2년 이상 그리고 그는 고린도에서 약 1년 반(행1811)을 머물며 선교한 것입니다. 얼마나 전략적입니까? 그는 도시의 복음화 없이는 세상의 변화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누군가가 악마는 도시에 살고 천사는 농촌에 산다고 했지만 그러기에 더욱 도시의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의 고린도는 가장 번영하는 무역도시였고 문화의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서는 매 2년마다 지금의 올림픽과 비슷한 체육 축전(Ithmian games)이 벌어지고 있었고 해발 600m의 아크로코린토 바위 언덕 정상에는 유명한 아프로디테(비너스)신전이 있어 거기 고용된 1,000명의 여인들이 공개 매춘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인처럼 행동한다’는 말은 매춘한다는 의미로 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도시는 복음이 필요한 도시가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도시에 자신의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올인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 도시 선교 비전 그리고 도시 선교 전략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2. [자비량 선교] 전략입니다.
바울은 이 도시 고린도에서 자기 평생에 힘이 될 동역자 부부를 만납니다. 그가 바로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본문 2-3절을 읽겠습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 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라” 바울 당시의 유대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만약의 경우 생존 전략으로 한가지 씩 기술을 꼭 가르쳤다고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 학자 가말리엘에게 배우며 학자의 훈련을 받았지만 동시에 그에게는 ‘천막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피해 고린도로 온 ‘천막 업자’(tentmaker) 아굴라 부부와의 만남과 동역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아굴라 부부는 주상 복합체 스타일의 건물에 살면서 아래층에 공장을 설치하고 위층에 거주하며 살고 있었는데 바울이 취직하러 가서 아굴라 부부를 만났을지 모른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바울은 취직하러 간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낮에 일하여 돈을 벌면서 저녁과 밤으로 아굴라 부부와 함께 전도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남들에게 전도비를 받지 않고 전도하는 것을 ‘자비량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자비량 선교라는 말은 지금은 고인이 된 아프칸 선교사요 골든 콘웰 신학교 선교학 교수였던 크리스티 윌손(Christy Wilson) 박사가 그의 책 ‘현대의 자비량 선교사들(Todays Tentmakers)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여 보편화된 말이었습니다. 그는 20세기 이후에는 자비량 선교가 아니면 세계 선교의 과업을 수행할 수 없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 날 이미 전 세계의 상당한 나라들은 선교사나 목사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교 목적의 비자를 발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라의 대부분은 여전히 전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방문하여 그 직업으로 기여하는 것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한 교회가 아무리 선교에 헌신한다 해도 여전히 우리의 선교 재정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시대에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지상명령의 과제를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이 바로 자비량 선교 혹은 전문인 선교인 것입니다. 자기 직업을 갖고 일하면서 여전히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를 가르쳐 평신도 선교라고 부르고 이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평신도 선교사라고 부릅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 선언문은 우리 모두가 목장교회를 통해 평신도 선교사가 되어 세상으로 나아가 우리의 가정과 일터에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울 사도에게 배운 자비량 선교의 전략인 것입니다.
3. [셀 목회] 전략입니다.
바울 사도는 처음 고린도에서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한 선교를 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본문 4절에 보면 “안식일 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고 했습니다. 베뢰아에 두고 온 동역자들인 실리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도착하자 바울은 더욱 힘을 얻어 열심히 전도합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실리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바울은 단순한 복음 예수는 구주, 곧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했고 이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회당 중심의 선교는 이내 장벽에 부딪힌 것으로 보입니다. 6절 말씀은 바울이 대적과 비방을 당했다고 증거합니다. 여기에서 바울의 새로운 선교 전략이 탄생합니다. 그것이 바로 셀 교회(목장 교회)전략이었던 것입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침례를 받더라” 학자들은 디도 유스도가 아마도 이방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학자들은 바울이 회당에서 핍박을 받으면서 모임 장소를 회당에서 유스도의 집으로 옮긴 것이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유스도와 힘께 회심한 것으로 보이는 회당장 그리스보는 또한 이 고린도 도시에서 영향력을 갖는 걸출한 지도자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회심과 헌신은 결정적으로 바울의 고린도 선교의 기폭제가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유스도의 집에서 모인 셀 모임이었지만 그 모임의 영향력은 적지 않아 본문 8절의 증언처럼 수많은 고린도인들이 이 모임을 통해 주께로 돌아왔고, 18:10에 보면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흔히 셀 목회의 가치를 말할 때 셀 목회의 생명은 전도에 있다고 말합니다. 전도가 없고 아웃리치가 없는 것은 셀 모임의 존재 의의를 상실한 것입니다. 고린도 유대인 회당 옆에서 모인 작은 셀 모임 그러나 이 모임이 바로 고린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 나라 복음 전파의 핵심 마당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여름이 돌아왔습니다. 금년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우리의 셀(목장들)을 중심으로 선교지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명령에 순종하고자 합니다. 오늘의 선교 바자회를 통해 우리는 자비량 선교의 정신을 또한 습득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팀워크를 이루어 선교의 발걸음을 옮기는 뜨거운 이 여름 저는 우리 교우들이 밟는 땅마다 세속의 도시 고린도가 성령의 도시로 변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최근 단기 선교를 ‘땅 밟기’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어왔고 이 단어의 어감이 왠지 제국주의적 선교 냄새가 난다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땅 밟기는 정복의 의미보다 축복의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밟고 온 그 땅에 [무엇을 하고 왔느냐] 보다 [무엇을 남기고 왔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방문한 그 곳에 세상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사랑을 남기고 온다면, 복음을 남기고 온다면 바로 그 사랑이 그 복음이 그 땅에 축복이 되는 그 날 우리는 단기 선교의 기회를 주신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복음 전파의 동역 자들
행 18장 1~11절 / 이성우목사(왜관감리교회)
성경이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권한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 나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쉼 없이 일하고 계심을 성경이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가장 분명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 타락함으로 영원한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날마다 성취해 가시는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의지와 계획을 말씀하고 있다면, 신약 성경의 4복음서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으며, 신약 성경 가운데서도 특별히 사도행전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루어져 갔음과 함께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져 갈 것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침투한 이후로 이 세상에는 갈등과 대립, 분열과 다툼의 역사가 시작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이 세상에는 평화 대신 전쟁이, 그리고 생명과 행복 대신 죽음과 불행이 엄습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서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 땅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또 다른 관계의 단절과 파괴, 그리고 갈등과 불화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육체의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리기 때문에 슬픈 것인데,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관계가 단절되거나 갈등과 긴장으로 인해서 일그러지게 되면 그 관계는 더 이상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되고 그 때부터 평화를 누리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게 됩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평화가 없는 세상은 그 자체로서 죽음과 같은 것이며 거기에는 기쁨 대신 깊은 슬픔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린 인간의 삶이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짙은 어두움과 깊은 슬픔 가운데서 몸부림치면서 광명한 새 아침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호소하며 탄식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절대적으로, 시급하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시작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것,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을 결코 눈감아 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간절히 요청하고 바라는 것보다 더 먼저, 더 애절하게 긍휼히 여기시며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먼저 계획하시고, 먼저 행동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행동하시되 그 구원하심의 방법을 분명히 알고 계시며 거기에 적합한 구체적인 방법을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다는 사실과 함께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완벽하신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이 무한하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면을 갖추고 계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바라고 호소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은 결코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조건들을 다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은 죄를 범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분명한 한계를 지닌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인간 세상에서만 통하는 것이지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그 앞에 다시 나아간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문제였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시지 않으시면 이 문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인간 구원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은혜의 다리를 놓아주시는 것이었는데, 그 다리가 되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 앞에서 긍휼과 사랑하심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믿는 길 밖에는 다른 방법이 결코 없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마련해 주신 구원의 다리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면, 거기에는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이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음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인간의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구원은 그저 영혼이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면들이 온전하게 치유되고 회복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삶을 영원토록 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인간이 비로소 누리게 되는 이 영원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귀중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시는 가장 분명한 이유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이 사명을 부여받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귀하게 헌신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창조 당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가장 간절하게 원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의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아 주는 일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가치를 지니는 일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8장 1-11절 말씀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행복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회복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 사람으로서 이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이제까지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껍데기 행복만 누렸지 그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며 살아감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까닭에 그가 뒤 늦게 발견하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이 행복감이야말로 그의 삶 자체를 완전히 뒤 바꿔 놓기에 충분했던 줄로 믿습니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성경의 기록들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겨 버려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그것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삶을 살았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된 이후부터 그가 순교의 자리에 나아갈 때까지 오직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주신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잃어버린 참된 행복을 회복하게 되는 사실을 전하는 일에만 자신의 생명을 다 바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찾은 예수 안에서의 행복감이 너무도 소중했기 때문에 그 행복감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며 살게 되기를 원해서 정말 안타까운 심정과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세계 곳곳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열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이 행복감을 알지 못했을 때는 예수 믿는 성도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지만 이 보화를 발견하게 된 이후부터는 아마도 그 누구보다도 뒤지지 않는 열정을 가슴에 품고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처럼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행복을 영원토록 누리며 살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복음을 전하는 곳곳마다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이 있었고 실제로도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맞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피곤함과 힘듦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에 걸친 전도 여행을 추진할 수 있었던 줄로 믿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의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 경로를 살펴보면 그야말로 거리상으로도 멀고 먼 여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도 해상 여행과 육상 여행 모두를 포함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당시는 지금처럼 여행 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그의 전도 여행은 한마디로 고생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멈추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다 바쳤던 것은 바울 자신의 인간적인 열정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바울의 마음을 거룩하게 충동질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였다는 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음을 그의 전도 여정 가운데서 얼마든지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거반 죽게 된 경우도 있었으며,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는 뜻하지 않은 고난을 겪었으며,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유대인들로부터 수없이 박해와 방해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쉼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가는 곳 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함으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에게 동역 자가 있었기 때문임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가장 확실하고 큰 힘을 끊임없이 불어 넣어 주었던 동역 자는 본문 9-10절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사도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를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보냄을 받게 하심으로 그를 전도자로 세워주셨으며, 그와 늘 함께 하시면서 그가 가야 할 전도 여정을 친히 지시하셨으며, 그와 더불어 늘 동행하시며 보호하시며 도우심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으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셨음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전도 여정 가운데 함께 하시면서 놀라운 능력으로 역사하셨는데, 사도행전 19장 1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가는 곳마다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함으로써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사람을 일꾼으로 세우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그의 사역을 책임져 주시는 든든한 동역 자가 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에 있어서 또 다른 측면에서의 동역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오늘 본문 말씀에도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뜻을 같이 하여 동행하며 힘을 보태주었던 많은 동역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소개되고 있는 바울의 동역 자들을 보면, 우선, 오늘 본문 2-3절에 소개되고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고린도에 갔을 때 처음 만난 사람들로써 바울과 같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얼마만큼 바울의 복음 전파를 도왔는가에 대해서 로마서 16장 3-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 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의 동역 자들 중에는 이들 외에도 바울과 함께 빌립보 옥중에 갇히기도 했던 실라와 바울이 믿음의 아들처럼 귀하게 여겼던 디모데가 있었으며, 고린도 교회의 중요한 일꾼이었던 디도 유스도와 에베소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었던 아볼로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 외에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라고 하는 의사 출신의 동역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전도 여행 과정에 늘 함께 하면서 바울의 주치의가 되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도 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기에 오늘 우리가 읽는 사도행전이 기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된 복음의 역사가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어떻게 온 세상에 전해져 가게 되었는가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온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를 관심 갖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류 구원에 대한 애정과 열정, 그리고 그 과정에 동원되는 하나님의 일꾼 된 복음 전파자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가를 그의 기록을 통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사실 하나는 바울의 동역 자들이었던 이들 모두는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게 되는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써 바울처럼 구원의 기쁨을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그랬듯이 참된 구원의 기쁨을 아는 자는 반드시 그 기쁨을 말하여 전하게 되어 있는 법인데,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감격이 분명하게 있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 기쁨에 못 이겨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서 복음 전파의 동역 자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의 여정에 함께 하면서 귀하게 동역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바울의 동역자들처럼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감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이상호목사 / 행 18:1-4, 24-28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육신의 형제나 자매 그리고 좋은 친척은 만나는 것 복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본다면 믿음이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가 어떤 교회를 선택하여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나 신앙의 잘못된 집단에 걸려들면 재산도 날리고 신세도 망치고 그것뿐입니까? 그는 영혼까지도, 영원한 미래까지도 망쳐버리는 치료될 수 없는 비극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좋은 벗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행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좋은 벗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복입니다. 육신적으로도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겠지만 그를 통하여 영혼까지 구원받고 천국을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의 길을 함께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 영혼이 얼마나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하는 것은 얼마나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실제로 행 18장에 저들의 이름이 세 번이나 등장하고(2절, 18절, 25절), 고전 16:19, 롬 16:3, 딤후 4:19 이렇게 6번 나오는데 그 중에 4번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경학자 바클레이는 이 두 사람을 가리켜 신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매력적인 한쌍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시절에 어찌하여 아내 이름이 먼저 등장했을까요? 이 사실은 그 여인이 신앙과 충성과 봉사에 있어서 남편보다 앞서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역사가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 부부가 사도 바울을 만난 경위가 밝혀집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장막제조업자였습니다. 이들은 로마에 살면서 삶의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훗날에 바울을 도운 것을 보면 상당한 재물을 모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인은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강제 추방령이었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권리금 한 푼도 못 받고 재고품을 헐값으로 정리하고 그야말로 공권력에 의한 파산선고를 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이 사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정든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낯설고 물 설은 곳에 정착해서 그들은 다시 장막 제조업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와서 뜻밖에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분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저들이 바울을 만난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가장 위대한 사역자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저들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습니다.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말씀으로 잘 양육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저들의 일생을 통한 최대의 복된 기회가 된 것입니다. 이런 만남이 없었더라면 이들 부부의 이름이 성경에 여섯 번이나 기록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마틴 부버가 ‘참 만남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듯이 이들의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롬 8:28절의 말씀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신앙의 간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같이 때로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며 추방당한 신세같이 어렵고 외로운 순간을 지나게 될 때라도 그 눈물의 골짜기를 지날 때 기쁨의 샘으로 솟아나게 하시는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교회와 좋은 사역자를 만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더욱이 외롭고 어려울 때 좋은 교회와 성도를 만나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사역자들도 좋은 교회와 좋은 교인을 만난다는 것이 역시 일생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과 동업자가 되었고 또한 아주 짧은 시간에 바울에 의하여 신앙훈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나 놓고 보면 하나님의 섭리요, 인도요,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공주에 살게 되셨습니까? 왜 세광교회에 나오시게 되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자리에 와서 앉게 되었지만 오늘 우리의 만남은 하나님의 은총이요,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때가 되어 만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을 만난 결과 이들 부부의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날 이후 이들 부부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성경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이들 부부는 가르치는 부부가 되었습니다.
행 18:26절을 보면 “아볼라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라는 유대인은 학문과 웅변에 뛰어난 인물로서 에베소에 와서 성경을 가르치며 전도하였습니다. 그는 열심히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가르쳤지만 아볼로는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굴라 부부는 그를 데려다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볼로는 성경에는 능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이해는 명쾌하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아볼로의 결함을 비난하거나 헐뜯지 않고 개인적으로 그것을 채워주는 조력자가 되고 있음을 봅니다.
결국 아볼로는 이들 부부를 통해 복음의 진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아볼로는 아가야로 가서 힘차게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으며, 고린도교회에 4파(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파 고전 1:12)가 있었는데 그 중에 아볼로파가 있었던 것을 보면 아볼로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볼로의 배후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합니다. 이들 부부가 바울과 동업을 하면서 어느 틈에 이들의 신앙이 아볼로를 가르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는지 정말 놀랄만한 성장이었습니다.
예수를 전파하면서 요한의 세례만 아는 것은 수박 겉핥기에 불과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모른다면 성경을 천만번 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성령 충만하다고 하면서 성경에 대한 지식도 없이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이 알아야하고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있게 아볼로를 가르칠 수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렇게 가르치는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이들 부부가 바울을 만난 후에 놀라운 생활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저들은 바울을 통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며 충성된 증인으로, 그리고 훈련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을 받게 된 것입니다. 천막을 깁는 일로 사도 바울을 돕고 또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으로 양육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정은 바로 시128편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은 복된 가정이었습니다.
보세요. 이 가정은 예수 믿고 믿음으로 살 때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만 땀흘리는 가정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성숙한 믿음의 가정이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가정이 되었고 내외간에 함께 신앙생활의 보조를 맞추며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부부가 조화롭게 함께 손잡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걸음을 맞추어 봉사하는 아름다운 축복의 가정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래서 진실한 봉사와 말씀의 깊이를 더하셔서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말씀으로 바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살아있는 순교자 부부였습니다.
롬 16:3절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쓰고 마지막 16장에서 문안할 때 30여명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뵈뵈 다음 두 번째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들 부부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자기와 함께 수고하였으며 또한 바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참형을 당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순교를 각오한 자세가 아니고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목이라도 내어놓았다는 말은 원문대로 해석하면 도끼아래 자신들의 목을 내어놓았다는 말입니다.
고후 11:23-27절을 보면 바울은 전도하면서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당시에 가장 위험인물로 지목되었던 바울을 따라 다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각오나 죽음을 불사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는 친구나 형제까지 여지없이 배신하는 현실 속에서 이들 부부는 실로 모범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을 위하여 도끼아래 자신들의 목을 내어놓았던 이들 부부, 옥에 갇힌 바울을 위로하여 끝까지 도왔던 이들은 살아있는 순교자 부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내 주위에 있는 형제를 돕되 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힘써서 도울 수는 없을까요? 목회평생에 이런 부부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요,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이라 믿습니다.
셋째, 자기 집을 교회로 바친 부부였습니다.
고전 16:19절을 보면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오늘날처럼 웅장한 예배당이나 건물이 없었고 거의가 가정교회였습니다.
골 4:15절에 보면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고 말씀했듯이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든지, 빌레몬서 1:2절에 나오는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라든지, 마가의 다락방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발상지였으며, 빌립보에는 자주장사 루디아의 집이 빌립보교회가 되었던 것처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집이 교회가 되어 훗날 저 유명한 에베소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헌신이었습니까?
우리나라에도 오래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개인 가정에서 두, 세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많은 교회들이 개인이 제공한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지만 영원히 가정교회로 남아있을 수가 없고, 마침내 큰 교회들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어저께도 우리 교회 주방을 보러 온 시내 개척교회가 있었는데 동행한 권사님이 1억이라는 거금을 헌금하여 새로운 공간에 아름다운 예배당으로 리모델링한다고 했습니다.
넓은 땅을 바쳐 예배당을 짓고 수양관을 지을 수 있도록 큰 헌금을 드린 성도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길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숨은 전도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사도 바울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왔습니다. 순식간에 자라난 그들의 신앙으로 위대한 인물 아볼로를 가르쳤습니다. 바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바울이 위기에 처할 때는 바울의 목숨을 대신하여 자신들이 참형을 당할 위험도 감수하였으며, 마침내 자신들의 보금자리였던 주택을 교회당으로 사용하도록 선뜻 내어놓은 그런 부부였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부부의 신앙은 오늘날 모든 기독교 가정의 모범이 되고도 남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모범된 부부가 많기를 바랍니다.
한평생 목회의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부가 나란히 교회에서 온갖 힘든 일을 감당하며 묵묵히 충성하는 모습을 볼 때 목회의 보람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부부가 많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사 짝 믿음의 가정을 합심되는 가정으로, 합심된 가정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이 주를 위해서 사는 가정으로 만드시사 이 땅에서도 존귀한 가정이 되지만 하늘나라에서 가장 귀한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그날까지 절대로 낙심 말고 새벽부터 밤까지 눈물과 사랑으로 그리스도 복음의 씨를 뿌려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오심이 가까운 이때에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같이 죽도록 충성하여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부부의 이름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나란히 오르고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선교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윤재목사 / 행 18:1-4, 18, 24-28
오늘은 선교주일로 지킵니다. 필리핀 선교를 마치고 내일부터 일본 선교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선교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해야 잘하는 선교입니까? 몇 년전 목회자 한 분이 베트남 선교를 마음에 품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훈련도 받고 기도도 했습니다. 선교를 앞두고 경기도 어딘가에 베트남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말을 듣고 방문했습니다. 가보니까 공장지대인데 아주 열악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월급도 제대로 못받고 중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기도하는 데 이런 감동을 받았습니다. “네가 베트남 사람을 사랑하느냐?” “예, 주님”. “여기도 네 도움이 필요한 베트남사람들이 많은 데 왜 멀리까지 가려고 하느냐? 여기서 선교해라”. 선교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베트남 가려고 다 준비했는 데 여기서 하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한 두 달 기도해본 후 파송교회에 말했습니다. “저는 베트남에 안 가고 여기 사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선교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감동하시네요”. 그 말을 듣고 파송 교회 당회가 모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베트남에 안 가겠다면 우리는 당신을 선교사로 파송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건입니다. 선교사도 교회와의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도 조금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베트남에 가야만 베트남 선교다“. 이런 전통적인 생각을 붙잡혀 있지 않습니까? 그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도 물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할까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여기 살고 있으니 그들을 돕는 것도 베트남 선교입니까? 아닙니까?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선교를 생각할 때마다 항상 외국을 떠올린다는 것입니다. “멀리 아프리카, 거기 사는 토인들, 동남아시아, 인도, 네팔, 거기 사는 가난한 사람들, 그들에게 가서 전도하는 것, 그들의 병을 치료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것, 그것이 선교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선교는 가야 합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지 않으면 선교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디를 가느냐입니다. 주님이 말한 “모든 족속”이 꼭 “외국”을 말합니까? 반드시 비행기타고 공간을 이동해야만 선교입니까?
우리에게 성경적 선교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신약 성경에 이들 부부 이름이 모두 6번 나오는 데 네 번은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오고 두 번은 남편인 아굴라가 먼저 나옵니다. 남성중심의 고대사회에서는 특이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가 말했습니다. “만일 성경에 나온 부부를 놓고 인기투표를 한다면 가장 많은 표를 받을 부부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다”. 그만큼 모범적인 부부입니다. 이들 부부가 우리에게 모범을 보인 것은 이들의 부부애뿐 아니라 이들이 보인 선교의 모범 때문입니다. 이들은 로마가 세계를 정복하던 1세기, 혼란과 격동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지금의 터키 북쪽, 흑해 연안에 위치한 본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이들은 생계를 따라 로마로 갔습니다. 거기서 텐트를 만드는 일을 하며 살다가 주후 49년 겨울, 로마 클라디우디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세 추방하는 바람에 지금의 그리스 고린도로 이주했습니다(1. 지리, 사진). 이곳이 고린도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쪽, 아테네에서 40킬로 떨어진 항구도시입니다.
문제는 거기서 이들이 사도 바울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은총의 만남이요 만남의 은총이었습니다. 바울과의 만남은 이들 부부의 운명을 바꿨습니다. 하루 하루 살던 이들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이들이 선교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바울처럼 선교사 파송을 받고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선교의 모델을 보여주었는 데 그것이 3W 선교입니다. 첫째 work, 직업을 따라 일하는 일터 선교사, 둘째. walk, 하나님과 동행하는 믿음 선교사, 셋째 word,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말씀 선교사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둘라 부부를 통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선교사로 살 수 있는지를 배우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Work(일), 일터선교사
첫 번째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했던 선교는 텐트만드는 일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행18: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 만드는 것이더라”. 브리스길라 부부가 살았던 시대는 인구의 이동이 심했던 시대였습니다. 로마가 한 나라를 쳐들어가 그들을 정복하면 불가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이 경우에 당장 필요한 것이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본격적인 집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럴만한 돈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은 집이 천막입니다. 천막은 짓기도 편하고 언제라도 이사갈 수 있습니다. 정치적 격동의 시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텐트는 가장 적절한 주거형태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이 집을 짓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요즘은 덜하지만 육체노동은 사람들이 조금 덜 귀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도 “사농공상” 해서 선비는 귀하고 기술자는 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양도 예외는 아닙니다. 서양 사회의 최고 가치는 철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어떤 기술자도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달랐습니다. 유대인은 기술과 육체 노동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하나님도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손으로 창조하신 노동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손으로 하는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잠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6: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전5:12,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 전10:18, “게으른즉 서까래가 내려앉고 손을 놓은즉 집이 새느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전통에 따라 자식들에게 기술 하나를 가치쳤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술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유대인은 육체 노동은 좋아했으나 그것이 거룩한 일이냐 거룩하지 않은 일이냐로 구분했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돈을 많이 버는 일이냐 적게 버는 일이냐로 구분합니다. 또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자존감에 맞는 일이냐 아니냐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성경에 따라 어떤 일이 거룩한 일이냐 않으냐로 구분했습니다. 그 기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을 부정한 일입니다. 당나귀 몰이꾼, 낙타몰이꾼, 뱃사공, 마부, 목동, 푸주간주인, 목동도 거룩한 직업이 아닙니다. 동물 만지기 때문입니다. 투전꾼, 고리대금업자, 세금징수관리, 세리는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돈을 필요로 하면서 돈을 만지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구리 대장장이, 무두장이, 피장이는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공통적인 것은 가죽을 만지는 사람입니다. 피장이는 가죽쟁이입니다. 이발사는 유대문화에서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인 머리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목욕탕관리인, 의사도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사람 몸을 만지고 피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했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목수였습니다. 목수는 육체노동자중에서도 상노동자에 속합니다. 예수님은 세리들과도 자주 식탁에 앉았습니다. 식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세리 마태를 아예 제자로 삼으셨고 세리 삭개오의 집에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창녀들 하고도 같이 잡수셨습니다. 창녀는 당시 누구든지 만나면 돌을 던져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을 던지지 않은 것은 물론 함께 식사까지 하셨습니다. 그는 일생 또한 어부, 농부, 세리, 창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누구도 직업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그리고 바울의 직업이 무엇입니까? 천막 만드는 사람입니다. 천막은 무엇으로 만듭니까? 가죽으로 만듭니다. 유대인의 눈에 동물과 관련된 직업은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목동을 양을 취급하고 피장이, 천막꾼은 동물가죽으로 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욥바 피장이 시몬의 집에 머문 것을 아십니까? 그 일로 결국 고넬료가 구원받았습니다. 이 말은 직업 자체가 사람을 부정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업이 사람이 부정하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직업을 부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어부로 예수님 만났고 사도 바울은 가죽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까? 하나님앞에 천한 직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직업에 대한 천한 생각이 있는 겻 뿐입니다.
골3:23-24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말은 “무슨 일을 하든지”입니다.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은 한 무슨 일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꿔야 할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일은 거룩하고 세상일은 거룩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다 거룩합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집례하는 신부나 목장에서 젖을 짜는 목동이나 하나님이 보실 때 똑같은 일이다”. 또 하나 바꿔야 할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열심히 일해서 헌금으로 선교에 동참할 뿐, 선교는 선교사가 한다”. 아닙니다. 선교헌금이 선교가 아니라 우리의 일이 선교입니다. 외국에 있는 선교사만 선교사가 아니라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나도 선교사입니다. 외국에 있는 선교사는 해외선교사고 나는 일터선교사입니다. 해외에 있는 선교사는 전문선교사고 나는 생활선교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교의 일로 불렀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사로, 어떤 사람은 공무원으로, 어떤 사람은 주부, 학자로, 사업가, 의사로 불렀습니다. 어떻게 불렀든 공통적인 일이 있습니다. 골3:24,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다 같이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어떤 사람은 외국에서 나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공간이 선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선교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부름받은 선교사입니다.
오래전에 지방에 그런 성도가 계셨습니다. 시내에서 구두를 닦는 분입니다. 외지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지방으로 내려와 무엇을 할까 하다가 구두닦기를 시작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이런 일을 숨기는 법인데 이 사람은 숨기지 않습니다. 새가족으로 처음 왔을 때 물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십니까?”. “시내에서 구두닦고 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심방을 갔더니 한 때는 잘 나가던 사업가였습니다. IMF 때문에 망하고 지방에 내려왔는 데 한번 시작한 일은 열심히 합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가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일하십니까?” “열심히 합니다”. 이 사람은 5년후에 자기 구둣방을 차렸습니다. 또 5년후 그는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구둣방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고 그 일이 바로 선교라고 믿는 데 그 일이 잘 안되겠습니까? 다같이 “무슨 일을 하든지”.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일터 선교사입니다. 아멘.
Walk(동행), 믿음선교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두 번째 선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1년 6개월만에 바울은 고린도 사역을 마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18절입니다. 행18:18, “바울은 더 여러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다같이 “함께 하더라”. 자, 지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에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텐트만드는 일입니다. 그동안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는 아마 고객도 생기고 돈도 좀 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음 선교지로 떠나게 되자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같이 떠납니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자기의 기득권, 자기의 생계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왜 이렇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과 함께 했습니까? 그들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직장이 선교지요 내가 직장선교사라면 우리는 직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정이 선교지요 내가 가정선교사라면 우리는 가정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베워야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의 생리상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기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출근하자마자 기도로부터 시작합니다. 쉬는 시간 짬짬히 성경읽고 묵상합니다. 우리 교회 어떤 분은 휴대폰에 녹음된 성경을 출근할 때 차에서 듣고 “생명의 말씀”을 늘 지참하고 다니면서 직장에서 잠시 잠시 묵상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휴대폰에 우리 교회에서 제공하는 매일 묵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2. 사진), 우리 교회 매일 묵상 코너입니다. 매일 아침 성경 귀절 하나와 간단한 묵상이 있고 매주 월요일마다 주일날 제 설교를 들려주며, 평일에는 찬양을 들을 수 있게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직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 신우회 예배입니다. 모든 직장마다 신우회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잘 모이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직장에 신우회들이 조직되기 바라고 정기적인 모임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현대백화점에서 몇 년전부터 주일예배를 드립니다(3. 사진). 몇 년동안 수고하신 분들이 애써서 지금은 자리가 잡혔습니다. 매주 주일 오전 8:30에 현대백화점 9층에서 드리며 지금은 봉사자 포함 약 50명이 예배드립니다. 현대 백화점에 속한 수천의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직장인들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브리스길라, 아굴라가 했던 가장 좋은 것은 그들의 집을 교회로 삼은 것이었습니다. 고전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여기에 “그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가 고린도를 세 번 방문했습니다. 바울이 떠난 지 2천년이 되었지만 고린도는 여전히 큰 도시였습니다. 두 개의 고린도가 있는데 바울이 활동했던 “옛고린도”와 현대도시 “신 고린도”가 있었습니다. 그 옛 고린도에 갔더니 아직도 바울이 말씀을 전한 유대인 회당자리, 바울이 재판받던 재판석, 그리고 거대한 공중목욕탕, 화려한 시장 저리와 거리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 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위세워진 고린도교회였습니다(4. 사진). 특이한 것은 이 교회 입구에 역대 고린도 교회를 담임목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 데 보았더니 1대는 바울, 2대가 아볼로, 3대가 실라, 4대가 소스테네 이런 순서로 나가 지금 88대입니다. 그러니까 약 2000년간 약 88대의 목회자가 고린도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가 생각했습니다. ‘아, 브리스길라, 아굴라, 두 사람이 살았던 집이 교회가 되어 2천년을 지켜왔구나. 아, 두 사람의 믿음의 삶이 이렇게 오랫동안 역사에 남다니. 역사는 단절이 없구나. 나도 지금 어떤 신앙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천막만드는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살던 한 나그네 부부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집을 교회로 만든 것이 2천년 고린도 역사를 지탱해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집도 교회가 되면 그런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어떤 무명의 시인이 “하나님과의 인터뷰”라는 시를 썻습니다. 이 시을 읽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묻고 하나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 인간에게 가장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이 대답했습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하다고 서둘러 어른이 되는 것. 그리고는 다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돈을 다 잃는 것.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쳐 버리는 것. 그리하여 결국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는 것”. 그것이 가장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삽니다. 어린 시절이 지루해도 서둘러 어른되지 마십시오. 돈을 벌기 위해 건강까지 잃지는 마십시오. 건강잃으면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미래를 얻기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미래도 천국도 희망이 있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시편의 말씀이 있습니다.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약속합니다. “내가 네 길을 지도하리라”. 그러면 하나님이 미래를 약속했으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신뢰”는 “몸을 기댄다”는 뜻입니다. 엄마품에, 벽에 기대듯 우리 몸을 하나님께 기대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의지”입니다. “의지”는 지팡이를 잡거나 보조기를 잡고 걷는 것입니다. 나 혼자 걷기에는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 붙잡고 걷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명철입니다. 명철은 하나님을 향해 우리의 생각이 열린 것입니다. 또 “인정”이 나옵니다. “인정”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네 길을 지도하리라”. 이 “지도”란 말이 재미있습니다. 이 말은 “길을 곧게 한다”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I will make straight your paths”. 구불 구불, 질퍽 질퍽한 인생 길을 반듯이 펴주겠다는 것입니다.
오래전 영국을 방문했는 데 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오랫동안 유럽선교를 했는 데 지금은 다른 사역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님, 어디로 가시나요?” 제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잘 모릅니다” 대답했습니다. 제가 “답답하시죠?” 했더니 “아니요. 하나님은 미리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셔서 알려주지 않으신 것 같아요. 만일 알아야 했다면 이미 알게 했겠죠. 제가 할 일은 그저 기도하는 일이죠”, 얼마후 떠나오면서 또 만났는 데 드디어 하나님이 알려주셨다고 말합니다. 어느 신학교를 갔더니 그 학교 벽보에 아프리카의 어느 신학교 교수 구인광고가 났답니다. 그래서 원서를 냈더니 합격했답니다. 그때 제가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위해 할 일은 없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지도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잠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아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아멘.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면 내일 하나님은 우리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선교입니다. 믿음은 다만 선교를 위한 준비가 아닙니다. 그 자체가 선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선교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믿으면 하나님이 인도합니다. 지금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은 미래를 여실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Word(말씀), 말씀선교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세 번째 선교는 말씀으로 사람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26절입니다. 행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자세히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여기 아볼로가 나옵니다. 아볼로가 누구입니까? 바울을 이어 고린도교회 2대 담임목사입니다. 다시 고린도교회로 가볼까요? 역대 고린도교회 담임목사 명단을 보십시오. 1대 바울, 2대 아볼로, 3대 실라, 4대가 소스테네(5. 사진). 그러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을 이어 고린도교회를 담임한 고린도교회 2대 담임목사를 키워 낸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평신도가 아닙니까? 이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전문적인 목회자도 아니예요.
그런데 26절입니다. 행18: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는 당대 지식인이었습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지성과 영성을 갖춘 차세대 지도자였습니다. 다만 그가 아는 것은 세례요한의 세례만 알뿐 예수님은 잘 몰랐습니다. 다른 다 알아도 예수님 모르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다행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바울을 통해 배운 예수님의 복음과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아볼로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26절의 “하나님의 도”입니다. 초대교회의 “도”는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입니다. 그것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사입니다. 선교사는 모든 것을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것을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국 최초의 목사, 장로가 누군지 아십니까? 최초의 목사는 황해도 출신 김창식입니다(6.사진. 생년월일과 함께). 이 사람이 살던 시대에 선교사들이 들어왔는 데 사람들 사이에 어떤 소문이 있었느냐 하면 파란 눈을 가진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가 간을 떼어 먹는다 하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김창식은 그 소문이 사실인가 하여 평양 올링거 선교사 집에 머슴으로 위장취업했습니다. 그리고 보니까 사실이 아닙니다. 아닐 뿐 아니라 선교사의 친절하고 진실한 삶에 감동받고 전도까지 받아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1901년 한국인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습니다. 그 뒤 김창식은 25년간 전국을 돌면 전도해서 125개 교회를 개척하고 48개 예배당을 건축합니다. 교통수단도 없는 때 그는 걸어서 안 가본 산골과 농촌이 없을만큼 조선의 모든 지역을 다니며 전도하다 72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그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가 바울처럼 살았다 하여 “조선의 바울”이라고 불렀습니다. 한국 최초의 장로는 서상륜입니다(7. 사진. 생년월일과 함께). 역시 황해도 출신이었던 서상륜은 13살 때 부모를 잃고 31살 때 열병으로 죽게 됩니다. 그때 선교사 맥킨타이어가 그를 서양 병원으로 인도하여 고쳐주고 전도까지 합니다. 그때 예수믿고 변화되어 그 역시 전도자가 됩니다. 그가 세운 교회가 새문안교회인데 처음 교회 세울 때 14명이 시작했는 데 그 중 13명이 그가 전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여 변화시키고 변화된 그가 또 다른 선교사가 되어 다른 사람을 전도합니다. 그러면 그가 예수믿고 또 선교합니다. 가난한 머슴이 변하여 목사가 되고, 병으로 죽어가던 고아가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선교였습니다. 국내에 있든지 해외에 있든지, 전문 선교사든지, 평신도 선교사든지, 말로 하든지 행동으로 하든지, 목표는 딱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여 그로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하고 그가 또 다른 선교사가 되어 다른 이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 그래서 복음은 복음을 낳고 전도는 전도를 낳고, 선교는 선교를 낳고, 교회는 교회를 낳아, 새상 끝날, 모든 열방이 주님을 볼 때까지 하나님의 선교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사이며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사명에 부름받았습니다. 어느 교회에 갔더니 주차장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주차장을 떠나는 당신, 당신은 이 세상의 선교사입니다”. 오늘 주님이 여러분 모두를 선교사로 이 세상에 보냅니다. 주일마다 예배자로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배끝나면 선교사로 세상에 가고, 예배자이면서 선교사인 여러분의 삶에 주님이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아굴리와 브리스길라
양향모목사 / 행 18:1-4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고린도로 왔습니다. 아덴이 그리스의 수도로 종교와 철학의 도시라고 한다면 고린도는 그리스반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로 교통의 요충지였고 상업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번창한 항구 도시였으나 심한 빈부의 차이와 퇴폐적인 윤리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의 우상숭배는 우상숭배와 함께 신전에 신을 섬기는 무녀들이 수천 명이나 있었고 고린도인들은 그 무녀들과 음탕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인이라고 하면 음탕한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상을 섬기는 도시에서 음탕한 생활을 하던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녔지만 교회 안에 이런 것들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후일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는데 주요 내용은 이런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도 행하지 않는 불의한 일들을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2:4)라고 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아굴라’라고 하는 사람과 그 아내인 ‘브리스길라’라는 사람을 만나서 고린도지역의 선교를 시작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들 부부를 만난 바울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선교활동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님들이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같은 동역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교회를 시작할 때 이런 충성스런 성도를 만나는 것처럼 좋은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비교적 안정된 교회로 성장하는 교회를 보면 어김없이 이런 부부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교회도 이런 충성스런 부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처음 개척했을 때 이런 부부들을 많이 만났고 지금도 이런 부부들이 함께 동역하기 때문에 교회가 운영이 되고 있고 복음을 전파하는 막중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본문 1-2절에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아덴을 떠나서 고린도에 온 후에 그곳에서 ‘아굴라’라고 하는 사람과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라고 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도 이제 막 고린도로 온 사람이었고 바울도 지금 고린도로 왔는데 서로 만났다고 했습니다.
아굴라는 본도애서 태어난 유대인이었습니다. 아굴라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유대인이었는데 부모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서 소아시아지방의 본도라는 곳에 와서 살다가 아굴라를 낳았습니다.
그런 아굴라가 큰 꿈을 품고 당시 최고의 도시인 이태리 로마로 올라갔습니다. 소아시아 본도 같은데서 사는 것보다 로마에 가서 사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굴라가 로마에 와서 브리스길라라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브리스길라는 이미 로마에서 자리 잡고 잘 사는 가문의 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가들이 짐작을 하기를 아굴라는 가죽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브리스길라는 자본과 인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동업자가 되고 부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가죽을 가지고 천막을 만드는 사업을 해서 제법 성공을 거둘 무렵에 로마에서 큰 사변이 일어납니다. 글라우디오라는 로마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 추방령을 내립니다. ‘크레스투스’라는 유대인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고 했습니다.
이 추방령에 의해서 유대인인 아굴라는 추방을 당해여야만 했고 그 아내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로마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남편을 따라서 로마를 떠났고 마침 여기 고린도에 와서 사업을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나라가 망한 이후에 근 2천여 년 동안 전 세계에 흩어져서 나라 없는 서러움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추방도 당하고 학살도 당하고 온갖 미움을 다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추방으로 인한 흩어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는 전초기지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에는 대부분 유대인들의 회당이 있었고 그 회당에서 바울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이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바울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었던 이 부부를 바울이 가서 복음을 전할 고린도로 미리 보내시고 힘을 합하여 고린도에 복음을 전하는 동역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얼마나 바울의 사역에 충성을 다하여 협조했는지는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바울이 잊지 못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그런 동역자라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들을 미리 준비해 두셨고 그 사명을 받은 사람들을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여 충성을 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그 일에 충성을 다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무책임하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무책임한 부모님을 만나서 고생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무책임한 남편이나 아내를 만나서 행복해야하는 결혼생활이 불행해지는 일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무책임한 사장 때문에 무책임한 직원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여러 분야의 많은 책임들을 맡기셨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형제로서 자매로서 또는 친구로서 이웃으로서 이런저런 사명들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이런 사명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주변의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의 삶만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의 삶도 채임을 져야 합니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교사로 이런저런 임무들을 맡기셨습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때 교회라는 공동체가 잘 운영이 되고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 일본에 다니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히로시마의 어떤 공장과 거래를 했는데 그 공장에 가서 본 현수막의 문구가 참 인상적이어서 돌아와서 우리 회사의 사훈으로 삼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수막의 내용은 “가치가 있는 상품을 창조하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 사훈을 “가치 있는 상품”이라고 정했습니다. 사장도 사장으로서 가치를 지녀야 하고 직원도 직원으로서 가치 있는 직원이 되어야 하고 상품을 취급할 때도 가치가 있는 상품을 취급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도 바른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 바른 설교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은 그 때의 각오가 목회에도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목사가 값어치도 하지 못하고 사례나 축내고 목사가 해야 할 바른 복음을 선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불행입니다. 목사 자신도 불행한 목사이고 그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제가 목사로서의 가치를 높일 때 제 자신도 행복하고 여러분도 행복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인생이 이렇게 살기도 하고 저렇게 살기도 합니다. 무책임하게 살기도 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책임한 삶을 살기보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잘 완수할 때 보람된 삶을 살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더 잘 완수하고 다른 사람에게 더 큰 기쁨을 줄 때 그 사람의 가치는 높아지게 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서 가치가 있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고 헌신함으로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가치를 높이시기 바랍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본문 3-4절에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 동역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 함께 동행했던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서 쫓겨나 아덴으로 올 때 거기 두고 나왔고 아직 합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 혼자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같이 동행하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었고 고린도에 아는 사람도 한 사람도 없어서 혼자 일을 해야 하는데 거기 마침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거기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들에게로 갔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하는 사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당시에 천막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짐승의 가죽으로 천막도 만들고 구두와 같은 가죽제품들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생업이 같았다고 했는데 바울도 천막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언제 이런 기술을 배웠는지 알 수는 없으나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지방의 부근에서 염소나 기타 짐승의 가죽이 많이 생산된 것으로 보아서 바울도 고향에서 그런 기술을 배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자손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것을 전통으로 생각했고 또 먹고 살게 하기 위해서 어려서부터 한 가지 기술은 꼭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전통에 의해서 바울도 이런저런 공부를 많이 했지만 가죽을 다루는 기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동업자로 아굴라 부부에게 접근한 것은 그들 부부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들 부부를 찾아간 것은 함께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계만방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 천막을 만드는 일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는 이 중요한 일을 조금만 알려도 한 사람 먹여 살리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먹고 살기 위하여 스스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이 일을 통하여 교훈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의 신성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무로 주신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인간이 벌로 받은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노동이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참 좋은 것입니다. 노동을 통해서 우리의 몸이 건강해지기도 하고 노동을 통해서 나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또 이웃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기도 합니다.
할일 없어서 빈둥거리고 놀게 되면 반드시 나쁜 생각을 하게 되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되고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고 정상적은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이든지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또 이 일을 통해 오늘날 목회자들에게도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혹간에는 목회를 직업으로 생각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직업 중에도 돈을 많이 버는 직업으로 생각하고 목회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를 잘 부흥시켜서 치부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소위 목회에 성공을 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부 목회자들을 보고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고 보면 사례도 받아서 생활도 해야 하고 또 교회가 돈이 많으면 때로는 돈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제 때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많은 목회자들이 그들과 타협을 하고 신사에 참배를 했습니다. 강요를 하기 이전에 앞장서서 일제에 협력하여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목사직을 그만두고 숨어서라도 신앙을 지켜야 했는데 그 자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우상숭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 신사참배를 한 목사들은 회개를 하고 목사직을 반납하고 다시 시작을 하라고 했지만 그렇게 회개한 목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다들 자기 자리 지키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들을 밥 목사 직업목사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직장을 위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신앙도 최소한의 양심도 저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른 목회를 하려고 하기 보다는 더 큰 교회 더 사례를 많이 주는 교회로 가려고만 했습니다.
목회가 직업의 하나로 혹은 출세의 도구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을 하여 교회가 부흥하고 거기에 맞게 대우를 받고 인정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교회성장에 유익한 것들을 설교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희생과 헌신은 사라지고 자기의 유익을 위하는 목회가 될 때 교회의 본질은 사라지고 복음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양용근 목사님은 일본대 법대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목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큰 교회에 가려고 하지 않고 고향의 작은 교회들만 담임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논문을 쓰면서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한국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던 밤에 뒤에서 방청을 하던 양용근 당시 조사님과 손양원 조사님과 그 친구 들이 일본 헌병들에게 쫓겨나서 평양신학교 교회당에서 밤을 새며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네 명의 친구들이 서약을 한 내용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우상숭배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지만 그 가운데 목회지를 정할 때 남들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열악한 교회로 간다는 것과 가서 사례는 교회의 형편대로 최소한의 생활비만 받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 양용근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나환자촌의 애양원교회에 차례로 시무하셨고 계속해서 작은 교회에서 시무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약속이 있는지도 최근에야 알았고 그런 약속과 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길을 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남들이 가지 않으려고 했던 지역의 교회에 왔고 사례는 평생 최소한의 생활비만 받았습니다.
제가 실력이 안 되니까 형편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감사할 것은 제가 이런 일을 통하여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이 약해서 순교자의 후손이지만 순교는 하지 못합니다. 아픈 것이 싫어서 병원에도 잘 안가는 사람입니다. 등치만 컸지 무서움을 잘 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난하게 사는 것은 이력이 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하지만 이렇게 살아도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삽니다. 오히려 못살수록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작은 희생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여러분이 더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할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후일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도 먹고 마실 권리가 있고 결혼할 권리도 있고 사례를 받을 권리도 있지만 이런 권리를 쓰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후9:12)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굴라 부부는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협력한 사람입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함께 복음의 동역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통한 충성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데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부부
행 18:1-4, 24-26 / 김재곤목사(전주태평교회)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도 첫째 주일은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기로 다짐하는 어린이주일로 지키며 유아세례예식을 거행했고, 둘째 주일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녀가 되기를 결단하면서 어버이주일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셋째주일은 우리 태평가족들의 큰 가정인 우리 태평교회의 창립기념일을 맞아 창립기념주일로 지켰고, 오후에는 가족찬양제의 시간을 갖고 참가한 가정만이 아닌 참석한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5월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은 부부주일로 정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5월 21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시나요? 모르신다고요? 그 날은 다름 아닌 부부의 날입니다. 그럼 왜 5월의 31일이나 되는 날 가운데 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했을까요? 그 이유는 2 그러니까 둘이, 1 즉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사십시오라는 뜻에서 그렇게 21일로 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부부주일을 맞아 어떤 부부가 둘이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사는 아름다운 부부인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부부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러 부부들 가운데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 부부가 있는가 하면 그러지 못한 부부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부부주일에 성경에 나오는 여러 부부들 가운데 아름다운 부부 한 쌍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 부부의 남편 이름은 아굴라이고, 부인 이름은 브리스길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 등장하는 부부가 바로 이 부부입니다. 그럼 이 부부를 왜 아름다운 부부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1. 언제나 함께 하는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 부부에 대한 기록이 여섯 번 나옵니다. (행18:2, 18, 26, 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그런데 그 여섯 번 모두 부부의 이름이 항상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 부부는 모든 곳에 함께 있었던 부부였고, 모든 일도 함께 했던 부부였으며, 마음이나 생각도 함께 하나가 되었던 부부였고, 즐거울 때만 함께 했던 것이 아니라 어려운 고통의 때에도 함께 그 즐거움과 어려움을 나누었던 부부였습니다.
1절과 2절 중반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아굴라는 본래 유대인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에 로마에서 자유민이 되어 당시 로마의 유력 가문과 연관을 맺고 있던, 그래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브리스가 가문의 유대인 여자 브리스길라와 결혼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 이후, 천막제조와 가죽수공의 기술이 있었던 아굴라는 그 기술을 브리스길라 가문이 가지고 있는 돈과 배경과 연결시켜 상당한 사업적 성공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룬 성공을 바탕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던 이 부부가, 그런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것은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글라우디오가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하여 유대인들에게 추방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 추방령에 의해 로마를 떠나게 되면, 그동안 로마에 모아 놓았던 재산을 잃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 재산이 주었던 안락함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글라우디오 황제는 유대인 남자들에게는 무조건 추방령을 내렸지만, 유대인 여자들에게는 그들을 노예나 성적 노리개로 이용하려는 목적에서 로마에 살고 싶으면 떠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는 그 녀의 가문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로마의 유력 가문과 연관을 맺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녀 자신도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로마에 그냥 남아 있어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될 정도의 보호는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녀는 남편 아굴라와 함께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거처를 옮깁니다. 즉 재산과 지위를 잃는다 해도 남편과 함께 하는 것을 브리스길라가 선택했다 그 말입니다.
이후에도 이 부부는 고린도에서 만난 바울이 선교를 위해 에베소로 간다하니까 함께 떠납니다. 그리고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 후 바울이 로마로 가려 할 때, 이들 부부는 바울보다 먼저 로마에 가서 바울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이 부부는 부부가 된 이후, 항상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거했고, 함께 행동했습니다. 기쁨과 슬픔도 함께 나누었고,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함께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부부가 아름다운 부부입니까? 저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는 부부, 그리고 모든 일에 마음을 같이 하여 함께 행동하는 부부가 아름다운 부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하지 않는 부부는 절대 아름다운 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께 하지 않는 부부를 사탄이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5절 말씀입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사탄이 언제 부부를 시험한다고 했습니까? 분방할 때, 즉 부부가 함께 하지 않을 때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그 예가 나옵니다. 하와가 아담과 떨어져 있을 때, 하와는 뱀을 통해 유혹하는 사탄의 시험에 빠졌습니다. 만약 사탄이 유혹하는 그 때 그 자리에 아담이 함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아담은 그 자리에서 뱀을 잡아 생사탕을 해 먹고 그 날 밤 하와를 더 행복하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없이 기쁨과 영광도 부부가 함께 나누어야, 부부는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고 진정한 감사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슬픔과 고난의 자리에도 부부가 함께 있어야, 부부는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오늘을 이겨낼 용기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혹과 시험의 문제에도 부부가 함께 대처해야 부부는 지혜로운 승리를 얻을 수 있고 복의 문도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과 삶의 자세에 있어서도 부부가 함께 하나가 되어야, 부부는 더 풍성한 영적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주위에 감동을 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부부주일에 우리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부는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하고, 언제나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이렇게 약속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언제나 떨어지지 말고 함께 하는 부부가 됩시다.” 아굴라 부부와 같이 언제나 함께 하는 부부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2. 서로를 세워주고 높여주는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간이 큰 남자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이야기에서 보통 남자들보다 간이 약간 큰 남자는 부인과 이야기 할 때 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 하는 남자이고, 간이 엄청나게 큰 남자는 부인께 돈 어디에 썼느냐고 따져 묻는 남자이며, 아예 간이 배 밖으로 툭 튀어나온 남자는 부인께서 보고 계시는 TV채널을 허락도 받지 않고 바꾸는 남자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기분 언짢아하실 어른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에는 ‘남존여비’나 ‘여필종부’의 뜻을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남자에 비해 낮은 사람이라는 뜻이나 여자는 반드시 남편을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대신 ‘남존여비’는 남- 남자가, 존-존재하는 이유는, 여-여자의, 비-비위를 맞추기 위함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여필종부’는 여-여자는, 필-필히 남자를, 종-종으로, 부-부려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정말 시대가 변해도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사실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존여비’나 ‘여필종부’의 본래적 뜻 그대로 남자는 여자에 비해 더 우월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렇게 남자가 힘을 행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옛글에는 여자 이름이 아주 특별한 존재가 아니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이 부부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섯 번 동안 모두 부부의 이름이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즉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인 A. D 1세기에 살았던 부부였음에도, 그래서 오늘과는 달리 여성의 존재적 가치가 상당히 비하된 시대에 그들이 살고 있었음에도, 남편만의 이름이 아닌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나오고 있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추측해보면 우선 이 부부가 모두 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 즉 부부 모두의 이름이 함께 기록될 만큼 초대교회의 역사와 바울의 선교역사에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 부부가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따로 따로 사역한 것이 아니라 늘 같이 다니며 함께 사역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들에 대해 여성의 가치를 크게 보지 않던 그 시대에 이 부부가 서로를 서로 세워주고 높여주는 부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세 가지 이유 가운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아름다운 부부로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로 세 번째 이유를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고 높여주는 부부가 되어야만 정말 아름다운 부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이 부부는 서로 세워주고 높여주는 부부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들 부부의 이름이 늘 함께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 부부의 이름이 모두 여섯 번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여섯 번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름의 기록된 순서가 똑같지 않습니다. 부부의 이름 가운데 두 번은 남편의 이름인 아굴라가 먼저 나오고, 네 번은 아내의 이름인 브리스길라가 먼저 나옵니다. 그럼 왜 두 번은 남편 이름이, 그리고 네 번은 아내 이름이 먼저 나왔을까요?
성경을 주의 깊게 읽게 되면 거기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은 다름 아닌 가정, 그리고 사역과 관계된 기준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사도행전 18장 2절과 고린도전서 16장 19절에는 남편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데, 이 구절은 이 부부의 가정에 대해 말을 하는 구절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장 18절과 26절, 그리고 로마서 16장 3절과 디모데후서 4장 19절에는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데, 이는 이 부부가 감당했던 사역에 대해 말씀하는 구절입니다. 그렇게 가정에 대해 말씀할 때는 남편 아굴라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고, 사역에 대해 말씀할 때는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에 대해 말해야 될 때 제 아내께서 그리하십니다만 아내 브리스길라도 항상 남편 아굴라를 가정의 대표로 세워주고 높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에 대해 말해야 될 우리교회 여자 장로님들의 남편 되시는 분들께서 그리하고 계십니다만 남편 아굴라도 항상 자신보다 믿음도 더 좋고 더 헌신적이었던 아내 브리스길라를 앞세웠습니다. 그렇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서로가 뒤에서 남편과 아내에게 협조하면서 남편과 아내를 세워주었고 높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기자들이 남편 먼저 아내 먼저하며 이들 부부의 이름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게 이 부부는 서로를 세워주고 높여 주는 부부였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부부는 서로를 세워주고 높여주어야만 아름다운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를 무시하고 사는 남편이 어떻게 행복한 아내의 남편이 될 수 있겠으며, 남편을 깎아 내리는 아내가 어떻게 남편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이 부부주일에 우리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부는 서로를 세워주어야 하고 높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시간 남편과 아내가 곁에 있든지 없든지 이렇게 외칩니다. “당신은 이 세상 최고의 남편이고, 최고의 아내입니다.” 아굴라 부부와 같이 서로를 세워주고 높여주는 부부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3. 복음을 위해 함께 헌신한 부부였기 때문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언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었던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갖게 되었을 유대교 신앙으로부터 언제 이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러 학자들은 이들이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기 전, 즉 로마에 살고 있었을 때 이들은 이미 기독교 신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여하튼 글라우디오 황제의 추방령에 의해 고린도에 오게 된 이 부부는 그 곳에서 바울을 만납니다. 그리고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사역하는 바울 곁에서 말씀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이후에는 부부 모두가 복음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래서 이후 바울이 사역을 위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갈 때, 이 부부도 고린도의 모든 살림을 정리하고 복음을 위해 바울을 따라 갑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오늘 읽은 24절 이하 말씀에 나오는 대로 젊은 교역자 아볼로가 열심은 있으나 말씀의 깊이가 없는 것을 보고 겸손하게 아볼로에게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은 후 당시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의 복음화를 위해 다시 로마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자기의 집을 로마교회 성도들의 신앙집회소, 즉 교회로 내어 놓습니다.
이런 이 부부의 헌신에 대한 바울의 평가가 로마서 16장 3절부터 5절 상반절까지의 말씀에 나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매주 부부가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습은 목사인 제게 얼마나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으로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는 부부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함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그런 복음을 위해 함께 헌신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에 헌신하기 위해, 이 부부는 말씀을 배우는 일에 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바치며 헌신했습니다. 또 복음에 헌신하기 위해, 이 부부는 로마에서 추방되어 새로이 기반을 닦아 놓은 고린도의 생활 터전도 기꺼이 정리하고 에베소로 가는 바울을 함께 따라나서며 헌신했습니다. 또 복음에 헌신하기 위해, 이 부부는 다시 로마로 함께 돌아가 자기들의 집을 교회로 내어놓으며 헌신했습니다.
그렇게 이 부부는 주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함께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헌신으로 이 부부는 자기들을 부부되게 하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릴 수 있었고, 인생의 진정한 보람과 의미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부부의 행복을 매일 매일 함께 만끽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많은 부부들이 부부 모두가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재정적으로도 여유가 있고, 정서적으로도 서로 통하고, 윤리적으로도 부끄러운 것이 없어야 아름다운 부부로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신앙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신앙에 그 어떤 악조건도 뛰어넘게 하는 능력이 있기에, 앞에서 말씀드린 그런 조건에 설령 부족함이 있다하여도 신앙이 주는 능력으로 그 부족함을 부족함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얼마든지 아름다운 부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그럼 신앙에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신앙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헌신의 신앙입니다. 분명 헌신의 신앙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이고, 헌신하는 사람에게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을 소유케 하는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부부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부부가 되면, 그 부부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부부보다도 더 행복하게 사는 아름다운 부부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부부주일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부부가 함께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만족해하지 마십시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처럼 부부가 함께 말씀도 배워야 하고, 그들 부부가 바울을 도왔던 것처럼 부부가 함께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도 도와야 하고, 그 부부가 복음사역을 바로 감당하기 위해 안락한 생활이나 자기의 집을 기꺼이 포기했던 것처럼 부부가 함께 복음사역을 위해 자신들의 소중한 것도 포기하며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부부가 함께 다짐하십시다. “우리 함께 복음을 위해 헌신하십시다.” 아굴라 부부와 같이 부부가 함께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부부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날 남편 때문에 속이 상한 어느 부인이 그 속상함을 달래고자 친한 친구들에게 이런 문자를 급히 보냈습니다. 「남편을 팝니다. 사정상 급매합니다. 00년 0월 0일 00예식장에서 구입했습니다. 나라에는 100% 국산 정품으로 등록된 제품이지만 기꺼이 명의를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아끼던 제품인데 요즘 들어 유지비도 많이 들고 여러 장애가 나타나 속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처음 구입할 때는 A급인줄 알았는데 요즘보니 마음 용량은 좁쌀만 하고, 이런 저런 잔소리 소음도 많이 나며, 거기에다 음식물 소비량은 동급의 두 배입니다. 그래서 사용 시 만족감도 떨어지고 짜증도 많이 납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외관은 봐줄만 합니다. 사용 설명서는 따로 드리지 않습니다. 단 AS는 안되고, 반품 역시 절대 안 됩니다. 사은품으로 구입하시는 분에게는 시어머니까지 함께 드리겠습니다.」
누군가가 웃자고 만든 이야기이겠지만, 이 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를 포함하여 듣고 있는 남편들의 속을 편치 않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우리교회 모든 부부들은 이런 이야기와는 절대 상관없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이 언제나 함께 하는, 그리고 서로를 세워주고 높여주는, 그리고 복음을 위해 함께 헌신하는, 그런 아름다운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부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