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로문진(子路問津)
자로가 나루터를 묻다는 뜻으로, 강을 건널 나루를 묻는 질문에 쟁기를 끌던 장저와 걸익은 흐르는 물처럼 살 것을 말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공자를 완곡하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子 : 아들 자(子/0)
路 : 길 로(足/6)
問 : 물을 문(口/8)
津 : 나루 진(氵/6)
출전 : 논어(論語) 미자편(微子篇)
장저와 걸닉이 짝을 지어 밭을 가는데 공자께서 지나시다가 자로를 시켜 나루터를 묻게 하시었다.
장저가 말하기를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분이 누구인가?”라고 하자, 자로가 “공구이십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가 노나라의 공구인가?”라고 다시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 분은 나루터를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걸닉에게 물으니, 걸닉이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인가?”고 하자 자로는 “중유입니다”고 대답하였다. 그가 “그대가 바로 노나라 공구의 무리인가?”고 묻자, “그렇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도도하게 흐르는 것은 천하가 모두 그러한데, 누구와 더불어 바꾸겠는가? 또 그대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보다는 세상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고 하고는 씨앗 덮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서 말씀드리니, 공자께서 한동안 겸연쩍은 듯이 계시다가 말씀하셨다. “조수와 더불어 무리지어 살 수는 없으니, 내가 이 사람의 무리와 더불어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 천하에 도가 있었다면 내가 더불어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長沮桀溺이 耦而耕이어늘 孔子過之하실새 使子路로 問津焉하신대 長沮曰 夫執輿者爲誰오 子路曰 爲孔丘시니라 曰是魯孔丘與아 曰是也시니라 曰是知津矣니라 問於桀溺한대 桀溺이 曰子爲誰오 曰爲仲由로라 曰是魯孔丘之徒與아 對曰然하다 曰滔滔者 天下皆是也니 而誰以易之리오 且而與其從辟人之士也론 豈若從辟世之士哉리오하고 耰而不輟하더라 子路行하야 以告한대 夫子憮然曰 鳥獸는 不可與同群이니 吾非斯人之徒를 與오 而誰與리오 天下가 有道면 丘不與易也니라.
(微子 6)
공자가 도덕정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천하를 유세(遊說)했던 지역은 대체로 하남성(河南省)을 중심으로 한 대륙의 중앙부였다. 이 지역은 넓은 평원이라는 뜻으로 중원(中原)이라고 말한다.
육지의 바다라고 할 만한 중원을 방랑하던 공자 일행은 결국 한 명의 훌륭한 제후도 만나지 못했다. 당시 공자와 제자들은 10여 년의 방랑길에 몹시 지쳐 있었다.
이때 공자 일행은 앞을 가로지르는 강을 만났다. 그런데 나루터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두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자는 자로를 보내 나루터를 묻게 하고는 자신이 대신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
두 농부의 이름은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었다. 자로는 먼저 장저에게 물었다. 그런데 장저는 말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이 공자인지 묻고, 공자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로는 걸닉에게도 물었다. 걸닉은 “세상은 도도하게 흐르는 물결 같은데, 그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사람을 가려서 만나는 스승을 따르지 말고 우리처럼 세상을 등지며 살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결국 나루터는 알려주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 있었던 일을 공자에게 전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어떻게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숨어 살겠는가? 천하에 도(道)가 있었다면 나도 바꾸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저와 걸닉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공자가 초(楚)나라 소왕(昭王)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남쪽으로 가기 얼마 전 패망한 채(蔡)나라의 유민(遺民) 혹은 숨어 사는 은자(隱者)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 때문에 장저란 이름은 ‘키가 크고 진흙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고 붙인 것이며, 걸닉 역시 ‘훌륭한 사람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라고도 한다.
이밖에 논어에는 공자가 은자를 두 번 더 만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가 초(楚)나라의 미친 사람 접여(接輿)이다. 접여는 ‘공자의 수레에 접했다’는 것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접여는 “봉황이여! 봉황이여!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오늘날 정치에 종사하는 자들은 위험하오!(微子 5)”고 말한 뒤 사라진다.
두 번째는 뒤쳐져 가던 자로가 늙은 농부를 만나 앞서간 공자 일행에 대해 물었다. 늙은 농부는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오곡(五穀)도 분별하지 못하는 공자가 선생의 자격이 있는가?(微子 7)”고 말하며, 들고 있던 지팡이를 꽂아놓고 김을 매었다.
자로가 옆에 공손하게 서 있자, 늙은 농부는 자로를 자기 집에서 하룻밤 묵게 하고 닭과 기장밥을 대접하며 두 아들을 인사시켰다. 이튿날 자로는 공자를 만나 전 날의 일을 말했다. 공자가 ‘그는 은자이다’고 말하고 자로에게 다시 만나보라고 했으나, 도착해 보니 떠난 후였다.
장저와 걸닉, 접여와 늙은 농부가 은둔한 것은 천하에 도(道)가 없기 때문이었다. 공자 역시 천하에 도가 없어서 10여 년의 유세를 했다. 천하에 도가 펼쳐지지 않아 세상을 버린 사람이 은자라면, 천하에 도가 없기 때문에 천하주유를 한 사람이 공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은자들은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세상을 도피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공자는 천하에 도를 실천하기 위해 ‘세상에 뛰어 들어 가혹한 운명에 맞섰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공자의 위대함이 있다.
뒤에서만 떠드는 비겁한 지식인들에게
오랜만에 학계 사람들을 만났다. 다섯 명 모두 대학에서 교수를 하거나 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면서 서로의 근황에 대한 안부가 오고 간 뒤 얘기는 자연스럽게 사회 이슈로 넘어갔다.
그때부터 식사자리는 정부를 규탄하는 성토대회장으로 돌변했다. 모두들 투사라도 된 듯한 목소리로 현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부동산 문제부터 남북한 정책까지, 최저임금 문제부터 예멘 난민 문제까지 주제는 다양했고 분석은 예리했다.
한번 달아오른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2008년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데 정부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가 뽑은 대통령이 이럴 줄 몰랐다” “어떻게 노무현 정부 때 실패했던 정책을 똑같이 되풀이하느냐” “상위 1%의 부자를 잡기 위해 나머지 99%의 국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 등의 격앙된 목소리가 식사시간 내내 이어졌다.
하나의 이슈가 거론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는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같은 지식인들이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란 결론에 도달했고 내일이라도 당장 행동에 옮기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시국선언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어제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교수에게 전화를 했다. 잘 들어갔느냐는 인사와 함께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까를 물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우리가 당장 무엇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대답이었다.
시국선언은 못 하더라도 글이라도 써서 정부가 국민들의 뜻을 알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더니 더 참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글을 써 봤자 받아줄 매체도 없고, 정부가 귀를 닫고 있는데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학교 재단이나 연구소 소장 눈 밖에 나면 좋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누군가는 ‘찍히면’ 학술연구재단의 지원금을 받을 수 없다고 했고, 누군가는 외부 용역이 끊길 것을 걱정했다.
그들 모두 전날 밤의 얘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그날의 비분강개함은 허약한 지식인들이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데 그쳤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날의 모임이 계기가 되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식인의 정의, 지식인의 역할, 지식인의 책무 등등 지식인에 대한 논쟁은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그만큼 한 사회를 지탱하는 데 지식인의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논쟁을 정리하기 보다는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르게 살아간 세 사람의 예를 통해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황현(黃玹)
다음의 유서(遺書)는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1910년 경술국치에 맞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남긴 글이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하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황현(黃玹)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조정에 나아가 벼슬하지는 않았다. 과거제도의 부패상을 목격하고 출세를 포기한 후 고향인 전남 구례로 낙향하여 제자들을 길렀다.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는 얘기는 그가 나라의 녹봉을 받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그가 망국의 날을 맞아 한·일 강제병합 체결 16일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선비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선비 된 자의 의무를 그런 식으로 실천했다.
그는 자결하기에 앞서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겼는데 그중 세 번째 시에는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황현상(黃玹像)에는 우국지사의 꼿꼿함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조선시대 마지막 초상화가인 채용신은 인물을 잘 그려 고종의 어진(御眞)을 비롯해 최익현상(崔益鉉像), 전우상(田愚像), 운낭자상(雲娘子像) 등 수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황현상(黃玹像)은 채용신이 전신(傳神)의 천재라는 명성에 걸맞게 얼굴의 피부결을 극세필로 그린 육리문(肉理文)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다. 터럭 하나까지도 틀리게 않게 그리는 핍진(逼眞)함이 탁월한 수작이다.
초상화는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대변한다. 40대 이후의 얼굴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도 그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황현상(黃玹像)과 마주하는 순간 그의 강렬한 눈빛을 받아내기가 힘들 만큼 움찔하게 되는 것은, 입을 꼭 다문 채 말 없는 말로 우리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라고.
절명시는 대체로 암울한 시대에 쓰였다. 성삼문(成三問)과 이개(李塏)도 세조의 단종 폐위에 항거해 절명시를 썼고, 개혁을 추구하다 38세에 사약을 받은 조광조(趙光祖)도 절명시를 남겼다. 이들이 모두 왕의 뜻에 반해 의로움을 실천하다 강제로 죽임을 당해야 했다면 황현(黃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이 차이점이라 하겠다.
항거의 형태가 꼭 자결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황현(黃玹)이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무인(武人)이 아니라 평범한 지식인이자 선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절명이야말로 최고의 결단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라의 녹을 먹고서도 모자라 자진해서 나라를 팔아 먹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던 시대였다.
지금은 황현(黃玹)의 시대처럼 나라를 잃은 식민지 상태가 아니다. 그때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예를 들면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 문제가 불거졌을 때, 지식인들은 난민 수용을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서로 피켓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방관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난민 연구자들은 역사적으로 난민이 발생한 원인과 세계의 난민 현황을 다룬 글을 정리해서 발표해야 하고, 다른 나라의 난민 대체 사례 등을 첨가하여 우리는 어떤 식으로 난민대책을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연구자들과 지식인들이 나 몰라라 하고 입을 닫으니 황색언론과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사람들은 판단능력이 흐려져 포퓰리즘에 휩쓸리게 된다. 지식인들이 여전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을 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스티브 풀러는 ‘지식인: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살아남기’에서 “무슨 생각이든,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려고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꼭 유명한 매체가 아니라도, 또한 정부에서 귀를 닫고 있어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회의가 들어도 지식인은 자신의 소신을 발표할 의무가 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지식인이 목숨을 바쳐야 할 시대적 소명의식이고 의무감이다.
황현(黃玹)이 쓴 유서와 절명시도 유명한 매체가 아니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는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단순히 술자리의 안주로 젓가락질만 하다 끝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
엄광(嚴光)은 후한(後漢) 때의 인물이다. 그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한 친구였는데 유수가 황제로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은거(隱居)해 버렸다. 광무제가 엄광(嚴光)을 찾아내어 조정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다가 삼고초려 끝에 겨우 나왔다.
광무제는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회포를 나누다 함께 잠을 자게 되었는데 잠결에 엄광(嚴光)이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올려놓고 잤다. 다음 날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객성이 어좌(御座)를 범했습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광무제가 웃으면서 “짐이 엄광과 더불어 잤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다.
광무제는 엄광이 조정에 머물러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엄광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농사짓고 낚시질하며 숨어 살았다. 사람들은 엄광이 낚시질한 곳을 ‘엄릉여울(嚴陵瀨)’이라고 불렀다. ‘후한서(後漢書)’ 권83 ‘일민열전(逸民列傳) 엄광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후대의 시인과 화가들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의연하게 살다간 엄광(嚴光)의 삶을 동강수조(桐江垂釣), 동강조어(桐江釣魚), 엄릉거조(嚴陵去釣) 등의 제목으로 작품화했다. 작품 제목에 ‘동강(桐江)’이 들어간 이유는, 엄광이 낚시질하던 엄릉여울이 절강성 동려현(桐廬縣)에 있었기 때문이다.
후한의 황보밀(皇甫謐), 남송(南宋)의 대복고(戴復古) 등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엄광을 찬탄하는 시를 남겼다. 조선의 김홍도(金弘道)는 엄광이 낚시하는 장면을 소재로 ‘동강조어(東江釣魚)’라는 그림을 그렸다. ‘동강(桐江)’을 동음(同音)인 ‘동강(東江)’으로 표기한 것이 흥미롭다. ‘동강조어’는 그림 중간을 가위질하여 둘로 나눠도 될 만큼 화면의 중심에 넓은 공간을 배치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보다는 감춰지기를 원했던 엄광의 심정을 대변하고자 했을까.
엄광(嚴光)처럼 은거하는 사람을 은자(隱者)라고 한다. 은자는 은사(隱士) 또는 유인(幽人), 일민(逸民)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이름을 감추고 숨어 사는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죄를 지었거나 능력이 없어서 숨어 사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운 속세(塵世)를 피하기 위해 깊숙한 곳으로 숨는다.
은자는 흔히 옛 그림에서 어부(漁夫)나 초부(樵夫) 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고기와 낚싯대를 든 어부와 허리춤에 도끼를 찬 나무꾼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가 바로 은자들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부와 초부는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은자가 어부와 초부라는 신분으로 위장한 가어옹(假漁翁)이고 가초옹(假樵翁)이다. 무술영화에서 무공이 뛰어난 고단자들이 거지 행색을 하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콘셉트이다.
어부라고 해서 물론 전부 은자는 아니다. 어부 중에는 강태공(姜太公)도 있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을 알아봐줄 귀인을 기다리며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다 나이 70에 문왕(文王)을 도와 주(周)나라를 세우는 ‘브레인’ 역할을 했다. 같은 그림이라도 함부로 예단하지 말고 맥락을 잘 살펴봐야 한다.
엄광과 강태공 모두 어부는 어부로되 그들이 지향하는 세계는 정반대였다. 강태공이 현세적이었다면 엄광은 도가적(道家的)이었다. 노자(老子)가 “공(功)을 이루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얘기했듯 도가는 은자의 삶을 지향한다.
고시(古詩)에 ‘맑은 물에 귀 씻어 인간사 아니 듣고, 푸른 소나무 벗 삼고 사슴과 한 무리’라고 한 것처럼 은자의 최상의 즐거움은 유유자적함이다. 유유자적함은 티끌 세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청복(淸福)인 까닭에 속세를 등져도 일말의 미련도 갖지 않는다.
은자가 강호자연에서 사는 모습은 ‘뻐꾸기 은사’와는 전혀 다르다. 뻐꾸기 은사는 강호에 숨어 산다면서 말로만 은둔할 뿐 속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이비’를 지칭한다. 그들의 목적은 은둔이 아니라 숨어 사는 고고한 선비라는 ‘청명(淸名)’을 얻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대로 소문이 잘 나지 않자 스스로 소문을 내게 된다. 이것은 꼬마들이 술래잡기를 할 때 술래가 숨은 아이를 오랫동안 찾지 못하면 숨은 아이가 ‘뻐꾹’ 소리를 낸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내가 지금 여기 숨어 있으니 술래는 빨리 내가 숨어 있는 곳으로 오라는 소리다.
그와 같이 뻐꾸기 은사는 말로는 은둔한다고 하면서 행여 세상이 자신을 몰라줄까봐 안달이 난 모습이 마치 스스로 ‘뻐꾹’ 하고 외치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명(虛名)에 집착한 자들을 질타한 신랄한 풍자다.
엄광과 같은 ‘강호은둔학파’에 속한 사람 중 가장 큰 형님뻘에 속한 사람으로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를 들 수 있다.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요(堯) 임금 시절의 얘기다.
허유는 요(堯) 임금이 천하를 자신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자 기산(箕山)에 숨어버렸다. 다시 요 임금이 구주(九州)라도 맡아달라고 하자 이번에는 영수(潁水)에 가서 더러워진 귀를 씻었다. 마침 소부가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 영수에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귀를 씻는 이유를 물었다.
허유의 사연을 들은 소부는 갑자기 송아지를 이끌고 강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허유에게 소부가 한마디 했다. “그대가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내 어찌 송아지에게 먹일 수 있겠소.” 은자입네 하면서 소문을 퍼트린 허유의 속마음을 그대로 꿰뚫어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강호 은둔자의 절대고수라고 할 수 있다.
엄광이 물러나겠다고 하니 억지로 붙잡지 않고 보내준 광무제도 대단한 사람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광무제 같은 사람도 찾기 힘들다. 허명에 사로잡혀 뻐꾸기 소리를 내는 가짜 은자들도 문제지만, 누군가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하면 공부를 할 수 있게 가만 내버려두지를 않는 사회 분위기도 문제다.
공부할 사람은 공부할 수 있게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나도 이렇게 유명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깍두기로 끼워 넣으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은자를 은자로 살아가게 놓아두어야 광무제가 될 수 있다.
지식인이 글을 쓰고 강의하는 것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지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학교수는 수업시간 외에는 판판이 놀아도 되는 ‘놀고 먹는’ 직업이 아니다. 놀고 먹는 직업으로 대학교수를 하는 사람은 이미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다.
유명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모임에 안 나온다고 비난하는 대신 논문과 책이 안 나올 때 욕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학자나 교수들이 직무유기하는 대신 자신이 하는 일에 책임감을 느낀다.
은자는 출사(出仕)하지 않고 강호에 틀어박혀 몸을 맑게 한다. 시쳇말로 더러운 물에 발을 담그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은자와 뜻을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은자의 대척점에 공자(孔子)가 있다. 기원전 491년이었다.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섭(葉) 지역을 지나 채(蔡)나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공자가 고국인 노(魯)나라를 떠나 주유열국(周遊列國)을 시작한 지 6년째 되는 해였다.
황하(黃河)를 건널 수 있는 나루터를 찾다 밭을 갈고 있는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을 만났다. 공자는 제자 자로(子路)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어보게 하였다.
그러자 장저와 걸익은 자로에게 나루터를 알려주는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도도한 흙탕물이 바로 천하의 형국인데, 누구와 더불어 개혁할 수 있겠는가. 그대도 사람을 피하는 선비를 따르지 말고, 세상을 피한 선비를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고는 나루터를 알려주지는 않고 계속해서 밭을 갈았다.
이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자로문진(子路問津)’이다. ‘자로문진’은 ‘자로가 나루터를 묻다’란 뜻으로 조선 후기에 활동한 평양 출신 화가 김진여(金振汝)가 그린 ‘공자성적도(孔子聖蹟圖)’에 들어 있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생애를 여러 장의 그림으로 그린 화전(畵傳)으로 중국·한국·일본에서 지속적으로 그려졌다. ‘자로문진’은 ‘논어(論語)’ 미자(微子) 편에 나오는 내용인데 ‘공자성적도’의 한 장면으로 그려진 것은 물론 독립적인 주제로 그려질 만큼 인기 있는 소재였다.
도가 없으니까 은둔할 수 없다는 공자
표면적으로 보면 지나가던 사람이 나루터를 묻는 그림이지만 깊이 들어가보면 그 의미가 사뭇 깊다. 장저와 걸익으로 대표되는 도가(道家)와, 공자와 제자들로 상징되는 유가(儒家)가 맞부딪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장저와 걸익은 은자다. 그들은 ‘도도한 흙탕물이 천하의 형국’이라서 그런 세상을 피해 이름을 숨기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농부는 어부와 초부에 이어 세 번째 유형의 은자다. 여기서 ‘사람을 피한 선비’는 공자를, ‘세상을 피한 선비’는 걸익 자신을 지칭한다.
그들의 눈에 공자는 벼슬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가 나루터를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난세에 은거하지 않고 도를 행하겠다고 천하를 주유하는 공자’가 못마땅했기 때문이다. ‘논어’와 ‘사기세가(史記世家)’를 보면 장저와 걸익뿐 아니라 여러 명의 은자들이 공자를 비난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무엇 때문에 유랑생활을 계속했을까. 나루터를 가르쳐주는 대신 동문서답을 한 은자에게 공자가 한숨 쉬며 대답한 말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 “새나 짐승과 더불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사람 무리와 어울리지 않으면, 누구와 어울리랴. 세상에 도가 서 있다면, 내가 굳이 바꾸려 하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도 결코 세상을 피해 몸을 숨기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주희(朱熹)는 논어집주(論語集注)에서 ‘천하가 이미 태평성세라면 굳이 개혁할 필요도 없는데, 천하에 도가 없기 때문에 도로써 개혁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호(程顥)는 ‘성인은 감히 천하를 망각하는 마음을 지닐 수 없는지라, 그 말씀이 이와 같다’고 했고, 장재(張載)는 ‘성인은 어질어 천하를 무도하다고 단정하고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은자는 천하에 도가 없으니까 은둔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공자는 도가 없으므로 은둔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 자공(子貢)이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에 넣어 보관해두시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찾아 파시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상인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공자는 천하에 도모하지 못할 시절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공자는 벼슬하기를 바라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임관(任官)에 의한 부귀는 공자의 목적이 아니었다. 공자의 목적은 오직 ‘제인(濟人)’, 난세에 태어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벼슬을 해도 되면 하고, 도에 의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그만두었다.
55세에 길을 나선 공자는 도를 행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주유열국을 계속했고, 14년 후 68세가 되어서야 노나라에 귀국했다. 공자의 뒤를 이은 맹자(孟子)도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듯 유가(儒家)들은 모두 출사(出仕)에 적극적이었다.
누구는 은자로 살아 존경을 받았고 누군가는 은자로 살아 손가락질을 받았다. 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은자냐 유가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비판정신과 책임감을 지닌 자
몇 해 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이 출판되었다. 뒤이어 종편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 방송되었다. ‘지대넓얕’과 ‘알쓸신잡’ 모두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지대넓얕’의 서론에 보면 ‘교양과 인문학으로서의 넓고 얕은 지식이 우리를 심오한 어른들의 대화 놀이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고 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교양과 인문학에 대해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문제는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조차 교양과 인문학 차원의 지식 수준에 멈추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미래를 준비해야 할 지식인들이 자신의 전문지식을 사회에 환원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지대넓얕’을 아는 것에 만족한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현실이다.
노암 촘스키는 ‘지식인의 책무’에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적합한 대중에게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지식인에게 주어진 도덕적 과제’라고 정의하면서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는 이유는 교화의 목적도 있지만 ‘인간적 의미를 갖는 행동을 촉구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지식인이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담론에 참여하며 담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준비하고 숙성시켜야 하겠는가.
상황이 이러할진대 ‘지대넓얕’을 비싼 가격에 팔아보겠다고 선거 때마다 선거운동 캠프로 달려가 줄을 서는 지식인들이 수백 명씩 되는 상황은 더더욱 슬픈 현실이다. 자신의 학문세계가 얄팍하니 행여 정치판이라도 기웃거려 ‘아웃사이더’의 열등감을 만회해보겠다는 심산이 아닐까.
예전에 어느 모임에서 내가 허유와 소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어떤 교수가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소부가 송아지를 끌고 가버린 이유가 혹시, 요 임금이 자기는 ‘콜’하지 않고 허유만 캐스팅하려고 하니까 부아가 치밀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지식인들은 이제 더 이상 ‘지대넓얕’으로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행위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 대신 부당한 현실에 침묵하는 대신 자신의 전문지식을 살려 비판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여림심연(如臨深淵)하며 여리박빙(如履薄氷)해야 한다.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말인데 ‘심연에 임하여 살얼음을 밟는 것처럼 전전긍긍하라’는 뜻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안다고 해서, 가방끈이 조금 더 길다고 해서 우쭐대거나 거드름 피우는 대신 자신의 이론이 맞는지, 오류는 없는지, 끊임없이 묻고 검증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본분이고 지식인이 있어야 할 환지본처(還至本處)다.
세계 역사를 살펴볼 때 히틀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모든 독재자들 곁에는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해 준 어용 지식인들이 있었다. 지식인이 환지본처를 하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결과다.
물론 지금도 우리 사회에는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지식인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술자리에서만 목소리를 높이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유행가 가사의 주인공처럼 사는 ‘뻐꾸기 지식인’ 대신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자신의 삶으로 녹여내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우리 사회가 삐꺼덕거리면서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지식인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느냐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조선 중기의 문신 간이(簡易) 최립(崔岦)은 ‘김수재가 화답한 시에 회답하다(回金秀才和章)’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다 함께 목욕하며 발가벗었다 욕을 하고/ 바보에게 꿈 이야기 해준 것도 진실로 믿는 세상/ 작은 재주에 천착하며 자랑하지 않으면/ 필시 조장하는 송나라 사람들뿐인데/ 나 역시 잘하는 게 무엇이 있으리요/ 단지 그들과 같은 것이 부끄러울 뿐이로세’.
▶️ 子(아들 자)는 ❶상형문자로 어린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아들을 뜻한다. 지금의 子(자)라는 글자는 여러 가지 글자가 합쳐져 하나가 된 듯하다. 지지(地支)의 첫째인 子와 지지(地支)의 여섯째인 巳(사)와 자손의 뜻이나 사람의 신분이나 호칭 따위에 쓰인 子가 합침이다. 음(音)을 빌어 십이지(十二支)의 첫째 글자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子자는 '아들'이나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子자는 포대기에 싸여있는 아이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양팔과 머리만이 그려져 있다. 고대에는 子자가 '아이'나 '자식'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중국이 부계사회로 전환된 이후부터는 '남자 아이'를 뜻하게 되었고 후에 '자식'이나 '사람', '당신'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다. 그래서 子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아이'나 '사람'이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子(자)는 (1)아주 작은 것을 나타내는 접미어 (2)신문(新聞), 잡지(雜誌) 따위 간행물(刊行物)의 어느 난을 맡은 기자(記者)가 자칭(自稱)할 때 쓰는 말 (3)십이지(十二支)의 첫째 쥐를 상징함 (4)자방(子方) (5)자시(子時) (6)글체에서, 그대의 뜻으로 쓰이는 구투(舊套) (7)글체에서, 아들의 뜻으로 쓰이는 말 (8)민법상에 있어서는 적출자(嫡出子), 서자(庶子), 사생자, 양자(養子)의 통틀어 일컬음 (9)공자(孔子)의 높임말 (10)성도(聖道)를 전하는 사람이나 또는 일가(一家)의 학설을 세운 사람의 높임말, 또는 그 사람들이 자기의 학설을 말한 책 (11)자작(子爵) 등의 뜻으로 ①아들 ②자식(子息) ③첫째 지지(地支) ④남자(男子) ⑤사람 ⑥당신(當身) ⑦경칭(敬稱) ⑧스승 ⑨열매 ⑩이자(利子) ⑪작위(爵位)의 이름 ⑫접미사(接尾辭) ⑬어조사(語助辭) ⑭번식하다 ⑮양자로 삼다 ⑯어리다 ⑰사랑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여자 녀/여(女), 어머니 모(母), 아버지 부(父)이다. 용례로는 아들과 딸의 높임말을 자녀(子女), 며느리 또는 아들의 아내를 자부(子婦), 아들과 사위를 자서(子壻), 아들과 손자 또는 후손을 자손(子孫), 아들과 딸의 총칭을 자식(子息), 남의 아들의 높임말을 자제(子弟), 십이시의 첫째 시를 자시(子時), 밤 12시를 자정(子正), 새끼 고양이를 자묘(子猫), 다른 나라의 법률을 이어받거나 본떠서 만든 법률을 자법(子法), 모선에 딸린 배를 자선(子船), 자손의 여러 대나 자손의 끝까지 또는 대대 손손을 일컫는 말을 자자손손(子子孫孫), 자자손손의 썩 많은 세대를 자손만대(子孫萬代),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는 뜻으로 부자지간의 천륜을 이르는 말을 자위부은(子爲父隱), 융통성이 없고 임기응변할 줄 모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막집중(子莫執中),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을 일컫는 말을 자모지심(子母之心), 듣고 본 것이 아주 좁고 고루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자성제인(子誠齊人), 자식은 아비를 위해 아비의 나쁜 것을 숨긴다는 말을 자위부은(子爲父隱), 공자가 구슬을 꿴다는 뜻으로 어진 사람도 남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말을 공자천주(孔子穿珠), 묵자가 실을 보고 울었다는 뜻으로 사람은 습관이나 환경에 따라 그 성품이 착해지기도 악해지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죽은 자식 나이 세기라는 뜻으로 이미 지나간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며 애석하게 여김을 일컫는 말을 망자계치(亡子計齒),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로워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성스러워야 함을 이르는 말을 부자자효(父慈子孝) 등에 쓰인다.
▶️ 路(길 로/노, 울짱 락/낙)는 ❶회의문자로 저마다 각각(各) 발로(足) 걸어 다니는 곳이라는 데서 길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路자는 '길'이나 '도로'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路자는 足(발 족)자와 各(각각 각)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各자는 발이 입구에 도달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各자의 본래 의미는 '오다'나 '도착하다'였다. 반면 足자는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두 글자를 결합하면 '오고 가다'라는 뜻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路자는 통행이 빈번한 길이나 도로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路(로)는 성(性)의 하나로 ①길, 통행(通行), 도로(道路) ②도리(道理), 도의(道義) ③방도(方道), 방법 ④사물의 조리(條理) ⑤중요한 자리 ⑥지위(地位), 요처(要處) ⑦길손, 나그넷길 ⑧거쳐 가는 길 ⑨수레 ⑩모(물건의 거죽으로 쑥 나온 귀퉁이) ⑪행정구획의 이름 ⑫크다 ⑬드러나다 ⑭고달프다, 피로하다 ⑮쇠망하다 ⑯모지다(모양이 둥글지 않고 모가 나 있다) ⑰길을 가다 ⑱바르다 그리고 ⓐ울짱, 울타리(락) ⓑ즐기다(락)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길 도(塗)이다. 용례로는 버스나 기차가 정해 놓고 다니도록 되어 있는 길을 노선(路線), 거쳐 가는 길이나 과정을 노정(路程), 길바닥 또는 길 가는 도중을 노상(路上), 여관을 노실(路室), 길바닥 또는 길의 바닥 표면을 노면(路面), 여행의 비용을 노용(路用), 먼길에 지치고 시달리어 생긴 피로나 병을 노독(路毒), 길 옆이나 길의 옆을 노방(路傍), 먼 길을 가고 오고 하는데 드는 돈을 노자(路資), 내왕하는 길의 과정을 노중(路中), 길의 경로를 노차(路次), 도로나 철로의 바탕이 되는 땅바닥을 노반(路盤), 길의 양쪽 가장자리를 노변(路邊), 길의 너비를 노폭(路幅), 길이 갈리는 곳 또는 갈림길을 노기(路岐), 앞으로 나아가는 길 또는 나아갈 길을 진로(進路), 통행하는 길을 통로(通路), 사람이나 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든 길을 도로(道路), 여러 갈래로 갈린 길로 갈림길을 기로(岐路), 돌아오거나 돌아가는 길을 귀로(歸路), 여행하며 다니는 길을 여로(旅路), 도덕적으로 그릇되고 옳지 못한 길을 사로(邪路), 살아 나갈 길이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길을 활로(活路), 갈피를 잡을수 없는 길을 미로(迷路), 배가 다니는 길 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하늘의 길을 항로(航路), 기차나 전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레일 길을 선로(線路), 물을 보내는 통로를 수로(水路), 지나가는 길이나 밟아 온 순서를 경로(經路), 좁고 험한 길 또는 일의 진행을 방해하는 장애를 애로(隘路), 길가에서 사람을 협박하여 재물 따위를 빼앗는 짓을 이르는 말을 노상강도(路上强盜), 백성이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는다는 뜻으로 나라가 평화롭고 모든 백성이 매우 정직한 모양을 이르는 말을 노불습유(路不拾遺), 길 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다는 뜻으로 기생을 의미하여 일컫는 말을 노류장화(路柳墻花), 경쾌한 수레를 타고 익숙한 길을 간다는 뜻으로 일에 숙달되어 조금도 막힘이 없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경거숙로(輕車熟路), 한 길로 곧장 거침없이 나아감을 일컫는 말을 일로매진(一路邁進), 높낮이가 없이 평탄하고 넓은 길이라는 뜻으로 앞이 환히 트여 순탄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태를 이르는 말을 탄탄대로(坦坦大路), 길에서 만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행로지인(行路之人) 등에 쓰인다.
▶️ 問(물을 문)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입 구(口; 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門(문; 출입구)으로 이루어졌다. 말이 나는 곳, 남의 안부를 묻거나 죄인에게 따져 묻는 일을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問자는 '묻다'나 '방문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問자는 門(문 문)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門자는 양쪽으로 여닫는 문을 그린 것으로 '문'이나 '출입구'라는 뜻이 있다. 問자는 이렇게 문을 그린 門자에 口자를 더한 것으로 남의 집을 방문해 질문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외에도 외부소식은 문을 통해 들어온다 하여 '알리다', '소식'과 같은 뜻도 파생되어 있다. 그래서 問(문)은 (1)물음. 질문(質問) (2)옛날, 경서의 뜻 따위를 구술 시험(試驗)으로 묻는 문제(問題) 등의 뜻으로 ①묻다 ②문초(問招)하다 ③방문(訪問)하다 ④찾다 ⑤알리다 ⑥부르다 ⑦소식(消息) ⑧물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물을 자(咨), 물을 신(訊), 물을 순(詢), 물을 추(諏), 물을 자(諮)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대답 답(畣), 대답 답(答)이다. 용례로는 남의 상사에 대하여 슬픈 뜻을 나타냄을 문상(問喪), 웃어른에게 안부를 여쭘을 문안(問安), 남에게서 글자를 배움을 문자(問字), 모르는 것을 알려고 물음을 문구(問求), 서로 묻고 대답하고 함을 문답(問答)예절을 물음을 문례(問禮), 앓는 사람을 찾아보고 위로함을 문병(問病), 죄를 지은 사람이 죄의 사실을 진술하도록 하는 심문을 문초(問招), 물어서 의논함을 문의(問議), 대답이나 해답 따위를 얻으려고 낸 물음을 문제(問題), 잘못을 캐묻고 꾸짖음을 문책(問責),묻는 항목을 문항(問項), 의심하여 물음을 의문(疑問), 남을 찾아가 봄을 방문(訪問), 의문이나 이유를 캐 물음을 질문(質問),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문(學問), 캐어 물음이나 따져서 물음을 신문(訊問), 일일이 따져 물음을 심문(審問), 상대방의 말을 되받아 묻는 것을 반문(反問), 문제나 물음을 냄 또는 그 문제를 설문(設問), 잘못된 점을 따져 물음을 힐문(詰問), 캐묻지 아니함을 불문(不問), 동쪽을 묻는 데 서쪽을 대답한다는 뜻으로 묻는 말에 대하여 아주 딴판인 엉뚱한 대답을 일컫는 말을 문동답서(問東答西), 병든 데를 찔러 보는 침이라는 뜻으로 어떤 일을 시험으로 미리 검사하여 봄을 이르는 말을 문안침(問安鍼), 정의 경중을 묻는다는 뜻으로 천하를 빼앗으려는 속셈이나 남의 실력을 의심하는 행위에 비유하는 말을 문정경중(問鼎輕重), 묻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가히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불문가지(不問可知), 지위나 학식이나 나이 따위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함을 두고 이르는 말을 불치하문(不恥下問), 동쪽을 묻는 데 서쪽을 대답한다는 뜻으로 묻는 말에 대하여 전혀 엉뚱한 대답을 일컫는 말을 동문서답(東問西答), 굽음과 곧음을 묻지 않는다는 뜻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일을 처리함 또는 잘잘못을 묻지 않고 함부로 행함을 일컫는 말을 불문곡직(不問曲直), 농사일은 머슴에게 물어야 한다는 뜻으로 일은 항상 그 부문의 전문가와 상의하여 행해야 한다는 말을 경당문노(耕當問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한다는 뜻으로 마음속으로 대화함을 이르는 말을 자문자답(自問自答), 어리석은 질문에 어리석은 대답 또는 우문은 자기의 질문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을 우문우답(愚問愚答) 등에 쓰인다.
▶️ 津(나루 진)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과 함께 '나아가다'의 뜻(進)을 나타내기 위한 聿(율, 진)로 이루어졌다. 강의 배가 떠나는 곳의 뜻으로 '나루터'를 말한다. 그래서 津(진)은 (1)풀이나 나무 따위 껍질 등에서 분비(分泌)되는 끈끈한 물질 (2)김이나 연기(煙氣), 또는 눅눅한 기운(氣運)이 서려서 생기는 끈끈한 물질 등의 뜻으로 ①나루, 나루터 ②언덕, 물가(물이 있는 곳의 가장자리), 강기슭 ③연줄, 인연(因緣) ④진액(津液), 침, 땀 ⑤직위(職位), 지위(地位) ⑥은하(銀河) ⑦경로(經路), 수단(手段) ⑧넘치다 ⑨윤택하다(潤澤--) ⑩전하다(傳--), 전수하다(傳授--)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나루터를 달리 이르는 말을 진안(津岸), 나룻터를 달리 이르는 말을 진역(津驛), 나룻터를 달리 이르는 말을 진하(津河), 나룻터로 나룻배가 닿고 떠나는 일정한 곳을 진구(津口), 나루터와 다리라는 뜻으로 물을 건널 수 있는 시설을 이르는 말을 진량(津梁), 생물의 몸 안이나 줄기나 뿌리나 열매 등의 안에 생명 현상으로서 생기거나 흐르는 액체를 진액(津液), 항구를 달리 이르는 말을 항진(港津), 하천가에 있는 작은 항구를 일컫는 말을 하진(河津), 소나무와 잣나무 따위의 줄기에서 내솟는 끈끈한 액체를 송진(松津), 흥미가 넘칠 만큼 많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흥미진진(興味津津), 길을 헤매는 나루의 훌륭한 배라는 뜻으로 삶에 가르침을 주는 책을 이르는 말을 미진보벌(迷津寶筏)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