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학교 자유학기제
엊그제 상강 절기가 지난 시월 하순 금요일이다. 새벽녘 잠을 깨 도서관에서 빌려다 둔 책을 펼쳐 읽으며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아온 아침 식후 등산화를 신고 스틱을 챙겨 들었다. 길을 나설 행선지가 천주산 꼭뒤 임도였기에 등산화를 갖춰 신고 스틱을 손에 쥐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버스 정류소로 나가 동정동으로 나가 거기서 북면 온천장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학생들 등교나 일반인의 출근보다 이른 시각이어선지 교통 흐름이 순조로워 천주암 아래에 내렸을 때가 8시 이전이었다. 비탈진 길을 따라 천주암에 이르러 창원 시가지를 굽어봤다. 주거지 아파트단지와 상업 업무지역의 높은 빌딩은 엷게 낀 운무가 가려 흑백의 실루엣으로 드러났다. 법당이 올려다보인 축대 아래 샘물을 한 바가지 떠 마시고 계단을 따라 법당 앞에서 손을 모았다.
절 경내를 벗어나 천태샘으로 오르니 산행객이 드물게 다녔다. 산 중턱이지만 샘물이 비교적 많이 솟는 천태샘의 물도 한 모금 받아마셨다.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날이 아님에도 샘터를 지날 때마다 그곳 샘물을 받아먹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음식 섭취에서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듯, 식수 음용에서는 ‘신수불이(身水不二)’라 생각한다. 우리 몸은 제 고장의 물과 하나여야 한다.
천주산 정상으로 오르려면 비탈을 올라 숨을 고르는 쉼터를 만남의 광장이라 불렀다. 창원에 사는 이들에게는 만남의 광장이 세 군데라 그때마다 앞에 관형어를 붙여야 헷갈리지 않는다. 빈도가 높고 일반적 경우는 종합운동장 광장을 만남의 광장이라 부른다. 도계광장에서 부산으로 가는 국도변 버스 정류소는 도계동 만남의 광장이다. 그리고 천주산 고갯마루에 만남의 광장이 있다.
내가 천주암을 오를 때는 천주산 정상으로 가지 않고 산허리 임도를 걷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천주산은 비탈이 가파를뿐더러 공연히 무릎에 무리가 가는 듯해 꼭뒤로 난 임도를 따라 달천계곡으로 내려서든가 함안 경계 고개에서 칠원 산정마을로 가기 일쑤였다. 이번에는 산허리 임도를 따라 고개에서 길고 긴 임도를 따라 걸으면서 가을을 장식하고 있을 야생화를 탐방하고 싶었다.
북향 임도를 따라 걸으면서 약수터에 오르기까지 본 몇 가지 야생화 사진과 문자를 보냈는데 회신이 닿았다. 예전 근무지에서 알게 된 지기는 퇴직 후 대학 평생 강좌에서 중국어를 공부하는 듯했다. 며칠 아침 산책을 나가지 않다가 시험을 마친 오늘 아침에 바깥으로 나갔더니 쌀쌀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 무슨 시험을 준비했느냐고 되물었더니 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한다고 했다.
지기에게 한 번 더 문자로 답을 보내길 나도 학생 신분인데, 이곳 자연학교는 자유학기제라 시험 없이도 매 학기를 잘 넘긴다고 했다. 설사 자연학교에서 시험을 치른다고 해도 걱정이 없다. 시험 문제도 내가 내고, 채점도 내가 하기에 어느 누구로부터 간섭이나 통제받을 일이 없다. 꽃향유 향기가 짙은 임도를 걸으면서 가로수로 자란 벚나무는 낙엽이 모두 져서 나목이 되어갔다.
함안 경계 고개 쉼터에서 배낭에 넣어간 커피와 삶은 고구마를 꺼내 먹은 뒤 칠원 산정마을로 가는 임도로 들어섰다. 길섶에는 지천으로 핀 쑥부쟁이꽃이 절정이었다. 아까 고개로 오르면서 봤던 꽃향유도 쑥부쟁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만발한 쑥부쟁이꽃과 꽃향유의 열병을 받으면서 내리막길을 따라 골짜기로 내려서니 노란 꽃잎의 이고들빼기와 산국꽃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인적 없는 골짜기 맞은편은 천주산이 호연봉으로 뻗친 산등선은 북향 응달이라 단풍이 먼저 물들어갔다. 계곡에는 지난여름 사방공사로 만든 커다란 구조물은 댐처럼 내려다보였다. 골짜기를 빠져나간 무덤가는 후손이 벌초를 다녀간 이후 새로 돋은 구절초 움이 잎줄기를 키워 하얀 꽃을 피웠다. 칠원 무기마을에 딸린 깊숙한 산중의 산정마을에 닿아 시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23.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