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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키시마호 폭침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원문보기 글쓴이: 홍화평
해군특설수송함 우키시마호 출항지
(위)일본 해군 군부의 “조선인긴급소개조치”로 멀리 정박해 있는 우키시마호에 타려고 오미나토항 기구치잔교와 그 주변에서 거룻배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일본 현지인의 증언에 의함) 조선인들이 마지막 발자취를 남긴 이곳에서 해군의 통제 아래 거룻배가 오가며 태우는데 3일이 걸렸다. 당년 8월19일부터 승선을 시작하여 21일 승선이 끝났으나 당일 출항하지 아니하고 하루를 지연하고 22일 밤 10시 출항했다.
(아래)오미나토해군특설수송함 우키시마호(4,730톤)는 종전 이후로 1주일 뒤인 1945년 8월22일 오후 10시쯤 오미나토항을 출항했다. 승선한 사람은 시모키타, 우에키타, 홋카이도에서 일하던 조선인 3,735명과 선착장에서 조선인을 승선시킨 일본해군 소속 군인 225명이었다. 목적은 조선인을 고국으로 귀환시키려고 부산항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연안을 따라 남하하던 도중에 미군사령부의 지령에 따라 항로를 변경하여 마이즈루만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1945년 8월24일 오후 5시20분쯤이었다. 그날 마이즈루만은 파도가 고요하고 평온했지만 도오시마와 헤비지마 사이에서 돌연히 대폭발을 일으키며 침몰하여 조선인 524명과 해군승조원 25명이 사망했다. 너무나도 비통한 영혼의 극치였다. 사건을 목격한 마이즈루 시모사바가 사람들은 자가용 배를 몰고나가 구조에 나서 많은 사람을 구조했다. 1978년 8월24일 마이즈루시 유지들이 힘을 모아 침몰지점에서 약 3백미터 떨어진 시모사바가 해변에 『우키시마호순난자추모비』를 세워 매년 8월24일에 위령제를 지낸다. 무츠시에서도 시민과 유지들이 『우키시마호출항추모집회실행위원회』를 결성하여 1994년 8월22일 우키시마호 출항지점에 있는 중앙공민관에서 제1회 『우키시마호출항추모집회』를 열고 조난자 추도•위령과 잊어서는 안 될 시모키타의 현대사를 후세에 전하기를 맹세했다. 그 후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8월22일에 집회를 열어 우키시마호사건이 풍화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해군 특설수송함 우키시마호 출항지기념비를 건립했다. —2012년 6월22일 『해군 특설수송함 우키시마호 출항지기념비』건립회 대표 사이토 사쿠지<(前)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 소장>
다음은 사진들은
일본으로 강제징용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하려고 우키시마호에 탔다가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만에서 폭파침물당할 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신 분들이 증언하였고,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일대를
조사하고 현지 주민이 증언한 군사시설 공사현장입니다.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일대 조선인 강제노동현장>
①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 제공: 충남 공주군, 청양군, 전북 진안군 지역에서 강제징용된 사람들이 닦은 가바야마비행장 활주로. 일제 패전 직후에는 아이들이 놀이삼아 드나들었으나 즉시 출입금지구역으로 통제하였다. ②지금은 가바야마비행장을 일본해상자위대 오미나토통신대 가바야마송신소로 쓰고 있다. ③충청북도 영동군, 충주시 일대에서 연행된 조선인들이 일했던 아오모리현 미사와비행장의 1993년 모습. 이 비행장의 활주로와 격납고와 평탄한 대지는 과거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손으로 완공되었다. 최첨단 전자통신장비를 갖춘 두개의 흰색돔(코끼리우리)이 있고 막 착륙을 시도하고 있는 항공기는 언제든지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대잠수함초계기 P3C 아니면 C130 허큐리스 수송기로 보인다. ④미사와비행장의 2019년 모습. 이 비행장은 미일합동군사훈련장으로 쓰고 있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감소시키려고 민항기를 취항시켰으나 탑승객이 없어 애초 운항횟수를 줄였다.<촬영: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전재진> ⑤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 제공: 오미나토 해군요항부 청사. ⑥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 제공: 아오모리헌병대 오미나토분견소.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일대 조선인 강제노동현장>
①오마철도 구간 가운데 가장 참혹했던 것으로 알려진 키노푸터널. 입구에 세워진 교각의 높이로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입구는 폐쇄되었고 가파른 절벽이라서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②노반 유적. ③키노푸터널 공사장에 투입되었던 조선인들의 숙소가 있었던 해변마을. 이 터널공사는 세자키조가 맡았는데 타코방식 운영으로 임금갈취는 물론 의식주가 노예 이상이었다고 현지인들이 증언한다. ④키노푸터널 입구와 연결된 축대로 1943년 당시에 바다에서 바위를 깨 날라 축조한 것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⑤키노푸터널 옆 마을을 통과하는 터널의 입구를 일본 정부가 콘크리트로 완벽하게 봉쇄했다. 봉쇄한 이유는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단다. 다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터널공사에 투입되었던 사람들을 생매장했다거나 황금백합작전으로 약탈한 황실의 보물들을 넣어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⑥키노푸터널 공사장에서 탈출한 청년이 잡혀 들어와 감독실에서 고문 끝에 장작불에 익어 죽었다고 현지인들이 필자에게 증언한 것을 근거로 진상규명회측에서 제작했다. 타코방이란 문어를 항아리에 가둬두면 배가 고파 제 다리를 뜯어 먹는다는 데서 비롯된 말로 조선인에게 죽어라 일을 시키고도,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고, 옷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촬영:전재진)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일대 조선인 강제노동현장>
①오마철도구간의 일부인 야케야마터널. 터널입구에는 연합군의 기총사격을 받은 탄흔을 관찰할 수 있으며 내부에 철로는 깔리지 않았다. 탐방객과 조사자들의 항의에 못 이겨 이곳 터널 입구는 개방하였으나 2008년경에 흙으로 완전히 폐쇄했다.(촬영:전재진) ②야케야마터널 안에서 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 사이토 사쿠지 소장이 한국에서 간 조사자들에게 터널축조 당시의 참상을 설명하는 장면. 사이토 소장은 터널벽을 비파괴엑스레이 촬영하여 공사 당시 죽어 던져 넣은 조선인의 시체를 조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③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오마철도 구간을 조사하는 한국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조사단 일행. (촬영: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④시모후로 해안마을을 통과하는 오마철도 노반시설인 니마이바시 교량이 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있다.(촬영:전재진) ⑤해안마을의 강제노동현장을 조사하는 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측과 한국의 진상규명회 회원들.(촬영: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 ⑥시모후로 해안마을 산기슭에 있는 당시 조선인 숙소. 일본인들은 이를 바라크(판잣집)라고 부른다.(촬영: 전재진)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일대 조선인 강제노동현장>
일본 아모모리현 무츠시와 인접한 가마부세산. 참호와 지하군수공장은 오상필씨의 증언과 일치한다. 시모키타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뒤에는 5개의 봉우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오소레산(공포의산)이 있다. 이 산은 1945년부터 2016년 현재까지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아마도 벌집처럼 쑤셔놓은 유적과 더불어 즐비한 지하군수공장과 참호 그리고 곳곳에 버려있을 한국인 유해들 때문으로 생각된다. 사진에 보는 군사시설은 한국인의 고난으로 만들어졌다. 강용섭씨가 그 장본인이다. 특히 도-크 공사장과 기뢰공장 옆에는 잿더미가 있었는데 그 잿더미는 한국인을 태워 덮어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제공: 마이즈루우키시마호사건진상구명회 리병만 회장)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일대 조선인 강제노동현장>
①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무츠시 하치노헤八戶시 카부시마蕪島와 시모키타군 카자마우라 면面의 카부도사키甲崎 해안 암벽을 뚫어 시설한 인공굴로 돌격용함정 신요(震洋)를 감춰두는 시설이다. 우키시마호폭침 당시 생존자 최석준씨는 오미나토에서 이 신요를 조종하는 훈련을 받았다. 신요는 앞부분에 강력한 폭탄을 장치하고 적 함대로 돌진하여 부딪쳐 함대를 공격하는 전술이다. 진주만 공격 때 가미가제 공격과 같은 이치이다. ②제주도 송악산 해안가에 뚫은 인공굴. 일본 본토와 똑같은 전략공법이다. ③오마철도 공사장 ④2만톤급 전함이 접안할 수 있는 도-크. ⑤일본통운주식회사 오미나토 거점지 오미나토항 군수품수송선 접안시설. ⑥접안시설 옆 군수품 저장창고. 충남 천안에서 징용된 사람들이 일한 곳이다. 이 창고에 보관되는 군수품은 시모키타 지역에도 보급되었지만 오마철도를 통해 오마자키에서 다시 배로 하코다테 해군기지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오마철도는 완공되지 못한 채 패전을 맞게 되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조선청년.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니마이바시二枚橋교량: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시모후로下風呂마을을 통과하는 오마철도 구간의 협곡 사이를 잇는 교량으로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콘크리트만으로 축조했다. 거푸집를 만들고 순전히 등짐으로 메 날라 부었다. 바닷가에서 바위를 깨 나르고, 자갈과 모래와 시멘트를 이겨 등짐으로 나르는 일을 조선인이 다 했다. 이 계곡물은 평소에 마을 사람들이 빨래하고 세수하고 밥을 짓는데 사용하던 물이었다. 어느 날 공사장에서 일하던 조선 청년이 행방불명되었다. 힘들고 배고픔에 못 이겨 뒷산으로 탈출한 것이 분명했다. 현장감독들이 몇 날을 찾았으나 여름철이라서 숲이 우거져 청년을 찾지 못했다. 탈출자를 잡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현장감독들이 질책을 받을 큰 사건이었다. 보름쯤 지났을 때 마을 사람이 이 계곡물을 따라 올라갔는데 웬 뼈만 남은 시신이 개울에 잠겨 있었다. 여름철이라서 살이 쉽게 부패되어 흐르는 물에 씻겨내려 가 뼈만 앙상하게 남았었단다. 마을 사람들은 “송장 썩은 물을 마시고 살았다.”일대 소동이 일어났단다. 그 청년의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조선 청년이라는 것쯤으로만 마을 사람들의 증언으로 확인되었다.
《우키시마호 침몰 지점-현장 사람들의 증언》
①마이즈루만 연안(인터넷 추출) ②침몰지점. 마이즈루만은 수 천 명을 삼켜버린 그 날의 참상을 잊었는지 고즈넉한 모습으로 어촌마을의 양식장만 즐비하다.(촬영:전재진 1998. 2. 20) ③침몰한 우키시마호. 일본 교토부 마이즈루시 앞바다 마이즈루만. 우키시마호는 도시마(왼쪽)와 헤비지마(오른쪽) 사이에서 멈춰 서서 함장을 비롯해서 해군승무원들이 모선을 다 빠져 나간 직후에 배가 폭파되었다.(사진제공:마이즈루우키시마호사건진상구명회 리병만 회장) ④마이즈루만 시모사바가 희생자추모비 앞에서 침몰지점에 대해 설명하는 리병만李秉萬회장. ⑤우키시마호가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침몰할 때 근처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다가 맨 먼저 목격하고 구조에 나섰다는 미시마 게이코三島惠子씨가 당시 상황을 증언함. ⑥우키시마호희생자추도하는회 사무국장 스나가 야스로須永安郞씨가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증언함. ⑦마이즈루시와 마이즈루만 일대 조선인 강제노동현장을 필자와 탐방하며 설명하고 증언하는 교토조선인역사연구회 류구채柳求采 회장.
<일본 아오모리현 미사와비행장조선인 강제노동현장>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연행된 조선인들이 일했던 아오모리현 미사와비행장의 최근 모습. 이 비행장의 활주로와 격납고와 평탄한 대지는 과거 태평양전쟁 당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손으로 거의 다 완공되었다. 이 미사와바행장에서는 조선인 3천명이 일했다.(증언23 이쾌영) 한세열씨는 그 가운데 식당에서 일했다. 최첨단 전자통신장비를 갖춘 두개의 흰색돔(코끼리우리)이 있고 막 착륙을 시도하고 있는 항공기는 언제든지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대잠수함초계기 P3C 아니면 C130 허큐리스 수송기로 보인다. 지금도(1995년 현재) F16 전투기에 폭탄을 장착하고 덴모리사폭장에서 사폭훈련을 하고 있다. <촬영: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전재진>
<제주도 일대에 설치한 일본군 군사시설 조선인 강제노동현장>
일본제국 일왕 히로히토의 부하들이 1926년부터 제주도민과 조선 본토에서 강제징용하여 설치한 대륙침략용 군사시설. ①알뜨르 들녘 전투기격납고.②수월봉 해안초소. ③단산 바위굴 포대진지.④,⑤가마오름 땅굴진지.⑥알뜨르 들녘 지하벙커. ⑦송악산 해안절벽 바위굴. ⑧,⑨송악산 해안절벽 바위굴 내부(돌격용특수함정(震洋) 격납고). 이 시설은 일본이 중국과 동남아를 침략할 전략으로 1926년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사진제공: 제주평화박물관 이영근 前관장)
《일본 본토 아오모리현 시모키타 지역보다 먼저 공사가 시작된 제주도》
①일본으로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이 미사와비행장, 가바야마비행장, 오미나토비행장의 활주로와 격납고와 지하무기저장고 등을 만들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이 보다 훨씬 앞선 1926년부터 활주로, 격납고, 땅굴진지, 박격포진지 공사가 시작되었다. 일본해군 전투기 제로셍을 실물크기로 제작하여 격납고에 넣었다. 이곳을 찾은 탐방객들이 이 공사장에서 희생된 제주도민의 넋을 기리는 리본을 달았다. ②알뜨르 너른 벌판에 만들어진 격납고는 일본에서 날아온 전투기가 직접 날아 들어가도록 본토의 큐슈지방을 향하고 있다. 일본과 제주도에서 같은 방식으로 격납고를 만들었다.
▶알뜨르비행장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제주시 대정읍 상모리 아래쪽의 너른 벌판에 제주도민을 강제징용하여 건설한 일본 해군 전용비행장이다. 1937년 중일전쟁을 조작하여 발발시킨 일본은 이 비행장을 전초기지로 삼아 약 700km 떨어진 중국의 난징을 공격하려고 오무라 해군항공대의 전투기를 알뜨르에서 출격시켰다. 그러나 다음해인 1938년 1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오무라 해군항공대는 중국 본토로 옮겼고 알뜨르비행장은 훈련비행장으로 남았다. “알뜨르비행장”은 마을 아래에 있는 너른 벌판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알뜨르’에 조성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본제국의 조선인 강제징용과 대륙침략용 군사시설은
본토보다 제주도가 착공시기도 빨랐고 더 참혹했다.
시설공법도 잔인하기 그지없이 동일하다.
제주도는 1926년부터 제주도민과 조선본토에서 강제징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