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임도 끝에서
시월 마지막 주말이다. 작년 이맘때 이태원에선 할로원 축제라고 한밤중 한꺼번 몰려나온 인파의 안타까운 압사 사고가 생겼다. 문명사회 서울 도심에서 도무지 믿기지 않는 백여 명이 희생된 대형 재난이었다. 1주기를 맞아 유가족 협회와 사회단체는 서울 광장에서 추모 행사를 갖는 모양이다. 영혼들이 편히 잠들고 유족들의 트라우마가 진정되어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으면 한다.
새벽녘 잠을 깨 몇 줄 글을 남기고 도서관에서 빌린 심경호의 ‘옛 그림과 시문’을 펼쳐 읽었다. 한문학 연구에 조예 깊은 권위자가 우리 옛 그림에 적힌 시구에 담긴 뜻을 풀어 쓴 책으로 박물관을 찾아가지 않아도 실제 그림을 만난 듯했다. 연구의 깊이가 대단한 저자였기에 그림을 그린 화가는 세상을 뜨고 없어도 그림이 그려졌던 당시 사회상의 면면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날이 밝아와 책을 덮고 아침밥을 해결하고 산행을 나섰다. 마산역 광장 농어촌버스 출발지에서 진전 둔덕으로 가서 오곡재를 넘어 최근 새로 뚫은 임도를 걸을 요량이다. 역 광장으로 오르는 노점에는 계절감을 느낄 수 있고 흙내음이 물씬한 제철 과일과 채소들을 가득 진열해 손님 맞을 준비를 마쳐 놓았다. 스쳐 지나기만 해 물건을 사 줄 고객이 되지 못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정한 시각 출발한 76번 녹색버스는 어시장과 댓거리를 지나면서 몇몇 승객이 타고 내리길 하다가 밤밭고개를 넘어 현동교차로를 거쳐 동전터널을 지났다. 진동 환승장에 들렀다가 진북면 행정복지센터와 진전면 소재지 오서를 지나자 진전천을 따라 형성된 농경지가 나왔다. 벼가 익은 황금빛 들녘은 추수가 거의 마무리 단계였고 뒷그루 월동작물인 양파와 보리를 심을 채비를 했다.
옛길 2호선 국도변 가로수 벚나무는 거의 나목이 되어 가나 양촌 온천장을 지날 무렵 은행나무는 아직 단풍이 물드는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암반으로 된 두 산봉우리를 연결한 출렁다리가 놓여 산행객이 더러 찾는 적석산 등산로 초입 마을 일암을 지나 대정으로 가서 둔덕으로 들었다. 그곳 평암에서 군북 오곡으로 넘는 농로처럼 좁은 차도를 넓히는 공사는 수년째 진행 중이었다.
술일방과 대량을 지나 종점을 앞둔 골옥방에서는 기사는 시동을 끄고 십여 분 쉬면서 밀대를 들고 냇가로 내려가 물을 묻혀와 차내 바닥을 닦았다. 종점에서 출발하는 시각을 맞추기 위해 골옥방에서 늘 멈춰 쉬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밀양 박씨 재실 여양재를 둘러보고 농가 마당귀에 높이 자란 감나무에 달린 감을 올려다 바라봤다. 헛간 담벼락 담쟁이덩굴은 단풍으로 물들어갔다.
둔덕 종점까지 타고 간 승객은 내 말고 한 노인과 같이 내렸다. 나는 동구 밖에서 오곡재로 가는 아스팔트 포장길을 따라 걸어 미산령 갈림길에 이르자 군북에서 몰아온 차가 멈추더니 두 여인이 내려 미산령으로 향했다. 나는 그들이 차로 넘어온 오곡재로 오르니 거기도 승용차가 두 대 세워져 있었는데 주말을 맞아 오봉산이나 미산봉으로 오른 등산객이 타고 온 승용차인 듯했다.
한 달 전 오곡재를 넘으며 봐둔 상데미봉 남향 산허리로 뚫린 임도를 따라가니 오곡 골짜기 마을과 농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건너편은 낙남정맥 발산재가 오곡재로 건너오다 지맥으로 나뉜 오봉산 산등선이 펼쳐졌다. 길고 긴 임도를 따라가니 자연석 더미를 실은 트럭이 들어가고 굴삭기가 산비탈을 깎아 고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촌으로 가는 임도 개설은 미완 상태였다.
임도 초입으로 되돌아가기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공사 끝 지점에서 개척 산행을 감행해 가파른 비탈을 내려서니 경주 박씨 무덤이 나왔다. 산소로 오르는 길섶에는 철을 당겨 자란 산달래가 보여 스틱으로 뒤져 몇 줌 캤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간 곳은 얼음굴 바깥 유동마을 입구였다. 신촌과 사촌을 거쳐 군북역까지 걸어 순천에서 진주를 거쳐오는 무궁화호를 타고 창원으로 왔다. 23.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