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PC는 스마트폰과 태블릿 등 대체 기기에 밀려 예전만큼의 지위와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PC가 살아남은 이유 중 하나에는 '게임'이 있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PC와 게임과의 밀접한 관계를 재조명해 미래 PC 업계의 성장동력으로 게임의 역할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미디어잇 최용석] 본래 PC는 업무용으로 만들어진 기기다. 요즘처럼 음악이나 영상 등 각종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감상하거나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즐기는 것은 본래 PC의 용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오늘날의 PC가 과거에 비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본래 용도’가 아닌, 게임이나 갈수록 고품질화되고 있는 멀티미디어 콘텐츠의 존재 덕분이다.
특히 PC의 핵심 부품인 CPU와 그래픽카드가 오늘날처럼 고도화되고 고성능화된 배경에는 PC의 모든 자원을 최대한 사용하는 ‘게임’의 존재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어떻게 게임이 PC, 그중에서도 CPU와 그래픽카드 발달에 기여할 수 있었을까.

▲본래 업무용 기기로 만들어진 PC는 게임을 위한 기기는 아니었다.(사진=영문위키피디아)
본래 업무용도로 만들어진 PC인 만큼, 초장기 PC 게임은 단순하고 조잡한 수준이었다. 그래픽은 커녕 일반적인 텍스트 문자와 ‘그림 문자’라고도 하는 아스키(ASCII) 부호를 활용해 화면상에 현재의 상황을 알기 쉽게 표현한 수준이 전부였다. 게임의 수준이 낮은 만큼 당연히 하드웨어 요구사항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하지만 PC에 사진(이미지)과 동영상, 사운드와 같은 멀티미디어적인 요소가 도입되기 시작하고, 2차원(2D)을 넘은 3차원(3D) 그래픽을 사용한 게임이 등장하면서 CPU의 부담이 커지기 시작했다. 단순 각종 명령어 처리와 연산처리만 하던 CPU가 영상 및 이미지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고(디코딩), 화면에 표시하는 3D 그래픽을 그려내는(렌더링 등) 복잡한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갈수록 늘어나는 3D 그래픽을 처리하기 위해 단순히 화면만 표시하던 그래픽카드가 3D 그래픽 처리를 떠맡게 됐다. 각종 음향 효과는 ‘사운드카드’가 담당하고, 동영상도 매끄러운 화면 처리를 위한 별도의 가속보드가 존재할 정도였다.

▲당대 '살인적인' PC 사양을 요구해 유명했던 PC게임 '윙커맨더4'는 그만큼 영화 수준의 게임 내 영상과 더욱 사실적인 음향효과, 비교를 불허하는 3D 그래픽 등으로 무장했었다.(사진=영문위키피디아)
그러나 이후의 게임들이 더욱 ‘사실적인 요소’를 반영하기 시작하면서 CPU 역시 발전을 멈출 수가 없었다. 특히 보다 ‘사실적인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처럼 행동하는 좀 더 똑똑한 인공지능과 물리효과, 환경효과 등의 요소가 게임에 도입되면서 게임은 ‘더욱 빠르고 똑똑한’ CPU를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CPU는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각종 추가 확장 명령어를 지원하고 작동 속도(클럭)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한계에 이르자 명령어 및 데이터를 분산 처리하기 위해 서버급 시스템에서나 쓰이던 ‘멀티코어’ 개념이 도입됐고 이는 PC 업계에 ‘듀얼코어’ ‘쿼드코어’ 등의 용어가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단순히 작동 속도나 코어의 수만 늘리는 것에서 벗어나 따로따로 놀던 CPU 코어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동하고, 하나의 코어가 동시에 2개 이상의 명령어를 처리(멀티쓰레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금은 다소 둔화되긴 했지만, 한창 때만 하더라도 CPU의 처리 성능은 세대가 거듭할수록 거의 배 가까이 향상되어 왔다.

▲단순히 속도만 향상되던 CPU는 '게임'을 중심으로하는 '고성능'의 수요에 힘입어 새 명령어 도입, 멀티코어 및 다중 쓰레드 등의 개념을 적용하는 등 과거에 비해 몰라보게 발전을 거듭했다.(사진=인텔)
그래픽카드도 처음엔 그저 3D 그래픽을 처리하는데 도움만 주던 수준(3D 가속)에서 갈수록 CPU처럼 독자적인 명령어와 데이터 처리 구조를 갖춘 장치로 거듭났다. 그래픽카드의 메인 칩이 CPU와 비슷한 GPU(그래픽 프로세서 유닛)라 불리게 된 것도 ‘그래픽’이라는 범위 내에서는 CPU와 다름 없는 역할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특히 게임의 그래픽이 더욱 사실적으로 향상되면서 그래픽카드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단순히 목각 인형을 연상시키는 딱딱한 폴리곤(polgon) 캐릭터에 세밀한 형태와 질감 등을 표현하기 위한 ‘텍스처(texture)’가 입혀지기 시작하고, 더욱 입체적인 효과를 위해 조명과 그림자 개념 등이 도입되는 등 그래픽카드가 하는 일은 갈수록 늘어났다.
또 한정된 공간이 아니라 더욱 넓고 오픈된 공간에서 수많은 캐릭터와 오프젝트가 동시에 움직이는 환경을 구현하기 시작하면서 그래픽카드의 성능은 CPU 이상으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최신의 그래픽카드는 단순 연산 처리 성능만큼은 CPU에 근접하거나 오히려 넘어설 정도로 발전했다. 심지어 고성능 GPU의 경우 집적(集積)되는 트랜지스터의 수는 이미 CPU를 넘어선지 오래다. ‘GPGPU’란 이름으로 평소 쓰지 않는 GPU의 연산성능을 CPU를 보조 또는 대체해 사용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사용되고, 지금도 계속 연구되고 있을 정도다.

▲단순히 화면 표시를 '가속'하던 그래픽카드는 더욱 빠르고 사실적인 게임 그래픽을 구현하기 위해 CPU를 능가하는 연산 성능을 갖추게 됐다.(사진=엔비디아,AMD)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최신 게임들은 CPU와 그래픽카드가 제공하는 ‘기본 사양’을 넘어서는 성능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그래픽 출력 해상도가 풀HD(1920 x 1080)를 넘어 QHD(2560 x 1440), UHD(혹은 4K, 3840 x 2160)급으로 놀라가면서 최상의 게임 환경을 구현하려면 여전히 수백 만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사실 고성능 PC는 게임용으로만 쓰이는 것은 전혀 아니다. 고성능 PC(워크스테이션)는 게임 외에도 고화질 사진 및 영상 편집이나 3D 설계 및 디자인, 각종 렌더링 등과 같은 전문적인 작업 용도로도 널리 쓰이고 있고, 오늘날의 PC 성능이 발달한 이유 중에든 그러한 전문적인 수요가 꾸준히 존재한 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다만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게임’이 가장 친숙한 소재다 보니 ‘고성능PC=게임용PC’이란 인식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또 실질적으로 ‘게임’이란 콘텐츠는 전문용 애플리케이션 못지 않게 PC의 성능을 거의 100% 가깝게 요구한다.
게다가 기술적으로 게임에 들어가는 각종 요소들은 전문적인 분야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더욱 사실적인 인공지능, 현실과 같은 물리효과, 환경 요소가 반영된 3차원 음향, 소재 및 그 특성에 따른 물성 표현 등을 구현하기 위해 각방면의 모든 최신 기술이 처음 시도거나 적극적으로 투입되는 것이 바로 게임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애들이나 즐기는 놀이문화’로 치부하고 자녀를 둔 학부모들에게는 ‘공공의 적’이나 다름 없는 게임이 실제로는 오늘날 IT를 비롯한 산업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점을 바꿔보면 게임이 없으면 그런 고성능의 CPU와 하드웨어도 필요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단순히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문서작업만 하는 데는 20만~30만원대의 저가형 PC는 물론, 5~10년 전 PC로도 여전히 가능하다. PC의 역할을 대체한다는 스마트폰과 태블릿도 단순 성능만 따지면 4~5년전의 PC 정도에 불과하다.
미래의 게임은 단순히 평면 스크린에서 입체적인 그래픽을 표현하는 것을 뛰어넘어 완벽한 가상 공간에서 온몸으로 체감하는 가상현실(VR)의 개념까지 도입될 전망이다.
이를 거대한 기업급 시스템이 아닌, 일반 가정에서도 빠르고 자연스럽게 구현하려면 우선 PC의 성능이 더욱 향상되어야 할 것이다. PC 말고는 그만한 요구 성능을 감당할 수 있는 레벨의 하드웨어가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CPU와 그래픽카드도 지금보다 더욱 고성능화되어야 할 것이다. ‘양자 컴퓨터’와 같이 완전히 다른 개념의 연산처리 장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게임’이 앞에서 수요를 만들고 CPU와 그래픽카드를 앞세운 PC의 하드웨어가 따라가는 과정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