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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말의 구원론적 능력 (살후 2:13-17)
정용섭목사
우리가 신약성서를 읽으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그 중에서도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지 못한다는 점과 이 편지를 쓴 사람의 영적인 세계를 따라가기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데살로니가 후서의 말씀도 그들만의 독특한 상황이 그 배경에 놓여 있으며, 또한 바울이 경험하고 인식한 고유한 영적인 세계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우리에게 열려지는 것만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감사의 이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아마 이런 말은 상투적인 게 아니라 그의 진정한 마음이 담긴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는 제삼자이기 때문에 이들의 편지 왕래에 어떤 공동의 생각과 느낌이 들어있는지 다는 알 수 없지만 이 편지 전체를 통해서 보더라도 이런 감사의 표현이 거의 구원론적인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은 대개가 자기에게 경제적인 이익을 끼쳐주었거나 자기의 어려움을 도와주었을 때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바울의 말은 그런 인간관계에서 느끼게 되는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그것까지 포함하면서 인간 전존재와 우주론적 차원과 연관된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가 감사하는 이유를 여기서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데살로니가 교우들을 선택해서 구원해주셨습니다. 둘째,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해주시고 진리를 믿게 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짤막하게 제시된 네 가지 조건들을 일일이 거론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선택, 구원, 성령의 능력, 거룩, 진리, 믿음, 복음, 영광은 어쩌면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을 총망라한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우들이 정말 구원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를 믿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아 누렸을까요? 2천년의 시간적 간격 때문에 이러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런 단어들이 함축하고 있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일반적 인식론적 범주를 뛰어넘기 때문에 이 단어와 문장의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구원, 영광
이 단어들 중에서 첫 번째와 마지막에 거론된 구원과 영광에 한정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이 성서 시대의 인식과 경험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연 데살로니가 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바울은 그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들이 아무런 걱정도 없고, 병도 걸리지 않고, 늘 기쁨에 충만했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리얼리티들이 이 땅 위에서 완전하게 현실화된 적은 인간의 역사이래 있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 역시 이런 세계를 완전하게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 제자들은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확실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이런 일들은 아직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이 이들을 선택해서 구원을 얻게 하셨다면서,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을 감사한다고 서술하는데,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고 그 영광 운운하고 있는 것일까요? 영광은 생명이 완전해지는 사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겪고 있는 모든 한계와 잠정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생명의 영이 충만하게 작동되는 것 말입니다. 이러한 구원과 영광의 완전한 실현은 당연히 종말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구원과 영광은 약간 다른 차원에서 언급된 것입니다.
물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 구원과 영광의 징표들이 나타난 것을 분명합니다. 초기 기독교가 그런 징표도 없이 유대교와 로마정권의 박해를 견뎌낼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 기쁨, 평화, 희망, 또는 일치와 섬김이라는 신앙적 열매들이 그들에게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신앙적 가치들이 빛을 발했다고 하더라도 완전하게 구원을 받았다거나 완전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아 누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들에게 나타난 그런 열매들은 완전한 구원과 영광의 시대가 오기 전에 선취적으로,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일종의 상징들입니다. 이 땅 위에서는 아무리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늘 불안하고 시험받고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나타난 구원과 영광의 증거들은 그렇게 구체적인 현상으로 확인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울이 명백하게 인식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그런 영의 활동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흡사 바둑에서 돌의 흐름이 고수들에게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그런 영적 활동을 보고 그들에게서 구원과 영광이 주어졌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영의 활동을 인식한다는 것이 주술적인 작용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종교적 열광에 빠짐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그런 엑스타시나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암호도 아닙니다. 여기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라는 악보가 있다고 합시다. 음악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악보를 보기만 해도 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의 음악적 내공에 따라서 악보를 보고 음을 되살려내는 능력도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히 그런 점에서 영적인 내공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 활동하는 영적인 현실들을 인식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감사한다는 말은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을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굳게 서라.
바울은 15절에서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굳건히 서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되었는데 굳건히 서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임한 이런 은총은 기계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손쉽게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미 구원과 영광에 참여한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서 이런 영적 활동이 사라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책임이 언급되어야만 합니다.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활동하지만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책임 또는 그에 못지 않게 크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그것을 유지하거나 포기할 자유가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책임은 자유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은 자기 삶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적이라는 말도 됩니다. 다른 하나는 영의 활동은 영적인 존재인 인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과 마찬가지로 흙(자연)을 소재로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숨'(루아흐)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아마 모든 생명체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영으로 창조된 존재는 인간이 유일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을 통해서 활동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에 절대적으로 의존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 없이도 하나님의 영은 세계의 생명을 이끌어 가시고 돌보십니다만 영적인 존재인 인간과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인간이 영적으로 문을 열어야만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거짓 그리스도
그런데 실제로 데살로니가 교회가 흔들리고 있는 조짐을 바울은 발견했습니다. 2장1절 이하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잘못된 재림론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2,3절만 여기 인용해보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지성을 잃고 쉽사리 흔들리거나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이나 혹은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이런 말을 편지에 써 보냈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절대로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하느님을 배반하게 될 것이며, 또 멸망할 운명을 지닌 약한 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이미 예수님이 재림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런 사실을 선포한다고 말했겠지요. 또는 자신들의 주장을 바울의 가르침이라고 호도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들의 말에 절대로 속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등장한 사이비는 오늘도 그렇지만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보십시오. 그 혼탁한 시대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재림했다고 말하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미래의 희망이 현실화되었다고 선포하면 사람들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이전에 우선 믿고 싶어집니다. 대개의 정치적, 종교적 사이비 교주들이 쓰는 방식은 대개 이렇습니다. 이미 결정적인 사건이 자기들에게서 일어났다고 선전합니다. 만약 이런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면 그 이외의 모든 일들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물불 가
리지 않고 그곳으로 달려갑니다. 전도관의 박태선, 통일교의 문선명, 영생교 교주 등이 모든 이렇습니다. 히틀러도 역시 이런 점에서는 사이비 교주와 똑같습니다. 요즘의 상품 판매술도 근원적으로 보면 '여기에 그리스도가 재림했다'는 논리와 다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 화장품을 쓰면 모두가 아름다워진다는 확신을 주는 게 바로 그런 사이비 그리스도론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등장한 사이비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성령의 감동으로 포장했습니다.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이렇게 성령 운운하는 사람들의 말을 거역하기가 참으로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차원이 아니라 흡사 신기루처럼 없으면서도 있는 것같이 위장하는 '아우라'의 효과가 그것입니다. 더구나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 자기들의 가르침을 바울의 이름을 빌려서 위장했습니다. 당시 교회에 참된 권위를 확보하고 있던 바울의 이름으로 없는 사실을 유포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종교적인 면에서나 정치적인 면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적인 면에서 거짓 그리스도에 미혹 당하는 것처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상황도 같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구원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다시 한번 더 기억나게 하면서 흔들리지 말고 '굳건히 서라'고 충고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약합니다. 특히 깨어있지 않는 군중은 선동에 쉽게 넘어가기 마련입니다.
전통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거짓 그리스도에게 미혹 받지 않고 굳건히 서는 일은 '전통'을 굳게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통은 다른 게 아니라 바울이 직접 보낸 편지나 만났을 때 한 말을 가리킵니다. 이런 말은 그 당시 데살로니가에서 활동하던 상대편의 시각에서는 당연히 비판의 대상일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전통은 변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물론 진리론적인 차원에서 아무런 반성도 없이 전통이니까 무조건 수호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진리를 거스르는 행동에 불과합니다. 그런 전통만을 고집한다면 기독교가 아예 시작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유대인들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서 시작했으니까 말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과 그 집단은 전통 파괴자들로 비쳤습니다. 왜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느냐, 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느냐, 왜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느냐?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행동을 비판한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보면 예수님은 전통주의자가 결코 아닙니다.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전통을 굳게 지키라는 말은 거짓된 가르침에 속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바울이 직접 한 말이나 편지의 내용을 정확하게 배우고 인식하고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 등장한 거짓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재림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들이 재림한 그리스도라고 가르친 대상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로마제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은 그 당시에 로마제국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더 이상 인내심을 갖고 그리스도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로마제국은 현실적으로 인간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집단이며 이데올로기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지상의 어떤 권력이나 이념들을 절대화함으로써 그것을 메시야로 호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을 굳건히 지키라는 말은 과거지향적인 보수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시대정신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신앙의 근본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도 이 바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신앙의 문제가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으려고 하고 적절하게 이름을 내려고 하고, 끊임없는 탐욕을 합리화합니다. 이런 현상은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교회 밖에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남보다 많이 소유하고 높은 자리에 앉아서 잘 살 수 있는가의 문제에만 마음을 두고 있지, 삶의 근본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과 생명과 역사의 근원과 미래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바울이 말하는 전통입니다. 그것이 곧 삶의 근원이며 토대이지만 현대인들은 것보다 현재 재림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일에 정신을 팔고 있을 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등장한 거짓 그리스도론이 오늘도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말의 능력
이렇듯 전통을 굳건히 지키는 일은 구체적으로 바울이 15절에서 언급한 '말'을 통해서 확인되고 유지됩니다. 바울은 17절에 다시 이 '말'을 진지하게 들음으로써 혼란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삶의 위로와 힘을 얻는다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온갖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17절).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자기의 선교적 사명과 편지를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음으로써 곤란한 지경에서 힘을 얻는다." 루터의 해석이 오늘 공동번역보다 원래의 뜻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우리의 양심이 가르쳐주는 대로 따른다는 말도 되지만, 그 양심은 경우에 따라서 왜곡될 가능성도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양심이 예민하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언어도 역시 모든 계시와 진리를 늘 완전하게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언어가 진리를 가리는 일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르기만 하다면 언어는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가장 월등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서도 역시 언어로 기록된 것만 보아도 언어의 존재론적인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이 이런 뜻으로 거짓 그리스도론자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전해준 말을 통해서 전통을 굳게 지키라고 가르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성서를 읽고 배우고 가르칩니다. 비록 이런 과정이 완전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길이 최선이기 때문에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드러난 가르침의 말들을 배우고 그런 인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굳건하게 서려고 합니다. 이런 노력 없이 자신이 혼자서 아무리 기도를 드리고 신비한 세계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칫 거짓 그리스도론에 미혹될 수 있습니다. 비록 갑자기 뜨거워지는 경험은 없다고 하더라도 성서 말씀을 차근히, 진지하게, 열린 마음으로, 진리론적 시각에서 배우는 일에 힘쓴다면 오늘 바울의 기도에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