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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전도여행 시작과 아볼로의 사역
행 18:23-28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행 18:23-28 / 안디옥에서 얼마 동안 지낸 다음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에 있는 모든 신도들을 격려하고 주님 안에서 굳은 믿음을 지켜 가도록 도와주었다. 24) [에베소에서 전도한 아볼로] 그 무렵 훌륭한 성경교사며 설교자로서도 뛰어난 아볼로라는 유대 사람이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를 찾았다. 25-26)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배워서 열성을 다해 회당에서 설교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은 고작 애굽에 있을 때 어떤 사람에게서 들은 침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담대한 그의 설교를 들어 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찾아가서 요한이 온 후에 예수께 일어난 일들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27) 얼마 후 아볼로가 아가야로 가고 싶어하자 신도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 믿음의 형제들에게 아볼로를 소개하고 환영해 달라는 편지를 써보냈다.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교회에 큰 힘을 북돋아 주었다. 28) 그는 공개 토론에서도 유대인들을 훌륭하게 논박하고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참으로 메시야이시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머물면서 다음 전도여행을 준비합니다. 또한 요한의 세례만 아는 성경에 능통하고 언변이 좋은 아볼로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배움으로 참 제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을 봅니다.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23)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도 바울은 52년 여름부터 53년 봄까지 안디옥에 머뭅니다. 그리고 다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의 이번 여행은 선교팀이 아닌 혼자서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번 전도여행의 목적은 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지역에 가서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된 성도들을 만나이단의 거짓 교훈에 흔들리지 않고 더욱 믿음을 굳게 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24-26) 바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이곳은 당시 세계제일의 도서관이 있는 지역으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은 마가 요한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일찍이 학문을 익혔고 또한 구약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의 핵심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을 통한 그리스도만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가 하나님의 도와 예수님에 관하여 더 깊이 풀어주고 성령강림의 사건을 정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아볼로를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세워질 것을 확신한 가운데 행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27-28)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를 더욱 깊이 깨달은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기를 원했습니다.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습니다.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더 깊이 깨달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함으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성경지식과 열정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남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식으로 만이 아니고 개념적인 이해만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하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능통한 성경 지식과 복음의 체험을 담은 증언은 힘이 있어 유대인들의 말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복음 전도자로서 사도행전의 한 부분의 역사를 채운 자가 되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도를 하나님의 은혜로서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아볼로와 같이 믿는 자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앞서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붙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진실할 때 평안해집니다. 거짓된 마음을 품고 있으면 늘 불안하고 평강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많이 가지고 있어도 늘 불만과 불편함이 따릅니다. 진실만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줍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삶에 있어서 거짓을 버리는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진실을 말하라. 자기가 느낀 바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결코 주저하지 말라.” 이는 프랑스의 조각가 로뎅의 말입니다.
호크마 주석
=====18:24
알렉산드리아 B.C - 332년 알렉산더대왕이 세운 중요한 해양 도시이다. 상업의 중심지요,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B.C. 280년경에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서인 70인역(LXX)이 이곳에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들을 이곳에 이주시켰는데, 유대인들이 크게 번성하뗘 당시 인구의 1/3이나 되었다 한다. 따라서 유대적 헬라 설학이발달하였는데 그 철학자들 중 필로(Philo)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때까지 필로가 생존해 있었으로 아마 아볼로는 그 필로 학파의 일원이었던것 같다.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성경에 능한자라 - '학문이 많고'의 헬라어 '로기오스'(* )는 '유식한', '말 잘하는'이란 뜻이 다나이는 아볼로가 천부적인 언변(言辯)과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나타낸다. 또한 아볼로는 이 외에 '성경에 능하기'까지 했다. 즉 그는 그의 언변과 학식을 성경 연구와 그 연구한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건하는 데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복음의 핵심을 몰랐다. 한편 아볼로가 에베소를 방문한 시기는 바울이 에베소에 잠시 머물다 떠난 후(19:1)부터 그가 제3차 건도 여행 때 다시 에베소롤 방문하기(19:1) 전의 기간이었다. 이 때에 아볼로가 에베소를 방문하여 영적 지도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8:25
주의 도를 배워...요한의 세례만 알따름이라 - 아볼로가 어디서 어떻게 주의 도를배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가 않다. 추측건대 그는 세례 요한의 몇몇 제자들을 통해 기독교의 교훈을 배웠을 것이다. 누가의 저서에 있어서'주의 도'나 '하나님의 도'는 항상 '기독교의가르침' 즉 복음을 의미했다(Haenchen). 그러나 아볼로가 주의 도를 아무리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다고 해도 세례 요한이 죽기까지 예수에 관해 이야기한 것만 부분적으로 배웠기 때문에 예수에 관한 지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흘츠만(Holzmann)은 아볼로가 세례 요한히 뒤를 잇는 인물이었다고 주장한, 또한디벧리우스(Dibelius)는 아볼로를 통해서 혼합적인 반(半)기독교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캐제만(Kasemann)은, 아볼로는 사도 중심적 기독교에 대해 독립적으로 활동했딘 기독교 교사였는데 이러한 연유로 누가는 그를 불완전한 교사로 묘사했다고 한다.
=====18:26
브키스길라와 아굴라가...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 본 구절에서도 브리스길라가 그녀의 남편 아굴라보다 먼저 언급되었다. 이는 아볼로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침에 있어 브리스길라가 아굴라보다 더 적극적이고 열심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Haenchen). 이들 부부는 아볼로가 회당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가 복음의 진수(眞髓)에 대해 무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루어진 모든 일들을 가르쳤다. 여기서 특별히 아볼로가 세례를 받았다는 언급이 없는데 이씨 대해 혹자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아볼로가 이전에 받은 '회개의 세례'를 기독교적 세례로 간주했던 것으로 판단된다(Longennecker)고 주장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많은 학자들은 아볼로가 성령 세례를 밞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학자 간에는 이 구절이서 기독교의 성령 세례에 관해서 논하기도 한다.
=====18:27
아볼로가 아가야로...많은 유익을 주니 - 베자 사본(Codex Bezae)에 따르면 에베소에 몇몇 고린도 고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아볼로의 이야기를 듣고 아볼로에게 자신들과 함께 고린도에 갈 것을 부탁했나고 언급되어 있다. 에베소에는 이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사역하고 있었으므로, 또한 그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은바 은혜를 전하고 싶어 고린도로 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볼로의 고린도 사역을 위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추천장을 써주기도 하였다. 결국 고린도에서의 아볼로의 사역은 후에 큰 결실을 거두었고 바울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고전1-4장).
=====18:28
성경으로써...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 아볼로 역시 바을과 마찬가지로 메시지의 핵심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집중시켰다. '성경에 능한 자'(24절)였던 그는 복음의 핵심을 깨닫자 공증 앞에서 그가 알고 있던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더욱더 설득력있고 확신있게 전하였다. 그의 능슥한 언변과 철학적 학식, 성경시 능통함 등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데 뒷받침이 되었고 특별히 유대인을 설복시키는데 귀하게 사용되었다. 이런 아볼로의 사역을 근거로 마르틴 루터(M,luther)는 히브리가 아볼로의 성경적 논증의 실례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이 유대교를 능가한다는 점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건들을 뒷받침할 만한 분명한 자료들이 없다.
< 설 교 >
아볼로
김영규 목사 / 행 18장 22~28절
제3차 전도 여행의 시작
제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은 잠시 체류한 후에 곧바로 제3차 전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행18:23) 유대 땅 가이사랴에 상륙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그간의 전도 결과를 보고하고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을 문안했습니다. 그리고 파송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곧바로 제3차 전도여행에 나섰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을 연도별로 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제1차 전도여행은 주후 45년 이후 51년 사이, 제2차 전도여행은 주후 52년에서 55년까지, 제3차 전도여행은 주후 55년에서 59년까지로 봅니다. 제1차 전도여행과 제2차 전도여행 사이에는 상당한 휴식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예루살렘 종교회의에도 참석했고, 노독을 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와 제3차 여행 사이에는 휴식 기간이 거의 없습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신속하게 3차 여행을 시작했을까요?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아시아 전도에 대한 열망입니다. 제2차 전도여행 당시 바울은 아시아에 집중하려 했었는데, 성령께서 마게도냐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에베소에 들렸었는데, 그 때에 에베소 사람들이 머물도록 간청했었습니다. 바울은 이때에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었습니다. 아마 이 때에 아시아 전도에 대한 비전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째로, 바울이 이미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려는 열망입니다. 바울은 이미 1차 전도여행 때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버가, 등지에 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제2차 여행 때에도 이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이제 10여년이 경과된 시점에서 자신이 세운 교회들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들을 방문하고 믿음을 강화시켰습니다.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방문한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아볼로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할 무렵에 또 한 사람의 중요 인물이 도착했습니다. 그가 바로 아볼로입니다. 오늘은 이 아볼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을 봅시다. 아볼로가 누구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4-25)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이집트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BC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란 이름도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이 도시를 건설하면서 헬라인과 함께 유대인을 정착시켰습니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들에게 헬라인과 동등한 거주의 권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 두 구역을 유대인에게 할당했습니다. 이 도시는 크게 부흥하여 자유인과 노예를 합한 인구 60만 명의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 유대인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필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알렉산드리아와 주변에 살던 유대인의 숫자가 1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도 알렉산드리아는 아프리카의 수도였고, 제국의 3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주후 641년 아랍의 칼리프 오마르가 점령했을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4000개의 왕궁과 4000개의 목욕탕, 400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만큼 헬레니즘 문화가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유대주의적인 문화도 상당히 섞여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이 만난 곳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동일하게 중요한 유산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70인경이란 구약성경입니다. 본래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이 성경을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본래 문자를 그대로 베낀 것을 사본이라 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을 역본이라고 하는데, 70인경은 성경 최초의 번역본입니다. 로마 제국과 헬라 문명권에서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은 유대교 역사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무튼지 이런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바로 아볼로란 인물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볼로의 특징이 두 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24) 첫째로, 학문이 많았습니다. 학문이 많다는 말은 “lovgio"” 유창하다는 뜻인데, 학식이 많다는 의미로도 사용이 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적인 철학, 수사학 등의 여러 학문이 발전되었습니다. 아볼로는 헬라 철학이나 웅변에도 능통했습니다. 둘째로, 성경에 능했습니다. 능하다는 말은 “dunatov"”(powerful, mighty)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이 많았기 때문에 유대인 회당과 학교도 많았습니다. 아볼로는 이렇게 풍부한 성경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으로 어떤 것이든지 변론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볼로가 예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25)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까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볼로가 어떻게 예수를 알게 되었을까? 많은 추측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돌아간 사람들이 전했을 것이란 설입니다. 둘째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회당으로 전파한 것을 아볼로가 들었으리라는 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곧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하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한 것이 구전으로 알려졌고, 아볼로도 이런 얘기를 듣고 예수를 메시아로 알았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알고 있는 복음은 불완전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5)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명하신 세례는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요한의 세례는 무엇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무엇입니까? 먼저 요한의 세례부터 생각해 봅시다. 요한의 세례가 뭘까요?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3:5-6)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요한의 세례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일종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물로 씻는 의식이 죄를 없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1:4)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NASB) “people should be baptized to show that they had turned from their sins and turned to God to be forgiven.*”(NLT) 요한의 세례는 죄 용서를 받도록 회개시키는 세례였습니다. 말하자면 일생일대의 conversion의 표시로써 받는 세례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실질적인 속죄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육체를 씻는 세례라면,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으로 마음의 죄를 씻는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세례라면 예수님의 세례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자에게 주는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영혼을 씻기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영혼의 죄를 능히 씻기는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형식상 물세례는 받았지만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셋째로, 만일 그가 유대교적인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속죄하신 대속의 원리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의 현세적 메시아관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볼로의 발전
아볼로가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배웠습니다. 아볼로는 복음에 대해서 불완전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적인 메시아관, 혹은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불완전한 회개, 불완전한 믿음, 불완전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볼로에 대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가르쳤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훌륭한 두 가지 모범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아볼로의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그는 기꺼이 복음의 진리를 배웠습니다. 배우는 열심! 배우는 겸손!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 그것이 아볼로의 장점입니다. 아볼로는 교리적으로 불완전한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교리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약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구원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주의 도” 혹은 “하나님의 도”라고 했습니다. “도”란 “호도스”인데 길, way란 뜻입니다. 바른 교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시고, 어른들에게는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교육을 보면 아이들은 가르치고 어른들은 축복합니다.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하세요. 어른이 되면 더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성숙되어야 합니다.
아볼로는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 더 크게 쓰임받게 됩니다. 아가야 교회가 아볼로를 지도자로 초빙했습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27-28) 아볼로가 아가야로 가려고 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청빙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 여러 분파가 있었는데 아볼로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째로, 형제들의 격려입니다. 우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개인적인 가르침입니다. 형제나 지도자가 부족할 때에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할 것이 아닙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볼로가 교리를 모른다고 챙피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르면서 뭘 가르치느냐고 탓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부분,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지도자를 대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지도자의 부족이 많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부족을 대신 채워주고, 부족이 채워지도록 도와야 합니다.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의 초청을 받았을 때에 믿음의 형제들은 그를 잘 영접하라는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부족한 형제를 보완해 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도자를 나무에서 떨어지도록 흔드는 교회가 아니라, 잘 감당하도록 부족을 돕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아볼로의 공헌
아볼로의 성장은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의 추종자, 베드로의 추종자, 아볼로의 추종자가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 아볼로의 추종자들은 오늘날로 한다면 말씀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파는 소위 말하는 은혜파들입니다. 은혜파에게 약점은 성경 말씀, 혹은 교리적 지식의 약점입니다. 아볼로는 그의 풍부한 성경 지식으로 은혜파의 약점을 보충해 주었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에는 그 의미가 큽니다. 고린도 교회는 갖가지 은사로 서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27-28) “boulomevnou de; aujtou' dielqei'n eij" th;n !Acai?an, protreyavmenoi oiJ ajdelfoi; e[grayan toi'" maqhtai'" ajpodevxasqai aujtovn, o~" paragenovmeno" sunebavleto polu; toi'" pepisteukovsin dia; th'" cavrito":” “eujtovnw" ga;r toi'" !Ioudaivoi" diakathlevgceto dhmosiva/ ejpideiknu;" dia; tw'n grafw'n ei\nai to;n Cristo;n !Ihsou'n”오늘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은혜로 믿게 되었다면, 즉 감성과 의지가 나를 믿음으로 인도했다면, 성경의 확증 즉 논리적, 법적 근거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아볼로는 은혜로 받은 구원에 대해서 성경 진리로 확증하여 주었습니다. 또한 성경으로 대항하는 유대인들에게 역시 성경으로 그들을 제압했습니다. 한 사람의 미숙한 일군 아볼로를 잘 지도하여 유능한 일군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책임입니다. 바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단순히 전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일군을 찾아 교회에 공헌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서금석 목사 / 행 18:24-28
들어가면서
●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가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에 가기 전 에베소에서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치던 아볼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를 에베소에 머물게 했었지요?
● 에베소란 어떤 도시였습니까?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 로마제국내에 4대 도시가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에베소였습니다. 그중에서 에베소는 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수도였습니다. 해안에서 5km정도 육지로 들어간 카이스터 강가에 위치한 도시로 로마에서 동방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소아시아 최대의 무역 중심이었습니다. 다음시간에 에베소의 특징에 대해 다시 설명하겠지만 에베소를 중심하여 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교회와 골로새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머무르면서 전도를 했는데 그에 관한 기록은 19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 아볼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면 먼저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24절 서두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라고 시작하지요?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아프리카 북단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BC332년에 제대로 된 계획도시를 만들어 보자(분당, 일산처럼)해서 만든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상업과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된 장서가 50-60만권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 학문적인 열정과 수준을 짐작할만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애굽사람, 로마사람, 헬라사람, 유대사람 이렇게 네 민족이 살았는데 그 중에 유대인수가 100만명이 되었다고 하니 유대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종교생활과 학문활동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볼로는 바로이런 분위기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또하나 알렉산드리아를 생각하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성경은 히브로 말로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히브리말에서 희랍어로 번역한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70명이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 성경'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면 아볼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24)
"24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⑴ 먼저 학문이 많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학문이 많다는 의미는 많이 배웠다는 뜻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적인 분위기로 대단했습니다. 애굽과 헬라의 학문도 많이 배웠을것이고 유대인이었으니 히브리철학에도 능통했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애굽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운 지성인이었습니다. 학문적인 권위는 하루아침에 생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배울 기회가 생겼을 때 열심히 배우시기 바랍니다. 배우지 않고서 배운사람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기회가 있을때마다 공부해야 합니다.
'교육열'을 말하면 우리나라 부모처럼 열성적인 민족도 보기가 힘들 것입니다. 좀 지난 연구입니다만, '산업화 사회의 어린이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움에서 한국, 미국, 일본, 대만의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각종 조사결과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공부하는 시간이 우리 한국어린이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나머지 세 나라들이 모두 1시간인데 비하여 거의 세곱이나 되는 2시간 54분을 공부시간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놀 때 상대하고 노는 아이수가 적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타 나라 아이들은 교우하는 친구가3-4명인데 한국어린이는 2명에 불과합니다. 학교 공부말고 여가로 습득하는 과목으로 미국은 스포츠가, 대만은 외국어가 으뜸인데, 한국어린이는 산수가 으뜸이었습니다. 수험(受驗)을 의식한 공부를 일찍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학문교육과 함께 인성교육이 되어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성공한 자녀일수록 부모님과의 관계가 생각만큼 뜨겁지가 못합니다.
어쨋든 배워야합니다. 학교도 가정도 이제 기술과 전문지식만 가르치려 하지 말고 인격도 가르쳐야 합니다. 학문이 많다고 반드시 인격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배운 것이 모자르면 좋은 지도자가 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또 하나 학문이 많다는 헬라어 '로기오스(λογιοσ)'는 '유식한'이라는 의미와 함께 '말잘 하는'이란 뜻도 있습니다. 아볼로는 풍부한 학식과 함께 천부적인 언변(言辯)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말 만 잘한다'면 이것도 문제이겟지만 자기가 배운바를 잘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 잘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 아닙니까? 28절 후반절을 보면 '공중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유대인들에게 힘있게 논박했다는 말씀인데, 아볼로가 얼마나 언변이 뛰어난가 하는 점을 보게 해 줍니다.
아볼로는 학문적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말도 잘했어요. 바로 이런 아볼로의 능력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데 귀하게 쓰임받지 않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열정도 있었습니다.
(2) 아볼로는 성경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성경에 능통한 사람입니까? 신학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까?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내용이나 흐름을 훤하게 아는 것이 성경에 능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줄줄이 암기하는 사람이 능한 사람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 맞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그런것만 가지고 성경에 능하다고 말하기는 부족하지요. 성경에 능하다는 말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잘 깨닫고 깨달아 진대로 믿고 믿는대로 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하여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도 많아도 성경이 그 사람의 삶과 생활에 아무런 관련도 없고 영향도 미칠 수 없다면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세상을 보면 학문이 능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성경을 멀리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볼로는 세상 학문에도 능할뿐 아니라 성경말씀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 아볼로가 어떻게 성경에 능한 사람이 되엇을까요? 25절 첫부분을 보면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 주의 도(the way of the Lord)란 한마디로 기독교를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을 믿는가와 함께 믿는 바를 실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生)의 길입니다.
'배웠다'는 희랍어 '카테케메노스(κατηχημενοσ)'라는 단어의 의미는 '배웠다'는 뜻인데 제대로, 깊이 있게 배웠다는 말입니다. 스승이나 부모로부터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웠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배웠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여기 저기서, 이 얘기, 저 얘기 들어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하여 제대로 배웠다는 뜻입니다. 아볼로는 바로 어려서부터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체계적으로 배웠다는 말씀입니다. 뿌리있는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십니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주어 모으듯이 성경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나무를 우선 흔듭니다. 사과가 떨어지면 주워담고 그리고는 큰가지를 흔듭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 사과는 작은 가지마다 사과를따냅니다.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창세기부텅 요한계시록 까지 계속읽는 것입니다. 통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연구의 가장 초기단계입니다.
● 성경통독 몇 번 하셨어요? 횟수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최소한 1년에 한번정도는 읽어야 지요. 성경과 늘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심방 가 보면 성경찾는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워낙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집사 이상 되신 분들 1년에 성경 꼭 한번이상 통독하세요. 이것이 성도의 기본입니다.
그 다음에는 책별로 장별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은 마라에서의 이야기,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 요한복음 2장은 가나혼인잔치의 기적과 성전정화사건 등 또 주제별, 단어별로 공부하기도 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기적처럼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성경에 대하여 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잘 가르쳐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성경을 너무 읽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뜻인지..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자'라 했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연구했다는 뜻이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고 아는대로 행하며 산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배웁시다. 특별히 성경에 대해서 많이 배우시고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생명수가 여러분 삶속에 흐르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열려진 마음으로 말씀과 깊이 만나고 말씀을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체험으로 내게 와야 합니다. 그렇게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아볼로는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으나(25)
여기서 아볼로의 문제와 한계가 발견됩니다.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아볼로는 일찍부터 '주의 도'를 체계적으로 잘 배웠습니다. 몇가지 생각해 봅니다.
'열심으로'라는 헬라어를 직역하면 '영으로 뜨거워져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열정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남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열정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아볼로는 뜨거운 사람,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 예수에 대해서 가르쳐본적 있나요? 누구에게 복음을 제시해 본 적 있나요? 예수 믿은 지가 몇 년 되셨습니까? 몇사람에게 예수에 대해 가르치고 예수 믿으라 권해 보셨나요? 이런 얘기 들으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십니까? 남에게 가르친다는 것 - 더구나 예수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일이 아니지요.
● 아볼로가 예수에 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긴 했는데 그런데 요한의 세례밖에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25절 성경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아볼로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배웠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알수는 없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는데 요한의 세례밖에 몰랏다' -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참 미묘한 성경귀절이라서 이 구절에 대한 해석도 분분합니다만 이런 정도로 정리합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물세례였습니다. 물세례와 대칭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성령세례. 아볼로는 열정적이었고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긴 했지만 성령세례는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장으로 가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볼 때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 - (물세례)-밖에 몰랐다'는 말씀은 성령세례 못 받았다는 해석이 맞는 것으로 봅니다.
●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아볼로가 성경에 능해서 구약의 메시야에 대해서도 알앗고 예수에 대하여도 알았다 했는데 문제는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시오 메시야이심에 대한 증거와 확신이 아볼로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자가 없다 하지 않앗습니까?
다른 하나는 아볼로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해 열심히 가르치기는 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아서 남에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알지는 못했지요. 종교적 열정과 합리적 학문성 때문에 남에게는 가르칠 수 있었지만 자신은 경험치 못햇던 것으로 봅니다. 죄에 대해서 가르치면서도 자신에게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없습니다. 이론과 지식은 있지만 마음에 체험과 감격은 없는 반쪽짜리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가 힘이요 능력이 되겠습니까? 아볼로는 학문도 높앗습니다. 성경도 잘 알았고 가르치기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볼로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고 여기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예수에 대해서도 알기는 많이 아는데 감동이 없습니까? 기쁨이 없습니까?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체험하셔야 합니다. 성령체험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야 기쁨이 옵니다. 그래야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체험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머리만의 신앙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이 함께 뜨거운 감격으로 채워지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신앙이 내게 능력이 됩니다.
3. 아볼로는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회당에 갔다가 아볼로가 예수에 대해 담대히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아볼로가 가르치기는 잘하는데 내용에 좀 부족한 것이 있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조용히 자기 집에 데려다가 자기들의 알고 체험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인품을 엿볼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볼로는 학문에 있어서나 성경에 있어서나 실력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까 문제가 있엇습니다. 보통사람같으면 여럿이 있는 공개석상에서 질문도 하면서 아볼로에게 있는 허점을 부각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대학자도 별 수 없구나' 성도 여러분. 실력있는 사람이 실수하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별 수 없구나'한소리 하지요. 그 속에는 '나도 많이 안다는 자만심도 있을 수 있고' '대단한 사람도 실수도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별 수 있겠어?'하는 자기 합리화의 마음도 잇을 수 있는데 하여간 좋은 것은 아닙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조용히 자기 집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배우고 체험했던 '주(主)의 도(道)' - 복음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볼로가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대학자 아볼로가 서민들의 직업인 천막만드는 브리스길라와 아불라 부부에게 배운다는 것 - 쉬운 입니까? 그것도 학문과 성경에 능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상상이 안 되는 모습입니다. 이점이 바로 아볼로의 위대한 점 아니겠습니까? 남에게 배운다는 것 자체가 겸손입니다. 겸손한 태도가 없으면 결코 남에게 배울수가 없습니다. 아볼로는 가르치기도 잘 했지만 겸손하게 배울 줄도 알았습니다. 왜 아볼로를 위대하다 합니까? 가르치는 사람이 남에게 겸손하게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요.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심성이 참 중요한 것을 느낍니다. 잘못되고 어리석은 사람은 배울수록, 많이 알수록 더 어리석어 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배울수록 더 지혜로와 집니다. 아볼로는 공부는 많이 해서 많이 알긴 했지만 체험이 없었어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배운 것은 많지 않았어도 체험이 있었어요. 아볼로는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로부터 체험에서 나오는 생생한 증거를 통하여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제가 목사인 것을 알고는 가끔 성경에 대한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없는 사람, 성령받지 못한 사람이 성경 많이 알면 목사에게는 참 골치아픈 일입니다. 질문해도 자신이 신앙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골탕먹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꼭 이상한 질문만 합니다. "임신한 마리아가 마굿간에서 애 낳을 정도의 몸으로 어떻게 하루 종일 걸었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900살 넘게 살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저도 "모릅니다" 하면 "목사가 그것도 모릅니까?" 그런 것을 안들 신앙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믿음없는 사람들은 꼭 이상한 것만 눈에 뜨이게 마련입니다. 믿음있는 사람은 성경볼 때 어떤 것이 눈에 들어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볼로에게 겸손함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세상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 나보다 못하게 보이는 사람을 만난다해도 한가지 이상은 꼭 배울 것이 있어요.
그래서 그 이후에 어찌되었지요. "27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며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어김일러라"
아볼로가 자신의 학문과 성경의 능함 위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체험적 신앙을 배우자 은혜가 넘쳐나기 시작합니다. 가는곳마다 은혜를 끼치기 시작합니다. 변론에도 뛰어났기에 말씀과 은혜가 합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증거합니다. 유대인들이 말로는 결코 아볼로를 당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아볼로의 학문적 지식과 성경에 능통함과 뛰어난 언변위에 체험적 신앙이 더해지자 엄청난 힘이 붙기 시작합니다.
정리하면서
아볼로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학문도 많고, 성경에도 능하고 언변도 뛰어났습니다. 거기다가 인품도 좋아서 세상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 서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도 겸손히 배울줄도 알앗습니다. 몇가지 교훈을 생각합니다.
1. 세상학문, 성경 - 기회있을때마다 열심히 배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경많이 읽고 많이 배우세요. 성경 제대로 깨닫고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겸손하게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2. 체험적 신앙이어야 합니다.
관념적 신앙도 따지기는 잘 하는데 생각해보면 맞는 얘기이기는 하는데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해요. 남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성령받아야 합니다. 성령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에 은혜가 힘이 붙습니다. 신앙생활이 피곤한 일이 아니라 내게 위로와 힘과 소망이 됩니다.
3. 궁극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아볼로가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능하다는 것은 단순히 많이 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삶속에서 적용하고 실천하여 한 단계 성숙해지는 은혜가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쓰임 받은 아볼로
신성종 목사
오늘은 월평동산교회 설립 2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쓰임받은 아볼로란 제목으로 우리 교회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쓰임 받을 때입니다. 반대로 불행은 버림받을 때입니다.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세상에는 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이 가장 행복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쓰임을 받아야 할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볼로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더 자세히 푼다는 말은 바로 성경의 짝을 찾아내서 바른 해석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바른 성경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누가복음 24장 27절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해석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모세 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 예언된 그 오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며 부활하신다는 예언이 바로 주님 자신에 관한 것임을 해석해주었습니다. 이 때에 두 제자의 눈이 영적으로 밝아지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예수님께서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또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 뜻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빌립 집사가 묻습니다. 30절에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러자 간다게의 내시가 말합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때에 빌립 집사가 이사야 53장이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을 자세히 해석하여 주었을 때에 내시가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물세례를 받고 중생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바른 성경 해석은 우리의 신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아볼로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것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깨닫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에서 성경 해석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아볼로가 에베소에 있었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1. 먼저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네 파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울파, 둘째는 게바파, 셋째는 그리스도파, 넷째는 아볼로파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정해서 만든 파벌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볼로파가 있었다는 것은 아볼로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이 일로 인해서 얼마나 상처가 컸는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고린도에 와 달라고 했지만 거절했고, 심지어 바울이 오라고 했는데도 고린도에 오는 것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 분파에 대한 아볼로의 확고한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 24절 중반절에 보면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학문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는 전혀 달랐습니다. 특별히 아볼로는 헬라권 문화 안에서 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물론 교회는 학문이 전부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학문이 없으면 큰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베드로가 말에 능하고 지도력이 탁월했지만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바울보다 떨어지는 것은 학문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학문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당시에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이민 온 유대인들, 디아스포라들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입니다. 저는 여러해 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명한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일, 그것을 LXX(셉투아진트)라고 부릅니다만 이 작업이 바로 여기서 진행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약성경에 인용된 구약의 구절들이 다 셉투아진트, 즉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구약에서 인용되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의 말씀과 약간 다른 것은 바로 번역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무려 백만명이 넘었다고 했는데 이들이 바로 초대 교회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 신약성경도 가장 오래된 사본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5세기경의 것입니다. 이처럼 이 알렉산드리아 지역을 기독교의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입니다. 성경 해석도 이 지역 사람들은 영적인 해석, 즉 알레고리칼 해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루터에 의하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아볼로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아볼로는 사도급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 24절 하반절에는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구약에 예언 되어진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성경을 인용하여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변증적 설교였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학문을 한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공격에 아무런 이론적 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는데 이것을 아볼로가 해낸 것입니다. 아볼로는 웅변가였기 때문에 고전 3장 6절에 보면 당시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강한 확신을 심어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그 심은 씨앗에 물을 주어서 자라게 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지금도 교회에는 물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전도사님들과 교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교역자들이 바로 물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3) 25절 상반절에는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라고 했습니다.
과연 누가 아볼로에게 주의 도(당시 기독교를 그렇게 불렀습니다)를 가르쳤을까요? 성경학자들은 부모에게서 배웠거나 아니면 이름 모를 어떤 경건한 성도들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도]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구나 일찍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영아부의 교육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여러 달 전에 영아부 제1회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배우는 것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어려서 일찍 배우는 것은 일생동안 잊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4) 25절 중반절에는 아볼로에 대해서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라고 했습니다.
열심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심은 불과 같아서 선한 일을 할 때에는 좋으나 나쁜 일에 열심을 낼 때에는 아주 해가 됩니다. 바울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유대교에 열심이 있어서 기독교인들을 잡아가고, 핍박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세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열심당원들입니다.
이 열심은 전염병과 같아서 사람들에게 빨리 전염됩니다. 따라서 참 열심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은 참으로 더럽습니다. 그런데 참 열심이 되려면 지식이 있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아볼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열심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5) 26절 상번절에서는 아볼로에 대해서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심은 바로 담대함으로 통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열심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하는데도 열심이 없고, 성경을 배우는데도 열심이 없고, 봉사하는데도 열심이 없고, 믿는데도 열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기도 민망하고, 형식주의에 빠져가고 있어서 걱정이 많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여서 주님이 토해낼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6) 끝으로 아볼로는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27절 상반절에 보면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라고 했는데 그 뜻은 그가 받은 소명에 충성하려고 아가야로 가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명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은 물론이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도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회사의 이사들처럼 뒤에서 잔소리나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심지어 직장에 다니는 분들도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볼로에게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5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한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볼로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유명한 설교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레의 경우를 보아도 그런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목사가 되어도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내가 세례 요한의 세례처럼 물세례만을 받았는가? 아니면 주님의 세례인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가? 자신을 검토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직분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세례에 관한 내용은 다음 주일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본문의 말씀에 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 아볼로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이유는?
26절에 보면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고 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빛 속에서 해석해야 보다 분명해집니다.
구약을 구약 안에서만 해석하면 우리는 바리새파가 되기 쉽습니다. 구약이 뿌리라면 신약은 꽃이요 열매입니다. 구약 속에는 신약의 모든 진리가 다 그림자처럼 숨겨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의 빛 속에서 환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는 바울에게는 물론 아볼로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입니다.
(1) 먼저 우리는 이 만남에서 아볼로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아볼로는 유명한 학자요 웅변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름도 없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데려감을 당해서 배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볼로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저도 솔직히 집사 정도의 사람에게 불려가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 앞에서는 겸손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서 복음을 들었고, 마침내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가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보석을 담는 보석상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도 겸손할 때에는 하나님께 쓰임 받았지만 그러나 교만하여질 때에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의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복음을 들으면서 아볼로는 아가야로 가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누구든지 소명을 받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아볼로에게 추천장을 써주었고, 아볼로는 아가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헬라는 나라를 두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마게도냐와 아가야였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에 와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을 주었는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28절에 나옵니다. 그의 성경지식을 통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교훈도 발견하고, 축복도 발견하고 위로도 발견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다른 많은 것을 발견해도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헛되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3) 끝으로 27절의 아볼로는 마침내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는 말씀처럼 놀라운 변증적 효과를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도 다른 어떤 종교보다 이론적 토대가 있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아볼로 같은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 중생의 체험을 하고 복음으로 무장을 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해석을 바로 해야 합니다. 왜 이단이 나옵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우리 사이에는 두 가지의 간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문화적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영적 간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때에 우리의 편견이 없어져야 되고, 우리의 고정관념이 무너져서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마음문을 열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역사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에 일어납니다. 이 쓰임 받음은 먼저 성경을 바로 해석해서 은혜가 될 때에 얼어납니다. 그러므로 아볼로에게 일어난 그런 역사가 오늘 이 자리에서도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3차 선교-에베소
정방원목사 / 행 18:23~19:7
바울의 3차 선교-에베소(1)
바울의 2차 선교의 마지막 여정은 고린도, 겐그레아, 에베소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거쳐 안디옥 교회에 복귀합니다. 바울에게 에베소는 어떤 곳일까요? 그는 실라와 함께 2차 선교를 떠날 때, 아마도 아시아의 서쪽 끝인 에베소 선교를 목표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에베소 선교의 길을 막으시고, 대신 마게도냐 환상을 주시며, 유럽 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하십니다. 그는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 선교하고, 아가야 지방의 아덴과 고린도와 겐그레아에서 선교합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에베소를 잠시 방문하고, 그곳에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를 머물게 합니다.
바울은 2차 선교의 최대 중심지인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이상 머물면서 열심히 선교합니다. 말씀에 사로잡혀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만, 마음 속에는 이런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성령이 왜 에베소 선교의 길을 막으셨을까?’ 그는 고린도 선교를 마무리하면서 즉 2차 선교를 마무리하면서 3차 선교를 생각합니다. 아직 선교하지 못한 에베소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바울이 3차 선교에 도전하도록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선교지입니다. 본문 23절 서두에 “얼마 있다가”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를 끝내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 선교했으면 되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시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갖고 3차 선교에 도전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3차 선교가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1차 선교의 중심지는 갈라디아 지방의 비시디아 안디옥이고, 2차 선교의 중심지는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이며, 3차 선교의 중심지는 소아시아 지방의 에베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10절에 의하면 바울은 최소한 2년 이상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아니, 사도행전 20장 31절에 의하면 삼 년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는 3차 선교를 끝내고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의 1차 선교와 2차 선교와 3차 선교 중에 그의 선교가 가장 무르익을 때는 언제일까요? 아마도 3차 선교 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는 바울 선교의 결정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보면 바울의 선교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예수님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십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3차 선교를 할 때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바울은 3년 간 에베소 선교를 마무리하고 그곳을 떠날 때, 그는 새로운 선교지로 로마를 선택합니다. <행 19:21>“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선교에 대한 바울의 열정은 절대 식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중단없이 전진합니다. 죽는 날까지 계속 나아갑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사명자입니다. 사명에 살다가 죽어야 합니다. 사명에 살다가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사명자에게는 죽는 날이 사명을 완수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관찰하면, 하나님은 에베소 선교를 위하여 세 부류의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 세 부류의 사람들은 각자 독특한 강점이 하나씩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있는 세 가지 강점은 무엇일까요?
첫째, 오직 예수입니다.
에베소 선교와 관련된 첫 번째 사람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그들을 통해 에베소 교회가 배우는 교훈은 ‘오직 예수!’입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추방된 이후 고린도에 정착하는데,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 신앙의 훈련을 받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날 때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를 데리고 갑니다. <행 18:18>“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라는 표현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부의 이름을 표기할 때 남편을 먼저, 아내를 나중에 표현합니다. 즉 ‘아굴라 브리스길라’라고 표현해야 하는데,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 26절에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 신앙의 훈련을 받고, 아굴라보다 브리스길라가 더 신앙의 열심을 냈을 것입니다. 아굴라보다 브리스길라가 더 헌신적으로 하나님과 교회와 바울을 섬겼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에 아굴라보다 브리스길라가 더 적극적으로 바울을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고린도에서 바울에게 무엇을 배웠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을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오직 예수!’를 정확하게 배웠을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24~28절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와 아볼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볼로는 본문 24~25절에 구약성경에 정통한 사람이고,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지만, 주로 세례자 요한이 외친 회개의 물세례만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반면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본문 26절에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쳐 줍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도’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전한 복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관한 진리에 대하여 잘 모른 채 세례자 요한이 외친 회개의 물세례만 전한 듯합니다.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통하여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본문 28절>“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여러분,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둘째, 오직 말씀입니다.
에베소 선교와 관련된 두 번째 사람은 아볼로입니다. 아볼로를 통하여 에베소 교회가 배우는 교훈은 ‘오직 성경!’입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본문 24절>“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신구약 중간 시대에는 헬라파 유대교의 중심지이고, 로마 제국 시대에는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번창합니다. 다섯 개의 구역 중에 두 개 구역이 유대인 구역일 정도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한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주전 200년 경에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됩니다. 그 성경을 칠십인역 성경이라고 표현합니다. 초대교회 때 기독교 신학의 양대 산맥이 있습니다.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안디옥 학파입니다. 주후 2~7세기에 기독교의 중심지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고,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직 성경!’입니다. 그는 본문 24절에 에베소에 와서 말씀을 전하고, 본문 27절에는 아가야에 가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아가야’는 고린도 교회를 가리킵니다.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를 고린도 교회에 추천하고, 고린도 교회는 말씀의 사람인 아볼로를 초청합니다. 그는 일종에 순회 설교자입니다. 언변이 좋기 때문에 고린도에 가서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절대 지지 않습니다. <본문 28절>“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에 보면, 말씀의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에스라이고, 신약시대에는 아볼로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스 7:10>“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바울은 아볼로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전 3:5~6>“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은 복음의 씨앗을 심고, 아볼로는 말씀으로 물을 주며,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를 성장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아볼로처럼 성경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성경을 깊이 공부하는 말씀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경!’입니다.
셋째, 오직 성령입니다.
에베소 선교와 관련된 세 번째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가 배우는 교훈은 ‘오직 성령!’입니다. 바울의 3차 선교는 본문 23절에 갈라디아 지방과 브루기아 지방을 거쳐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에는 열두 명 정도의 소그룹 모임이 이미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볼로처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본문 2절>“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으로 성령은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을 성령의 인침 혹은 성령 세례라고 표현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성령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입니다. <고전 12:12>“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으니.” 이 일은 예수님을 믿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오직 성령!’입니다.
반면에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기독교의 세례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세례자 요한의 물 세례는 예수님을 믿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고, 영적으로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세례는 이렇게 시행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물 세례를 베풉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려면 반드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회개-믿음-세례’ 순이고, 그 중에 ‘회개와 믿음’을 회심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게 회심한 사람에게 세례를 베푸는데, 영적으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의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성령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본문 3절>“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물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은 ‘성령 세례’를 베푸십니다. <막 1: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날에 불 같은 성령, 바람 같은 성령이 임하십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 불세례’라고 표현합니다. 혹은 성령 충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행 2: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에베소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사도행전 2장에 예루살렘에 임한 오순절의 역사와 흡사합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령!’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의 3차 선교의 중심지는 에베소입니다.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은 세 명의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 세 사람은 각각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볼로입니다.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바울입니다. ‘오직 성령!’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며,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양향모목사 / 행 18:18-23
옛날에 시골 사람들이 사울에 올라오면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라고 하면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컴퓨터 켜고 스마트폰 열고 수십 종의 신문도 보고 수십 개의 방송국 뉴스를 다 보아도 코를 베어가는 세상입니다.
보고 들었다고 그것이 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보다는 가짜들이 더 판을 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가짜뉴스라는 말이 공개적으로 나돌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 보도했다고 그것이 다 진짜는 아니고 어떤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뉴스로 내보내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카더라 뉴스”라는 것도 있습니다. 잘은 모르는데 누가 그렇다고 카더라(하더라)는 것입니다. 정확한 근거가 부족한 소문을 그냥 누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지고 사실처럼 전달하거나 의도적으로 퍼트리는 것을 말합니다.
“지라시”라는 것도 있습니다. 지라시는 일본말로 낱장으로 된 광고지나 선전지를 말합니다. 누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선전한 광고를 마치 대단한 사실처럼 이야기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과장광고 허위광고들도 많이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선전하는 약들을 보면 아플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건강 정보들을 보면 아플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선전이나 정보들이 허위가 많고 과장이 많습니다.
모 텔레비전 방송에 가끔 반복해서 보여주는 “조작된 도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과 거짓 정보를 만드는 사람이 손을 잡고 CCTV 영상을 조작하고 증거를 조작해서 범인을 죄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아무 죄 없는 평범한 사람을 억울하게 죄인으로 만든다는 영화입니다.
이런 조작된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런 눈에 보이는 정보들 때문에 눈을 뜨고도 코 베임을 당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진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런 불신의 세상을 통해서 사탄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의의 기준은 “믿음”입니다. 사탄은 세상을 온통 불신의 세상으로 만들어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도 세상을 믿지 못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도 믿지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 하나님이라고 어떻게 믿겠는가, 성경도 복음도 내세도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냥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 마음껏 즐기며 살자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믿음에서 떠나고 교회에서 떠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 올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할 때 철저하게 사실에 입각해서 기록을 하셨습니다. 소설을 쓰는 것처럼 근거 없이 상상력을 동원해서 기록을 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기록을 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 성경이 등장하는 인물, 성경에 등장하는 도시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다 실제로 존재했던 것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세의 사람들도 알 수 있도록 당시의 중요한 사건 중요한 인물 중요한 도시들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 역사의 주제는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지를 인간의 역사 안에서 진행하시고 그 진행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즉 구속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본문 18절에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인 18절에서 23절의 말씀에는 짧은 본문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매우 긴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나온 도시들도 고린도, 수리아, 겐그레아, 에베소, 가이사랴, 예루살렘, 안디옥, 갈라디아, 브르기아 등의 도시를 다녀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도시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에 있는 도시들입니다. 이 도시들은 대부분 당시의 유명한 도시들이었고 지금도 존재하는 도시들입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으로 배가 제일이었기 때문에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배를 타고 다녔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많은 지역들을 다녔는데 주석가들은 바울의 전도여행을 1차에서 3차까지로 분류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차전도 여행을 마감하면서 예루살렘의 교회에 올라가서 선교보고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상륙해서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라고 했는데 다른 사본에는 ‘올라가서’ 앞에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예루살렘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올라가’라는 말과 ‘교회’를 방문한 것으로 보아서 예루살렘은 주로 올라간다고 하고 교회는 예루살렘의 본부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교회 앞에 그동안 있었던 선교보고를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갔는데 안디옥은 아시는 대로 바울을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입니다. 자신을 선교사로 파송한 교회에 와서 선교보고를 하고 그리고 다시 3차 선교를 떠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을 통해서 사도바울의 선교현황을 자세하게 기록을 한 것은 그 지역에 복음이 들어간 경위를 설명하며 그 교회가 시작된 역사를 기록한 것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을 드린 대로 이런 성경의 기록들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지역이나 인물이나 사건들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지명이나 인명들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말씀이 허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유행하는 카더라 뉴스나 지라시처럼 허위 과장된 것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사실이며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 믿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진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하는 유일한 진리의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앞서 인용한 18절과 그리고 19절에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두 가지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깍은 것과 에베소에 와서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을 한 일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실인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민수기 6장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 제도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나실인은 평생 혹은 일정기간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람을 말합니다. 평생 나실인으로 산 사람은 삼손, 사무엘 등이 있습니다.
나실인은 포도나무에서 나는 소산물은 어떤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민6:3)라고 했습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의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말미암아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민6:6-7)라고 했습니다.
나실인은 서원 기간 동안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아야 했습니다. 여기 삭도란 머리를 밀 때 쓰는 칼을 말합니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민6:5)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서원한 것 때문에 머리를 깎지 않았다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머리를 깎은 것이 나실인의 서원을 따른 것인지 그 서원은 언제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나실인의 관례를 따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구약의 율법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친 사람입니다.
아마도 구약 나실인의 정신을 살려서 응용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함에 있어서 각오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세계만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각오를 하지 않으면 쉽게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런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남다를 각오가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가운데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특별한 각오로 임했을 것이고 그것이 끝날 때 그 일의 끝을 알리며 머리를 깎았을 것입니다.
또 본문에서 그가 한 일은 에베소에 와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을 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별로 좋아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봉변을 당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 거기서도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하여서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의 말을 듣고 헬라인들은 다수가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유대인들은 불량배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와서 바울을 해치려고 했습니다. 바울을 찾지 못하다가 바울이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기까지 달려와서 소동을 부려서 바울이 도망을 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바울이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서 강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바울을 붙잡아 법정에 세우고 처벌을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회당에서의 좋지 않은 추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에베소에 와서 다시 회당을 찾아갔고 회당사람들과 변론을 했습니다. 변론이라는 말은 이야기나 설교를 말하기도 하고 토론이나 논쟁을 말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늘 하던 대로 그들이 보고 있는 구약성경을 해석하여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론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했던 설교를 했던 그들과 토론을 했든지 변론을 했든지 그 주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반대나 핍박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기회만 있으면 회당에 들어가서 강론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배우고 토론하고 논쟁을 해서라도 확실히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셨고 다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믿지 못한 사람들은 죄인으로 형벌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전해야 하는 핵심복음이고 성도들이 믿어야 할 핵심진리입니다.
또 하나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아주 강한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보통의 마음으로 하면 그만이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이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이 복음을 전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나실인처럼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사람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일에 쓰임을 받으려는 각오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말세가 되면 각오 없이 그냥 교회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을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정말로 진리를 알고 복음을 믿는 참된 신자로 살아야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런 결심도 없이 이 위대한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굳은 결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제자들을 굳건하게 하니라
본문 23절에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갈라디아와 브르기아는 소아시아지방 즉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입니다. 갈라디아는 이미 바울이 1,2차 전도여행 때 전도하며 지나간 지역입니다. 이 소아시아지방을 다시 가는 이유는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는 감격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 믿음이 변질이 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다시 돌아보면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점검을 하고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이 미처 가보지 못한 도시나 다녀와서도 더 할 말이 있을 때는 편지를 써서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했습니다. 그 편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편지를 우리는 서신서라고 하며 복음의 진리 믿음에 대한 교리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일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를 기록한 갈라디아서는 그 서신서들 중에 가장 먼저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서신입니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하면서 바울이 가장 강하게 선언하는 말이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7-8)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처음에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고 믿음이 힘을 잃게 됩니다. 교회 안에 이미 많은 거짓선생들이 들어오고 이단들도 판을 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떠나 다른 헛된 것들을 믿음이라고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늘로서 온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 받을 사탄의 세력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통하여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 복음의 진리를 중심으로 한 교리의 역사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한 순교자들의 역사입니다.
이 귀한 복음으로 굳건하게 무장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조영식목사(김포한신교회) / 행 18장 24-28절
들어가는 글
9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이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계속되는 여진으로 조금만 흔들려도 불안 증상이 나타나는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상담가들은 지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저는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3차 선교여행을 다시 시작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울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고, 그가 2차 선교 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만나 생업이 같음으로 함께 일하며 말씀을 가르쳤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관련된 사건입니다(행18:2,3). 아볼로가 에베소에 와서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쳤는데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25절). 그 말을 듣던 브리스길라 부부가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서 전했습니다(26절). 그리고 아볼로는 새로운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들이 하나님의 도를 정확하게 아는지 깨닫고 변화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의 도를 정확하게 아는가?
브리스길라 부부는 텐트를 만들어서 파는 장사꾼입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당대 최고 학문의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를 한 박사였습니다. 텐트 장사꾼 부부가 명문 대학 출신의 박사를 가르쳐서 변화시킨 것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가 하나님의 도를 정확하게 풀어주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첫째는 모든 성경은 정확하게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제자 요한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요5:39). 모든 성경을 예수님께로 정확하게 연결하여 오직 주님만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를 정확하게 예수님의 성령 세례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성경을 가르칠 때 정확한 것을 너무 따진다는 푸념들이 있습니다. 제 성격은 덜렁 덜렁해서 항상 아내가 챙겨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정확하게 전하고 가르쳐야만 생명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할 때도 정확한 부위를 치료해야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정확히 믿어서 구원 받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정확하게 내 구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다양한 모습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내 구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볼로가 말한 요한의 세례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브리스길라 부부가 하나님의 도를 정확하게 풀어줄 때 아볼로도 지식적으로 알았던 예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만나서 내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사랑을 정확하게 풀어주었습니다. 텐트 장사꾼이 유명한 박사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까? 성경 지식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으로는 가능했습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성경의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성경 지식은 홍수처럼 넘쳐나고 있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가뭄처럼 말라만 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성경의 지식보다도 예수님의 사랑이 더 풍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아볼로는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아볼로가 하나님의 도를 정확히 알고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첫째로 트러블 메이커에서 피스 메이커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볼로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소개합니다(24절). 아볼로는 언변이 좋은 재주와 성경 지식을 많이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주가 성경보다도 더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이 말씀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언변의 재주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사역으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아볼로처럼 말씀보다도 재주를 앞세우면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에 아볼로파가 생겨나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고전1:11,12). 이처럼 재주를 앞세우면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아볼로는 하나님의 도를 정확하게 알고 화평케 하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면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확하게 체험한 후로는 믿음의 형제들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믿음의 “형제들이 아볼로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고 합니다(27절). 아볼로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고 트러블 메이커에서 피스 메이커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고 화평케 하는 자로 변화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둘째로 인간적인 열심에서 은혜를 받은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볼로는 인간적인 열심히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라고 소개합니다(25절). 인간적인 사역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만족을 채우지 못하면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열심을 포기하거나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열심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아볼로는 하나님이 도를 정확하게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볼로가 인간적으로 열심히 할 때는 자신을 드러내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정확히 체험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섬기면서 영적인 유익을 주었습니다(27절). 그러므로 인간적인 열심보다 주님의 은혜로 섬길 때 다른 사람에게 믿음의 유익을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로 하나님의 은혜로 섬겨서 영적인 유익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셋째로 머리의 믿음에서 가슴의 믿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아볼로는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하고 지식적으로만 가르쳤습니다. 그는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합니다(25절). 여기서 ‘예수에 관한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사랑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 능통하여 아는 것은 많았는데 요한의 세례만 알았습니다. 그는 요한의 물 세례는 알았지만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 보면 에베소에서 성경을 가르쳤던 아볼로가 떠나자 바울이 와서 성령의 세례를 주었습니다(행19:1-6). 물 세례는 겉 사람을 바꾸지만 성령의 세례는 속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볼로가 예수님을 정확히 체험한 후로는 가슴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가슴으로 믿어서 성경 말씀에 붙잡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정확히 체험한 후로는 성경 말씀이 그의 재주를 붙잡고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 합니다(28절). 아볼로가 가슴으로 믿을 때 바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5절). 머리로만 믿으면 지시만 하려고 하지만 가슴으로 믿으면 예수님의 사랑에 붙잡혀 증인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붙잡혀 있습니까? 부디 우리들이 세상에 붙잡히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의 증인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들이 인간적인 재주와 자신의 열심히 교회에 다니다가 자기의 만족이 채워지지 않을 때 하나님과 멀어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시며, 예수님의 사랑을 정확히 알고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또한 우리들이 예수님을 정확히 체험한 후에 갈등이 아니라 화평케 하며, 열심보다 은혜가 더 커져서 영적인 유익을 주며,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믿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유익을 주는 성령의 사람
행 18장 24~28절 / 이상호목사
두 젊은이가 같은 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젊은이가 승진을 한 것입니다. 같이 입사한 다른 직원은 사장의 불공평한 대우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그래서 사장에게 가서 따졌습니다. 그러자 사장님께서는 두 직원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들, 지금 당장 시장에 나가서 감자가 어떻게 거래되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게.
”얼마 뒤, 승진하지 못한 젊은이가 먼저 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농사꾼들이 지금 감자를 팔고 있습니다.”
사장은 이 젊은이에게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또 가격이 얼마인지를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이 젊은이는 “그것까지 알아 오라고 하지 않으셨잖아요”하고 퉁명스럽게 대답을 합니다.
잠시 뒤, 승진을 한 젊은이가 왔고 그 역시 사장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오늘은 감자 마흔 포대가 거래되고 있으며, 가격은 한 포대에 만 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감자 하나를 보이면서 “이 감자는 품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합니다. 사 두면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안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불만 가득한 젊은이는 이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왜 승진을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사장이라면 어떤 사람을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시키는 일만 마지못해 하는 직원의 모습일까요? 아니면 사장의 마음을 읽고 사장이 원하는 것을 행동하는 직원의 모습일까요? 아마 누구나 다 후자의 모습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 직원의 입장에 섰을 때에는 앞선 그 불평에 찬 젊은이처럼 상대방의 처사를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신앙의 차원에서도 공통되게 적용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단지 내가 저 사람보다 부유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더 중요하고 그런 기준과 판단으로 살기에 주님께는 감사와 찬송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앞서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열망, 비전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절입니다. 부활 후 40일을 계시다가 승천하시는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곧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셨습니까?
어떠한 외적 기준과 조건도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단 하나 오직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약속한 것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 나선 우리가 사탄의 중요한 전략을 한 가지 확인해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방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우리가 이미 그것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히 우리는 이미 받았다고, 찾았다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주님께서 주실 것은 엄청나게 크고 많은데 이미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니 이제 더 구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슬며시 넘어가게 하고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작고 적은 것으로 만족하게 합니다.
1. 오늘 본문에서 만날 수 있는 아볼로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훌륭한 자질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달변가였고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새로운 방법으로 열정을 가지고 가르쳤습니다(행18:24-25). 하지만 그에게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직접 체험으로 알았던 것이 아니고, 머리속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볼로에게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탄은 아볼로가 신령한 능력을 받지 않고 그냥 인간적인 선량함과 우월감에 안주하기를 소망했고 체험 없이 가르치는 자로서 만족하기를 소원했습니다.
성령 강림주일에 아볼로를 통해 성령의 외침을 듣고자 하는 것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 아볼로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면 그만이지..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죄 짓지 않았는데..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데..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볼로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학문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답게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비록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기도 했지만 아볼로는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아볼로의 가르침이 복음적이지 않음을 알게 된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주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에게 더욱 자세히 가르쳐 준 것은 무엇일까요?
승천하시는 주님의 당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단지 착하게 살 것이다. 남에게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에게 가르친 것은 신앙인이라면 머리로 알고 깨닫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권능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권능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다. 권능이라는 단어는 다이나마이트의 어근인 듀나미스입니다. 권능을 받은 성령의 사람은 순하고 착하게, 법 없이 살 수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이나마이트처럼 큰 바위도 파괴하고 산도 부수는 큰 힘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고 가둘 수도 없는 능력의 사람입니다.
2. 사도행전을 비롯한 성경은 아무리 신앙의 차원에서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실패와 부끄러움에 대해 솔직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 왕의 경우입니다. 그는 통일 왕국을 열었던 왕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부러운 평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그 누구도 범하지 않는 큰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부하의 아내를 취했고 그리고 그 죄 때문에 부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역사 기록자의 관점이 다윗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의 부끄러운 과거와 치부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영웅으로,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본문인 아볼로 이야기의 위치를 살펴보십시다.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의 실패 기록이 사도행전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명한 스승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헬라 문화에 대해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사도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성령으로 하지 않고 단지 철학적 지식과 학식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권능으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19장에는 성령에 관하여 듣지도 알지도 못한 에베소 교회의 주의 제자들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천하의 전도자 사도 바울의 실패 경험과 19장에 이어지는 에베소 교회의 성령 받지 못한 제자들의 이야기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그 어떤 사람의 믿음이나, 사역이나 헌신도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17장의 바울이든 18장의 아볼로이든, 19장의 제자들이든..
본문이 담고 있는 두 가지 복음이 있습니다.
1) 성경은 단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지적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아볼로에게 부족함이 있었다는 지적으로 끝이라고 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으며 우리에게 무슨 결정적인 교훈이 되겠습니까?
부족했던 아볼로를 위해 좋으신 주님께서 성령의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곧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과 직업이 같았습니다. 곧 천막을 만드는 부부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크게 내세울 것은 없는 부부였을지라도 그 부부에게는 복음을 위한 엄청난 열정과 헌신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 사도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문안하기를 요청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사도 바울을 위하여, 복음의 사역자들을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는 엄청난 열정과 헌신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러한 열정과 헌신은 사람의 결단과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성령의 권능이 부족했던 아볼로에게 성령의 부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보내어 그에게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었던 것입니다.
2) 아볼로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관계를 생각해보십시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한 사람이지만 유대인이요,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로마 사람이었고 평신도였습니다. 아볼로에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영향을 받는 것이 쉬울까요? 본문의 내용대로 되는 것이 쉬울까요?
* 머슴 이자익과 주인 조덕삼 장로의 관계(김제 금산교회)
세상의 관점과는 달리 회당에서 가르치는 사람이요 유대인인 아볼로가 이방 사람에게 배우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 아볼로에게 필요한 것은 교만을 이용하는 사탄의 계략을 이겼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사탄의 계략을 이기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를 바랍니다.
3. 주변에 유익을 주는 성령의 사람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아볼로는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gentleman 또는 Good man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시대의 신앙의 사람들을 향해 더 이상 “좋은 사람(Good man)”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God's man)”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좋은”과 “하나님” 사이에는 철자 하나의 차이만 있지만 이것이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에도 안주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에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저 선하다는 것은 주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가집니다.
그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주변에 유익을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주변에 유익을 주는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하나님의 징계를 위해 나아가는 천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들었던 아브라함처럼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크고 놀라운 비밀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은 다이나마이트처럼 세상이 알지 못하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알지 못하는 위로부터, 곧 만군의 여호와로부터 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것이고 사자 굴속에 던져져도 상함이 없습니다.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이방 왕 다리오 왕은 말하기를 “내 나라 관할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찌니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오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재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단 6:26-27)
하나님의 사람은 크고 놀라운 비밀을 압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것으로 세상에 유익을 주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령의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쓰임 받은 아볼로
행 18장 24~28절 / 신성종목사
오늘은 월평동산교회 설립 2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쓰임받은 아볼로란 제목으로 우리 교회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쓰임 받을 때입니다. 반대로 불행은 버림받을 때입니다.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세상에는 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이 가장 행복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쓰임을 받아야 할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볼로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더 자세히 푼다는 말은 바로 성경의 짝을 찾아내서 바른 해석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바른 성경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누가복음 24장 27절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해석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모세 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 예언된 그 오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며 부활하신다는 예언이 바로 주님 자신에 관한 것임을 해석해주었습니다. 이 때에 두 제자의 눈이 영적으로 밝아지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예수님께서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또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 뜻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빌립 집사가 묻습니다. 30절에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러자 간다게의 내시가 말합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때에 빌립 집사가 이사야 53장이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을 자세히 해석하여 주었을 때에 내시가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물세례를 받고 중생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바른 성경 해석은 우리의 신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아볼로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것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깨닫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에서 성경 해석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아볼로가 에베소에 있었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1. 먼저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네 파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울파, 둘째는 게바파, 셋째는 그리스도파, 넷째는 아볼로파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정해서 만든 파벌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볼로파가 있었다는 것은 아볼로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이 일로 인해서 얼마나 상처가 컸는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고린도에 와 달라고 했지만 거절했고, 심지어 바울이 오라고 했는데도 고린도에 오는 것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 분파에 대한 아볼로의 확고한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 24절 중반절에 보면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학문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는 전혀 달랐습니다. 특별히 아볼로는 헬라권 문화 안에서 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물론 교회는 학문이 전부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학문이 없으면 큰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베드로가 말에 능하고 지도력이 탁월했지만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바울보다 떨어지는 것은 학문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학문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당시에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이민 온 유대인들, 디아스포라들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입니다. 저는 여러해 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명한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일, 그것을 LXX(셉투아진트)라고 부릅니다만 이 작업이 바로 여기서 진행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약성경에 인용된 구약의 구절들이 다 셉투아진트, 즉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구약에서 인용되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의 말씀과 약간 다른 것은 바로 번역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무려 백만명이 넘었다고 했는데 이들이 바로 초대 교회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 신약성경도 가장 오래된 사본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5세기경의 것입니다. 이처럼 이 알렉산드리아 지역을 기독교의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입니다. 성경 해석도 이 지역 사람들은 영적인 해석, 즉 알레고리칼 해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루터에 의하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아볼로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아볼로는 사도급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 24절 하반절에는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구약에 예언 되어진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성경을 인용하여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변증적 설교였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학문을 한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공격에 아무런 이론적 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는데 이것을 아볼로가 해낸 것입니다. 아볼로는 웅변가였기 때문에 고전 3장 6절에 보면 당시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강한 확신을 심어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그 심은 씨앗에 물을 주어서 자라게 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지금도 교회에는 물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전도사님들과 교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교역자들이 바로 물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3) 25절 상반절에는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라고 했습니다.
과연 누가 아볼로에게 주의 도(당시 기독교를 그렇게 불렀습니다)를 가르쳤을까요? 성경학자들은 부모에게서 배웠거나 아니면 이름 모를 어떤 경건한 성도들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도]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구나 일찍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영아부의 교육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여러 달 전에 영아부 제1회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배우는 것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어려서 일찍 배우는 것은 일생동안 잊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4) 25절 중반절에는 아볼로에 대해서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라고 했습니다.
열심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심은 불과 같아서 선한 일을 할 때에는 좋으나 나쁜 일에 열심을 낼 때에는 아주 해가 됩니다. 바울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유대교에 열심이 있어서 기독교인들을 잡아가고, 핍박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세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열심당원들입니다.
이 열심은 전염병과 같아서 사람들에게 빨리 전염됩니다. 따라서 참 열심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은 참으로 더럽습니다. 그런데 참 열심이 되려면 지식이 있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아볼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열심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5) 26절 상번절에서는 아볼로에 대해서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심은 바로 담대함으로 통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열심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하는데도 열심이 없고, 성경을 배우는데도 열심이 없고, 봉사하는데도 열심이 없고, 믿는데도 열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기도 민망하고, 형식주의에 빠져가고 있어서 걱정이 많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여서 주님이 토해낼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6) 끝으로 아볼로는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27절 상반절에 보면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라고 했는데 그 뜻은 그가 받은 소명에 충성하려고 아가야로 가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명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은 물론이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도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회사의 이사들처럼 뒤에서 잔소리나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심지어 직장에 다니는 분들도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볼로에게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5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한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볼로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유명한 설교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레의 경우를 보아도 그런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목사가 되어도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내가 세례 요한의 세례처럼 물세례만을 받았는가? 아니면 주님의 세례인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가? 자신을 검토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직분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세례에 관한 내용은 다음 주일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본문의 말씀에 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 아볼로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이유는?
26절에 보면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고 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빛 속에서 해석해야 보다 분명해집니다.
구약을 구약 안에서만 해석하면 우리는 바리새파가 되기 쉽습니다. 구약이 뿌리라면 신약은 꽃이요 열매입니다. 구약 속에는 신약의 모든 진리가 다 그림자처럼 숨겨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의 빛 속에서 환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는 바울에게는 물론 아볼로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입니다.
(1) 먼저 우리는 이 만남에서 아볼로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아볼로는 유명한 학자요 웅변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름도 없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데려감을 당해서 배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볼로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저도 솔직히 집사 정도의 사람에게 불려가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 앞에서는 겸손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서 복음을 들었고, 마침내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가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보석을 담는 보석상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도 겸손할 때에는 하나님께 쓰임 받았지만 그러나 교만하여질 때에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의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복음을 들으면서 아볼로는 아가야로 가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누구든지 소명을 받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아볼로에게 추천장을 써주었고, 아볼로는 아가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헬라는 나라를 두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마게도냐와 아가야였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에 와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을 주었는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28절에 나옵니다. 그의 성경지식을 통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교훈도 발견하고, 축복도 발견하고 위로도 발견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다른 많은 것을 발견해도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헛되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3) 끝으로 27절의 아볼로는 마침내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는 말씀처럼 놀라운 변증적 효과를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도 다른 어떤 종교보다 이론적 토대가 있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아볼로 같은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 중생의 체험을 하고 복음으로 무장을 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해석을 바로 해야 합니다. 왜 이단이 나옵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우리 사이에는 두 가지의 간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문화적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영적 간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때에 우리의 편견이 없어져야 되고, 우리의 고정관념이 무너져서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마음문을 열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역사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에 일어납니다. 이 쓰임 받음은 먼저 성경을 바로 해석해서 은혜가 될 때에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아볼로에게 일어난 그런 역사가 오늘 이 자리에서도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열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박종광목사 / 행 18장 18~28절
우리는 지난 2주간의 시간을 통해 고린도 지역에서 사역하는 바울을 만나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이후의 여정을 잠깐 설명하고, 이어 본문을 강해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만났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수리아를 향해 배에 올랐습니다. 중간에 그는 잠깐 에베소에 들러 머물게 되는데 이곳은 전에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초반에 방문하고자 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성령께서 바울을 마게도냐로 인도하셨기에 들르지 못했고, 이제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과정에 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내내 에베소 지역에 대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에 잠깐 방문했는데, 그는 이 잠깐의 시간에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열심을 보여 줍니다. 바울 자신이 아들 같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권면했던 것처럼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했습니다.(딤후4:2)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 반응은 상당히 좋아 여러 사람들이 바울에게 좀 더 오래 있어주면 안되느냐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20절) 하지만 바울은 다음 행선지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 요청을 허락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겠다 하며 배를 타고 떠납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았던 바울의 모습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바울은 훗날 3차 선교여행 때 이 에베소에 머물게 되는데 3년을 머뭅니다. 그는 선교 여행 중 최장시간 동안 이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하게 됩니다.
한편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유다 땅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를 방문하고 자신의 선교활동을 보고합니다. 그는 2차 선교여행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팀 가운데 어떤 역사를 일으켰고,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파송해 주었던 안디옥으로 귀향하는 것으로 2차 선교여행을 마무리 합니다.
이후 18장 23절부터 21장 7절 까지는 바울의 3차 선교 여행 일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은 간단히 이정도만 말합니다.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여기에는 바울의 3차 선교 여행의 목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도했던 제자들의 신앙을 더 견고히 하며 확고히 세우기 위해 3차 선교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 정도 안디옥에 머물다 다시 선교지로 떠난 것인지는 성경에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바울은 52년 여름부터 53년 봄까지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간동안 바울은 자신의 모교회에서 여독을 풀면서 2차 선교여행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면서 3차 여행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까지가 2차 선교여행을 마무리 하고 3차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후 24절에서 28절 사이의 단락은 분위기를 달리하여 한 인물에 대해 집중하게 합니다. 이 단락에서 주목받는 인물은 ‘아볼로’라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아볼로의 고향 알렉산드리아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바울 당시 최대 규모의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B.C 332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인데, 상업의 중심지요,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 유명했습니다. 당시 이 도서관에는 49만 권의 어마 어마한 분량의 책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는 수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이 우글 거렸고, 세계 최고의 문화 중심 센터가 되었습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이 이 도시를 세우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이곳에 강제 이주 시켰는데, 그 유대인들이 크게 번창하여 당시 인구의 1/3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아볼로는 이런 환경 가운데 태어났고,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배경으로 세상 학문에도 능통하였고 성경에도 정통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도 이런 아볼로를 소개하면서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말합니다. 아볼로는 말도 잘하고, 구약성경에도 능통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볼로는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아볼로의 모습이 유독 두드러져 나타납니다. 25절은 아볼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그는 예수를 믿었던 신앙생활 초기부터 대단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배우는 것에만 열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데도 열심을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지도하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도에 관해 겸손하게 배웠습니다. 그는 배우는 것에 열정을 가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어떤 신분과 지위를 가진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학문적 풍토 가운데 고급 철학과 학문을 접한 지성인이었다면, 시장과 집을 다니며 천막 만들기로 생계를 유지했던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는 평범한 직장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만남을 보면 마치 서울대 대학원생과 여기 남항시장 난전에서 장사하는 분이 만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 관해 몰랐던 사실을 배우는 열정에 사로잡혀 아볼로는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정말 열심을 가지고 배웠습니다.
그는 또한 해외 선교를 감행하여 자신의 고국을 떠나 먼 에베소나 아가야 지방의 고린도까지 갔습니다. 아볼로는 선교에 대한 열심도 큰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대단한 열심은 이후 고린도 교회 사역에서 큰 열매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고린도 전서를 읽어보면, 교회안에 분쟁하는 여러 파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는 네 파가 있는데, 하나는 바울파요, 다른 하나는 게바, 곧 수석사도인 베드로 파요,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파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파가 아볼로 파였습니다. 고린도 전서 1장 14절에 보면 고린도 교인들이 이런식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우리는 이것을 통해 이름없는 전도자 아볼로가 유명자들 사이에 끼여 얼마나 열심히 사역했던 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는 말할 것도 없이 제자들 중 큰 형으로 사도들 중 가장 큰 명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순회 전도자로 이 고린도 교회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성도들을 훈계했습니다. 그런 유명한 이들에 비해 아볼로는 사실 내세울게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대단한 열정으로 교회 사역에 임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내 아볼로의 진가를 알아차렸습니다. 사람들은 아볼로의 뛰어난 웅변술과 교양, 해박한 성경적 지식에 감탄했습니다. 아볼로는 처음에는 교회 안에서 무시당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비교할 수도 없는 거성들인 베드로와 바울과 맞먹는 인지도를 갖게 된것이지요. 이렇듯 아볼로는 열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모습은 바울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바울 역시 비교할 수 없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열정의 사람이었고, 그 이후에도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있어 열심이 특심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바울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바울이 보여준 그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계속 진행되는 선교여행이 그것을 증명하는 현장입니다. 두 사람이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자, 다시 아볼로에게로 돌아와서, 우리는 아볼로가 등장하는 초창기의 모습을 보고 성경이 가르쳐 주는 교훈을 받았으면 합니다. 아볼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열정에 사로잡힌 사역자였습니다. 그러나, 처음 등장하는 아볼로에게는 열정만으로 부족한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초창기 아볼로는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을 아는 정확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요한의 세례까지만 알고 있었지 복음의 핵심인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열정이 있어 배운 것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도 열심으로 임했지만, 예수님에 관한 그의 가르침은 가장 중요한 복음의 핵심이 빠진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열정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가르쳤지만, 이것은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었습니다. 아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는데 십자가와 부활,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사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면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냥 의미없는 세미나이고 교육일 뿐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면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볼로의 열정은 조금 더 다듬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볼로를 다듬으시고 더 귀하게 그를 사용하시고자 그의 옆에 브리스길리와 아굴라 부부를 붙여 주셨습니다. 이들은 아볼로가 회당에서 말하는 것을 보고 아볼로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조용히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쳤습니다.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볼로의 열정은 하나님을 아는 정확한 지식이 더해졌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도움을 입어 아볼로는 비로소 사역자 다운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에베소 성도들의 추천으로 고린도 교회에 가게 되었고, 말씀을 강론함으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사람들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유대인과의 변론에서는 성경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그들을 압도하였습니다. 초창기 열정만 가진 사역자였을 때와 달리, 이후의 아볼로는 사역에서 예수님을 증거할 때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되었고, 교회와 사도의 좋은 평가도 얻게 됩니다.
이런 아볼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삶 가운데 적용할 교훈을 찾게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분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내가 열심히만 한다면 뭐든지 잘될 줄 생각합니다. 자신은 힘도 있고 건강하고, 또 일에 대한 열정도 있다 이겁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심을 가지고 임하면 나중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보는 거지요. 옛날 제가 담당하던 구역에 한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교회는 오는데 예배의 자리에는 앉지 않고 식당에서 계속 봉사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 번 주의를 주었는데 잘 바뀌지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난 후에도 예배당이 아닌 식당에서 그분의 얼굴을 뵈었는데 참으로 당황스러웠습니다. 이분의 열정은 자신의 신앙을 거꾸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열정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예배와 신앙생활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교회와 일상에서 쉽사리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열정만으로 부족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열정이 있고 지식이 없으면 그 열정은 다툼이 됩니다. 열정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더 많이 다투고 분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열정 있는 사람들이 말도 많고 사건. 사고의 주범으로 나타납니다.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의지로 교회 모임을 강하게 끌고 갈려다 많은 사람들을 상처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년때 교사도 하고, 수련회도 가고, 봉사도, 선교도 떠났던 열정있는 청년들이 나이 들어 신앙을 떠나 교회도 출석하지 않고 그 신앙이 시들시들해지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두 주먹을 꽉 쥐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기도했던 이들이 10년도 안 되어 담배 피고, 술먹고 골목길을 비틀리거리면서 다닙니다. 인생의 어떤 한 때 확 타올랐다가 그 불이 팍 꺼진 사람이 많습니다. 한번 뜨겁게 봉사하고, 그 이후에는 전혀 어떤 열정도 보여주지 못한채 다 타고 남은 재같은 인생도 있습니다. 이 모든 사례들은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타고난 재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어느 정도는 타고난 머리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바울과 달리 타고난 언변이 있었습니다. 설교자로서는 너무 부러운 은사입니다. 아볼로는 변론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말싸움으로 아볼로를 쉽게 이길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초창기의 아볼로는 열정과 언변, 구약성경에 대해 능통한 지식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조그만 지식을 가지고 복음의 풍성함을 무시한 채 “나는 다 안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 제자훈련하고, 성경공부 그런 것 나는 그런 필요없다. 이미 나는 다 배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열정과 은사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보다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아볼로는 열정과 은사에 더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정확한 지식을 가졌을 때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회 일 자체가, 또 우리의 삶 자체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바탕할 때 열심과 은사가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에 다투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앞서가고, 그 다음에 열정과 은사가 따라와야 교회가 평안하고, 가정이 평안한 법입니다. 내 마음, 생각, 열정, 계획, 경험 이런 것들이 먼저 앞서면 성도가 성도에게 상처를 안겨주고,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온갖 인간적인 철학들과 방법론들이 가득한 세속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열정은 사그라지기 마련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계속해서 내릴 수 없습니다.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활활 타오를 때가 있으면 싸늘하게 식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비가 내릴 때 , 내 마음속에 주님에 대한 열정이 활활 타오를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더욱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열정이 더욱 오래가고 지속적인 것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 뜨거운 마음과 재능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여서 식어지거나 약해지거나 쇠하지 않습니다. 열정이 식어져도 성경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더욱 강한 것이 되어 우리의 삶을 지탱해 줍니다. 우리 부영교회를 보십시오. 큰 기둥들이 사방을 둘러 건축되었습니다. 콘크리트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합니다. 그러하듯 우리 신앙도 말씀에 기초하여 건축하면 세월이 갈수록 더욱 단단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열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여러분의 열정이 더욱 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정이라는 우리의 감성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우리의 이성이 함께 협력해야 더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