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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빠의 글이 더 좋아요. 쳇 지티피 것보다 훨씬(고맙다) 나는 허리 조심해서 운동으로 항상 보강하고 있어요. 아빠 말 새겨들을게요. 차병원 진료 다녀왔는데 약 잠깐 끊어보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어요. 6개월 뒤에 다시 검사했을 때 안 좋으면 수술하고, 아니면 다시 약 먹거나 할 거 같아요... 약물 치료가 큰 차도가 없는데 약 오래 먹는 게 그리 좋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아무튼 그래도 컨디션은 이상무입니다. 여름 더위 조심, 긋나잇!(공주가 아빠 딸로 태어나서 고생이 많구나... 수술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시기 조절을 좀 더 하자구나! 또 통화하자. 답장하지 마시라 굿 나이) 아빠 택배 잘 받았어요. 고마워요. 잘 먹고(영양제), 잘 쓰고(요추 방석), 잘 입을게요. 고마워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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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치는 청소년 문제가 심각합니다. 정부는 강력·중대·반복 범죄에 한 해 촉법소년 연령을 현행 만 14세 미만에서 13세 미만으로 낮추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추가 의견수렴과 제도 개선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행법상 촉법소년은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으로,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 대신 소년법상 보호 처분을 받습니다. 최근 5년간 촉법소년 경찰 검거 인원은 약 2.2배 증가했고, 특히 폭력·절도·성범죄가 늘어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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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정부는 강력·중대·반복 범죄에 한 해 연령을 1살 낮추(13세, 6학년)는 조건부 하향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첫사랑은 순미라는 여학생이었고, 5학년 때 비행 청소년들을 동경하면서 중2(15세) 때 도박-외박-문신-도둑질을 했고, 고1(17세) 때 불량 서클을 시작했습니다. 촉법소년 문제는 50년 전에도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촉법소년 하향 법>, <검사 공소권 폐지> 문제는 실정법과 자연법의 문제로 봅니다. 이러나저러나 실정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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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꿔보면 공소권 완전 폐지를 주장하는 쪽과, 촉법소년 나이 하양을 강력 주장하는 입장은 집단이기주의일 개연성이 아주 높습니다. 명분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이지요. 성경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은 턱도 없다고 했고, 오늘 이사야서(9;1-7)에서는 <한 아이가 통치하는 나라>를 언급합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 정신의 마지막 변신을 <어린아이>라고 말합니다. 낙타가 짐을 지고, 사자가 "아니오"를 외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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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예(Yes)를 말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합니다. 어린아이는 과거에 묶이지 않고 미래를 여는 창조자의 상징입니다. 어린아이는 순수하고 망각할 줄 알며, 무엇보다 <놀이하는 존재>입니다. 놀이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 자체를 긍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예(Yes)"라고 말하며 새로운 가치와 세계를 창조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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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린아이는 순진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공로를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존재입니다. 천국은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선물로 받는 나라입니다. 니체도, 성경도 <어린아이>는 기존의 세계를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존재입니다. 둘 다 자유롭고 열린 존재라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니체의 어린아이는 스스로 놀이의 규칙을 만듭니다. 그는 창조자입니다. 삶 자체가 예술이며 인간은 자기 삶을 작품으로 만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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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창조적 놀이하는 존재는 놀이를 창조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예수님은 놀이를 은혜의 열매로 보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놀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지만, 하나님을 아버지로 신뢰하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천국을 살아가는 어린아이처럼 기쁨과 자유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회는 왜 어린아이를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아이들이 위험해져서일까, 아니면 어른들이 '어린아이'의 의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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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흥미로운 점은 촉법소년 문제를 법률의 영역에서 철학과 신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는 데 있습니다. 대부분의 논쟁은 "처벌을 강화할 것인가, 보호를 강화할 것인가"에 머물지만, 이 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대체 어린아이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그 질문은 사회 현상보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향합니다. 첫머리에서 자신의 학창 시절 비행 경험을 솔직히 고백한 대목도 설득력을 높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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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법소년은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인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령을 한 살 낮춘다고 범죄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 것도, 반대로 제도를 그대로 두면 해결된다고 믿는 것도 모두 지나치게 단순한 해법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실정법과 자연법의 긴장을 언급한 것은 법은 질서를 세울 수 있지만 인간 자체를 새롭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글의 중심부는 니체와 성경을 연결한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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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어린아이는 기존의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존재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어린아이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은혜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두 사상은 출발점은 다르지만 모두 새로운 삶은 '어린아이 됨'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는 만납니다. 이 연결은 철학과 신학을 대립시키기보다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입니다. 다만 현실의 촉법소년과 성경이나 니체의 '어린아이'는 같은 개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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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촉법소년은 보호와 훈육이 필요한 법적 대상이고, 예수님과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는 <존재의 태도와 인간 정신의 상징>입니다. 이 둘을 동일시하기보다 육체는 성장했지만 영혼은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사회라는 방향으로 연결하면 논리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이 던지는 메시지는 처벌 강화나 제도 개선을 넘어섭니다. 아이들이 폭력적으로 변한 이유만 묻지 말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고 신뢰하며 성장할 수 있는 공동체를 어른들이 만들어 왔는지도 함께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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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범죄를 억제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를 다시 어린아이답게 만드는 것은 가정과 공동체, 그리고 사랑과 신뢰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촉법소년을 둘러싼 법적 논쟁을 넘어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어린아이 자체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신뢰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아니었는가?
2027.7.20.mo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