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초심닦기(8) / 위선환 (시인)
시인들은 상당기간 내면화되지 않았습니까. 또 그런 것을 긍정하는 쪽에서도 자기들이 이런 내면화의 연대를 고착화시키고 있고요. 내면화는 자기문학이라고 하는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거든요. 한계에 자족하고 있죠. 도취되어 있고. '이런 문학에 제한되어서는 우리 문학은 점점 좁아지고 자기를 끊임없이 모방하는 것 밖에는 안 되겠다. 타자 읽기 없이는 심화되어야 할 자기내면도 구제 받을 수 없다. 타자가 없이 어떻게 자아가 성립되는가? ' 하는 이 상대성이야 말로 자기 존재의 최고 형태인데 이것이 없이 자기 방안에 자기를 가둬둔다면 끝내 자기도 없어지는 거죠. 최선의 이기주의를 위해서도 최선의 이타주의와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문학에서 수용하여야 합니다.
내면을 확대하면 외부가 되죠. 자아가 확대되면 우주라는 거죠. 우주가 본래 있고 우주와 대립해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주 속에 있는 나이고 자아 속에 우주가 있다는 거죠. 이런 점에서 문학에 있어서도 타자로서의 상상력, 여기까지 가야 한다고 나는 꿈꾸고 있죠.
- 고 은 / '시와 시학' 2007년 봄호 / 대담에서
ㅇ시적 형식에서 볼 때 미래파의 시는 완전히 줄글로서 행갈이를 무시하는데, 空이 택스트에 개입함으로써 줄글 아래서 새로운 행갈이가 태동하고 창조되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감수성에 맞는 새로운 행갈이나 장단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요즘의 생태시도 줄글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미지 범벅, 재유나 환유의 범람, 이런 것들이 기본적으로 감수성 측면에서 수용자, 즉 시의 소비자들에게 무엇을 제시하는가 입니다. 감성의 과소비와 대범람을 일으키지요. 풍요의 환각과 온갖 다양한 욕망이 돌출하고 요란법석이죠. 이 요란법석은 곧 자연을 압살할 정도의 이탈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그 내용에 있어서 생태나 생명을 지향하는 생태시까지도 미래파의 시와 마찬가지로 줄글을 극복하지 않으면 그 진정한 활로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 김지하/ '시와 사람' 2007년 봄호/ 대담에서
'미래파 논쟁'은 궁극적으로 미적 현대성의 문제다. 무엇보다 '미래파'라는 용어 자체가 미래라는 '아직 아닌not yet' 시간에 대한 사유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과거와는 다른, 혹은 현재를 극복하는 '내일'의 변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문화적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을 혐의한다. 이 용어의 대두가 세대론적 전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러한 이념적 지향성 때문이다. 항간에는 '논쟁'이라 부르지만 정작 뚜렷한 갑론을박 없이 최근 시의 '새로움'을, 그것의 기원과 출처와 형태들 밝히고 분석하려는 담론들이 줄을 잇는 것도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이전의 한국시와는 다른 차이점, 변별점을 우선 발견하고 규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른 것이다. 환상성과 감각의 활성화가 시적 새로움의 핵자로 전경화하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존의 시적 재현방식이 현실의 유동성을 포착하기에 미흡하고 인지적 충격의 효과도 적기 때문에 예술적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진정한/진정한' 미적 재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젊은 시인들은 기존의 서정시 양식이 현실로부터 유리된 채 하나의 관례가 되고 있음을 문제시하고 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 주체의 분열과 해제, 혼종적이고 다종적인 화자, 환유적 어법의 우세와 환상의 미학등을 바탕으로 서정시가 견지하는 동일성의 원리를 부정하는 시의 대거 등장은 문학적 규범으로 자리잡은 서정(시)의 구조를 內破하는 새로운 시학의 출현을 증거한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 '다른 서정'이라는 수사는 이를 총칭하는 표현으로, '미래파'라는 단어 또한 최종적으로 이러한 '다른' 서정의 창조와 탄생을 혐의한다.
문제는 이 '다름'의 특화가 미학적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을 정당화 하기 위해, "전대의 언어와 미의식의 압력에서 자유롭고 자재한" 시라는 자기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서정의 원리를 초역사적 보편으로, 불변의 권위로 단정하는 데 있다.
하지만 한국시의 역사 속에는 서정-反서정- 非서정의 흐름이 공존하며, 그렇기 때문에 최근 시의 '다른'서정이 이러한 다양한 詩史的 지형도와 어떻게 연계되고 이반되고 탈구되는지를 섬세히 분별할 필요가 있다. 이는 서정(시)의 원리와 구조가 초역사적인 '일반'이나 정형화된 '법칙'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지금의 시는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간파하지 못한 현실과 법칙, 경험과 지식 간의 불일치에서, 그것이 만드는 틈과 틈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렇듯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자리가 곧 시인들이 존재하는 곳이자 그들의 실존성이 보장되고 유지되는 곳이다. 이러한 관점을 유지할 때, 비로소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해진다. 예컨데 지금의 젊은 시인들은 균열과 해체를 정말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들 시의 시적 주체들은 계몽의 원리를 부정하고 非계몽, 反계몽, 無계몽을 구현하는 존재들인가? 이를 시에는 항간의 비판처럼 공동체에 대한 사유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유가 전혀 부재하는가? 스스로를 '감각으로 사유하는 종' 이라 칭하지만, 그것이 이들 시에 어떠한 이념의 추구도, 진리의 탐색도, 윤리적 실천도 없다는 의미와 같은 것인가? 이들의 시가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의 표현이라면, 이들의 詩作은 무엇을 위한, 누구를 향한 발언인가? 이들이 전대의 언어와 미의식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재한 자들이라면, 이들의 문학적 성장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이며, 지금의 시 세계를 가능케 한 배경과 원천은 무엇인가?
- 강계숙 / '문학과 사회' 2007년 봄호
<시 문예지들 '미래파' 논쟁 특집>
[연합뉴스 2006-12-06 16:53]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연말을 맞아 시 문예지들이 '미래파'로 불리는 젊은 시인들과 관련된 시단의 논쟁을 특집기획으로 잇따라 정리했다.
월간 '현대시' 12월호는 '2006 올해의 시를 말한다' 코너에 '2000년대 미래파 시 논쟁과 탈국가ㆍ탈장르적 상상력'이라는 주제의 특별좌담을 실었다.
문학평론가 조강석씨는 "올해 미래파 논쟁이 가장 화제가 됐다"면서 "이는 젊은 시인들이 시단에 진입하는 진입장벽을 낮추고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도록 했고 동시에 기성 시인들에게는 전체적인 우리시의 지형 속에서 나는 어떤 미학을 갖고 시를 쓰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던져줬다"고 평가했다.
사회를 본 문학평론가 이경수씨는 "첫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의 시를 논하면서 미래파 시 담론을 끌어들이는 것은 그다지 좋은 방식이 아니다"라면서 "이는 시가 지닌 개성을 섬세하게 보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시인 차창룡씨는 "미래파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시인들은 자신의 시가 낡은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유행에 휩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니까 미래파는 사실상 실체가 없는 것이다. 다만 편의적인 용어였을 뿐인데, 일종의 문학사조로 취급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
계간 '시작' 겨울호는 젊은 시인들이 보여준 환상성을 기획특집으로 다뤘다. 미래파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뤘다.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는 "환상성은 미래파 시인들의 시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서 "이들을 옹호한 평론가들이 시의 전위성이 새로운 미학적 언어표기로 작용한다는 점만 되풀이했을 뿐 어떤 점에서 무엇이 좋은지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 교수는 "미래파 논의 이후 이들과 유사한 엽기적 환상 서술시가 늘어났으며 최근 환상적 경향의 시들은 대부분 장황한 서술성의 산문시 형태를 취하는데, 이름을 가리고 그들의 시를 읽으면 어느 것이 누구의 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모든 문학작품은 나름의 크고 작은 장점이 있다며 "이들의 시가 해석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아서 사유와 상상력의 폭을 넓혀주었다"고 덧붙였다.
jsk@yna.co.kr
ㅇ 미래파’ 시 논쟁 매듭 짓는다
[서울신문 2006-12-08 08:57]
‘미래파란 무엇인가.’ ‘탈(脫) 서정’과 ‘환상성’ 등 21세기 들어 새롭게 떠오른 젊은 시인들의 경향성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기존 시단에서는 “그럼 우리는 과거파란 말이냐.”며 이같은 분류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 쓰기는 1990년대와는 다른 2000년대 우리 시문학의 현주소임이 분명해 보인다.
연말을 맞아 문예지들이 7일 미래파로 불리는 젊은 시인들과 관련된 논쟁을 특집기획으로 잇따라 정리해 눈길을 끈다. 월간 ‘현대시’ 12월호는 ‘2000년대 미래파 시 논쟁과 탈국가·탈장르적 상상력’이라는 주제의 특별좌담을 실었다.
사회를 본 문학평론가 이경수씨는 “2006년 문단에서는 ‘미래파’ 논쟁이 가장 활발한 담론을 형성했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미래파 시 담론은 시가 지닌 개성을 섬세하게 보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조강석씨는 “미래파 논쟁은 젊은 시인들이 시단에 진입하는 장벽을 낮추고 나름의 영역을 확보하도록 했다.”면서 “우리 시의 지형 속에서 ‘나는 어떤 미학을 갖고 시를 쓰고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던져줬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시인 차창룡씨는 “미래파라고 이름붙일 수 없는 시인들은 자신의 시가 낡은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유행에 휩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미래파는 사실상 실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종합문예계간지 ‘리토피아’ 겨울호에서 문학평론가 김남석씨는 “최근 시인들은 90년대 시인들과도 격차를 보이고 있다.”면서 “전통, 관습, 타자(他者)지향에서 멀어지려는 욕구가 더욱 더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남들이 읽지 않아도 ‘내’가 쓰고 발표하면 가치 있다는 생각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하상일씨는 “탈 서정이 21세기를 선도할 미래파적 표상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전통 서정을 고수하며 문명적 세계와 맞서는 시인들을 ‘과거파’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며 미래파 논쟁을 경계했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ㅇ<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시 / 정합적인 언어로 씌어진 시의> 정합적인 언어 운용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어, 시행, 시련에 이르는 모든 차원의 반복, 반복을 통해서 서정시의 언어는 그 최초의 자리로 돌아온다. 우리 시의 특이한 구성 방법 가운데 하나가 首尾相關인데, 이런 언어는 대표적인 회귀성 언어다. 둘째, 언어의 질감에 대한 배려, 언어가 가진 질료적 성격을 배려하면서, 곧 음운과 리듬을 통합하고 변용하면서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는 일, 이것은 고정된 주체가 언어의 세부까지 스며드는 방식이다. 셋째, 주체와 연계된 풍경들, 이로써 시의 풍경이 주체의 내면 풍경이 된다. 넷째, 회귀적인 시공간의 창출, 고정된 주체는 轉變하는 주체가 아니므로, 대상들이 주체의 주변에 배치된다. 유년(다른 기억을 허용하지 않는 닫힌 시간), 사랑하는 상대(다른 사람을 허락하지 않는 닫힌 시간), 가족(소수 구성원만을 거느린 닫힌 공간), 소규모 공동체(사회 역사적 지형과는 절연된 공간) 등이 흔히 이런 주체를 둘러싼다.
ㅇ<주체와 대상의 불일치를 적어내려간 시 / 비정합적인 언어로 씌어진 시의> 비정합적 언어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어, 시행, 시련과의 연관을 의도하지 않는 모든 차원의 배제, 비정합적인 언어는 단일한 주체와 대상으로 수렴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둘째, 언어의 질감이 아닌, 통사적인 구문에 대한 배려, 언어는 음운 차원에서도 율격 차원에서도 통일되지 않는데, 다만 비슷한 구문을 배치하여 전언을 통일한다. 구문의 통일은 주체가 세계와 자신을 매개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셋째, 주체와 분리된 채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이행하는 진술, 이러한 진술은 주체와 세계의 불일치를 드러내는 데 유력하다. 넷째, 개방된 시공간의 창출, 주체로 수렴되지 않는 세계는 그 자체로 곤혹스럽다.
- 권혁웅 / <문예중앙 > 2006년 여름호
* 위선환 시인 전남 장흥 출생 1960년에 서정주, 박두진이 선選한 용아문학상으로 등단 1970년부터 이후 30년간 시 절필하다가, 1999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 시집 『새떼를 베끼다』 『두근거리다』 『탐진강』 『수평을 가리키다』 『시작하는 빛』 외, 합본시집 『나무 뒤에 기대면 어두워진다』 시 에세이집 『비늘들』 현대시작품상, 현대시학작품상, 이상화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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