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오는 1965년 중앙대학교 2학년 재학시, 중앙대학교 학생대표 자격으로 6․3한일회담비준반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제적을 당하고 언제 복학될지 모르는 암울한 상황에서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이듬해인 1966년 3월에 정식대학은 아니지만 4년제 대학교 졸업자와 동등한 학력이 인정되는 ‘중앙농민학교’에 입학하였음.
- 그러나, 당시 박정희 군사정권은 중앙대학교에서 제적당한 이재오를 내버려두지 않고 1966년 4월에 군대로 강제징집해버렸음. 그러나, 다행히 군에서 ‘군인파견교사’(군부대가 대민서비스 차원에서 고학력을 가진 군인을 선발하여 교사가 부족한 인근학교에 파견시키는 제도)로 선발되어 군부대 인근에 있는 이동중학교에 1967년부터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으며, 또한, 이재오를 아끼는 대학교수들의 배려덕분으로 중앙농민학교 학적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되었음.
- 1970년 중앙농민학교(나중에 국민산업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국민대학교로 통합됨)를 졸업하고 바로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였으며, 1972년 교육학석사로 졸업하면서 2종교사자격증을 가지고 1973년부터 기간제교사로 근무하였음.
- 교사로 근무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였고 30년간의 민주화운동으로 5차례의 투옥을 당하면서 10년간의 감옥생활을 감내해야 했으며, 군사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28년만에야 비로소, 모교인 중앙대학교에 복학할 수가 있었고, 입학한지 32년만인 1996년에 마침내 졸업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임.
1966년 1월.
나는 3개월 여의 수배생활 끝에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한일회담 비준반대 시위를 주동한 혐의였다.
해가 바뀌고 군사정권은 시위학생들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할 때라 다행스럽게도 나는 구류 29일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처분을 받았다.
대신 구류를 살고 오자마자 바로 입대해야만 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큰 사회의식이 있다거나 남다른 애국심이 있어서 시위를 한 건 아니었다.
그냥 과대표로서 농어촌사회연구회를 하니까 자연스레 그룹의 리더로서 해야 할 일을 짧은 기간 동안 한 것뿐이다.
그 이유로 결국 제적되고 군에 강제로 끌려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미래가 아득하기만 했다.
시간이 우뚝 멈춰서버린 것만 같았다.
하루 하루를 내 몸이 잘 버텨주기만 바랄 뿐 다른 바람은 없었다.
몸이 힘드니 뭔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은 나중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하루는 점심을 타러 갔던 배 일병이 올라오면서 웬 개를 한 마리 끌고 올라왔다. 그러더니 주인 없는 개라면서 잡아먹자고 나를 꼬드겼지만 나는 네가 잡아먹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다.
주인 없는 개가 어디 있을까 싶어 찜찜하긴 했지만 하도 졸라대니, 측은하게도 여겨져서 그렇게 하라고 응낙하고 말았다.
배 일병은 개를 끌고 마을로 내려가서 적당하게 요리를 해갖고 올라왔다. 평소에 개고기는 입에 대지 않았지만, 배도 고프고 배 일병도 권하고 해서 모처럼의 포식에 배를 두들기며 우리들은 마냥 흐뭇해했다.
찜찜했던 대로 며칠 지나 부대엔 난리가 났다.
배 일병이 끌고 온 개는 중대장이 애지중지 기르던 것이었다.
나와 배 일병은 끌려가서 엄청 맞았다.
그래도 그 개 때문이었는지 이후 군생활은 평탄해졌다.
사고를 친 덕분에 군에서 좋은 기회가 생겼다.
전방을 비롯한 시골마을 학교에 선생님들이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군인을 교사로 파견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 제도를 어렵사리 통과하여 이재오 상병은 남은 군 생활을 이동중학교 교사로 보내게 되었다.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학교 선생님 생활의 시작이었다.
개가 목숨 바쳐 내게 준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