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타령
도시락, 아니 우리 어릴 적에는 벤또라고 했었지. 우리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인 50년대 중반, 오전반과 오후반이 나누어져서 도시락이 필요 없었으나 고학년이 되면서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운 때, 내가 다닌 학교는 대구의 변두리 초등학교라 도시락을 사오지 못하는 애들도 많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세계아동보호기구(CARE)에서 버터를 짜고 난 탈지분유를 끓여 양동이로 퍼다 급식하였고, 이는 나중에 옥수수 가루로 대체되어 죽으로, 또는 쪄서 떡으로 주었다.
싸오는 밥은 어땠는가? 대개가 보리밥이고 꽁보리밥은 있었어도 온통 쌀밥은 없었다. 사실 보리밥을 하려면 일단 한번 보리를 삶아서 쌀을 안칠 때 넣어야 한다. 물론 배급되는 압맥과 나중에 나온 할맥은 그냥 쌀과 같이 밥을 하여도 되지만. 나 역시 우리 집은 그런대로 살았어도 대학을 다니던 60년대 중반까지 본가에 내려가면 보리를 섞어 먹었다. 산에 한창 다닐 때 하산 후 보리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면 화내는 친구가 있었다. 어릴 적 꽁보리밥만 먹었는데 지금 왜 그걸 먹어야 하냐고? 그러나 나는 병원 점심에 보리밥이라 표시되어 있으면 ‘야호’ 하며 이를 반긴다.
내가 싸가는 도시락 반찬은 부잣집답게 쇠고기 장조림, 삶은 계란과 프라이, 아니면 계란말이 등이었고, 어떨 때는 표가 나지 않게 계란을 부쳐 밥 아래 깔아 주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급우들은 멸치볶음, 콩자반, 이것도 안 되면 그냥 고추장에 생오이도. 그러니 내 도시락 찬은 급우들의 별식이라 아직도 그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우리 너 벤또 반찬 많이 훔쳐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위하여 집에서 아예 반찬을 넉넉히 싸주었다. 한번은 도시락 찬 통이 닫기 질 않고 불룩 솟아올라서 열어보니 삶은 거위 알이었다. 마당 너른 집에 키웠던 거위의 알, 그걸 보는 순간 비위가 약한 나는 속이 메슥메슥해오고, 이를 본 다른 급우들은 신이 났다. 계란 크기의 한배 반이 오리 알이고 오리 알의 한배 반이 거위 알이니 계란 두 개보다 더 큰 셈. 나는 못 먹고 옆 급우의 고추장과 바꾸어 먹고 집에 돌아와 도시락을 집어 던지며 반찬으로 그걸 왜 넣었느냐고 투덜댔더니 몸이 약한 나를 위해서 넣었다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도시락은 계속 싸 다녔었지요. 책가방에서 책을 버리는 것은 잉크가 새었거나 도시락 찬의 김치 국물이 배어 나왔을 때이다. 겨울철 도시락을 난로 위에 얹어 데워먹었다는 건 드문 일이었지요. 왜냐하면 겨울철이 되면 난로는 일단 설치하나 불을 때는 건 별개이니까. 즉 엔간히 춥지 않으면 불을 지피지 않았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하숙을 하며 도시락을 싸 다녔으나 학교 가까이에 하숙집이 있어 가서 먹기도 하였지요. 이것도 인턴 숙소에 들어가며 끝이 났다.
교환교수로 호주에 있었을 때는 처는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다니는 애들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지요. 샌드위치, 마실 것과 과일 하나 등으로. 어쩌다 처가 김밥을 싸주면 주변 애들이 맛을 보느라 다 뺏기곤 하였다. 그 시절 호주가 우리보다 잘 살았는데도 도시락은 각자 지참이었지요. 우리나라는 학교급식으로 바뀌어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다.
애들 대학 입학시험 보기 전에는 휴일에 처가 다섯 개의 도시락까지 준비한 적도 있었다. 애들 각자 점심과 저녁으로 두 개씩과 내 등산가서 먹을 도시락하나까지.
난 아직도 도시락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어 언젠가 세미나가 열리는 제주에 늦게 도착한 탓으로 혼자서 롯데호텔 모모야마의 일식당에서 도시락을 시켰다. 나온 식사는 훌륭하였으나 부족한 것이 두 가지가 있어 주방장을 불렀더니 소공동 롯데호텔의 알던 주방장이 나타나서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하여 첫째는 생선구이에 곁들인 다이꽁 오로시(무를 간 것)를 기계로 갈았어요? 하고 물었고 두 번째는 우메보시(일본 매실 장아찌)가 물러서 맛이 없다고. 그 후 제주 롯데호텔에 가서 그 주방장에게 연락을 하면 항상 우대를 받곤 하였다. 전에 필동병원에서는 토요일도 근무하던 시절이라 오후에 새마을호를 타고 대구 본가를 가려면 미리 주문한 충무로 ‘진고개’ 식당에 찬합정식을 찾아 기차를 타고 가며 먹었었다. 이 글을 쓰며 ‘진고개’ 식당을 찾았더니 아직 그대로 있으나 찬합정식은 그만 둔지 한참이나 되었다고 한다. 몇 년 전 일본 규수 사가현의 다께오에 자유여행으로 간적이 있었다. 여기가 에키 벤토(역에서 파는 도시락)로 유명하여 전국 콘테스트에서 1위를 한 곳이라 점심으로 사먹어 보았다. 역시 그냥 일등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맛이 있었다.
호텔에서 학회 중 luncheon symposium에 나오는 도시락은 비싸도 맛이 있지요. 하나의 흠은 안주만 먹고 술은 없다는 점과 넉넉한 식사 후 오후 강좌는 꿈속에서 헤매게 된다는 것. 한 달에 두 번 씩 내가 위원장으로 진행하는 의사협회 저녁회의에서 지금도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는다. 청와대에서 먹는 10 만 원짜리가 아니고 여러 기성 도시락회사에서 나오는 만 원 정도의 도시락을 군말 없이 반찬하나 남김없이 다 먹는다.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은 음식을 남기면 죄 짖는다며. 처가 별식으로 주먹밥을 만들어 여름철 지리산 산행 때 가지고 간적이 있었다. 김밥은 쉬 상하니까 그 전날 출발이고 다음날 점심이니까. 속에 쇠고기 졸임, 멸치, 우엉을 넣은 세 가지로 계곡에서 물놀이 후 잘 먹었다.
이글을 쓰면서 처한테 보여주니까 자기는 초등학교 점심때마다 집에서 뜨거운 밥을 가져다 주었다고 약을 올린다.
첫댓글 난 그 시절, 겨울철마다 벤또에 김치 썰어서 얇게 깔고, 참기름을 뿌리고, 그 위에 밥을 퍼 얹은 도시락이거나,
거기에 날계란 하나 더 추가된 것을 주로 먹었었기 때문에, 난로에 데워 먹는 것이 아주 중요했었습니다.
벤또를 채곡채곡 올려놓다 보니 제일 아래 것은 밥이 타 버리고, 두번째 것이 제일 적당히 데워졌었습니다.
벤또가 데워지면서 참기름 의 꼬소한 냄새가 추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