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돌아가신 아버지는 나에게 아득한 그리움이다.
당신 나이 쉰이 될때까지도 라면이 술안주인줄로만 아셨던 분...
그만큼 술에는 문외한이기에 담배로만 계산서를 뽑으셨던 무미건조함...
남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자식들에겐 누구보다 혹독했던 호랑이...
하지만 "쭈쭈바" 가 뭔지 궁금해 고사리 손에 돈을 쥐어 주시며 아주 가끔씩은 순진
한 표정을 지으시던 분...
이런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가 바둑(5급)이었는데, 동시에 어머니께서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것 또한 바둑이었다. 이유는 아버지께서 바둑을 두는 날이면 방바닥(장판)
에 담배빵으로 도배를 해 어머니의 심기를 흐려 놓았기 때문이다.
이미 밝혔듯이 "목숨을 걸고 둔다" 는 조치훈의 말에 감동해 가훈으로 착각하고 바둑
을 두는건 나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한나절 동안 바둑을 둬
도 쌓이는건 사석이 아니라 담배재(2-3갑분량)와 담배빵 뿐이었다.
여하튼 아버지께서 바둑을 두는 날이면 아궁이에 불을 지필 필요가 없을 만큼 어머니
의 머리에선 어느새 시꺼먼 연기가 피어 올랐다. 방바닥에 빵꾸가 나서 입는 재산상
의 손해 보다 사랑하는 지아비의 건강이 심히 걱정되기에 그런다는걸 그 뉘라서 모르
겠는가.
어머니의 스팀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아침 밥상을 물리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오늘 친구 불러서 바둑이나 한판 할까나?" 하고
어머니께 응수를 물으셨는데 그러면 어머니께선 소매를 걷어 팔을 쭉 내미시며
"왜? 방바닥 말고 내 팔에도 한방 놔 주시구랴!!" 라며
최강으로 반발을 하셨다. 가정의 평화를 지키려는 가장의 책무 때문인지 아니면 소매
를 걷어 올린 어머니의 팔뚝에 섬뜩한 두려움을 느꼈는지 확인된바는 없지만 아버지
께서는
"이런~ 오늘 약속이 있는걸 깜박 잊었네그려" 라고
말씀하시며 반발은 커녕 노타임으로 굴복을 하시곤 했다.
근엄했던 가장의 체통은 담배빵이라는 축에 걸려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세상에서 유
일한 취미인 바둑과도 생이별을 하며 어머니의 특별사면만을 기다리던 어느 봄날이었
다.
불경한 표현이지만, 당신의 간을 푸아그라로 착각하셨는지
"나 내일 친구 불러서 바둑 둘래!!!" 라고
단호하게 외치시며 화점도 소목도 아닌 천원에 초수를 날리셨다.
순간 나를 포함한 아버지의 꼬붕들(형과누나)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아니 경악하
지 않을수 없었다. 경천동지할 격전의 서곡이었다.
그렇다. 제1회 응씨배 결승에 버금가는 빅뱅이 시작된 것이다. 예상대로 어머니께서
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천원 옆으로 백2를 붙이시며 즉각 반발을 하셨다. 아버지의
꼬붕들은 오늘도 역시 아버지의 불계패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허~걱 "준비된 수"...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준비된 수가 있었다. 어디서 배워 오셨는지
"바둑 못두게 하면 뱅기타고 동남아 일주일간 여행 다녀 온다" 라고
하시며 역으로 모자를 씌워 갔다.
<비행기>- 이 얼마나 엄마의 심장을 얼어 붙게 만드는 무지막지한 놈이란 말인가? 때
는 바야흐로 1987년 11월. 김현희의 칼기 폭파사건에 치를 떠시며 가족중 누구도 뱅
기를 탈수 없다는 엄명을 내리셨던 어머니. 해가 바뀌어 완연한 봄날이 될때까지도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머니의 심장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의 약점을 담보한채 사악한 수를 두신 거다. 초속기의 대모였던 어머니
께선 그때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던 장고를 시작했다.
1분... 2분.... 3분..... 4분...... 그러나 5분이 채 못되어서 어머니께선 백4로 두
점머리를 두들겼다.
"그럼 나랑 당신 꼬붕들도 같이 데리고 가!"
최강이다. 듣도 보도 못한 묘수다. 여러분은 초반 네수만에 묘수 놔왔다는 소리를 들
어보았는가? 하지만 그건 분명 묘수였다.
검토실에서 참고도가 쏟아졌는데 다들 백의 불계승을 낙관하는 분위기였다.
꼬붕1- "이젠 돌을 던지시겠지"
꼬붕2-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바둑은 돌을 잘 던져야 한다고...
잘못 던지면 되려 자기 대굴빡이 개지는 수가 있다라고..."
꼬붕3(나)- "엄마 쭈쭈바 한턱 내셔야 해요^^ 헤헤"
순간 환청인지는 모르겠지만 "막내야 쭈쭈바는 아빠가 한턱내마" 라는 어쨋든 기분
째지게 만드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버지! 전 밤맛쭈쭈바가 좋아여^^ 히히"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흑5수가 떨어졌다.
"그것도 안되면 내 꼬붕 셋 전부 바둑 가르켜야~~~지"
신의한수다. 말로만 듣던 빼도 박도 못하는 신의 한수 바로 "진신두" 였다. 괴로우셨
을거다. 나쁜것두 아니고 지새끼 지가 바둑 가르치겠다는데 그걸 무슨수로 말리겠는
가? 어머니께서는 그날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지존 이창호를 포함한 토종국내기사중
누구도 해본적이 없다는 이틀걸이 장고에 들어가셨다.
결국 어머니께선 아침 밥상을 올림과 동시에 돌을 거두셨다. 추측해보건대, 애들 가
르칠때 담배를 안핀다는 조건을 걸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아버지가 담배를 끊을
수 없는 사실 또한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신 어머니기에 행여 바둑 가르친답시고 자
식들이 담배로 인해 건강에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되셨을꺼다.
어머니께서 하루 종일 옆에서 지키고 있을순 없는 노릇이잖은가.
거기에다 꼬붕은 오야붕을 일러 바칠수 없다고 직접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반나절을 두던 한나절을 두던 반갑이상 피지 않는다는 맹세와 담배빵 하나에 한가치
씩 줄인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아버지께선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바둑세계로 컴백하
실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의 꼬붕중에 아버지께 직접 바둑을 사사받은 이는 없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인 1986년 여름 어느날, 초등학생 이창호가 전문기사가 되었다
는 소식에 당신 일처럼 기뻐하시며 어린 아들을 불러 앉혀 놓고 서는
"너 저꼬마가 얼마나 대단한지 아니?" 라고 물으셨던 아버지...
"모르겠지.. 암 모를꺼야.. 저 꼬마가 판검사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란다"
89년 KBS 바둑왕전을 필두로 그 육중한 기록창고를 채워가는 이창호를 보며 흐뭇해하
시며 그에 대한 칭찬으로 침이 마를 날이 없으셨던 아버지..
"아버지!! 그뜻을 이해하기까지 15년이 걸렸습니다"
"이젠 제가 아버지의 마음을 물려받아 이창호에 대한 내리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p.s- 먼저 연재1편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 프바사 회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
리며 또한 성원에도 불구하고 생업에 종사하는 관계로 빠른 시일내에 2편 올리지 못
한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3편만큼은 2편을 올린 시간보다 빨리 올리도록 노력하
겠습니다. 리플 마니 달아주세요^^
어제 있었던 춘란배 16강전에서 다른 기사들은 모두 탈락하고 이창호9단만 남았네
요. 정말 대단합니다 이국수님. 저 어제 그거 보느라 시골도 못내려갔습니다. 지금
창밖을 보니 좀 뿧연데 우리 어머님 스팀 연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갑자기 뇌리를
스칩니다.
프바사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올해는 우리 한국바둑이 질적으로도 한단계 상
승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혹시 이국수님이랑 연락되시는분 있으시
면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구 전해주세요^^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카페 게시글
○ 자유 게시판
이창호에 대한 짝사랑을 말한다- 연재2편
천하제일팬
추천 0
조회 298
04.01.01 13:49
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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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정말 글 잘쓰시네요. 새해벽두부터 좋은글을 보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재밋게 읽었습니다. 3편 기대하겠습니다.
저두..재밌게 잘읽었습니다..점점 다음글이 기대됩니다..멋진글 또 부탁드립니다~
글재주가 보통 이상입니다 혹시나 글쓰는 일에 종사하시는지 ^^a 천하제일팬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3편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ㅋㅋ 2004년에는 천하제일님의 해가 되기를~*
ART군요
웅캬캬캬 너무 재밌네요 ㅋㅋ 그래도 어머니가 아직 약하시다는 느낌이 드는게.. 우리 아빠도 앵간한 골초신데.. 절대 네버 집안에선 담배도 못펴요 ㅋㅋ 엄마의 빠워로..
천하제일팬님께서 고맙게도 먼저 말걸고 인사를 해주셔서 방금전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궁금한것만 물어봤어요 --; 글쓰는게 직업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
전 글쓰는 일과는 무관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걍 누구에 대한 짝사랑을 심하게 하다보니 그에 대한 마음이 글로 표현되나 봅니다. 관심 가져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 대단하십니다그려... 작품성이 별 다섯개라는...
정말 재밌게 잘 쓰시네요.. 다음 편도 기대하겠습니다..
쿠하...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어머님과아버님의 결승제3국도 기대됩니다.ㅎㅎㅎ
ㅎㅎㅎ3편 기대합니다^^
정말.... 재밌네여...^^.. 3편도 기대할게여..^^/
햐........^^
가슴한켠이 아련해지는 글이네요. 다음편 기대해봅니다 ^-^
예전에 인터넷에서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소설로 본 이후로...이렇게 잼있는 글은 첨인거 같네요...정말 재밌어요~ ^^
3편까지만이라도 보고 가게 해주세요
크..뽈님 글이 더 애절하오~
애절한 뽈님 소원좀 들어주세요 ㅋㅋ 17일인가? 10며칠로 들었습니다만;; 참고하세요 천하제일팬님~
정말 이렇게 재미있는 글은 첨 보네요..본격적으로 이창호 사범님이 등장할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빨랑 빨랑...써주세요...창호사범님 천하제일팬님 ...화이팅...
글이 훈훈하고 따뜻하네요~ 사람냄새가 나는 글을, 오랜만에 넷상에서 읽을 수 있어 아주 기쁩니다~ 다음편도 빨리 써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