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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사역(2)
행 19:1-10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 설 교 >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계강현목사 / 행 19:1-10
예수 믿는 자의 삶은 주일에 교회에 한 번 나오는 삶이 아니라, 매일을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마음에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은 그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고, 그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갈 5:2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삶은 윤리 도덕적인 삶을 넘어 매일 성령님의 인도와 보호와 능력을 체험하는 영적, 초자연적 삶이다.
바울사도는 2차 전도여행 말미에 에베소에 잠간 들렀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3차 전도여행 중에 약속한 대로 에베소에 도착하여 교인들을 만났다.(cf.행 18:19-21, 행 19:1) 그런데 바울사도가 이 에베소 교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들에게는 뭔가 영적 감각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직설적으로,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v2a)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니요.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v2b) 그러는 거다. 그래서 바울이 계속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러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v3) 그러고 보니까,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고, 요한의 제자였다.
당시 수리아와 아시아 지방에는 ‘세례요한 파’라는 게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절기 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 왔다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세례 요한을 만나 도전을 받고 그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일 게다. 명절이 끝나고 다시 집과 생업이 있는 자기들의 터전인 소아시아 지방의 에베소에 와서 살았다. 그들은 요한이 전하던 ‘뒤에 오실 메시아’, ‘예수에 관한 것’(cf.행 18:25)은 알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긴 했지만, 만나지도, 믿지도 못한 채 세례요한을 보다 더 숭상했다고 전해진다. 요한의 세례만 받았을 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지 않았으니,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이렇게 그들의 문제를 파악한 바울 사도는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전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v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기쁨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데, 12명쯤 되는 사람이 그렇게 성령세례를 받게 되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그림자일 뿐이고, 진짜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구원받아 삼위의 이름으로 물세례와 더불어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도 교회 안에 이런 비슷한 부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에베소 교인들처럼 예수 믿고 세례 받은 것에서만 머물러 있고, 성령 하나님을 모르는 교인들이 있을 수 있다. 또 교회에 나와서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성령이 없는 예배를 드리는 교인이 있을 수 있다. 일주일을 살면서 한 번도 성령님과 교제하지 않고 사는 교인들도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이런 바울의 질문을 오늘날도 신자들에게 동일하게 던진다면, “예!”라고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거다.
물론 “예, 나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고 매일 그분과 동행하고 느끼며 삽니다.”라고 대답하실 교우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을 거다. “예, 내가 예수님은 믿지만, 성령을 받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예, 내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이 내 속에 들어오신다고 목사님이 가르쳐서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솔직히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신지, 성령님이 어떻게 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지 느껴보거나 체험해보거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 “성령님이 좀 더 확실하게 나를 인도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다양한 대답들이 있을 거다. “여러분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나는 ‘바울사도가 오늘 이 시대에 우리 교회에 강사로 온다면 어떻게 물어보실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오늘 설교를 준비했다. 아마도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까 싶다.
1.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님이 임하신 줄 아십니까?
왜냐하면 성경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시기 때문이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이미 마음을 감동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을 정식으로 영접하는 기도를 하는 바로 그 시간에 잡신이 아니라 거룩한 성령님이 우리 속에 쑥 들어오신다. 롬 8:9b,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그 속에 없는 사람은 크리스천이 아니다. 곧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령 하나님을 모신 자들이다. 고전 12:13,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한 몸의 지체가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기 때문에 성령 충만함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표현에 부담을 느끼실지 모르지만, 무당에게는 잡신, 귀신이 강신하기 때문에 무당 짓도 하는 거다. 푸닥거리를 하고 작두를 타고 점을 치고 하는 게 다 잡신이 임해서 그렇다. 반면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는 거룩한 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 몸 안에 들어오신다. 무당들이 잡신이 몸에 들어오면 갑자기 초자연적인 지식 같은 것이 생겨서 그 집안에 있었던 일들을 턱턱 알아맞힌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님을 모시게 되면 그 순간부터 영적인 사람이 되고, 우리 삶에서 영적인 요소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존재로 태어났으니까 이걸, ‘거듭났다!’, ‘다시 태어났다.’, ‘중생했다.’고 말하는 거다.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다.
이렇게 우리 구원을 성령과 연관 지어서 이해하면 참 쉽다. 사실 몰라서 그렇지, 영적인 세계에 중립이란 게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악령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어떤 분들은 그냥 ‘예수 믿는 거’, ‘교회’, 그런 말만 들어도 괜히 이유도 없이 극도의 반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 이것은 본인이 그러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 속에 뭔가 있어서 그런 거다. 또 교회 배경이 전혀 없는 어떤 분이 교회당에 예배하러 처음 왔는데, 들어와서 앉자마자 진땀을 막 흘리는 거다.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 하던 그 사람이 예수 믿고 난 후에는 완전히 자유스러워졌다. 전에 집안이 대대로 불교를 믿었다든가, 미신을 세게 믿고 무당 푸닥거리를 자주 하는 집안의 사람들이 이런 잡신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처음에 그런 어려움이 종종 있다. 신앙생활은 영적인 생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이 내린다. 성령님은 잡신과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의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삼위이시다. 그러니 게임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딱 결단하고 성령 하나님을 붙잡으면, 마귀와 잡신은 곧 물러가고 능히 이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실패하고 있는 이유가 뭔가 하면, 이런 신적인 요소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독교를 어떤 차원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철학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 조금 나은 사람들은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 교회 나와서 예수 믿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착하게 살고 ‘자녀들에게 교회에서 좋은 얘기 가르치지 나쁜 얘기 가르치겠어!’ 겨우 그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분! 명심하자.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철학적이나 윤리 도덕적인 차원을 넘어 영적인 차원이다. 영적인 차원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귀에게 실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텐데,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니까 신앙에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세계라는 것을 알면 승리하게 되어 있는 싸움이다.
고전 3: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 속에 성령님이 임하셔서 내주하신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왜 성령을 주셨다고? ‘인 치시기 위해서’다. ‘인 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서부영화를 보면, 소들을 몰고 가다가 다른 사람들의 소와 섞이면 어떤 것이 누구 것인지 모르니까, 소 엉덩이에다가 불도장을 찍어 놓는다. 나 같으면 ‘계’씨니까 K로 된 쇠를 만들어 불에 지져서 소 엉덩이에다 꽉 찍으면, K자가 선명하게 딱 찍힌 순간 내 소유라는 걸 확증하게 된다. 이게 ‘인 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을 때 ‘요건 내 꺼다!’하고 도장을 찍으셨는데, 무엇으로 도장을 찍었나 하면 ‘성령으로!’ 찍으신 거다. 세상 끝날 까지, 영원히 천국에 갈 때까지 확실히 하나님의 것이라고 보장하신다고 도장을 콱 찍어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을 해서 성령을 받는 것!’ 이것을 ‘성령세례’라고 말한다. 어떤 교단에서는 뜨거운 체험이나 방언을 해야만 성령세례라고 하는데, 그것도 이해한다. 체험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용어를 가지고 얘기하는 건데 정확하게 하자면, ‘성령세례’라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서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영적인 존재가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거다.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물세례를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물세례를 받아야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물세례를 주는 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신앙을 고백하는 순간, 성령세례를 받은 존재인 것을 믿기 바란다.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렇게 아는 것이 믿음이다! 이걸 의심하는 자는 성령을 모시고 있어도 아무 느낌 없이 살게 된다. 그것을 믿고 인정하고 나아갈 때, 다음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럼 다음 단계가 뭘까?
2.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님을 체험하며 사십니까?
오늘 바울사도가 우리에게 질문을 한다면 분명히 이렇게 질문할 거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님을 체험하며 사십니까?” 여러분, 이 질문을 여러분이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나? “예”라고 대답하기에 자신이 없는 분들은 잘 들어보자. 성령님을 체험하며 사는 삶은 이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1) 성령님을 모신 자들은 기도하며 살게 된다. 롬 8:14-15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 성령님이 ‘자녀로 삼으시는 영’(개역개정/ ‘양자의 영’)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분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양자의 영인 성령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다.
어떤 귀신들린 사람에게 “하나님 아버지!”라고 따라하라고 했더니, 그 말을 못하는 거다. 그냥 따라하면 될 것 같지 않나? 그러나 귀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거다. 물론 안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하고, 크리스천이 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 그 감정과 느낌은 천양지차가 난다.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때, 정말 하나님 아버지가 내 기도를 듣고 계신 것이 느껴지나? 성령 하나님이 그걸 가능하게 해주시는 거다. 여러분의 기도가 깊어지고 뜨거워질수록 여러분은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거하신다는 걸 더욱 실감나게 느껴질 거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생생한 느낌을 받게 될 거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마다 성령충만을 구하라.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 5:18) 우리 크리스천이 술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술 취하면 성령충만과는 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령충만을 주신다. 성령 충만하게 되면 여러분은 성령님이 안에 임재하신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앞에 계심을 느끼게 되고 그 하나님 아버지와 밀접하게 교통하게 된다.
2) 성령님을 모신 자들은 하나님을 진정 예배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는 걸 기뻐하신다. 그런데 성령님의 임재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4)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게 만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늘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의 우편에 앉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게끔 만든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높고 크고 영광스러우심을 알고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예배를 통해 체험할 수 있다. 주일 한 시간의 예배가 아니라, 성령님과 동행하는 한 주간의 삶을 연결하는 주일예배에서 말이다. 이런 예배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이 없다면 우리는 창조주, 구원자, 주님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이런 성령님의 감동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이렇게 성령님이 우리를 순간순간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만들면 우리 영혼의 갈증이 다 사라져 버린다. 물댄 동산과 같이 되고 물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이 된다.
3) 성령님을 모신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 요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여러분, 설교를 듣거나 삶공부를 할 때에 깨달아 지시나? 아니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나? 주일에 설교말씀 들은 말씀이 일주일을 살아가는데, 문득 생각날 때가 있지 않나? 그것이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 성경책을 사서 읽을 수는 있다. 그러나 성령님이 깨닫게 하지 않으면 그건 소설보다 재미없는 책에 불과하다. 성경이 기록되기 위해서 성령의 감동이 필요했듯이,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도 성령님의 감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영접모임을 한 이후부터 갑자기 설교가 더 잘 깨달아지게 된다. 성령님이 안에서 역사를 시작하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화살을 쏘듯이 꽂을 때가 있다. 그전에는 문자로만 지나치던 말씀이 그날따라 갑자기 이해되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같이 특별히 느껴진다. 청년 시절 어느 날 제가 읽었던 고전 1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이 말씀이 내 마음에 꽂혀서 계속 생각나게 하심으로 결국 목사로 헌신하게 만들었다. 여러분도 설교를 듣다가 그날따라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는 때가 있다. 이게 성경을 통해 성령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거다.
이렇게 성령을 받고 뜨겁고 열렬한 신앙을 갖게 된 12명을 중심으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는 석 달 동안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고 권면할 때(v8) 몇몇 사람이 비난하며 반대하기에 바울 사도는 두란노 서원으로 가서 거기서 날마다 강론하기를 두 해 동안 하자(v9) 영적으로 에베소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게 되었다. 전에는 요한의 세례만 알던 12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어도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그런데 바울이 와서 그 12사람에게 예수님과 성령님을 소개하고 성령세례를 받고 말씀을 전하자, 그들의 열렬한 복음증거로 에베소가 진동하고 온 아시아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다. 결국 v20,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님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하고 의지해라. 말씀을 깨닫고 심령이 부흥하게 된다.
4) 성령님을 모신 자들은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성령 하나님은 거룩할 ‘聖’, 영 ‘靈’, 곧 거룩한 영이시고, 거룩한 하나님이시고, 인격체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은 지정의를 가지고 계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 안에 거하신다. 성령님은 우리의 더러운 생각들을 불쾌하게 여기신다. 우리의 죄악 된 옛 습관과 행위들을 싫어하신다. 그 죄 때문에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던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고 악랄한 죄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을 진정 우리 안에 모시고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거하시기 합당하고 깨끗한 성전을 만들어야 한다. 날마다 죄와 싸워야 한다. 실수하여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주님께 잘못됐음을 동의하고 자백해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지적하시고 회개하도록 도와주신다. 죄를 회개하고 자백했다면 다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해야 한다. 그러면 곧 우리 속에 충만하게 임하신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악한 행위는 물론이고 악한 습관도 싫어지고 악한 생각조차 거부하게 된다. 술, 담배가 자동적으로 싫어진다. 점점 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령의 성품을 사모하게 된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같은 신앙인격의 열매가 포도송이 열리듯 점점 더 열리게 된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기에 우리를 점점 더 예수님을 닮게 만든다.
5) 성령님을 모신 자들을 통해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에베소의 성령 받은 12제자가 뜨겁게 복음을 전파하자, 제자의 수가 늘고 하나님 말씀이 능력이 되어 에베소 도시를 흔들었다. 수많은 이사와 기적이 일어났는데, 얼마나 충만한지 그들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가서 미친 사람이나 병자에게 얹기만 해도 귀신이 쫓겨 나가고 병이 나았다. 결국 에베소의 마술사들이 모두 회개하고 마술 책들을 가져다가 다 불살랐다. 사도시대의 위대한 복음증거의 성공은 당시 성도들이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성령님이 없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건강한 교회 세우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으려는 갈급한 심령이 꼭 필요하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고 날마다 체험하며 사십니까?” 이 질문은 오늘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우리 다 성령님으로 충만하고 그분에게 온전히 붙들려서, 능력있는 신앙생활과 건강한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쓰임받는 성도들이 다 되길 축원한다. 아멘.
바울의 3차 선교-에베소
정방원목사 / 행 19:1~20
바울의 3차 선교는 사도행전 18장 23절부터 시작됩니다. 먼저 갈라디아 지방과 브루기아 지방을 방문하고, 이어서 소아시아 지방의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에베소는 바울의 3차 선교의 최대 중심지입니다. 거의 3년 동안 에베소에 체류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아마도 이때 세워진 교회일 것입니다. 에베소 선교를 끝내고 이어서 사도행전 20장 1~3절에 마게도냐 지방, 헬라의 아가야 지방, 그리고 또 다시 마게도냐 지방으로 갑니다. 사도행전 20장 6절에 드로아로 가고, 사도행전 20장 17절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하여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 바울의 3차 선교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3차 선교의 중심지인 에베소 선교를 위하여 세 부류의 사람을 특별히 보내십니다. 그들은 각자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입니다. 그들의 톡징은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고, 믿으며,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두 번째 사람은 아볼로입니다. 그의 특징은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을 깊이 알고, 묵상하며, 성경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의 특징은 ‘오직 성령!’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고 ‘오직 성경!’ 그리고 ‘오직 성령!’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나깨나 항상 예수 충만,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본격적인 에베소 선교 사역입니다. 본문에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본문 1~7절에 세례자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12명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입니다. 일명 ‘에베소의 오순절 사건’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본문 8~10절에 바울이 회당에서 석 달 동안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이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는 내용입니다. 소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정도입니다. 세 번째 부분은 본문 11~20절에 바울의 축사 사역을 흉내 내던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귀신에게 쫓기는 일이 벌어졌다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세 가지 질문을 제기하면서 세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성령으로 거듭났느냐?”입니다.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아볼로의 영향을 받은 세례자 요한의 열두 제자에게 질문합니다. <본문 2절>“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았느냐?”는 질문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으로 거듭났느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믿을 때에 성령을 받는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이 세례를 베푸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성령에 의한 성령 세례’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셨는지요? 첫 번째 태어나는 것은 육신적으로 태어나고, 부모로부터 태어나며, 부모의 자녀가 됩니다.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은 성령으로 태어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3:3>“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요 3:5>“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씀은 두 가지 사건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의 두 가지 측면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은 표면적인 측면이고 성령은 영적인 측면입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표면적으로는 교회에서 물세례를 베풀고, 영적으로는 성령이 그 사람에게 성령 세례를 베푸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주십니다.
에스겔은 거듭남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겔 36:25~26>“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줄 것이라.” 바울은 거듭남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딛 3: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거듭남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지요?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촉구합니다. 신앙 생활은 거듭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고후 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거듭났다는 것은 신분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마귀의 자녀, 죄의 종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은 “말씀으로 훈련을 받느냐?”입니다.
본문 8~10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가서 처음 석 달 동안 회당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란노 서원으로 장소를 옮겨 2년 동안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강론할 때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굳어 있고, 순종하지 않으며, 사람들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비방합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회당을 떠나서 두란로 서원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제자’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에베소 지역에서 선교할 때 제자를 삼는 사역을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두란노 서원’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 안디옥 교회가 나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초청하여 함께 1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를 합니다. 그들이 핵심으로 삼은 사역은 말씀으로 훈련하여 제자를 삼는 사역입니다. <행 11:25~26>“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훗날 바울은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목회 서신을 쓰면서 제자를 삼는 사역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딤후 2:2>“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제자를 삼는 사역은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대중을 상대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시면서 집중하신 사역이 바로 제자를 삼는 사역입니다. 열두 제자를 상대로 3년 동안 말씀으로 훈련하십니다. 그리고 승천하실 때 그에게 지상 명령을 주십니다. <마 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교회는 어떤 곳일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하는 곳입니다 그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로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말씀으로 훈련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말씀 사역자가 되어야 하고, 성도는 말씀으로 훈련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말씀의 훈련을 받고 있는지요? 본문 9절에 말씀 훈련의 핵심은 순종입니다. 마음이 굳어 있는 사람은 불순종합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순종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의 양식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성경을 사랑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 질문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느냐?”입니다.
본문 11~20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신유 사역과 축사 사역을 행합니다.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환자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귀신이 떠나는 역사가 나타날 정도입니다. 엄청난 능력이며 대단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의 신유 사역과 축사 사역을 흉내 내거나 모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로 유대인들인데, 하나는 본문 13절에 마술하는 유대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 14절에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입니다. 그들 모두는 시험 삼아 귀신이 들린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귀신이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귀신이 그들을 덮치고 그들을 눌러 이기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귀신에게 몸이 상한 채 망신을 당하고 귀신에게 패배하며 도망갑니다.
신앙 생활은 영적 싸움입니다. 마귀 사탄, 불신앙의 세상, 세속과 죄악, 어둠의 세력, 비진리와 이단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바울은 훗날 오늘 본문의 사건을 마음에 새기면서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써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엡 6:10~20>“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악의 세력과의 영적 싸움을 말씀합니다. 창세기 3장에 뱀은 에덴 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를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도록 미혹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됩니다. 그 이후 마귀 사탄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온 세상을 지배합니다. 지금도 세상의 모든 사람은 마귀 사탄의 종으로 죄를 짓고 살다가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지만, 금식하시면서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 사탄의 시험을 이기십니다. 공생애 내내 마귀 사탄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공격하지만,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치시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십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승리하십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만왕의 왕과 심판주로 재림하십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마귀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과 불신앙의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교회의 승리이며 그리스도인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 사탄을 물리치며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울의 3차 선교의 중심지는 소아시아 지방의 에베소입니다. 그의 에베소 선교 사역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성령으로 거듭났느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두 번째 질문은 ‘말씀으로 훈련을 받느냐?’입니다. 말씀으로 훈련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질문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느냐?’입니다. 마귀 사탄, 불신앙의 세상, 세속과 죄악, 비진리와 이단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장 1~10절 / 안양준목사
행 1:4에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분부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믿고 마가 다락방에 120문도가 모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한 지 10일째 되던 날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각 사람 머리 위에 불의 혀같은 것이 임하였습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받은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고, 오늘날에도 성령의 역사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1. 성령의 역사
본문은 에베소 교회의 성령 강림의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였습니다. 행 18:을 보면 아볼로가 얼마 동안 사역했고, 시간이 흘러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중에 다시 에베소로 돌아오게 되어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을 때 그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세례로라”
행 18:24에 보면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태생으로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으며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요한은 세례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고 그가 주는 세례는 물 세례였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마 3:11에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지 물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식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 세례만 갖고는 안됩니다. 물 세례로는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 3:5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롬 8:9에 “저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저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에베소 교인들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5절에 바울이 말씀으로 가르치니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성령을 받게 된 사건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도들 가운데 성령을 받지 않은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볼로가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지만 본인이 요한의 세례 밖에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 세례에 대해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반쪽 교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의 역사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성령 받기를 사모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가 하면 본문처럼 말씀을 깨우쳐주고 안수하며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 저희 교회가 개척한지 1년하고 3개월이 지났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꾸준하게 가르쳐 왔고, 조금씩 신앙의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저희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임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미 성령 체험을 하신 성도들이나 아직 성령의 체험을 못한 성도들도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안산경신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 뜨거운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겠습니다.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모일 때마다 성령의 역사를 위해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 교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본문의 말씀을 보기 원합니다.
2. 성령의 능력
8절 이하에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기독교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회당에서 석 달, 두란노 서원에서 이 년을 가르쳤다고 했고,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하실 때 우선은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하고, 그 말씀을 들을 때 말씀대로 행하는 자리에까지 가게 되고 그때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난 한가지 에피소드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추측하면 아마 바울이 손을 얹고 기도하면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가 많이 일어나다보니 심지어 바울의 몸에 지니고 있던 손수건이나 병자를고치기 위해 둘렀는지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갔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에 대해 특별히 본문에서만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에베소에는 우상 숭배가 극성이었고, 또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도 많았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런 역사를 일으키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해 정확하게 보아야 할 이유는 11절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력이 나타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이런 능력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을 에베소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것을 보면서 부러워 흉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이들 중에 14절에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본문은 성령의 능력을 흉내만 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병고치는 것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눈으로 볼 때 신기하게 보여지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들.
병고침이나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은 성령의 역사 중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님을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경을 보면 병고침의 은사가 있다고 해서 아무 사람이나 다 고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실 때나 귀신을 쫓아내실 때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병을 고침받는 대상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마치 무당이 살풀이를 하듯이, 점쟁이가 복채만 내면 누구든 점을 봐주듯이 그렇게 성령의 역사를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런 이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를 마치 장난삼아 생각하는 사람들. 거룩함에는 거룩함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거룩함이 없이는 절대로 가까이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신을 벗지 않고는 갈 수가 없습니다.
“이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선 곳에서 신을 벗으라”
오늘날에도 성령의 역사가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임할 때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가는 역사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부분의 성령의 역사는 회심과 부흥으로 나타납니다. 믿지 않던 자들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수많은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성령의 역사가 성령의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삶의 변화
본문에 에베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앞의 사건이 병고침과 귀신을 쫓는 성령의 능력의 한 다면을 보여주었다면 이제부터는 성령의 사람들을 통해 삶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 사회가 변화되는 역사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17절에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당시 에베소에서는 마술을 하는 자들이 많았고 마술에 대한 책들도 시중에 많이 팔리고 있었습니다. 마술이 무엇입니까? 눈속임입니다.
제가 예전에 라스베가스에서 마술 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술을 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면서 갑자기 손을 가리키자 헬리콥터가 한 대 서 있는 겁니다. 아무리 눈속임이라도 어떻게 그 커다란 것이 눈깜짝할 사이에 나타난 건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마술은 아무리 놀랍다 하더라도 결국은 눈속임일 뿐입니다. 13절에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술에는 사람의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진짜 능력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눈으로 목격한 후에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마술책들을 모아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런데 불살라진 책값을 계산해보니 은으로 오만이라고 했는데 당시에 엄청난 액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또다른 사건은 데메드리오라 하는 은장색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당시 에베소에 마술만큼이나 인기가 있던 직종이 바로 은장색입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아데미 여신을 모시는 아데미 신전이 있었는데 아데미 여신은 유방이 열두개가 있다는 다산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데미 신전의 모형을 은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것이 성경에 있는 은감실입니다. 이 은감실을 갖고 있으면 악귀가 물러가고, 좋은 일만 있게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만드는 일을 은장색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 “우리의 유족한 생활이 이 업에 있는데”라는 말처럼 은장색들은 풍족한 생활을 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에 “이 바울이 에베소 뿐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바울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워낙 많다보니 자신들의 생계가 위협을 느끼는 지경에까지 간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질 때도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어린아이를 잡아 먹는다”는 비방까지 있지 않았습니까? 에베소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난 후에 자신들의 매출이 점점 줄어드니 조합장 격인 데메드리오가 은장색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잡아 행패를 부리려고 해서 온 도시가 소란스러워진 것입니다. 물론 이 사건은 다행히 요즘 시장같은 직위인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습니까?
20절에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사람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에 정말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는 일보다 사람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 5:18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필요한 때입니다. 2000년전 우상의 도시 에베소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어가는 과정들을 보면서 그때도 처음 성령받은 자의 수가 12명이었습니다. 그러나 2년 3개월이 지나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할 때 능력도 나타나고, 전도도 되는 것이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바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이제 안산경신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안산경신교회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위해 뜨겁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183장을 뜨겁게 찬송하신 후에 성령 충만을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장 1~20절 / 김 조목사
험악한 세상살이에 언제나 승리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사는 것이 전쟁입니다. 환경, 가난, 질병,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때로는 넘어지고 깨어집니다. 특히 영적 전쟁에 사단의 최후 발악하는 유혹과 미혹이 집요하기에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 자신으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와 보호 받으며 승리하고 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사도의 3차 선교여행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3년간의 긴 세월 심혈을 기울여 수고와 헌신한 에베소의 목회를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2차 선교 여행을 마무리하며 잠시 들렸다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이곳에 머물게 하였던 곳으로 학문도 많고 성령에 능하여 열심히 전도한 아볼로는 안타깝게도 복음의 핵심과 성령의 역사를 몰랐으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르침으로 그가 맡아 고린도에 사역하게 되었고 바울사도가 에베소에서 믿는 몇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어 보더니 성령이란 말로 듣지 못하였다 해서 회개와 안수로 성령이 임하였다(1-7) 이에 회당과 두란노 서원에서 2년 3개월을 가르치고 능력을 나타내어 복음을 전하였고(8-12) 그 지역 마술사들이 바울을 흉내 내고 예수의 이름 빙자하여 주술 하다가 악신에게 봉변당하였고(13-17) 믿는 자가 많아지고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 얻었던 것입니다(18-20) 에베소는 소아시아서쪽에 있는 교통과 무역의 도시로 “아시아의 보고”라고 불리었고, 동, 서양이 교차하는 곳으로 매우 부유했던 도시였습니다. 우상 숭배와 미신이 달하여 유방이 수십 개가 달린 다산의 여신 아데미를 섬기며 그 신상을 조각하여 부적이나 주물을 써서 돈을 버는 미신 중심역할 하던 에베소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바울사도 통해 역사가 변합니다. 성도들이여! 에베소 같은 현재 우리 땅에도 이런 역사 이루어지기 원하여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제목하고 성령 받아야 할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1-12절)
성경 많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경건한 모양으로 화려한 의식과 형식적 예배 참석으로 다소의 인격적인 변화는 있을지 몰라도 구원 받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 받아야 믿어지고 구원 받게 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하셨습니다. 아볼로 통해 예수에 관한 것 듣고 요한의 세례만 받은 그들에게 회개와 말씀하시고 안수하시니 성령이 임하여 방언 예언하여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꾼 되었습니다.(6) 또한 바울 사도 통해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베드로 사독의 지나가는 그림자만 닿아도 환자가 고침 받은 것 같이(행5:15,16) 바울이 쓰던 손수건 앞치마 가지고 환자에게 닿으면 환자가 병 고침 받았으니 손수건 앞치마에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이를 믿음으로 성령이 역사하시니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것을 인격수양이나 육신적 교제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원 받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자 되는 것입니다. 한계 있는 사람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 성령역사를 넉넉 해내어 불안, 미움, 좌절, 유혹 미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꾼 되시기를 원합니다.
2. 악한 귀신도 알아봅니다(13-17절)
바울사도의 사역에 하나님이 많은 기적을 보여 주시니 이를 본 마술사들이 시험적으로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명하노라 했고 대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로 주술 하다가 악귀가 “예수로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하고 그들을 억제하여 이기니 주술 하는 자들이 몸도 다치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여 큰 봉변당하였다 미신과 주술이 난무하는 에베소에 이 소식을 들은 자가 두려워하며 예수의 이름을 높였다고 했습니다. 사단도 예수님이 자기 멸하려 오신 것 알고 있었다.(막 1:24,34 눅 4:41) 또 성령 받지도 않고 형식만 갖추었던 자들에게 악귀가 “너희는 누구냐”하고 봉변 주웠으니 성령 받고 일하는 자를 악귀도 알고 있었습니다. 성령 받고 하나님의 일꾼 되어 악한 귀신도 끔찍하도록 이기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무당 큰 내림하려던 사람 기도해서 물리치고 온전케 했고 우리 교회 무당 하다가 전도되어 돌아온 자도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아 살아야 합니다. 형식과 의식도 있어야 하고 중요하지만 사단이 먼저 알고 있기에 넘어지고 깨어집니다. 성령 받아 악귀로 알아보고 도망치는 참된 능력자요 승리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됩니다.(18-20절)
성령의 역사로 기적과 말씀이 전파되니 믿는 자가 많아져 교회가 부흥되고 마술사들이 회개하여 자기들이 갖고 있던 마술책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 버렸으니 이는 자기를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요 책값이 은 오만이라고 하니 드라크마나 데나리온 같은 화폐 가치고 은 하나가 일용 노동자 하루 품삯이니 하루 5만원 일용직만 따져도 현재로 2천 5백만원 정도이니 굉장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흥왕하여졌고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큰 부흥과 왕성한 세력을 연계되어 에베소를 복음화 시켰습니다. 교회가 부흥 성장한다는 것은 성도들의 심령과 가정이 부흥되고 성장하는 것이요 성도들에게 축복입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었다는 것은 말씀에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 받아서 내 심령도 가정도 사업도 흥왕하시고 큰 세력을 얻어지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는 순간의 어떤 소득이 있다 해도 그것을 잠깐입니다. 성령 충만하여 흥왕하는 성도되시기를 원합니다.
말씀마치겠습니다.
에베소에 처음 제자들처럼 요한의 세례만 받았고 형식적 교인 되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꾼이 되어야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 받고 안 받은 것은 우리의 대적자인 사단도 알고 있기에 악귀에게 부끄러움 당하고 지지 말고 성령 받아 악귀를 물리치시고 언제나 승리하며 사단의 시험도 살아지게 하시고 성령 받아 흥왕하여 세력을 얼음으로 복된 성되시기를 원합니다.
거듭나는 생활
행 19장 1~20절 / 박조준목사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제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들은 대답했습니 다.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 시는 이를 믿으라 하셨으니 그는 곧 예수라 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믿음을 세 워야 할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로 돌이켰을 때 그들은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며 예 언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유대인들에게 주셨던 대로 거듭남의 표적을 받은 것이 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어떻게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이 아직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참된 제자들이 아니었음을 분별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기자인 누가는 기록하지 아니하였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믿는 사람 사이에 서로 교제하다보면 이와 같은 체험을 하 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교회의 직분을 맡았다고 하기는 하는데 만나 고 같이 지내는 동안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느낌을 가지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 다. 예수님도 일찍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 나무가 어떻게 생겼느냐? 잎이 얼마나 무성하냐? 가지가 얼마나 퍼졌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 이 아니라 어떤 열매를 맺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 냐? 몇 대째 신앙생활을 하느냐? 교회에서 무슨 봉사를 하느냐? 무슨 직분을 맡았느냐? 하는 것 이전에 그의 인격에서 무슨 열매가 맺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의 중책을 맡은 분들 가운데서도 저 분이 과연 거듭난 체험을 했을까? 하고 의심스러워 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기초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 나게 하십니까?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 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 라 (벧전 1:23). 씨는 말씀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때에 예루살렘에 계셨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그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장 24∼25절에 보니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태도에서 이렇게 표현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니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믿는 자들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바로 전 절인 23절에 보니 많은 사람이 … 그 이름을 믿었으나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한 것을, 그들이 아직도 거 듭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음을 아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요한복음 3장에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당시의 유명한 유대의 공회 원 중의 한 사람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비록 사회적인 지위가 있 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령 깊은 곳에서는 무엇을 갈급하여 찾고 있었습니 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 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 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은 선언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솔직히 말하면 니고데모의 믿음은 그 당시 유월절에 모였던 다른 모든 사람들의 믿음과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생명이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믿는다고는 했지만 거듭나는 삶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 생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르 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 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거듭나는 것 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까? 요한복음 1장 12∼13절을 보세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 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 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 는 것은 곧 그를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 음을 세우고, 나의 삶의 중심에 그를 모실 때 나의 심령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렇게 될 때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을 때 거듭나 새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심령이 거듭나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우리의 심령이 주 안에서 새로워질 때 소망 이 달라지고,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보람이 달라지고, 인생관과 세계관, 우주관이 달라집니다. 옛날의 습관이 시들해지고 옛날의 소망은 간 데 없고 옛날의 쾌락은 보잘 것없어집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둘째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실상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살아 있었다 면 그것은 죄 속에서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불의의 종노릇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노릇 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에 있는 물을 쏟아 버리면 그 병 안이 공기로 가득 차는 것처럼 우리가 죄의 종에서 벗어나면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4∼5절에 이렇게 말 씀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 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그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셋째로, 능력의 새 원천을 얻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 다시 말해서 거듭난 새 사람이 된 내 안에 성령을 통해서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다고 하지만 마귀는 기회 있는 대로 자기의 세력 밑에 넣으려고 마치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옛 습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성령의 인도 아래서 새로운 삶의 길을 갈 수 있게 하 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거듭났다는 말은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더 이상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 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 고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넷째로, 완전한 자리로 나아갑니다.
주님을 떠나서 세상에 속해 사는 사람은 그 삶에서 무엇인 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돈도, 명예도, 지식도, 권세도, 쾌 락도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을 얻으면 공허감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쾌락과 물질과 명 예와 권세를 추구해 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은 미칠 지경이 되어 술과 마약에 매달려 보지 만 여전히 허탈만 더 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좌절되어서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세상의 것은 얻으면 얻을수록 더 얻고 싶고, 누리면 누릴수록 더 누리고 싶어진다는 것입니다. 목이 말라서 그럽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허한 우리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실 때 만족과 완전으로 그 공허를 메워 주십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에게 주신 말씀은 너무 유명합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수 샘은 우리 안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선한 샘물처럼 우리 심령 안에서 끝없이 솟아납니다. 우리가 생명의 물을 나눠 마시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을 때 우리 심령의 갈증은 멈춰지고 배고픔이 충족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육신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할 때 완전해 질 수도 없고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의 간증은 너무 의미 깊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러분 모두가 다윗이 받은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 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다섯째로, 영생을 얻습니다.
영생은 앞으로 얻게 될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소유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5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 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미래 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내가 죽으면 어 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이 해소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여기의 시제는 과거형입니 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며 우리의 심령이 거듭날 때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까? 여섯째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됩니다. 어두움의 권세의 억압에서 풀려 나와서 하나님 나라의 광명으로 들어왔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 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 심령이 거듭나기 전에는 어두움의 세계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초조해 하며 두려워하며 잘못된 길에서 기진하고 좌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거듭나 새 사람이 되면 언제나 빛 가운데서 인생길을 강하고 담대하게 걸어갑니다. 확신 을 가지고 주저함이 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며 감사와 기쁨과 행복이 넘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 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 네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속에 차고도 넘쳐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 리 그뿐입니까?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에 있습니까?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기워질 때 우리의 이름은 천국에 있는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 까? 사람에게 분명한 것이 많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너무 분명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이요, 그 다음 하나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코에 있는데 사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죽는다는 것을 꼭 기억하면서 살아야 어리석게 살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심판 이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도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검찰이 있고 재판관이 있습니다. 그 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 세상의 재판은 공정한 재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상적인 재판은 하나님 의 심판입니다. 여기에는 속임수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억울한 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보니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 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생각한 것, 말한 것, 행한 것 모두를 책으로 기록했는데 각자가 다 있으니까 책들, 복수형입니다. 이 책에 기록된 대 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 가운데 구원받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요? 세상에 의인이 없나니 곧 하나도 없다 고 일찍이 사도 바울이 선언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되면 사망과 음부인 불 못에 던지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성경에 보니,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으니 곧 생명책이라 했습니다. 이 책 은 복수가 아니고 단수입니다. 책 이름은 생명책입니다. 누가 이 생명책에 기록됩니까?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이 말은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단지 지은 죄를 주님께 고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 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니 우리가 범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구원받은 14만 4천을 말하면서 14절에 보면,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죄로 더럽혀진 옷을 예수의 피로 깨끗케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서가 아닙니다.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못 다한 일 많아 부끄럽네아버지 사랑이 날 용납하시고 생명의 면류 관 주시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험한 세상 걸어가는 동안 주 안에서 거듭나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 에 기록되었으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고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씌 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생각만 해도 감격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의 이름 하나 하나가 생명책에 기록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 하며 권면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사람들이 묻는 질 문에 성경적인 해답을 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혹 성경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못한 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이 없이 다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연구하세요. 성 경에 해답이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의 목사에게 묻고 도움을 청하세요. 우리는 해답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청중들에게 진리를 권했습니다.
우리의 책임도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미루지 말고 거부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잠언 27장 1절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 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하였습니다.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있을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외쳤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 중 수천명이 내일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오라 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외칠 때 성령은 필요한 사람에게 확신을 주시는 역사를 이루십니다.
끝으로, 9∼10절의 말씀은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여기서 기독교를 도 (道)라고 부 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하늘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 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하셨습니 다. 기독교는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이었을 때 우리는 기독교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다면 그리스도인 으로 산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십니다. 죄에 대한 심판도 있 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고의 방식이며, 생활의 방식이고,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생각과 삶과 구원의 길에 대해 유대인들에게 석 달 동안이나 가르쳤습니다. 그 러나 그들은 바울이 제시한 모든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비극입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을 모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을 때 주님을 영접 하면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구원의 대로가 여러분에게 이르기를 바랍니다.
믿음과 성령세례
행 19장 1~6절 / 김홍도목사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이렇게 말을 하면 많은 그리스도인들 혹은 주의 종들 가운데 도 이 말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12: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주님이라 부르면 그 순간에 성령을 받은 것인데 무슨 성령을 또 받으라고 합니까" 하면서 반대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예수를 믿고 구주로 시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의 충만함, 다시 말하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도 비록 조그만 계집아이 앞에서도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수 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베드로는 분명히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과 대화하시는 가운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는 기뻐하시며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도 못받은 자에게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이렇게 그 때에도 성신의 감동을 받아 신앙 고백을 바로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천국 열쇠는 베드로가 잘 나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신앙 고백이 곧 천국 열쇠가 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가 죽을 대신에 십자가에 못박혀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믿고 시인하면 다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0:20에도 보면 70인 전도대들이 돌아와서는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하며 굉장한 보고를 할 때에 예수께서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벌써 그 때에 오순절 전에도 제자들은 이미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13:10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목욕한다는 말은 죄사함을 받고 중생하여 구원받았다는 말이요, 또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도 매일매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발에 먼지가 묻는 것과 같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졌으면 그 때 그 때에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는 말씀도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 곧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마귀의 자녀인 가룟 유다를 지적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열두 제자중 가롯 유다 한 사람을 빼놓고는 다 중생을 한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다른 뜨거운 체험, 은사같은 것들을 몰라도, 중심으로 믿는다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따라서 능력있는 삶을 살 수가 있고, 그러한 신자들이 있는 교회가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9:1부터 보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보니까 성령을 못 받은 것 같았 습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라고 하는 젊은 목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말도 잘하고 학식도 많고 성경도 잘 알고 열심도 있었으나 성령의 세례를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성령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바울이 그 교회에 가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고 물으니 "우리는 성령이 계시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를 믿는 것으로 다 된다고 하면 "네가 믿느냐?" 하고 물을 것이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말은 또 무엇입니까? 그러나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다시 "그러면 너희들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 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바울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자기 뒤에 오시는 이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했더니 성령도 받고 방언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안수도 해야 합니다. 방언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인 것 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성령을 받는다, 안수를 한다 하면은 반대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 목사님들 가운데도 성령 세례를 모르고 체험이 없어서 성령을 받는다든지 소리를 내며 기도를 한다고 하면 질색을 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직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l20명이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하루, 이틀, 사흘, …… 열흘씩이나 기다리면서 열심으로 기도하던중 열흘째 되던 날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뜨거워지더니 이상한 말을 하고 능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기도하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신자들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교회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히 받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성령 충만해진다는 말은 마치 돈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또는 물을 많이 가지고 있듯이 성령을 많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하는 것도 내 힘으로 하려고 할 때에는 예수를 믿는 생활이 힘들고 괴롭기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은혜를 받으면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또 성령이 충만해지면 모든 의심과 부조리가 해결됩니다. 성령 세례 받기 전에는 설교를 들어도, 성경을 읽어도 의심이 자꾸 생겨납니다. 그러나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그러한 의심이 다 사라지고 부조리하게 생각되었던 것이 믿음 안에서 다 해결되고 완전해 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연인(Natural man)이 있습니다. 보임이요, 이는 중생하지 못하고,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 입니다.
고린도전서 2:14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좇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에 대해서는 중생도 못하고 구원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일에는 깜깜하고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육체대로만 살고 영적으로 영의 눈이 뜨이지 않으면 아무리 영의 일을 이야기해도 알지 못합니다. 천국? 지옥? 하나님이 계심? 심판?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영적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로 육신적(Carnal man)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를 정말 믿기는 하나 영적으로 성숙하여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같이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아직 육체의 소욕을 버리지 못하고 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전서 3:1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의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먹여 주어야지, 스스로는 성경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고 또 은혜를 받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시기 분쟁 다툼이 많습니다. 모든 교회에서 일어나는 시끄러운 문제들도 바로 이런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육적인 사람들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신령한 신자(spiritual man)가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하고 장성하여 분별력이 있고 영적인 힘이 있는 장성한 교인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15에 보면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한 교인은 잘못된 교리, 잘못된 신학, 잘못된 영의 역사 등을 다 분별할 수가 있어서 이단 사설에 현혹되거나 미혹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심령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서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요한 l서 2장 20절과 27절에도 보면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고 했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 마음 속에 오면 자연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주께 맡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오면 자연히 깨달아지고 알아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교인 중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갈라디아서 6:1에 있는 말씀과 같이"…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 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시험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 자기를 반성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떠한 사람에게 속했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나의 구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 죄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의 중요한 한 가지 목적은 능력과 권능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구원받은 후에는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죄와 싸울 것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도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육신의 소욕에 지고 맙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서로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에도 보면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기 힘으로 신앙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실패했지만 8 장부터 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승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7에도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능력은 성령을 따라 사는 생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전도와 봉사의 능력입니다>
육은 영적인 일에 무능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봉사에 쓰여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영적인 봉사의 힘을 얻는 것입니다. 무디(D. L. Moody) 같은 이는 국민학교 3학년 밖에 못 나온 무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키도 작고 목소리도 나빴다고 합니다. 배운 것이 없고 훌륭한 체모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무디와 같은 부흥사가 없다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성렁에 사로잡힌 사람이 될 때에 어떠한 상황과 조건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은 나타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31에 보면 "빌기를 다 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고로 전도나 선교나 기도나 봉사나 무엇이든지 성령을 받아야 그 능력이 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열심히 기도하시고 사모하시고 기다리시어 성령 충만히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장 1~7절 / 서금석목사
인도에서 한 도둑이 남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갔다가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밤새 이웃마을까지 달아났습니다. 새벽이 밝아 올 무렵 도둑은 피곤에 지친 나머지 마을 입구의 커다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때, 때마침 염소젖을 짜러나온 처녀 하나가 이 도둑을 보고는 진리를 추구하는 요가 수행자로 오해했습니다. 처녀는 인도인들의 오랜 전통에 따라 아침의 첫 염소젖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찾아와 절을 하며 꽃과 돈을 도둑의 무릎위에 올려 놓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도둑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도둑은 요가수행자처럼 똑바른 자세를 하고 앉아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침묵의 성자'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둑으로 가슴 졸이며 사는 것 보다는 성자 흉내를 내는 것이 훨씬 살기가 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둑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 성자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쓸데없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고
-자세를 흐트러 뜨리지도 않으며
-마음까지도 단순하고 평화롭게 갖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십여년이 흘렀을 때 너무도 열정적으로 성자 흉내를 낸 나머지 도둑은 진정한 성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새해, 새 성전에서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볼 이야기입니다. 도둑도 성자가 되었는데 - 마음만 먹으면, 열정을 가지면 여러분도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금년한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윗지방-갈리디아와 부르기아를 거쳐 에베소에 이르게 됩니다. 에베소는 상업이 발달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는 이방 미신의 중심지였습니다. '부적'아시지요? 당시에 '에베소 부적'이 유명했습니다. 부적가지고 다니면 여행중에 안전하고, 자식없는 사람에게 자녀가 생기고, 사업에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어 다른 곳에서도 '에베소 부적'을 사러올 정도였습니다. 에베소는 범법자의 소굴이었습니다. 다이아나(Diana)신전은 도피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이 신전에서는 체포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범죄자들이 이곳에 모였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에베소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데미(Artemis)신전이었습니다. (다이아나와 아데미는 같은 말입니다. Diana는 Latin어이고 Artemis는 헬라어입니다)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파르테르 신전의 네배가 되는 크기였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최고로 영예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아데미 신전이었는데 그말은 에베소가 우상숭배에 얼마나 극성이었나를 단적으로 보게 해 줍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를 만났다고 했는데 '어떤 제자'란 표준새번역에는 몇몇 제자로 번역했는데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바울이 그들과 대화하기 시작합니다.
1.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1-2)
"1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가로되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묻습니다. "여러분이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랬더니 에베소에 있던 몇몇제자들이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성령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성령이 있다는 말도 못들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먼저 성령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3절을 보면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전도 받은 사람들 같지는 않고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전 성경을 가르칠 때 그에게 영향을 받아 믿게 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의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믿을때에"에 대한 의미를 생각합니다.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여기서 "믿을때에"는 두가지 면에서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은(성령의 능력, 성령의 충만함)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을때에 성령받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만일 믿기만 하면 당연하게 성령을 받는 것이라면 이 질문도 필요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질문은 예수는 믿지만 성령체험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복잡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간략하게 정리합시다.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은 믿음과 성령의 시간적인 관계를 묻는 질문도 됩니다. 성도들도 대부분 '믿음과 성령'의시간적 관계를 보면 셋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나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이성적으로 확신하고 고백하고 나서 얼마간 시간이 흐른후에 성령체험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체험 먼저 하고 나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현대교회 성도들은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부류에 속할 것입니다. 전도받고 교회다니면서 배우고, 세례받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다가 성령체험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에서 본 고넬료는 성령먼저 받고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에 대한 말씀은 다시 드리겠습니다. ) 생각해 보면 예수의 제자들도 3년이나 가까이서 배우고 함께 살앗지만 성령체험은 예수님 승천후가 아니었습니까?
성령체험은 예수 믿고 나서 하는 것이냐?
예수 믿는 즉시 하는 것이냐? 예수 믿기 전에도 할 수 있는 것이냐? 이런 질문이나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체험을 꼭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바 대로 부활후 40일간은 제자들과 함께있다가 승천하시기 직전 - 통상 헤어지기 직전에 가장 중요한 말을 남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예수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당부였습니다. 너희가 세상 만방에 복음을 전하기 전에 먼저 경험할 것이있다. 받을 것이 있다. 그것 받기까지는 떠나지 말라는 말씀 아닙니까?
제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께배우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 믿은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모두 눈으로 보앗으니 분명히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런 정도 가지고 안된다. 예루살렘 떠나지 말고 기다려라. 성령세례받으라고 말씀하신 그 중심을 헤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여기 앉아계신 분들 중에 예수 믿지 않으시는 분 계십니까? 다 믿으실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십자가의 신앙과 부활의 신앙도 다 있을 것입니다. 몇 년에서 수십년을 교회다니고 믿었는데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어지간한 것은 다 믿어질 것입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이웃에게 좋은 일도 많이하고, 전도도 하려고 애씁니다. 이만하면 된 것 아니냐?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래 됐다'가 아니었어요. '기다려라, 성령받아라'하셨습니다. 왜 그렇셨을까요?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열흘이 지난후에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예수 믿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긴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다 보았을텨인데 성령의 역사를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세상에 내보내지 않으셨어요. 성령체험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뜨겁게 경험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받아야 진정으로 살아있는 믿음이 됩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인간의자유의지로 결심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 위에 성령께서 임하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보다가, 말씀듣다가 성령체함하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기도하다가 성령체험하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바울의 질문은 단순히 에베소 교인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지금 이시간 나를 향한 질문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을 때에 성령받으셨습니까?" 성령받아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조그만 미풍에도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은 아직도 믿음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성령받아야 주의 일 할때 기쁨이 있습니다. (성령받은 증거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체험만이 아니라 성령충만한삶을 살도록 힘써 믿음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바울의 질문에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합니다. 우리 가운데 성령소리 못들어본 사람 있으세요? 우리 교인은 에베소의 믿는 사람들 보다는 모두 나은 분들입니다. 그러자 바울이 다시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2.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3-4)
"3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앗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엿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는 바울의 질문에 에베소의 믿는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라고 대답합니다. 요한의 세례와 상대적으로 생각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세례지요. 그러면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의 차이점이나 혹은 연관성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봅니다.
마태복음 3:7-12을 보면, 요한의 설교가 있는데 이 성경을 잘 읽어보면 몇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1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穀間)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설교의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상당히 위협적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열매 없으면 찍어 불에 던지겠다' 살벌합니다.
-세례 요한이 위협적으로 설교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겠지요? 8절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회개하라' 이겁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 열매 없으면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지겠다 - 심판하겠다 이 말이지요.
세례 요한의 분명한 목적은 '회개의 선포'입니다. 11절에 또 분명하게 말하지요?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 여기서 세례 요한의 세례의 목적과 범위가 나타나지요? 회개케 하기 위하여 세례를 주었습니다.
-11절에 '내 뒤에 오시는 이' - 누구입니까? 예수님.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세례가 예수의 세례를 위한 준비였지요? 무슨 세례? 회개를 위한 세례. 그러나 신앙 생활하는데있어서 회개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지요. 회개는 다만 첫 번째 단계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서커스단에서 공중 곡예를 할 때 양쪽에 그네를 달아놓고 이리 저리 하다가 한 쪽 그네에서 다른 쪽 그네로 옮겨가는 것 기억나시지요? 옮겨타기 위해서는 한 쪽의 그네에서 손을 놓고는 재빨리 다른 그네를 잡아야 합니다. 만일 다른 그네를 잡지 못하면 바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회개는 뭐냐? 잡고 있던 그네를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그네를 잡지 않으면 그 회개는 실패하는 것입니다. 다른 그네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회개란 이제까지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청산하고는 예수님을 꼭 잡는 것까지 가야합니다. 예수님 꽉 잡고 예수님과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결심하고 확인하는 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회개의 세례였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구원의 세례, 확신의 세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에게 요한의 말을 인용하며 예수에 대해 설명합니다.
간혹 '예수가 구세주임을 믿으면 되는 것이지 꼭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세례받기를 피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 사랑하고 예수가 구세주임을 고백하는 사람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설명합니다. 어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했어요. 사랑하니까 함께 살았어요.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어요. 두 사람은 말합니다. '서로 사라하면 됐지, 꼭 결혼식해야 되느냐?'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랑해서 같이 산다면 결혼식 반드시 해야지요. 결혼식도 하지 않고 같이 사는 것 좀 이상하게 보지 않겠어요? 사랑한다면 결혼식해야 지요. 세례는 '평생 주님과 함께 살겠습니다'하는 약속이고 동시에 예수가 내 구세주임을 고백하므로 구원받는 구체적 증표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3. 세례 주고 아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5-7)
"5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바울이 자세히 설명하니까 요한의 세례만 받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어요.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했어요. 그랬더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언뜻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습니다. 안수와 성령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먼저 안수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안수'란 일반적으로 손을 타인의 몸에 얹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머리에 손 얹고 안수하지만 때로는 병자를 위해 안수 기도할 때는 아픈 부위에 손을 얹기도 합니다. 안수는 대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능력이나 자실들을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하는 의미와 영적 자격을 인정하는 외적 표시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자는 안수할 때 본문에서처럼 안수하니까 성령도 임하셔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는 경우로써, 예수님께서도 안수하셔서 눈도 뜨게 하셨고 병도 고치셨습니다. 후자는 집사를 세울 때, 선교사를 파송할 때 안수하여 만민 앞에 공개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목사 안수, 장로 안수도 마찬가지 경우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안수에 대해서 오해할 소지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안수하니까 성령이 임하시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안수가 성령이 임하게 하시게 하거나 능력이 나타나는 수단이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안수받고 성령받고, 안수받고 능력받고, 안수받고 병고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능력많은 목사에게 안수받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습니다. 우리 목사도 능력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한번 기도하면 병낫고, 한번 기도하면 방언이 터지고… 물어봅시다. 바울이 능력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어요. 사도행전에 바울이 안수해서 병낫고 방언이 터지고 성령 충만해지는 역사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능력이 있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병 다고쳤어요? 항상 성령이 임했어요? 항상 방언하게 했어요? 사도 바울이 자신의 병 '육신의 가시'를 제해 달라고, 쉽게 병고쳐 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나요? 그런데 그 병 낫어요? 안 났어요. 죽을 때까지. 안수는 사도 바울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만일 자기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면 왜 자기 병을 못고쳤겠어요? 여기 안수에 대하여 오해 하지 마세요. 안수라는 것은 사람이 손을 얹지만 역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능력있는 줄 알고 사람 따라 다니다가 따라다니는 사람 바보되고 능력있다고 우쭐대는 사람 망가져요. 안수는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안수는 성령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에 따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안수하는 사람이나 안수받는 사람 -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안수해보면 어떤 사람에게 안수 할 때는 뜨거운 물에 손 담근 것 같구요. 어떤 사람에게 안수할 때는 딱딱한 막대기 만지는 것 같아요. 안수하는 사람, 안수받는 사람,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령과 안수는 언제나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도 안수할 때도 성령이 임하셨지만 안수없이도 내리셨습니다. 말씀듣다가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기도하는데도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어떤 정형화된 도식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령께서 직접 구원을 가지고 하시는 것이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기도와 말씀 중에 때로는 안수할 때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볼 뿐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내적 확신'입니다. 성령받으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적 확신'이 생깁니다.
다른 하나는 '외적 증거'입니다. 성령받으면 성품도 달라지고 행동도 달라집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성령 받으셔야 합니다. 확신있는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받은 증거도 열매로 보여져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 있지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
정리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오늘 이 질문이 내게 주어졌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누가 뭐라해도 예수는 나의 구세주이시고 -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해도 흔들리지 않으며 -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더라도 담대히 예수를 전하는 확신있는 신앙 생활 - 그렇게 신앙생활하십니까?
내 의지나 습관에서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믿음 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체험 할 때까지 기다리라 하셨던 예수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성령충만, 믿음 충만, 기쁨 충만으로 금년 한 해 승리하시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장 1~7절 / 신성종목사
조금 전에 봉독한 말씀은 에베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왔을 때에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오늘 저도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바울은 초신자들에게 물은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에서 만난 “어떤 제자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위 믿는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물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먼저 장로님들에게 묻겠습니다. 장로님들, 믿을 때에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과거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성령을 받았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물으면 혹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당신은 받았습니까? 하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저를 포함한 모든 교역자들에게 먼저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이번에는 모든 직분자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을 받았다고 믿는 분들만 정직하게 한번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성령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다같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소원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1.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어떤 분들은 성령을 받으면 짜릿짜릿한 느낌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때도 없지 않지만 그런 느낌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성령을 받으면 가슴이 뜨거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뜨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것을 뜨거움과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연극을 볼 때에도 가슴이 뜨거울 때가 있는데 그 뜨거움 자체가 성령을 받은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간단히 말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성령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내 육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적어도 다섯 가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믿음이 생겨지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고전 12장 3절에 보면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 3장 5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중생이 바로 구원의 초기 역사입니다. 다음에는 천국이 임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기쁨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둘째는 ‘성령의 인치심’이 생기면서 확신이 생깁니다.
엡 1장 13절에 보면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인친다는 말은 도장을 찍는다는 뜻입니다. 언제 인감 도장을 찍습니까? 땅을 사고 팔 때, 혹은 집을 사고 팔 때처럼 아주 중요한 일에 항상 인을 찍습니다. 인을 찍으면 항상 따르는 것이 있습니다. 잘 간직해 주고 보호해줍니다. 책임을 저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마음에 확신이 생깁니다. 어떤 확신이 생깁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확신이 생기고, 그가 나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이 생기고, 약속대로 승리한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다섯 가지의 확신이 생깁니다.
(1)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2) 하나님은 내게 권능으로 역사하신다.
(3)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
(4) 나는 구원받았다.
(5) 나는 주안에 있다. 그러므로 언제 죽어도 나는 천국에 간다는 확신이 생깁니다.
셋째는 ‘성령 받으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은 혼자 있다고 생각할 때 생기고,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생깁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나, 위대한 모세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도 두려움이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 두려움이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넷째는 ‘삶에 변화’가 생겨집니다.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삶에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으면 경건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으면 삶의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열매가 없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갈 5장 22-23절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성령을 받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생령이 된지라”라고 했습니다.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한탄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면서 영성을 상실하게 되어 이제는 육체가 됨이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다시 받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없습니다.’
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은 성령을 받을 때에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돈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만이 할 수 있습니다.
2.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을 받는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순풍처럼’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에 가고 싶고,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달음이 있고, 감격이 있는 초보적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그 다음 단계까지는 가야 합니다.
다음은 ‘물 같은’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불세례라고도 부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세 가지의 불의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불처럼 환하게 보입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진리가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주님이 보입니다. 불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둘째는 불처럼 태우는 일을 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회개한 죄가 타서 없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셋째는 불처럼 뜨겁게 합니다. 불같은 열심히 생기고, 불같은 봉사를 하게 됩니다.
끝으로 ‘소낙비 같은’, ‘허리케인 같은’ 성령의 충만이 있습니다. ‘충만’이란 말은 꽉 채운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고, 마치 허리케인 바람이 불듯이 완전히 성령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성령의 충만까지 가야 우리는 능력의 사람이 되고, 주의 일을 많이 할 수가 있습니다.
3. 그러면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믿게 되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믿습니까?
(2) 기도할 때에 기쁨이 있고, 응답의 확신이 있으면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3)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열매가 맺어지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4) 주의 일을 하고 싶어지고 경건하게 살고 싶어지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5) 물질을 바치고 싶고, 바칠 때에 기쁨이 있으면 성령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고, 성령을 받아야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고, 성령을 받아야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다음 주간은 성탄절 주간인데 성령을 받지 않고는 아기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4. 성령을 받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성령을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으려고 갈급함 같은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성령을 받습니다. 원치 않는데 성령이 임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령을 받아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했습니다. 기도는 기적을 일으키는 방법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면서 성령을 받으려고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기도해야 개인도 살고, 교회도 살고,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믿습니까?
(3)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는 말씀대로 ‘믿어야 성령을’ 받습니다.
오순절의 역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함께 기도했을 때에 임했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어야 하고, 기도하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바로 이 시간에도 임할 줄로 믿습니다.
(4)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역사’ 합니다(행 10:44).
따라서 말씀을 들어야 성령이 임하고, 역사합니다. 감동이 있다고 언제나 성령이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동은 연극이나 영화에도 있고, 사랑에도 감동은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가까이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5) 다음은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은 임하십니다.
행 5장 32절에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까? 순종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6) 끝으로 오늘의 본문 6절을 보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라고 했습니다.
안수 받을 때에 성령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맺는 말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개개인, 또 우리 교회는 에베소 교회처럼 믿기는 하는데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로 성탄절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함으로 성령을 받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교통할 수도 없고,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다같이 성령을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역자 정신 치유
행 19장 1~7절 / 박지온목사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오늘 광고중에 지금까지 달서유선방송이라고 해서 달서지구만 나갔습니다. 이제 당장 내일부터 실현될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듣기로는 대구전역과 경산과 김천까지 메시지가 나간다고 그래요. 그래서 채널을 모두가 할당을 받았기 때문에 전에는 20인가 21채널에 나갔습니다만 그동안에 채널을 땡길려고 했는데 채널이 없어요. 34채널로 해서 낮 10시부터 11시 12시 1시까지 그렇게 3시간동안 아마 매일 테이프가 세 개정도 그렇게 나가도록 되어있습니다. 처음에 이 테이프가 나갈때에 달서지역에 있는 사람들만 해도 굉장한 반대를 했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은혜주셔서 계속할 수 있도록 또 하는 분들도 담대함을 주셔서 계속했습니다. 아마 대구전역내지는 대구부근까지 나가니까 아마 당분간은 반대가 안나오겠습니까마는 여러분들이 이 일을 그냥 내가 듣는 차원에서 끝나지 말고 기도하면서 엄청난 선교의 기회라는 것을 여러분 개인이 가서 말씀 못전하지마는 말씀이 안방을 파고 들어서 구체적으로 메시지가 파고든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기도하시며는 하나님께서 큰 은혜의 역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지속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마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수 있습니다만 특별히 오늘 제목이 사역자 치유 그랬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앞에서 일하는 사람부터 치유되어야 되겠다. 저는 제 자신을 미리 공포를 했습니다. 송현교회에서 제일 문제가 많은 사람은 박지온 목사이다. 그 다음에는 강명자사모, 1부예배에서 그다음에는 누구냐고 하니까 박창복목사요!라고 하더라구요. 그다음에는 중직자 여러분들, 앞에서서 일하는 분들이 문제가 있기 때문에 교회왔고 문제를 치료받는 만큼 우리가 하나님앞에 헌신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보니까 하나님앞에 내 인생을 걸고 주를 위해서 살겠습니다,한 것이 목사가 되고 또 그렇게 교회에서 일하다보니까 모든 사람들보다 앞서서 충성하다 보니까 장로님이 되고 또 중직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할 것은 교역자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은혜떨어지면 본질이 나오며는 곤란하거든요. 그러니까 본질이 안나오도록 계속해서 은혜속에 살도록 기도해야 되는 것이 목사위해서 중직자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다음은 이어서 기도해야 되는 것이 사역자들인것입니다. 역시 사역자들도 열심히 하나님앞에 사역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뭡니까? 문제를 그만큼 보고 깨달았고 해결받는 만큼 헌신할 수 있기 때문에 사역자가 된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역자부터 치유가 되어야 되겠다. 그렇게 말씀을 좀 드리고 이 사실이 안되면 참 어려움이 어디서부터 오느냐 사역자 자신에게서부터 온다고 하지만 그 결과 교회안에 가정안에 그 결과 여러분이 있는 지역에 지속해서 나오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사역자들이 어떻게 치유를 구체적으로 받아야 할 것인가? 제가 믿음의 발판을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계속말씀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첫 번 두 번 들으면서 뭐 목사님이 저렇게 자꾸 말씀하시느냐 그럴줄 모르지마는 이것이 안되어있다는 것을 너무 느껴요. 그래서 심지어는 어떤 경우냐 100% 안되어있어요. 나도 어떤 면에서 설명을 하면서도 문제가 생기면 불신앙으로 빠집니다. 그래서 먼저 조금 설명할 것이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동시에 누구속에 들어갑니까? 하나님의 다스림속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주권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부터 모든 문제 해결했다는 말이 시작이 됩니다. 왜! 하나님이 하시니까 모든 문제 해결되고, 하나님이 하시니까 내가 잘된다 못된다 상관없이, 나의 나타나는 현상과 상관없이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왜 주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주님이 나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에서 주권 개념에서 여러분의 진짜 행복이 어디서부터 왔느냐? 이것이 와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내가 행복하다. 기쁘다라는 것이 어디에 와야 되는가하면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시니까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으니까 행복하다. 이것이 와야 하는데 이런 개념이 안나와요. 그래서 잠깐동안 1부예배를 마치고도 구체적으로 컴퓨터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바울이 주안에서 하는 것이 이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주권이라는 배경에서 오는 것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속으로 들어왔다. 이 방향으로 나가게 될 때에 여기에 선교와 전도와 바로 이것이 치유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미래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드시고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가시는데 이 속에 있을때에 가장 행복하다. 바울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바로 주안에서가 이 개념입니다. 여러분 주안에서 주안에서 하니까 자기의 욕심을 차리는 것이 주안에서 인줄 아십니까? 흔히 우리가 주안에서 아닙니다. 바울이 주안에서 하는 내용을 보니까 주로 로마서 뒤에 바울서신에 나오는 주안에서 하는 개념이 바로 이개념인데 이것이 몇 번정도 나오는가 하면 40번 정도 나왔어요. 주안에서 하는, 예수안에서, 그리스도안에서 까지 다 합치면 훨씬 더 많지요. 바울의 전 생애가 바로 이 내용이지요. 바울은 모든 것을 여기서 기뻐하고 여기서 행복을 다 찾았습니다. 진짜행복이 여기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아프든, 슬프든, 만나든, 전부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6장 2절에 보면 너희가 주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의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주안에서 만남과 사건, 일, 모든 것 전부 이 계획입니다. 이속에서 만남과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껑충껑충 뛰어서 제가 바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고린도전도 1장 31절에 보면 기록된바 자랑하는자는 어디서 자랑하라고 했는가 하면 주안에서, 주안에 있는 것 만큼 자랑스러운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는 것 만큼 자랑스럽다. 이 이상 더 필요없습니다. 바울의 개념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 보니까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그랬습니다. 이 이상 바울의 자랑이 없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대한 행복이 정말 여러분과 제게 이 행복이 내 행복이라는 사실이 안오면 이게 잘 안되요.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다른데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보면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절대로 헛되지 않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동안에는 우리 수고, 노력 다 하나님께서 축복된 열매로 온다고 했습니다. 이 밖의 수고는 헛일이예요. 더 막말로 하면 다 헛일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7절에 자랑하는 자는 어디서, 주안에서,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진짜 자랑이지, 다른 것이 자랑이 아니다. 그 다음에 특별히 주안에서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반 이상이 옥중서신입니다. 에베소,빌립보,골로세,빌레몬 그렇더라구요. 옥중서신 감옥속에서 계속해서 이것 생각하면서 너무 감사했더라구요. 다 읽지는 못하지만 몇가지만 골라서 보면요. 에베소서 4장1절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히 행하며... 뭡니까? 갇힌 것도 주안에서 감옥속에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대강 넘어가서 에베소서 5장 8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 되었다했습니다. 주안에서 여러분 진짜 참빛으로 참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길이 다른길이 없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다른 문제가 나오죠. 에베소서 6장 10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주안에서 비로서 여기서 큰 권세와 힘으로 역사하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절에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은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이에 더 뭐 자꾸 같은 말을 되풀이 해봐야 다른말은 없다. 주안에서 모든 평안과 안정과 모든... 진짜 안정은 여기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0절에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에 다시 싹이 남이니 주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 이것 다 빛이라 했습니다. 빌레몬서 1장 20절에 오 형제여 나로 주안에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안에서 평안케 하라 주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는 것 전부 이 이야기입니다. 주안에서 주안에서 다시말해서 여러분들이 정말 주안에서 행복한가? 이게 지금 우리속에 확실히 자리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안되면 주안에서 하면서 문제가 오면 두가지로 나옵니다. 문제가 터지면 바로 불신앙이 나옵니다. 이리가다가 문제만 터지면 이 사실과 이 행복의 축복이 확인이 안되면 문제만 오면 불신앙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불신앙은 저주와 죽음의 문제 아닙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 제사장에게 고난을 받고 삼일만에 살아날 것에 대한 십자가의 내용을 설명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그럴때에 베드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여! 그리마옵소서 그랬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당장 돌이켜서 그냥 주여 그리마옵소서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죽으려 가는데 선생님이 제자된 베드로가 잘 죽으십시오.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그리마옵소서 강력하게 말릴때에 베드로에게 돌이켜서 하신 말씀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셔야 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하나님의 계획이예요. 바로 이 구원과 선교와 전도와 치유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것을 바로 베드로가 문제삼았습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그럴때에 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그랬느냐?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바로 문제가 생겼을때에 전도와 선굘르 향한 이 사실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다음에 이어서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은 구원역사요 선교역사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이일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너의 감정과 문제 때문에 너의 기분과 너의 계획에 빠졌도다. 바로 그것이 사단의 통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요 참 우리도 모르게 다 여기에 빠져버려요 문제가 생겼다 사단통로예요. 그러니 뭐가 옵니까? 저주와 고통이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 생기면 불신앙에 빠지는데 사단의 통로예요. 그런데 이것이 이해되고 내가 주안에 있는 사실을 잡고 있으며는 문제 생기면 사단통로가 아니고 예수께서 찾아오시는 길이 됩니다. 이것이 잘 이해가 되야 합니다. 38년된 병자 베데스다 못가에서 천사가 한번씩 내려와서 물이 동하면 물이 움직일때에 제일먼저 뛰어들어가면 병이 낫게 된다. 그것이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병자들의 소원입니다. 그때에 누가 찾아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셨거든요.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저는 38년된 병자다. 이것은 보통 고통이 아닙니다. 제가 불과 일년고통해 보았는데 이것 보통일이 아니더라구요. 왜 그동안 잠깐 일년동안 지나면서 뭐냐하면요. 여러분 병이 오래되면 돈이 자연적으로 없어지게 되요. 왜냐하면 자꾸 병에 대해서 돈을 쓰게 되니까. 일년동안 많이 않셨다고 그러면서도 좋다 그러면 이약도 먹어보고 저약도 한번 먹어보고 그러던 중에 제가 적게 받는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활비가 한달정도 빵꾸가 나더라구요. 근데 이것이 38년 되었다. 가히 짐작해 보아야 합니다. 있는 돈 다 떨어먹어 버렸습니다. 거기다가 아픈것도 내가 1년정도 아파봤는데 뭐가 오느냐, 정신적인 문제가 오더라구요. 그래서 심지어는 오늘 아침에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요.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더니 제 아내가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요. 당신 진짜 옛날에 아플때에 어떤 모습인지 아냐 그러더라구요. 어떤 모습이긴 나는 모습이 변한 것 같지 않거든요. 그런데 옛날에 내가 좀 아플때는 얼굴이 굳어있더래요. 사단이 역사하는 얼굴로 굳어 있더래요. 그런데 얼굴만 굳어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굳어있더랍니다. 뭐든지 뭔가 바르게 생각을 안하더래요. 뭐가 오느냐 사단통로가 옵니다. 그러니까 38년되었다. 그건요 완전히 정신이 간겁니다. 여러분 문제중에 문제 38년동안 병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주실때에 38년된 병자를 38년된 병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찾아갔습니다. 여러분 이거 엄청난 축복 아닙니까? 오늘 잘알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원하든 안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 약속안에 섰다. 여러분 문제 생겼습니까? 뭔 통로입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요즘 무슨 생각을 하는가하면 내가 아프다 어렵다. 이때에 전에는 아프다 이때에 전에는 원망이 나오더라구요. 하나님! 내가 주님을 위해서 불철주야 뛰어다니고 노력도 하고 겨우... 집에서 잠자는 것이 나가 돌아다녀 보면 얼마나 좋은지모릅니다. 여관방에서 잠자는 것 그것 참 고통스럽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밖에 잠자지 못하거든요.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이럴수가 있습니까? 이게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이해가 안되면 그런데 이것이 이해가 되면 하나님이 이것을 통해서 주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께서 내게 오시는 축복의 통로인줄 믿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얼마나 큰 고통과 괴로움속에서도 사단의 가시를 없애주옵소서. 그랬을때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네가 약할 때 그때가 뭐라 그랬습니까? 곧 강함이라 그랬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다시 말하노니 주안에서 기뻐하라. 여러분 이게 와야합니다. 이게 안오면 문제생겼다 사단의 통로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이해되면 문제생겼다 받아합시다. 기대되네! 뭐가? 여러분의 문제와 사건이 기대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 속에 있을때에 무엇을 주시는가? 이렇게 가는동안에 여러분을 통해서 선교와 전도와 세계살리는 축복의 역사가 자손만대에 실제적으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일을 여러분들이 구체적으로 오늘 붙잡지 아니하면 자꾸 문제 생길때마다 다른곳으로 갑니다. 그래서 사역자들! 여러분 제가 늘 설명을 드렸습니다. 송현교회 사단의 공격 제일목표는 박지온목사 그 다음은 강명자사모, 그 다음은 중직자들, 그 다음은 앞에서 뛰는 사역자들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해안되면 영적인 싸움에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불러놓고 엄청난 축복과 역사로 하나님의 주권에 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축복과 은혜를 다 쏟아부어주시려고 선하신 하나님께... 그래서 여기섰다, 이럴때에 잘못하면 오해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왔다 그럴때에 모세라는 사람이 모세는 태어날때부터 하나니께서 이 언약속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속에 섰을때에 태어나면서 언약속에 섰다는 자체가 무엇입니다. 받아합시다. "모세는 태어나면서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 해결하셨다." 할렐루야 이해가 됩니까? 다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모세가 태어났지만 좋을 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어려울때에 모세가 태어나자 3개월동안 어머니의 젓을 먹고 그 다음에 3개월 짜리를 갈대상자에 넣어가지고 나일강에 띄워버렸어요. 여러분 나일강에 악어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그냥 내어 보냈습니다. 이거 보냈다 그냥 가는겁니다. 말이 갈대상자 보냈다 그러지, 가는겁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보호가 어디서부터 여기서부터. 그것이 실패한 것 같고 안된 것 같지만 하나님이 누구를 준비했습니까? 주님께서 인간의 지성과 이성과 상관없이 바로 딸을 그시간에 맞추어서 하필이면 목욕할것이 무엇입니까? 그 시간에 나일강가에 나와서 목욕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갈대상자가 또 강에 띄워서 강 복판으로 가면 안되잖아요. 목욕하는 바로왕의 딸의 앞으로 딱 떠내려오도록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이스라엘나라를 선교와 전도와 애굽을 구원하시고,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성공했다. 바로왕의 왕자가 되었으니까 성공했다 그 말이 아닙니다. 한 40세 쯤되어서 이제는 반항을 해보겠다고 회복해 보겠다고 그러다가 실패했습니다. 40세에 미디안의 광야로 쫓겨갔습니다. 완전실패했습니다. 거기에서 일년 이년도 지루한데 40년동안 완전인생 다 썩어버렸습니다. 그것도 늙어서 80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주 안에 섰을때에 실패한 것 같지마는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인생문제는 완전히 해결했습니다. 실패도 해결입니다. 가시덤블수풀 속에서 모세를 불렀습니다. 어디로 보냈습니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라 바로왕 앞으로 가라. 그랬을때에 모세가 잘알지요 애굽이 어떤 나라인지! 여러분 그때당시에 첨단의 무기인 철병기를 가지고 있는 애굽의 바로왕에게 맨손으로 들어가라 말이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계획을 이루십니다. 모세의 실력과 상관없이 이 계획을 이루십니다. 모세가 그것을 잘 알고... 아닙니다. 절대로 안들어가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받아합시다. "나의 수준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든 문제 해결자이시다." 끝났어요. 이것이 뿌리가 내려져야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수준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이름 붙잡았느냐 주님의 주권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인생문제, 후손문제, 모든문제 해결되었습니다. 아파도, 넘어져도, 실패해도 해결입니다. 받아합시다. "죽어도 해결입니다." 사도들이 고백했습니다. 두들겨 맞아도 해결입니다. 이 사실이 확실하게 자리잡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 힘과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보세요. 세계복음화 여러분의 힘으로 될 것 같습니까? 한번 둘러보세요.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엄청난 힘으로 밀어닦치고 있습니다. 뭐 지금보세요. 선거한다 정권이것 보니까요 도저히 언제 저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언제 되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안되게 되어있어요. 보세요. 지금 뉴에이지라고 그래서 로만카톨릭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 종교통합을 이룹니다. 종교통합 사단의 배경입니다. 문화권 완전히 우상문화권입니다.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말세에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힘없는 저를 통해서 세계복음화를 이루십니다. 누가합니까? 하나님이 하십니다. 모세를 바로왕에게 보내어서 모세의 수준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일을 이루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기에 섰을때에 주님께서 성공한다. 승리한다. 이 개념이 나오는 것이지 우리힘으로 우리뜻으로 아닙니다. 이 사실이 분명하게 이루어지게 될 때에 말할 것 없습니다. 이것이 안되면 오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오늘 사명자가 이 사실이 안되면 치유자체가 안되고 안되면 정신적인 문제가 사명자들이 영적인 문제가 옵니다.
1. 사명자들의 영적인 문제
사명자들이 남달리 앞서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면요. 성질좋은 사람들이 앞서서 잘 안하더라구요. 보면 깨닫고 앞서서 하는 사람들이 뭐가 많은가 하면요. 남달리 시기심이 많습니다. 가만히 보세요. 여러분 이것 이해하면요 앞에서서 일하는 사람들이 시기를 좀 내더라도 아하 맞다! 저 시기한다 원래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나보다도 남이 좀 잘하면 속이 끓어서 못살아요. 그래서 사명자들이 그래되요. 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시기가 많습니다. 이것이 안되니까 현장에서 뭐가 안됩니까? 갈등이 많아요. 왜 안되는가 싶어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되든 안되든 상관이 없는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문제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받아들여야 되는데 그것이 안되니까 막 갈등이 나와요. 왜 안되는가 싶고 하나님이 나를 버렸습니까 하나님 나를 안사용하면 당신이 손해이지 내가 손해입니까? 누구 손해입니까? 자기 손해이지! 별소리를 다하면서 갈등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옛날의 희한한 습관까지 다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안되니까 동기, 옛날에 숨었던 것 욕심까지 틔어나옵니다. 이것이 정신문제까지 다 나옵니다. 이것을 말하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하면 시골에 가면 소먹이기 위해서 그릇을 씻기전에 남은 음식물을 구정물에 갇다가 부어놓습니다. 부어넣는데 떨어진 결레까지 넣어두거든요. 그런데 가만히 놓아두면 위가 맑갔습니다. 그런데 작대기 가지고 두 번 움직일 것도 없어요. 한번만 휘 저으면요 별것이 다 올라옵니다. 저는 그 기분입니다. 이 말씀을 하면서요. 문제가 딱 나왔다 한번만 휘저었다. 이것 못깨달으면요 속에 들었던 것이요 별것이 다올라옵니다. 문제있는 사람중에 문제가 아니라 요원들이 이것 못깨달으면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 엄청난 문제로 오게 됩니다. 이것을 보셔야 여러분 자신이 시험에 안들어요. 이것을 보셔야 여러분 자신이 뭐가됩니까? 치료가 될 수 있습니다. 안되면 내가 다 된 것처럼 느끼고 있거든요. 다 된 것이 아닙니다.
2.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전부 손해이다.
자 그러니까 이제 깨닫는 것이 이런문제를 놓고 깨닫는 것이 아하 맞다. 그리스도가 안되면 전부 손해이다. 전부 손해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전부 손해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했는가하면요. 갈라디어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여러분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단 하나입니다.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이 사실을 믿는 믿음위에 사는 것이라. 할렐루야! 여러분 여기에 살아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문제가 생겼다.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닙니까? 이걸 믿는 믿음속에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는다고 했을때에 욕심을 이루고 그것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벌써 평생해답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받아합시다. "나에게는 영원한 해답이 나왔습니다." 이 해답을 따라서 문제 생길때마다 기도제목이 바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게 되어야 기도제목이 바로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안되면 기도제목이 이상하게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교회를 향해서 조금 보면서 우리 교회가 자체 점검을 할 때가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평생해답이 나왔습니다. 평생해답이 나왔는데... 어떤 사람을 만났다. 메시지를 좀 듣고 뭔가 마음에 해답받았다. 시원하다. 그것은 이런 해답이 안나왔다는 의미입니다. 해답이 나오면 기도제목이 나오고 기도응답이 계속해서 나오도록 되어있어요. 근데 결국 이게 안나오니까 이 해답이 나왔다고 해도 거짓말입니다. 속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따라 다닙니다. 누구를 만나야 시원하고, 누구이야기를 들어야 되고, 누구 설교를 들어야 되고 그래서 여러분 주일날 설교 딱 한번 듣고 그것으로 메시지를 잡고 여러분 기도하면 계속해서 일주일동안 응답이 나왔다. 시원한 것입니다. 편안한 것입니다. 생활자체속에서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안되니까 자꾸 사람소리를 들으려고 따라 다니는 것 아닙니까? 막 말로 이야기를 해서 여러분! 특별히 누구의 설교를 들어야 된다. 이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에 영원한 해답이 나왔습니다. 믿습니까? 완전 책임졌습니다. 하나님 그다음에 문제 나올때마다 합당한 기도제목이 나옵니다. 메시지를 들을 때에 합당한 기도제목이 나옵니다. 이것이 안되니까 기도제목이 이상해 집니다. 옛날에는 아파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일하라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일하라고... 이렇게 생각했다가, 그 다음에 자녀가 있던 없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했다가, 그 다음에는 이 사실이 해답이 나왔다고 생각을 했는데 뭔가 하면요 기도제목이 바로 안잡혀지니까 계속해서 기도제목이 안잡혀지니까 이 사역이 안되니까 욕심으로 그만 빠지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모여지게 되면 기도하는 제목이 달라지게 됩니다. 뭐가 됩니까? 주여 아들을 낳게 해 주옵소서. 실컷 지금까지 딸놓아도 된다고 하다가 아들놓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빠집니다. 여러분 잘알아들어야 합니다. 그 배경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해해야 합니다. 아들인지 딸인지 않놓든지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가장 잘아십니다. 나보다도 나를 잘아시는 하나님 이렇게 나가는 길에 뭐가 있어야 되고 뭐가 없어야 될지 잘아십니다. 전도와 선교와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세계를 품고 이루어 나갈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님이 더 잘아십니다. 문제있으면 기도제목입니다. 기도제목일때에 이 상황을 붙잡지 않으면 욕심이 나오고 기도제목이 다르게 나옵니다. 이렇게 될 때에 이 사실이 이루어지게 될 때에 기도포럼이라든지 전도포럼 이 말이요 구체적으로 이해됩니다. 다락방이 조금되고 영원한 해답이 나오고 역사가 나올때에 버스타고 갈때에 우리교인들 잘알잖아요. 역사일어나는 것 서로 이야기 할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사이에는 어느때 부터인가 이것이 죽어버리니까 버스타면요 이상하게 전도포럼이 안나와요 전도이야기 안나와요 기도응답이야기 안나와요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그러니까 개인욕심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놀러가자 말하고 그러고 윷놀자 그러고 세상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잘 알아 들어야 합니다. 왜 제가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는대도 말하는 배경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안되니까, 기도제목이 다른 것이 나오게 됩니다. 결국엔 욕심으로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배경이 무엇입니까? 사단의 배경입니다. 그건 저주와 죽음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된다는 배경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들어갔다 어떻게 할겁니까? 뒤가 어떻게 될것입니까? 이게 바로 문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하나님이 나와함께 하시는 축복이 가장 행복하더라! 문제생기면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축복 받아합시다. 받아합시다. "기대되네!" 문제가 있을수록 기대되네, 이 사실이 마음에 바로 잡혀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망했다 상관없습니다. 코를 깨도 상관없고 뒷통수를 깨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때마다 뭡니까 기대되네 주님의 일을 통해서 내게 뭘 이루실 것인가 이것이 나와야 될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않되니까 전부 이런 문제가 속에 잠재되어 있다가 막 그냥 올라옵니다. 한번만 젓었는데 수라장이 되요. 한번만 사단이 휘 젓고 나가면 교회가 술렁이고 야단입니다. 보통문제 아니예요. 이 사실이 안되면 현재교회, 현실의 교회, 모든 교회들 거의 보면 다 이리 빠집니다. 종교와 우상에 빠지게 될 수 밖에 없구요. 이러니 교회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바로 이것이 안되니까 이를 위해서 여러분 집중해서 "주여! 흑암의 권세가 우리 개인에게서부터 교회서부터 이땅과 이 지역에서부터 완전히 추방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사실이 보여줘야 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만 부르면 바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 그 이름이 아니며는 손해중에 손해 다른 것이 없다 그이야기입니다. 갈라디어서 2장 20절 디모데후서 4장 1~10절까지 나오는 말씀입니다.
3. 영적인 싸움을 싸우라.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런 배경을 보고 사명자들이 영적인 싸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영적인 싸움을 할때에 목회자들과 함께 영적인 싸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보면 반드시 사도들로 인해서 기적이 나오고 사도들로 통해서 모든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메시지입니다. 반드시 메시지가 임하게 되면 메시지가 임하게 되는 순간에 말씀이 눙력입니다. 역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되면요 영도 치료되고 육도 치료됩니다. 그런 것들 안봤습니까! 그럼 치유가 안되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다른부분이 치유가 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주일날 말씀을 들었다. 여러분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도요, 여러분 개인과 가정과 여러분에 처해있는 사건 속속히 뭡니까? 역사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받을때에 말씀으로 치료되게 됩니다. 여러분 혼돈한 세상에 말씀이 임하게 될 때에 질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 그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게 될 때에 구원의 역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 중요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항상 그 말씀의 역사를 주인공으로 세워서 말씀을 증거케한 사도들로 더불어 사도들로 함께 사도들로 인해서 계속해서 역사가 나왔습니다. 사역자들과 사명자들이 바로 목회자들과 함께 이것이 바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간단한 말같지만 신앙생활전부입니다. 주일날 말씀을 기다리게 될 때에 말씀을 기다리는 정도가 아니고 누가 좋아지게 됩니까? 목회자들이 좋아지게 됩니다. 관계가 좋아지는 관계가 아니라 바른 관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말씀이 임하게 될 때에 여러분 가정이, 개인이, 후손이, 사건이 속속히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치유되어집니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중에 문제를 가지고 밤에 꿈도 꾸고 하다가도 주일날 낮에 메시지가 들려지게 되면 그사람이 그 문제가 언제 없어졌는지 없어지게 됩니다. 메시지가 이해안되고 안들려지게 되면 그게 해결안되게 되더라구요. 뭐 특별히 어느날 강하게 빛이 비추이거나 아니면 사도바울에게 역사한 것처럼 주여뉘시오니까 그렇게 치유된다 그것은 아닙니다. 왜 약속하신대로 말씀으로 이것이 임하시면 치유된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일이 이일이 이루어져야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 7절이죠. 여러분을 향해서 사역자들을 향해서 누가 찾아옵니까? 제일 공격대상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길자를 찾는데 누굴찾습니까? 사단이 사명자를 찾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을 찾습니다. 저 사람이 공격대상이다 이렇게 해서... 그러니까 영적싸움이 이 눈이 안열리면 문제오면 속아버립니다. 아하 이것이 사단의 역사이구나 이것이 안보이면 속아버립니다. 괜히 그래서 신경질을 냅니다. 신경질을 내는 것은 사단의 길입니다. 신경질을 낼것이 뭐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랬는데 그게 안되니까 이 안에 있는 것이 안되니까. 이 안에 있다 넘어져도 기뻐요. 바울이 이것이 기뻐서 못살정도 였습니다. 보아야 됩니다. 왜냐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과 같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마귀가 나와 함께 하는 것이 기쁘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경질을 내면서 기뻐한다 이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신경질을 즐기는 사람이 있어요. 걸핏하면 고함부터 먼저 지르는 사람이 있어요. 이야기는 들어보도 안고 고함부터 먼저 질러버리고 애들을 만나면 고함부터 먼저 지르고 있어요. 받아합시다. "마귀와 함께 즐거워 하는자다." 잘알아야 합니다. 통로입니다. 그래서 술먹는 사람은 술을 먹어서 사단의 통로가 되어서 고함을 지른다고 하지만요, 잘믿는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는 것은 진짜 사단 통로입니다. 맨정신으로 고함지르는 것은 그것은요 사단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술먹고 고함지르는 것은 술기운에 고함을 지른다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맨정신에 고함을 지르거든요. 확실한 사단통로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6절~ 7절에 이 속에서 진정한 행복,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이 안에 있는 동안에 한없이 평안해야 합니다. 주여! 내 모든 것 주님이 아시니까, 성령이 나를 인도하옵시고 이끌어주시니까 내가 할것이 없어, 신경질내고 짜증낼 것 없어, 내가 어떻게 할 것 없어, 주여 어찌하오리까 성령께서 내가 여기있다. 행복함이 여기와야 합니다. 이것을 맏기지 못하고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자꾸 내가 할려고 하니까 실력도 없는 사람이 내가 하려하니까 그것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수학문제 풀줄도 모르는데 자기가 풀려고 하면 그것은 골치아픈 문제입니다. 못풀면 못푼다고 맡기면 정말 편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세요. 학생들이 자살하는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죽더라고요. 참 그것이 안되니까. 왜? 못하는 놈들은 못하니까 아예 죽도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못할려면 진짜 못해버리고 잘할려면 진짜 잘해버리든지 안그러면 이 사실을 확실히 안붙들면요, 공부하는 아이들 가만히 보니까 자살충동 느끼게 되어있어요. 힘들어요. 예수그리스도 당신의 뜻 내인생이 다 여기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여기 있다는 것을 여러분 확인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단의 역사인가 마태복음 4장 1절~ 10절입니다. 마귀가 어느정도냐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넘어뜨리면 되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안찾아오겠습니까? 사명자들 예수그리스도 넘어뜨리려고 찾아와서 웃으면서 뭐하느냐! 여보세요, 이 돌가지고 떡만들어 잡수세요 이랬거든요.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런게 여러분에게 찾아와서요 물질가지고 먹는거 가지고 세상것 가지고 영원한 것은 삭 눈을 가려서 다 죽여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역사 아닙니까? 여기에 다 속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에베소서 6장 10절이하에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진짜 영적인 무장을 안하면 이길수가 없다. 구체적으로 이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4. 결론 - 영권을 회복하라
그러면 마지막 결론으로 맺습니다. 이제 사명자들이 영권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문제는 영권이 구체적으로 나와야 하니까, 사명자들의 영권입니다. 우리는 영권 그럴때에 또다시 옛날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뭐냐하면 뭘 많이 힘들여서 되는줄 알고 많이 기도하고 힘을 실어야 되는줄 알고 불을 위에서 받아가지고 내가 때굴 때굴 몇 번 구르면 역사가 일어나는 줄 알고 그래 생각하거든요. 제가 전도사역을 인도하면서 보면서 느끼는 것은요, 여러분 영권이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심이 어디서! 전도와 선교방향으로 나갈때에 내가 열심히 했다 안했다 상관이 없습니다. 영권이 나갑니다. 전도하려고 나갑니까? 영권이 나가요. 복음증거하려 나갑니까? 영권이 나갑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세히 보세요. 주의 성령의 역사가 초대교회 전도할 때 역사하든 그 역사대로 오늘날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역사도 있는가 하면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고 영접하려고 그럴때에 워낙 할마시들이 할마시 그러니까 미안합니다만, 시골 할마시! 내가 할마시라고 부르는 것은요 워낙 못알아듣는 사람이니까, 귀도 약간 멀었고 이래가지고 못알아듣더라구요. 못알아듣는데,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에게 메시지는 들어가야 하겠고 안타까우니까 등을 한번 쓰다듬으면서 "할머니!" 이러니데 할머니가 꼬그라 집니다. 왜 나도 모르게 등을 뚜드리는데 등 뚜드리는 순간에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뜨거운 열이 약 100도 가까운 열이 자기도 모르게... 사람이 가버리더라구요. 그러면서 뭔가 마음을 열어버리더라구요. 주의 성령의 역사가 복음전파의 발길위에 영권이 나가게 되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했습니까? 막 신비해서 뭔가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영권을 받아가지고 그렇게 하면 될줄 알았는데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그대로 복음들고 나가는 발걸음에 영권이 임하게 됩니다.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오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1절로부터 13절. 그래서, 이 영권이라 할때에 2장 1절부터 쭉 나가면서 메시지가 나오는데 여기에 1장부터 쭉읽어보면 낳죠. 뭘 받아야 되는가 하면 일단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역자들이 은혜를 받아야 해요.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그냥 자연스럽게 교회에 모일 때 마다 말씀을 은혜로 받지 않으면 못받아요. 그리고 은혜받게 되면, 아하! 정말 복음들고 나가야 되겠다. 이러면요 영권이 여기서부터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생기는 것이 아니예요.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요. 사도행전 19장 1절부터 나오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사도행전 3장 이 내용을 붙잡고 사도행전 3장의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해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한번도 보지못했던 하나님의 능력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능력입니다. 영권그럴때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는 발걸음 어찌그리 아름다운지요. 영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땅에 사는 날동안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과 교회에 대해서 이땅과 세계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세우고 영권을 약속하셨습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들로부터 치유
행 19장 1~7절 / 박지온목사
제가 종종 중직자나 묵은디 이야기를 하는데 잘못 들으시면 오해하게 됩니다. 즉, 중직자나 묵은디가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교회 중직자들은 칭찬을 들을 정도가 아니라 너무 좋으신 분들입니다. 평신도들 같으면 조금만 쳐도 나갈 수 있으나, 중직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기존 신자와 중직자들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것은 오래 예수를 믿을수록 바로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척 고생을 하게 됩니다. 목사, 장로, 안수 집사, 권사님들이 오래 믿을수록 '복음이 정말 좋구나!'라고 느끼며 살 맛이 나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으로 고생이 따릅니다.
[1] 서론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선택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에 중요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으며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에서 제일 고생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선택된 이후부터 어떤 일들이 생겼는지를 살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선택을 받고 방황하게 되었고, 야곱은 축복을 받자마자 고생 길에 들어섰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선택받은 그 때부터 어려움에 처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와 목사가 왜 저러느냐?'라고 총공격을 합니다. 사실 상당한 경우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상당히 많은 중직자들이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천주교나 불교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국법을 잘 지킵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들은 국법을 제법 어기는 편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IMF의 위기 시대에 교회가 선교한다면서 돈을 외국에 갖다 버린다고 말합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현지에 가서 전도는 안 하고 땅이나 집을 사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들은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불법으로 돈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래 놓고도 결국은 현지인들에게 땅도 집도 다 빼앗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해놓고는 엉뚱한 결과가 나옵니다. 이런 부분에서 사람들이 욕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조금 깊이 들어가 보면 다릅니다. 선교와 전도하는 일에 사단은 무조건 반대하며, 무조건 미워합니다. 선교와 전도의 모든 프로그램이 세상에서 환영받은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아예 습관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자마자 이스라엘에게 다른 역작용이 나왔습니다. 세계 복음화를 진행하며 성전에 이방인이 들어와서 예배할 수 있는 공간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정하셨으나, 유대 사상이 생기면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불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계 구원의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으나, 이스라엘이 거꾸로 나아갔습니다. 그 때에 역사하는 것은 사단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단은 모든 것을 놓아두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지속해서 집중 공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땅에 우리를 전도와 선교하는 단체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악한 사단이 우리가 선교하지 못하게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복음의 확실한 결론이 없으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2) 현재
사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 그 때의 현재적 상황에서 받을 축복을 받지 못하도록 집중 공격했습니다.
(3) 노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로 있었던 것은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그런에, 악한 사단은 완전 공격을 가하여 그것을 훈련 기간으로 깨닫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4) 존패의 위기
사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완전히 매이게 하여 존패에 위기에까지 처하도록 했습니다. 사단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계속 공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죽여 버리고, 아들을 낳으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게까지 하였습니다. 복음을 받았으나 승리하지 못하면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완전히 고난 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수많은 성도들이 여기에 빠져있습니다. 약속을 굳게 잡고 승리하지 못하면, 후손들까지 다 죽게 됩니다. 언약을 깨닫고 자녀들에게 언약의 바톤을 넘겨주지 못하면, 사단의 집중 공격을 받기 때문에 자녀들이 처절하게까지 타락하게 됩니다.
아마도 대구의 악한 영들은 송현교회 성도들을 제일 많이 건드릴 것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더욱 건드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미하게 있으면 당하게 됩니다. 약속을 분명히 붙잡고 승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중직자들을 너무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사단이 집중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직자들이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확신을 가지고 사단의 세력을 꺾고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안목으로 볼 때, 우리들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벌서 우리들의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변화와 역사를 누려왔습니다. 정말로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희미하게 있으면 예수 믿는 것으로 오히려 고생을 하며 방황하게 됩니다. 만나와 메추라기의 은혜 속에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놓치니까 늘 원망하며 불평에 빠져 있습니다. 묵은디들을 건드려 보면 대부분이 이러한 상태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문제가 해결되어집니다. 눈만 뜨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불평하게 됩니다. 조금만 깨달으면 엄청난 축복에 들어가게 됩니다.
[2] 사단의 통로
사단이 틈타는 통로를 살펴봅시다.
(1) 마태복음 12장 43-45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왜 귀신이 나갔을까요? 귀신은 딱 하나 앞에서만 쫒겨나갑니다.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이 다시 돌아왔을 때 주인 없이 집이 비어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복음이 안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다면, 집이 비어있지 않고,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나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는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냄새만 맡고도 사단이 도망갔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도망갔던 사단이 미심쩍어 다시 와본 것입니다. 복음이 없이 '예수, 예수'라고 하면, 율법과 종교에 빠지게 됩니다. 마음이 착하다거나 선행을 한다고 해서 악한 사단이 떨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단이 더 힘을 얻습니다. 나갔다 와보니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어서 놀기 좋고 쉬기가 좋아서 다른 일곱을 더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하여 그 나중 형편이 더욱 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악한 세대가 바로 그렇습니다. 이 세대는 종교와 율법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오래 믿은 묵은디나 중대한 짐을 진 중직자일수록 복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안 되고 종교인과 율법자가 되면 점점 어려워지고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완전히 빈 집이 되고 소제가 되어지나 전보다 더 악한 형편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나 율법 속에 들어갈 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노력하고 애쓰느 만큼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앉았다 하면 비판하게 됩니다. 율법적인 설교를 할 때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을 때 교인들의 허물부터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한 시간 예배를 드릴 때, 모두 자기의 잘못을 보고 설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고개가 저절로 끄득여지며 나갈 때는 완전히 눌려서 기가 죽어 현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와 율법에 빠진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기도회가 끝나고 상담을 한다는 것이 남의 허물을 꺼내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주로 남편이나 아내를 반 죽여놓습니다. 말세에 어려울수록 '여리고 작전'이 필요합니다. 여리고 성을 돌 때에 사람과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말 위기를 느끼게 되면 말을 하지 마십시오. 믿는 자는 그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중대한 어려움이 올 때에는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들과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 집중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상담하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 그렇게 하다가 점쟁이에게까지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 직고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종교와 율법에 빠지는 현실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전부 사단의 통로입니다.
(2) 베드로전서 5장 7-8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사단이 삼킬 수 있는 대상은 염려하는 대상입니다. 염려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주권자 되신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이, 내 욕심과 소망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주권자이심을 모릅니다. 그래서, 이것이 되지 않은 오래된 성도들이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 응답에 대해서 많은 착각을 합니다. 자기 욕심을 이룬 것이 기도 응답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와는 달리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내가 할 일은 전혀 없는 것 아니냐!'라고 하면서 대어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완전 불신앙의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놓고 우리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세워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계획에 맞추어 나아가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씻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하니까 마냥 누워있기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어 나아가지 않는 자입니다. 완전 불신앙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염려하지 말고 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 짐은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주님께 다 내려놓고, 이제는 주님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맡겨야 됩니다. 왜 맡겼다가 뺏았다가 합니까?
어느 선교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차를 타고 시골 길을 가다가 어떤 할머니를 태웠습니다. 조금 가는데 뒤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보니 할머니가 아직도 머리에 짐을 이고 중심을 잡느라고 고생하더랍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짐을 옆 자리에 내려놓으시라고 하니까 할머니께서 더 걸작의 대답을 하셨답니다. "몸만 태워준 것도 고마운데 짐까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다 내게로 와서 맡기라고 하십니다. 무엇이든 맡기십시오. 그리고, 맡겼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런데 왜 다시 머리에 이고 끙끙댑니까? 이렇게 되니까 예수 믿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3) 요한일서 4장 18-19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으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공포가 사단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맞추는 것이 안 되면 염려를 지나서 두려움이 나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밤에 배가 아프다가 아프다가 나중에는 '맹장염이 아닐까?'라는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은혜로 되어지지 않으면, 두려움이 오게 됩니다.
염려와 걱정 근심이 모두 사단의 통로입니다. 이것을 알 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이 기도가 나올 때 성령께서 치유하십니다.
(4) 마태복음 4장 1-10절
사단이 시험을 하는 통로로서 의식주, 명예, 경배의 대상이 있습니다. 초기 신앙에서 제일 많이 사단의 통로가 되는 것이 의식주입니다. 실제로 배고파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입은 옷이 남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눌려버립니다. 사단이 이러한 먹고 입는 것을 통로로 삼아 성도들의 마음을 다 빼앗습니다. 물론, 가난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난이 사단의 통로가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사단이 마음대로 들어옵니다. 복음이 안되면 사단이 들어올 통로가 마음대로 열리기 때문에 진짜 고생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됩니다.
[3] 사명자들
사명자들도 영적 문제에 빠집니다. 사명자들이 영적 문제에 빠진 증상이 있습니다.
(1) 시기
시기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계획이 각자에게 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안되면 어떤 사람이 한 쪽 방면에서 잘 하면, 박수를 쳐주어야 되는데 시기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시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2) 갈등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나오지 않으면 감사가 나오지 않고, 갈등이 나오게 됩니다.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메추라기가 없으면 광야에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조금만 다른 일이 생겨도 하나님께 감정을 가지고 갈등했습니다.
(3) 습관
시기와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상한 습관이 생깁니다. 그렇게 사단에게 잘못 끌려다닐 때에 생긴 습관은 잘 사라지지 않습니다.
(4) 성품
이러한 습관이 성품화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모두 성격이 좋지 않습니다. 이상한 성품이 깔려버립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모두 정신 문제입니다.
(5) 동기
이렇게 될 때에 동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은 복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그 은혜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바쳤으면 그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바쳤으니 더 큰 것으로 주셔야만 된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꼬투리로 무엇인가를 바랄 필요가 없습니다. 바쳤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동기도 필요 없습니다. 받은 것이 너무 많아 감사할 따름입니다.
(6) 욕심
욕심이 생깁니다. 기도할 때에 욕심이 나온다면, 응답 받을수록 더 망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편안할 수 있는 것은, 욕심없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으로 다 받은 것입니다. 지금은 받은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4] 자기가 죽어야 한다.
'내 것, 내 계획이 아무 소용없구나!'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살하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시기, 갈등, 습관, 성품, 동기, 욕심 등이 왜 나옵니까? 조금만 문제의 상황이 닥치면 혈기를 막 부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 자신은 장사지낸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건을 만나면 자기가 다시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정말로 그리스도 이외에는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모아야 합니다. 이것이 치유 중의 치유입니다.
(1) 갈라디아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옛 것은 다 죽었습니다. 죽은 자에게 무슨 시기와 원망이 나옵니까? 그런데 시기와 원망이 가끔씩 올라옵니다. 어떤 목사님은 그 때에 '내려가'라고 명령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단에게 속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올라오던 시기와 원망이 사라져 버립니다. 깨달으면 이상하게 평안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지금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2) 디모데후서 4장 1-5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메시지 듣기가 힘들어집니다. 메시지를 드는 일에 너무 힘이 든다면, 그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TV에는 푹빠져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면서, 메시지는 잘 못듣는 것이 말세의 증상입니다. 메시지를 들으면 들을수록 꿀송이보다 달게 느껴집니까? 그렇게 되면 말씀 성취에 눈이 열립니다. 이것이 되면 다른 허탄한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영혼을 살리며 사단의 세력을 꺾고 승리하는 약속의 말씀을 잡고 기도할 때입니다. 그 때에 치유되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장 1~7절 / 박용래목사
오늘 아침 봉독한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방문했을때 아주 심각한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이 질문은 성령강림절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에게 성도 한사람 한사람에게 주시는 질문과도 같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질문 같지만 아주 심각하고 중대한 질문 입니다. 그런데 대답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했습니다. 기가막힌 말입니다. 교회를 탄생케 하신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충만함 받은 성도들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르는 교회가 교회일까요? 지금도 이런 성도와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고전 12:3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수 없느니라. 그런데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도 없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면 기독교는 아무런 힘과 능력을 잃어버린 하나의 이론과 지식에 빠지고 맙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라는 이 말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때에 성령을 체험하였느냐. 또 하나는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성령체험을 하였느냐하는 질문하도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성령을 체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을 받기전과 성령 받은 후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삼년씩이나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살기도 했습니다. 설교도 직접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목격했고 주님의 부활도 목격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40일이 지난 후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재림의 약속도 들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누가 믿지 않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안 믿는 것도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못 믿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까지는 떠나지 말라. 나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8:19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성령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먼저 성령을 받고 능력을 힘입어야 전도하러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만났고 많이 배우기도 했고 십자가도 봤고 부활도 승천도 보았지만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받기까지 떠나지 말라, 나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자체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처럼 성령충만함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아니하고서는 어떤 사역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으로 모였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전심으로 기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10일만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고 치유의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교회가 탄생되었고 폭발적으로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 얼마나 실력이 좋으냐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학문으로 전도하고 지식으로 돈과 기술로 전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특별새벽기도회 표어를 정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세상을 이기고 주의 사역을 감당하자!”
오순절에 경험했던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질병을 이기고 세상의 모든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도 성령의 능력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모든 사역은 내 힘과 지식과 기술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미남미녀로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됩니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됩니다. 변화된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없고 걱정근심도 없어집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기도해도 찬송 불러도 기쁨이 있고 힘이 생깁니다. 약한 것 같지만 강해지며 가난한 것 같지만 넉넉하고 부유한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지는 것 같으나 이기며 우겨 쌈을 당하는 것 같으나 승리합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던진 질문인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 질문은 오늘 아침 성령강림절에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요한의 세례만 받았을 뿐 성령세례는 알지도 못하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3:11-12 나는 너희를 회개키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의 불을 너희에게 세례로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목숨 걸고 믿는 다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박해와 핍박이 있을 때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주님을 배신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건다는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순교하면서도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세례는 나는 죽고 예수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잘라내고 예수그리스도를 내게 접붙이는 사건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을때 성령이 임재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성령 없이 신앙생활 했기에 무능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는 힘도 없었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는 힘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힘도 없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의 감동을 믿었고 그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 받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못하면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힘이 있어야합니다. 힘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마가 요한 다락방에 모여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해 십일 동안이나 전혀 기도에 힘쓰므로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임재한 후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방언하는 능력이 나타났고 육적인 병과 영적인 병이 치유되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핍박도 두렵지 아니하는 담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할 때 하루에 삼천 명씩 회개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에베소 교인들처럼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지도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도 못하고 우리의 경험과 지식과 기술을 힘입어 주님을 믿고 따라왔다면 오늘 아침 이 시간 겸손히 회계하며 성령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사모합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기다립니다. 성령님 나에게도 임재 하여 주셔서 나를 주관하여 주십시오. 연약한 나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옷 입혀 주십시오.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 충만함을 체험하기 까지 지속적으로 기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교회 주변에 삼천오백세대 아파트가 입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도록 주의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아니하고서는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으로 채워지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백 이십 명의 기도 사역자들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간절하게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함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회, 심야기도회에 마음을 모두어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는 결단이 있어야합니다.
주의 사역을 감당하려면 첫째,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더러 대통령이 공연히 기도한다. 시간만 낭비한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힘입지 아니하고서는 내게 맡겨진 중대한 직분을 하나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도한 사람들이 큰 역사를 이루어 왔습니다. 기도하며 성령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고 주의 사역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둘째, 능력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초대교회에는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놀라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사나운 이리처럼 살던 사람이 순결한 양처럼 변화되는 일이 나타났습니다. 병들어 사람구실 못하던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여 사람답게 살아갑니다. 더러운 귀신이 떠나서 방황하던 사람들이 완전한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 축원합니다.
셋째, 칭찬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행2:47 “하나님을 찬미했고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예수그리스도인은 두 가지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칭찬을 받든지 손가락질을 당하며 삽니다. 장미꽃이 백합꽃이 향기를 발할 때 아름답습니다. 환영받습니다. 그러나 그 꽃이 시들고 썩으면 더러운 냄새를 풍깁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세상을 이기고 주의 사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야합니다. 세상의 칭찬을 받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성령 없는 신앙생활은 썩어 냄새풍기는 생활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향기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행 19장 1~7절 / 최응희목사
사도행전19:1-7, 갈라디아서 2:20
오늘 본문에서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우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물음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 교우들은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사도의 두 번째 물음은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에베소 교우들이 대답합니다. '요한의 세례니라' 이에 대하여 바울이 설교합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그래서 에베소 교우들이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사도가 안수하니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 읽어보면 세례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말씀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라는 말과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요한이 세례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태3:7-9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태생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인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세례요한은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핏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모태신앙이나 몇대신앙이 내 신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사는냐가 중요하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러한 요한의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자신의 죄를 돌이키게 하고, 바르고 깨끗하게 살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니까 그런 세례로는 성령의 감화와 충만을 이룰 수 없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슨 다른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영적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요한의 세례에 머무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한의 세례에 머무는 사람은 나쁜 짓 하지 않고, 깨끗하게 살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책임감 있게 사는 것을 믿음으로 여깁니다. 이런 생활을 한 마디로 성실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성실한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사명의 삶에 있습니다. 성실한 생활이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실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교제 안에서 믿음으로 살라고 말씀합니다.
성실과 믿음의 차이점을 불레셋 거인장수 골리앗을 만난 다윗과 병사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다윗과 병사들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병사들은 평소에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골리앗 앞에서 그들의 성실함은 무능함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훈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는 들판에서 자유로운 생활은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골리앗 앞에 믿음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사무엘상17:45-47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영적교제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었느냐 살았느냐는 의미가 아니라 내 믿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있는 믿음이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느냐 아니냐는 내가 하나님과 영적교제를 나누고 있느냐 아니냐와 같은 말입니다. 영적교제가 무엇입니까? 진실된 예배, 뜨거운 기도, 말씀에 순종, 주님의 이름으로 감당하는 헌신 등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영적교제 없는 인간적인 성실함과 책임감, 열심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예수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말씀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에베소 교우들이 말씀을 듣고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도 중요합니다. 성실함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열심과 책임감,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높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바로 성령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교우들에게 회개의 세례인 요한의 세례만이 아니라 은혜의 세례인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한 것입니다. 믿음은 나의 성실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영적 교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영적교제를 통해서 성령의 충만함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우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에야 성령의 외적인 체험도 왔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례 받고 죄를 지으면 다시 세례 받으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믿음의 태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의 믿음이냐, 예수의 세례를 받은 자의 믿음이냐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례의 근본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죄사함과 그리스도와 연합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사도행전2:38
이렇게 세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세례의 더 중요한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라디아서 3:27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의 특징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옷 입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날마다 옷을 입듯이 날마다 예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삶--그것이 그리스도를 옷입는 삶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닮고, 예수님의 뜻을 사명으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옷 입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하는 사람입니다. 잠을 잘 때는 옷을 벗지만 옷을 입을 때는 무언가를 할 때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영적교제는 예수님을 위한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제 총남선교회에서 '예수 사관학교'라는 곳에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을 주관하는 목사님이 대단히 열정을 가진 목사님이셨습니다. 유대교 랍비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특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고, 그 생각이 좀 산만하여 그 만들어진 것들도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다만, 그 열정, 그 사명감은 본받을 점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아버지 김해준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러 나갔다가 잘못된 지도 때문에 길을 잃고 헤메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정호는 조선의 지도를 정확하게 만드는 것을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완성해야 할 삶의 목표를 삼았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거나 돈이 되는 것이 아님에도 의미있는 일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을 기꺼이 행했다는 점에서 그는 사명자의 삶을 살았다 할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 분과 영적교제를 이루며 사는 우리가 주님을 위한 사명자가 되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 나 자신을 드리는 것이 사명의 삶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선교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그것이 봉사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그것이 교사일수도 있고, 때로는 그것이 물질일수도 있고, 때로는 그것이 전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님과 교제를 나누며 주님의 뜻을 위해 나를 사용하는 열정과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사명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날마다 주님과 영적교제를 나누는 참 그리스도인들입니까? 여러분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위해 끊임없이 힘쓰는 사명자입니까? 적어도 나 자신을 위해서만 살지는 않는 헌신자입니까? 여러분의 그 어떤 것을 예수님을 위해 사용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바울사도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2:20
'내가 예수님과 함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므로, 이제는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삶의 의미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만 있다.' 이런 뜻입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므로 나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지금 사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바울사도가 물었습니다. 나 하나 죄짓지 않고, 바르고 성실하게 살고자 하는 나 중심의 믿음--요한의 세례에 머무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 하십니다. 나의 성실로서가 아니라 날마다 성령안에서 주님과 교제를 나누고, 열정과 사명의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안전과 나의 축복에만 머물지 말고, 예수님을 옷입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데 관심과 생각을 넓히는 사명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두란노 서원에서의 전도
행 19장 8~12절 / 김영규목사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8)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9-10)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19:8-12)
에베소 회당에서의 3개월 전도
지난주에는 바울의 에베소에 도착한 이후 첫 번째 전도 활동을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먼저 성령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약 12명의 요한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 사건에 이어서 이제 본격적인 에베소 전도가 시작됩니다. 바울의 에베소 전도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시기는 유대인 회당에서 전도한 시기로 그 기간은 약 3개월 정도 됩니다. 두 번째 시기는 유대인 회당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전도한 시기로 그 기간은 약 2년 정도 됩니다.
먼저 유대인을 상대로 한 전도는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8-9) 유대인 전도의 성과가 미미했던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는 아마 논쟁을 좋아하는 유대인들의 성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강론하며 권면했다”고 합니다. “강론하다”(dialevgomai)는 말은 영문 성경에 disputing, reasoning 등으로 번역합니다. 논리적인 설교를 의미합니다. 무엇을 논리적으로 얘기했다는 말입니까? 왜 논리적으로 얘기했을까요? 구약 성경의 예언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성취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논쟁만 즐길 뿐,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굳게 하여(sklhrov", harden)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악평을 했습니다. “kakologevw” 나쁘게 말한다는 뜻입니다.
전도에서 논쟁은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성령의 역사만 의지하는 성령의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18,22-24)
바울은 부득이 유대인들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9) 바울이 유대인 회당을 떠난 것은 그 이후로는 유대인 사회에서는 완전히 철수했다는 뜻입니다.
두란도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다
유대인 회당을 떠난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세웠습니다.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9) 바울은 단순히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커뮤니티를 창설했습니다.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상관없는 순수한 복음의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바울은 이미 유대교와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족이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에 대해서 한 가닥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미련조차도 다 떨쳐버렸습니다. 유대교를 떠나지 못하는 유대인들, 복음을 배척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교회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순수한 예수님의 제자들로 에베소 교회를 세웠습니다.
새로운 교회는 두란노 서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폭발적인 열매를 가져왔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9-10) 두란노 서원! 기독교 역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만 한 장소입니다. 두란노(Tuvranno")란 이름은 서원을 설립한 설립자의 이름이거나 건물주의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어쩌면 두란노는 당대에 이름난 헬라 철학자인지도 모릅니다. “서원”이란 말은 헬라어로 “scolhv”(스콜레)입니다. 영어의 school의 어원입니다. 학교란 뜻입니다. 본래 스콜레란 빈둥댄다는 뜻이 있습니다. 한가하게 육체적 휴식을 취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것에서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헬라식의 이오니아 철학 학교들이 여러 곳에 있었습니다. 이런 학교들은 대개 아침 일찍 강의를 시작하여 오전 11시에 일과를 마쳤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강좌를 마치는 오전 11시쯤 말씀 강론을 시작하여 당시 사람들이 즐기던 시에스타(낮잠)시간까지 활용하여 설교를 계속했던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무려 2년을 계속한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바울은 어디서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비량 전도를 했습니다. 한 편으로 노동을 하면서, 남들이 낮잠 잘 시간에 가르쳤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특별한 열심히 있었지만, 배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집니다. 남들이 자는 시간, 쉬는 시간에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바울의 두란노 서원 전도의 특징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말씀 공부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주일 예배에 참석했으니 하나님이 어떤 좋을 일이 일어나게 하시겠지? 오늘 헌금을 했으니 좋은 일을 주시겠지? 여러분, 기독교는 막연한 것을 기대하는 행운의 종교가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분명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하고, 성령님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합니다. 막연히 기대하지 마세요. 막연히 믿지 마세요. 확실히 믿고, 확실한 것을 기대하세요. 우리는 확실한 것을 믿고, 확실한 것을 기대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확실한 것을 믿고 붙잡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확실한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말씀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세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 음성을 들으세요.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들으세요. 주님이 내게 명령하시는 명령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매일성경은 받아 가셨습니까?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묵상하세요. 두란노 서원에 출석하던 성도들은 매일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바쁜 직업에 종사하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정기적인 성경 공부는 매우 유익합니다. 요즘은 구역모임이 힘듭니다. 직장이나 사업 때문에 성경 공부를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성경 묵상 생활은 어떤 경우에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께 아뢰고 부탁드리기 위해, 하루 10분을 못 내시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확실한 약속이나 기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축복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 설교의 중심 주제였습니다.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8) 오늘 우리의 관심사가 뭡니까? 대통령의 신년 연설을 들으니 국정의 최우선 과제가 경제 살리기입니다. 자나 깨나 경제, 경제 없이는 못살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오직 경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경제란 의식주 해결의 수단입니다. 의식주에 대해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5-26)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8-33)
예수님이 왜 오셨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천 년 만 년 살게 하시려고 오셨습니까? 경제 때문에 오셨습니까? 의식주 때문에 오셨어요? 결코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다 조만간 이 땅을 떠납니다. 병든 사람만 떠나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떠납니다. 노인만 떠나는 게 아닙니다. 젊은 사람도 떠납니다. 못 사는 사람만 떠나는 게 아닙니다. 웰 빙 하는 사람도 떠납니다. 힘없는 약자만 떠나는 게 아닙니다. 권력자도 떠나고, 유명 인사도 떠납니다. 남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오래오래 살 곳은 이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경제에 매달려 머리털 빠지지 마세요.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의 목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도들의 중심 주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가 얼마나 경제 중심적입니까? 건물, 예산, 재산, 규모와 경영에 매달려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경제에 영혼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여러분, 경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도 하나님이 보장하십니다. 믿으십니까? 이제는 하나님 나라에 관심 좀 가집시다. 그것이 우리 설교의 중심이 되게 합시다. 성도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하나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종일 하나님 나라만 좀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갈 곳, 우리가 영원히 살 곳, 우리가 영원히 행복하게 지낼 곳,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제가 하나님 나라 얘기 안 하면, 하나님 나라 얘기 좀 해 달라고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다
바울의 두란노 전도는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첫째로, 아시아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10) 에베소는 아시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아시아란 말은 본래 지금의 터어키 서부 지역의 한 지역의 이름입니다. 에베소는 그 지역의 수도였으며, 소아시아 전 지역에서 가장 큰, 인구 25만 명의 메트로폴리스였습니다. 로마 제국 당시, 로마를 제외하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디옥과 함께 에베소는 동방의 3대 도시였습니다.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서쪽으로는 에게해를 통해서 로마에 이르는 교역의 통로였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아시아 지역으로 통하는 관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사방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등. 이 교회들이 바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동안에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역할이 뭡니까? 우리 교회의 외형을 키우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복음이 어떻게 확장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사방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 때문에 많은 아시아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세운 에베소 교회로 말미암아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사도 요한과 같은 좋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정윤교회가 바로 이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정윤교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복음을 듣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둘째로, 바울로 말미암아 나타난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1-12) 기적은 말씀을 들은 결과로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믿고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가정집에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는 통로가 있지요? 배선을 통해서, 배관을 통해서 전기가 공급되고, 수돗물이 공급됩니다. 내 영혼에 성령의 능력이 공급되는 통로가 뭡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루디아 가족, 고넬료 가족이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말씀을 경청하세요. 그러면 기적도 따라 옵니다.
어떤 기적이 나타났습니까? 귀신이 쫓겨나갔습니다. 귀신 중에 좋은 귀신은 없습니다. 귀신은 마귀의 하수인들입니다. 지금도 귀신은 사람들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게 합니다. 정직한 일이나, 착한 일은 하지 못하게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게 합니다. 배척하게 합니다. 교회에 가지 못하게 하고,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더럽고 추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이런 악한 영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는 가운데 다 쫓겨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병자들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의 손수건, 앞치마만 갖다 놔도 병이 고쳐졌습니다. 바울의 손수건 앞치마가 뭐하는 물건입니다.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쓰던 것들입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기 위해 둘렀던 수건입니다. 가죽이나 천을 만지면서 수시로 손을 씻으려고 허리에 매던 앞치마입니다. 땀에 젖어 냄새나는 물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도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가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옷깃만 스쳤어도 병을 고쳤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9:20-21) 수제자 베드로는 그림자만으로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5:15-16) 그런데 바울 사도는 수건, 앞치마로 병을 고쳤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베드로 못지않은 주님의 사도임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림자로 병을 고쳤다면, 바울 사도는 땀 닦는 수건, 손 씻는 헌 앞치마로 병을 고쳤습니다! 얼마나 특별한 사도입니까?
그러나 실제로 병을 고친 것은 바울이 아닙니다. 손수건이나 앞치마는 더욱 아닙니다. 병을 고친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수건을 만졌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앞치마나 그림자를 스쳤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기적을 체험합시다! 지금 내게는 앞치마나 손수건이 없습니다. 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을 구주로 믿으세요. 복음의 말씀에 아멘하세요! 그러면 이 시간에 온갖 기적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주여, 오늘 이 시간에 저의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제 상처에 손을 얹어 주소서! 제가 누님이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습니다. 주여 내 인생에 작용하는 악한 귀신들을 다 쫓아내 주옵소서! 악한 영들이 절대로 내 삶에 범접하지 못하게 해 주소서! 주여 내 병을 고쳐 주옵소서! 심장병을 고쳐 주옵소서. 중풍병을 고쳐 주옵소서. 고혈압을 고쳐 주옵소서. 관절염, 신경통, 류마치스 다 고쳐주옵소서. 위장병을 고쳐주소서! 모든 암을 고쳐주옵소서! 주여 시력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이 시간 모든 병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을지어다! 주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화답하여 기적이 일어나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