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바다 곤노서 야마도 땅은”(1): 건국절과 뉴라이트
나도 크게 충격을 받았다. 온 일본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큰 대회에서 한국어 노래가 울려퍼지다니...... 내가 이 노래를 처음으로 들은 것은 8강전 경기에 관한 뉴스에서였다. 정말 충격이었다. 아 저런 게 여지껏 있었나? 저런 게 여지껏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인 후예들은 아직도 자기들끼리 모여 살면서 조선말을 가르치고 조선말로 노래를 부르는 모양이다. 4강전에서 져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기기까지 하더니 결승전에서까지 이겼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누가 알아주던 말던, 그들은 남의 땅 한 귀퉁이에 자기들의 영토를 개척하여 자기들의 삶의 방식을 전수해왔다는 점이다. 나는 그 후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뉴스를 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주로 속으로 불렀으나 소리내어 부른 적도 몇 번 있다. 한번은 아예 재일동포 그 소년들을 따라 일어서서 불렀다. “동해바다 곤노서 야마도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나는 속으로 부를 때도 ‘곤노서’라고 하였지만, 물론 비꼬거나 비웃는 뜻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애정과 친밀함을 표현하는 뜻으로 그렇게 하였다.
바로 이 때쯤인데, 한국에서는 “뉴라이트”니 “건국절”이니 하는 것이 다시 튀어나왔다. 며칠 전인데, “동해바다”가 울려퍼지는 뉴스가 끝나고 바로 다음 소식으로 어느 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 장면이 나왔다. 이 짧은 장면 하나를 보고 나는 뉴라이트가 무엇인지, 건국절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알지 못하였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 장관 후보자가 주장하는 내용은 간단하였다.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된 것이다. 36년 동안 우리에게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들 중에는, ‘샤이한’ 자들—자기가 뉴라이트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이 많은 것 같으며, 공직에 나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자들도 많은 것 같다. 이 후보자는 그들과 다른 것이다. 이렇게 솔직히 나오니, 야당 의원은 당황하였고, 화를 내었으며, 기가 막혀하였고, 기가 막히다고 말하였다. 장관 후보자는 당황하지 않고 자기가 화를 내었으며 기가 막힌 쪽은 자기라고 말하였다. 그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추가적으로 말한 요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위의 내 말은 그냥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상식’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정확히 나타내자면 ‘사실’로 고쳐야 한다. 내가 그 때 야당 의원의 자리에 앉아있었다면 나는 그 후보자를 어떻게 달았을까?
나는 우선 자연의 영역이 아닌 사회의 영역에 그러한 ‘사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질문하였을 것이다. 사회의 영역에서 사실이라는 것은 전부 ‘해석된’ 사실이다. “36년 동안 우리에게는 국가가 없었다”는 것은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이것은 그야말로 사실이다—에 가깝다기보다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은 애국적인 행동이었다”에 가깝다. 그 후보자는, 말뜻을 알아듣기 어려운 질문이라서 대답하지 못하겠다고 응수할지 모른다. 쉽게 고쳐서 말하면 이렇게 된다. 그 후보자는 그냥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된 것이요, 36년 동안 우리에게는 국가가 없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또 다른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령 당시의 조선 사람들은 일본국민이 된다. 그렇게 되면 독립운동이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게 되며 친일파(친일부역자)라는 개념도 성립하지 않게 된다.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 선조들은 실정법을 위반한 테러리스트 등의 범법자가 되며, ‘친일파’들은 애국자—대일본제국의 애국자—가 된다. 이것 이외에도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많이 있지만,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의 '사실'을 말하는 것은, 이렇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엄청난 주장을 하는 것이며, 실로 발설하기 두려운 주장을 하는 것이다.
위의 후보자는 내심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건국절’을 입에 담는 뉴라이트 인사들 중에는 그러한 주장을 자신의 소신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멋도 모르고 입만 놀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 두 가지를 분리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즉 내가 추론해낸 엄청나고 두려운 주장은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며 자기는 그냥 ‘건국절’을 믿는다고, 즉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된 것이다. 36년 동안 우리에게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점을 믿는다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그렇다면 그 믿음의 실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하고 다시 물어야 한다. 그 말은 아무 내용이 없는 말이 되고 말지 않은가?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 중에는 유명한 에릭(에리히) 프롬의 것이 들어있다. 이 사람은 사회주의자인 것이 맞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말하는, 그러한 사회주의라면, 사회주의라면 또 어떤가, 아니 사회주의가 좋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은 에릭 보에글린(푀겔린)의 것이다. 프롬과 달리 유명하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이 사람의 사상은 미국의 신자유주의—뉴라이트와 비슷한 계열—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람 자신은 자신에 대한 이러한 해석과 평가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사람의 사상이 만약 자유주의라면, 자유주의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요컨대 나는 두 명의 에릭 모두에게 마음이 빼앗겨 그 둘의 가운데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우리 정치 현실로 눈을 돌리면 나는 불행한 고민을 하게 되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원래 나는 정치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좀 전의 건국절 이야기가 만약 정치 이야기라면, 이것은 내가 쓴 최초의 정치 이야기이며 최후의 그것일 것이다. “동해바다 곤노서”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약간 곁가지로 나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즉 그 교가를 들으며 감동했다는 이 글의 첫머리를 읽으며 반발과 혐오의 감정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생각도 든다. 즉 설사 건국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교가를 들으면 감동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교가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재일동포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을 떠올렸고, 이어서 김소운(金素雲)선생의 ‘木槿通信’을 떠올렸다.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나는 이 두 편의 글을 읽은 후 크게 감동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무엇인가 찜찜한 것을 종내 떨쳐버리지 못하였는데, 이 교가가 찜찜함을 상당 부분 해소해주었다. (계속)
첫댓글 동해(東海) 바다 곤노소 야마돈 땅은...이런 교가나 한국 노래들이
세계 곳곳에 아직도 있겠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나라 잃고 흩어져간 조상들이 불쌍토다 그래도 노래나 어떠한 형태로라도
나의 뿌리를 남기고자 하시는 마음이 거룩하도다~
서경식, 김소운 두분의 글을 읽고 감동하였다는데...(물론 난 안읽어봤지만 ㅎ)
뭔가 찜찜한게 남은 것이 이 교가를 통해 해소 되었다니~ 그게 뭘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