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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경궁과 누상·누하동 》
[인왕제색도, (仁王霽色圖), 정선 (鄭敾)]
1751년, 종이.수묵 / 79.2×138.2cm
국보 216호, 호암미술관 소장
[건드렁 타령]
※ 건드렁 건드렁 건드렁거리고 놀아보자
1. 왕십리 처녀는 풋나물 장사로 나간다지 고비 고사리 두릅나물 용문산채를 사시래요.
2. 누각골 처녀는 쌈지 장수로 나간다지 쥘쌈지 찰쌈지 육자비빔을 사시래요.
3. 모화관 처녀는 갈매 장수로 나간다지 갈매 천익 남전대 띠에 춘방사령이 제격이래요.
4. 애오개 처녀는 망건 장수로 나간다지 인모망건 경조망건 곱쌀망건을 사시래요.
5. 광주분원 처녀는 사기 장수로 나간다지 사발 대접 탕기 종지 용천병을 사시래요.
6. 경기안성 처녀는 유기 장수로 나간다지 주발 대접 방짜 대야 놋요강을 사시래요.
7. 마장리 처녀는 미나리 장수로 나간다지 봄미나리 가을미나리 애매나리를 사시래요.
8. 양삿골 처녀는 나막신 장수로 나간다지 홀태나막신 코매기며 통나막신을 사시래요.
9. 구리개 처녀는 한약 장수로 나간다지 당귀 천궁 차전 연실 창출 백출을 사시래요.
10. 자하문 밖 처녀는 과일 장수로 나간다지 능금 자도 앵도 살구 복숭아를 사시래요.
경기민요 '건드렁 타령'에서 나오는 '누각골'은 조선시대 북부 순화방(順化坊) 지역으로 인왕산 기슭에 위치하는 누상(樓上)·누하동(樓下洞) 일대를 말하는데, 일제 강점기 초기에 실시된 행정구역 개편에서
누상동은 누각골의 위쪽 마을이라는 뜻에서, 누하동은 누각골 아래쪽에 해당되므로 각기 그와 같은 이름을 얻었다.
[도성지도 (都城地圖)]
필사본
1780년대
67.5×92.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御製守城綸音(어제수성윤음)》
누각동은 조선후기 이래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는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동으로 영조 때 만든 「도성지도(都城地圖)」에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 영조 27년(1751)에 반포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보면 순화방 밑에 사재감계에 속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갑오개혁(1894) 때 북서(北署) 순화방의 사재감하패계 누각동·남척동·유목동·복정동·송목동·장성동·수성동 등으로 되었다.
남척동은 누각골 아랫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납작하므로 납작골이라 불렀는데 한자로 남척동(南隻洞)이라 표기하였고, 유목동(柳木洞)은 버드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붙여졌으며 버드나뭇골 이라고도 한다. 복정동(福井洞)은 물이 맑고 차서 삼복 더위도 물리친다는 복우물이 있기 때문에 복우물골이라 했고 송목동(松木洞)은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졌으며, 장성동(長城洞)은 담이 성처럼 길게 뻗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아마도 인경궁의 담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성동(水聲洞)은 누하동 뒤쪽으로 누상동과 경계되는 곳의 지명인데 한가롭고 그윽하여 물소리가 끊어지지 않는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수성동에는 기린교(麒麟橋)가 있었는데 석교(石橋)였다고 한다.
가난한 양반은 인왕산 골짜기 곧 지금의 누상동·누하동인 누각골과 남산골짜기·진고개(충무로) 같은 곳에서 살았다. '남산골 샌님'이란 속어가 있는데 이는 생활능력도 없고 주변도 없는 무능하고 고지식한 사람의 대명사이다. 남자들이 무능하기 때문에 대개 여자들이 살림을 꾸려나가게 마련인데 여자들도 특별한 기술이 없으므로 평소에 갖고 있는 바느질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그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술과 떡을 만들어 파는 일인데 술은 남산골 양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유명하고 떡은 북쪽 누각골의 것이 유명해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한양에서 유행하였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보면,
「예로부터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있다. 남주(南酒)는 장흥동과 회현동에서 빚어내는 것을 제일로 쳤다. 그 맛과 색깔이 뛰어나서 한 잔에 취하여도 쉬이 깰 뿐 아니라 갈증이 나지 않으니, 가히 나라 안을 통틀어 이름난 명주이다. 떡은 누각골 것을 좋게 친다.」
또한 누각골 가난한 양반들은 백지를 구해 기름을 먹여 담배쌈지나
갈모를 만들거나 기름종이를 이용한 물건을 만들었다. 따라서 집집마다 용마루 위에 시렁을 얹고 쌈지와 갈모를 널어 말렸으므로 '누각골
처녀는 쌈지장수로 나간다지'라는 민요가 생긴 것이다.
※ 쌈지: 잎담배 ·살담배를 넣고 다니는 흡연 용구로 허리에 차고 다니는 주머니 모양의 것을 찰쌈지라 하고, 옷 소매나 호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 있는 것을 쥘쌈지라 한다. 처음에는 간단한 종이나 기름종이에 싸서 가지고 다녔는데, 흡연자가 증가함에 따라 상품화되었다. 찰쌈지는 비단 ·비로드 ·모직물(나사) 등으로 만들었고, 쥘쌈지는 헝겊 ·종이 ·가죽 등으로 2~3절로 접게 만들었다.
※갈모: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쓴 우장(雨裝)으로 원이름은 갓모[笠帽]이며 우모(雨帽)라고도 한다.
(갈모)
고종 초 편찬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누각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각동은 인왕산 아래에 있고 연산군 때에 누각(樓閣)을 지었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지금은 여항(閭巷)의 서리노퇴자(胥吏老退者)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화과업(花果業)에 종사하는 자가 많다.」
누각이 있었기 때문에 동명이 유래된 타당성은 인정하나 과연 연산군 때 누각을 지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여기서 누각이라 함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건물이 될 만큼 규모가 큰 누각 건물로 민가의 것이라기 보다 궁궐과 관련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연산군 때 과연 누각동 일대에 그러한 건축을 영건(營建)한 사실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연산군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이궁(離宮)등의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창의문(彰義門) 밖의 장의사(藏義寺)터에 세웠던 이궁,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세운 이궁, 두모포(豆毛浦: 현재의 옥수동) 이궁 등이 대체로 서울에 세운 연산군 때의 이궁으로 세 곳 이외의 이궁은 나타난 것이 없는 것으로 보아 누각동에 누각을 세운 시기가 연산조였다고 함은 잘못 전해진 기록이며 광해군(光海君)때 조성한 누각동 일대에 소재했던 인경궁(仁慶宮)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인경궁은 광해군 9년부터 15년까지 역사(役事)를 계속하여서 그동안에 외전(外殿)·내전(內殿)·별실(別室) 등의 주요건물은 완성하였으나 궁궐로서의 제반시설을 채 완공하지 못한 가운데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건축을 중단한 궁궐이다. 인경궁의 위치는 현재의 필운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일대로 인조11년에 일부 전각이 철거되고 나머지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곳이 누각동 일대였다. 더구나 인경궁은 건립한 후 왕이 거처한 적이 없이 폐기되었던 것과 완성되지 못한 채 일부 철거된 '폐기된 궁궐'이어서 궁이라고 지적하지 않고 누각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누각동이란 지명은 인경궁이 이룩된 광해군이후에 생성된 지명이었으며 일제 초까지 사용되다가 없어진 동명이었던 것이다.
[ 백호정(白虎停) 약수터 ]
누상동의「백호정」은 누각골의 막바지 인왕산 기슭에 있었던 5처(處) 사정(射亭)의한 곳으로 바위에「白虎亭」이란 각자는 숙종때 명필가 엄한명(1685∼1759)의 글씨였다. 한편 백호정 약수터에는 전해
내려오
는 이야기가 있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많던 시절에 병이든 흰 호랑이(白虎)가 수풀속에서 물을 마신후 곧 병이 나아서 활동하는 것을 보고 주민들이 그 자리에 가보니 조그마한 샘이 있어 이 곳을 약수터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백호정 약수터의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나았다고 하며, 전국이 폐질환자도 이 약수터의 약수를 마시기 위해 먼거리도 마다하고 찾아왔던 유명한 약수터였다고 한다. 현재에는 백호정이란 돌기둥만이 옛날의 명성을 대변해주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 누각골 약수터 ]
누상동 159번지에는 누각골 약물 혹은 누상동 약수라 부르는 약수가
흘러 내렸는데 위장병에 특효가 있었다. 1960년대 말부터 인왕산 정상쪽으로 점점 민가(民家)들이 들어서면서 약수터는 주택가로 바뀌어졌다.
[ 와룡당 ]
누상동 약수 옆에 와룡당(臥龍堂)이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중국 촉(蜀),
한(漢)의 정치가 였던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신봉하던 곳으로 대한제국 말기에 폐지되었다.
[ 불노천 약수터 ]
누상동 약수에서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와룡당 위쪽에도
약수(藥水)가 바위로 된 굴속에서 떨어지고 바위에 불노천(不怒泉)이라 새겨져 있어 불로천 약수 혹은 불로천이라 불렀는데 이 물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톡 쏘는 듯한 맛이었다고 한다.
[ 석함집 설화 ]
누각골에 얽힌 한 가지 설화가 전해 온다. 옛날 이 누각골에는 보물을
많이 가진 공주가 살았었다. 공주는 죽을 때 소중히 간직해온 보물들을 석함에 넣어 혼자만 아는 뜰 안 땅 속 깊이 묻었다. 그 뒤 이 공주의
집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는데, 새로운 주인 마다 얼마 동안씩은 그
보물함을 찾기 위해 뜰안의 이곳 저곳을 깊이 파보곤 했다. 하지만 공주가 묻었다는 보물 석함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주의 보물이 묻혀있다는 그 집은 옛날부터 '석함가'라 전해 온다고 한다.
[ 윤동주(尹東柱)가 하숙하던 곳 ]
인왕산 기슭을 향해 올라가는 누상동 9번지에서는 1940년대 일제하의 어둠을 몰아내고 민족 광복에의 염원으로 괴로워하며 격렬한 시를
썻던 시인 윤동주(1917∼1945)가 1년동안 하숙을 하였다.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연희전문학교에 재학중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이곳에서 하숙을 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일본 복강 형무소에서 2년동안 복역하던 중 옥사했는데 유해는 가족에 의해 북간도로 옮겨 안장되었다. 그의 시와 정신을 기려 1968년
연세대학교 연세춘추사에서 그의 서시(序詩)를 새긴 시비(詩碑)를 세웠다. 민족의 애수와 이상, 정열을 상징적 필치로 다루고 있는 그의 시는 문학사적 견지에서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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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경궁에 대해 】
- '서울 육백년사' 참조 -
[인왕산도]
화가명:강희언(姜熙彦: 1710-1784)
화 법:종이에 담채
크 기:24.6cm x 42.6cm
소장처:서울 개인 소장
(1) 인경궁 창건 연혁
인경궁(仁慶宮)의 창건 역사(役事)가 시작된 것은 광해군 9년(1617)이었으며 약 6년의 공역(工役)을 거쳐 광해군 15년에 전각의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인경궁은 일부 문헌에는 경희궁(慶熙宮)과 혼동되어 기술되어 있으나 인경궁과 경희궁은 별개의 궁궐이며 경희궁에 비해 훨씬 규모가 큰 장대한 궁궐이었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인경궁이 본래 원종(元宗, 인조의 부)의 사저(私邸)였고 새문동(塞門洞)에 있었던 것으로 적었으나 이는 경덕궁(慶德宮, 후에 경희궁)의 오기(誤記)임이 밝혀졌다. 인경궁이 있었던 곳은 새문동이 아니고 그보다 동북측인 필운동· 누상동 · 누하동 · 옥인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는 인경궁의 위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선수도감이 아뢰기를, 새 대궐의 남쪽 담장이 사직(社稷)의 담장과 연이어져 있어서 순라(巡邏)도는 길이 막혔습니다. (중략) 부득이 북쪽 담장 안에다가 또다시 겹으로 담장을 쌓아서 순라길을 뚫기로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즉 인경궁의 남장(南墻)이 사직(社稷)의 장원(墻垣)에 연접해 있어서
순라지로(巡邏之路)가 통하지 않게 됨으로 사직(社稷) 북장(北墻)을 중장(重墻)으로 해야겠다는 선수도감(繕修都監)의 계(啓)가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사직의 장원(墻垣)과 인경궁의 남장(南墻)이 접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실록(實錄)에는 인경궁의 남장을 퇴축(退築)한다면 그 정전(正殿)의 후여지(後餘地)가 좁아진다는 기사가 보이고
있어 사직 북장과 접해 있는 인경궁의 북장내는 바로 궁의 정전 뒤였음을 추정하게 된다.
인경궁의 역사(役事)는 광해군 8년에 궁의 터를 인왕산 아래에 고르는 작업에서부터 비롯되어 이듬해인 광해군 9년 4월, 5월에는 축장(築墻) 공사가 있었고 같은 달에 정전과 침전(寢殿) · 별당의 개기(開基)가 있었다.
인경궁이 창건된 동기에 대하여는 광해군이 풍수음양설에 쫒아 창덕궁(昌德宮)을 흉궁(凶宮)으로 생각하여 기피하고 인왕산 아래에 신궁을 영건하고자 한 데에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광해조(光海朝)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3궐(闕) 가운데 먼저 광해군 원년에 창덕궁이 복구되고 다시 광해군 7년에는 창경궁이 복구되어 임진왜란 이후의 피폐된 국가 재정이 더욱 압박을 받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창덕궁에 대하여 이 궁이 증경내변(曾經內變)이 있어 불길하다는 것을 이유로 이어(移御)를 꺼리어 왔다. 증경내변이란 창덕궁에서 단종과 연산군이 소거(所居)하다가 폐위된 사실을 말한다. 또한 광해군은 한양의 지기(地氣)가 쇠하였으므로 교하(交河)에 천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술관(術官)의 말에 미혹되어 천도를 추진하다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하지 못한 일도 있었다.
그러던 차에 광해군 8년에 성지(性智)라는 승려가 인왕산이 석산(石山)이 돌기(突起)한 것이 매우 기이하고 인왕(仁王)이란 2자(字)가 길참(吉讖)인즉 왕자(王者)가 이 곳에 거처한다면 역수(曆數)가 가연(可延)하고 태평이 가흥(可興)한다고 하매 광해군이 이 말을 듣고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다.
※성지(性智)
풍수지리에 밝아 사대부(士大夫) 집안에 드나들다가 광해군의 총애를
받게 되자 왕을 부추겨 인경궁(仁慶宮)·경덕궁(慶德宮)·자수궁(慈壽宮)을 짓게 하고, 영조도감(營造都監)을 설치, 전국에서 목재를 징발하고 승려들을 공사에 동원하여 부역하게 했다. 1618년(광해군 10)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가 되어 새로지은 궁궐옆에 살았으며 사미들이 출입이 잦으니 한 가람[大加藍]이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후
주살됨.
※인경궁 터를 처음 점정(占定)한 사람은 중국 명나라 지관이었던 시 문용(施文用, 1572-1643)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조 광해군이 임진란으로 폐허가 된 왕도(王都)를 재건할 때, 경상감사에게 "궁궐을 짓는 큰 역사(役事)가 있으니 그곳에 사는 시문용을 올려보내라"는 교지를 내릴 정도로 유명했고, 그에 따라 인왕산 밑에 인경궁 터를 직접 잡았다고 한다.
우선 광해군은 왕 8년 3월에 성지(性智)와 시문용(施文用)이라는 중국인 술사(術士)를 시켜 인왕산 아래에 신궁의 기지(基地)를 상택(相擇)토록 하였다. 그런데 성지란 승려에 대하여 《광해군일기》에는 그가 문자를 알지 못하여 언서(諺書)로 풍수를 논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시문용은 본래 중국인으로 임진왜란 때 내도(來到)하여 도병(逃兵), 경남(慶南)에 유주(留住)하다가 상지(相地)로 추천된 자라고 하였다. 광해군은 이들을 특별히 신임하여 궁내에 머물도록 하고 인경궁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기지(基地)의 선정에서부터 개개 전각의 영조(營造)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의견을 들었다.
공사는 광해군 9년에 들어와 시작되었는데 우선 궁장(宮墻)의 조성과 궁기내(宮基內)의 민가를 옮기는 작업이 있었다. 5월경에는 축장 공사가 끝나고 전각의 조성이 시작되었는데 정전(正殿)·시사전(視事殿)·별당 등이 착수되었다.
그런데 인경궁의 공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이 궁 외에 다시 새로운 궁전의 조성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새문동궁(塞門洞宮) 또는 서별궁으로 불리다가 후에 경덕궁(慶德宮: 경희궁)으로 불리게 된 궁전으로 새문동에 왕기(王氣)가 있다 하여 이를 억누르기 위하여 서둘러 광해군 9년 7월에 궁궐의 조성이 착수되었다. 경덕궁의 공역은 광해군 12년에 가서야 끝났으며 이 기간 동안 인경궁의 역사는 소규모로 축소하여 진행하게 되었다. 광해군 9년에서 12년 사이에 조성된 전각은 동궁(東宮) 침전과 정문 및 주변 월랑(月廊)에 불과하였다.
경덕궁의 공역(工役)이 끝나자 광해군 13년초에는 다시 인경궁의 역사(役事)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해 6월에는 대내전당(大內殿堂)이 대개 조성을 마치고 각 아문의 조성을 남겨놓게 되었다. 그러나 공역은 광해군 14년에도 계속되었는데 광해군 14년 12월에는 인경궁에 연못을 파고 경회루의 제도에 따라 누각을 조성할 것을 명하는 기사가 있으며 기타 일부 공사는 광해군 15년에도 계속될 예정으로 자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 15년 3월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궁의 건립 역사는 폐하여지고 영건도감(營建都監)도 파하여 인경궁의 공사는 완성에 이르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2) 인경궁의 전각·문루의 건축과 배치
인경궁(仁慶宮) 전각의 배치에 관하여는 《광해군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인왕산의 터는 두 구역이 있는데, 하나는 사직 담장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인왕동(仁王洞)에 있는 바, 바로 소세양(蘇世讓)의 청심당(淸心堂) 터이다. 성의 담장은 양쪽이 함께 하였으나 전우(殿宇)는 서로 달라서 실로 두 개의 대궐이었는데…」
즉 인경궁은 궁기(宮基)가 2구(區)로 되어 하나는 사직단의 장동(墻東)에, 다른 하나는 인왕동에 있고 장원(墻垣)은 하나로 되어 있으나 전우(殿宇)는 따로 떨어져 실제로는 양궐(兩闕)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기록만으로 인경궁의 배치를 추정하기는 곤란하다. 다만 그 특징이 큰 울타리를 두고 그 안에서 건물군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음을 추측할 따름이다.
인경궁의 전각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나 전각의 수 및 건물의 치장에 있어서 창경궁(昌慶宮)이나 창덕궁(昌德宮)에 못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 더 화려하고 장대한 것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인경궁의 전각에 대하여 이를 '목요(木妖)'라 칭하여 조선왕조의 궁궐의 법도를 벗어나 지나치게 화려함을 비난한 실록(實錄)의 기사가 보인다.
인경궁은 창건 때부터 성지(性智)라는 승려와 중국인 시문용(施文用)이라는 자가 공사에 깊이 간여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다. 광해군은 이들을 매우 신임하여 궁터를 선정할 때에도 이들에게 상택(相擇)하도록 하였으며, 정전(正殿)·시사전(視事殿)·침전(寢殿)·별당을 건립하는 데에도 이들을 회동(會同)시키어 '일일상의(一一詳議)'하였다고 한다.
'목요'라는 비난이 승려나 중국인이 공사에 간여한 것을 질책하는 표현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광해군 자신이 인경궁의 전각을 다른 궁궐에 못지 않은 화려한 전각으로 치장하고자 하였음은 명백하다. 그것은 전각의 착칠(着漆) 누각의 규모 등에서 알 수 있다. 전각의 착칠에 있어서는 내전의 침전 등은 국내에서 산출되는 주홍(朱紅)으로 하도록 하였으나 대내전당(大內殿堂)과 누각은 당주홍(唐朱紅) 즉 중국산을 쓰도록 하였는데 이는 비용도 많이 들고 매우 화려한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궁의 정문은 창덕궁(昌德宮)의 돈화문(敦化門)의 예에 따라 층문(層門)으로 하고 궁내에 경회루(慶會樓)의 제도에 따라 누각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인경궁의 전각 명칭과 규모에 대하여는 부분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史料)가 있다. 이에 의하면 인경궁은 정무를 보는 외전(外殿)에 정전(正殿)으로 홍정전(弘政殿), 편전으로 광정전(光政殿)이 있고 주변에 아문(衙門)들이 있으며 내전에는 침전·별당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경궁 전각의 명칭과 규모를 알려주는 사료란 창경궁과 창덕궁의 수리공사를 기록한 문서를 말하는데 이 공사들은 인경궁의 전각을 철거하여 이축하였으므로 이 문서에 철거된 인경궁 전각의 명칭과 규모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들 사료는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옛 장서각)에 소장 중인 숭정 6년(인조 11년)에 편찬된 《창경궁수리도감의궤(昌慶宮修理都監儀軌)》와 순치 4년(인조 25년)에 편찬된 《창덕궁수리도감의궤(昌德宮修理都監儀軌)》를 말한다. 전자는 이괄의 난으로 소실되었던 창경궁을 인조 11년에 재건하면서 공사의 전모를 기록한 것이고, 후자는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던 창덕궁의 재건을 기록한 것이다. 두 의궤(儀軌)에는 양궁궐의 복구 공사가 인경궁의 전각을 철훼하여 이루어지게 된 과정을 상세히 적었으며 새로 지은 전각의 명칭과 규모, 이를 위하여 철거된 인경궁 전각의 명칭과 규모를 명시하여 놓은 것이다.
우선 공사가 먼저 이루어진 창경궁 복구시에 철거된 전각들을 살펴보면 청와전(靑瓦殿)·광운당(廣運堂)·무일당(無逸堂)·수루당(壽縷堂)·소기별당(蘇基別堂)·환희당(歡喜堂)·함인당(涵仁堂)·헌잠당(獻箴堂) 등이며 이들 전각은 각각 창경궁(昌慶宮)의 통명전(通明殿)·연희당(延禧堂)·양화당(養和堂)·경춘전(景春殿)·연희당남월랑(延禧堂南月廊)·사성각(思誠閣)·통명전(通明殿) 서책방(西冊房)·연경당(演慶堂) 등으로 이조(移造)되었다. 여기에 조성된 창경궁의 전각들이 대부분 내전에 속하는 침전·별당들임을 볼 때 이를 위해 철거된 인경궁의 전각들 역시 인경궁내의 내전을 구성하던 침전·별당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본래 인경궁의 침전들은 당초 건립할 때에 창경궁의 경춘전·명광전 등을 모방하여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경춘전·명광전이 소실된 후에 이를 재건하는 데에는 이를 모방하여 지었던 인경궁의 침전을 철거하여 이축하는 것이 용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재건과 관련되어 명칭과 규모가 밝혀진 전각은 전각 수에 있어서나 규모, 칸수 등에서 앞에 제시한 창경궁 재건 때에 비하여 크게
증가하였다. 더욱이 여기에는 인경궁의 정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비롯하여 외전의 주요 전각들과 내전의 전각의 상당수가 망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전각은 홍정전(弘政殿)과 광정전(光政殿)이다. 홍정전은 인경궁의 정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추정되며 광정전은 편전(便殿)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광정전은 창덕궁의 선정전(宣政殿)으로 이건되었는데 선정전은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로는 인조 25년의 재건시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이 확실하다면 광정전은 인경궁의 여러 전각 가운데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물이
되는 셈이다.
홍정전과 광정전 두 건물이 모두 인경궁의 외전에 위치한 궁의 중심
전각이라는 사실은 이 두 건물만을 경복궁의 근정전과 같이 진채(眞彩)로 장식할 것을 명한 점에서 알 수 있다. 두 건물 가운데 홍정전이
정전(正殿)이고 광정전이 편전(便殿)이라는 것은 건물의 규모, 건물 주변의 월랑·행각의 규모, 출입문의 위치, 규모 등에서 홍정전이 광정전에 비하여 월등히 크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창덕궁 선정전)
여기서 인경궁의 여러 전각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광정전에 대하여 자세히 검토하기로 한다. 광정전은 인경궁의 편전이었으며 이 건물은 인조 25년에 헐리어 창덕궁에 다시 세워졌고 전각
명
칭은 선정전이 되었다.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의 동측에 세워졌다.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 의하면 광정전은 9칸이었으며 선정전 역시 9칸으로 두 건물의 규모가 동일하다. 광정전을 창덕궁으로 옮기어 선정전을 세우는 작업에 대하여는 광정전의 철거 자재와 선정전의 소요자재가 《창덕궁수리도감의궤》에 명시되었는데 여기서 두 건물의 골격을 이루는 주요 자재는 서로 일치하고 있다. 즉 고주(高柱) 2주(柱)·대복 2개·살미 28총(叢)·사래 4개 및 종복·평복·허복(虛?)·충복(衝?) 등의 수량이 철거분과 이축시(移築時)의 소요량이 일치한다. 그런데 현존하는 선정전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전면에 이고주(二高柱)를 두고 지붕은 팔작지붕 건물로 되어 있어 앞에서 든 자재들은 현존 건물의 구조와 들어맞고 있다. 특히 현존 선정전의 지붕은 청와(靑瓦)로 덮여 있는데 본래 인경궁의 광정전 역시 청와로 덮여 있었고 광정전에서 청부와(靑夫瓦) 2,520장, 청녀와(靑女瓦) 5,650장, 청잡상(靑雜像) 21개를 철거하여 선정전의 지붕을 덮었다고 한다.
한편 《궁궐지(宮闕志)》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 조선왕조의 궁궐을 다룬 당시의 문헌들에는 선정전이 인조 25년의 재건 이후 피재(被災)되었거나 변조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건물은 재건 이후 부분적인 보수는 있었을 것이나 건물의 기본 골격이나 형태는 재건 당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재건시에 소요된 기본적인 부재(部材)들이 현존하는 유구(遺構)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이나 재건시에 자재장(資材帳)과 현존 유구와의 비교에서 현존 선정전의 건축 형태가 재건시의 모습을 보지(保支)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미 고찰한 대로 재건시의 선정전은 인경궁의 광정전을 이축한 건물이었으며 건물을 구성하는 기본 부재가 모두 광정전에서 그대로 옮겨왔음이 밝혀졌던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창덕궁의 선정전은 바로 인경궁의 수많은 전각 중 유일하게 창건시의 건축형태를 간직한 건물로 결론지을 수 있다.
(3) 인경궁 전각의 철훼(撤毁)
인경궁(仁慶宮)의 역사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중지되었다. 이 때에 궁전은 대부분이 완성되었고 약간의 공역이 남아 있었다. 역사(役事)가 중지되고 나서 인경궁은 궁궐로 이용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는 자전(慈殿: 인목대비)이 일시 거처하였고 이 곳에서 서세(逝世)하였다고 적고 있을 뿐이다. - 인조 10년(1632) 6월 28일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춘추 49세로 승하 -
그러다가 인조 11년에 들어와 소실된 창경궁(昌慶宮)을 복구하면서 인경궁의 전각 중 침전(寢殿)의 일부가 철거되어 창경궁으로 이조되었고 인조 25년에는 창덕궁(昌德宮)의 복구공사가 시작되면서 인경궁 외전(外殿)의 정전(正殿)·편전(便殿) 등 중요 전각과 내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다. 이듬해인 인조 26년에도 창경궁내에 동궁(東宮)의 처소인 저승전(儲承殿)을 지으면서 인경궁 전각을 철거하여 지었으며 홍제원(弘濟院) 역시 인경궁 전각으로 건립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인경궁의 대부분의 전각은 철거되고 약간의 건물만이 남게 되었으며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궁궐의 흔적마저도 사라지고 궁터에는 민가가 들어차게 되었던 것이다.
인경궁이 완성 직전에 공사가 중지되고 이 곳이 궁전으로 사용되지도 못한 채 방치되었다가 바로 철거하게 된 데에는 광해군의 폐위가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보인다. 인경궁은 건립 과정에서 광해군이 풍수음양설을 신봉하여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공사를 벌였고 승(僧) 성지(性智)와 중국인 시문용(施文用) 등 술사(術士)들이 공사에 깊이 간여함에 따라 대신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이다. 《인조실록》 권28 인조 11년 3월 병진조(丙辰條)에는
「다만 생각컨대 인경궁은 혼조(昏朝) 때 미친 중이 건의하여 건축한 곳이니 풍수의 길흉은 논할 틈도 없거니와 가옥의 제도가 너무나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정말 이른바 목요(木妖)입니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제왕이 거처하기엔 맞지 않으나 …… 창덕궁은 본래 조종의 법궁(法宮)으로 선조 말년에 중건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잿더미가 되었으니 또한 몹시 애석합니다. 만약 인경궁 주변의 두어 곳 전각 재목과 기와를 옮겨다 이 대궐을 지을 경우, 인경궁 수리에 비하여 난이의 차이는 있겠으나 또한 그리 큰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며, 조종의 법궁도 이로 인해 세워질 것이니 사리에 있어서 더없이 편리하고 마땅하겠습니다.」
라고 하여 인경궁이 혼조(昏朝) 때 광승(狂僧)의 창의(倡議)로 세워진 궁궐로 사려(奢麗)를 극하고 있는 반면 창덕궁은 선조 말년에 재건되었으나 불에 타 버렸으므로 인경궁의 전각 수처를 헐어 그 재와(材瓦)로 창덕궁을 수건(修建)한다면 일이 쉬울 것임을 비변사(備邊司)에서 계(啓)하고 있다. 당시에는 창경궁이나 창덕궁이 모두 피재(被災)되어 있었던 때였으며 일부에서는 두 궁궐을 수리하는 공역(工役)을 다시 일으킬 것이 아니라 왕이 인경궁(仁慶宮)으로 이어(移御)할 것을 청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인조 11년 7월에는 우선 창경궁을 복구하기로 하고 인경궁의 전각 일부가 철거되어 창경궁에 이조(移造)되기 시작하였다.
인경궁의 전각 중 철거되어 창경궁과 창덕궁에 이조(移造)된 건물의 명칭과 규모는 앞에서 밝힌 바 있으며 그 외에 인조 26년에는 인경궁의 승화전(承華殿) 45칸과 주변 행각(行閣)·월랑(月廊) 79.5칸, 중휘당(重暉堂) 동월랑 13칸, 북월랑 50칸, 계명당(啓明堂) 동남행각 25칸, 제1별당 19.5칸, 제2별당 20칸, 벽월당(陽月堂) 층합(層閤) 16칸 외에 행각 등 69칸 등이 저승전(儲承殿)의 수리를 위하여 철거되었다.
인경궁의 전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효종 연간(年間)으로 생각되는데 《효종실록》 권21 효종 10년 4월 임인조(壬寅條)에는
「신이 듣기를 동평위(東平尉) 집을 지은 곳은 인경궁 옛 터라고 합니다.」
라는 기록하고 있어 이 때에는 이미 인경궁을 구기(舊基)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터에 부마 동평위(東平尉)의 집이 세워졌다고 하여 궁궐의 모습이 사라졌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영조 45년 11월 왕이 승지에게 명하여 인경궁이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승하한 곳이니 옛 터를 살펴보라고 하였으나 그 곳을 다녀온 승지는 인왕산 아래, 사직의 왼쪽 근처에 있었던 듯하나 상세한 위치를 알 수 없다고 하여 18세기에는 완전히 자취가 인멸되었다고 하겠다. 오직 인경궁 전각의 한 자취를 찾는다면 부분적인 변개(變改)가 있었다고 보여지나 창덕궁의 선정전(宣政殿)에서 당시의 광정전의 모습을 찾아볼 따름이다.
- 다음은 임오군란과 왕십리의 이야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