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곡리 두 인물
시월이 가는 마지막 날 산책 행선지는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의령 지정면 성산마을 근처 의병의 숲으로 나갈 요량이다. 합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함안 대산을 거쳐 지정 두곡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침에 근교 화사나 학교로 가는 일반인과 학생들과 함께 시골길을 지나 남강 하류 송도교를 건너니 남강이 흘러와 낙동강에 합류하는 곳으로 거름강이라고도 불리는 강변이다.
거름강은 한자어로 기강(岐江)이라 하는데 두 강이 나뉘는 분기점이라는 의미로 양수리나 두물머리와 같은 뜻이다. 기강 나루는 임진왜란 때 연패를 거듭하던 초기 전황에서 의병장 곽재우가 첫 승전보를 전했는데 관군 이순신이 옥포 해전에서 왜선을 격침 시킨 전투보다 일주일 앞선 기록이다. 4대강 사업 때 의령군이 유일하게 낙동강과 접한 둔치에 의병의 숲 공원을 꾸며 놓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송도교 건너 강변 성산에 나를 내려준 기사는 종점 두곡으로 향해 갔다. 두곡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우뚝한 한글학자 이극로 출생지다. 그는 일찍이 마산 창신학교에 다니다가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일까지 유학 가서 경제학과 언어학을 연구한 학자가 되었다. 이후 국내로 잠입해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이념이 달라 북을 선택했다.
임진란 의병장 곽재우 출생지 유곡 세간은 의령 동부권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에도 큰 인물을 다수 배출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정곡 중교리에서 태어났다. 이극로와 동시대 독립운동에 군자금을 댄 안희제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는 부림면 입산이다. 부림과 정곡은 대구와 마산이 가까워 진주에 치우친 의령읍과는 생활권이 달라 어릴 적 나는 잘 몰랐던 동네다.
성산마을에서 강둑 너머 둔치 공원으로 내려갔더니 안개가 짙어 사위의 분간이 쉽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니 사람 손길로 가꾸어진 화초들이 안개에 비를 맞은 듯 흠뻑 젖어 있었다. 산국보다 잎이 조금 커 보인 노란 감국이 제 철이고 코스모스는 저물었고 황화 코스모스는 끝물이었다. 구절초는 가뭄으로 생육이 부진해 잎줄기가 부실하니 꽃이 시원찮았고 물억새 군락지를 지났다.
강 건너편은 남지 개비리길 벼랑인데 안개가 짙어 강조차 보이질 않았다. 산책로를 따라 둔치 북쪽 끝에서 둑으로 올라 낙동강환경관리청 소속 감시원을 만나 잠시 얘길 나누었다. 그는 그곳 현지인으로 내가 관심 많은 이극로 얘기를 꺼내자 잘 모르고 작곡가 이호섭에 대해 훤하게 알았다. 나는 대중가요계를 잘 몰라도 이호섭 이름은 알고 있는 터라 환경 지킴이 얘기에 귀 기울였다.
이호섭은 성산과 이웃한 두곡리 출신으로 어린 시절 집안이 어려워 부모 품을 떠나 마산에서 양모 밑에 키워져 나중 보니 의령 두곡에 생모가 살아 계셔 정체성 혼란이 와 십대 사춘기 방황하기도 했단다. 일요일 KBS 전국 노래자랑 악단장으로 국민 작곡가인 이호섭은 의령에서 그의 이름을 딴 가요제가 매년 가을에 열린다. 내 고향 초등 친구들도 이호섭의 광펜이고 나와 나이가 같다.
환경 감시원과 작별하고 안개가 걷힌 둑에서 내려와 나머지 초화원을 둘러봤다. 자주색으로 물들었던 댑싸리는 퇴색했고 한때 아름다웠을 핑크뮬러와 가우라는 아직 볼만했다. 구절초와 버들마편초와 이스타국화도 거의 저무는데 평일도 불구하고 외진 곳까지 가을 정취에 젖어보려는 탐방객이 간간이 보였다. 전망대에 올랐더니 남강은 낙동강에 합수해 남지를 비켜 유장하게 흘렀다.
강변에는 임진란 의병장 곽재우를 기린 보덕각과 손인갑 부자 순절 충절을 새긴 쌍절각이 보였다. 오천 배수장에서 돈지마을을 지난 마산리에서 송도교를 건너 대산 구혜에는 한국전쟁 참전 경찰 승전비와 기념관이 나왔다. 귀로에 전화 연락이 오간 친구에게서 작곡가 이호섭에 대해 하나 더 알게 되었다. 오래전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이호섭이 찾은 은사가 친구 장인이었단다. 23.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