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y3JNzQLzlyY?si=SvH76ixo_MTN28HR
푸쉬킨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엔 참고 견이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픔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알락센드르 푸쉬킨은 "러시아 시(詩)의 태양"이라고 일컬어진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문학가 중 한 사람입니다.
푸쉬킨은 시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해주었습니다.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한줄의 시 귀절이 바로 그 유명한 삶의 詩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라는 귀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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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시의 창작 배경은 시인 푸쉬킨이 모스크바 광장에서
소경 걸인을 만나게 된 연유에서 출발 합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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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그 유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쉬킨은 모스크바 광장에서
추운날씨에 누더기를 걸치고 구걸하는 한 소경걸인을 보게 됩니다.
광장에는 걸인들이 많았기에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푸쉬킨은 소경걸인을 지켜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나도 역시 가난한 처지인지라 줄 돈은 없고 돈대신 글씨 몇 자를 써서 주겠으니
그걸 몸에 붙이고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얼마 후에 푸쉬킨은 친구들과 모스크바 광장에 갔는데 그 걸인이 어떻게 알았는지
푸쉬킨의 바지를 붙잡고는 ~~
“ 감사합니다. 목소리를 들으니 며칠 전 글씨를 써주신 분이시지요 !
신께서 도우셔서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써주신 종이를 몸에 붙였더니 그 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돈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였다.
푸쉬킨에게 그 소경걸인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날 써준 내용이 도대체 어떤 글 이신지요 ? "
“푸쉬킨은 말했습니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멀지 않으리!’ 라 썼습니다.”
사람들은 이 글을 보고 생각하였을 것 입니다.
지금은 비록 춥고 고단한 날을 보내고 있지만 봄을 기다리는 이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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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는 일반적인 시어로 삶에 대한 진솔한 표현을 나타낸 작품으로 푸쉬킨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詩 입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과 꿈과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은 푸쉬킨 위대함을 말해준다. 시인은 현실의 삶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신이여, 저를 미치지 않게 하소서
신이여, 저를 미치지 않게 하소서.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보따리와 지팡이가 나아요.
아니, 고생스럽고 배고픈 게 차라리 더 나아요.
그것은 내가 나의 이성을 존중해서도 아니고
이성과 헤어지는 것이 기쁘지 않아서가 아니요.
나 자유로이 둔다면
그 얼마나 활개치며
어두운 숲으로 달려가리!
열병에 걸린 것처럼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그 얼마나 자유로이 멋진 꿈에 도취되어
나를 잊으리.
그리고 나의 파도소리에 귀기울이고
행복에 가득 차서
빈 하늘을 바라보리니
나 그 얼마나 힘차고 자유로우리
들판을 파헤치고
숲을 휘어뜨리는 회오리처럼
그런데 불행히도 미친다는 것은
페스트보다 더 두려운 일,
곧 갇히고
사슬에 묶이리니,
사람들은 창살 사이로 짐승을 찌르듯
찌르러 올 것이고,
그리고 밤에는 들을 것이다.
꾀꼬리의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도 아니고
빽빽한 참나무숲의 웅성거림도 아니고
울리는 것은
친구들의 외침소리, 밤의 파수꾼의 욕설,
사슬이 쩔렁이고 삐걱이는 소리뿐.
내 그대를 사랑했노라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는 한, 내 영혼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나니
그러나 나의 사랑은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히지도 방해하지도 않나니
내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니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이야기도 희망도 없이
때로 나의 소심함과 때로 나의 질투가 나를 괴롭혔지만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그토록 진심으로 그토록 조심스레
신의 섭리에 따라 다른 이들이 그대를 사랑한 것만큼
위 시는 곤차로바와 결혼하기 전에 푸쉬킨이 사랑했던 여인 안나 올레니나에 대한
사랑했던 심정을 표현한 시 입니다.
사랑에 대한 애절한 심사가 문학의 열정에서도 빛을 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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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의 일생
알렉산드르 푸쉬킨(Alexandr Pushkin)의 가족사를 보면 어머니의 증조할아버지는
Abram Petrovich Gannibal9(흑인)으로 아프리카 족장의 아들로 러시아인에게 노예로 팔려와 표트르
대제에게 바쳐진 후 신임을 얻게되어 귀족계급까지 오르게 되었다 합니다. 푸쉬킨은 열렬한 구애끝에
나탈랴 푸쉬키나(결혼전 성은 Goncharova)라는 경국지색의 아리따운 13세 연하의 미모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네자녀를 두었던 곤차로바는 러시아(당시 황제시대)사교계에서 네덜란드 외교관이었던 단테스 데 헥케른D남작
과 염문을 뿌리게 됩니다. 단테스와 나탈랴가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은 러시아 사교계에 소문이 나게 되고
드디어 불쾌한 소문을 접한 푸쉬킨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됩니다.
푸쉬킨의 아내는 미인이었지만, 젊고 잘생긴 남자들에게 환심을 사는 행실로 소문이 파다한 아내였다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 황제 짜르에게까지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결국 1837년 1월 27일 상뜨 뻬쩨르부르크에서 두 사람의 운명적인 결투가 있었습니다. 이 결투에서 푸쉬킨은 단테스가 쏜 총알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이틀 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나이 38세에 일생을 하직하게 됩니다.
(단테스는 나탈랴 여동생의 남편으로 푸쉬킨에게는 처제의 남편이었습니다. 푸쉬킨의 정적들이 자유분방한 푸쉬킨을
제거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러시아의 횃불 같은 시인 푸쉬킨은 아내의 행실에 노여워하는 바람에 슬픔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시처럼 노여워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면 아마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전세계의 문학 독자들은 주옥같은 그의 작품을 더 많이 즐길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푸쉬킨은 아내를 탐하는 사람들로 부터 자신의 명예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2014.2.5. 산인
(아래글은 옮긴 글 입니다. )
그 날도 페테르부르크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지만, 오후 4시가 넘어 교외 공터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주변은 나무가 둘러싸고 있고 두껍게 눈이 쌓인 러시아의 전형적인 겨울 풍경이다. 총을 든 두 남자의 눈가에 분노와 긴장이 갈마들어 감돈다. 정적을 깨뜨리며 발사된 총탄. 한 남자가 배를 움켜쥐며 눈밭에 쓰러진다. 눈밭을 적시는 낭자한 선혈. 온 얼굴이 눈 범벅이 된 채 겨우 일어난 남자가 소리친다. “브라보!”
남자는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12번지에 있는 집으로 급히 옮겨진다. 때는 1837년 2월 8일 오후 4시 30분경. 남자는 이후 이틀 동안 심하게 앓았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남자. 아내는 남편의 비명에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남자는 아내가 자기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그래도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방에 들어왔다. “얼음을 달라!” 아내가 갖다 준 얼음을 이마에 올려 굴리다가 얼음을 먹는 남자. 그가 입을 연다. “잘 있어! 친구들!”
곁을 지키는 친구가 한 명도 없는데 느닷없이 친구라니. 그가 부른 친구란 서재에 있는 책들이었다. 남자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꿈에서 책 더미 위로 올라갔어요. 책 더미가 너무 높아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지요.”
2월 9일과 10일에 걸쳐 모이카 12번지 주변에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놀라 명령을 내렸다. ‘장례식 장소를 비밀리에 변경할 것, 일반인의 장례식 참석 엄금, 가족과 친구들만 참석 가능, 군대는 비상 대기할 것, 황실 주치의를 보낼 것, 불법 결투를 벌였지만 사면할 것, 신문의 과격한 추모 기사는 엄금.’ |
결국 남자는 2월 10일 숨을 거두었다. 러시아 구력(舊曆) 1월 29일. 신력으로 2월 10일 오후 2시 45분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슈킨이 38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법으로 금지돼 있던 결투를 벌인 푸슈킨의 상대는 조르주 단테스. 러시아로 망명한 프랑스군 장교로 네덜란드 공사 헤케른의 양자였다. 푸슈킨이 단테스의 양아버지 헤케른에게 모욕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단테스는 푸슈킨에게 결투를 신청한 터였다.
그들이 결투한 곳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결투를 위해 두 사람이 각각 자리 잡았던 곳이다. 푸슈킨의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에서 렌스키는 오네긴과의 결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렌스키의 운명이 곧 푸슈킨의 운명이 되고 말았으니, 소설이 하나의 예언이었던가. 꽃다운 16살 소녀 곤차로바를 처음 만나 ‘아!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여!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여인이야!’라며 정열을 불태웠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건만, 매혹적인 자태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1831년에 결혼해 네 명의 자녀들을 남겨두고 푸슈킨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곤차로바는 1844년 재혼).
푸슈킨과 결혼하기 전부터 러시아 상류 사회 사교계의 꽃이었던 곤차로바는, 결혼 후 조르주 단테스와의 염문설에 휩싸였다. 단테스는 끈질기게 푸슈킨의 아내 곤차로바에게 구애했고 이는 당시 러시아 상류 사회 최대의 화제로 떠올랐다. 푸슈킨의 모욕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내와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푸슈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단테스가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언니와 결혼함으로써 결투 신청은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단테스의 구애는 계속되었고, 더구나 푸슈킨에게 익명의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배반당한 남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식의 악의에 찬 조롱이었다. 푸슈킨은 단테스의 양아버지 헤케른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고 그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고, 결국 위와 같은 비극으로 끝났다(그러나 이 결투가 러시아 궁정 내부 세력이 푸슈킨을 제거하기 위해 꾀한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 푸슈킨. 러시아 황실 여름 궁전이 있는 이 도시의 본래 이름은 차르스코예 셀로, 즉 ‘황제의 마을’이었다. 18세기 초 표트르 1세가 건설한 도시로, 특히 예카테리나 여제가 세운 별궁(이후 황실 여름 궁전으로 이용됐다)이 있었던 곳. 1937년에(푸슈킨 서거 100주년) 오늘날과 같은 푸슈킨 시로 명명된 것은 알렉산드르 1세가 그곳에 세운 학교 리체이에서 푸슈킨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푸슈킨은 1815년 리체이의 상급반 시험장에서 ‘차르스코예 셀로의 회상’이라는 자작시를 낭송하여 시인으로서 자질을 인정받았다(화가 일리야 레핀은 ‘차르스코예 셀로 시절의 알렉산드르 푸슈킨’(1911)이라는 그림으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리체이 시절(1811-1817) 푸슈킨은 자유주의적 기풍에 물들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에 참여했다. 학업을 마치고 외무성에 근무했지만 혁명적 사상가 및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러시아의 전통적인 농노제를 타도해야 한다는 사상을 굳혀나갔다.
"네가 주인이다 / 홀로 살아가라 / 걸어가라 자유로운 길을 / 자유로운 정신이 너를 이끄는 곳으로" 하고 노래했던 푸슈킨은 바로 그렇게 자유를 찬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는 러시아의 낙후된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꾼 데카브리스트 구성원들과 교류하며 그들에 공감했고, 1824년에는 국외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집안 영지인 미하일로프스코에 유폐되어 계속 창작에 몰두했고, 유폐라는 고독하고 불우한 상황이 푸슈킨을 예술적, 사상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가 괴멸당한 뒤 유폐 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러시아의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예민한 성찰과 민중에 대한 관심은 푸슈킨에게 호흡과도 같았다.
푸슈킨의 시적(詩的) 단편 드라마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피터 셰퍼의 <아마데우스>에 영감을 제공했고, 푸슈킨 자신이 큰 애착을 갖고 있던 시적 소설 <예프게니 오네긴>은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영역(英譯)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러시아 국민 음악파의 창시자로도 평가 받는 미하일 이바노비치 글린카는 푸슈킨의 <루슬란과 류드밀라>에 바탕을 두어 동명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글린카는 ‘국민이 음악을 창조하며 음악가는 그것을 편곡한다’는 생각으로 민중의 삶과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푸슈킨의 문학 세계야말로 음악적 영감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되었다. 비단 글린카뿐만이 아니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예프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 <마제파> 등도 푸슈킨의 작품이 원작이며,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라흐마니노프의 <알레코>(푸슈킨의 작품 ‘집시들’에 바탕을 둠),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술탄 황제 이야기> 등도 마찬가지다.
푸슈킨은 러시아 문학의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낭만주의라는 말만으로 그의 문학 세계 전체를 규정하기는 힘들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가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를 거쳐 리얼리즘으로 가는 길을 반영한다고 본다. ‘낭만주의적이었으되 낭만주의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푸슈킨은 러시아 문학의 발전뿐 아니라 러시아어 자체의 발전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러시아어 표현에서 부족함을 느낄 때 푸슈킨은 과감하게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고안해내기도 했고, 풍부한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문장 표현은 러시아 문학을 푸슈킨 이전과 이후로 나누게 할 정도였다. 서유럽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던 19세기 러시아에 푸슈킨은 유럽의 모든 문학 장르를 도입시켰다. 서정시, 서사시, 소설, 단편, 에세이, 희곡 등 모든 장르에 걸쳐 창작의 불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푸슈킨이 아니었다면 이반 투르게네프, 이반 곤차로프, 톨스토이 등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내 그대를 사랑했노라
사랑이라는 게 존재하는 한, 내 영혼에서 완전히 꺼지지 않나니
그러나 나의 사랑은 더 이상 그대를 괴롭히지도 방해하지도 않나니
내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니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이야기도 희망도 없이
때로 나의 소심함과 때로 나의 질투가 나를 괴롭혔지만
내 다만 그대를 사랑했노라, 그토록 진심으로 그토록 조심스레
신의 섭리에 따라 다른 이들이 그대를 사랑한 것만큼
푸쉬킨이 가지는 러시아 문학사상에서의 의미를 한마디로 한다면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 문학의 예술적 완성과 러시아 근대문학의 전통과 사실주의 문학을 확립한 작가이다. 그의 천재성은 나폴레옹 전쟁에 수반된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서 꽃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역사적 시대의 러시아 국민사상과 감정의 최대 표현자로서 국민문학의 창시자가 되었던 것이다. 국민생활과의 밀접한 유대, 시대의 선구적 사상의 반영, 그 내용의 풍부성, 이런 면에서 그를 따를 러시아 시인은 없다. 그가 다루는 범위도 당시 러시아의 모든 계층의 생활과 역사적 사건, 또한 러시아의 소수민족과 서구와 동방의 생활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는 <이고리 원정기>와 라지시체프 작품의 전통을 이어받음으로써 문학이 사회의 정신적 발전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민적 사업이라는 것을 자각한 최초의 러시아 시인이기도 하다. 푸쉬킨은 러시아 작가들 중 가장 우뚝 솟은 최고의 시인이며 작가로 인정을 받고 있다. 러시아 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영문학에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그것에 곧잘 비유되고, 그에게 부여된 국민 시인이란 칭호도 그의 작가로서의 비중을 잘 말해 준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단지 러시아 작가만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즉 그의 작품은 러시아적이면서도 인간 보편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그의 문학의 세계적인 문학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푸시킨문학의 특징은 음과 의미의 완벽한 결합, 서술의 자연스러움, 명석·간략함에 있으며, 그의 공적은 근대적 러시아 문장어 표준 확립과 세계문학 수준에 이르는 새로운 국민문학 창조의 2가지로 집약된다.
I.S. 투르게네프가 그의 창작활동에 대해 '다른 나라에 1세기 또는 그 이상 뒤떨어져 있던 2가지 일을 그 혼자서 이루었다'고 한 것처럼, 그는 러시아의 진실·국민성 및 역사적·사회적 조건을 기술한 국민시인이면서, 민족성의 한계를 뛰어넘어 러시아문학을 보편적인 것으로 드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더라도>를 두고서는...
평이한 시어로 삶에 대한 진지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는 시로 푸슈킨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다.
푸시킨은 아내 나탈리야의 낭비벽으로 재산을 모두 탕진했으며, 또한 그녀는 프랑스 혁명때 도망친 프랑스 망명 귀족 단테스와 바람이 났다. 푸시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그 부상으로 이틀 후 38살에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푸시킨의 사랑과 죽음
젊은 나이로 허망하게 맞은 푸시킨의 죽음을 두고서 '당시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아낀 많은 러시아 민중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말한다.
나탈리야 곤차로바. 그 빈 머리(지적 수준이 미달되는)와 미모로 인해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목숨까지 잃는 결과를 낳았다고.
1826년 푸시킨은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부름을 받고 유배지에서 돌아와 지내다 16세(13세 연하)의 나탈리야를 보고 반하게 되는데, 일찍이 그가 "현기증을 느꼈다"고 했을 만큼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었다. 그리하여 3년간 열애 끝에 그가 32세 되던 1831년에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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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alya Goncharova, Pushkin's wife. Painted by Ivan Makarov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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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은 말한다.
푸시킨은 여자 보는 눈이 없어 얼굴은 예쁘지만 '머릿속이 하얀 여자'를 마누라로 얻어 불행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결혼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가난했던 신부 측은 푸시킨의 가문에 반해 결혼을 승낙했던 것이다.
궁핍한 장모에게 빚까지 내가며 거액의 혼수금을 쥐어줘야 했다. 게다가 유행을 좋아하고 사교계의 여왕으로 각광받게 된 아내 때문에 갈수록 큰 돈이 들었다.
늘어가는 빚과 사교계의 번잡함 속에서 그는 정서불안에 시달렸다. 모스크바에서의 신혼의 달콤한 날들은 꿈마냥 짧았다.
숨지기 3년 전인 1935년 무렵 그는 황제에게 매수당했다는 비난을 각오하고 니콜라이 1세로부터 3만 루블을 빌리게 된다.
그만큼 그로서는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였다.
이런 와중에 아내의 불륜을 암시하는 투서까지 날아들었다.
황제의 근위병 중에는 프랑스 혁명 때 러시아로 망명해온 귀족(단테스)이 있는데, 둘이서 몰래 만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푸시킨의 진취적인 사상을 미워한 당시 세력가의 음모라는 설, 혹은 황제와 나탈리의 불륜을 덮어주기 위한 계책이란 설도 있지만, 푸시킨은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익명의 편지에 분개했다.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연적'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