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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 어디 있느냐."
"예, 어머니. 연이 곁에 있사옵니다."
몸이 아픈 어미가 사흘 밤낮을 꼬박 앓은 뒤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연은 혹여 어미가 듣지 못할세라 크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밖에 비가 오는구나."
"추우십니까 어머니?"
"아니, 비가 보고 싶어 그래. 이 어미를 위해 창을 열어주겠니?"
"그러다 고뿔에 걸리십니다. 어머니, 아프지 마시어요."
비를 맞으면 다시 앓으실 게 뻔한데 연은 어미가 아픈 게 싫었다.
연은 어미가 아플 때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허나, 다 죽어갈 듯한 목소리로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말하는 어미의 부탁을
차마 들어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비가 보고 싶어 그런대두. 요 근래에 비를 본 적이 없지 않으냐."
"- 예, 어머니. 대신 잠시뿐이어요."
잠시 망설이다 연은 조심스레 창을 열었다.
덧댄 짚 섶이 빗물에 젖어 발치께로 툭 하고 떨어졌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요전엔 부슬부슬 내리는 듯하더니 어느새
사나운 기세로 맹렬히 쏟아내리는 장대비로 변해 있었다.
연은 서둘러 어미께로 다가가서 어미를 꼭 끌어안았다.
어미의 몸은 차가웠지만, 어미는 가만히 미소짓고 있었다.
"어머니, 가지 마시어요. 가지 마시어요."
"연아, 비가 참으로 예쁘구나……."
"- !!!"
어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차가운 빗속에서도 행복하다는 듯 그저 미소 짓고 있었다.
어린 연이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699년, 서나라의 왕 호헌은 말년에 주색에 빠져 나라를 소홀히 다스렸다.
비주족의 잦은 침입과 잇따른 기근으로 백성의 원성을 날로 커져갔다.
이에 몇몇 신하들이 반역을 꾀했으나, 얼마 안 가 그 계획이 발각되어
그 중 몇몇은 참수당하였고, 몇몇은 외딴곳에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들의 가족 또한 대부분 몰살되거나 노예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후에 밝혀진 이야기지만, 그 배후에는 세자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자는 호헌 왕의 적자로서 어릴 때부터 검술과 학문에 매우 두각을 나타냈으며
외교술 또한 나이 많은 대신들 못지않게 훌륭했다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세자를 왕으로 봉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며 이듬해 호헌 왕이 붕어하자,
19살의 나이에 그는 서나라의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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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꺼정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반 식경(半食頃 : 약 15분)후에 식이 거행돼야 할 것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서두르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알겠느냐?"
"예! 명 받듭니다!"
대호군 (大護軍) 이원영은 오늘 거행될 왕위 책봉식을 담당한 신하였다.
그는 세자의 오랜 친구로서 국가의 치안을 관리하는 중대한 관직에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세자의 까다로운 심미안을 충족시키지 못해 화를 입게 될 궁인들을 안쓰럽게 여겨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직접 모든 부분을 총괄하고 나섰던 것이다.
세자는 정말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분명 얼마 전까진 여인의 치마폭을 들추며 킬킬댔지만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무서우리만치 차가운 얼굴로 전각을 나서곤 했다.
그의 말은 겉으로 보이는 말이 전부가 아니었으며, 그의 행동 또한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를 믿는다는 것은 범의 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을뿐더러 사람들에게 적잖은 상처를 안겨주기 일쑤였다.
그런 그에게도 평생을 함께할 세자빈이 존재했다. 비록 명분뿐이긴 하나, 선대 왕이 주색에 빠져 살기 전,
갑작스럽게 전국을 샅샅이 뒤져 찾아낸 세자빈이었다. 신하들은 세자빈이 남자라는 것을 알고는 대경실색하며
그를 뜯어말렸지만, 왕은 약속을 지킬 뿐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 세자의 곁에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세자빈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자빈께선 지금 어디 계신가."
"예화궁에 계시옵니다."
"예화궁? 그곳엔 어인 일로 계시던가."
"그게…. 예화궁은 세자빈께서 거처하고 계신 곳이옵니다, 나으리."
예화궁은 구중궁궐(九重宮闕) 못지않게 겹겹이 둘러싸인 빈궁전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미처 뻗치지 않은 터라 지금껏 폐비나 찾지 않는 후궁이 내쳐지곤 했던 곳으로 알려졌는데,
선왕이 책봉한 세자빈이 예화궁에 거처하고 있다는 것은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강제로 이어진 연이라 해도, 어찌 자신의 비에게 이렇게 무심할 수 있으랴.
새삼 세자에 대한 마음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원영은 종복과 함께 예화궁으로 서둘러 향했다.
시간은 흘러 반 다경 (半茶頃: 5분에서 10분 사이) 도 남지 않았지만, 예화궁은 좀처럼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이원영이 걸음을 바삐 움직이자 어디선가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호군을 뵙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본 이원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앞에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세자빈이 자리해 있었다.
"여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빈."
"후원에 못보던 초들이 자라있길래 구경을 좀 다녀왔습니다."
어릴 적, 궁에 처음 입궐해 낯선 곳에서 정을 못 붙이고 있길래 안쓰러움에 다가가 말을 걸어보았다.
그렇지만 그가 무슨 말을 건네와도 세자빈으로 온 소년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가 얄미워 부루퉁한 얼굴로 옆에 자라있던 풀을 잡아 뜯었는데,
소년은 눈을 크게 뜨며 처음으로 말을 했었다.
「초를 그리 뜯으면 아니되어요.」
「말을 하느냐?」
「-...아무곳에서나 쉬이 입을 열지 말라 하셨습니다.」
「누가?」
「제 어머니께서 그리 이르셨습니다.」
「오호, 그런데 지금와서 입을 연 연유는 무엇이더냐?」
어미가 쉬 입을 열지 말라 일렀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소년에게 놀리듯 묻자
소년은 그것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발갛게 붉히었다.
「금난초이옵니다. 아직 꽃송이가 제대로 여물지 않았는데 그리 뜯으시니 안타까워…….」
「하하하. 그것이 그리 안타깝더냐. 지천에 널린 것이 초이거늘…. 그래, 네 이름은 무엇이더냐?」
「-....연, 소인은 연이라 합니다.」
그때도 연은 초를 그리 아꼈더랬지. 회한에 빠져있던 이원영은 수줍게 웃는 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초도 초이지만, 오늘은 저와 함께 가셔야 겠습니다."
"어딜 말씀이십니까?"
'이런, 내가 없던 시간동안 도대체 연은 어떻게 지냈기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그도 그럴것이, 심지어 연이 산보를 할 때에도 그를 따르는 시비는 한 명도 없었다.
언제라도 검은 속을 한 자들이 해칠지 모르는 궁궐에서 그는 태연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던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원영은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해하는 연의 조그마한 손을 꼭 붙들고 척척 길을 돌아
지금쯤 책봉식이 거행되고 있을 대궐로 향하였다.
"대호군, 어딜 그리 바삐 가는 것입니까?"
"오늘은 세자 저하의 왕위 책봉식이 거행되는 날입니다. 당연히 빈께서도 왕비가 되시는 것이지요."
"아…. 그렇습니까."
"진작 찾아뵙고 전해드렸어야 했거늘... 소인의 불찰입니다."
"아닙니다. 대호군께서는 전장에 나가 계셔서 바쁘셨을터, 미처 궁안의 일을 알아보지 못한 제 탓입니다."
연이 조그맣게 말해왔을 때, 둘은 대궐 문 앞에 다다랐다.
"대문을 열어라."
"예, 대호군."
이원영이 대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 두 명에게 이르자, 이윽고 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대궐 안에서는 몇몇 궁인들이 식에 필요한 음식들을 나르는 중이었다.
다행히 아직 식이 거행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원영은 주위를 둘러본 후 연을 향해 몸을 돌렸다.
"빈께서는 어찌 그러십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호군."
"한 나라의 국모가 되실 분 아니십니까. 아직 세자 저하께서 다른 총비를 들이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그리 스스로 자신을 숨기려 드십니까. 보는 제가 더 서럽습니다."
다시 얼굴을 보게 됐을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원영이 비주족을 정벌하러 떠나기 전 보았던 연의 얼굴은
적어도 혈색이 돌았다. 발그스레한 뺨에 해사한 웃음을 띠는 소년 같은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불과 2년 가까이 되는 시간 안에 어찌 이리도 억장이 무너질 듯한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그런 게 아니 옵니다."
"빈께선 바보입니까? 천치입니까? 궁에 계신 분이 궁궐의 소식조차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된단 말입니까?
부디 자신을 찾으세요. 그렇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살아가지 마시란 겁니다!!"
"- 제가 어찌 그러할까요."
"……."
"사내의 신분으로 궐에 들어온 지도 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저도 제 신분을 압니다, 제 위치를 알아요.
저하의 씨를 품을 수도 없는 사내의 몸으로 세자빈이 되어 궁인들의 눈초리를 받는 게 전 서럽지 않사옵니다.
궁에 들어오기 전엔 이보다 더한 것도 겪었으니까요. 스스로를 찾길 원하십니까?
제가 어찌 그러할까요. 제가 어찌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저를 찾을수 있을까요, 대호군."
이원영이 연을 다그치듯 몰자, 연은 잠시 숨을 가다듬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연은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어린 나이에 선왕의 명으로 열 다섯의 나이에 세자빈이 되어 궁에 입궐한지 어언 2년이었다.
자신도 사내인지라 마을에 연정하는 처자 또한 있었고, 혼인을 해 아내와 아이들을 두어 소박하게 살아가는게 꿈이었다.
허나, 어찌 인생이 이리도 얄궂은지. 어미를 잃고 몇 해가 흐르지 않아 어찌 된 영문인지 궐에서 나온 병사들이 자신을 데려갔고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세자빈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실 연도 오늘이 세자 저하의 왕위 책봉식이 있는 날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언질을 주지 않았어도, 궁에는 듣고 말하는 귀와 입들이 있다. 책봉식이 있음에도 자신에게 별 다른 어명이 내리지 않는 것은, 자신은 이번 식에서 빠져달라는 뜻이란 걸 연은 알았기에, 부러 모른척했으나, 이를 간과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에 대한 연민으로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성정 곧고 자상한 이원영의 배려에 못 이기다시피 끌려와 주었던 것이다. 자신은 절대 왕비가 될 수 없었다, 세자가 자신을 찾지 않는 이상.
연은 세자의 얼굴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처음 입궐하던 날, 저 멀리 행차하는 무리를 보며 어렷품히 세자를 알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자는 한 번도 연을 찾지 않았다. 마치 이 혼례가 절대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그것이 씁쓸한 듯 짧게 웃으려는 찰나에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세자께서 오늘 식을 올리신다 하였으니, 어서 준비토록 하여라."
"예, 마마."
명령을 내린 이는 중전이었다. 세자의 어머니인 중전은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며 선대 왕의 정비 자리에 올랐으나,
왕이 찾는 여인은 매번 따로 있었기에 중전은 자경전에서 매일을 구슬피 울며 지내곤 했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흡족한 얼굴로 뒤에 있는 누구에겐가 말을 건넸다.
"세자가 드디어 이 어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다 중전마마의 지엄한 뜻 덕분이 아니겠사옵니까."
"호호, 어쩜 그대는 언행 하나하나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으뇨. 가히 세자의, 아니 이제 주상 전하가 되실 분의
반려가 될 만 할지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아직 부족한게 많은 소녀를 그리 봐주셔서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중전의 뒤에는 어여쁜 처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녀는 고운 비단 옷을 입은 채 중전의 칭찬에 수줍게 웃었다.
두명의 여인은 기쁜 듯 얼굴이 밝았고 특히 어여쁜 처자는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이었다.
"헌데, 세자가 갑작스레 결정을 내려 그대는 혼란스럽지 않았는가?"
"사실대로 아뢰자면…, 처음엔 당황하였으나 곧 수긍하였나이다."
"어찌?"
"저하께서 제게 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마. 전하를 믿었기에 그 약조, 소녀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처자는 부끄럽다는 듯 볼을 발그레 붉히며 미소지었다. 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설마 아닐 것이다. 엄습해오는 불안함에 초조해하며 입술을 지긋히 물었지만 세자가 연을 찾지 않는다 하더라도,
설혹 다른 여인을 그의 아내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손 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연은 알았다.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빈이 된 것일 뿐. 다만, 오갈 곳 없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질 뿐이었다.
"세자가? 그래, 무슨 약조를 하였기에 그리 간절히 믿었더냐?"
"시일 내에 소녀와 꼭 혼례를 올리시겠다 하였나이다. 그리고……."
연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 했다.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을 애써 추스린 뒤, 식이 거행 되기 전까지 머물 곳을 향해 몸을 돌리려는 찰나에
고운 처자의 결연한 눈동자와 연의 공허한 눈이 마주쳤고 여인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그 곳에선
연이 그토록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흘러나왔다.
"제게 왕비의 자리를 내려주시겠다 하였습니다, 마마."
가수, 곡명: Jia Peng Pang - Deep Blue
출처: BGM Store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연재는 틈날 때마다 하겠습니다.^^
연이불쌍해ㅠㅠㅠ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쥐 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