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 石南寺
나에게 석남사는 매우 친숙한 절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번이나 찾아갔던 절이기 때문이다. 경주 쪽에서 석남사를 찾아가면 멀지 않고, 길도 잘 포장되어서 절에 가기가 쉽기 때문이다.
찾아가는 명분은 거의가 답사였다. 지난 날에 문화와 관련 있는 여러 단체에 가입하고 있었으므로, 이 단체들은 석남사를 반드시 찾아갔다. 그만큼 문화의 면에서 가치 있는 절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대구에서 교통편이 좋다는 것도 이유이리라 생각한다.
뿐만 아니고 석남사를 품고 있는 가지산 일대는 영남 알프스라 하여 조금 거친 산들이긴 해도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나도 교실 동문의 산행모임에 참여하였다. 이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산행을 하면서, 영남 알프스라는 이곳의 산을 올랐다. 그 중의 하나인 가지산을 오를 때는 석남사에서 올랐다. 모두 아득한 옛날 일이다.
내 기억 속의 석남사는 아담하였다. 비구니 스님이 머무는 산사라서인지, 아담하고, 여성다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관광객이 들끓어서 시장 장터처럼 북적이었다는 기억도 생생하다.
이번에 부산의 아들에게 들렸더니 자기 차로 대구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였다. 대구까지? 나는 빠르게 계산해보았다. 길을 조금만 돌아서 가면, 석남사와 밀양의 표충사도 들리겠다고 계산했다. 6월의 해는 느릿느릿 산을 넘어간다고 생각하니 가능하였다. 아들에게 말했더니 그렇게 합시다. 대답이 시원하다. 사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녀오기로는 불편해 보여서 차일피일하고 있었다. 나는 ‘잘 되었다.’ 싶었다.
부산에서 양산을 거쳐 언양에 들어갔다. 길은 낙동강을 타고 뚫여 있다. 강물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강 너머에는 햇빛에 눈이 부시도록 반사하는 아파트들이 강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나는 차 창 밖으로 그 풍광을 바라보느라 마음마저 시원하였다.
어느 사이에 길은 산골짜기로 들어간다. 길 옆의 산자락은 6월의 녹음이 짙다. 온통 푸른 색만 보인다. 나무도, 바위도, 심지어는 산 능선까조 짙은 푸름에 갇혀서 보이지 않는다. 평일이라선지 차들도 많지 않았다. 예전에는 줄을 선 차에 막혀 내가 탄 관광버스는 달리다 서고, 섰다가 달리고 하였는데.
절 입구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도 한산하다. 예전과 비교되어서인지, 한산한 주차장이 이상하게 보인다. 절 뒤의 가지산 봉우리가 가마득하다. 이래서 영남 알프스라고 하나보다. 아들에게, 옛날에 교실 동문 선생님과 석남사에서 출발하여 가지산을 올랐던 이야기를 했다. ‘몇 세 때 였어요?’ 아들이 묻는다. ‘40대 였었나.’ 아들이 ‘젊었을 때 였네요.’ 한다. 아하, 지금은 늙었다는 말이구나. 그렇지 지금은 ------.
아들은 자꾸 ‘엄마와 함께 사진을 찍어요.’며 우리 부부에게 안달이다. 그래서 절을 배경으로 부부 사진을 여러 장이나 찍었다.
평일이라선지 절을 찾는 사람은 간간이 보인다. 절로 오르는 길의 바닥은 포장이 잘 되어 있어서 걷기가 편안하다 골짜기로 흐르는 물소리도 맑다. 절로 건너가는 홍교도 화강암으로 깔끔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절의 경관이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다. 법당도 더 지어진 듯하고, 요사체도 더 많이 들어 서 있다. 기와지붕의 추녀가 이어지고, 이어져 있어 마치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처마를 맞대고 줄을 지어 있는 유명한 양반가 동네 같다. 대웅전, 극락전,조사전, 그리고 스님이 수행한다는 수행처, 기와 지붕의 높은 집들이 행렬을 이룬다. 아무리 절집이지만 집은 사람의 손떼가 묻기 마련이라, 자연과는 거리가 있다.
이런 절에 들리면 집사람과 내가 곧잘 하는 말이 있다. ‘부자 절이네.’ 석남사에서도 같은 말을 해야겠다. ‘부자 절이네.’
아내는 나에게서 시주 돈을 받아들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다음 달이면 아들 내외가 가족을 데리고 미국에 연수를 떠난다니. 무사히 다녀오기를 빌기로 했다.
석남사는 가지산 자락에 자리 잡았고, 대한 불교 조계종 15본사 통도사의 말사이다. 824년(신라 헌덕왕 16년)에 도의국사가 창건했다. 그렇다면 선종 사찰로 출발했다는 거다. 그래서 조사전이 있나 보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절은 허물어졌으나 1674년(조선 헌종13년)에 언양 헌감이 시주하여 허물어진 절을 세웠다고 한다. 현감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기에 희사하였을까. 또 못된 생각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린다. 언양의 백성들을 얼마나 닦달하였을까.
어쨌거나 그후에 절은 폐사가 되었다.
1957년에 석남사 중흥에 크게 이바지 하신 스님이 오셨다. 비구니 승 인흥 스님이다. 1959년에 복원하였다. 이때 석남사는 비구니의 도장으로 거듭 태어났다. 여담으로, 성철 스님의 부인(인휴스님)과 따님(불필스님)이 이 절에 와서 인흥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이전에 여러 번이나 석남사를 찾았다. 대웅전 앞에는 불국사 석가탑을 닮은 큰 탑을 화강석으로 지어 모셨다. 나는 석남사 답사를 왔을 때마다 대웅전 앞의 탑은 밀쳐두고, 요사체를 돌아 뒤로 간다. 그곳에는 크기가 훨씬 작은 삼층 석탑이 모셔져 있다. 신라 3층 석탑으로, 9세기 중반에 조성된 탑이다. 이 탑의 존재가 석남사가 신라 말에 세워진 옛 절임을 증명해준다.
이 탑도 무너져서 탑의 부재만 절의 경내에 흩어져 있었다. 인흥스님이 오셔서 1973년에 스리랑카 스님이 갖고 오신 사리 1과를 봉안하여 보수하여 세웠다. 석남사가 절이라는 면에서 뛰어난 절은 아니더라도, 이 탑과, 절의 뒤편에 있는 신라 말의 부도(승탑) 때문에 고찰의 반열에 올라 우리가 자주 찾아왔다.
오늘은 차를 운전하여 우리를 대구로 데려다 주는 아들 덕택에 석남사를 방문하는 횡재를 한 기분이다. 나는 절에 들리면 절의 내력이나. 특히 불교미술에 관하여 열심히 설명한다; 두 아들 모두 내 설명에는 시큰둥하다. 그렇더라도 학교 선생님처럼 주의를 줄 수도 없는 일이다. 불교미술은 내가 즐기는 관심사이지 아들에게는 무의미하다. 아이들에게는 자기의 삶이 있고, 자기네의 취향이 있을 것이다.
절을 내려 왔다. 주차장 앞으로 난 길은 가지산을 넘어 밀양으로 가는 길이다. 답사를 다니고, 산행을 다닐 때는 으레 이 길로 다녔다. 표충사를 들린 후에 대구의 우리집으로 가려면 이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각인되어 있다. 아들더러 이 고개길을 넘어야 한다니까. 고개를 갸우뚱한다. 네비가 가르키는 길은 표충사까지는 30분인데, 아버지가 말하는 길은 52분이네요 한다. 솔직히 자신감이 옅어지는데도, 각인된 기억이 고집을 부린다. 고갯길을 넘자고 ----.
어쨌거나 고갯길을 넘기로 했다. 길은 구불구불했고, 곳곳에서 길가의 양쪽 나무가 터널도 만들었다. 계곡을 끼고 있는 산자락에는 울긋불긋한 지붕이 나무 숲에 싸여 보이는 둥 마는 둥 한다. 그림같은 집들이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구나. 하니 아들이 ’주택이 아니고 팬션입니다.; 한다.
집에 와서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니 울주군과 밀양시를 연결하는 터널이 뚫여 있고, 이 터널이 절의 이름을 따서 석남터널이라고 했다. 네비가 빠른 길을 옳게 가르켜주었는데, 우리는 험한 길로 고개를 넘었다. 그래도 터널에서는 이 좋은 풍광을 즐길 수가 없었을테니, 고개를 넘는 길은 잘 선택한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고개를 넘어가니 큰 인공호수가 나오고, 표충사로 가는 길이 나왔다.
첫댓글 부부가 함께 사찰순례 가시는 것 엄청 부럽습니다. 저도 따라쟁이 하고싶어 남편과 오랜만에 도리사에 갔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