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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 19:11-20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 19:11-20 / [스게와의 아들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셨다. 12) 그래서 그의 손수건이나 옷가지만 병자에게 갖다 대도 병이 낫고 어떠한 귀신이라도 떠나갔다. 13) 그때에 악마를 쫓아내는 일을 하며 돌아다니던 유대인 마술쟁이 일행이 있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서 귀신을 쫓아내 보자는 계획을 세우고는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령한다. 나가거라' 하는 주문을 정하였다. 14) 이런 짓을 한 사람들은 유대의 제사장인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었다. 15) 그런데 그들이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에게 실험을 하자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는 도대체 누구냐?" 하고 귀신이 오히려 반발하였다. 16) 그뿐 아니라 귀신 들린 사람이 그들 가운데 두 사람에게 덤벼들어 난폭하게 구는 바람에 그들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간신히 도망쳐 나왔다. 17) 이 소문은 순식간에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과 헬라 사람에게 퍼져 온 시내는 두려움 속에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였다. 18-19) 그리고 마술을 써오던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행한 일들을 고백하며 주문 외는 책이나 부적들을 가지고 나와서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 그 책값을 계산해 보았더니 은화 5만개에 해당하였다. 20) 이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얼마나 큰일이 온 지방에 일어났는 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에 놀라운 능력을 더해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의 능력을 흉내내보기도 하지만 외려 험한 꼴을 당하고 맙니다. 이 일은 에베소에 두려움과 주님을 높이는 경외함, 그리고 자복하는 회개의 역사를 불러옵니다.
바울의 능력과 흉내 내는 자들(11-16)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사역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에 능력을 더해주셨습니다. 심지어 바울이 직접 가지 않아도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 병자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며, 귀신도 물러갔습니다. 말씀 위에 능력을 더하셔서 말씀이 힘이 있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곳은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하여 능력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질병의 치유나 악귀의 내어 쫓김의 목적은 복음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며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능력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능력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순례 마술사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에게 명해보았지만,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흉내 내 보았지만 오히려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 올라 상하게 하므로 벗은 몸으로 도망할 뿐입니다. 우리는 자주 믿음을 흉내 내려 합니다. 신앙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힘 있는 말씀으로 인한 일들(17-20) 바울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은 에베소를 변화시켰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자들이 자신들의 책을 공개적으로 불태울 만큼 구체적인 변화의 증거들이 나타났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이 일을 알고는 두려워했으며, 주님을 높여드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며 통회하였고, 마술사들은 은 오만이나 되는 값의 책을 불살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힘이 있고 흥왕하여 세력을 얻은 결과입니다. 복음은 삶 속에서 영적 대청소를 불러일으킵니다. 또한 죄와 단절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적용: 에베소에 성령의 능력으로 거짓된 풍속을 벗어 버리는 역사가 일어났듯이, 오늘 당신이 공개적으로 태워야 할 죄 된 풍속이나 습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신앙은 내가 주인으로 사느냐? 내 속에 주님을 주인으로 인식하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 나쁜 습관이 사라지고 끊지 못하던 것들이 끊어지게 됩니다. 습관의 죄가 끊어지면 변화되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기도로 산다는 것은 성령을 인식하고 계속 주님과 교제하며 삶 속에서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19:11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시기 시작하셨는데 그 기적들은 제자들에게조차도 익숙지 않은 특별한 것들이었다. 홀츠만(Holtzmann)은 바울의 이러한 기적들이 베드로가 그의 그림자를 통해서 일으킨 기적들과(5:15, 16) 유사하기 때문에 역사적 신뢰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베드로의 기적이나 바울의 기적이 그들 스스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기적뿐만 아니라 더 큰 기적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 미신과 주술이 범람(氾濫)하는 도시에서 바울의 선교 사역은 이러한 특별한 기적 행사가 필요했을 것이다(Whitelaw).
=====19:12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 학자들 간에는 이러한 일들이 정말로 일어났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또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본절에 언급된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바울은 마술과 미신의 본거지에서 사역했으며 무당들 가운데서 말씀을 전파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손수건이나 앞치마 자체에 어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인 믿음을 통해서 기적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 기적을 일으키는데 사용된 '수건'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땀을 닦기 위해 머리에 두루고 있던 헝겊 조각이며 '앞치마'는 장막 짓는 작업을 위해 허리에 둘렀던 것이다(F.F. Bruce).
=====19:13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예수를 빙자하여 - 고대 세계에서 악령을 내쫓기 위해주문을 외울 때 주술적(呪術的)인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경향이었고, 특히 이러한 관습은 에베소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었다. 그런데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 또는 성도들 외에 비기독교인들도 귀신 축출을 위해 예수 이름을 마술적으로 사용했다(14-16절 ; 막 9:38, 39). 그리고 실제로 파리의 마술 문서인 574번 파피루스 3018행에서는 무당들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 실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내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엄히 명하노니." 본문에서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을 목격한 유대인 주술사들도 바울의 행동을 모방해 예수의 이름을 그들의 주술에 이용하려고 했다.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라고 굳이 바울의 이름까지 언급한 것은 바울이 행하는 능력이 압도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주술사들이 악령을 쫓아내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마술적 주문과 정확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Haenchen, Longenecker). =====19:14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행하더니 - 헬라어 본문에는 스게와가 대제사장이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KJV, RSV, NASB, MB, NIV). 대제사장이 이방인의 땅에 살고 있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이들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업 수단으로 고객 유치를 위해 자신들이 대제사장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을 빙자하였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이들이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이라면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져 이방 도시에서 귀신 쫓는 일이나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몰락한 가정형편을 보여 주는 것이고 아울러 에베소의 유대교는 그곳의 미신과 혼합, 변질되어 그곳 사람들로부터 형편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 학설은 몇몇 학자들이 지지하지만(Mastin, Marshall) 별로 타당성이 없다. 만약 이들이 대제사장의 가문을 빙자하고 있다면 그들은 대제사장의 권위와 명성을 빌어 자신들의 야심을 채우고자 하는 간교한 술책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문헌에는 스게와라는 대제사장의 이름은 나타나 있지 않다. 누가는 그 사실에 대해서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아마도 여기서 그들이 충분히 대제사장의 가문을 빙자할 수 있는 인물들임을 암시하려고 했는 듯하다. 이전 맥락에서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 앞에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는다고까지 증언했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이런 교활한 행동은 마치 사마리아인 시몬의 태도와도 유사하다(8:9-24). 이들은 자신들의 사악한 행동들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자신들이 지금까지 행하던 사악한 일들을 계속해서 하고자 했던 것이다.
=====19:15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 유대의 주술사들은 영적인 세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귀신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믿음과 능력들을 먼저 파악한다. 그들 자신들이 하는 일을 멸하러 오신 예수를 이미 이전부터 알고 있었으며(막 1:24, 34;5:7;눅 4:41;히 2:14;요일 3:8) 나아가 바울이 그 예수의 사도이며 믿음과 능력의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귀신들이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너희는 누구냐'라고 한 것은 곧 이 귀신들이 스게와의 아들들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함을 먼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도 전혀 없이 또 사악한 동기에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려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사단의 세력이 징벌(懲罰)의 도구가 될 것이다.
=====19:16
악귀 들린 사람이...도망하는 지라 - 사기성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과 또한 귀신들을 동시에 시험해 보려고 한 사악한 유대인 주술사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력 앞에서 봉변을 당하고 쫓겨가야만 했다. 그들이 마귀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감으로써 이들의 신의와 위엄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며 반면에 바울의 권위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다. 한편 개역 성경에서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을 '그 두 사람에게'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암포테론'( )으로 '양쪽'(both)이라는 의미 외에 '모두'(all)를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파피루스에서는 이 단어를 둘이상의 경우에 많이 사용했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암포테론'은 스게와의 '일곱 아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Haenchen, Lenski, Robertson, Longenecker, G.A. Buttrick).
=====19:17
유대인과 헬라인들이...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 미신과 주술이 난무하는 에베소의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일곱 주술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엄청난 파문을 던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그 주술사들처럼 미신과 주술이라는 악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귀신의 봉변이 자신들에게 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곤경을 치르게 될까 염려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바울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귀신이 쫓겨나고 주술사들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주술사들이 오히려 귀신에게 쫓기는 그 원인을 몰랐다. 단지 그들은 예수의 이름이 모든 귀신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이름을 높이게 되었을 것이다.
=====19:18
믿은 사람들이...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 이 일은 에베소 주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보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예수의 이름이 지닌 신비한 능력 앞에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은밀하게 범하던 잘못들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에베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생활 습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은밀한 가운데 미신과 주술을 쫓거나 그 같은 일들을 직접 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의 능력을 확실히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자 자신들의 은밀한 범죄를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기독교가 비기독교 지역에 전파되면 문화적 혼합(混合) 현상이 나타나 자칫 잘못된 악습으로 인해 교회가 부패될 위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19:19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 '마술'을 뜻하는 헬라어 '페리에르가'(* ) 는 문자적으로 '주변 일' 이라는 의미로서 주된 일을 제외한 '쓸데없는 일'을 가리키거나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누가가 '마술'을 '쓸데없는 일'로 표현한 것은 공허한 것을 섬기는 우상 숭배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에베소에 많았다고 하는 것은 그 도시 자체가 영적인 기갈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며 또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에베소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 책을...불사르니 -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행동을 회개하고,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공개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마술에 관계된 모든 서적들을 불살랐다. 이 책들은 주문이나 부적 등 미신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파피루스나 양피지(parchment)에 기록된 것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책들은 '에베소의 책들'(Ephesia Grammata)로 추정된다(Zahn). 한편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을 불태우는 것은 그 내용을 공식적으로 배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렘 36:23). 따라서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공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과거 자신들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은 오만 - 에베소에는 대부분 헬라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은 오만'에 대한 화폐 단위는 아마도 '드라크마'(Drachma)이었거나 아니면 로마의 화폐 단위인 '데나리온'(Denarius)이었을 것이다. 이 두 화폐의 가치는 거의 같은 것으로서 당시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이를 오늘날 액수로 환산(換算)한다면 약 800만원 정도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 본다 하더라도 당시 에베소에 미신이나 마술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19:20
주의 말씀이...세력을 얻으니라 - 헬라어 본문에서 본 구절의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주의 말씀이 에베소에서 지속적으로 흥왕하여 모든 거짓되고 미신적인 마술들을 물리치며 많은 사람을 회개시켰음을 나타낸다.
< 설 교 >
너희는 누구냐
행 19:11-16 / 주승중 목사
1. 들어가는 말
성도 여러분, 만약 이 시간 누군가가 우리에게 “너는 누구냐?”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너희는 누구냐?” 이 질문은 자기 정체성(identity)과 관련된 질문이지요. 그런데 사실 이런 질문에 선뜻 쉽게 대답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주 쉬운 질문인데도, 막상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동안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사오정과 손오공이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시험을 치르러 어느 회사에 갔습니다. 손오공이 먼저 면접장에 들어갔습니다. “15번 손오공입니다.” 면접관이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자네 축구 선수 중에 누구를 제일 좋아 하는가?” “예,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지성입니다” “산업혁명은 언제 시작됐나?” “예, 18세기입니다” “자네, 하나님은 있다고 믿는가?”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면접을 잘 마치고 나간 손오공이 밖에서 면접순서를 기다리면서 벌 벌 떨고 있는 사오정을 보고는, 불쌍해서 첫 번째 질문부터 순서대로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오정은 열심히 질문과 답을 순서대로 외우면서 자기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자기 이름이 호명이 되자 사오정은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오정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27번입니다”라고 번호만 말했습니다. 사오정이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자, 면접위원이 묻습니다.
“자네 이름이 뭔가?” “예, 옛날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지금은 박지성입니다”
“뭐? 자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나?” “예, 18세기부터 입니다”
“자네 혹시 바보 아닌가?” “예, 과학적으로 증명은 안 되었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만든 우스개 소리이지만, 사오정의 모습은 어쩌면 자신이 누군가를 모르고 살아가는 오늘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의외로 나 자신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질문을 했지만, 우리는 사실 내가 누구인지를, 나의 정체성을 잘 모르면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여기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도 “너희는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 그 대답을 못한 체 당황해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2. 몸말
1) 본문의 배경
그들은 바로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9장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또한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 사역을 소개하고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성령의 충만함에 힘입어 세 가지 중요한 사역을 했습니다. 제일 먼저 바울은 주의 제자들과 함께 회당에 들어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씀 사역, 이것이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바울에게는 여러 가지 놀라운 은사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치유의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의 치유능력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오늘 본문은 기록하기를 “희한한(놀라운) 능력”(11절)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12절에서는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갔다”(11-12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은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치유사역, 이것이 에베소에서 행한 바울의 두 번째 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세 번째 중요한 사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축사(귀)사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가 다시 읽어보면,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능력이 얼마나 희귀한지, 바울의 손수건이나, 그가 텐트를 만들 때 입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들에게 얹으면 병이 나을 뿐만 아니라, 악한 귀신들도 떠나갔다고 했습니다(12절).
그런데 그 당시 에베소를 중심한 소아시아 지역에는 우상을 숭배하는 신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많은 우상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자연히 에베소에는 마술을 하는 사람들, 주문을 외우는 주술가들, 그리고 소위 귀신을 쫓아내는 무당들(Exorcist)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모든 종류의 악한 세력들과 능력대결(power encounter)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악한 세력들이 활동을 하던 에베소는 그 중에서도 마술과 마법이 아주 강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는 악한 영들이 있었고, 따라서 귀신들의 활동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신들의 힘을 빌려 마술을 하던 마술사들 가운데 바울의 사역을 눈여겨 본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니까 바울의 능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바울이 병도 낫게 하고, 귀신도 쫓아내는데, 바울의 하는 이런 일들이 그들이 보기에도 아주 희한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도대체 바울이 어떤 주문을 외우길래 저렇게 병도 금방 낫고, 악귀들도 쫓겨나는가?” 하는 궁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하기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고 외치는 바울의 주문에, 악귀들이 도망간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어떤 유대인 마술사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그 마술사들은 귀신들린 자들에게 바울의 흉내를 내면서 시험을 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스게와 라는 유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이들도 다른 마술사들의 흉내를 내면서 귀신에게 나갈 것을 명하였는데(14절), 이게 웬일입니까? 귀신이 나가기는 커녕 오히려 이렇게 대꾸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15절)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분명히 바울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흉내를 내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했는데, 악귀가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귀가 그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도 스게와의 아들들은 당황한 나머지 별의별 소리를 다 질렀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서 골고다에서 죽으신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고 해보기도 하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라”를 외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귀는 도무지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달려들어 공격을 해 왔습니다. 마침내 스게와의 아들들은 악귀들에게 정신없이 얻어맞고는 입고 있던 겉옷마저 찢기고 빼앗긴 체,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2) 왜 이런 수모를 당하였나?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스게와의 아들들은 왜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비록 제사장의 아들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제사장의 아들들로서 경건의 모양은 있었는지 모르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볼 때 바울의 놀라운 능력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습니까?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갖다 대어도 병이 낫고, 악귀들이 도망가는 이런 놀라운 능력의 근원은 어디서 온 것이었습니까? 그것은 바울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11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능력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희한한 능력은 바울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지, 마술과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신앙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이며, 바로 그 관계에서 놀라운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게와의 아들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이것을 착각했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같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주님과의 관계속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과의 관계는 아랑곳없이 그저 예수님의 이름만을 주술적으로 외우면 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악귀들에게 그런 수모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악귀들이 “너희는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적어도 그들은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예수님과 그리고 바울과의 관계만은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나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바울은 그 예수님의 제자요, 우리의 동역자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도, 바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르고 있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능력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단지 주술적으로 예수님과 바울의 이름을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에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악귀 들린 자에게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명하노라”는 단어는 “호르키조”라는 말인데, “부탁한다” “애원한다”(막 5:7절 참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가 성경원문에는 명령형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단순 현재 직설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애원한다. 내가 부탁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악한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단호한 명령(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 이 아니라, “얘,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부탁하는데, 좀 나가줄래?”라는 일종의 타협이요, 부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단지 예수의 이름으로 이교적인 축귀 관습을 따라 주술을 외우듯 인용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묻는 악귀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악귀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바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자들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인류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해서 믿지를 못하고 의심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 오히려 귀신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그 어떤 의심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분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여러 곳에서, 오히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눅 4장 31-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 한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는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4:34)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 분이 누구인 줄 알았습니다.
또한 막 5장 1-20절에도 보면, 군대 귀신이 들어 고생을 하던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도 귀신은 예수님을 보고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라고 애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귀신들은 하나 같이 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믿고 떨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약 2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악귀가,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은 모두 ‘안다’고 번역을 했지만, 여기서 악귀가 예수님을 안다고 한 단어는 ‘기노스코’인데, 이는 ‘본질을 속속들이 알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안다’고 할 때의 단어는 ‘에피스타마이’인데, 이는 ‘안면이 있다’는 뜻으로, 바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몇 번 보아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신들과 악한 영들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그 어떤 의심도 가지지 않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의심하고, 믿지를 않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의 스게와의 아들들은 “내가 예수도 확실히 알고, 바울도 안면이 있어 아는데,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라고 도전하는 악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술처럼 인용하고 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귀신들조차도 알고 있고, 귀신들조차도 믿고 떠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의 아들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3) 나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혹시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 스게와의 아들들과도 같은 모습은 아닙니까? 겉으로는 제사장의 아들들이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 같고, 예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혹시 우리의 속사람은 오히려 주님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사탄으로부터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라는 이런 공격적인 질문을 받는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저 2천년 전, 십자가의 길, 예루살렘의 길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가르쳐주신 우리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경건치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지옥의 땔감으로 밖에 쓸 수 없는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살리시려고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그 귀한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영접하는 자, 곧 그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죄와 죽음에서, 멸망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삼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온갖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당하셨고,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기 위하여 대신 징계를 받으셨고, 우리의 연약함과 상함을 고치시기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언젠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이사야 49:14-16)
사랑을 말할 때 흔히 가장 깊은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으로 비유합니다. 여기 이런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 1995년 성탄절이 가까운 때에 舊소련 연방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커다란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그 엄청난 지진 때문에 무려 55,000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때에 한 어머니와 딸이 무너진 건물더미에 함께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 어머니의 이름은 수산나였고, 딸의 이름은 구이안(Guian)이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공간에 갇혀 있는 모녀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구조의 손길이 임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린 딸은 무서워서 자꾸 울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무서워” “엄마, 우리 여기서 못나가는 거야?”
“아니야, 걱정하지 마라. 조금만 기다리면 아저씨들이 우리를 금방 찾으러 올 거야”
무서워 떨고 있는 딸을 향하여 엄마는 계속해서 우리는 괜찮을 것이라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어두운 공간은 그야말로 칠흙같이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구조의 손길은 닿지 않았고, 그렇게 사흘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는 공포와 허기에 지쳐 점점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이 마른 아이는 엄마에게 계속해서 먹을 것과 물을 달라고 울면서 보채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아이도 엄마도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그 생명의 불꽃이 가물가물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어머니의 손에 무엇인가 예리한 것이 잡혔습니다. 그것은 건물이 무너질 때 쏟아진 유리조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엄마는 그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팔뚝을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자신의 피를 마시게 했습니다. “구이안아, 여기 물이 있다. 이 물을 마셔라”라고 그 어머니는, 자신의 몸에서 흐르는 물과 피를 아이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물가물 의식이 흐려져 가던 아이는, 어둠 속에서 엄마의 몸에서 흐르는 물과 피를 받아 마시고는 비로소 갈한 목을 축이고,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 마침내 구조대가 이 두 모녀가 갇혀 있는 곳을 지나다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건물 더미들을 치웠습니다. 구조대가 건물 더미들을 다 치우자, 거기에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을 한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옆에는 모든 물과 피를 다 흘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는 엄마가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의하면, 세상에 자식에 대한 가장 진한 사랑이 어머니의 사랑인데, 그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부모들도 때로는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자식들을 버릴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십자가에 물과 피를 아낌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그가 대신 달리셨습니다. 내가 찔려야 할 창에 그가 대신 찔리셨습니다. 내가 맞아야 채찍을 그가 대신 맞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멸시와 천대를 그가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흘려야 할 물과 피를 그가 대신 흘리셨습니다. 아낌없이, 최후의 한 방울까지 다 흘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도 사랑하시고 계십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대답을 잘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제가 4년 전(2005년) 고난주간이 가까운 때에 갑자기 심한 복부의 통증으로 밤에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습니다. 병명은 급성 담낭증이었습니다. 3일 동안 너무 통증이 심해서 병원을 두 곳이나 갔는데, 그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담낭의 염증은 더욱 심해져 갔고, 세 번째 병원인 현대 아산 병원에 갔을 때에는, 담낭이 염증과 담석으로 인해 부어서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응급실에서 옆구리를 뚫어서 긴급조취를 하였고, 결국 수술을 통해서 담낭(쓸개)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쓸개 빠진 인간’이다.) 그러나 저는 쓸개를 떼어내는 작은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수술 후에 한 이틀은 통증이 심해서 매우 고통스러웠는데, 토요일 밤에 통증으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루다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도 중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높은 산에 세워놓고는 제게 휘황찬란한 우주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더 이상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수많은 별들과 함께 형형색색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는 우주를 보여주시다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우주가 참으로 놀랍고 신비스럽지? 그런데 내가 너를 이 온 우주보다도 더 사랑한단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나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단다.” 저는 꿈속에서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제게 온 삼라만상의 아름다운 것들, 꽃들과 푸른 들과 물과 산 등의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또 말씀하시기를 “아들아, 삼라만상이 너무 아름답지. 그런데 내가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보다 너를 더 사랑한단다. 그래서 내가 내 아들 예수를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했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어나 밤새도록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이토록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견디지를 못해 하십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두고 스바냐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한 것이 아닙니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이것이 나와 주님과의 관계라는 사실을 언제 어디서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나가는 말
그러므로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오늘 이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고 감사하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나와 하나님의 관계, 나와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탄이든 누구든 “너는 누구냐?”고 우리에게 물을 때,
“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주님은 지금도 나를 이 세상에서 나만을 사랑하듯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나도 주님을 그렇게 사랑한다”라고 우리가 담대히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어떤 대답은 사오정처럼 잘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함이 없는 그분의 사랑을 먼저 받은 우리가, 아직도 이 사랑을 깨닫지 못하여, 신음하며, 죄와 사망 가운데서 방황하고 헤매고 있는 자들을 향해 나아가,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품고 있는 태신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하십니다”라고 담대하게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말씀이 힘이 있습니다
서금석 목사 / 행 19장 11~20절
가끔 생선 '도루묵'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조선 선조 임금이 국난으로 궁궐을 떠나 피신해 있었습니다. 식량이 귀하던 차에 마침 한 백성이 '묵'이라는 물고기를 임금께 바쳤습니다. 임금이 그 물고기를 먹어보니 그 맛이 천하일품이었습니다. 맛이 하도 기가 막혀, 맛에 탄복한 임금은 물고기 이름을 '은어'라 부르도록 명했습니다. 물고기의 맛과 '묵'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은어'라는 아주 멋진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얼마 후, 난리가 끝나 임금은 궁으로 돌아왔고,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임금은 피난 길에 먹었던 은어의 맛을 잊을 수가 없어서 그 요리를 해오도록 명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산해진미로 입맛이 길들여진 임금에게 그 물고기가 맛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토록 맛있었던 은어의 맛이 영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도루 '묵'이라고 불러라"하고 명했습니다. 여기서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사실 물고기 '은어'의 맛이야 배고플 때 먹거나 배부를 때 먹거나 똑같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입맛이 바뀌었다는 것 아닙니까? 상황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의 마음은 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맛이야 상황 따라 변할 수가 있다 해도 믿음은 어떤 경우라도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배고플 때나 배부를 때나, 기분 좋은 때나 기분이 나쁠 때나, 옛 교회에서나 새 교회에서나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믿음은 성장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합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석달동안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전하긴 했는데 몇몇 사람이 마음이 완고하여 믿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독교를 비난 하자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서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2년이나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들었고 바울의 손을 통하여 이상한 기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 바울의 희한한 능(11-12)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하셨는데, 그 기적들은 제자들에게도 익숙치 않은 특별한 것들이었습니다. '희한(稀罕)한 능'이란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우연히 발생한 것들이 아닌 능력들' '평범한 것들이 아닌 것'들을 뜻합니다. 글자 그대로 바울의 손을 통해 나타난 희한한 능은 희귀하고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일들을 일어나게 했는데, 이런 일은 바울에게 있어서도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12절에는 더 구체적인 기적의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이 쓰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얹으면 악귀도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기적은 이미 우리가 보았던 사도행전 5:15-16절에 나타난 베드로의 기적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침대에 병들어 누워있던 병자들, 귀신들려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베드로가 지나가는 그림자만 닿아도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바울의 기적은 두 가지 면에서의 기적을 보여 줍니다. 육신의 질병이 낫고, 귀신이 나가는, 육적인 능력과 영정인 능력입니다. 육적인 병과 영적인 병을 고치는 능력이 동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기적에 쓰여진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는 무엇입니까? 손수건까지는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남자가 웬 앞치마입니까? 원어를 보면 손수건이란 '땀'이란 뜻의 라틴어에 해당하는 헬라어입니다. 흔히 땀 닦는 수건입니다. 앞치마는 천이나 가죽으로 된 것으로 종이나 직공들이 일할 때 두르는 것으로 두 가지는 모두 바울이 장막을 만들 때 사용하던 물건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능력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기적의 사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쳐다보기만 해도 능력이 접촉됨을 느끼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사람도 있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까지도 놀라운 영적인 능력입니다.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병도 고치고 안수해서 성령의 역사가 임한 것도 여러 번 있었지만, 바울이 사용하던 손수건과 앞치마를 병든 사람에게 얹어 병이 낫고, 귀신들린 사람에게 얹어 귀신이 나가는 이런 류의 특별한 기적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습니다. 왜 여기서만 이런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지금 바울의 기적이 나타난 곳이 어디인가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에베소. 에베소가 어떤 도시였다고 했습니까? 미신이 극성스럽게 퍼져 있는 도시였다고 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최대의 영예로 생각했던 것이 아데미 신전이었다고 했어요. 무슨 뜻입니까? 우상숭배가 심했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에베소가 유명한 것이 있다 했지요? "에베소 부적" 부적과 주술이 성행한 곳이 바로 에베소였습니다. 미신과 주술이 범람하는 도시에서 바로 이런 기적의 사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기적을 주셨지 모든 곳에서 같은 기적의 역사를 주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흔히 우리가 빠지기 쉬운 오류가 있습니다. 바울이 사용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닿기만 하면 병도 낫고, 귀신도 쫓겨 갔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생각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인 믿음을 통하여 기적은 일어납니다. 분명하고도 중요한 것은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가 아닙니다. 바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능력의 하나님께서 잠시 바울의 손을 빌어 희한한 능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쓰셨어요. 바울의 손을 쓰셨어요. 성도 여러분 그렇게 믿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해야 합니다.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기적은 다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 바울의 손을 빌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도 병든 자 위해 기도하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기적입니다. 전도할 때 기적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병이 낫고 전도할 때마다 기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만 믿으면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순교자가 나고 왜 성도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미신과 주술이 심한 에베소에서 전도하는 바울에게 기적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바울을 쓰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며 소원해야 할 것은 나도, 우리도, 하나님의 필요한 때에,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기적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영광의 도구로 써 주시옵소서" 쓰임 받으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능력은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13-16)
바울을 통해 병이 낫고 귀신이 쫓겨 나가자 바울을 흉내 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마술하는 사람이 시험적으로 귀신들린 사람들에게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무슨 주문 외듯 귀신을 쫓아내려 했습니다. 제사장 스게와의 아들들도 똑같은 흉내를 냈는데 드디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귀신이 대답합니다.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고는 오히려 덤벼들어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유대인 가운데 마술사들이 있었어요.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도 마술을 했어요. 생각해 보면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이 마술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 아닙니까? 구약을 믿는다면 적어도 유일신 하나님은 믿을 터인데 마술로 밥먹고 산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남의 말해 뭣하겠어요. 믿는다 하면서, 재미로 한다는 토를 달고는, 토정비결보고, 점치는데 기웃거리지는 않습니까? 고대 세게에서는 악령을 쫓기 위햇 주문을 외울 때 주술적(呪術的)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보편적인 경향이었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우상숭배와 미신이 극성이었으니 얼마나 심했겠어요?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본 마술사들이 바울의 행동을 모방하여 예수의 이름을 주술로 사용하려 했습니다. 거기다가 더 확실하게 바울 이름까지 들먹입니다. 한 마디로 마술사들은 바울이 하는 것보고 바울 흉내냈어요. 바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지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바울의 말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하는 선언을 자기들이 무슨 주문 외는 것처럼 주술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은 흉내낸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예수를 빙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하니가 귀신이 나가는 것 보고 마술사들도 '옳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하니까 나가는구나'생각하고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에게 나가라 했는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갔습니까?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마술사 노릇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마술사라니요. 제사장 스게와가 실제 인물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그런 것은 덮어두고, 스게와의 아들들이 다른 마술사들처럼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귀신들린 사람 속에서 귀신이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는 누구냐?'하고 덤벼들어 오히려 두드려 패게 합니다. 결국 그들은 옷 벗은 채로 도망 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진짜와 가짜입니다. 귀신이 진짜와 가짜를 더 잘았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예수 이름을 대고 있지만 귀신이 보기에는 진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으려고 마술하던 유대인들은 다 가짜였습니다. 진짜가 나타나면 가짜는 사라지게 마련 아닙니까?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했습니다. 바울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 것은 그들의 절대적인 믿음이었지 흉내가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모방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짜 꽃은 모양은 진짜 꽃과 같게 할 수가 있지만 자연적인 향기까지 같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짜 꽃이 진짜 꽃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가짜에게는 열매가 없습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비슷하고 헌금드리고 봉사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차이가 납니다. 가짜는 귀신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귀신에게 조롱을 받았습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능력이란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지 결코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의 성경을 묵상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진짜일까? 예수도 믿고,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긴 하는데, '예수 이름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면 귀신이 나갈까?' 예수 이름의 능력이 여러분께 있습니까? 예수 이름의 능력이 이 교회에 있습니까? 흉내 낼 수 없는 기적, 모방할 수 없는 능력은 예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어떠한 능력도 행해질 수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사도행전 속에서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 복음의 능력임을 깨닫고, 복음의 능력이 우리 속에 회복되어지기 바랍니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 믿음의 성도가 되도록 더 힘써 믿음생활하시기 바랍니다.
3. 기적의 결과(17-20)
섣부르게 흉내 내다가 센 귀신에게 걸려 옷도 홀랑 벗긴 채 도망갔다는 소문이 에베소에 쫙 퍼졌습니다.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기본 자세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공경과 두려움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에 대한 공경과 두려움이 없으면 버릇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들어설 때, 예배실에 들어설 때 여러분 마음은 어떻습니까?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으로 두려움, 경외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에서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17절 후반에 보니까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 예수만이 참 구세주이시고, 주 예수만이 참 능력의 주님이심을 분명하게 알았다는 말씀입니다. 능력 앞에 거짓이 여지 없이 드러났습니다. 마술사들의 거짓과 위선이 다 드러났습니다. 주님만이, 하나님만이 참 능력자임이 드러났기에 오직 주 예수의 이름만 높였습니다.
그 다음 18절을 보니까 '믿는 사람이 많이 와서 자복하고 행한 일을 고했다'고 했습니다. '자복하다'는 뜻의 헬라어 '엑소몰로게오'는 공식적으로 항복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모든 흉금을 다 털어 놓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이제까지 믿는다고 하면서 시원찮게 잘못 믿은 사람들이 모두 다 회개했다는 말입니다. '이제까지 잘못 살았다. 이제까지 죄된 삶을 살았다. 구체적으로 이런 죄를 지었다' 고백하면서 새 삶을 다짐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삶의 위기 앞에 설 때에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법학을 전공하여 법률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어느 날 루터는 다정한 친구와 길을 걸으며 서로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내리친 벼락에 잠시 전까지 자기 장래의 푸른 꿈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목숨을 잃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루터는 미래가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피부로 깨닫고 "오! 하나님 나를 구원하소서. 나는 수도사가 되겠나이다!"하고 그 길로 어거스틴 파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능력 앞에서 잘못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며 회개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이 일으키는 기적을 보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목격하게 되니 두려움과 함께 저절로 자신들에 죄에 대한 고백이 쏟아져 나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으면서 아직도 제대로 회개 한번 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능력의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으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회개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좀 불향한 사람들입니다. 회개없이도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회개없이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아서 언제 무너져 내릴는지 모릅니다. 회개있는 삶이 정말 축복된 삶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왜 이리 세상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물론 비난하는 사람들의 비난의 잣대로 찬성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한국 교회가 제대로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의 책망에 우왕좌왕하고 힘없이 주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두렵다고 고백한다면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 개인도 교회도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회개가 있을 때 - 회개 한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아닙니까? 회개할 때 -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과 교회에 나타나게 됩니다. 회개하세요. 자복하세요.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세요. 변화되세요. 1900년대에 한국 교회에 일어났던 대각성운동은 바로 회개운동이었습니다. 회개운동이 일어나니 한국교회에 성령께서 역사 하시고 커다란 부흥까지 이루지 않았습니까? 19절을 보니까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이 책을 모아가지고 와서 불사르니 그 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이 당시의 책은 참 귀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인쇄술이 발달되어 대량으로 책을 찍어내던 때가 아니라 파피루스라는 종이에 손으로 옮겨 써야 했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 책 한권의 값이 엄청나게 비쌌어요. 똑같은 책 한권 만들려면 한 사람이 몇 년씩이나 얘를 써야 했습니다. 책값이 얼마나 되었다구요? 은이 오만입니다. 화폐 단위가 나와 있지 않지만 주석 학자들은 은 하나가 대략 드라크마나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은이 오만이면 노동자 한 명이 135년을 쉬지 않고 일한 대가로 받을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얼마입니까? 3만원만 잡아도 15억 정도의 돈입니다. 사실 마술사에게 있어서의 책은 재산과도 같습니다. 책이 귀하기도 한 때였고 그 만큼 가치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마술사들에게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책이 없으면 끝장입니다. 더 이상 마술로 밥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술사들이 책을 불살랐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마술사들이 진짜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목격하고는 가짜 버리고, 회개하고 제대로 나도 이제 주님을 믿겠다는 인생의 전환적인 -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적인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진짜인줄 알고 마술하며 살았는데 아니었어요. 다시 돌아갈 수 없도록 책까지 태워버렸어요. 철저한 회개였습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배수의 진을 친 회개였어요. 이렇듯 회개는 철저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니 20절 보니까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런 모든 기적은, 능력은 말씀을 전하다가 혹은 말씀을 전하는 중에 일어났음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두란노 서원에서 열심히 말씀을 전했고 모두들 열심히 들었더니, 그랬더니 바울로부터 희한한 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바로 아셔야 할 것은 말씀에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이 힘이 있습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기만 하면 내 삶에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부흥합니다. 이 교회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마치면서
여러분! 사도행전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 우리 교회의 이야기도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세요. 말씀을 붙잡으세요. 말씀을 믿으세요. 말씀이 능력임을 확신하세요. 하나님께 쓰여지는 손이 되세요. 하나님께 쓰여지는 사람이 되세요. 어떤 사람을 쓰십니까? 믿음의 사람, 말씀 붙잡고 확실하게 오직 주님, 오직 예수님만 붙잡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쓰십니다. 춘천중앙의 성도와 교회도 말씀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적의 도구로, 능력의 도구로 쓰시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
행 19장 11~20절 / 이재철목사
♬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
1.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후렴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2. 당신이 외로이 홀로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게 위로를 얻나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마음을 그대 홀로 있지 못함을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가져다 얹어도 병이 낫게 할 수 있는 큰 능력을 주셨습니다.(11-12절)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 다른 곳보다 에베소에서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왜 일까요?
에베소는 악령과 주술이 강하게 뿌리 박힌 곳이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전을 중심으로 문화, 생활, 종교가 연관되어있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은 자손을 번창시키고 풍년이 오게 하는 신, 풍요의 신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매년 6월은 아데미 여신의 축제의 날로 모든 에베소 인들이 이날을 즐겼습니다. 이 날 아데미 여신을 조각하여 판매하는 사업가(은장색)도 있었는데 바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오고 여신상이 잘 팔리지 않자 사람들이 바울을 싫어했습니다.(24절 이하)
19절 말씀에 보니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마술책을 모아 불사르는데 그 책값이 은 오만이었다고 말합니다. 은 오만은 천오백억에서 이천억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이런 곳에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사람들이 돌아오기 힘듭니다.
엡 2:1-2절 말씀에 에베소 교회 교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베소는 이런 곳이었습니다.
영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들은 감정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엡 6:12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성령의 역사를 알면 악령의 실체를 알게 되고 속아넘어가지 않습니다.
악령에게 넘어가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악령을 이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악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우리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우리속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들어오지는 않지만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앞으로 닥칠 수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 베드로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립니다. 그런 베드로를 보며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영접했으므로 마귀가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마귀가 옆에서 베드로를 부축인 것입니다.
반면에 가롯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척, 제자인 척 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그 마음속에 들어가 자리잡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처음에는 생각을 타고 들어왔습니다.(2절) 그 마음을 계속 품자 사단이 직접 들어왔고 행동으로 옮기도록 시켰습니다.(27절)
마귀가 들어오니까 예수님이 돈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요 18:2-3) 그래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가롯유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 목 메달아 죽고 말았습니다.(행 1:18)
◈ 마귀가 틈을 타는 통로가 있습니다.
엡 4:25-2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① 악한 귀신은 거짓으로 옵니다. 거짓을 버리십시오(25절)
② 해가 지도록 분을 품으면 마귀가 틈을 타고 들어옵니다.(26절)
③ 도적질하는 것을 통해 들어옵니다.(28절)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도적이 많았습니다.
내가 수고하여 얻은 것 외에 도적질하여 얻는 것은 낚시 바늘과 같습니다.
어떻게 악령을 이길 수 있습니까?
이미 악한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신 예수님을 의지하십시오. 마귀는 예수님 앞에 떨며 무서워합니다.
◈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치는데 왜 떠나가지 않을까요?
①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막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홉명의 제자들은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와서 귀신을 내어 쫓아주기를 소망합니다.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마침 예수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말합니다.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
② 흉내를 내기 때문입니다.(13절)
마술하는 유대인이 바울의 예수를 빌러 흉내내서 그냥 해 본 것입니다.
제사장 스게아의 일곱 아들들도 흉내를 냅니다. (14-16절)
◈ 어떻게 해야 끊고 물리칠 수 있을까요?
①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가계를 타고 오는 어둠의 세력은 기도록 물리쳐야 합니다.
② 악령이 틈을 타는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음식물 쓰레기에는 고양이, 쥐가 몰리기 마련입니다. 그 쓰레기는 그대로 둔 채 고양이를 내쫓으면 잠시 도망가기는 하지만 다시 몰려옵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해야 합니다.
본문 18-19절에 보면 마술책을 불사름으로써 악령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했습니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꾸 나를 유혹합니다.
술, 도박, 음란 등을 물리치십시오.
너희는 누구냐
행 19장 13~16절 / 양향모목사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다 신들린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고 어떤 사람은 사탄의 지시를 받는 악한 귀신이 들린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도 어떤 사람은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조차도 잘 모를 정도로 그 역사가 잘 느껴지지 않은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각종 은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충만한 역사를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악령 즉 귀신을 받은 사람도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귀신을 받은 것을 전혀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신 내림굿을 받아서 점도 치고 굿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다 결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갑니다. 악한 귀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도 그것을 알고 느끼는 사람이나 잘 모르고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은 사탄의 뜻을 따라서 악하게 살게 되고 사탄의 종으로서 살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을 쳐주시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함께 하시면서 영원한 천국까지 이르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그 속에 악한 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진리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인이라고 생각하고 바른 길로 가는 사람들이라고 착각을 하고 살지만 다 악한 영의 지배를 받아서 죄악 속에서 살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끌려가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악한 영의 지배를 받으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처럼 가장하다가 실패를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처럼 가장을 하여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다가 가짜임이 들통이 나서 망신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짜 교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자 귀신이 내가 예수님도 알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도 잘 아는데 도대체 “너희들은 누구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실로 믿지 못하고 믿는 사람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너희들은 누구냐”고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후일 에베소교회가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을 칭찬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런 칭찬을 받을 수 있도록 가짜를 거짓된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너희는 누구냐”로 정했습니다. 우리도 에베소교회처럼 악한 자들과 거짓 사도들과 거짓 복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탄의 세력들을 향하여 “너희는 누구냐”라고 당당하게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본문 13-14절에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앞의 성경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11-12절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손을 통하여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고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얹으면 병도 떠나고 악귀도 물러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흉내를 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라고 하면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명령을 하니까 나오라고 했습니다.
이런 흉내를 내는 사람을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돌아다닌다고 하는 것은 근본이 없는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이라고는 하지만 뚜렷한 근거가 없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유대인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행세만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술을 한다는 것은 좀 다양하게 해석이 되는 말입니다. “유대인 무당”으로 번역하기도 하고(현대인의 성경), “귀신 축출가”로 번역을 하기도 하고(새번역 성경),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 사람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했습니다(공동번역 성경). 여기 마술이라고 번역된 말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마술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는 무당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귀신들의 역사가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미친 사람처럼 지내거나 귀신으로 인해서 병이든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귀신을 축출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귀신들린 많은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눅11:15)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귀신이 귀신을 쫓아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마술을 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자신들이 귀신들인 사람이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려고 했습니다.
“시험 삼아”라고 했습니다. 안 될 줄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번 시도해 봤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고 노력을 했지만 잘 안됐는데 바울이라는 사람이 아주 쉽게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한번 따라해 봤다는 것입니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유대교의 한 제사장 스게와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진짜 제사장이었는지 가짜로 제사장이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먼 에베소에 와서 사는 것으로 보아서 진짜 제사장은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그냥 자기들 스스로 제사장 집안이었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 제사장에게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들이 근본 없이 떠돌아다니는 마술사들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고 바울의 이름을 빙자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잘난 척하기 위해서 제사장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본문을 주석하면서 이들의 잘못을 두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의 가르침이나 믿음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마치 마술의 주문처럼 악용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더 나아가서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을 한다고 했지만 그 예수님이 누구인지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주문으로만 그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처럼 악용한 것이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주관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을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이고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려고 한 것이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돌아다니며 마술을 하는” 사람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오늘날 돌아다닌다는 것은 신학의 근본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느 날은 순복음의 오순절 신학을 따르고 어느 날은 감리교의 알미니안 신학을 따르고 어느 날은 칼빈주의 신학을 따르고 어느 날은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고 어느 날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릅니다.
근본이 없이 자기 이익을 따라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 고신 하면 확실하게 칼빈주의를 따르는 개혁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색깔이 뚜렷하지 않고 희미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 순복음 장로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재산이 많아지고 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기만 하면 그것이 성경적인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살펴보려고 하지 않고 무조건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술을 하는 사람들도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무당들처럼 이상한 짓을 하는 이단 거짓 선생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침투해 있습니다. 시험 삼아 그냥 한번 해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번 되든지 말든지 해 보는 그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거짓 선생 이단의 무리들을 향하여 “너희는 누구냐”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라고 사탄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에 관하여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관하야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복하여 살펴보고 있는 것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고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본문 15-16절에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편에서 있거나 사탄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서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창조해주시고 우주 만물을 주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사탄을 따르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사탄이 자신의 졸개들인 악한 귀신을 동원해서 인간들을 유혹하여서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자신들의 뒤를 따르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끌어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하여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할 그리스도를 오시게 하기 위해서 특별한 민족을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을 출애굽하게 하시고 광야에서 훈련을 시킨 다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특별히 당부한 말씀들이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10.그는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너를 꾀어 떠나게 하려 한 자이니 너는 돌로 쳐죽이라”(신13:1-10)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면서 가나안 땅에 사는 원주민들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가나안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만 섬기고 따라야 하는데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면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을 깨우쳐서 참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이방 잡신들을 따라갑니다. 사람들의 심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더 쉽게 믿습니다. 그 우상이 한낱 돌이나 나무기둥에 불과한 것인데도 이상하게 그것들을 섬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숭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였고 심지어 제사장이라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이런 무당 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끝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교회에까지도 이런 무당 같은 이상한 신앙이 들어왔습니다.
이런 무당 신앙이 하나님 나라를 망신시키는 아주 나쁜 신앙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고 천국백성이 되는 것인데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당들이나 따라하는 잘못된 신앙 때문에 교회가 엉뚱한 길로 가고 있습니다.
교회안의 진실한 성도들도 자신도 모르게 무당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 형상이나 다른 어떤 귀중품들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하고 지니고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고 무속신앙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무당이 주문 외우는 것처럼 외우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주문이 아닙니다. 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렇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교회는 사도신경을 특별히 공부를 했고 해설을 한 책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도 그 냉용도 모른 채 주문처럼 외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찬송가를 부를 때도 그냥 무당 주문 외우듯이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오래된 성도들이 잘 아는 찬송가를 부르지 왜 새로운 노래들을 부르는가라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옛날 잘 아는 찬송을 그냥 의미도 모르고 노래 부르듯이 부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래이지 찬송이 아닙니다. 그 때 상황에 맞는 노래를 의미를 알고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찬송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니까 마술 즉 무당 짓을 하는 유대인들이 악귀에게 망신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나가라고 하는데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귀신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귀신이 무당 유대인을 보니까 예수님도 모르면서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모르면서 예수님 이름만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무당 같은 유대인에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로만 예수님 이름을 대는 사람에게 사탄이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러고 나서 귀신 들린 사람이 무당 짓을 하는 유대인 제사장 아들들에게 달려들어 모두 때려 눕혔습니다. 그들은 상처를 입고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쳐 나갔다고 했습니다. 사탄에게 굴복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 무당 같은 짓을 하는 이단이나 거짓 선생이 지도하고 있는 교회들이 부흥을 하고 성장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들이 우리 개혁주의 교회를 비웃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을 비웃습니다. 그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웃는 것은 하나님아 아니라 사탄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사탄 편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사탄에게 농락을 당하고 성도들을 사탄의 소굴로 끌어넣은 위험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모르고 예수님의 복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 믿는척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척하고 거짓으로 행하다가 주님 오실 때 아주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모르면서 복음도 모르면서 무당처럼 행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도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누구냐?”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복음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너무나 귀한 것입니다. 이 귀한 믿음 이 위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술과 참 신앙
행 19장 13~20절 / 김영규목사
예수 이름을 빙자하는 마술사들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반 동안 머물면서 전도했습니다.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전 시민들이 예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사방에 복음이 퍼졌습니다. 본문은 그 중에 특기할 만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마술사들의 회개입니다. 에베소에서 마술사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것은 역사에 남을만한 특별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에베소는 마술사들의 소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13) 본문에 “마술”이라고 번역된 말은 “ejxorkisthv"”(엑소르키스테스)입니다. 영어의 exorcist란 말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ejxorkisthv"”란 말을 분해하면 “ejk”(out)와 “oJrkivzw”(vow)가 합쳐진 말입니다. “맹세를 내는 자”란 뜻입니다. 즉, 어떤 말을 해서 그 말에 묶이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마술사란 말보다는 주술사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에베소에는 특히 블랙 매직이 성행했습니다. 블랙 매직은 화이트 매직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화이트 매직은 어떤 주문을 외워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주술입니다. 반대로 블랙 매직은 어떤 주문을 외워서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예를 들면 저주의 문구를 외워서 남을 해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따위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압왕 발락이 주술사였던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부탁합니다. 때로는 사람 모양을 만들어서 바늘로 찌르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매직은 100% 거짓말이거나 사기입니다. 섹스피어의 희곡 중에 “Comedy of Errors”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 중에 에베소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중에 “Syracusan Antipholus”란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 도시(에베소)를 가리켜 속이고 빼앗는 곳이라고 합니다. 민첩한 요술쟁이(사기꾼)들이 사람의 눈을 속입니다. 음흉한 마법사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영혼을 죽이는 마녀들이 몸을 추하게 만듭니다. 변장한 사기꾼들, 지껄여대는 돌팔이 약장수들, 이런 저런 죄들을 마음껏 짓는 곳이 에베소입니다.”
바로 이런 마술사들 중에 떠돌이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귀신을 쫓아낸다거나, 병자를 고친다고 선전했습니다. 어떻게 유대인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유대인이라면 하나님 말씀만 따르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방인에 동화된 유대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들은 유대교와 별 상관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마술을 행했다면 분명히 사기성이 농후한 유대인들입니다. 이런 유대인 마술사들은 이방인들에게 특별한 대접을 받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술사들이 의지하는 신들의 이름 중에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의 이름이 대단하다는 것을 그들이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대인 마술사들은 솔로몬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전수받았다고 선전하기도 했습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 특히 하나님의 고유명사를 감히 입으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란 이름은 자음 네 자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여호와”란 이름이 나오면 그냥 “나의 주”란 말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마술사들은 별 생각 없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들이 부른 하나님의 이름은 제각각입니다. 당시 마술사들이 부르던 하나님의 이름이 파피루스에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부른 하나님의 이름을 보면 “이아오, 이아에, 이아오우에” 등등이 나오고, 사바오트, 혹은 아브라함의 이름까지 나옵니다. 파리 매지칼 파피루스란 문서에 보면 에베소 사람들 중에 “히브리인의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다”는 글귀가 남아 있습니다. 에베소 마술사들이 부르는 신들의 이름 중에 “예수”란 이름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런 부류의 유대인 마술사 중에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14) 스게와를 가리켜 “한 제사장”이라고 했는데, 원문대로 하면 “ajrciereuv"”(대제사장)입니다. 역사 기록 중에 스게와란 대제사장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스게와는 대제사장은 아니고, 아마 회당의 지도자였거나, 아니면 제사장 가문의 한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바울을 흉내 냈습니다. 13절 말씀을 보세요.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13) 주술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신의 이름을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에 바울이 사용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점을 흉내 냈습니다. 아하! 예수라는 이름이 효과가 있구나! 그들은 예수님 이름을 사용하면서 바울까지 들먹였습니다.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13)
예수님은 그냥 자신의 명령만으로 모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내가 네게 명하노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2:11)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막5:41)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7:14)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14:13)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3:6) “바울이...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16:18)
그런데, 마술사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무단 도용했습니다. 그냥 사용하기는 좀 미안하니까, 바울의 저작권(?)을 인정했습니다. 내가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노라! 결과는 참담합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13-16) 귀신들은 인격체입니다. 예수 이름을 사용한다고 무조건 벌벌 떠는 존재가 아닙니다. 귀신들은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사람보다 천만 배 더 정확하게 사리판단을 합니다. 정말 이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예수님 이름만 빌려 쓰는 사람인지, 다 압니다. 귀신들이 스게와의 아들들을 덮쳤습니다. 힘으로 눌러버렸어요. 스게와의 아들들은 혼비백산 했습니다. 옷을 다 벗은 채로 도망쳤습니다. “상하여 벗은 몸으로”라고 했습니다. “gumnou;" kai; tetraumatismevnou"” 어떤 영어 성경에는 “naked and wounded.”라고 번역했고, 어떤 성경에는 “naked and bleeding.”이라고 번역했습니다. “traumativzw”란 말은 부상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아마 피를 흘릴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 이름만 빌려서 살지 마세요. 큰 부상을 당합니다. 벗은 몸이 됩니다. 망신을 당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셔서 당당히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세요.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백하세요. 그리고 당당히 예수님 이름을 사용하세요. 내가 예수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들아 물러가라! 내가 예수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병은 내게서 떠날지어다! 예수님 이름을 의지하고 사용하세요. 라이선스 비용도 없습니다. 명예 도용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 이름을 사용하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단순히 이름만 들먹이지는 마세요. 진정성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가? 예수님이 내 목자이신가?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신가? 예수님을 정말 의지하고 있는가? 예수님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예수님 이름을 진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앞에 굴복한 마술사들
스게와 아들들의 사건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에베소 거주민들이 예수님을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17) 이들이 개인적으로 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든지 아니했든지는 모릅니다. 최소한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에 예수님은 흔히 부르던 우상이나 신화 속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실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마술사 점쟁이들이 빌려오는 가짜 이름이 아닙니다. 귀신들을 좌우하고,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짓는 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 이름을 부르면서 살 때에 삶의 증표들이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우리의 증표들을 보면서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그 이름을 높이게 됩니다. 아하! 예수님은 위대하시구나! 이름을 높여요. “megaluvnw”, magnify, 확대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내 삶을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이 크게 확대되기 바랍니다.
둘째로, 마술사들의 변화입니다. 에베소의 마술사들에게 일대 사변이 일어났습니다.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18) 믿은 사람들이 와서 자복하고 행한 일을 고했습니다. 자복은 하나님께, 알리는 것은 사람에게 한 일입니다. 자복했다는 말은 “ejxomologevw”인데, 동일한 말을 밖으로 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공동의 고백을 말합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하나님께 함께 고백했습니다. 공적인 회개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행한 일을 알렸습니다. “알렸다”는 말은 “ajnaggevllw”인데, 사람들을 향한 발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렸다는 말일까요? 당시 마술사들은 자신들만이 아는 주문이 있었습니다. 그 주문은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효력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직업상 철저하게 비밀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주문을 공개해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수리수리 마수리, 난로 수리, 곤로 수리, 화로 수리!” 뭐 이런 주문이 있다고 하면, 그 말을 다 공개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더 이상 마술을 행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마술사들의 회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19) 마술사들이 책을 가져와 불태웠습니다. 당시 마술사들의 책은 다른 책들보다도 상당히 비싼 값에 매매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마술 책에는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비밀들이 많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부분의 마술 책들이 몇 사람에게 없는 비법을 담은 소장본들이었습니다. 값이 비쌀 수 밖에 없습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은 마술사들의 책들을 다 모아 보니 그 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오만이란 단위는 드라크마로 생각됩니다. 당시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오늘날 숙련된 노동자의 일당을 10만 원으로 환산한다면 약 50억 원이나 됩니다. 그렇게 많은 마술사들이 회개한 것도 신기한 일이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책이 에베소에서 모아진 것도 신기한 일이고, 그렇게 엄청난 분량의 책을 불태워버린 것도 신기한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바울 당시의 마술사들이 사용하던 파피루스 사본들 중에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런던, 파리, 라이덴 컬렉션 들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어떤 진귀한 책을 갖고 계십니까? 어떤 값 비싼 소장품을 갖고 계십니까? 남들에게는 없는 너무나 비싼 것이기에 절대로 내놓지 못하는 물건은 없습니까? 비록 신앙에는 손해가 날지라도 금전적인 이익 때문에 붙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유형이든 무형이든, 버려야 될 재산이 있습니다. 과감하게 불살라 버리세요. 에베소 마술사들을 본받기 바랍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마술 책을 팔면 큰돈이 됩니다. 그렇다면 불태워 없애지 말고, 시장에 팔아버리면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책을 불태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적하는 물건이 하나라도 세상에 남아 있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영혼을 죽이는 책은 억만금이 나가더라도 불태워버리세요. 거짓과 사기의 책,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책은 무조건 불태워버리세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에베소 마술사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불태웠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오늘 내가 주님을 위해 버릴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에베소 마술사들처럼 불태울 책은 없습니까? 쓸 데 없는 처세술 책들 불태워 버리세요. 염세주의 책들 불태우세요. 영혼을 병들게 하는 음란한 책들 불태우세요. 저는 그동안 종이 신문을 보지 않았습니다. 매일 인터넷으로 실시간 뉴스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며칠 전부터 종이 신문을 구독하고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중에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버리라는 말씀을 봤어요. 인터넷은 음란한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이상한 제목을 붙입니다. “내 친구와 바람. OOO 출금 대체 무슨 일? OOO 너무 벗고 나와. OOO 알고보니?” 뉴스를 검색하다가 “이게 뭘까?” 궁금해서 클릭해 봅니다. 보면 별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시간을 까먹어요. 호기심 따라 클릭하다 보면 영락없이 엉뚱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인터넷 뉴스에는 속임수가 많아요. 될 수 있으면 종이 신문 보세요. 여유 있게 생각하면서 활자 시대로 돌아가 보세요. 오늘 내 삶에서 주님을 아는 것에 걸림돌이 된다면 다 없애버리세요. 예수님을 모시기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 다 불태워버리세요. 영혼의 청소와 함께 주변 청소를 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주의 말씀이 힘을 얻다
마술사들이 회개 한 결과가 뭡니까?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 “Ou{tw" kata; kravto" oJ lovgo" tou' kurivou hu[xanen kai; i[scuen” “So the word of the Lord grew mightily and prevailed.”(NKJV) “So the message about the Lord spread widely and had a powerful effect.”(NLT) 복음의 부흥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힘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전파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효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기적 자체가 아닙니다. 복음 전파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게 하는 일입니다. 천국 자녀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는 일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천국으로 인도되게 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의 천국 전파와 천국 건설! 바로 그것이 사도행전의 목표입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흥왕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 술
행 19장 17~20절 / 장경동목사
성경은 항상 양면으로 나누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듯이 진짜와 거짓이, 참 종과 거짓종이 귀신들 앞에서 적나라하게 자기의 정체가, 자기의 능력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한 사람입니까? 주님 편에 있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려울 때, 낮아 졌을 때, 내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참아낼 수 있는 능력과 이길 힘을 주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주님이 함께하는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성경 속에서 깨달아야 될 것 중 하나가 막16:17의 말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와 막16:20 말씀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르는 표적이 하나님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요2:11 의 말씀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처럼 표적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요11:45 말씀 ‘마리아 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와 요12:11 말씀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 이러라.’처럼, 나타나는 표적을 통해서 믿게 하고,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표적과 마귀가 주는 표적이 다릅니다. 즉, 믿게 하는 표적과 미혹케 하는 표적이 따로 있습니다.
마12:38-39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의 말씀을 보면, 표적을 통해서 미혹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사용한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표적은 과정(중간)이어야지 목적(결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바른)표적은 주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거짓)표적은 악한영이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가 표적 일방주의와 표적 부정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흑백논리로만 세상을 아서는 안 됩니다. 윷놀이를 할 때도 보면 모와 도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와 걸이 훨씬 많이 나옵니다. 내편이나 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편도 아니고 적도 아닌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행19: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의 증거를 믿어야 합니다. 현대교회는 복음은 있는데 복음의 능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말은 있는데 그 말에 따르는 능력(권세)이 없습니다.
누4:31-32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 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에 권세가 있음 이러라.’ 이처럼 예수님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고전13:8-10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 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여기에서 온전한 것은 주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마술의 능력이 부딪칠 때가 몇 번 나옵니다. 마술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는 술법을 말합니다. 출7:10-12 에도 보면,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어 술객이 만든 뱀을 삼켜 버렸습니다. 행8:9-13 과 행19:19 에서도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라는 기록처럼, 많은 술객들이 책을 태우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초대 교회시절에는 이런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이 현대교회 안에서는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 무속인이 수십만 명랍니다. 그것은 그만큼 사회가 혼돈스럽고 영적으로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
은 크리스찬이 하나님 능력을 상실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요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죄된 생활을 바꿔야 합니다. 기적은 고칠 수 있는 능력과 고침 받을 수 있는 믿음이 합쳐질 때 이뤄지는 겁니다.
인간은 미래를 모르고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모르지만 주님 주시는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했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믿는 무리의 수가 많아졌고 본문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무속인들이 자기들이 보던 책을 다 태워버리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이 회복될 수 있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우리 한국교회가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베소 교회를 본 받아 부흥하는 교회
행 19장 20절 / 강성찬목사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이야기가 다시 이어지며 바울이 윗 지방을 다녀 에베소에 왔다고 하는데 '윗지방'이란 일반적으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Zahn, Bauernfeind).
에베소는 소아시아 서해안에 있는 도시로서 코레소스(Koressos) 산맥과 에게해 사이의 카이스터(Cayster) 강 어귀에 위치하였습니다. 이는 항구도시로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아시아의 보고'로 불리울 만큼 번창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종 미신들과 이방 종교들과 사회적 병폐들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당시 에베소인들은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점점 잃어가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전부터 섬겨오던 아데미 여신을 더욱 더 열심히 섬겼는데 이 여신의 신전은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곳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므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는 부흥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1907년 처럼 다시 부흥하는 교회가 되되 에베소 교회를 본 받아 부흥하는 역사가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에베소 교회 부흥의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에베소 교회는 주 예수의 이름 중심하는 교회입니다.
바울이 어떤 제자들을 만나 성령에 대해 아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행 19: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그러나 그들은 성령과 그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행 19:2)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그래서 다시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어 봅니다.
(행 19: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와 성령 세례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마 3: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런데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 씀 이들이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하였다는 것은 '요한의 세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보입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의 사역의 뜻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 설명합니다.
(행 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바울은 요한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요한의 세례에 관한 정확한 의미와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을 올바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마음의 변화와 근본적 전환을 위해 베푼 회개의 세례로 뒤에 오실 이, 곧 예수를 믿게 하기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과 불로 베푸시는 구원의 세례라는 것입니다.
때때로 세례 요한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계시의 절정으로 보며 심지어는 메시야와 동일시 하기도 했습니다.
(눅 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그러나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일 따름이었습니다.
(마 3: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따라서 요한은 예수께서 베푸실 '성령과 불 세례'를 위해 먼저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왜냐하면 회개 없이는 성령을 받을 수 없으며 또 근본적으로 회개케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기(Lenski)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행 19: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의 가르침으로 자신들이 모두 잘못 알고 있음을 깨달은 제자들은 자진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로서 진정하고 참된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진정한 연합의 관계가 이루어 집니다.
(롬 6:3-5)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어떤 마을에 잘 지어진 아름다운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의 벽에는 선명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써 있었습니다.“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는다.” 언제부터인가 건물 벽에 담쟁이 넝쿨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벽에 쓰인 글을 가리기 시작했습니다. 벽에 쓰인 글 중에서“십자가에 못박힌”이란 부분을 담쟁이 넝쿨이 가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라는 말만 보였습니다. 얼마 후 담쟁이 넝쿨이 더 자라나서 이번에는“그리스도”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남은 말은“우리는 믿는다”는 말뿐이었습니다. 끝내는 이 담쟁이 넝쿨이 벽을 모두 가려 원래 있던 글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죄에서 해방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 버리고 예수님에게서 십자가를 빼 버리고 십자가에서 당한 고통과 죽음의 의미를 빼 버리면 믿는 신앙에는 아무 것도 남을 것이 없으며 아예 우리의 존재 가치마저도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주를 믿음으로써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기독교 - 예수 - 십자가 = ?)
에베소 교회는 성령 중심하는 교회입니다
(행 19:6,7)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던 바울 사도는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저들에게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세례를 베풀므로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합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주의 영이신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표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와(2:4, 6, 8), 고넬료의 집에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10:44-46)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나타났던 표적들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성령 세례를 받은 열 두 사람들은 후에 에베소 교회의 핵심 인물들이 되어 이방 선교에 전심 전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에베소의 오순절'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고대의 한 수도원에서 내려오는 얘기입니다. 어느 한 노인 수도사가 젊은 사업가에게 말했습니다. “물고기가 마른 땅에서는 죽듯이 자네도 세상에 뒤엉키면 파멸케 되네. 고기는 물로 돌아가야 하고 자네는 성령께로 돌아가야 해.” 그러자 그 사업가는 아연실색하며 말했습니다. “그럼 당신은 내가 사업을 그만두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란 말이오? 내가 사업을 통해 성취한 것을 포기해야 한단 말이오?”그 노인은 다시 말했습니다.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니네. 내가 한 말의 뜻은 사업은 그대로 붙들고 있고 당신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이지.”
우리의 마음은 성령이 계신 곳이니 성령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으면 세상의 사람이고 세상사가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하나님의 사람이고 하늘나라 일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성령의 지배)
성령안에서 부흥의 역사를 이루는 모두가 됩시다.
에베소 교회는 말씀 중심하는 교회입니다.
에베소에 이른 바울은 이제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강론하기 시작했습니다.
(행 19: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이미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이 회당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고 약속했었습니다.
(행 18:19-21)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바울 사도는 그 약속을 지키고 회당 사람들의 호의적인 태도로 석 달 동안이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믿지 아니하고 그 도를 비방하기까지 했습니다.
(행 19: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전파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 문을 열려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 문을 굳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두고 마음이 굳어 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게 되었습니다.
(행 19:9)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 제자들은 바울이 회당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곳에서 얻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로부터 떠나면서 그곳에서 얻은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나왔습니다.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의 적대감이 매우 심했던 까닭에 바울은 더 이상 회당을 복음 증거 장소로 이용할 수 없다고 느끼고, 두란노 서원으로 옮겼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계속되었고 그러한 노력은 에베소에서 큰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17세기의 칼뱅주의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목사였던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이 '경건한 가정'의 후손들 4백여 명은 에드워즈의 가르침에 따라 14명의 학장과 1백 명의 목사·신학자, 1백 명 이상의 법관·판사, 60명이 의사가 되어 사회에 봉사했습니다. 그런가하면 70명의 작가·저술가가 있었으며, 언론인·출판인으로도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했습니다.(말씀은 위대한 유산)
말씀 중심하며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교회입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습니다.
그중에 바울을 통해 나타난 것은 병 고치는 이적이었습니다.
(행 19:11,12)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는 바울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희한한 능력이었습니다.
그러자 마술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이적 행한 것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행 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바울 사도나 다른 사도들 또는 성도들 외에 비기독교인들도 귀신 축출을 위해 예수 이름을 마술적으로 사용했습니다(14-16절; 막 9:38, 39). 실제로 파리의 마술 문서인 574번 파피루스 3018행에서는 "내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네게 엄히 명하노니." 라고 무당들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 실례를 언급하고 있다합니다.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것을 목격한 유대인 주술사들도 바울의 행동을 모방해 예수의 이름을 그들의 주술에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무당들이 귀신을 내어 쫓으려 할 때는 십자가를 긋는다 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바울을 모방하다가 큰 봉변을 당했습니다.
(행 19:14-16)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이들의 이런 교활한 행동은 마치 사마리아인 시몬의 태도와도 유사합니다.
(행 8:18-19)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귀신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먼저 하나님의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들의 믿음과 능력들을 먼저 파악합니다.
그들 자신들이 하는 일을 멸하러 오신 예수를 이미 이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나아가 바울이 그 예수의 사도이며 믿음과 능력의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행 19:15)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그들이 마귀에게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감으로써 이들의 신의와 위엄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며 반면에 바울의 권위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죄를 자백 합니다.
(행 19:17,18)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미신과 주술이 난무하는 에베소의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일곱 주술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엄청난 파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그 주술사들처럼 미신과 주술이라는 악습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귀신의 봉변이 자신들에게 임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곤경을 치르게 될까 염려하며 예수의 이름이 모든 귀신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이름을 높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에베소 주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보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예수의 이름이 지닌 신비한 능력 앞에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은밀하게 범하던 잘못들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생활 습성을 청산하지 못하고 은밀한 가운데 미신과 주술을 쫓거나 그 같은 일들을 직접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수의 능력을 확실히 목격하고 체험하게 되자 자신들의 은밀한 범죄를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마술사들도 마술을 버리고 그들의 책을 불살라 버립니다.
(행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행동을 회개하고,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공개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마술에 관계된 모든 서적들을 불살랐습니다. 이 책들은 주문이나 부적 등 미신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파피루스나 양피지(parchment)에 기록된 것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책들은 '에베소의 책들'(Ephesia Grammata)로 추정하기도 합니다(Zahn).
한편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을 불태우는 것은 그 내용을 공식적으로 배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렘 36:23) 여후디가 삼 편 사 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공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과거 자신들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에베소에는 대부분 헬라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은 오만'에 대한 화폐 단위는 아마도 '드라크마'(Drachma)이었거나 로마의 화폐 단위인 '데나리온'(Denarius)이었을 것으로 이 두 화폐의 가치는 거의 같은 것으로서 당시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에 해당되었습니다. 하루 품삯을 3만원으로 계산하며 15억이 됩니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 본다 하더라도 당시 에베소에 미신이나 마술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고 소금되고 향기되고 편지 되는 사명을 감당해야함을 교훈 합니다.
웹 할아버지는 손녀와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였고, 손녀도 무척 교회 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주중에도 “할아버지, 오늘이 교회 가는 날인가요?”하고 할아버지에게 묻곤 하였다. 그래서 때론 주일이 아니더라도 할아버지는 손녀를 데리고 교회에 갔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서 제단 강대상 밑에 조용히 앉으면 손녀는 신기한 듯이 아름답게 꾸며 놓은 예배당 안을 둘러보았다. 손녀는 색유리를 끼운 창, 특히 예수의 자비로운 얼굴이 그려져 있는 유리를 좋아하여 한동안 황홀한 듯이 바라보다가는 가만히 “할아버지, 기도해주세요”하며 웹의 손을 꼭 쥐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 나가 놀다가 들어온 손녀가 물었다. “할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언제 교회 밖으로 나오시나요? 하나님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하나님은 언제 교회 밖으로 나오시는가? 항상 교회에서만 계시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나님은 세상에 계시는 것일까?’ 손녀의 물음에 깊은 생각을 하던 웹 할아버지는 눈을 번쩍 떴다. “맞다. 하나님께서도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을 통해 언제나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나의 생활 속에서 또한 여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고 계신다.”(교회 밖으로 나오시는 하나님)
에베소 교회는 예수중심 성령 중심 말씀 중심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아 나타나므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어 갔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본 받아 1907년 처럼 부흥하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하는 모두가 됩시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행 19:11-20 / 구모영박사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사역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11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다.” 여기 놀라운 능력(Δυνάμεις)이란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기에(οὐ τὰς τυχούσας) 분명히 치유의 능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1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σουδάρια)이나 앞치마(σιμικίνθια)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누가는 보고하고 있다. 여기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란 그가 천막을 만들거나 가죽을 가공할 때 사용하였던 것들이었을 것이다. 여기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란 아마 땀이 흘러내리는 것은 막기 위하여 머리에 두른 수건과 가죽을 가공하며 그의 허리에 둘렀던 앞치마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마치 베드로의 그림자 치유 사역을 연상시키기도 하며(행 5:15), 더 나아나 주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행하셨던 여러 치유의 사역 중 주님의 겉옷자락을 만진 사람들이 나음을 얻은 사건을 떠 올리게 한다(막 5:27-34; 6:56). 다만 주님의 치유 사역은 주님의 주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여기 바울과 베드로의 치유사역은 그들이 치유의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역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며, 또한 그 능력의 원천은 하늘로부터 온 것임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에 차이가 있다.
어쨌든 바울의 사역 중에 “예수의 이름으로”(ὄνομα τοῦ Κυρίου Ἰησοῦ )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목도한 많은 무리들이 이제는 자신들도 모방을 하려고 하였으니, 1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 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기 까지 했던 것이다. 여기 마술을 하는 유대인이라 하였으니, 본래 마술은 사람의 눈을 속이는 기술을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자신의 마술을 행하면서, 악귀 들린 자들에게 시험 삼아 악귀를 쫒아내는 축사(逐邪) 행위까지 한 것이다. 다만 누가는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는데, 축사를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로 아래 스게와의 아들들이 이 일을 했을 때 오히려 축사는커녕 악귀가 이들을 덥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는 사실에서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행하는 능력을 받고 싶어 하고 닮고 싶어 하였던 것 같다. 당시의 이와 같은 기록 중 “나는 너에게 히브리의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명한다”라는 파피루스의 기록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마술관련 자료에 현재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14절에는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능력을 닮기를 원했고 또한 흉내를 내고 싶었는데, 여기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기는커녕 도리어 악귀에게 사로잡혔으니, 15절과 16절은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라고 누가는 적고 있다. 여기 스게와에 대해서는 그가 제사장이 아니라 단지 제사장이라고 떠들고 다녔을 수도 있고, 실제적으로 제사장의 신분이었으나 그의 아들들이 귀신 축출의 오류를 범했을 수도 있지만 스게와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 이상 알 수 있는 정보가 없다.
악귀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스게와의 아들들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여기 우리는 좀 “안다”라는 말에 주목을 해 보자. 성경은 종종 안다는 말을 표현하는데, 여기 먼저 “예수도 알고”라고 할 때의 안다는 표현은 γινώσκω라는 말로 이는 상호작용과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을 의미한다(be aware of, perceive). 이는 마치 부부가 결혼생활을 하면서 알아가게 된 것과 같은 경험적인 의미이다. 이에 반하여 “바울도 알거니와”라고 할 때의 안다는 말은 ἐπίσταμαι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는 “∼에 대하여 알다”, “이해하다”(know, understand)라는 의미로, 다소 지적인 의미에서 알게 된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귀신은 스게와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너는 누구냐?”(τίνες ἐστέ ?)라고 반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안다는 단어와 관련하여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F.F.Bruce와 같은 학자는 귀신은 예수는 이름으로 알았고, 바울은 보아서 알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이와 같은 두 헬라어 동사의 의미 구별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소극적이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 스게와의 아들들의 축사행위를 해 보려 하였으나 귀신은 결코 그에게 축사의 능력이 있지 않음을 알았고, 또한 축사는 예수와 사도 이외에 다른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귀신이 입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스게와의 아들들은 오히려 악귀 들린 사람의 힘에 제압을 당하는 일이 발생을 하였다. 즉, 스게와의 아들들은 악귀에 사로잡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그들에게 뛰어올라 상처를 입혔으며, 벗은 몸으로 도망을 가는 일까지 벌어진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경은 귀신들린 사람들이 특별한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막 5:3-4 참조), 이들은 어설프게 바울의 흉내를 내고자 했다가 자신들의 몸이 상하는 일뿐만 아니라 망령된 올로 온갖 우사를 당하는 일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자들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망령되게 사용하려 했던 사건을 통하여 결과적으로는 17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에베소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두려움을 주었고, 결국은 이들이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된 것이다. 이는 스게와의 아들들이 귀신을 축출하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였던 것과는 분명 대조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과로 18절과 19절은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말하자면 회개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라 볼 수 있다. 회개는 이전의 자신들의 행위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마술과 악령에 참여했었는데, 이것은 자기들의 “행한 일”(πράξεις: deed, office, work)에서 잘 드러난다. 즉, 여기서 말하는 “행한 일”이란 바로 마술적인 주문과 처방과 같은 악행이었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이전의 악행을 회중 앞에서 고백(ἐξομολογούμενο)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술 책을 공개적으로 불살랐는데, 이들은 마술로써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 다른 사람들을 제압할 힘을 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들을 불살랐으니, 더 이상 이와 같은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회개의 행동으로, 이들이 여기 불사른 책의 값을 따지면 은전(ἀργυρίου) 5만에 상당하는 액수였다.
에베소의 이와 같은 놀라운 교회 정화 회개는 결국 힘있는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으니, 누가는 이를 20절에서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ηὔξανεν) 세력을 얻으니라(ἴσχυεν)”라고 적고 있다. 여기 교회의 흥왕에 대한 보고는 사도행전의 전체 총 일곱 번 중 여섯 번째 성장 기록이라 볼 수 있으며(2:47; 6:7; 9:31; 12:24; 16:5; 28:30-31), 누가는 이와 같은 기록을 끝으로 한 부분의 결론을 짓고 있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행 19장 11~20절 / 조상수목사
바울이 에베소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역사는 참 다양했습니다. 바울은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고(1~7절),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8~9절). 여기까지는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상황과 비슷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겪은 세번째 일은 '두란노 서원'에서 2년간 매일 자유롭게 말씀을 가르쳤다는 데 있습니다. 누가는 바울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기록하면서 바울의 사역이 단순히 가르치는 데만 머물지 않았음을 기록합니다. 즉, 예수님처럼 가르친 말씀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로 드러났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1~12절은 바로 바울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 바로 치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바울과 병자의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라 '손수건'과 '앞치마'가 능력을 일으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려면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람간의 접촉이 쉽지 않은 지금입니다. 특히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면회하는 것도 (병원마다 다르지만) 쉽지 않죠. 어떤 중환자가 병실에 있다가 가족으로 인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기를 요청했습니다. 목사는 병실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고, 세례는 행해야 하고 참 여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온라인으로 세례식을 진행하면 세례를 받은 걸까요? 아닐까요? 실제 있는 일로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자꾸 제한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기를 어려워 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시죠. "내가 거룩하다고 하는데, 네가 왜 반대하느냐?" 특수한 상황과 특수한 경우에 특수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보여준 기적은 마술사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전에 제우스라고 섬김 받았던 것처럼 지금 바울은 모든 마술사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술사들은 바울의 행동과 주문(예수 이름으로 명하는 것)을 따라합니다. 성령이 이끄는 사람과 따라하는 사람의 차이가 15절에서 나타납니다. 악귀의 힘이 더 세지는 결과죠. 2011년에 청년들과 N국으로 선교 여행을 갔을 때였습니다. 오지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병자와 귀신들린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현지 사역자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머뭇거리길래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오늘 본문) 때문이지?"라고 물었더니 맞다고 합니다. 말씀을 잘 몰라도 들은 것은 있었나 봅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탄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경외'라는 말은 두려움과 존경, 예배의 의미가 다 담겨 있습니다. 두려움은 단순히 무서운 감정 이상의 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탄이 무서워지지 않죠. 세상의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마술사들도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내려 놓습니다. 바로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죠. 말씀이 흥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하고, 말씀의 흥왕을 위해 우리 스스로의 이익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 바울이 보여준 여러가지 역사를 이루어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