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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세대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공로까지 부정하는 것은 4.19의 뿌리인 대한민국 건국사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
柳根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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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등소평은 문화혁명 기간에 모택동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해와 수모를 받았다. 한국 같았으면 등소평 정권이 들어섰을 때 모택동은 아마 부관참시를 당했을 것이다. 그의 초상화가 천안문에서 사라지고 그의 이름이 중국 공산당사에서 ‘악당’으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 정권은 모택동의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분리해서 기록하기로 했다. 등소평은 모택동을 ‘오로지 악당’으로만 그려 놓을 경우 등소평 자신의 역할을 포함하는 중국 공산당 초창기 역사가 송두리 째 ‘악당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4.19 혁명이 나자 시위 군중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허물어 끌고 다녔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 부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치적 출세에 지장이 되는 행위로 치부 되었다. 지금도 대한민국 건국사 일체를 부정하는 친북좌파는 물론이지만, 그렇지 않은 진보파, 자유주의, 보수주의 지식인들까지도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 부분을 평가하는 데는 가급적 인색하게 굴어야 하는 것처럼 돼 버렸다. 그러나 4.19 혁명을 기리기 위해서는 이제 와서도 반드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공로까지 먹칠해 버려야 하는 것인가를, 그리고 그것이 민주화 세력엔들 도움이 되는 것인가를 해방 65주년, 건국 62주년이 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진지하게 음미(吟味)해 봐야 한다. 만약-‘만약’이 부적절할지는 모르지만-이승만 박사까지 대한민국 수립에 반대해서 남북협상을 하겠다며 38선을 넘었다면? 그랬다면 4.19 혁명인들 가능했을 것인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4.19 혁명은 대한민국 헌법을 수호하려던, 대한민국 헌법이라는 갓 파더(god father)의 권위에 의거해서, 대한민국 헌법체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4.19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한민국 헌법의 출현을 지지해야 하고 대한민국의 탄생을 지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대한민국 헌법과 국가를 만든 원훈(元勳)들의 공로를 긍정해야 하고, 그 대표인 이승만 박사의 공로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 자유민주 헌정 체제는 참으로 기막힌 묘리(妙理)를 가지고 있다. 헌법 자체는 이승만 박사 등 사람들의 의지가 만들어낸 피조물이다. 그러나 일단 만들어진 헌법은 이승만 박사를 포함하는 모든 인간들을 묶어 버린다. 이승만 박사는 설마 자신이 주도해서 만든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서 자신의 권좌가 무너지고 자신이 하야를 하게 될 줄은 아마 꿈엔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자유민주 헌정 체제와 김일성 김정일 수령 절대주의 체제가 다른 결정적인 요체다. 대한민국 헌법 체제는 결국 일단 만들어진 이후에는 이승만 개인의 것도, 자유당만의 것도 아닌 야당의 것이기도, 저항언론의 것이기도, 비판적 지식인들의 것이기도, 반정부 대학생들의 것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이승만 세대는 대한민국 자유민주 헌법 체제를 만들었고, 그 손자 세대는 대한민국 자유민주 헌법 체제의 이름으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 시켰다. 이 얼마나 기막힌 묘리인가? 4.19 당일 바리케이드의 양쪽에서 대치했던 학생들과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이라는 구속력에 묶여 있었다는 점에서는 절묘한 중첩성을 보였다는 이야기다. 이승만 대통령과 4.19 세대는 정치적, 국면적(political juncture)으로는 서로 배제(排除)적일 수 있었어도 원추(圓錐)의 뾰족한 출발점-대한민국 헌법이라는 최상위의 객관적 규범의 지배를 받았다는 점에서는 서로 배제적일 수 없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4.19 세대의 부정선거 규탄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이 주도해서 만든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4.19 세대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공로까지 부정하는 것은 4.19의 뿌리인 대한민국 건국사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를 관찰하는 데는 당대(當代)적 관찰과 후대(後代)적 관찰, 근접적 관찰과 성찰적 관찰이 있을 수 있다. 당대적 관찰이란 작용에 대한 즉각적인 반작용 같은 것이다. 자유당 경찰이 평화적인 시위대에 정조준 발포를 하는 순간 군중들이 “저런 나쁜 x들!”하고 분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대인들은 격한 정서로 그런 반(反)헌법적인 관권(官權)의 상징인 이승만 대통령을 원망하고 비난할 수 있다. 아무리 성현(聖賢)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라도, 자유당 경찰이 김주열 군의 이마에 최루탄을 박아 살해하고 마산 앞 바다에 그 시신을 유기한 현장을 보는 순간 이승만 대통령이 대표하던 당시 권력에 대해 즉각적인 분노의 반작용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4.19 세대의 이 같은 당대적 반응은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는다. 그러나 역사는 긴 안목에서도 바라보아야 한다. 후대적, 성찰적 관찰의 필요성이다. 4.19는 먼 옛날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여전한 당대사’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4.19 후 5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는 당대적 근접관찰과 후대적, 성찰적 관찰을 동시적으로 진행시킬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말년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그것으로 그의 건국 공로까지 덮어버릴 경우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의 건국 공로를 간과하면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 남쪽에 있다는 반(反)대한민국 사관(史觀)의 억지와 궤변 앞에서 우리를 무장해제 하는 위험이 발생한다. 분단의 원인은 대한민국 수립에 앞서 38선 이북 지역에서 이미 폭력적으로 강제되었던 소련 점령군 및 그 하급자 김일성의 인민위원회 혁명과 1당 독재 수립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 폭력혁명을 38선 이남까지 확대 하려 했다. 그렇게 되면 남한의 비(非)공산주의자들은 그날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이럴 때 남한만이라도 그 1당 독재 폭력혁명에서 면제 시켜야 하겠다는 결단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비(非)공산주의자들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죽임을 당하겠다는 것밖엔 안 된다. 이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했는가?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이라도 자유총선을 실시해 비(非)공산주의자들의 살 터전, 즉 자유민주 헌법 질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게 이승만 박사의 건국 노선이었다. 4.19의 ‘자유민주’여망은 따라서 이승만 박사가 여망한 대한민국 ‘자유민주’ 헌법 질서와 대칭성 아닌 연속성(continuum) 속에 있다. 이 연속성이 4.19 당일 경무대 앞 바리케이드로 단절되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그 바리케이드의 의미를 김정렬 국방장관으로부터 설명 받는 자리에서 자신이 더 이상 반(反)헌법적 권력의 원천 노릇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때(時)의 뜻(兆)’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내가 책임지고 물러나야”라는 의중을 비쳤다. 병원으로 4.19 부상자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불의를 보고 분노하지 않으면 젋은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4월 26일 경무대를 떠나 바리케이드를 넘어왔다. 부정선거와, 부정선거 규탄으로 끊어졌던 당초의 그와 국민 사이의 헌법적 연속성이 복원되는 순간이었다. 이승만 박사가 주도했던 1948년의 ‘7.17 대한민국 헌법 제정’과 ‘8.15 건국’은 한반도 역사상 전혀 새로운 시작이자 빛나는 금자탑이었다. 부족사회, 봉건왕조, 중화(中華)주의, 식민주의, 파시즘-볼셰비즘 등 현대 전체주의, 쇄국주의, 강제적 집단주의, 전근대적 퇴영을 뛰어넘어 근대(modernity) 문명개화 세상의 대장전(大章典)과 기틀을 마련한 획기적인 파라다임 전환(paradigm shift)이었다. 이 전환은 소련 점령군 사령관 스티코프 중장과 그 하수인 김일성에 대항해서, 그리고 하지 중장이 이끌던 미군정과도 다퉈가면서 이승만 박사가 선도한 한국적 생활방식의 근대주의적 돌파(breakthrough)였다. 4.19 혁명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1948년의 이승만 대통령과 1960년의 4.19 세대는 그래서 자신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만든 자유민주 대한민국 65년사의 긍지(矜持)를 공유하면서, 그 공유가치를 일구어 낸 각자의 정당한 몫을 인정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
[ 2010-08-23, 10:23 ] 조회수 :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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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조선은 단군이 시조, 가야는 김수로, 신라는 박혁거세, 고구려는 주몽, 고려는 왕건, 조선은 이성계, 대한민국은 이승만이 건국의 시조. 국사를 학교에서 제해버리더니 건국시조도 없는 대한민국이 되었네
공감하는 글 입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을 이제는 재 평가하고 그 업적을 기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승만 대통령 개인의 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관한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업적을 부정하는 사고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북한의 사고라 읽힐 수 밖에 없는 북한옹호론자로 봐야죠
그동안 건국대통령을 모르고 잊고 살아 온 까닭은 미국건국역사는 알리면서 한국건국 역사를 숨기는 듯 부정하는 행위처럼 보이는 정부의 잘못도 있군요
이승만 대통령/그는 카리스마가 늘 넘쳤다. 어느 누구에게서 뭘 듣고 사정을 잘 알아본 뒤 움직이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늘 남보다 생각이 넘쳤고, 학식도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 이야기다. 그에게는 일반인이 범접하기 힘든 권위가 있었다. 그가 걸어온 이력(履歷)과 쌓아온 학력(學歷)이 우선 남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은 찾아보기 드물었던 상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주변에서 그런 정도의 학력을 찾아볼 만한 인물은 아주 적었다. 내무장관을 지냈던 조병옥 박사, 총리를 맡았던 장택상씨 정도가 각각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과 영국 에든버러 대학 출신이다. 그가 걸어온 역정(歷程)과 학식, 나아가 인품이라는 측면에서 이 대통령은 가장 큰 어른이었던 셈이다. 그는 전쟁이 터지기 전 대한민국이 첫걸음을 막 떼었을 때 그전까지 한국을 지배했던 미군의 고위 장성, 전쟁이 터진 뒤에 한국 전선으로 이동해 온 모든 미군 고위 장성에게도 ‘상대하기 아주 까다로운 한국 지도자’였다
미군 고위 지휘관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무서운 한국 호랑이’였다. 미군 지휘관들은 한국에 대한 지원 문제를 두고 이 대통령과 말싸움을 벌일 때 늘 긴장해야 했다. “당신들 미국 헌법을 제대로 읽기나 했느냐”면서 미국 헌법 조문을 들이대는 노련한 이 대통령의 공박에 제대로 대답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미군 지휘관들은 부산의 임시 경무대나 서울의 경무대에서 이 대통령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오면 늘 긴장했다. 나이 많은 한국의 대통령, 게다가 학식이 넘쳐 늘 미국의 법조문, 헌법 정신, 미국의 역사와 민주주의를 들이대는 박식한 한국의 대통령을 상대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기총은 “G20 정상회의 등으로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가운데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 안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우남 이승만 박사는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의 기틀을 놓은 건국대통령이지만 그 업적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제대로 돼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건국대통령에 대한 예우와 기념사업은 정치적 입장과 이념적 이해관계를 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바로 세우는 국민적 과제”...http://www.chogabje.com/
한국에서 가르치고 있는 어느 미국인 교수는 우리가 이룬 대단한 업적은 '한(韓)민족'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성취한 것이라고 옳게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번영과 위상은 우리의 민족적 자질 덕분이라기보다는 한반도 남쪽에 거주해온 대한민국 국민이 건국 후 피땀 흘려 이루어낸 것이라는 말이다. 한민족과 대한민국 국민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한 그의 통찰력이 놀랍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17/2010111701969.html?Dep1=news&Dep2=headline1&Dep3=h1_09
자유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누리며 광복 66주년을 맞이함에 이승만 전 대통령께 감사드립니다. 하늘에서도 영혼으로 대한민국이 자유진영으로서 세계에 자유를 전파하시길 고대하실 겁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고마움과 함께 후손의 자유로움을 믿으시고, 편안한 영혼이 되시옵소서
김대중, 노무현때 공무원들 전라도 사람만 뽑았습니다...남로당 사람도 뽑았다는 말있습니다...그 사람들이 다른 지역사람들 다 짤랐다고 합니다....경찰, 공무원, 선생님, 판사, 방송사
“이북동포 여러분 나와 같이 결심합시다. 공산군이 어디서 들어오든지 그것이 소련이건 중공이건 들어오려면 들어오너라. 우리는 죽기로 싸워서 물리치며 이 땅에서는 발붙이고 살지 못할 것을 세계에 선언합시다.” (이승만 대통령, 1950년 10월29일 평양 연설)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을 오늘에 와서 검토해 보면 대단히 뛰어난 정치기술의 하나로 북한의 중·소 군사동맹과 같은 한·미사호방위조약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철승 前 신민당 총재, 1988년 <신동아> 10월호 인터뷰)
“우리는 북한으로 자유를 확산시켜야 한다. 그래서 북한동포를 최악의 독재자로부터 해방하고 각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민국이 주도해 통일을 달성하여야 한다”면서 “이것이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뜻이다. 우리는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뜻에 따라 반드시 북진통일, 자유통일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8년 8월23일자 보도)
한국만 콕 찍어 독립 보장…“카이로선언, 미국 움직인 이승만 작품”, 선언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문구가 포함됐다.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과정을 통해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했다. “카이로선언이 없었다면 한국 독립은 아마 요원했을 것이다. 군국주의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결정할 때까지 한국을 자신들 영토에 남겨두려 했다.” 11월 23일 루스벨트가 장제스에게 한국 독립 문제를 먼저 거론하자 이에 장제스는 수동적·소극적으로 찬성했다.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선과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무시하고 1905년부터 일본의 한국 병탄을 허용한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일제가 105인사건(1912)과 제암리사건(1919)을 일으켜 한국의 기독교도들을 무참하게 박해한 진상을 폭로했다. “이승만은 1942년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를 결성해 워싱턴에서 활발한 로비활동을 펼쳤다. 대부분 독실한 기독교인들로 구성됐다. 한국 독립을 요청하는 진정서에 서명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와 기독교계에서의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루스벨트와 홉킨스에겐 무시 못할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카이로선언과 이승만의 외교독립 활동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백년전쟁’ 같은 불필요한 논란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대한민국 국기법 제1조는 국기법의 목적에 대해 "이 법(대한민국 국기법)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국기의 제작·게양 및 관리 등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기에 대한 인식의 제고 및 존엄성의 수호를 통하여 애국정신을 고양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