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에서 바늘은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 걷고 길은 잡음들로 무성했다. 시큼하거나 혹은 알싸하거나, 그늘이 나무 아래서 고두밥처럼 부글거리며 익어간다. 그 흔한 시월의 나무를 따라 걸어도 아픈 말은 흔하지 않았다. 메뚜기 앞이마 같은 집을 얻었구나, 내 방을 둘러보고 할머니가 말했다. 세상의 끝 어디쯤에선가 번데기들이 평화로운 진자처럼 흔들렸다. 세상을 연민하며 시계들이 일제히 뻐꾸기 소리를 울렸다. 오랫동안 모아온 흠집 난 레코드와 구겨진 수첩은 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걷는다. 이별편지 위에 쓰인 내 이름이, 통합공과금 영수증 위에 찍힌 내 이름이 서글퍼 보였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4.10.18. -
젊음은 찬란했지만 춥고 배고팠습니다. 그때 우리는 “메뚜기 앞이마 같은” 좁은 방에서 언젠가 화려한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날을 기다리며 묵묵히 인내하는 “번데기”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미납 “공과금 영수증”은 쌓이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깊어가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잡음 섞인 음악만 들어도 눈물을 흘릴 수 있었고 “이별편지”에 세상을 다 잃은 듯 서러워할 감수성과 순수함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찬란했던 젊음 위에 세월의 먼지가 쌓여 잡을 수 없는 연인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도 사라지고 나서야 그 시절이 얼마나 빛났는지 문득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서로를 향하는 동안만 구름에겐 이별이 생긴다. 사랑한 후에는 작은 꺾쇠로, 차별받는 후에는 농담의 사전으로,
넌 제비를 뽑았다.
향기 많은 꽃들이 네 머리만큼 자라 벌들을 통에서 꺼내기 시작하면 주방 아줌마는 물이 가득한 욕조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첨벙거리며 후회 없이 바닥을 다 훑고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동물로 숲이 가득 채워지는 날. 여름은 당근의 붉은 뿌리처럼 하나씩 뽑히며 사라지고 있었다. 구석에 서서 작은 귀를 흔드는 것으로 나의 은신술은 완성된다. 여기까지는 내 몸이 기생식물이었을 때의 길. 이제부터의 길은 내가 숙주(宿主)일 때를 향해 열린 곳.
아이들은 분말의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렸다. 색종이접기를 가르쳐주었지만 그애들은 이제야 겨우 시든 튤립을 접기 시작한다. 8자놀이하는 아이들의 7시, 술래는 강을 건너지 못한다. 여자애는 흡혈박쥐처럼 거꾸러 매달려 자기 피를 빠는 단꿈을 꾸었다.
하지만 우리는 너를 잊고 싶지 않아, 나 혼자서 바람에게 그렇게 말해본다. 그날은 왼손잡이용 글러브처럼 오른쪽으로 날아오는 것들과 마주하던 일요일. 우월의 표시로, 연대의 표시로 너는 모자를 벗고 세계관이 없는 제비를 하나 뽑았다. 겨울의 지하에서 여름의 지상으로, 수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