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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전쟁
행 19:21-31
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2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행 19:21-31 / [에베소에서 일어난 소동] 그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에 우선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서 가리라고 마음 먹고는 `그곳에 들렀다가 로마로 가야겠다'고 중얼거렸다. 22) 바울은 먼저 그를 늘 도와주는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먼저 보낸 뒤 자신은 얼마동안 더 아시아에 머물러 있었다. 23) 바로 그무렵 에베소에서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24) 그 소동은 데메드리오라는 은세공업자가 일으킨 것이었다. 그는 많은 직공을 두고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큰 장사를 벌여 온 인물이었다. 25) 그가 자기 직공과 동업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말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업으로 먹고 삽니다. 26) 그런데 여러분이 이미 듣고 본 바와 같이 저 바울이라는 작자가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는 통에 우리의 장사는 이제 말이 아닙니다. 여기 에베소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가 이런 실정입니다. 27) 물론 나는 이런 형편에서 우리 사업에 대한 전망이나 수입이 줄어든다는 것만을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위대한 여신 아데미 신전이 그 영향력을 잃게 되고, 이 아시아 지방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모든 사람들이 장엄한 여신 아데미를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28) 이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 하고 소리 지르기 시작하였다. 29) 시가에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다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재판에 붙이려고 강제로 끌고 원형극장으로 몰려갔다. 30) 바울이 이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제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말렸다. 31) 바울의 친구인 그 지방의 로마 관리들도 바울에게 사람을 보내 안에 들어가면 위험을 당할테니 제발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반응을 요청합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전파한 복음은 회심을 일으켰는가 하면(11-20), 대적하기도 합니다(23-31). 복음은 태도를 변화시키고 생활방식을 바꾸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탄의 방해전략도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까지 복음으로(21-22) 바울은 복음으로 로마까지 변화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는 당시 문화와 권력의 핵심부였기에 로마가 변해야 문화가 바뀐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작정하여”로 번역된 말은 ‘영으로 이끌리어 결정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21). 바울의 로마행에 대한 의지는 그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로 말미암은 소동(23-31) 사탄이 잡고 있는 세상의 문화는 바울이 계획한 복음으로의 변화를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26)고 가르친 것에 대한 데메드리오의 분노는 바울의 메시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상으로 가득 찬 아테네, 고린도, 그리고 에베소에서 바울은 이 메시지를 강조했습니다. 바울의 선포는 타협이 없었으며 분명했습니다. 바울의 선포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되자(11-20, 참고) 우상을 만들어 많은 이익을 챙기던 자들에게는 경제적 손실로 다가왔습니다. 이에 데메드리오는 시민들을 선동합니다(25-27). 시민들이 외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에서 ‘크다’는 것은 아데미 여신의 명예 회복이라는 종교적 차원의 의미이며, ‘에베소 사람의’라는 말은 그들의 시민의식을 부추겨 분노를 일으키자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분노는 항상 그럴듯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 앞에 사단은 합리적 세상문화를 앞세워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를 내어주면 다 내어주는 것임을 사단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기를 구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물든 문화가 흘러갈 때 세상은 진정한 생명을 잉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이 나라의 문화가 그리스도의 문화로 변화되길 기도합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의 방식들이 무엇인지 떠올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화로 바뀌어지길 기도합시다.
신앙은 생각의 싸움입니다. 나쁜 생각(육신의 생각)과 하나님 생각(영의 생각)의 싸움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생각으로 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내 생각을 타고 들어옵니다. 내일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까? 그것을 기대하는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호크마 주석
=====19:19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 '마술'을 뜻하는 헬라어 '페리에르가'(* ) 는 문자적으로 '주변 일' 이라는 의미로서 주된 일을 제외한 '쓸데없는 일'을 가리키거나 자신의 일이 아닌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누가가 '마술'을 '쓸데없는 일'로 표현한 것은 공허한 것을 섬기는 우상 숭배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에베소에 많았다고 하는 것은 그 도시 자체가 영적인 기갈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며 또 이들 중 많은 사람이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에베소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 책을...불사르니 -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악된 행동을 회개하고, 자신들의 변화된 삶을 공개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마술에 관계된 모든 서적들을 불살랐다. 이 책들은 주문이나 부적 등 미신적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파피루스나 양피지(parchment)에 기록된 것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책들은 '에베소의 책들'(Ephesia Grammata)로 추정된다(Zahn). 한편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을 불태우는 것은 그 내용을 공식적으로 배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렘 36:23). 따라서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공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과거 자신들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은 오만 - 에베소에는 대부분 헬라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은 오만'에 대한 화폐 단위는 아마도 '드라크마'(Drachma)이었거나 아니면 로마의 화폐 단위인 '데나리온'(Denarius)이었을 것이다. 이 두 화폐의 가치는 거의 같은 것으로서 당시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에 해당되었다. 따라서 이를 오늘날 액수로 환산(換算)한다면 약 800만원 정도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 본다 하더라도 당시 에베소에 미신이나 마술이 얼마나 극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
=====19:20
주의 말씀이...세력을 얻으니라 - 헬라어 본문에서 본 구절의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어 주의 말씀이 에베소에서 지속적으로 흥왕하여 모든 거짓되고 미신적인 마술들을 물리치며 많은 사람을 회개시켰음을 나타낸다.
=====19:21
이 일이 다 된 후 - 바울이 에베소에서 행한 총체적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Haenchen) 또 어떤 학자들은 이 말이 10절에서 언급한 2년의 기간에 있었던 사역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endt, Loisy, Lenski, Bruce, Neil). 이 견해대로라면 본 구절 '에베소에서 머물기로 작정된 날이 다 된 후'라는 의미를 지닌다. 문맥상 이 해석이 더 무난하리라 본다.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 본문에서 전혀 언급이 없지만 당시 팔레스틴은 기근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1:27-30). 그래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러 연보를 모아 기근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했을 것이다(롬 15:31;갈 2:8-10). 여기서 '경영하여'라는 뜻의 헬라어 '에데토 엔 토 프뉴마티'(* )는 직역하면 '성령 안에서 결정하였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바울이 그러한 지방으로 가고자 한 것은 성령의 지시에 의해서 결정된 것임을 시사한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결심한 것은 로마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자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유럽을 복음화하기 위해 로마를 전초 기지로 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라고 할 만큼 번성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기에 선교 효과가 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도나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한 곳에는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롬 15:20). 그래서 그는 이미 다른 전도자들이 교회를 세우지 않은 유럽으로 시선을 돌려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얼마 후 아가야와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에게 전달한 후(롬 15:26) 죄수의 몸으로서 로마를 방문해 그가 계획했던 바를 이루게 된다(28:16).
=====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마게도냐로 보내고 - 저자 누가는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돌아와 고린도에서 합류한 이후(18:5) 디모데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라는 언급을 보면 그는 분명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머물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동안 디모데를 고린도로 파송하여 봉사하게 하였다(고전 4:17;16:10, 11). 한편 '에라스도'라는 이름은 본서에서는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딤후 4:20에서 그는 고린도 교회에 특별한 관심을 둔 바울의 친숙한 동료로서 소개된다. 아마도 그는 롬 16 :23에 언급된 고린도의 재무 담당자인 에라스도와 동일인일 것이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했던 디모데와 함께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 벤트(Wendt)는 여기서 바울이 에베소가 아닌 아시아의 다른 곳에서 얼마간 더 머물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쟈안(Zahn)은 26절을 근거로 바울이 그의 조력자들을 마게도냐에 보낸 후 에베소에서 가까운 다른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혹자는 23절을 근거로 바울이 에베소에 계속 체류했다고 반박했다(Haenchen). 그러나 본절에서 누가는 바울이 어떤 지역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먼저 보낸 후 좀더 아시아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어느 견해가 옳은지 결정하기 힘들다. 다만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선동할 때 '에베소'란 말을 게속 강조적으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바울이 에베소에 계속 머문 것으로 추정된다.
=====19: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소동이 있었으니 - 여기서 '그 때쯤'이 정확히 언제쯤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에 대해 다음 몇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21절의 '이 일이 다 된 후'와 거의 비슷한 시점. 이는 바울이 유럽으로 떠날 계획을 실행에 옮길 시점을 의미한다.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낼 시점.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먼저 보내게 된 것은 데메드리오의 선동이 있었던 때문인 듯하다. 즉 바울은 디모데와 에라스도와 함께 유럽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려고 작정했다가 데메드리오의 소동으로 인해 두 사람만 먼저 보내고 자신은 그 소동을 잠재운 후 떠나게 된 것이다(20:1). 따라서 의 추측이 더 타당하다. 한편 '이 도'란 뜻의 헬라어 '테스 호두'(* )에 대해 로이지(Loisy)는 '호두' 대신에 원래는 이 곳에 '데우'( ) 즉 아데미를 나타내는 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소동'은 '이 도로 인하여'라는 표현으로 미루어보아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일어난 소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24
데메드리오...아데미 - 에베소의 아데미(Artemis) 여신은 근동 지역에서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모신(母神)이었다. 사람들은 이 아데미의 신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이 신상은 여러개의 유방을 지닌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신상은 원래 운석(隕石)이었는데 그 모습이 유방을 많이 가진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경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데미의 신전은 에베소 북동쪽 약 2.4km지점에 있었는데 가로와 세로가 각각 120m, 60m나 되어 고대 세계의 7대 블가사의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당시 수많은 여행자들이 이 신전을 방문하려고 원근 각처에서 몰려들었다. 신전 주변에는 여행자들을 대상으로 음식을 팔거나 숙소를 제공하며 아울러 제물과 기념품을 파는 장사꾼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그 중 가장 수입이 좋은 장사는 데메드리오 같은 자들이 취급했던 아데미의 은감실 즉 모조 은신상을 제조해서 여행자들에게 파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모조 은신상을 기념품이나 서원의 헌물 또는 호신품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로 많은 사람들, 심지어 마술사들까지 개종함으로 자연히 우상 숭배의 악습이 점차 폐지되어 은장색(은세공사)들의 수입이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은장색 조합의 우두머리는 기독교를 대항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소동을 통해 그들은 사람을 선동하여 바울의 기독교 선교를 저지함과 동시에 아데미 여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더욱 더불러 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19:25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 데메드리오는 단순히 은장색들만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아데미 여신상과 관련을 맺고 생계를 유지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그들은 은장색들 외에 적갈색 진흙으로 작은 신상을 만드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은장색들과 함께 여행자들을 상대로 대단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6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신이 아니라 하니 -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라는 말은 바울이 아시아 전 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아마도 에베소를 중심하여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시아 전역에 소문으로 번져갔거나 바울을 통하여 믿는 신자들이 아시아 각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의미로 추측된다. 그리고 바울이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미 아레오바고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가르친 내용이다(17:29). 대체로 에베소에서는 5월 무렵에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대축제가 벌어졌는데 이 축제는 아시아 전역에서 가장 큰 축제로서 이 축제에 인근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본문에서는 은장색들이 이 축제가 곧 임박했는데 바울의 선교 활동은 갈수록 확장되어만 가니 매상이 줄어들게 되지 않을까 염려한 것같다(Lenski).
=====19:27
영업만...떨어질까 하노라 - 데메드리오는 사람들을 부추기고 선동하기 위하여 몇 가지 합리적 이유들을 제시한다. 데메드리오의 주장과 관심은 아데미의 위엄과 권위에 있는 것 같지만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신의 이익에 있었다. 한편 아데미 숭배가 세계적이라는 데메드리오의 말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같다. 왜냐하면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모두 32개소에서 아데미 숭배의 흔적이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Wernicke).
=====19:28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 이는 우상 숭배자들이 의식을 거행할 때 신을 찬양하기 위해 쓰이는 상투적(常套的)인 말이다. 서방 사본(Western Text)과 함께 몇몇 사본에서는 본구절 바로 앞에 '거리로 뛰어나가'라는 말을 삽입시키고 있다. 만일 이러한 사본을 따른다면 이길은 에베소의 중심부를 지나고 있는 아카디안대로(Arcadian Way)일 것이다. 이 대로는 에베소의 항구로부터 피온(Pion) 산의 기슭에 있는 대극장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외치며 종교적 열정을 구실로 삼아 에베소 성읍을 소동 가운데 몰아넣으려고 했을 것이다.
=====19:29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연극장으로 - 가이오는 더베 출신이고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바울과 함께 여행한 동료들이었다. 소동을 일으킨 무리들이 어떻게 해서 이 두 사람을 붙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아무튼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그리스도인 두 명을 붙잡아 노천 극장으로 끌고 갔는데 이 노천 극장은 에베소 동편에 있는 것으로서 약 2만 4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건축물이었다.
=====19:30
바울이...들어가고자 하나 - 바울이 살벌한 기운이 넘치는 현장 속으로 달려들어가고자 한데 대해 혹자는 바울의 신앙적 의리와 용기에 초점을 맞춘다. 즉 바울이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속수 무책으로 가만히 있는 것을 비겁한 도피라 여기고 폭도들 앞에 자신을 나타내 동료들에게 자신이 신뢰할 만한 형제임을 입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Bauernfeind). 이러한 측면 외에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일찍이 여러 로마 관리들에게서 호의를 받았기 때문에 폭도들을 진정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R.N. Longenecker, Zahn).
=====19:31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 - 아시아의 관원들은 대체적으로 고귀하고 부요한 가문 출신이었다. 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와 로마의 여신(女神)에 대한 숭배를 조장하는 것이 이들의 주임무였다. 해마다 아시아 관원이 그 관할 지역을 위하여 선임되었고 그 인원이 추가되기도 했다. 이 아시아 관원들의 동맹은 정치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종교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관원들 중에 몇몇이 바울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바울을 염려하여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는데 이는 당시 로마의 정책이 기독교에 대해서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F.F. Bruce).
< 설 교 >
주님의 일을 경영한 사도 바울
김명혁목사 / 행 19:21
저는 최근에 새벽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명에 붙잡혀서 달려가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감동과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특히 행19:21 말씀을 읽으면서 깊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저는 여기 ‘경영’이란 말을 새롭게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안에는 ‘경영’이란 말이 많이 유행하고 있고 인기를 얻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강대학교에는 ‘경영대학원’이 있고 대학과 기업들에서는 ‘최고경영자과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최고경영자’를 CEO 즉 chief executive officer라고 하는데 기업의 최고 책임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CEO는 대개 회장이나 사장이 맡고 있는데 기업의 방침과 계획을 결정하는 등의 책임을 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기업이나 사업을 가장 효과적으로 경영하여 기업과 사업을 성공시키는데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기업가나 사업가뿐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개인의 삶이나 자기 가정의 삶이나 자기 자녀들의 삶을 가장 효과적으로 경영하여 성공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자기 가정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자기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서 어릴 때부터 유학을 보내는 등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성공을 기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자기의 삶을 경영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그런데 사도 바울의 삶의 경영은 우리들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자기의 건강을 위한 경영도 아니었고, 가정의 행복을 위한 경영도 아니었고, 자녀들의 성공을 위한 경영도 아니었고, 자기의 기업이나 사업을 위한 경영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경영이 무엇을 위한 경영이었으며 어떤 방식의 경영이었는지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사도 바울의 경영은 주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경영이었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 사울은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 받은 후부터는 자기의 삶을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경영을 했습니다. 사도행전20장 24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또는 직접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서 그가 이루어야 할 사명을 다짐하시곤 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결국 사도 바울은 주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의 삶을 경영하며 계속해서 달려갔습니다.
2. 사도 바울의 경영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경영이었습니다.
우리 나라 성경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라고 번역했지만 영어 성경은 대부분 “바울이 성령 안에서 또는 성령에 사로잡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라고 번역했습니다. 킹 제임스 역본은 Paul purposed in the Spirit (KJV) 이라고 번역했고 개역본은 Paul resolved in the Spirit (RSV) 이라고 번역했고 리빙 바이블 역본은 Paul felt impelled by the Holy Spirit (The Living Bible)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영은 주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경영이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경영이었고 성령에 사로잡힌 경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교회를 떠나 제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도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서 갔고 제2차 선교여행을 진행할 때도 성령에 이끌려서 갔고 제3차 선교여행을 진행할 때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진행했습니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행13:4).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기늘”(행16:6). “바울의 몸에서 손 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행19:12).
3. 사도 바울의 경영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경영이었습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사도 바울의 경영은 철두철미 주님의 선교명령에 따라서 땅끝으로 달려가는 경영이었습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은 이방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당시 악의 중심부인 로마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사도들과 자기에게 분부하신 분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사도 바울은 제3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쓰면서 자기의 소원과 경영을 다름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0,13-15). 사도 바울의 경영은 지금으로 말하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와 북한을 향해서 달려가는 야만이나 어리석은 자들에게로 달려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경영이었습니다.
4. 사도 바울의 경영은 곳곳에 흩어져 성도들을 돌아보는 경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영은 목적만을 위한 경영이 아니고 과정도 중요하게 여기는 경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달려가는 선교여행의 길목마다 며칠씩 일주일씩 또는 몇 달씩 머물면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돌아보고 저들을 격려하며 저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행20:1-3).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20:6,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행20:17,18).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20:36-38).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쌔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행21:1,3-8).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행21:17-2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0,31). 이렇게 볼 때 사도 바울의 경영은 사역만을 위한 경영이 아니었고 사람들을 돌아보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사랑한 사람 중심의 경이었습니다.
5. 사도 바울의 경영은 고난과 수고와 핍박과 죽음의 위험을 개의치 않는 모험적인 경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영은 안일이나 안주나 노후대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경영이었습니다. 은퇴 후에 좋은 집과 좋은 자동차를 마련하고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편안하게 살려는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과는 정 반대의 경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전에는 안주나 안일과 평안과 같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과 사역과 경영의 사전에 등장한 단어들은 고난과 환란과 수고와 핍박과 결박과 죽음이란 단어들이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고린도후서에는 사도 바울이 몸에 지녔던 고난과 수고와 핍박의 흔적들을 묘사하는 단어들로 가득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고행주의자나 자학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수고와 핍박을 통해서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기뻐한 십자가의 사람이었고 승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0).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결국 사도 바울의 경영은 자기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는 십자가 짊어짐의 경영이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6:17).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주님의 일을 경영한 사도 바울의 경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을 경영합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도 경영하고,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한 삶도 경영하고, 자기 자녀 손들의 성공을 위한 삶도 경영하고, 자기 사업의 성공을 위한 삶도 경영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를 위한 삶을 경영하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가 조금이라도 주님의 일을 위한 경영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경영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경영이 되기를 바랍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경영이 되기를 바랍니다. 곳곳에 흩어져 성도들을 돌아보는 경영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과 수고와 핍박과 죽음의 위험을 개의치 않는 모험적인 경영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의 경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돌리는 멋진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비전
행 19:21-22 / 김영규 목사
이 일이 다 된 후
오늘 말씀의 제목은 바울의 비전입니다. 본문은 에베소 사역이 끝날 무렵에 바울이 어떤 비전을 가졌는지 간략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짧은 언급이지만 바울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본문 서두를 보세요. “이 일이 다 된 후” “이 일”이란 바울의 에베소 전도를 말합니다. “다 되었다”는 말은 완성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에베소 전도가 끝났습니다. 큰 과제를 완성했습니다. 대단한 업적입니다. “다 되었다”는 말은 헬라어로 “plhrovw”(플레로오)인데, 가득 채워지다, 충만하다, 충분하다, 완성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문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After these things were ended”(KJV) “When these things were accomplished” (NKJV) “Now after these things were finished”(NASB) 바울의 에베소 전도는 목표한 만큼 충분하게 달성되었습니다. 대 만족의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미 15년 가까이(AD45-59) 전도에 헌신했습니다. 그동안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수 많은 도시들을 방문했고,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에베소 전도는 바울 전도활동의 절정입니다. 이 시점에서 전도를 멈춘다고 해도 바울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여전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21)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비전은 두 가지입니다. 단기적으로는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는 일입니다. 장기적으로는 로마를 방문하는 일입니다. 그 상세한 부분은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은 삶을 정지시키지 않습니다. 항상 앞으로 나아갑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에 떠내려갑니다. 죽은 인생은 과거를 향해 갑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생은 매순간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이 바울의 인생관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요즘 사회적 현상 중의 하나는 조기 은퇴입니다. 공무원은 60세 정년이 보장되어 있습니다만, 일반 회사들은 50대, 40대에 퇴직합니다.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80세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은퇴 후 여생이 30년, 40년입니다. 과거 20대에 인생을 설계했듯이, 이제도 새로운 미래에 대해서 설계를 해야만 합니다. 은퇴했다고 과거 지향적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시각입니다. 어디를 바라보고 살 것인가? 과거를 바라볼 것인가, 미래를 바라볼 것인가? 과거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화려했던 과거의 업적이나 지위에 집착합니다. 내가 그래도 이런 큰 업적을 세웠지! 내가 대기업의 임원이었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과거만 바라보는 “왕년” 인생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남의 인생을 기억에 담지 않습니다. 나의 과거 업적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신분을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이 처한 상황은 항상 변합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다른 상황에 있습니다. 미래도 마찬가집니다. 바울을 보세요. 바울은 어떤 과거 업적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다만 다가오는 앞날을 새롭게 설계할 뿐입니다.
인생 설계를 할 때에 중요한 지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이고, 둘째는 내 인생의 최대 행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와 내가 추구하는 행복은 서로 상충된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면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표를 따를 때에 최대의 행복이 보장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불행하게 사는 것을 원하실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목표와 방식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를 수 있을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삶이 개인 중심이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공동체 중심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고 누리도록 하신 것이 다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이 최고의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남을 돕고 함께 즐거워 할 때라고 합니다. 사람은 남을 도울 때 정신적으로 최고의 행복과 만족을 느낍니다. 억만금을 가졌다 해도 인간관계가 나쁘면 불행합니다. 돈 많은 사장님, 회장님 중에 자살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가난해도 가족들이 오순도순 함께 하면 행복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 중심으로 인생 설계를 합니다. 돈을 얼마나 준비하면 앞날이 행복해질까? 잘못 된 생각입니다. 돈은 필요한 것이긴 해도,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 적다고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여생의 행복을 원한다면 돈 중심의 설계를 하지 마세요. 어떤 일을 위해 살 것인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먼저 삶의 목표와 방식을 설계하세요. 바울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표를 찾았습니다. 동족을 구제하는 일,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 모두가 주님이 주신 목표입니다. 내 인생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생 설계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하나님! 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앞을 바라보는 인생의 비전입니다. 남은 생애를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설계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첫 번째 비전 예루살렘 교회 구제
바울의 첫 번째 비전은 예루살렘 방문 계획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21-22)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려고 한 것은 유대인들을 구제하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지역에는 잦은 흉년이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 중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에서 특별한 모금을 했습니다. 본문에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미리 마게도냐로 보낸 것도 모금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바울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15:25-27)
유대인과 바울의 관계는 결코 좋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심한 경우는 돌로 쳐 죽이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만일 바울이 감정적으로 대했다면, 동족에게 반감을 품었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나쁜 면보다는 좋은 면을 평가했습니다. 즉, 유대인에게서 복음이 나왔습니다. 유대인에 의해서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빚진 사람들입니다. 금전적인 빚을 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해주고 구원받게 했습니다. 지옥 갈 사람을 천국 가게 했습니다. 이보다 큰 빚이 어디 있습니까? 이방인들은 유대인에게 영적인 채무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물질로 갚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북한 동포들을 생각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북한 정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얄미운 짓거리만 골라서 할 수 있습니까? 온 백성이 굶어 죽는데도 강성대국이니 뭐니 하면서 큰 소리만 뻥뻥 칩니다. 도와주면 고분고분해야 하는데 오히려 행패를 부립니다. 세계 역사를 거슬러 점점 백성을 탄압합니다. 수십만 명을 정치범 수용소에 가두고 함부로 처형합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정권이 미워서 백성들까지 굶어죽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억지로라도 바울의 심정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대한민국의 성도들은 북한 동포에게 약간의 빚이 있습니다. 한 때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시민들 대다수가 예수를 믿을 정도로 부흥했던 곳입니다. 6.25 전쟁 후에 그 많은 성도들이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가장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신앙의 유산을 갖고 내려와 남한에 영적으로 많은 혜택을 줬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북한 동포들에게 영적인 빚을 일부라도 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 도와야지요. 요즘 아이티 지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바다 건너 다른 나라를 도와주면서 동포를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금년부터 작은 일이지만 탈북자 정착 지원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북한 체제 돌발 사태에 대비하여 이런 저런 준비도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들도 동족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 비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교회 구제는 교회 구제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구제할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 구제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교회 공동체는 자체 구성원을 구제하는 일부터 충실히 해야 합니다. 최초 교회는 성도 구제를 중요 과제로 삼았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구제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경제적 도움의 제일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신26:12)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신16:14) 레위인은 오늘날로 하면 성직자를 비롯한 교회 직원들입니다. 세상에서 생업이 없기 때문에 교회가 책임져야 합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는 경제력이 전혀 없어 생계가 곤란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물론 생계를 책임져야 될 첫 번째 당사자는 가족과 친족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니라”(딤전5: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약2:15-16) 자기 가족, 자기 친족, 형제자매는 당사자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돌아볼 가족도 없고, 친족도 없고, 형제자매도 없는 경우는 교회 책임입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원칙에 따라서 구제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2:44-45)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행4:34-35)
오늘 여러분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우선 가족, 친족을 돌아보는 비전을 가지세요. 어떻게 하면 가족을 더 행복하게 할까? 그리고 교회 안에서 서로 돌아보는 일, 구제하는 일에 헌신하세요. 교회는 큰 의미에서의 가족입니다. 세상 혈연은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세상 떠나는 날까지 함께 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성도들은 혈연과 다른 의미에서 영원히 함께 갈 가족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돌아보는 일과 교회를 돌아보는 일은 우리의 중대한 과제입니다.
바울의 두 번째 비전 로마 방문
바울의 두 번째 비전은 로마 방문입니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입니다. 바울은 일찍부터 이 제국의 심장부에 복음의 깃발을 꽂으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황제 앞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황제가 믿으면 백성들도 믿게 할 것 아닙니까? 이런 구상은 바울의 뜻이기 전에 주님의 뜻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행27:24) 바울이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겠노라고 탄원한 것은 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황제에게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에 갔다가 체포당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라 감옥에서 2년간 갇혀 있었습니다. 그 2년 동안 여러 차례 최고 지도자들 앞에서 심문을 당했습니다.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 총독 벨릭스, 총독 베스도,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와 버니게 등등. 이러한 심문은 바울을 심문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법정에서 헤롯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26:28)
바울의 비전은 로마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더 멀리 스페인까지 마음에 두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바울의 최종 목적지가 로마가 아니라 스페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결코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집을 짓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 로마는 이미 복음이 전파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굳이 거기에 오래 머물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최종 행선지가 서바나, 즉 스페인이었다는 사실은 바울 스스로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롬15:23,28) 바울 당시 스페인은 로마 제국의 서쪽 끝입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동쪽 끝에서 시작하여 서쪽 끝까지 관통하기를 원했습니다. 요즘도 아시아와 유럽을 관통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하물며 바울 당시에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은 황당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꿈을 가졌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 여정은 어디까지 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유대입니까? 사마리아입니까? 땅 끝입니까? 바울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당대에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바울이 볼 때에 스페인은 곧 땅 끝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끝까지! 요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바울의 스페인 여행은 낭만적인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자기가 살던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스페인을 바라본 것은 죽음을 각오한 것이었습니다.
좀 더 멀리 보세요. 하루살이는 하루 밖에 내다보지 못합니다. 여름철 매미도 한 주간 노래 부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영원을 사는 존재입니다. 이 땅의 삶은 영원으로 가는 길목일 뿐입니다. 좀 더 멀리 보세요. 긴 여정의 인생에서 내가 이 땅에서 할 일이 무엇인가?
저도 이제 우리 나이로 60이 되었습니다. 축하해 주세요.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내 자신을 보았습니다. 요즘 건강 문제로 약간은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60부터입니다. 스스로 늙었다는 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늙었다는 증표가 뭡니까? 건강 문제입니까? 퇴직 문제입니까?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늙었다는 증표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싫어합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합니다. 아무리 좋은 복잡한 것은 싫어합니다. 뭐든지 하던대로, 종전대로 하려고 합니다. 과거 지향적입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삽시다.
새로운 도전의 걸림돌은 고난입니다.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 자체가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고난을 감당할 각오를 하세요. 힘들지 않은 도전은 없습니다. 새로운 비전은 언제나 새로운 시련을 동반합니다. 그래도 새로운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수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잠시 석방되었다가 다시 붙잡혀 네로 황제에게 처형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전도 당시에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일을 중단했나요? 유대인들이 괴롭힌다고 유대인 전도를 중단했나요? 이방인들이 외면한다고 이방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중단했나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바울의 도전은 계속되었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앞으로 전진입니다. 오늘 내가 가야 될 로마는 어디입니까?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아시아 복음화를 위하여
이필재 목사 / 행 19장 21~32절
오늘 성경말씀의 배경을 보면 바울 사도께서 아시아 전도 여행을 다니다가 일어난 한 소요사태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바울을 고소하는 말입니다. 이 웬 문제아가 하나 나타나서 아시아 전부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 때문에 우리가 여태까지 잘 믿고 있는 아데미 신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있으니까 이 문제아를 없애야겠다라고 바울의 선교 여행을 핍박하고 있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시아 전부를 통하여 허다한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 때문에 아시아가 다 시끄럽다.” 이런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지금 세계 지도의 아시아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부분을 옛날에 소아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주변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시아라고 말하면 북부 아시아, 남부 아시아,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극동 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전체의 광범한 지역을 아시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처음에 바울은 아시아 복음화를 목표로 했습니다. 열심히 선교를 하는데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라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유럽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 가서 빌립보 교회를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유럽 전도를 했기 때문에 유럽이 먼저 복음화된 것입니다.
만약 그때 바울의 발걸음이 아시아로 향했다면 아시아가 유럽같이 되었을 겁입니다. 우리 기독교 역사가 2천년인데 유럽의 웬만한 나라들은 다 기독교 역사가 2천년입니다. 우리나라는 2백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더군다나 개신교는 1백년이 조금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늦게 기독교 복음이 들어왔는가 우리가 역사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가 변했습니다. 아시아가 세계무대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세계 모든 문제가 미국과 소련의 양극화였습니다. 이제는 소련의 자리에 중국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중국은 세계 최대 외환 보유국이 되었고 세계 제2의 상품 수출국이 되었으며 과학 발전은 세계 3위를 차지하는 나라로 변했습니다. 이미 일본은 중국보다 앞서 오래전부터 세계 2위의 자리를 막강하게 확보하였습니다. 그 틈바구니에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대한민국의 위치는 대단히 성장해서 이제는 G20에 넉넉히 자리를 확보함으로 내년도 G20 회의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가 세계 중심에 서게 된 것은 기쁜 일입니다. 지리적으로 평가하면 예수님도 바울도 아시아인입니다.
그런데도 아시아의 복음은 아직도 아시아 전체 인구에 7퍼센트 미만이 될까 말까한 숫자입니다. 저는 바로 이 문제에 우리 대한민국 교회의 갈 길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서 노력할 나라가 아시아에서 대한민국 밖에 없습니다. 일본은 기독교 복음이 한국보다 훨씬 먼저 들어갔지만 일본 교회는 1퍼센트가 안 되는 교인 숫자가 됨으로 세계 선교에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중국은 그동안 공산주의 이념에 의해서 기독교 박해 역사를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선교는 고사하고 그 나라 자체 교회 발전도 힘이 들었던 역사를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아시아는 세계 전체 인구의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을 제외하고는 선교를 할 수 있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남부 아시아와 동남아, 일본까지 불교가 오랜 역사에 굳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또 중국의 공자 사상이 유교라는 이름으로 종교화 되면서 한국 사회를 500년 이상이나 점령하였습니다. 서남아시아는 유대교가 기독교 복음의 확산을 방해해서 어려움을 겪어서 이 아시아는 아주 복음이 캄캄한 지역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성경의 장소는 에베소 소아시아 지방인데 소아시아 복음의 확산이 어려워졌던 이유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신전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을 고소하는 이유가 아데미 여신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복음 전도에 가장 큰 걸림돌은 무당 종교였습니다. 5천년 역사에 가장 뿌리 깊이 박힌 민속 신앙이 무당 종교라서 누구든지 인생의 문제는 무당에 가서 물어봤습니다.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동네마다 무당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인생의 문제를 무당에게 가서 점을 쳐서 인생의 갈 길을 정했었습니다. 무당의 능력은 궁중까지 세력을 뻗쳐서 궁중 무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궁중 무당이 점을 쳐서 국가의 갈 길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자기 후임 왕을 선택하는 과정을 보면 무당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후처의 소생 막내를 내정했다가 이방원의 반란에 죽게 되는 역사를 봤습니다. 또,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고 사회적 엘리트가 되었어도 인생의 문제가 닥치면 무시 못 하고 무당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점을 쳐서 운명을 결정하는 그러한 문화가 아주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는 이 아데미 신전이 그런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성경말씀이 쓰이게 된 것입니다. 아데미 신전이 얼마나 웅장했느냐 하면 솔로몬 성전의 34배입니다. 대리석 기둥 120개가 있고 길이가 425척이며 넓이가 120척, 높이가 60척입니다. 그리고 고대 미술의 정수를 모아서 조각과 벽화를 그려서 놀라우리만치 정교한 건축물입니다. 건축물이 너무나 웅장하고 섬세하게 잘 되어 있어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바로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직공들과 함께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데미 신전의 모형을 조그맣게 만들어 파는 겁니다. 사람들이 집집마다 하나씩 사가지고 자기 집에 신으로 모셔두고 아데미 신을 섬기는 일을 했는데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느닷없이 하나 나타나서 “이것은 다 불필요한 일이다. 이것은 다 어린아이 장난감이지 무슨 신이냐? 신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고 그 하나님을 소개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런 일을 벌이니까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우리가 여태까지 인생의 문제를 잘못 논했다. 아무것도 아닌 장난감을 가지고 우리가 복을 달라고 빌었다.” 그래서 장사가 잘 안되고 아데미 신의 권위도 떨어지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바울이 아시아를 다 뒤집어엎고 있으니까 바울을 아주 많이 핍박했습니다. 아시아에서 핍박을 당한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핍박을 많이 받았는지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고 디모데에게 편지한 말 가운데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일을 네가 아나니”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사도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기록을 해서 어디로 보내고 있습니까?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냅니다. 또,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베드로가 “비두니아와 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낸다.”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아시아에서 얼마나 박해가 심했는지 아시아의 복음의 역사가 캄캄하게 되어서 아시아는 지금 미신의 나라가 되고 유럽이 복음화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여행할 때 영적 싸움이 없습니까? 저는 동남아를 여행할 때 항상 영적 싸움을 합니다. 어디를 가나 우상이 가득하니까 영적 싸움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현실에 아시아 대륙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먼저 아시아 대륙의 많은 국가들은 지난 몇 십 년 동안에 겨우 독립을 한 약소국가입니다. 그래서 오랜 역사 동안 대부분 식민지로 살아온 것이 아시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25개의 나라가 독립했고, 나머지 나라는 그 이후에 독립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시아의 나라들은 거의 다 식민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물론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1940년대에 한국을 비롯한 12개 나라가 독립을 했고 50년대에 와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60년대에 와서 쿠웨이트를 비롯해서 7개국이, 70년대에 들어서서 바레인을 비롯한 4개국이 독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인도네시아로부터 동티모르 등이 독립을 하였습니다. 모두가 식민 통치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확산이 아주 어려워졌습니다. 아시아는 일찍이 고대 3대 문명의 발상지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든가 중국 황허 강 지역의 문명이라든가 인도의 문명이 다 아시아권 아닙니까? 그런데 왜 유럽보다 발전이 늦어졌는가? 과학 기술의 발달과 동양인의 마음이 연결되지 못한 이유 때문에 과학에 뒤떨어진 불행한 역사를 지나간 세계 동안 살았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일본이 가장 먼저 발전을 했는데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서구의 과학 기술을 먼저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보다 앞서 선진국이 된 것입니다. 중국은 70년대에 와서 어쩔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해서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아시아의 과학 기술 발달이 늦어졌는가? 우리 동양인의 지혜는 관찰과 분석에서 지식을 얻고자 하는 과학적 사고가 아닙니다. 마음부터가 다릅니다. 명상에 의한 예지를 삶의 기초로 삶고 자연 속에서 호흡하며 마음의 세계에서 살기를 좋아했던 것이 우리 동양인의 마음입니다. 무엇을 개척해서 새롭게 만들고 파헤치고 이런 것을 싫어하고 그냥 자연에 순응하면서 생긴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동양인의 마음이었습니다. 서구 사람들이 도전적이고 진취적인데 비해서 동양인은 조금은 자연 순응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동양인들은 달을 정복하지 않았으면 더 행복합니다. 이태백이 놀던 달을 그냥 두지 그래서 계수나무로 집을 짓고 천년만년 살고 문학의 세계에서 달을 그리워하면서 소원을 빌면서 달 속에 묻은 아름다운 정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괜히 쑤셔놔서 돌멩이 몇 개 집어오고 그랬으니 동양인들은 솔직히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겁니다. 서구인들은 너무나 자랑스럽고 마음부터가 다릅니다. 서구인들은 무엇이나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려고 하는데 동양인은 될 수 있는 대로 그냥 두고 거기 순응해서 사는 법을 배웁니다. 마음 자체가 달랐습니다. 건강에 도움을 주는 서구인들이 만든 약이 과학적이라면 동양의학은 철학적입니다. 그래서 과학을 초월하는 우주의 이치를 기준으로 사람의 몸도 바라볼 수 있는, 그래서 인간의 몸도 한의학에서는 소우주로 봅니다. 우리 몸속에 우주의 신비 작용이 다 들어있어서 음양해석이라든가 하는 것으로 사람을 바라봅니다. ‘배부르게 먹고 잘사는 것보다 좀 배가 고파도 산 좋고 물 좋은 것을 그대로 두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지 않으냐?’ 우리 동양인은 내부 구조가 편리한 것보다 터를 잘 잡아야 되고 죽어서 묻히는 묘지 자리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우리 인간관계도 나 혼자를 분리시키는 것을 매우 두렵게 생각하는데 서구인들은 독립 정신이 강해서 아이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집안에서 독립시키기 위해 부모들이 자녀들을 내좇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국에 가서 굉장히 창피당한 일이 한번 있는데 너는 몇 살 때 부모 집을 떠났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25살, 30살이라고 하면 깔깔대고 웃습니다. 그러니까 빨리 집을 나와서 독립해야 합니다. 이것이 서구인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르잖아요? 끝까지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죽여라, 죽여라 하면서도 함께 사는 걸 좋아합니다. 자기 아내를 내 색시라고 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 색시 누가 뺏어 갈까봐 내 색시, 내 색시 그러냐? 우리 집 사람이라고 해야 은혜스럽지 다른 말로 안합니다. 지나간 몇 십 년 동안 아시아의 문제는 자주 독립의 문제였는데 이제는 그 문제는 거의 해결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뭐냐? 아시아가 기술 개발에 의한 근대화 작업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시아 교회 협의회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협의한 내용을 제가 발표하겠습니다. 아시아를 어떻게 민주화하고 복음화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협의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나왔습니다. 아시아의 평화와 민주화를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이 공헌해야 된다고 결정지었습니다. 이유는 이 두 나라가 아시아에서 가장 힘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두 나라에 정치 이념과 국가 방향에 의해서 아시아의 평화가 좌우됩니다. 또 일본은 과거 아시아의 평화를 가장 많이 깨뜨린 죄가 있기 때문에 이제는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공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과거 일본이 대한민국을 통째로 다 식민지화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제는 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독도 같은 문제는 건드리지 말아야 아시아 평화가 이루어지지 나라 전체를 다 식민지화 한 그런 나라 사람들이 돌멩이 하나 자기 것이라고 자꾸 우겨대면 아시아 평화가 자꾸 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앞으로 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조금은 희생하면서 과거를 생각하면서 공헌해야 되고 가장 영향력을 많이 미칠 수 있는 나라가 중국인데 그 이유는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경제권을 다 잡고 있습니다.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아시아의 평화는 크게 영향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아시아 평화에 최고 걸림돌이 지금 북한과 미얀마의 민주화 문제입니다. 이 두 나라가 언제 민주화가 되느냐? 이것이 아시아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일본에게 강력히 요청하였습니다. 아시아 평화 문제에 있어서 장애가 되는 몇 가지 큰 문제점에 있어서 일본의 인종 차별 문제! 그래서 “우리 재일 교포들의 지문날인을 없애라! 차별이다.” 지문을 찍어서 “너는 조선 사람이다. 이렇게 완전 차별하는 것을 없애야 한다.” 제가 미국에서 스티븐 야마고찌라고 하는 신학생과 회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프린스턴 신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왜 일본으로 가느냐?”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나쁜 일을 행하기 때문에 이것을 막으러 간다.” “무슨 나쁜 일을 하느냐?” “조선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죄를 많이 지었는데 이제는 지문을 찍어서 차별화 정책을 펴기 때문에 미약하지만 내가 가서 일본과 싸우기 위해 간다.” 일본 사람입니다. 그런 친구를 알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그런 일에 대해서 앞장서서 “이것은 아시아 평화를 깨치는 일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엽에 쇄국 정책을 주창한 대원군과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서 부강해 보려는 명성왕후 민비 사이에 치열한 대립에서 민비가 승리하지요? 그래서 일본과 수결을 하게 되는데 이때 일본이 침략성만 없었다면 우리나라도 일본 못지않게 잘 성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민비를 살해하고 마침내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아시아의 복음화는 한국이 수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성장한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아시아 전체의 크리스천은 3,500만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한 나라에만도 1천만 명이 넘는 신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아시아의 선교를 책임질 때 문화권이 같기 때문에 동질감에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대단히 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시아권에 미국 선교사나 영국 선교사는 잘 안 통합니다. 같은 아시아인끼리 전도가 잘 되고 있어서 한국 교회가 이렇게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국민이나 한국 교회가 아시아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선교를 책임지는 일입니다. 절대 이질감이 없는 인종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또, 한국 교회가 이만큼 부흥하고 줄 때가 되었으므로 이제부터 지금 하는 것보다 배나 더 아시아의 복음화를 위해 한국 교회가 노력해야 된다는 결론을 아시아 교회 협의회에서 회의 끝에 내렸습니다.
124년 전에 제물포에 선교사 두 사람이 왔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입니다. 그 두 사람이 들어옴으로 우리 한국에 개신교의 역사는 이렇게 화려하게 빛이 났잖아요? 그러므로 아시아의 복음화를 굉장히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작은 소수를 통해서 큰 열매를 맺는데 그것이 겨자씨 신학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나중에는 커져서 새들이 깃드느니라.”라고 예수님이 설교하셨잖아요? 이제 한국 교회는 사명감이 투철한 목사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선교를 뒷받침할 만한 재정 능력도 한국 교회, 세계 교회에서 우수합니다. 구체적인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협력할 만한 구체적인 리더가 부족하고 개체 교회들의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구를 둥글게 만드신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역사는 돌아간다는 증거입니다. 굶주림의 식민지 땅인 아시아는 이제 세계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금번 G20에 참석하셨던 이명박 대통령께서 강조하신 말 “대한민국은 세계 변방 국가였는데 이제는 중심에 자리 잡은 나라가 되었다.” 세계 강대국 20개국 중에 넉넉한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런 말해도 괜찮습니다. 아시아의 복음화는 이제 미국 교회 몫도 아닙니다. 영국 교회 역할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한국 교회 몫이 되었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선교 역할보다 10배나 더 많은 역할을 해야 아시아가 복음화 되어서 현재 7퍼센트 미만의 아시아 인구의 크리스천을 70퍼센트 올릴 수 있는 그런 작업의 중심에 우리 한국 교회가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미션 패러다임을 좀 바꾸었지요? “현지인을 현지에!” 현지인을 교육시켜서 후원하는 것이 효과 면에서 또 경비 면에서 훨씬 유리함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 중에 아시아 15개국에 500명의 선교사를 이미 파송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들만 잘 역할을 해도 10년만 지나도 놀라운 발전이 온다고 확신합니다. 성경에 보세요. 에디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갈 때 빌립에게 길가에서 만나 성경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고 자기 나라 에디오피아로 돌아갔지요?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에디오피아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생각하면 우리 갈보리교회 하나만 역할을 해도 세계 역사는 변할 수 있습니다. 왜? 바울 하나 때문에 유럽의 역사가 변했잖아요? 넉넉합니다. 그런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업을 조금은 힘겹게 열심히 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하고 있는 이런 일이 어느 때인가는 아시아를 변화시키고 세계를 복음화 하는 청사진들을 미리 써가면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많은 말을 배웠죠? “꿈이 있는 자는 반드시 성취한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꿈을 꾸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면 하나님께서는 그 꿈과 반드시 함께 하십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미국인이나 흑인들에게 언제나 연설할 때 빼놓지 않는 단어 “I have a dream! 우리 흑인이 역사의 중심에 설 때가 있을 테니까 그 꿈을 가지고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용기와 힘을 가지고 살자.” 몇 십 년 전입니다. 오버마가 대통령이 되었잖아요? 여러분, 우리는 아시아의 복음화를 책임졌습니다. 이제는 아시아를 품고 세계를 품고 일해야 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사도적 관찰, 영적 비전이라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이런 역사를 위해서 힘을 바치는 자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그 나라를 부강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책임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축복 사인인 것을 사람들이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리더들이 우리나라에서 계속해서 많이 나와서 아시아의 복음화를 큰 교회에서 앞장서서 책임을 져 나갈 때 하나님은 이 나라에 복을 주시고 이런 일을 능히 해 나갈 수 있도록 역사의 과거, 영국이나 미국을 품으셨던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이 이 나라에, 21세기에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사명을 먼 앞날을 미리 내다보면서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 다 함께 자유스럽게 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비전과 소동
행 19:21-41 / 김 조 목사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것은 만든 분의 목적이 있습니다. 만들어진 것이 그 목적을 잊어버리거나 기능을 상실할 때 버려지고 폐기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닮도록 하셨고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권세까지 위임하여 주셨습니다.(창 1:28)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순종하여 그 목적을 상실하게 됨에 낙원에서 쫓겨나 죽음이 왕 노릇하는 세상에서 비참하게 살아 소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비전을 품고 아우성치는 세상에 소동을 잠재우며 승리하라고 비전과 소동이라 제목하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사도의 3차 선교여행에 3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여 헌신했던 에베소 사역이 마쳐질 즈음에 앞으로 하고픈 비전을 말씀한 것이 21-22절이요 그때에 큰 소동이 일어났으니 바울사도의 복음전파가 에베소 뿐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증거 되니 우상 아데미 여신상과 전을 만들어서 유착한 생활하던 은장색들이 자기 영업에 위협을 느껴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업자들을 선동하여 온 성이 요란하게 되어 바울사도의 일행이었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연극장으로 데리고 가서 적지 아니한 노동을 두 시간이나 했던 것이 22-34절까지 이며 이 소동에 로마의 관리는 아니었으니 자유 시민 의회에서 선출된 최고의 행정관리였던 서기관이 지혜로운 판단으로 소요를 진정시키고 자진 해산하게 하였던 것이 오늘본문입니다. 바울사도의 복음전파의 결과와 비전을 알 수 있고 그 일로 온 성이 소동하는 것을 보면 어떤 비전과 소동의 원인을 생각하며 몇 가지 은혜 받고져 합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21-22, 30-31절)
바울사도는 에베소에서 정했던 일을 이어 앞으로 할 일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할 것이라는 비전을 갖게 된 것으로 팔레스타인 지방에 흉년으로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금하여 도우려고 했고 유럽 전도위해 로마교회에서 재정지원 받기를 원하였기도 했으나(롬15:23,24) 당시에 로마는 세계의 중심지로 세계의 길은 로마로부터 라는 말이 있었으니 세계복음화를 위해 로마의 가기를 원했던 것이라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전파의 비전을 가진 바울은 후에 예루살렘에서 죄수의 신분이지만 로마로 호송되어 가졌던 비전이 이루어졌습니다.(28:16) 이러할 때 소동으로 동료가 연극장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에 자기가 가고자 했던 의분도(30-3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지금 우리가 마음에 품고 있는 뜻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심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하려고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자녀 잘 되기를 원하십니까? 구하는 목적이 하나님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돈 많이 가졌으니 목적이 분명치 못하면 수전 노 되고 그것 때문에 망합니다. 칼이 엄마 손에 있으면 음식 만드는 요리 칼 되고 도적 놈 손에 들려지면 살인 도구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전은 참으로 귀합니다. “무릇 지킬 만 한 것 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하셨습니다. 나라가 바벨론에 망하면서 어려서 잡혀간 다니엘을 왕의 진미로 마음을 사려 했으나 먹는 것 돈 몇 푼 때문에 내 몸 더럽히지 않겠다고 뜻을 정하였기에(단1:8)그는 120개도를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어도 아무 틈이나 허물을 찾을 수 없게 살았습니다.(단6:4) 성도들 심령에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뜻을 갖고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자신 위해 살 때 소동이 있습니다.(23-35절)
바울사도의 복음증거로 소동이 일어나 온 성이 요란했고(29) 바울사도 일행인 두 사람을 잡아 2만 5천쯤 들어가는 노천극장으로 끌고 가 두 시간이나 소동을 벌였으니 그 원인이 에베소 중심하여 온 아시아 일대가 복음이 증거 되니 우상 아데미 여신상이 천해지고 그 모형 만들어 돈 벌던 자기들의 수입이 줄어들 것 같아 데메드리오란 자가 같은 업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요를 일으킨 것이다. 연극장으로 몰려간 사람 중에 무엇 때문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32) 아데미 여신 위한 전각이 솔로몬 성전의 34배로 120개에 60개나 되는 전각이라 굉장했기에 그것으로 유족하게 살다가 자기 것이 빼앗긴 것 염려하여 일어난 소동이라 삶에 목적을 분명치 못하니 자기 위한 것 밖에 몰라 일어난 소동입니다. 이 땅에 모든 소요와 혼란이 이기주의적 욕심 때문입니다. 자신만 위하다 보니 사기 질투, 시기, 분노, 미움으로 살기가 둥둥해지고 가정도 사회도 혼란해 지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중심으로 살면 평안과 안정이 있을 것인데 자신 위해 살다가 소동만 일으키지 아니하도록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3. 올바른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34-41절)
이성을 잃고 소동하는 무리를 서기장이 진정시켜 바른 판단을 하게 합니다. 바울사도 일행이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 한 것도 아니고 아데미 여신을 훼방한 것도 아닌데 이런 불법을 행하면 안된다. 재판 신청할 수 도 있고 총독도 있는데 합당한 절차를 취하자는 논리적이요 합당한 서기장의 설득에 자진 해산해 버리게 되었다. 위기적 상황에 바울사도가 나서지 아니해도 진정되었으니 올바른 판단이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비전을 갖을 것인가? 나 자신 위하여 소동할 것인가? 판단해야 할 것이 하루에도 수 없이 부딪쳐 옵니다. 여기에 우리는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장의 감정이나 기분이나 내 입장에서 화내고 분을 품다가 경솔하게 행동하다가 작은 것 때문에 큰 것 놓치는 어리석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했으니 나 중심의 어리석은 판단을 제하고 하나님 중심에 지혜로운 판단으로 언제 어디서나 부끄러움이 없는 올바른 판단으로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 받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비전을 가진 사도와 자신의 유익이나 욕심때문. 소요를 일으키고 혼란하게 하는 무리를 우리는 보아왔습니다. 자칫하면 현실에 내 입장 형편 따라 이기주의적 욕심으로 가정과 사회를 요란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올바른 판단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품고 달려가는 성도되어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받는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가만히 있어야 할 때
행 19장 21~27절 / 전승문목사(교문교회)
드디어 코로나19의 백신을 우리나라에서도 접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속히 백신접종이 완료되어 코로나19로 인한 모든 어려움이 해소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지만 백신접종이 완료되기까지는 최소한 6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마도 올 여름까지는 코로나로 인한 답답한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지속될 것 같습니다. 힘들지만 어렵지만 잘 참아내고 꼭 이겨내시길 당부 드립니다. 그런데 백신접종이 완료되면 그래서 국가적인 집단면역이 형성되면 그러면 다 해결될까요? 물론 그렇게만 되면 적어도 마스크를 벗고 이전의 일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일정부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더 큰 어려움이 찾아올 위험성이 있다고 합니다. 일단 세계경제가 지금까지는 아무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엄청난 어려움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대 경제공황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대부분 그렇게 예상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국가만의 어려움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나라들이 경제적 큰 난관에 봉착할 거라는 겁니다. 그로인해 발생하게 될 어려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우리 지구의 환경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망가져버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로 인한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자연재해 역시 일찍이 아무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것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로 인해서 세계적인 식량난이 일어날 것이고 더욱 무서운 전염병도 창궐할 거라고 합니다. 대환난! 말 그대로 대환난이 시작되는 겁니다. 성경이 수없이 경고한 그 대환난이 마침내 시작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이 대환난의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번 이 환난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시고 특별한 방법으로 주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막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물론 직접적인 피해는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이 당했지만 그러나 그건 경제적인 피해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많이 어렵겠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어떻게든 다시 회복될 여지가 충분히 남아있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입은 피해는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교회의 이미지 훼손으로 인한 선교의 어려움은 앞으로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겁니다. 솔직히 많이 억울합니다. 교회는 코로나의 온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코로나19는 교회 때문에 확산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국민 대다수는 코로나로 인한 많은 문제들을 교회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교회 때문에, 교인들 때문에 코로나가 확산되었다고 또한 교회 때문에 코로나를 막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대부분 악의적으로 조작된 것들입니다. 악의적인 언론과 악의적인 정치인들이 책임을 교회에 떠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목사님들과 교회는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하고 심지어 대항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강력하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일부 부당한 조치에는 극렬하게 반발하고 그러는 겁니다. 그 심정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문제가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국민들의 생각은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고착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억울함을 해명하고 다시 선교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을까요? 이건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사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에베소는 바울 당시에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지금은 7m가 넘는 두터운 진흙에 덮여 터키인들만 얼마간 살고 있는 황무지가 되었지만, 바울이 에베소에 교회를 세울 때에는 인구가 20만 명이 넘는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에베소에는 아주 큰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데미(Artemis, Diana)신전인데 길이가 120m 폭이 60m 높이가 18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신전이었습니다. 실면적만 2천 평이 넘는 엄청난 크기의 신전이었던 겁니다. 이는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크기고 솔로몬 성전보다는 34배나 큰 크기입니다. 에베소의 이 아데미 신전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놀라운 건축물로 손꼽힙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세워진 이 신전에는 거대한 기둥이 127개나 있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했을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이 신전에서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인데 특이하게도 유방이 24개나 달린 여신입니다. 고린도의 아프로디테가 애인 같은 여신이었다면 에베소의 아데미는 어머니와 같은 여신이었던 겁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이 여신의 신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었습니다. 아마도 이 신상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조각해서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아데미 신전은 에베소의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그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수의 범죄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어머니와 같은 신전이라 어떤 사람이든 다 품어주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범죄자들까지도 아데미 신전에만 도착하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에베소는 항상 외지인들로 북적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상업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아케이드(arcade)라는 말이 처음 생겨난 곳이 에베소입니다. 게다가 아데미 신전에는 여사제들만 3천명이 넘게 있었습니다. 그녀들 역시 밤이 되면 매춘부가 되어 에베소의 남성들을 유혹하곤 했습니다. 에베소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눈물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그가 에베소를 바라보며 늘 울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누구든지 에베소에 사는 사람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도덕에 울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곳이 에베소였습니다. 항구도시 특유의 북적거림이 있었던 곳입니다. 많은 외지인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항상 범죄자들이 우글거리는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곳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아데미 신전이 있었던 겁니다. 아데미 신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 덕분에 에베소의 상권이 유지되고 있었던 겁니다. 에베소는 부적으로도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에페시아 그라마타(Ephesia Grammata)라는 부적인데 이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만병통치의 효능이 있고 무엇보다도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인들에게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전설이 있는 부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모든 부적은 에베소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 역시 아데미 신전의 영향이었습니다. 유방이 24개나 달린 아데미 여신의 신상과 그 부적이 이런 명성을 얻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에베소 시민들은 아데미 신전 덕분에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데메드리오(Δημήτριος)라는 은장색이 나오는데 그 역시 아데미 신전 덕에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은장색은 은세공업자를 뜻하는 말인데 아데미 신상의 모형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데메드리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데미 신전 덕에 적지 않은 수입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2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에베소에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회개하였고 심지어 부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마술서적을 한꺼번에 모아 불사르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전역의 사람들 생각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신상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변화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아무도 신상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바울 때문에 자신들의 생계에 막대한 지장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에베소에는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원형극장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겁니다. 데메드리오는 바울을 붙잡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자 대신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갔습니다.
이런 게 마귀역사입니다. 사람들을 동원하고 분노가 가득하여 폭력을 일으키게 하고 세상을 소란하게 만드는 겁니다. 마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일을 만들어 왔습니다.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분노에 불을 붙이는 겁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 방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절대로 이런 일에 이용당하면 안 됩니다. 물론 성령님도 사람들을 모아 큰일을 도모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주관하시는 모임에는 언제나 질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는 절대로 미움이나 증오나 분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마귀가 역사하는 겁니다. 지금 에베소에 그 마귀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살해한 방법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마귀가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미움과 증오와 분노를 이용해서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에베소 시민들이 데메드리오의 충동에 호응한 결정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생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극단적인 반응들을 보인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 때문에, 성도들 때문에, 생계에 지장이 생길 수 있겠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 두려움을 이용해서 미움을 자극하고 증오와 분노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귀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틀림없는 마귀역사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영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원형극장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바울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뛰어들려고 했습니다 :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그랬습니다. 바울을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들어가지 말라고 막은 겁니다. 또한 에베소의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사람들도 들어가지 말라고 연락했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베소의 서기장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줬을 겁니다. 서기장은 총독을 대신해서 에베소를 다스리던 시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바울에게 나서지 말고 기다리라고 연락을 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물론 가만히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 엎드려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자 엄청난 소동을 야기했던 이 사건이 순식간에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습니다. 서기장이 사람들에게 나아가 자초지종을 조목조목 설명하자 허망하게 다 흩어지고 만 겁니다.
이런 게 마귀역사입니다. 가만 두면 때가 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겁니다. 하지만 맞서려고 하면, 싸우려고 하면, 문제가 크게 확산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만류를 듣지 않고 그대로 연극장에 들어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대로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면 에베소의 선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한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에 또 얼마나 큰 지장이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마귀 역사는 불같은 것이라 땔감을 공급하지 않으면 저절로 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땔감이 공급되면, 싸울 여지가 생기게 되면, 그 불은 걷잡을 수 없게 확산될 수도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억울하더라도 답답하더라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나서지 말고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시고 특별한 방법으로 주관하시는 겁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 사태가 지나고 나면 우리에게는,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교회들에게는, 놀라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바람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위한 마지막 성령의 바람이, 우리를 중심으로 불어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회들은 이 마지막 시대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추수꾼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마귀들이 이토록 기승을 부리는 겁니다. 어떻게든 한국의 교회들을 무너뜨려야 하겠기에 이렇게 계속 악한 역사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작금의 사태는 마귀들이 역사하는 겁니다. 마귀들이 총력을 다해 교회를 공격하는 겁니다. 그걸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번 사태를 영적으로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싸우는 일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정부에 대항한다고, 정부의 몇몇 사람들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영적인 문제입니다. 악한 영들이 실로 강력하게 역사하는 엄청난 영적전쟁입니다. 마귀는 주님만이 제압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오직 성령님만이, 마귀를 제압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섣불리 나섰다가는 주님의 일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잘 한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주님을 방해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역사하실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더 많이 기도하면서, 더 열심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주님이 놀랍게 역사하실 겁니다. 반드시 우리들로 하여금 저 땅끝까지 나아가 이 마지막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겁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잠잠히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합시다.
데메드리오의 소동 앞에서
행 19장 21~41절 / 박종광목사
본문내용
오늘 본문은 바울이 약 3년간의 에베소 사역을 거의 마쳐가고 있는 시점에 발생한 일들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전도를 마치고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과 로마까지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문 21절은 이런 계획에 대해 “작정”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우리는 ‘작정’이라는 말에 대해 오해할 여지가 있다. 작정은 내가 스스로 정한 듯한 뉘앙스를 안겨준다.) 그런데, 여기서 ‘작정하여’라는 말은 영어로 impelled by the Holy Spirit 곧 “성령에 이끌리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다음 행선지를 정할 때는 자기 생각대로 계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했고, 성령에 이끌려 그런 계획을 구상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당연하지만 늘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의 계획이 성령님과의 교제 속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잠언 16장 9절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아멘. 그러니, 교회의 건축과 리모델링, 교육, 선교도 모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럼, 왜 바울은 이 지역들로 다녀갈려 했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전혀 언급이 없지만, 당시 가나안 땅은 기근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러 헌금을 모아 기근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또한 로마를 안중에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동안 전도성향을 보았을 때 로마는 전도하기에 최고로 적합한 지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는 세상의 중심이라고 할 만큼 번성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되었지요. 그는 또한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곳에는 절대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전도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은 유럽으로 시선을 돌려 로마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얼마 후 자기를 돕는 두 사람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보내어 아가야와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금을 준비케 합니다. 그리고 그런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한 후 (롬15:26)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방문해 계획했던 바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성령안에서 계획한 바는 반드시 이루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도 보여주셨지만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그 계획들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사실, 어느 누가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갈 거라고 생각 했겠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은 바울을 2년 동안 안전하게 로마에 거하게 하시면서 방해 받지 않고 마음껏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인 28장 30절, 31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하나님은 성도가 성령 안에서 계획한 바를 반드시 이루어지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저희 교회를 보십시오. 지난 5년 사이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까? 성령님께서 이 박목사를 달달 볶아 매해마다 교회 공사를 하고 리모델링을 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이 희한한 방법으로 본 교회를 도왔습니다. 어떤 분은 아들 장가보내면서 우리 교회에 감사헌금을 보내 주셨습니다. 한 집사님은 친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아무 상관없는 저희 교회에 헌금을 보내셨습니다. 저는 그 집사님 얼굴 안 뵌지가 6년이 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저희 교회 수요 예배에 한번 참석한 후 곰팡이 냄새 한번 맡고 건축헌금을 보내왔구요. 우리 교회를 떠났지만 어떤 권사님은 본인의 집과 교회도 어려울텐데 그 마음을 담아 저희 교회를 도왔습니다. 어떤 분은 가정의 파탄 이후 새로운 헌신의 마음을 담아 몇 해 동안 저희 교회를 도왔던 분도 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우리 부영교회를 돕고 싶은 마음이 커서 직장에 복직하여 3개월만 일하겠다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3개월에 10배를 벌게 해주셨습니다. 지하 예배실 공사를 하는 집사님의 아내는 우리 교회 공사에 좋은 재료 팍팍 사용해서 공사하라고 남편을 들볶았습니다. 이렇게 공사하면 다른데 가면 4천만원 정도 들어간다 해도 부영교회는 그렇게 해주라 했습니다. 어떤 교회 밖의 청년은 원인을 알 수 없어 희귀병에 걸려 있다 본 교회 성도들이 합심기도 했는데 완전히 다 나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본 교회에 감사헌금을 보내왔습니다. 하나하나의 사연들을 다 들춰보면 이 모든 일들이 너무 신묘막측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상황과 마음을 움직여 주시지 않으면 우리 부영교회와 상관없는 분들이 이렇게 해 주실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분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우리 교회를 돕습니까? 또, 우리는 왜 아무 상관없는 아프리카의 어린이 교회를 도와 줄려 합니까? 또, 재정이 어려운데 왜 자꾸 담임목사는 기를 쓰고 교회공사를 감행했고 앞으로 해외 선교센터를 세우자고 합니까? 하나도 제대로 감당 못하면서 왜 저와 여러분은 여러 갈래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성취하기 위해 힘을 다해 달려갑니까? 이런 모든 현상에 대해 우리는 빌립보서 2장 13절 만한 정답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교회를 돕는 분들이나, 또 우리 성도들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선교적 차원에서 교회 유치원을 세우고, 또 교회를 새롭게 디자인하고 건축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령 안에서 계획하고 작정하는 일은 다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유치원과 어린이 교회는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어느 해가 되면 교회 빚도 힘을 모아 다 갚고, 또 어느 해가 되면 모두가 전도에 미쳐서 빈 자리를 가득 채워야 합니다. 또 어느 해가 되면 단독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또 어느 해가 되면 제2의 부영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해외 선교센터를 세워 젊은이들을 세계로 내 보내어 훈련받게 하고, 역으로 해외 선교지의 타국인들을 받아 그들을 재 훈련시켜 그들의 나라로 재파송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 교회는 하나님의 꿈과 소원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계획을 이루신 하나님이 우리 부영교회의 계획도 이루시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자, 이제 우리는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 봅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마게도냐로 보내고 바울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좀 더 머물러 있을 때 한 가지 사건이 터졌습니다. 은장색, 곧 금과 은으로 세공업을 하는 상인인 데메드리오가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원래 이 에베소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테미스’로 알려진 ‘아데미’를 신으로 숭배하는 중심 도시였습니다. 이 아데미는 에베소에서 ‘대모신으로 경배 받는데 이 여신은 12개의 유방을 지닌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 다산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고, 또는 사냥의 신으로도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에는 이런 아데미를 섬기는 큰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자그만치 220년을 거쳐 지어졌다고 하는데 고대 7대 불가사의중 하나에 들어갑니다. 특별히 매년 5월에 있는 축제 때는 3만 명의 사람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평상시에도 여행자들은 무리를 지어 신전에 모여드는데, 은장색 업자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아데미 여신상이 들어 있는 작은 신전 모형을 제작하여 팔았습니다. 은장색 업자들은 이런 일로 인해 많은 이윤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 증거로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의 악습을 버리고 기독교로 귀의하자 그들의 생계에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로 인해 바울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의 선교활동을 통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상인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소요의 중심인물인 데메드리오는 더 큰 손해를 입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혼자서 그 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 직공을 두고 기업체 사장처럼 군림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와 많은 사람들이 이 우상을 구매하지 않자 실질적인 손해가 찾아온 것입니다. 아마도 이 손해는 큰 소요를 일으킬 만큼 막대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바울이 3년 동안 에베소에 머물면서 얼마나 큰 선교사역을 감당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 에베소는 아시아의 로마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지역 거점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조그만 변화라면 은장색 업을 하는 사람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니라 이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기독교에 귀의하여 그들의 장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정도가 되었습니다. 본문도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26절에서 데메드리오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 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3년의 시간 동안 바울은 에베소와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선교활동을 펼쳤고 그로 인해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큰 손해를 입은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되어 소동을 일으키니, 다른 영업하는 사람들도 함께 동조하여 온 시내를 소란스럽게 한 것입니다.
오늘 이 데메드리오가 중심이 된 소동은 에베소를 중심으로 한 바울의 아시아 사역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증거되자 우상의 허상이 무너지고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은 단순한 이론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살아있는 생명력이요 영향력이기에 가는 곳마다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 살펴보았듯이 복음은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이요 그 지역과 나라를 변화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지는 곳에는 큰 반발이 일어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정과 교회 나라도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우리가 믿음대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께 충성되이 살지 않으면, 헌신하지 않으면 사단도 우리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면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하면 사단은 우리 주변에서 꼭 이런 소동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신자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바르게 살지 못하게 만들고, 또 다시 그런 모습을 보이면 더 큰 일을 일으키겠다고 우리에게 협박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초 평양에 복음이 전해지자 술집과 기생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생조합이란 곳에서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두 목사를 넘어뜨리기 위해 기생 대표를 뽑아 유혹작전을 펼쳤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27절 말씀같이 복음전파로 인해 자신이 천하여지고, 무시당하게 되고, 위엄이 떨어질 때 분노가 가득하여 우는 사자같이 삼킬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그러다, 걸리는게 있으면 ‘확’하고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29절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의해 분노와 흥분에 사로잡힌 은장색들은 삽시간에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의 동역자인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2만 4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노천극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흥분한 군중들은 지금 사단의 앞잡이가 되어 사단의 분노를 머금고 신자들을 붙잡은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사주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훼방하고 복음 전도자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일을 시행하게 합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 가운데 흔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의 앞잡이로, 노예로 사용되는 이들이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믿음이 없다 하여, 다른 종교를 숭배한다 하여 자기 자신이 나는 ‘사단 숭배자’다. ‘마귀의 졸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행동들을 보면 사단의 사주를 받아 하는 것과 동일한 일들을 벌입니다. 나무는 열매로써 그 자신을 나타냅니다. 사람도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지, 사단에 사주되어 노예처럼 사용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혹된 사람들은 자신이 사단의 노예와 졸개로 이용되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모여서 소동을 일으켰던 은장색들에 대해 뭐라고 말합니까?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소동에 참가한 대부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모였는지도 모른 채 두 시간이나 소리 지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같이 흥분하고 싸우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상에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저들은 자신의 죄를 모르나이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이들, 모욕하고 채찍을 때렸던 이들에게 욕하지 않았습니다. 죄가 미운 것이지 사람이 미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마귀의 앞잡이처럼 행동하고 우리에게 악한 일을 행하려 하는 이들에게 동일한 분노로 맞서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저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쳐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성도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마귀의 밥으로 삼켜질 상황에서도 경솔히 행하지 않고 차분하게 일을 정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사태에서 서기장이 행한 일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이 서기장은 로마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베소 의회에서 선출된 최고 행정관리였습니다. 그는 담당 지역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요 사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로마가 중앙통치를 강화하면서 자유도시의 민주적 요소들을 제거하던 시기였습니다. 쉐르윈 화이트에 따르면 이때는 민간이 자치적으로 통치했던 마지막 시기였고, 총회와 의회가 있는 도시. 국가의 옛 형태에 따른 시민정치는 끝났습니다. 서기장이 두려워한 것은 이런 소요사태에 대한 로마의 반응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시대 분위기가 안 좋아 각 지역마다 의회가 폐지되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태가 벌어지면 시민 의회에 의해 선출된 자신은 파면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지금 서기장은 이런 곤란한 처지에서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직임에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서기장의 자리는 중립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편도 아니고, 에베소 은장색 업자들의 편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하나님은 이처럼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사단의 술책과도 유사해 보입니다. 사단은 믿지 않는 자들을 미혹하고 선동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하나님 역시 어떤 상태의 사람을 움직여 그분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사단이 움직이는 사람은 불신자에 한정되고, 그 뜻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안 이루어 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그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시고, 사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분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서기장을 사용하셔서 무리를 진정시키고 그들이 경솔히 행하지 아니하도록 제어합니다. 이 서기장이 행한 방식은 곧 하나님의 일 처리 방식입니다. 서기장은 모인 무리에 대해 일체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으며, 폭력과 강제력을 동원하지도 않습니다. 서기장은 차분하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악한 자의 계략에 빠지거나 불신자들의 강한 훼방과 핍박을 당하게 되면 취할 자세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주장이 옳다 하여도 싸우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싸움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기 동료 2명을 에베소의 은장색들이 끌어갔다 하여 칼 뽑고 노천극장에 찾아갔으면 죽는 것은 바울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철없는 젊은이들이 절에 들어가 불상을 파괴하고, 보은사에 들어가 땅밟기 동영상을 촬영하는 일 등은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초대 기독교는 아데미를 대놓고 비방하거나 파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들과 전쟁을 벌일 필요 없습니다. 단군상을 부수는 과격한 행동도 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옳은 것을 증거하고 보여주는데 전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사용된 서기관이 그렇게 했습니다. 서기관이 한 일은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옳은 일을 행하는데 우리 시간을 드리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잘못한 것을 말하면 더 많은 반발을 가져오고 폭력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옳은 것을 말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실천하고 보여주면 그것으로 인해 감화 감동 받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분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발 마사지 전도를 할 때 정말 고집이 세고 완악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교회 안에서 봉사를 받으면서도 교회를 비방하고 흉을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 분은 절대 신앙생활을 할 것 같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여러 전도대원들이 정성껏 섬김을 감당한 결과 어느 순간 이 분이 슬그머니 교회에 등록하여 다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몇 달의 시간이 부정을 긍정으로 바꾼 결정적인 시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에게도 이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못을 지적하고, 나쁜 것, 옳지 않은 것을 책잡아 싸우고 시비걸면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평안 할 수 없습니다. 반면, 우리가 옳은 것을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그 옳은데로 사는 모습을 눈으로 보여주면 우리가 만나는 그 사람은 변화됩니다. 가정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에베소의 소동을 계기로 옳은 것을 말하고 실천하여 보여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함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만히 있어야 할 때
전승문목사(교문교회) / 행 19:21~27
드디어 코로나19의 백신을 우리나라에서도 접종하기 시작했습니다. 속히 백신접종이 완료되어 코로나19로 인한 모든 어려움이 해소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지만 백신접종이 완료되기까지는 최소한 6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마도 올 여름까지는 코로나로 인한 답답한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지속될 것 같습니다. 힘들지만 어렵지만 잘 참아내고 꼭 이겨내시길 당부 드립니다. 그런데 백신접종이 완료되면 그래서 국가적인 집단면역이 형성되면 그러면 다 해결될까요? 물론 그렇게만 되면 적어도 마스크를 벗고 이전의 일상으로 회복되는 것이 일정부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더 큰 어려움이 찾아올 위험성이 있다고 합니다. 일단 세계경제가 지금까지는 아무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엄청난 어려움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대 경제공황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대부분 그렇게 예상하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국가만의 어려움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나라들이 경제적 큰 난관에 봉착할 거라는 겁니다. 그로인해 발생하게 될 어려움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우리 지구의 환경은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망가져버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로 인한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자연재해 역시 일찍이 아무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무시무시한 것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로 인해서 세계적인 식량난이 일어날 것이고 더욱 무서운 전염병도 창궐할 거라고 합니다. 대환난! 말 그대로 대환난이 시작되는 겁니다. 성경이 수없이 경고한 그 대환난이 마침내 시작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이 대환난의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번 이 환난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시고 특별한 방법으로 주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막을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물론 직접적인 피해는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이 당했지만 그러나 그건 경제적인 피해일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많이 어렵겠지만 상황이 달라지면 어떻게든 다시 회복될 여지가 충분히 남아있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입은 피해는 앞으로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교회의 이미지 훼손으로 인한 선교의 어려움은 앞으로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회복되지 않을 것 같은 겁니다. 솔직히 많이 억울합니다. 교회는 코로나의 온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코로나19는 교회 때문에 확산된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국민 대다수는 코로나로 인한 많은 문제들을 교회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교회 때문에, 교인들 때문에 코로나가 확산되었다고 또한 교회 때문에 코로나를 막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대부분 악의적으로 조작된 것들입니다. 악의적인 언론과 악의적인 정치인들이 책임을 교회에 떠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목사님들과 교회는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하고 심지어 대항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강력하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일부 부당한 조치에는 극렬하게 반발하고 그러는 겁니다. 그 심정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문제가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국민들의 생각은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고착화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억울함을 해명하고 다시 선교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을까요? 이건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사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에베소는 바울 당시에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지금은 7m가 넘는 두터운 진흙에 덮여 터키인들만 얼마간 살고 있는 황무지가 되었지만, 바울이 에베소에 교회를 세울 때에는 인구가 20만 명이 넘는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에베소에는 아주 큰 자랑거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아데미(Artemis, Diana)신전인데 길이가 120m 폭이 60m 높이가 18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신전이었습니다. 실면적만 2천 평이 넘는 엄청난 크기의 신전이었던 겁니다. 이는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4배나 큰 크기고 솔로몬 성전보다는 34배나 큰 크기입니다. 에베소의 이 아데미 신전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놀라운 건축물로 손꼽힙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세워진 이 신전에는 거대한 기둥이 127개나 있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했을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이 신전에서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걸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아데미 여신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인데 특이하게도 유방이 24개나 달린 여신입니다. 고린도의 아프로디테가 애인 같은 여신이었다면 에베소의 아데미는 어머니와 같은 여신이었던 겁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이 여신의 신상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었습니다. 아마도 이 신상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조각해서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아데미 신전은 에베소의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그 명성을 듣고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수의 범죄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어머니와 같은 신전이라 어떤 사람이든 다 품어주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범죄자들까지도 아데미 신전에만 도착하면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에베소는 항상 외지인들로 북적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상업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아케이드(arcade)라는 말이 처음 생겨난 곳이 에베소입니다. 게다가 아데미 신전에는 여사제들만 3천명이 넘게 있었습니다. 그녀들 역시 밤이 되면 매춘부가 되어 에베소의 남성들을 유혹하곤 했습니다. 에베소 출신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데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눈물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그가 에베소를 바라보며 늘 울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누구든지 에베소에 사는 사람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도덕에 울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곳이 에베소였습니다. 항구도시 특유의 북적거림이 있었던 곳입니다. 많은 외지인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항상 범죄자들이 우글거리는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곳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아데미 신전이 있었던 겁니다. 아데미 신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 덕분에 에베소의 상권이 유지되고 있었던 겁니다. 에베소는 부적으로도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에페시아 그라마타(Ephesia Grammata)라는 부적인데 이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만병통치의 효능이 있고 무엇보다도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인들에게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전설이 있는 부적이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모든 부적은 에베소에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물론 이 역시 아데미 신전의 영향이었습니다. 유방이 24개나 달린 아데미 여신의 신상과 그 부적이 이런 명성을 얻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에베소 시민들은 아데미 신전 덕분에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데메드리오(Δημήτριος)라는 은장색이 나오는데 그 역시 아데미 신전 덕에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은장색은 은세공업자를 뜻하는 말인데 아데미 신상의 모형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데메드리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데미 신전 덕에 적지 않은 수입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2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에베소에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회개하였고 심지어 부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마술서적을 한꺼번에 모아 불사르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전역의 사람들 생각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신상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변화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아무도 신상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는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바울 때문에 자신들의 생계에 막대한 지장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에베소에는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원형극장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겁니다. 데메드리오는 바울을 붙잡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자 대신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갔습니다.
이런 게 마귀역사입니다. 사람들을 동원하고 분노가 가득하여 폭력을 일으키게 하고 세상을 소란하게 만드는 겁니다. 마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일을 만들어 왔습니다.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분노에 불을 붙이는 겁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 방법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절대로 이런 일에 이용당하면 안 됩니다. 물론 성령님도 사람들을 모아 큰일을 도모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주관하시는 모임에는 언제나 질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회개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는 절대로 미움이나 증오나 분노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마귀가 역사하는 겁니다. 지금 에베소에 그 마귀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살해한 방법으로 바울을 죽이려고 마귀가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미움과 증오와 분노를 이용해서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에베소 시민들이 데메드리오의 충동에 호응한 결정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생업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극단적인 반응들을 보인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 때문에, 성도들 때문에, 생계에 지장이 생길 수 있겠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 두려움을 이용해서 미움을 자극하고 증오와 분노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귀역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틀림없는 마귀역사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영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원형극장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바울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뛰어들려고 했습니다 :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그랬습니다. 바울을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들어가지 말라고 막은 겁니다. 또한 에베소의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사람들도 들어가지 말라고 연락했습니다. 아마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베소의 서기장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줬을 겁니다. 서기장은 총독을 대신해서 에베소를 다스리던 시장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바울에게 나서지 말고 기다리라고 연락을 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물론 가만히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 엎드려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자 엄청난 소동을 야기했던 이 사건이 순식간에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습니다. 서기장이 사람들에게 나아가 자초지종을 조목조목 설명하자 허망하게 다 흩어지고 만 겁니다.
이런 게 마귀역사입니다. 가만 두면 때가 되면 저절로 사라지는 겁니다. 하지만 맞서려고 하면, 싸우려고 하면, 문제가 크게 확산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만류를 듣지 않고 그대로 연극장에 들어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대로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면 에베소의 선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한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에 또 얼마나 큰 지장이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마귀 역사는 불같은 것이라 땔감을 공급하지 않으면 저절로 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땔감이 공급되면, 싸울 여지가 생기게 되면, 그 불은 걷잡을 수 없게 확산될 수도 있는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억울하더라도 답답하더라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나서지 말고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획을 가지시고 특별한 방법으로 주관하시는 겁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 사태가 지나고 나면 우리에게는,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교회들에게는, 놀라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바람이,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위한 마지막 성령의 바람이, 우리를 중심으로 불어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그리고 우리 한국의 교회들은 이 마지막 시대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추수꾼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마귀들이 이토록 기승을 부리는 겁니다. 어떻게든 한국의 교회들을 무너뜨려야 하겠기에 이렇게 계속 악한 역사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작금의 사태는 마귀들이 역사하는 겁니다. 마귀들이 총력을 다해 교회를 공격하는 겁니다. 그걸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번 사태를 영적으로 바라보는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싸우는 일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정부에 대항한다고, 정부의 몇몇 사람들을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영적인 문제입니다. 악한 영들이 실로 강력하게 역사하는 엄청난 영적전쟁입니다. 마귀는 주님만이 제압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오직 성령님만이, 마귀를 제압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섣불리 나섰다가는 주님의 일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잘 한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주님을 방해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역사하실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더 많이 기도하면서, 더 열심히 기도하면서,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주님이 놀랍게 역사하실 겁니다. 반드시 우리들로 하여금 저 땅끝까지 나아가 이 마지막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실 겁니다. 그날을 바라보며 잠잠히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게 합시다.
변화된 도시
행 19장 21~41절 / 이동휘목사
1.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었는가 하는 것은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은장색 조합장(순례자들에게 아데미 신상이나 신전의 작은 모형을 기념품으로 팔아서 수입을 올리는 자들의 조합)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사업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대로,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에베소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에 걸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려 놓았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이 사업이 명성을 잃을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아데미 여신의 신당도 무시당하고, 또 나아가서는 온 아시아와 온 세계가 숭배하는 이 여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25-27절)
복음이 자기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전통을 깨트리며 나아가서는 자기들의 생업까지 위협을 주고 있다면서 강력하게 복음을 반대하며 그 자신이 주동이 되어 군중들을 선동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충돌하게 된 이 에베소의 이권단체는 에베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주도하고 있던 아데미 숭배자들의 조합을 말합니다. 당시 이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는 에베소의 북동쪽에 위치했던 아데미 신전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족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데미 전각(27절)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서 한 면의 길이가 120m이고 다른 면의 길이는 60m로 솔로몬 성전의 3.4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에베소는 이방 종교의 총본산이요 수 많은 순례자가 끊임없이 이곳을 방문하였고 에베소 사람들은 신전을 중심으로 경제생활을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신전에서 숭배하는 우상의 형상들을 만들어 많은 수익을 올리는 은장색(銀匠色)조합의 영향력은 에베소에서 가장 지대하였던 것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바로 이 은장색 조합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자 이 은장색 조합은 경제적 큰 타격을 입음은 물론 그 기반까지 흔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 전파가 당장 그들의 생업을 위협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던 데메드리오는 자신의 지반을 옹호하고 이득을 지키기 위해 은장색들로 하여금 소동을 일으켜 바울을 대적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데메드리오는 군중심리를 격발하여 아예 바울을 없애버리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데미 신전을 위하는 것처럼 빙자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행19:27)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얼음판에서 놀던 아이 하나가 얇은 얼음장을 딛다 물에 빠졌습니다. 곁에 있던 소년이 얼른 가서 그를 건져 주었습니다. 물에 빠졌던 아이의 어머니가 와서 칭찬을 했습니다. “정말 너는 용감한 소년이다. 얼음물에 뛰어들어 내 아들을 건져 주다니....” 그러자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가 내 스케이트를 신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웃기는 이야기로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양심적으로 따져볼 때 우리가 하는 소위 선행이라는 것은 결국 나의 유익이나 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가! 우상숭배에 불과했던 아데미 신전을 위하는 척하면서 탐욕에 눈이 어두운 데메드리오는 그의 악업을 버리기는커녕 복음을 정면으로 대적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악업(惡業)을 버리라고 경고합니다. 아데미의 은감실, 즉 모조 은신상을 제조해서 파는 행위는 분명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악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돈을 많이 벌거나 직분이 높으면 좋은 직업이 아니라 그 직업 때문에 사회 분위기가 흐트러지고 청소년들이 타락한다면 악업인 것입니다. 음란 비디오를 만들어 판매하고 술과 마약을 팔고 도박을 조장하는 것은 아무리 수입이 많아도 그 직업은 천하기 그지없는 악업인 것입니다. 그러한 직업은 직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범죄일 뿐입니다. 더구나 우상의 형상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인간을 어리석게 만들기 때문에 악업 중에 악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의 헛됨을 성경, 이사야 44:9-19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허망한 자들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우상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이런 우상을 신이라고 증언하는 자들은 눈이 먼 자들이요, 무지한 자들이니, 마침내 수치만 당할 뿐이다. 아무런 유익도 없는 신상을 만들고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드는 자가 누구냐?
그런 무리는 모두 수치를 당할 것이다. 대장장이들은 사람일 뿐이다.
철공은 그의 힘센 팔로 연장을 벼리고 숯불에 달구어 메로 쳐서 모양을 만든다. 목공은 줄을 늘여 나무를 재고 석필로 줄을 긋고 대패질을 하고 걸음쇠로 줄을 굿는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따라 우상을 만들어 신전에 놓는다.
그는 용도에 따라서 백향목을 찍어 오기도 하고 삼나무와 상수리나무를 베어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저절로 튼튼하게 자란 것이지 그들이 키운 것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머금고 자라는 것이지 그들이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무는 사람들에게 땔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서 그것에게 절하며 그것으로 우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 엎드린다.
우상을 만드는 것과 꼭 같은 나무 반 토막으로는 불을 피우고그 불덩이 위에 고기를 구워먹고 그것으로 배를 불리며 또 몸을 따스하게 하며 ‘아, 불을 보니 따뜻하다’ 하고 말한다.
불을 때고 남은 토막으로는 신상, 곧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숭배하고 그것에게 기도하며 ‘나의 신이여,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하고 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예레미야10:3-5에서 다음과 같이 우상숭배의 헛됨과 우상을 두려워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풍속은 허황된 것이다.
그들의 우상은 숲 속에서 베어 온 나무요, 조각가가 연장으로 다듬어서 만든 공예품이다.
그들은 은과 금으로 그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망치로 못을 박아 고정시켜서 쓰러지지 않게 하였다.
그것들은 논에 세운 허수아비와 같아서 말을 하지 못한다.
걸어 다닐 수도 없으니 늘 누가 메고 다녀야 한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수도 없고 복도 내릴 수가 없으니 너희는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2. 에베소 도시가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아데미 은감실의 판매가 줄게 된 것은, 당대 최고의 우상숭배 도시인 에베소의 변화의 물결을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데미의 은감실의 판매가 줄게 된 것은 바울의 일행이 은감실을 비판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도록 그들을 변화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승리가 얻어졌던 것입니다. 이제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더 이상 우상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거하는 ‘하나님의 전’, 곧 성전이 되었기 때문에, 거대한 아데미 신전도, 아데미 여신 우상도 모두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증언한 그대로입니다. 고린도 전서3:16-17입니다.
(고전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줄을 알게 된 에베소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의 돈을 아데미 신전에 가서 우상에 앞에 바치거나, 아데미의 은감실, 우상을 사는데 쓰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아데미 은감실, 우상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또한 그러한 우상 숭배에 반대하거나 공공연히 항의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에베소에서는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상을 반대하는 시위가 없었으며, 단지 하나님과 교제가 시작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새롭게 솟아나는 새 생명의 세력은 옛 것의 온갖 세력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파했던 사도 바울과 그 일행으로 말미암아 에베소는 변화되어갔던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새 단체를 조직하기 위하여 그 간부 요원으로 열두 제자를 뽑고 경영 상담소에 그들의 자격 심사를 의뢰했다면 이런 회답을 받을 것입니다.
나사렛 목공소 요셉의 아들 예수 귀하
귀하가 의뢰한 12명의 이력서를 검토하고 심리 테스트와 직업 적성 검사를 모아 컴퓨터에 넣어 결과를 뽑았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귀하가 계획하는 새 단체의 간부사원으로 자격 부족입니다. 학력이 너무 낮고 경험 부족입니다. 그들은 단체 관념이 없고 협조 정신이 약하여 경영 관리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서적으로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고 성격이 너무 과격합니다. 안드레는 한 마디로 무능력자입니다. 남을 지도할 사람이 못 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회사의 이익을 제쳐놓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사람들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부정적이고 질문뿐이요 추진력이 없습니다. 마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무슨 짓이나 할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이 두 사람은 사회 혁명을 노리는 과격한 불온 사상에 감염되어 있어 귀하가 생각하는 온건한 집단에는 해로울 것입니다. 귀하가 추천한 12명 중 긍정적인 해답을 드릴 유자격자는 1명뿐입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고 사회 지식도 풍부하며 예민한 실업인의 감각과 판단력이 있습니다. 사교성도 있어 상류 권력층과 접촉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강한 동기와 의욕에 차 있습니다. 따라서 본 경영 상담회사는 가룟 유다 1명만 추천하고 남은 요원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찾아보도록 권고합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 있어서 새 단체인 교회의 터를 닦고 2천년의 세계사를 주름잡은 사람들은 당연히 실격될 수밖에 없는 11명이었고, 오히려 유능한 유다는 탈락했습니다. 이 모순에 대한 대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격 부족이었으나 “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분부를 따라 십자가를 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 하나가 그들 자신을 변화시켰고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사치와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음란과 악행과 악업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복음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풍요로운 사회라 불리워지고 있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손에 주어진 풍요함은 축복도 되고, 많은 악의 근원이 되는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Brain K. Rice) 그러므로 풍요로운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기독교인의 “소명은 이제 부(富)를 성화(聖化)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F.R. Barry). “부(富)를 성화(聖化)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축복의 재물들이 복음을 위해 쓰여지는 성화에 이르지 못하고, 썩어질 육체를 위해 사용되어진다면,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은 더욱 더 부패하고 타락하여 갈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경제가 성화되시어 거룩한 일에 의롭게 쓰임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의 부가 성화되지 않고서는 가정과 자녀가, 나아가 나라 민족이 새롭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의해 움직인 은장색들은 지방색과 종교색이 짙은 우매한 군중들과 합세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자기 대신 동행자가 고초를 겪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연극장으로 뛰어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동료를 구하든 못구하든 생사고락을 함께 하려는 바울의 이러한 행동은,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따라가지 못하는 오늘날의 세대에 훌륭한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19:29-32) (29)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 (30)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31)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32)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이처럼 복음을 위해서라면 폭도들 앞에서 도피하지 아니하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사도 바울이 있었기에 에베소는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에베소 소요사태를 통해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의 소요 사태에 대한 서기장의 태도는 정당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서기장은 시정에 대한 책임자로서 에베소 시의 평안을 위해서 기독교를 보호하려했던 것이지, 그가 기독교를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서기장의 관심은 오로지 아우성치는 군중들로부터 바울의 동료들을 구하고, 소란에 빠진 에베소 시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요된 군중들의 종교를 높여주고, 그들을 달래서 해산시키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서기장은 에베소 시가 조용해지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연유야 어떻든 서기장의 도움으로 기독교는 보호함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외부로부터 보호와 후원을 받게 되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교회의 첫사랑이 식어버린다는 것을 교회사는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계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의 촛대는 수세기 동안 그곳으로부터 옮겨져 버렸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저분한 회교도 마을에 사는 보잘것없는 주민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을 정도입니다. 에베소의 사원은 볼품없는 유적이 되었으며, 항구는 갈대가 무성한 웅덩이가 되었습니다. 물이 괴어서 썩고 있는 에베소의 더러운 저습지들에는 덤불 백로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모여듭니다. 고대 문명이 아주 저급한 미신과 극도로 타락한 죄악을 중심으로하여 번성했던 곳에는, 이제 말라리아와 망각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에베소는 몰락한 도시와 몰락한 교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늘날의 에베소의 이러한 모습은 에베소 시의 보호와 후원을 받다가, 그만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에 의하여 구원받을 수 없었던 도시의 모습인 것인 것입니다. 서기장이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해줄 때, 교회는 가장 위험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복음을 반대하지않고 오히려 복음 전파를 허용하는 우호적인 환경에 도취된 나머지, 우리의 힘을 낭비하고 우리의 고귀한 소명의 의미를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의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성품이 연단을 받아 금과 같이 빛나게 되는 것은 박해의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박해를 받은 교회는 언제나 순수했으며 따라서 능력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세상으로부터 보호를 받은 교회는 늘 위험에 처했으며 아주 종종 무기력해졌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전도를 생명을 삼아 전도하는 사람인데, 하루는 말을 타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 며칠 동안 핍박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깜짝 놀라서 말에서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짓고 있나요? 왜 핍박이 없을까요? 제가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까?” 하고 소리를 내서 기도했더니, 옆 사람이 시끄러웠던지 요한 웨슬레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돌을 맞고는 다시 우러러 보면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젠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데 이렇게 때로는 반대와 핍박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사태평하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반드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순간에 변화되고, 어떤 사람은 점진적으로 변화되기도 하나 아무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변화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복음은 그것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변화시키며, 또한 그들이 사는 가정과 사회, 온 세상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대 세력이 있기 마련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는 바울과 함께 사도들이 복음을 외칠 때, 강한 박해와 핍박이 있어서 결국 예수의 제자들 대부분은 피흘리는 순교를 당해야 했고, 그것이 로마로 확산된 후에는 더 극심한 박해가 일어나서, 악한 황제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을 고백하다가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 죽거나, 불 속에서 한 줌의 재로 화하기도 하고, 창과 칼을 무서워하지 않다가, 장엄한 죽음을 당한 성도들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 복음이 유럽 대륙에서 카톨릭과 갈등하여 끊임없이 고통을 겪다가, 미국 대륙과 호주 등으로 퍼졌고, 다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수많은 토속 종교들과 부딪쳐서 전도자들의 아까운 목숨들이 희생되기도 수 없이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에도, 미신과 전통 종교의 세력 때문에, 선교사들이 천대를 받거나 핍박을 받고 갖은 고난을 다 겪으면서 예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한 때 일부 선교사 사회에는 한국은 선교사의 묘지라고 한 무서운 기록의 일부가 있습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고난을 동반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에 종교가 많고 또 주장도 많지만, 참으로 우리에게 참된 기쁨과 축복과 소망을 주는 것은 오직 예수 복음뿐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이요 나와 세상의 구세주되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우상을 철저하게 떠나고 악업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한 선교사가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행인을 만나서 “당신은 복음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복음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보았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즉 자기 동네에 소문난 깡패요 불같은 성격 때문에 동네 사람들도 무서워하고 아편 중독자에 짐승처럼 사나운 전과자가 있었는데, 그가 예수에 관해서 듣고 나더니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복음에 관해서 잘 듣지는 못했지만, 복음을 보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복음을 증거하는 생활인 것입니다. 말할 수 없으면 자신의 생활로 복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들려줄 수 없다면 생활로 보여주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직접 복음을 전할 수 없으면, 복음을 위해 주어진 부요함을 복음을 위해 헌신하시므로, 성화된 풍요로움으로 변화된 성도 여러분과 이 나라 민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로마를 보는 비전
행 19장 21~22절 / 김경년목사
미국의 유명한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1963년에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에 모였던 25만 명의 청중에게 했던 유명한 설교가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그 내용을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좀 바꿔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역경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꿈은 모든 차별이 사라지는 그런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넓고 푸르른 언덕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장애를 가지지 않은 아이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단지 몸이 불편하고, 정신이 불편하다는 것만으로 평가를 받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차별주의자들과 무관심한 교육관료들이 법과 원칙이 도외시되는 것을 당연시 여기면서 참교육의 길을 가로막고 있지만 모든 아이들이 형제자매처럼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모든 장애를 가진 이들이 염원하는 세상을 함께 보게 될 일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마틴 루터 킹의 한편의 설교는 당시 미국 사회를 새롭게 변화 시키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있다면 꿈입니다.
꿈이 없는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는 결국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위대한 꿈을 꾸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사명수행을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사명을 더 귀하게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는 큰 꿈이 있었습니다. 바로 세계선교의 꿈입니다. 즉 세계선교를 꿈꾸던 그에게 세계선교의 중심무대가 되는 로마선교에 꿈입니다. 당시 로마는 모든 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선교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첫째, 로마를 보는 비전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오늘 본문에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위대한 비전을 먼저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그 놀라운 일을 바울은 시도했습니다. 로마전도가 얼마나 기독교역사에서 위대한 일인지 아십니까? 주후 313년에 로마가 국교로 된 이후에 기독교 역사의 중심이 되었고 서양교회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복음의 세계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전도를 했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가 서양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로마전도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기독교역사는 전혀 다르게 쓰여 졌을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전도는 교회사의 분수령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로마전도는 기독교 역사에서 선교의 획을 긋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그런데 바울이 이 로마에 대한 비전을 어떻게 가졌습니까? 하나님이 곧장 “바울아 너는 로마로 가라”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먼저 바울은 19장 21절에 소원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이런 로마 선교에 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행23:11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소원하는 것을 통해서 비전을 베풀어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비전을 꿈꾸십시오. 하나님은 그 소원을 비전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20대 젊은이들에게 최근 소망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1위가 뭔지 아십니까? 다이어트,
2위는 가족건강,
3위는 로토 복권 당첨 등등
여러분, 이런 소원 말고, 놀라운 소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꿈꾸십시오. 큰 소원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의 소원의 내용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그릇에 담겨있는 내용물을 보면 그 그릇의 가치를 압니다. 밥 그릇은 밥 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릇에 보석을 담으면 보석 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릇에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 만큼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귀한 소원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나의 소원의 내용과 크기에 따라서 나의 가치와 크기가 달라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소원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십시오. 그 속에서 소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장점이 있었습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소원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소원을 결정할 때는 자신의 강점을 살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장점을 보십시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강점이 무엇인지를 보고 거룩한 소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확신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꿈이요 비전이 됩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일을 계획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일을 기대하십시오. 여러분의 강점을 살려 소원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비전을 부여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러면 우리의 꿈을 어떻게 이룰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간 더 있으니라.”
바울은 철저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얼마간 더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 머물렀으나, 에베소에서는 3년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울의 철저한 준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시도하기 위해서 해야할 것은 먼저 준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준비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능력과 실력입니다.
우리는 먼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능력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능력과 실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기도했고 능력으로 준비했고 실력으로 준비했습니다.사도행전 19장 첫 부분에서 바울은 아볼로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성경에 대해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를 합니다.
행19:6절입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19:11-12절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심지어 바울이 사용하는 손수건이나, 혹은 장막을 만들 때 사용하는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낫고,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이 떠나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또한 19:19절에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마술사도 예수를 영접하고 모든 마술책을 불사르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변화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위대한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하여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누구보다가 실력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위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가 실력을 갖추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1)
며칠전에 우리나라 전국 신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교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지 사랑의 교회 전도사님이 1등을 했는데 신문에 나온 그의 소감을 보았습니다. 자기는 설교를 잘 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즉 실력을 갖추려면 준비해야 합니다. 아무런 준비없이 꿈을 이루는 법은 없습니다.
예2)어떤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차례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 신학생의 차례였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은 설교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는 강단에 서서 청중들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아십니까?" 그러자 청중들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고 마쳤습니다. 설교학 교수님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다시 설교하라고 했습니다. 다음 주, 그는 설교준비를 안하고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또 묻습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아십니까?" 그러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여러분이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아는데 제가 말을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마쳤습니다. 교수님은 다음 주에 다시 설교할 것을 명했습니다. 다음주 그는 강단에 서서 또 물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십니까?" 그러자 청중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고, 또 반 정도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신학생이 말하기를, "여러분 가운데 아시는 분은 모르시는 분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모르시는 분들은 아는 분들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설교를 끝냈습니다. 그는 결국 설교학 과목에 낙제점을 맞고 말았습니다.
준비하지 않는 자가 쓰임 받지 못합니다. 준비하지 않는 자는 세계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능력과 실력을 겸비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소원을 품으십시오.
위대한 일들을 계획하시기 바랍니다. 큰 비전을 꿈 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어 나가기 위하여 철저하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실력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에페소 소동에 연루된 사람들
행 19장 23~41절 / 정용섭목사
오늘 본문의 보도는 일종의 해프닝이다.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처럼 시작되고 진행된 이 이야기가 예상 외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우선 이 사태와 연결된 문제를 두 가지만 정리하고 넘어가자. 첫째, 에페소에서 바울이 당한 위기는 오늘의 보도보다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고후 1:8 이하). 둘째, 이 에페소 소동 설화에 누가의 신학적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소동에 연루된 사람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데메드리오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신당 모형을 만들어 파는 수공업 대표자인 데메드리오가 어느 날 동업자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여신 기념품 사업을 통해서 잘 살아오던 우리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 위기는 바울이라는 사람의 복음 전파에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건 신이 아니라는 바울의 주장이 인근 지역에 설득력을 얻게 되어, 자칫 우리의 사업이 큰 타격을 입을 뿐만 아니라 아르데미스 여신과 그 신당이 괄시를 받게 될 것이다.
누가는 지금 데메드리오의 행동을 통해서 바울의 복음과 그 지역 사회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복음은 분명히 그 사회에 거침돌로 작용한다. 물론 복음이 그 사회를 무조건 거부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근본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드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에 대한 전반적인 교회사-신학사적 정황에 대해서는 리차드 니버의 <Christ and Culture>를 참고하라. 복음의 토대인 예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라는 바울의 지적에서도(고전 1:23)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데메드리오는 동업자들에게 경제적인 이유와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바울을 공격한다. 그의 속마음은 어디에 놓여 있을까? 실제로 아르데미스 여신에 대한 염려인가, 아니면 돈벌이에 대한 염려인가? 경제와 종교는 인간들의 영원한 관심사이다. 경제가 받쳐주지 않으면 문명이 발달할 수 없고, 종교가 받쳐주지 않으면 예술이 발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경제와 종교는 인류 문명의 쌍두마차라 할 수 있다.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이 자본주의의 토대라는 막스 베버의 논리를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종교와 경제는 그야말로 찰떡궁합이라 할만하다.
데메드리오가 자신들이 처한 입장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누가는 데메드리오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니다. 그 근거를 우리는 데메드리오가 이런 소동의 주동자인데도 실제로 극장 안에서 극심한 논란이 벌어졌을 때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무대에서 사라지고 다른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사건이 더욱 긴박하게 돌아간다.
바울
데메드리오의 선동은 일정한 효과를 달성했다.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월드컵 때 “대 - 한민국!”을 외치던 응원단처럼 그들은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하고 외치면서 도시를 시끄럽게 했다. 사람들은 바울 대신 그와 동행한 마케도니아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타르고를 붙들어 극장으로 끌고 갔다. 이 대형극장에서 논쟁을 벌이자는 것인데, 그것은 일종의 인민재판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누가는 이런 긴급한 순간에 무대 뒤편에 있던 바울을 잠시 끌어들인다. 바울은 자기의 동료 두 사람이 극장으로 끌려가는 걸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누가는 이 상황에서 바울의 정신적 상태를 설명하지 않는다. 자신의 복음이 에페소의 흥분한 민중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위험에 빠진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이 발동한 것인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누가는 바울을 뜯어말린 집단이 둘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는 신도들이며, 다른 하나는 지방장관들이었다. 바울까지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다는 신도들의 생각은 당연하지만, 지방장관들까지 여기에 동참했다는 것은 의외이다. 이 사람들은 로마 식민지에서 황제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한 동맹신전의 책임자들이다. 최고위 사회 지도층이라 할 이들이 바울의 안전을 염려했다는 것은 기독교의 복음이 반(反)국가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데메드리오를 대표로 한 경제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적대시했지만, 실제로 사회 지도층들은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사실을 누가는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바울이 극장으로 들어갔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본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나설 때와 물러 설 때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게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일지 모르겠다.
알렉산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고 있는 그 와중에 알렉산더라고 하는 유대인이 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를 그렇게 나서게 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본문 32절에 의하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 모를 정도였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이 소동이 자칫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지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고, 말 잘하는 알렉산더를 내세워 변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가 전하는 이 장면은 매우 희화(戱畵)적이다. 알렉산더가 군중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짓을 하자 군중들은 그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라는 구호를 두 시간동안이나 외쳤다고 한다. 결국 알렉산더는 한 마디도 못하고 연단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누가는 무슨 이유로 보기에 따라서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이런 에피소드를 끌어들인 것일까? 그 내막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사도행전의 기본 구도에 따라서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다. 바울 일행의 위기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려고 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매우 졸렬한 것이며, 결국 근본적으로 봉쇄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복음을 방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에페소 시장
이 설화는 세 토막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데메드리오의 선동, 두 번째는 몇 가지 에피소드, 셋째는 시장의 대중 설득이다. 대화나 논쟁이 아니라 근동 종교의 광신적 열정만 난무하는 바로 그 순간에 에페소의 시장(서기관)이 등장한다. 익명으로 그려진 에페소 시장은 이 이야기 앞부분에서 바울을 고소한 데메드리오와 대립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에페소가 아르데미스의 신당과 제우스 아들을 숭배하는 도시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군중들이 끌고 온 기독교인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신당의 물건을 훔친 일도 없고, 여신을 모독한 일도 없다. 데메드리오 일행은 이렇게 선동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정법에 호소해야 한다. 이런 소동에 대해서는 시장이 책임을 져야하며, 더 근본적으로 이런 행위는 불법이다. 시장의 설득에 따라서 흥분했던 군중들을 해산했다. 이 맥락에서 우리는 세 가지 요점을 정리할 수 있다.
1) 기독교 복음은 이방신들을 모독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의 신성을 부인할 뿐이다. 누가는 기독교가 이 세상 문명과 타종교에 대해서 모욕적인 태도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한다.
2) 누가에 의하면 기독교는 세속 사회와 적대적이지 않다. 앞에서 데메드리오의 선동을 다룰 때 기독교 복음이 사회의 거침돌로 작용한다고 설명한 것과 이 대목이 모순처럼 보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기독교가 로마 황제와 신들의 우상숭배 질서에 영합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도적으로 세상과 충돌한 것은 아니다. 누가는 지금 후자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기독교와 사회의 관계를 일치냐, 대립이냐, 하는 양자택일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대응하는 게 바람직한 것 같다.
3) 바울의 복음은 소용돌이 속에서도 승리의 길을 간다. 누가의 눈에 바울의 복음은 그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앞으로 진행되었다. 데메드리오의 고발은 무고가 되었으며, 바울은 직접 논쟁에 나서지 않은 채 승리자가 되었다.
민중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또 한 부류는 민중이다. 누가가 “에페소의 여신 아르데미스 만세!”라는 그들의 고함을 두 번이나 전달하고 있는 이 민중들은 매우 강력한 힘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매우 무기력하게 허물어진다. 그들은 우선 데메드리오에 의해서 선동당한 다음에 극장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는 역할을 하다가 시장의 회유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민중은 예수를 적대적으로 생각한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집단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빌라도 법정에서는 바라바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을 지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처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도대체 민중은 누구인가? 민중이라는 실체는 있는가?
1960년 대 라틴 아메리카 로마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학운동이 해방신학이라고 한다면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일어난 신학운동은 민중신학이다. 이 두 신학은 이전의 정통신학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또는 동정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던 기층민들을 신학의 주체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당파성을 토대에 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1990년대의 현실사회주의 몰락 이후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무기력증을 보이고 있는 민중신학이 앞으로 신학적 역동성을 회복하려면 민중을 이상화하지 말고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요즘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 연구와 연관된 민중들의 태도에서 이런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지난날의 민중을 요즘의 네티즌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대중성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군중, 또는 민중은 윤리보다는 공학에, 세계보편성보다는 민족의식에 쉽게 휩쓸린다. 민중들의 부화뇌동이 정치와 종교 영역이 아니라 과학영역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은 해괴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황 교수 파동은 과학이 아니라 순전히 정치공학적인 사건인 셈이다.
이제 바울의 선교는 대중선동이라는 극한의 혼란 가운데서도 추호도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가게 되었다. 이제는 로마질서의 지도층 인사들 중에서도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누가는 이런 일련의 설명을 통해서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독보적인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사람이 만든 것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수 없다
유민용목사 / 행 19:23-28, 32-41
팀켈러 목사는 ‘내가 만든 신’이라는 그의 책에서 앤드류 카네기의 자서전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그는 33세의 나이에 세계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자신을 성찰하며 “나에게 쓰는 글”을 작성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우상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부의 축척은 우상숭배 중에서도 최악에 속한다. 돈을 숭배하는 것보다 사람의 격을 떨어 뜨리는 우상은 없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성품을 길러 줄 삶을 신중히 선택하려면 나는 매사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나치게 긴 세월을 사업 걱정에 매달려 최단기간에 돈을 더 벌 생각밖에 모른다면, 영영 회복될 가망 조차 없이 삶이 저급해 질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서른다섯에 사업에서 손을 뗄것이며, 앞으로 2년 동안도 오후 시간은 꼭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책을 읽으며 보내고 싶다” 카네기는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후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그의 자서전에 보면 깨닫고 난 후에도 여전히 사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우려 했던 대로 삶의 격을 떨어뜨리는 삶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 우상이 있음을 깨달아도 그 우상을 밀어내는 구원의 힘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구원자 되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죄성과 연약함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시고 죄로 무뎌지는 마음을 날마다 회개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바르고 선하며 큰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점잖고 고상하고 선한 사람도 마음안에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안에서 내 마음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마주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거룩한 삶을 만나게 됩니다.
신상 앞에서 3천배를 하고, 평생을 수도사로 살며 마음 비워내도 또 생겨나는 것이 죄성입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모든 종교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범신론적 세계관은 매우 관용적이고 포용적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는 배타적인 것처럼 보여지는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기독교가 종교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복음화율이 현격히 떨어지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사회속에서 차별을 받는 시대입니다. 상황은 달라도 박해받던 초대 교회 시기와 비슷한 상황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능력에 두지 않고,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비관용적, 비포용적, 비평화적이라고 말하는 종교 다윈주의적 생각도 기독교 진리를 핍박하는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에베소 지역에 살던 주술사들이 회개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엄청난 양의 주술책들을 태워 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데미 여신을 통해 기념품 사업을 하며 살아오던 데메드리오에게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 지역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데미 신으로 만든 기념품을 파는 데메드리오는 세공업자들의 조합장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를 제공해 준 듯 보입니다. 당연히 영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가 생계에 위협을 느끼자 모든 관계자들과 종사하던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를 그냥 방치하게 되면 아시아 지방까지 전세계 아데미 여신을 통해 하던 사업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조합원들에게 불안감을 조장시킵니다. 그의 속마음은 실제로 어땠을까요? 아데미 신전이 위엄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것도 있겠지만 자신의 돈벌이에 대한 염려가 더 컸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류역사 이래 돈은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소유를 통해서 인생을 확인하는 삶에 있어서 돈의 힘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이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은으로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팔며 돈을 버는 일과 아데미 신을 믿는 종교성까지 더해지니 데메드리오 외에 그 일을 하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차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28 이 말을 듣고, 모인 사람들은 크게 화를 내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에베소 사람의 위대한 여신, 아데미 만세!”…32 에베소의 원형극장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마구 떠들어 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라고 기록합니다.
데메드리오의 말에 그 자리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모인 사람들이 원형극장에서 아데미 만세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물질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광장에 모여서 온 힘을 다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우상이 점령한 마음에는 스스로 신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중문화를 이끌어 가는 유명인들을 보면 끊임없는 자기 과시와 소유로 자신을 증명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질의 소유로 우리 가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흔히 갖게 되는 돈에 대한 첫번째 오해는 내가 번 것이니 내 소유라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평생을 돈과 씨름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가난으로 부터 구원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 이면에는 인생의 주인이 돈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성경은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3-5a)
말씀 안에 3가지 동사를 보면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해석해 보면 돈을 섬기면 돈에게 절하게 되고 돈을 만드는 일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지를 점층적으로 전달해 줍니다. 이 유혹을 끊을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세상은 돈으로 인해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돈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돈 사이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임시적으로 우리에게 허락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돈을 소유한 사람은 없으며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가는 사람도 없습니다.(욥 1:21) 이 오해를 바로 잡게 되면 돈에 대한 시각과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각이 달라집니다.
두번째 돈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나타난 생각은 돈이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돈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을 하면서 몸속에 작은 세포들이 안 좋은 세포로 변화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부모가 되어 보니 자녀에게 위험한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도 금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종으로 가는 마음을 돌이켜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2천년 전에도 에베소 지역의 사람들은 매년 3–4월을 아데미의 달로 지정하여 각종 축제와 행사를 벌였고 은으로 만든 아데미 신상 모형을 집에 보관하면서 복을 빌었습니다. 아데미는 풍요의 여신으로 가슴에 풍요를 상징하는 24개의 유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이 신상의 높이가 대략 130미터, 폭이 75미터나 되는 거대한 신전입니다. 당시 이 여신은 ‘위대한 어머니’(the Great Mother)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축복과 풍요를 주는 신이라 여겼으니, 은세공업자들은 아데미 여신의 형상을 만들어 부적이나 작은 신상으로 돈을 번 것입니다. 에베소 소동 사건은 에베소 원형 극장에 분노한 수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아데미를 외친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70,80년대만 해도 한국교회에 나타난 현상은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안에 돈이 우상이 되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건강과 부를 얻고 출세하는 설교를 해야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생활은 어느 편에 설것이가는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바울은 세상의 신을 모독하거나 훔친 일이 없습니다. 단지 아데미의 신성을 부인했을 뿐입니다. 37절을 보게 되면,
37 여러분들이 이리로 끌고 온 이 두 사람은, 아데미 여신의 신전에서 무엇을 훔친 것도 아니고, 또 아데미 여신을 모독한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가끔 뉴스에 보면 열정주의 신자들이 불교의 불상들을 가서 파괴하고 예불을 드리는 절에서 찬송을 부르며 방해는 하는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타종교의 불상보다 더 큰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세상의 방법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으면 선교하려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문을 막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복음을 아픈 마음으로 전하기 보다 우리 삶에 허락하신 GOOD NEWS 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행복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만나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은혜의 여정을 만나게 되는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은 이슬람 열성주의자들처럼 세상과 충돌하고 세상위에서 군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을 보면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델이 오늘날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셔서 함께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역사회에 이루기 위해서 세상이 악하니까 그들의 문화와 충돌해서 대립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변혁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인간이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는 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없이도 사역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주시며 그분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바울은 이 세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문화를 변화시키라는 사명을 강조합니다.(롬 12:1,2) 아무리 위대한 과학 기술도 절대적 가치의 자리에 오를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해 놓은 원리와 법칙을 발견해 낼 뿐입니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어떤 세상의 우상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는 인재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좋은 기독교 사상가의 책이 출판 되면 그 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 뿐입니까? 정치, 문화, 사회, 경제, 의료 과학등 수많은 분야에 기독교 인재들을 길러내게 되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로 키워져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을 성경적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개인적 신앙의 바탕 위에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 문화 양상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고 흘러가고 있어서 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계속적으로 문화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의 문화가 지니는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구별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앤드류 월즈(Andrew Finlay Walls:1928~ 2021)라는 세계적인 선교 역사학자는 ‘어느 문화에도 속하지 않지만 철저하게 민족들에게 녹아 들어가시는 노예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그리스인들의 하나님 테오스, 독일인들의 하나님 갓트, 중국 사람들의 하나님 썅티, 일본인들의 하나님 가미, 이탈리아인들의 하나님 디오, 프랑스인들의 하나님 쥬(Dieu)라고 부르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을 전하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그들의 풍요의 신 아데미를 불러대며 외쳤습니다.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보화를 버려두고 세상에 잃어버린 흩어진 양들을 찾으러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늘의 평안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한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 1:9)
37절로 4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데메드리오에 의해서 선동 당한 다음에 엄청난 힘을 보이는 듯 싶지만 아데미 신전에 모인 수만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데메드리오의 고발은 무고가 되었으며, 바울은 직접 논쟁에 나서지 않은 채 모든 사람들은 해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서기관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소동이 잠잠해진것은 로마의 법과 질서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바른 길을 걸어야합니다. 군중 심리에 끌려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면 안됩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방향이 되어야합니다. 이러한 소동 앞에서도 분별하는 지혜와 믿음의 성숙이 논란과 혼란을 이겨낼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법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로마법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도리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이들의 의무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바라바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도 데메드리오의 말에 분노하여 외치던 군중들의 외침도 오늘날 시대속에서 가려진 진리와 사랑안에서 몸부림 치는 우리들의 모습임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하나님의 길을 걷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눈물과 사랑이 세상속에 속하여 갈길을 잃은 우리의 마음에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도 섬김도 영혼을 향한 마음도 철저히 내안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상은 보이는 거대한 신전만이 아닙니다. 매일 머리속에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생각들, 나의 마음에 채워져있는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알아도 하나님 말씀이 마음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매일 다른 우상들로 채워질 것이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따라 매일 매일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 매일의 은혜가 우리의 한주간의 삶에도 주님의 능력을 됨을 보게 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행 19장 23~27절 / 양향모목사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계만방에 퍼져나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성장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세력의 끊임없는 방해공작도 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떠돌이 유대인 마술사들이 사도바울의 흉내를 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고 하다가 귀신에게 망신을 당하고 나서 마술사들이 마술책을 다 모아서 불태워버린 사건을 통해서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도 많이 와서 자복하며 그동안 바르게 믿지 못했음을 공적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에베소에서의 복음전도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탄은 다시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공격해옵니다. 사탄이 복음이 전파되어 자기들이 설 자리를 잃는 것을 그대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공격해 온 사람들은 은장색들이라고 했습니다. 은으로 신상의 모양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람들이 자신들 밥벌이 사업이 망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바울과 복음 전파자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서 19장 끝 절까지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23절에서 27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에는 그들이 왜 이 도 때문에 적지 않은 소동을 벌렸는지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도로 말미암아
본문 23절에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그리고 26절에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도’라는 단어가 나오면 특별히 반복해서 이 도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도’란 단어의 뜻은 단순히 ‘길’이라는 뜻이지만 성경에서 ‘도’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혹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사는 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도’를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말했습니다. “네가 오늘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또 그 도를 행하고 그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들으라”(신26:17)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인간들의 가장 흉악한 죄는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신 참신이신 하나님을 몰라보고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면서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서 만들어주신 율법이나 여러 규례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기를 좋아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앞서 인용한 신명기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네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도를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과 법도를 지키며 그의 소리를 듣고 따르는 것이 도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이 전한 도로 인하여 소동이 일어났는데 그 도를 설명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고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는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그 외에 사람이 만든 모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이 도’는 더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도’는 “믿음의 도”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말로 “십자가의 도”라고 하기도 합니다.
유다서 1장 3절에서 믿음의 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믿음의 도는 “일반으로 받은 구원”을 말하고 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을 사도바울은 “십자가의 도”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라고 말하면 흔히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나아가는 길이 십자가를 진 것과 같은 고통스럽고 어려운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십자가의 도를 잘못 이해한데서 오는 생각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도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항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저항을 받았고 타락한 중세의 교회에 저항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행함이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비웃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십자가의 도를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일들을 많이 하는 사람이나 교회일수록 이 십자가의 도를 무시합니다.
제가 지난주 낮예배 설교에 제 꿈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은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 꿈이 조금 이루어져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지난 주 오후에 세종로에서 한국교회 일천만 기도운동이라는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고 동참했던 죄를 회개하고 순교자의 신앙을 본받자는 주제로 기도회를 했습니다.
제가 순교자들의 유족을 대표해서 30초 동안 이야기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간단히 감사하다는 인사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생방송으로 중계하고 있는데 말을 끊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 몇 마디 해버렸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만 회개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지 못했음을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하여 한국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외쳐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 도’로 인해 과거에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십자가의 도를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두 마디하고 말아서 그냥 넘어갔지만 좀 더 강하게 이야기 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본문 24절-25절에 이 도로 말미암은 소동을 이렇게 말합니다.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라고 했습니다.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이 있었습니다. 은장색이란 은 세공업자를 말하는데 은을 녹여 물건을 만들거나 은을 두들겨 펴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말합니다. 당시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은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서 적잖은 돈을 벌었습니다. 자신도 돈을 벌었고 자신과 함께 하는 직원들도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데미 신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며 주신인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 태어난 신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의 수호신이며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신으로 믿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 여신을 ‘디아나’(Diana)로 불렀습니다. 진짜 신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리로 상상하여서 만든 가짜 신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을 신화라고 합니다. 우주의 기원이나 국가나 씨족의 기원들을 인간의 머리로 상상력으로 그럴듯하게 만든 이야기를 신화라고 합니다.
데메드리오에게 있어서 이 신이 진짜 신인지 가짜인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유명한 수호신으로 믿고 있고 이 신상을 많이 사갔습니다. 그로 인해서 돈을 많이 벌고 호화스러운 삶을 사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렇게 가짜 신상을 만들어 팔아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 신이 가짜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제 그런 호화스러운 삶을 살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소동을 벌렸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돈으로 연결이 되는 세상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돈을 벌기 위해서이고 돈이면 뭐든지 해결이 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모든 것들이 다 돈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스포츠나 오락이나 여행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상술과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텔레비전 프로도 좀 보려고 하면 얼마나 상품선전을 많이 해대는지 모릅니다. 신문도 인터넷으로 보면 장사꾼들의 선전이 얼마나 집요한지 모릅니다. 공짜로 신문 좀 본다고 하다가 잘못하면 큰돈을 잃도록 유혹을 합니다. 스포츠도 다 장사를 위한 것이고 도박까지 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종교에도 이 상술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거짓종교들이 신을 빙자해서 복을 받게 한다는 것을 빙자해서 돈을 받아 챙기고 있습니다. 중세시대 타락한 교회는 면죄부를 팔기도 하고 신부직을 돈으로 사고팔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도 진리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돈에만 눈이 어두웠습니다. 이단들의 교회를 보면 엄청나게 재산이 많습니다. 종교를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복을 받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돈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참 가난하고 못살았던 시절에 복을 받아서 잘 살아보려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은 미신에서 벗어났고 공부를 할 기회도 주어졌고 출세를 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를 더욱 잘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굳건해지면 참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잘 살게 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교회를 세상에서 잘 살게 해주는 복을 받는 곳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도 세상 복 받기를 좋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종교를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자는 생각들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서 자신들이 얼마나 악한 짓을 하는지 알지 못했던 은장색들처럼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평안한 삶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지옥에 빠지게 하는 엉터리 종교인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재물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를 당하게 되고
본문 27절에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그들의 사업은 승승장구 했는데 이제는 그 사업이 망할 위험에 처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만들어 파는 아데미의 신전은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제는 무가치한 것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데미라는 여신의 위엄마저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신전의 모형을 팔면서 이 신전을 가지고 있으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 그것이 거짓말로 탄로가 나고 말았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이제는 사기꾼이라고 핀잔을 받을 것이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악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을 알면서도 그냥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우리가 그냥 이대로 있다가는 다 망한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아야 하고 복음전하는 사람들을 내쳐야 한다고 선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옳은 일인지 옳지 않은 일인지를 구별하려면 이성적으로 그것이 왜 옳은 일인지를 잘 설명하여서 거기에 동의를 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 이성적이거나 설명을 듣고 깨달을만한 지식이 없습니다. 그냥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느냐에 따라서 행동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제일 큰 문제가 이런 선동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나라를 위해서 옳고 바른 일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여론으로 판단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촛불부대에 몇 명이 모였는가, 태극기 부대에 몇 명이 모였는가? 그것으로 판단을 합니다.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항의를 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일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 꼭 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자기의 이익의 기준에 맞춰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진리는 사람이 많은 다수의 편에 있지 않고 소수의 편에 있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사람은 소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길을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힘들고 어렵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길이고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복음은 비밀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무나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백성만 이 진리를 알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알고 바른 믿음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비록 소수지만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이 십자가의 도로 말미암아 소동을 벌린 사람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그들의 장사를 방해하고 풍족한 삶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들이 섬기던 우상이 헛된 것임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이 십자가의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귀한 믿음을 세상 재물과 세상 욕심과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행 19장 23~25절 / 강성찬목사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 여자 성악가 마리아 앤더슨은 평소에 '나'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관심있게 듣던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오래 살면 살수록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노래 한 곡 부를 때도 작곡가가 있어야 하고 피아노 제조업자가 있어야 하며 반주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속의 나는 작은 협력자일 뿐입니다.'
더불어 번성함이 자연의 원리입니다
아프리카 정글을 탐험한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재미나는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그곳에 사는 수 많은 종류의 짐승들을 한 종류씩 없애 보기로 한 것입니다. 먼저 새를 없애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새소리가 없는 정글은 마치 공동묘지처럼 적막한 숲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원숭이들을 쫓아내 보았습니다. 이가지 저가지를 옮겨 다니며 나뭇가지를 꺾고 숲을 망가뜨리는 원숭이들인줄 알았는데, 원숭이들이 떠난 숲은 나무들이 서로서로 엉키고 덮히면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징그러운 뱀들을 다 제거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천적이 없어진 쥐들이 그 숲에서 판치며 날뛰기 시작했고 쥐들로 인해 해충을 잡아먹던 벌레들이 모두 없어짐으로 숲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은 모든 것이 공존 할 때에 건강하고 질서가 잡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돕고 공존하며 관계가 아름답도록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부근에 '레드우드'라는 공원이 있습니다. 사막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공원에는 우람한 적송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심한 더위와 가뭄 때문에 아무 것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막에 어떻게 레드우드 공원과 같은 숲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물을 주기도 하지만, 여러 나무가 함께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많은 나무가 함께 자라면서 바닥엔 늘 그늘이 지고 습기의 증발이 억제되어 나무가 죽지 않고 숲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울창했던 밀림의 나무들도 한 그루씩 자꾸 베어지면, 앞서의 경우와는 반대로 점차 땅이 보습 기능을 잃고 메마르게 되어 나머지 나무들도 전부 말라 죽고 맙니다.
독불 장군은 재앙을 당하나 더불어 살 때 위기를 이겨 내기도 합니다.
어떤 '평화스런 바다 마을'에 크고 사나운 물고기가 나타나 좀 컸다 싶은 물고기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먹었습니다. 포식성이 강한 이 물고기는 심지어 '그물을 감지하고 피하는 지혜'를 갗춘 물고기까지 잡아먹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주 작은 물고기들만 남았습니다. 어느날 어부가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 결과 이 '크고 포악한 독재자'만 잡혔습니다. 다른 물고기들은 너무 작아 그물 사이로 다 빠져나간 것입니다. 큰 물고기는 그물 사이에서 몸부림치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가를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농부가 새를 잡기 위해서 여기저기 그물을 쳐놓았습니다. 어느 날 여러 마리의 참새들이 그물에 걸려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물에 걸린 참새 가운데 한 마리가 외쳤습니다. '이대로 잡힐 순 없다. 살아야 한다. 자아, 우리 모두 동시에 힘껏 날아 올라 이 그물을 저 큰 나무에 걸어 보도록 하자. 그러면 우린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이 끝나자 마자 참새떼들이 동시에 힘껏 솟구쳐 날아 올랐습니다. 그러자 그 무겁게 쳐져 있던 그물이 움직였습니다. 참새들은 그물을 큰 나무에 걸고서 모두 빠져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한 겨울에 먼 길을 떠나는 두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눈보라까지 치게 되자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런데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산길에 이르렀을 때, 눈 위에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가 '이 사람을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분명히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나그네는 '미쳤소? 우리도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 어떻게 데리고 간단 말이오!'하며 도망치듯 가는 것이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은 나그네는 죽을 힘을 다해 걸었습니다. 눈보라는 더욱 더 심해지고 정신마저 잃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등에 업은 사람의 체온으로 점점 의식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마을에 가까이 왔을 때, 길 옆에는 혼자서 먼저 간 친구의 얼어 죽은 시체가 있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업고 간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지만, 혼자 간 나그네는 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고 만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가게 되어있습니다.
[전 4:9-12]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더불어 살 때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서 가장 무거운 썰매를 끌 수 있는 건강한 말을 뽑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대회에서 1등을 한 말은 2,0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2등을 한 말은 1,8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었습니다. 이 두 말의 주인들은 만약 두 말이 힘을 합하면 얼마만큼의 무게를 끌 수 있을 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두 말이 함께 썰매를 끌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5,500kg이나 되는 썰매를 끌 수가 있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나누어 함께 하기를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혼자서 끙끙거리면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참으로 비능률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불어서 일하기를 권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지며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라도 더불어 함께 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애굽과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억압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과 앗수르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는 일본과 북한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억압했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일본과 북한에서 해방시키고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과 앗수르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애굽과 앗수르까지 구원하시고 더불어 복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일본과 북한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뿐 아니라 일본과 북한까지 구원하시고 더불어 복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더불어 왕래하고 교류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 19:2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더불어 나라들 간에 왕래와 교류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나라들 간에 왕래와 교류가 끊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나라들 간에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역사에서는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간에 우호적인 왕래와 교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속에 더불어 나라들 간에 우호적인 왕래와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여기에 세계주의적, 평화주의적 비전이 극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날에 유다는 세계의 중심이 되어 끊어진 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구심점이 될 것입니다. 유다를 교량으로 하여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가로놓인 전쟁의 통로가 그날에 복음의 통로, 평화의 대로로 바뀔 것입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유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시키시고 이 둘을 화목하게 하심같이, 신자들은 오늘의 한국상황에서 분열되고 갈라진 인간 관계를 회복시키는 자로서 역할을 해야합니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엡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애굽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관계의 우선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며, 그럴 때에 적대적인 관계들도 해소된다는 것입니다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더불어 하나님을 경배하리라 합니다.
(사 19:23)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인간의 역사에서는 이방 나라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사람 고넬료의 집에 가서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아니 지금도 어떤 곳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어떤 흑인 한 사람이 백인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흑인은 목욕을 깨끗이 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은 다음 성경과 찬송을 소중히 들고 백인교회에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받아 줄 리가 없었습니다. 단 한번만이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지만 허락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백인이 아니고 흑인인 것에 뼈저린 아픔을 느끼면서 그 교회의 바깥뜰 계단에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으로 보이는 분이 흰 옷을 입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는 반가워서 부르짖었습니다. “오! 주님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님의 교회에 들어갈 수가 없나요?”주님이 말씀으로 위로하셨습니다. “형제여! 나도 이 교회에 들어가 본적이 없다네.”
그러나 더불어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 대학부에서도 외국인들이 함께 예배 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이 비전을 보았습니다.
[계 7:9-10]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오늘 우리 시대에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과 더불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고,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 더불어 스스럼없이 예배를 드리기를 기도하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더불어 복이 되리라 합니다.
(사 19: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저주 받아 망할 이 세상의 나라들이 더불어 세상의 복이 되는 것입니다. 저주가 복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창 12: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역사는 만남과 나눔과 복 받는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자기를 해롭게 한 사람들에게 저주의 폭탄을 투하하는 보복의 역사이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자기를 반역한 원수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는 축복의 역사입니다.
온 세상을 대표하는 두 초강대국,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 이스라엘이 셋 중의 하나로서 참가하게 될 것인데, 이전에 두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림을 받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복을 중재해 주는 나라로 변모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 합니다.
영적으로 연합된 세 나라에 대한 복을 선언하면서 이 복은 이스라엘에게만 배타적으로 허락되었던 권리와 영예로운 이름이 애굽과 앗수르에게까지 확대 적용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 19: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내 백성(아미) 애굽이여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된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렘 11: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호 2:23)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
니콜라스 2세가 구소련을 다스릴 때였습니다. 소련 경찰은 독일 히틀러 학정을 피하여 소련으로 넘어온 유대인들을 잡아 독일로 넘기면서 짭짤한 수입을 얻었습니다. 소련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과 도망 온 유대인이 함께 길을 가다가 경찰에 들켰습니다. 잡히면 독일로 끌려가 죽을 판입니다. 영주권을 가진 유대인이 힘껏 달아났습니다. 경찰도 있는 힘을 다하여 그를 쫓았습니다. 한참을 달린 후 섰습니다. 경찰이 영주권 제시를 요구했고 유대인은 여유 있게 내밀었습니다. 경찰은 영주권을 갖고도 왜 도망쳤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의사가 약을 먹고 달리라고 했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했습니다. 경찰은 재차 도망쳤다고 다그치자 유대인은 “경찰관님도 나와 같은 의사의 처방을 받은 줄 알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덕분에 영주권 없는 유대인은 감쪽같이 숨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순간적으로 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안전한 피난처를 주십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내 손으로 지은(미아세 야다)앗수르여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진흙으로 빚어 만든 수고로운 작품이란 말입니다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로 쓰임 받았던 앗수르가(10:5)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탈바꿈 할 것을 말씀 합니다.
불란서 루불 박물관에 전시된 조각품 중의 하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의 수작이라 합니다. 그런데 애석한 일은 누가 만들었는지 그 이름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눈물겨운 전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가난한 조각가가 헐벗고 굶주려 가면서도 피와 땀을 짜내는 노력의 결과로 걸작품을 완성시켰는데 하루는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기에 조각품이 얼어 상할까봐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덮어놓음으로써 조각품은 보존이 되었지만 그는 얼어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기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 얼어 죽기까지 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해도 버릴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시켜 가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기업(나할라티)이스라엘이여 합니다
(신 4: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풀무불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시 47:4)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셀라)
이 놀라운 예언은 그날 곧 복음이 만방에 선포되어질 신약 시대에 성취되어질 일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의 사람들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믿고 삽니다. 그러나 영적 기업가들은 물고기 뱃속에서 동전을 끄집어내고 하늘에서 만나를 떨어뜨리고 공중에 메추라기를 날려 보냅니다. 쓴물을 단물로 바꿀 수 있으며 안될 때 되게 하는 능력의 주인공이 영적 기업가들의 특징입니다.
6.25를 맞으며 더불어 교류하게 하시며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며 더불어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더욱 아름답고 구체적으로 임하기를 기도하며 준비하는 모두가 됩시다.
복음의 영향력
행 19장 23~41절 / 김영규목사
에베소 소동의 배경, 아테미 숭배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기 직전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아데미의 숭배자들이 바울과 기독교에 대해서 폭동을 일으킨 겁니다. 앞서서 에베소가 마술의 소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이 실제로 숭배하던 것은 마술사들이 아니라 아데미( #Artemi") 여신입니다.
아데미 여신이 누구일까요? 어떤 영문 성경에는 아데미란 이름 대신 다이아나(Diana)란 이름으로 번역했습니다. 다이아나는 그리스 여신 아데미를 로마식으로 표기한 겁니다. 그러나 그리스 여신 아데미와 에베소 사람이 섬기는 아데미는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섬기는 아데미는 제우스의 딸이며, 아폴로의 누이로서, 처녀 신으로 순결과 공명의 신이며, 사냥의 신이며, 달의 신입니다. 여기에 비해 에베소 사람들이 섬기는 아데미는 모든 인간과 신들의 어머니로서 만물의 보육자요, 인간과 모든 생축의 생산을 담당하는 여신이었습니다.
왜 에베소가 아데미의 중심지가 되었는지? 그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추측을 합니다. 본문 35절에 보면 에베소를 가리켜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35) 제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의 제왕이요 하늘의 신입니다. 그 제우스에게서 우상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많은 학자들이 이것은 운석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어느 날 에베소 지역에 운석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운석의 모양을 보니 유방이 여러 개 달린 여자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제가 에베소에 갔을 때, 아주 작은 아데미 여신상을 구해왔습니다. 사진으로 보여드리면 이렇습니다. 유방이 많이 달린 것은 풍부하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많은 자식을 낳아서, 풍부하게 먹이는 어머니! 그것이 아데미의 이미지입니다. 아데미는 생산의 여신입니다. 풍성한 곡식을 내는 대지, 많은 새끼를 생산하는 가축들, 자녀가 많은 사람들이 다 아데미의 영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아데미를 섬겼을까? 그것은 당시 아데미 신전의 규모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입니다. 이 신전은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나 큰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대략 폭이 200피트(약60미터)에 길이가 400피트(약120미터)나 되고, 높이 60피트(약20미터)의 대리석 기둥 127개가 떠받치고 있었습니다. 이 신전은 주전 550년 경 창건되었다가, 주전 356년 헤라스트라투스란 사람에 의해 불태워진 후 다시 세워졌습니다. 재건된 신전 역시 주후 262년 경 고트족의 침입 때에 파괴되었습니다. 그 파괴된 신전 터가 1863년 J. T. Wood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바울 당시 이 신전을 관리하기 위해서 거세된 남자 사제들과 세 등급의 여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여 사제들은 낮은 신분의 사람들로 신전 매춘부 역할을 했습니다. 아데미 신전에서는 매년 춘분을 전후해서, 아데미의 달이 시작되는 것을 축하하는 큰 축제가 열렸습니다. 오늘 말씀에 언급된 소동은 아마 이 아데미 축제의 시기에 발생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군중들의 소란
소동의 발단은 일단의 은장색들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신전에서 아데미 신을 섬기기도 했지만, 집집마다 작은 신전 모형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기도 했습니다. 이 신전 모형은 매우 다양했는데, 그 중에 은으로 새겨서 만든 고급스런 것들도 있었습니다. 은장색들은 이런 신전과 신상을 만들어 파는 것을 중요한 생업으로 삼았습니다.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인하여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23-24) 이런 은 세공업자들은 나름대로 하나의 길드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데메드리오란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바울과 기독교를 대적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23-27) 첫째는 경제적 이유입니다. 그들은 아데미 신전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하여 신상 판매가 줄고 수입이 줄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아데미 신 때문에 생겨난 종교 산업이 망하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둘째는 자신들의 위신 문제입니다. 아데미 신전 모형이나 신상을 만드는 직업은 당시 사회에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우상을 헛것이라 함으로 그들은 졸지에 헛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셋째는 아데미 여신의 위엄의 문제입니다. 에베소인들은 아데미를 대단한 신으로 여겼는데,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 하여 아데미 여신의 위엄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세 가지 이유를 대기는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생업의 문제입니다. 바울 때문에 수입이 줄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흥분하는 것은 돈 문제에 부딪칠 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는 경제 문제입니다. 오바마 대통령도 경제 때문에 인기가 바닥입니다. 생계를 문제삼는다고 나쁘게 볼 수는 없습니다.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본능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바로 이런 본능을 자극했습니다. 여러분! 큰 일 났습니다. 저 바울 때문에 우리가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외부로 나타난 구호는 “생계”가 아닌 “아데미”였습니다. 핵심은 돈 문제인데, 구호는 아데미 신의 이름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위선적인 모습입니다. 돈 문제를 종교 문제로 포장했습니다. 그래야 더 흥분하니까요. 데메드리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앞서서 구호를 외쳤습니다. 크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여! “Megavlh hJ #Artemi" !Efesivwn”(Great is Artemis of the Ephesians!)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축제에 참여하던 군중들, 시장에서 오락가락 하는 무리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흥분하여 바울의 동료들을 붙잡아 연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 온 시내가 요란하여 바울과 같이 다니는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가는지라,”(28-29) 당시 연극장은 오늘날처럼 실내 극장이 아닙니다. 잠실 야구장처럼 반원형으로 스탠드가 둘러 있고 앞에 무대가 있습니다. 오늘날 발굴된 에베소 연극장의 유적을 보면 2만 5천 명 이상의 관중이 들어갈 정도로 규모가 큽니다. 이런 연극장은 당시 민중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재판을 여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웃기는 것은 군중들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흥분하여 사람을 붙잡아갔습니다. 바울의 동료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가 붙잡혔습니다. 본문에 보세요.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32) 왜 모였는지 몰라요. 그냥 앞에 가는 놈 뒤통수만 보고 따라 온 거예요. 왜 흥분하는지 몰라요. 남들이 흥분하니까 그냥 흥분한 겁니다. 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왔는지 몰라요. 남들이 달려가니까 나도 달려갑니다. 남들이 구호 외치니까 나도 외칩니다. 깊은 사색도 사려 깊은 판단도 없어요. 그것이 바로 군중들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무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입니다. 무리들은 신앙이 없어요. 밥 먹여 주면 우루루 모입니다. 병 고쳐주면 우루루 모입니다. 그랬다가 힘든 얘기 하면 다 떠나갑니다. 군중 심리로 움직이지 마세요. 괜히 남이 촛불 든다고 나도 들고, 남이 구호 외친다고 나도 외치지 마세요. 데모하는 데 삼보일배는 왜 합니까? 자신을 제어하고 자아를 죽이려고 삼보일배를 하는 것인데, 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려고 삼보일배를 합니까? 종교의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설치고 다닙니다.
현대 사회는 많은 부분이 군중심리에 좌우됩니다. 좋은 말로 하면 여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포퓰리즘입니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군중들을 선동하려고 거리로 나옵니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정치를 해야지 왜 거리에서 합니까? 데메드리오는 목적이 있어서 선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동에 놀아난 군중들은 뭡니까? 군중 심리로 움직이지 마세요. 남이 하니까 따라하지 마세요. 과연 이것이 옳은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세요.
사건의 마무리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바울이 무리 앞에 나아가려고 했지만 가까운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과 친분이 있는 아시아의 고관들도 말렸습니다.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30-31)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나섰습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더란 사람을 군중 앞에 내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이 왜 알렉산더를 내세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이 기독교와 유대교는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내세운 것 같습니다. 군중들은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크도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데미여!
사건의 결말은 서기장이 나섬으로써 마무리되었습니다.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신전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왔으니, 만일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오늘 아무 까닭도 없는 이 일에 우리가 소요 사건으로 책망 받을 위험이 있고 우리는 이 불법 집회에 관하여 보고할 자료가 없다 하고, 이에 그 모임을 흩어지게 하니라.”(35-41) 서기장은 에베소 시에서 최상급에 속하는 지도자입니다. 서기장(grammateuv")이란 말은, city clerk, town clerk, 시장 등으로 번역됩니다. 에베소 시를 대표할 만큼 중요한 인물로 생각됩니다. 당시 행정 구조를 보면 이원적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시민 자치 형식의 조직이고, 둘째는 로마 정부가 파송한 총독과 같은 관리들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서기관은 로마의 관리가 아니라, 시민 조직의 관리입니다. 서기장은 법령을 기안하고, 예산을 집행하고, 총독을 도와서 치안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민회가 열릴 때는 그 내용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서기관이 나선 것은 그의 재량권이기도 하고, 그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당시 에베소는 일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치 도시였습니다. 이런 특권은 치안 상태가 좋지 않으면 박탈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은 군중들에게 바로 이점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서기장의 논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에베소 사람들이 아데미를 섬기는 것이나, 에베소가 아데미 신전의 중심 도시인 것은 아무도 부정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소동을 떨지 말라. 둘째로, 데메드리오와 군중들이 붙잡아 온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범죄 행위가 없다. 신전의 물건을 도적질 한 일이 없다. 아데미 여신을 욕한 일도 없다. 그러므로 재판건이 될 수 없다. 만일 고소할 일이나 재판 건이 있으면 정식 재판 날이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그 때에 고소하라! 당시 로마 총독의 재판은 매월 3회씩 열렸으며, 이 공식 재판 외에 열리는 집회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서기장은 군중들에게 겁을 줍니다. 만일 이런 불법 집회가 총독에게 들통 나면 서기장도 문책을 당하고, 소란을 일으킨 주동자도 처벌을 받을 것이고, 에베소 시민들의 자율적인 특권도 박탈당할 것이다! 그러니 당장 집회를 해산하고 돌아가라!
서기장의 노련한 설득에 군중들은 조용히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바울 일행에게 가해졌던 소란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 결과로 최소한 바울 당시에 에베소에서 교회나 기독교가 공개적으로 박해를 당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바람직한 기독교의 영향력
제가 오늘 특별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복음의 영향력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한 기간은 약 2년 반입니다. 그 2년 반 동안에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독교인이 많아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아짐으로써 그 사회가 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앞서서 마술하는 사람들이 회개한 것을 말씀드렸지요? 마술 책을 가져다 불태웠습니다. 다시는 마술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은 오만 드라크마나 되는 분량의 책을 태웠습니다. 책값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술이란 생업을 버렸습니다. 더 이상 그 직업을 갖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데메드리오 사건도 그렇습니다. 은장색들의 수입이 격감할 정도로 에베소 도시의 산업 구조가 바뀐 겁니다. 사람들의 삶에서 우상 숭배 행위가 줄다 보니 우상 제조업이 위축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한 도시의 경제가 변하고 있습니다. 산업이 바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축하할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당연히 삶의 변화가 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변하지 말라고 해도 변합니다. 생각이 변합니다. 사상이 변합니다. 가치관이 변합니다. 말씨가 변합니다. 생활 습관이 변합니다. 취미가 변합니다. 직업이 변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성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2-26)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8-29)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1-32)
사람이 변하면 주변이 변하고, 사회가 변합니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들어갈 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우상 숭배가 제거되었습니다. 그리스 로마는 신화의 제국입니다. 온갖 신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신화들이 삶에서 제거되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격투기가 폐지되었습니다. 노예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9) 천부 인권의 사상, 자유와 평등의 사상도 성경을 배경으로 합니다.
최근 발생한 세계 금융 위기가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시작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미국은 기독교로 시작 된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다. 모든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금지한 나라입니다. 지금 미국을 움직이는 사상은 기독교 사상이 아니라 실용주의 배금사상입니다. 극도의 개인주의, 최대한의 자유, 법치를 가장한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돈이 된다면 뭐든지 하는 탐욕주의가 미국의 금융을 지배했습니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합니까? 노력의 대가보다 천 배 만 배 더 가져가니까 문제입니다. 노력이라고 다 같은 노력입니까? 도둑놈이 도둑질하려고 애쓰는 것도 노력입니까? 사기꾼이 사기 치려고 노력하는 것도 노력입니까? 폭력배가 다른 사람 두들겨 패는 것도 노력입니까? 남 보다 머리 좋은 것을 이용해서 불법적으로 떼돈을 버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대한민국에 기독교 인구가 천 만 명입니다. 그런데 왜 사회가 이렇게 어지러운가요? 복음이 삶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무기력한 기독교,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기독교 때문입니다. 언젠가 목사님들끼리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라스베가스 교회 목사님은 어떤 설교를 해야 할까? 교인들 대부분이 도박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매춘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들에게 무슨 설교를 해야 될까요? “여러분은 비록 도박에 종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천국 갑니다!” “여러분은 몸을 팔고 간음 죄를 짓고 있지만 예수만 믿으면 천국 갑니다. 안심하세요!” 이렇게 설교해야 합니까? 물론 그렇게 설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인답게 삶이 변해야 합니다. 생각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고, 직업이 변하고, 그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그래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참 복음의 결과입니다.
한 사람이 변하면 가정이 변합니다. 가정이 변하면 사회가 변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저는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대대로 우상을 섬기던 집안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새로운 가문이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가정을 세우고 있습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방식이 신앙적입니다. 직업 선택이 신앙적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직업을 선택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의 기반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사회적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경제 생활의 패턴이 달라졌습니다. 직업이 변했습니다. 한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가정이 변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변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 정윤 교회가 있음으로써 강동 하남이 변할 수 있기 바랍니다. 남의 탓 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변하면 남도 변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복음의 능력을 나타냅시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