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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무례(恭而無禮)
공손하되 예가 없다
恭 : 공손할 공(㣺/6)
而 : 말 이을 이(而/0)
無 : 없을 무(灬/8)
禮 : 예도 례(礻/13)
子曰: 恭而無禮則勞하고 愼而無禮則시하고 勇而無禮則亂하고 直而無禮則絞니라. 君子篤於親이면 則民興於仁하고 故舊不遺면 則民不偸니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공손하되 예(禮)가 없으면 수고롭고, 삼가되 예(禮)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스럽되 예(禮)가 없으면 혼란하고, 강직하되 예(禮)가 없으면 너무 급하다. 군자(君子)가 친척에게 후하게 하면 백성들이 인(仁)에 흥기(興起)하고,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의 인심이 각박해지지 않는다."
(태백 2)
본래 이 문장의 본지는 태백편의 전반적인 내용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태백'이 그 부친의 뜻을 헤아려서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한 것이야말로 예(禮)의 근본을 지키는 행위라고 공자는 생각했다.
또한 공자께서는 아무리 훌륭한 '공손함[恭]'도, '자신을 삼가 낮추는 행위[愼]'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勇]'도, 그리고 '곧은 절개의 정직함[直]'도 '예'라는 원칙과 자제력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단언한다.
주지하다시피 ‘예’는 ‘법’과 다르다. ‘법’은 강제성과 형벌이 뒤따르지만, 어쩌면 ‘예’라는 것은 사람들끼리의 규약이며 약속에 불과하다. 따라서 예를 지키지 않았다고 처벌을 받거나 구속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서 ‘예’는 왜 이렇게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그것은 ‘예’라는 것이 인류가 오랫동안 삶을 영위하는 과정 속에서 얻어낸 경험적 지혜의 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산길을 걷다 보면 나뭇가지에 색깔이 있는 리본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리본을 매달아 놓은 사람 덕분에 초행의 산길을 걷는 누군가는 길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예'도 이와 같아서, 이미 선현이 만들어 놓은 준칙을 깨닫고 따라가면 그로부터 얻는 평온함의 질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고차원적인 선험적 지식의 그 무엇도 아니라는 점이다. 즉 '예'는 두뇌를 통하여 지식을 습득해온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몸으로 체득된 행동양식인 셈이다.
공자는 ‘과공비례(過恭非禮)’라 하여 공손함이 너무 지나쳐도 예가 아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또 공자는 ‘공손하기만 하고 예가 없는 것’ 역시 탐탁치 못한 모습이라고 평가절하 한다.
사람이 그 누군가에 지나칠 정도로 공손하기만 하고 절제된 아름다움[節制美]가 없다면, 그 사람은 육체적으로 수고롭기만 하면서 그 공손함의 행동이 오히려 노동에 불과하게 될 거라고 경고한다.
이와 같이 예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아름다운 약속이자 규율과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 행위를 절제시켜 줄 수 있는 준칙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곧 유교가 '조화로움[和]'을 추구하는 이상사회 구현의 한 방법일 것이다.
예(禮)와 무례(無禮)
예(禮)란 무엇인가? 예(禮)자가 지닌 의미를 풀이하면, 한 해 동안 지어 수확한 농산물을 제기(祭器)에 풍성하게 담아서(豊: 풍성할 풍) 제사상에 올려놓고 하늘에 기원(示: 보일 시)하는 모양이다. 즉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어 그 수확물을 하늘에 올리는 제사가 예이고, 그 절차가 예절(禮節)이다.
지금에 맞추어 예를 풀이하면, ‘사회에 나아가 착한 인성과 덕을 실천하고자 할 때에 행동화에 필요한 기준. 또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 필요한 이성적 실행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예란 ‘하늘이 부여한 착한 인성에 근거해 사회생활을 실행하기 위해서 지녀야할 가치 기준이고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논어에 공자께서 “공손하더라도 예가 없으면 고달프고, 신중하더라도 예가 없으면 두려우며, 용맹스럽더라도 예가 없으면 문란하고, 강직하더라도 예가 없으면 박절하다(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고 하였다.
사람됨이 공손하더라도 예를 모르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게 되어 몸이 고달파진다. 이 때문에 ‘勞(수고로울 노)’자를 썼다.
신중하기만 하고 예를 모르면 결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심적인 두려움으로 공황에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 愼(두려워할 사)’자를 썼다.
용맹하기만 하고 예를 모르면 일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만다. 이 때문에 ‘亂(어지러울 난)’자를 썼다.
강직하기만 하고 예를 모르면 일을 빡빡하게 조이기만 하여 더욱 꼬이게 할 뿐이다. 이 때문에 ‘絞(꼬다 또는 꼬이다 교)’자를 썼다.
생각해보면 공손함과 신중함은 일을 해나감에 있어서 실수를 줄일 수 있는 필수 항목이며, 그 일을 완성시킴에 있어서도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이다. 반면에 용맹함과 강직함은 일에 있어서 추진 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에 또한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공손하고 신중하더라도 일을 합당한 절차 없이 한다면, 애는 애대로 쓰면서도 마음만 태우다가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이와 상대적으로 용맹하기만 하여 행하는 절차와 법도를 무시한다면 이 또한 일을 어지럽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강직하기만 하여 융통성이나 여유를 지니지 못해도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가까이 해야 할 사람에게는 더욱 예를 지키며, 돈독함을 쌓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아껴주고 싶은 생각이 넘쳐나도록 하는 지혜를 지녔다.
또 오래된 친구를 버리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가볍게 여기거나 얕보지 못하도록 하는 현명함도 지녔다. 그래서 진정(眞情)을 예절에 담아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이를 실천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을 넓혀나가는 본보기로 삼는다.
무례한 자로(子路)를 빼닮은 한나라 승상 주박(朱博)의 최후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 언언(言偃)이라는 사람이 공자(孔子)에게 “예(禮)가 이토록 시급한 것입니까?”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대개 예라는 것은 선왕(先王)이 하늘의 도리를 이어받아 그것으로써 사람의 정(情)을 다스린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잃은 자는 죽고 예를 얻은 자는 살아간다.”
사람의 정[人情]을 다스리는 것이 예라면 다스리지 못한 것이 비례(非禮), 무례(無禮)가 된다. 그리고 예기에서는 흥미롭게도 사람의 정을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것 7가지, 즉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이라고 말한다. 이는 따로 배우지 않고서도 발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마땅함[義]으로 다스려야 한다. 예기에서는 사람의 정을 다스리는 마땅함으로 부모의 자애로움[慈=子], 자식의 효도[孝], 형의 사랑[良], 아우의 공순[弟=悌], 지아비의 의로움[義], 지어미의 순종[聽=從], 어른의 베풂[惠]과 아이의 따름[順], 임금의 어짊[仁]과 신하의 충성스러움[忠] 10가지를 제시한다. 몇몇을 제외한다면 현대사회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결국 마땅함으로 사람의 정을 다스리는 것이 예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곧바로 그동안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지인(知人)의 문제로 연결된다.
“사람은 마음을 숨기고 있어 그 속을 헤아릴[測度] 길이 없으며 사람의 좋고 나쁜 점[美惡]은 모두 그 마음 안에 있어 그 얼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단 한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알아내고자 한다면 예가 아니고서 무엇으로 할 수 있으랴!”
“곧되 예가 없으면 강퍅해진다”
따라서 먼저 예를 배워서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비례, 무례, 결례(缺禮), 실례(失禮) 등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말이다.
이같은 예기의 도움을 받게 되면 우리는 논어(論語) 태백(泰伯)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단순히 예를 갖추라는 도덕 명령이 아니라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비결임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공자는 말했다.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恭而無禮] 몸만 힘들고[勞] 조심하되 예가 없으면[愼而無禮] 두렵고[葸=恐] 용맹하되 예가 없으면[勇而無禮] 위아래 없이 문란해질 수 있고[亂] 곧되 예가 없으면[直而無禮] 강퍅해진다[絞].”
날 때부터 공이례(恭而禮), 신이례(愼而禮), 용이례(勇而禮), 직이례(直而禮)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사람이다. 그 다음은 그것을 배워서라도 알아야[學而知之] 한다. 여기서 무례(無禮)란 예를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바로 이 예의 자리에 다시 사리분별 혹은 현실감을 집어넣어 다시 해석해 보면 그 뜻은 훨씬 명확하게 드러난다. 때와 장소를 제대로 가려가며 공손하고 조심하고 용맹하고 곧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그 사람의 공손, 조심, 용맹, 곧음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이 상황에 맞게 행동을 하는지[隨時處變]를 보고서 판단할 때 사이비(似而非)가 아닌, 진짜 그 사람의 진면목을 꿰뚫게 되는 것이다.
정장(亭長)에서 승상에 오른 주박
한서(漢書) 주박전(朱博傳)에 따르면 주박(朱博)은 두릉(杜陵)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해 젊은 시절 현(縣)의 급사(給事)로 정장(亭長)이 됐다. 우리 식으로 보면 동장 정도 되는 말직이다.
도적을 잡는 일이 있을 때는 과감하게 나서 피하지를 않았다. 점차 승진해 (현의) 공조(功曹)가 됐고 협객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이때 전장군 소망지(蕭望之)의 아들 소육(蕭育)과 어사대부 진만년(陳萬年)의 아들 진함(陳咸)도 재주가 뛰어나 이름이 있었는데 박(博)은 이 두 사람 모두와 우정을 나눴다.
그런데 진함이 어사중승으로 있으면서 궐내[省中=禁中]의 일을 누설한 일에 연루돼 수감에 처해졌다. 주박은 관리를 그만두고 몰래 정위(廷尉)의 관아에 들어가 함의 일을 훔쳐보았다.
진함이 고문을 당하며 아주 고생을 하자 주박은 의원(醫員)인 것처럼 꾸며 옥 안에 들어가 진함을 만났고 죄에 걸려든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주박은 감옥 밖으로 나와 다시 성과 이름을 바꾸고서 진함이 수백 대나 맞는 등의 고초를 겪고서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것임을 입증하여 감형될 수 있게 해준다. 진함은 정식 논죄를 받아 감옥에서 나왔다. 덕분에 주박은 이름이 났으며 군의 공조가 됐다.
드디어 지방의 행정을 맡아 태수로 나갔다. 성실하고 진취적이었기에 가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는 좋은 평가를 얻었다. 다만 배움이 짧은 데다가 나아가 유학을 싫어했다.
유리(儒吏)들은 수시로 옛 기록을 운운하며 글을 올렸으나 주박은 그들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태수란 한나라 관리이며 3척(짜리 죽간에 실린) 율령이면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데 무슨 유생들이 함부로 성인(聖人)의 도리 운운하는가? 정 그런 도리를 따르고 싶거든 훗날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에게 가서 진설(陳說)하라.”
여기서 우리는 논어 선진(先進)편에 나오는 자로(子路)를 떠올리게 된다. 한번은 자로가 계씨(季氏)의 가신이 되어 공자의 또 다른 제자인 자고(子羔)를 비읍(費邑)의 책임자로 삼자 공자는 탄식했다. “남의 자식을 해치는구나!”
이에 자로가 맞섰다. “백성과 사람이 있고 사직(社稷)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책을 읽은 뒤에야 학문을 하겠습니까?”
공자는 말했다. “바로 이런 너 때문에 나는 말 잘하는 사람[佞者]을 미워하는 것이다.”
자로는 전형적으로 용이무례(勇而無禮)한 자다. 주박의 말은 자로의 말 그대로다. 영자(佞者)에 대한 공자의 부정적인 인식은 이 구절만 봐서는 명확히 알기 어렵다.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서 수제자인 안연(顔淵)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책에 관해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라의 책력을 시행하고 은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나라의 면류관을 써야 한다. (그런 연후에) 음악은 순임금의 음악인 소무로 하고 정나라의 음악을 추방하며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왜냐하면) 정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위태롭기 때문이다.”
자기는 물론이고 나라를 망칠 사람이 바로 영자인 것이다.
실무 능력이 뛰어났던 주박
그러나 주박은 이재(吏才), 즉 관리로서 다스리는 재주가 뛰어났다. “박은 군을 다스리면서 늘 속현(屬縣)들에 명해 각각 자기 현의 호걸들을 써서 대리(大吏-고위관리)로 쓰도록 하고 문재(文才)와 무재(武才)를 감안해 적재적소에 배치토록 했다. 현에 큰 도적이나 그 밖의 다른 비상사태가 있으면 즉각 문서를 보내 엄하게 책망했다. 이에 그들이 온 힘을 다해 효과가 있으면 반드시 큰 상을 주었고 간교함을 품고서 임무를 소홀히 할 경우에는 즉각 주벌을 시행했다. 이 때문에 호강(豪强)한 자들은 두려워하여 복종했다.”
치적이 뛰어나 도성에 들어가 임시 좌풍익(서울시장)이 됐고 임기를 다 채우자 정식 좌풍익이 됐다. 그가 좌풍익을 할 때 법리와 총명(聰明)은 설선(薛宣)에 미치지 못했지만 무략과 계책이 많았고 비밀 연락망을 잘 조직했으며 이익을 별로 탐하지 않았고 과감하게 주살(誅殺)을 시행했다.
그러나 또한 큰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아래 관리들은 이로 인해 온 힘을 다했다. 이에 그는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탄탄대로 승진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애제(哀帝) 때 신하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승상(丞相)의 자리에 오른다.
그런데 그에 앞서 애제의 할머니 정도(定陶)태후가 존호를 원했을 때 태후의 사촌동생 고무후(高武侯) 부희는 대사마(大司馬)로 있으면서 승상 공광(孔光), 대사공(大司空) 사단(師丹)과 함께 공동으로 바른 의견을 고수했다.
반면에 공향후(孔鄕侯) 부안(傅晏) 또한 태후의 사촌동생이었는데 아첨을 하면서 태후의 뜻을 따르고자 하여 마침 주박이 새롭게 지방에서 불려와 경조윤이 되자 함께 교결을 맺고서 존호를 받게 하려는 계책을 만들어 (애제가) 효도를 넓히게 하려 했다.
이로 말미암아 사단이 먼저 면직됐고 주박이 그를 대신해서 대사공이 되자 여러 차례 애제가 한가한 틈을 타서 봉사를 올려 말했다. “승상 광의 뜻은 자기 한 몸이나 지키는 데 있어 나라를 제대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대사마 희는 지존(至尊)의 지친(至親)이면서 대신에게 아부하여 당파를 이뤘으니 정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애제는 드디어 부희를 파직시켜 내보내 봉국으로 나아가게 했고 공광을 면직시켜 서인으로 삼고서 주박을 광을 대신해 승상으로 삼고서 양향후(陽鄕侯)에 봉하고 식읍은 2000호로 했다.
이에 주박은 글을 올려 사양하며 말했다. “고사에 따르면 승상을 봉할 때 1000호를 넘지 않았는데 신 홀로 제도를 뛰어넘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1000호를 반납하고자 합니다.”
태후에게 영합하다가 탄핵당해
애제는 허락했다. 부(傅)태후는 부희에 대한 원망이 그치지를 않아 공향후 안으로 하여금 은근히 승상에게 눈치를 주어 부희의 후(侯) 작위를 박탈하도록 아뢰게 했다.
주박은 조(詔)를 받고서 어사대부 조현(趙鉉)과 토의를 하니 조현이 말했다. “그 일은 이미 전에 결정되었는데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박이 말했다. “이미 공향후가 가져온 (태후의) 뜻에 따르기로 했소. 필부와의 약속이라도 죽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하물며 지존이겠습니까? 박은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오.”
현은 즉시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박은 오직 희만을 배척하는 글을 아뢸 수가 없어 예전에 대사공이었던 범향후(氾鄕侯) 하무(何武)도 전에 역시 죄에 연루되어 봉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어 일이 부희와 유사하다고 여겨 곧장 함께 아뢰어 말했다. “희와 무는 예전에 자리에 있으면서 모두 정치에서는 무익했는데 비록 이미 물러나서 면직됐지만 작위와 봉토는 그대로 봉받고 있으니 마땅한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모두 벗겨서 서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상(황제)은 부태후가 평소에 일찍이 희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박과 현이 태후의 뜻을 이어받은 것으로 의심하고 곧바로 현을 불러 상서로 오게 하여 상황을 물어보니 현이 두려워하여 실상을 자백하자 조서를 내려 좌장군 팽선(彭宣)과 중조(中朝)에 있는 신하들이 함께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자살로 마감한 주박
이에 선(宣) 등이 주박을 탄핵하여 아뢰었다. “박은 재상이고 현은 상경(上卿)이며 안은 외척으로 그 지위가 특진(特進)이니 모두 팔다리와 같은 대신으로 상의 신임을 받고 있는데도 온 정성을 다해 공을 받들고 은혜와 교화를 넓히는 일에 힘써 백료들을 앞서 이끌 생각은 하지 않고서 모두 아는 바와 같이 희와 무의 일은 이미 성은에 따라 결정된 일이며 3번이나 고쳐서 사면되었는데도 박은 그릇된 도리를 고집하며 폐하의 성은을 훼손하고 외척과 신의를 지킨다며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저버리고 정치를 어지럽게 하면서 간사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아랫사람에게 붙어 위를 기망하려 하였으니 신하 된 자로서 불충이자 부도입니다. 현은 박이 말한 것이 법에 어긋나는 것임을 알면서도 대의를 굽혀 아첨하고 따라 큰 불경을 저질렀습니다. 안과 박이 희를 면직시키자고 토의한 것은 예를 잃은 것이며 불경입니다. 신은 청컨대 알자에게 조서를 내리시어 박, 현, 안을 불러 정위에 이르러 조옥(詔獄)에 가둬야 할 것입니다.”
제(制)하여 말했다. “장군, 중(中) 2000석, 2000석, 제(諸)대부, 박사, 의랑을 함께 토의하라.”
우장군 교망(蟜望) 등 44인은 “선(宣) 등이 말한 대로 허락하셔야 합니다”라고 했고 간대부 공승(龔勝) 등 14명은 “춘추(春秋)의 대의에도 간사하게 임금을 섬길 경우에는 일반 형벌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노(魯)나라 대부 숙손교여(叔孫僑如)는 노나라 공실을 제 마음대로 하려고 그 족형인 계손행보(季孫行父)를 진(晉)나라에 참소했고 진나라에서는 행보를 잡아가두어 노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는데 춘추는 이 일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 부안은 폐하의 명을 따르지 않아 일족을 패망으로 이끌고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게 만들었으며 대신을 협박해 상을 기망하려 했으며 본래부터 계책을 주도하여 혼란을 빚어냈으니 박, 현과 같은 죄이며 모두 부도(不道)에 해당합니다”고 말했다.
상은 현의 죽을 죄를 3등급 감형했고 안의 식읍 4분의 1을 삭감했으며 알자에게 지절을 주어 승상을 불러 정위의 조옥에 보내게 했다. 주박은 자살했다.
자로를 닮은 주박
딱히 악행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속된 말로 새로운 줄에 서보려다가 명분에 밀린 경우다. 자로도 위(衛)나라의 권력투쟁에 휘말려 제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
묘하게도 반고(班固) 또한 다른 맥락에서이긴 하지만 주박의 삶을 한 줄로 압축하면서 자로를 끌어들인다. “박(博)은 열심히 내달려 진취(進取)한 바가 컸으나 도리와 다움[道德]을 생각지 않았으니 이미 뭐라 칭송할 만한 말이 없고, 또 효성(孝成·성제)의 세상을 보았고 대신으로 위임을 받아 이름을 빌려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세상의 주인[世主]이 이미 바뀌었다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예전과 달리하면서 다시 정씨(丁氏)와 부씨(傅氏)에게 붙어 공향후(孔鄕侯)의 뜻에 맞춰 순종했다. 일이 발각돼 힐책을 당했고 드디어 꾐에 빠졌으니 말은 궁하고 사실은 명확해 짐독(鴆毒)을 마셨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오래되었구나! 유(由)의 거짓을 행함이여!’라고 했으니 박 또한 그러했도다.”
반고가 여기서 인용한 것은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의 일부다. 공자가 병이 더 심해지자 자로는 또 다른 제자를 스승의 가신으로 삼았다.
병에 차도가 있자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 되었구나! 유의 거짓을 행함이여! 가신이 없는데 가신을 두었으니. 내가 누구를 속였는가? 내가 하늘을 속였구나!”
공자는 임금이 아니기 때문에 신하를 둘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자로가 하늘을 속이고서 스승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공자에게 가신을 둔 것에 대한 공자의 탄식이다. 세상의 이치, 즉 예를 몰랐던 자로나 주박은 공자의 말대로 제 수명을 다하지 못했다.
▶️ 恭(공손할 공)은 ❶형성문자로 心(심)의 변한 모양이 뜻을 나타내는 마음 심밑(㣺=心, 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두 손을 마주잡다'의 뜻을 가진 共(공)으로 이루어졌다. 공손한 마음 가짐의 뜻이다. ❷회의문자로 恭자는 '공손하다'나 '받들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恭자는 共(함께 공)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共자는 양손으로 물건을 받드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함께'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본래 '공손하다'는 뜻은 龍(용 룡)자가 들어간 龔(공손할 공)자가 쓰였었다. 갑골문에 나온 恭자를 보면 용을 양손으로 떠받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경배한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에서 용은 길상(吉祥)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신성시됐었다. 그래서 갑골문에서는 용을 받드는 모습으로 그려져 '삼가다'나 '공손하다'는 뜻을 표현했었지만 소전에서는 글자가 간략화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恭(공)은 ①공손(恭遜)하다, 예의 바르다 ②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직분(職分)을 다하다 ③받들다 ④섬기다 ⑤높이다, 존중(尊重)하다 ⑥고분고분하다, 순종(順從)하다 ⑦조심하다 ⑧크다 ⑨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공경 경(敬), 공경할 흠(欽), 공경할 지(祗), 겸손할 손(遜), 공경할 건(虔)이다. 용례로는 삼가서 공손히 섬김을 공경(恭敬), 공경하고 겸손함을 공손(恭遜), 공손하고 온순함을 공순(恭順), 삼가 생각함을 공유(恭惟), 공손하고 삼감을 공건(恭虔), 공손하고 검소함을 공검(恭儉), 공손하고 부지런함을 공근(恭勤), 공손히 대접함을 공대(恭待), 공손하고 삼감을 공근(恭謹), 삼가 기뻐함을 공열(恭悅), 공손하고 말이 없음을 묵공(恭黙),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춤을 뜻하는 말을 겸공(謙恭), 극히 공손함을 극공(極恭), 삼가고 존경함을 경공(敬恭), 삼가서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는 모양을 건공(虔恭), 공손하지 아니함을 불공(不恭), 온화하고 공손함을 온공(溫恭), 인정이 많고 공손함을 독공(篤恭), 지나치게 공손함을 과공(過恭), 다할 수 없이 지극히 공손함을 지공(至恭), 삼가 새해를 축하한다는 말을 공하신년(恭賀新年), 공손하면 수모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을 공즉불모(恭則不侮), 언행이 공손하지 아니하고 건방지며 버릇이 없다는 말을 불공불손(不恭不遜), 공손한 태도가 없이 함부로 하는 말을 불공지설(不恭之說),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난다는 말을 과공비례(過恭非禮), 주는 것을 물리치는 것은 공손하지 못하다는 말을 각지불공(却之不恭), 남의 말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담아 듣는 것을 이르는 말을 세이공청(洗耳恭聽), 처음에는 거만하다가 나중에는 공손하다는 뜻으로 상대의 입지에 따라 태도가 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전거후공(前倨後恭) 등에 쓰인다.
▶️ 而(말 이을 이, 능히 능)는 ❶상형문자로 턱 수염의 모양으로, 구레나룻 즉, 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을 말한다. 음(音)을 빌어 어조사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而자는 '말을 잇다'나 '자네', '~로서'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而자의 갑골문을 보면 턱 아래에 길게 드리워진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而자는 본래 '턱수염'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而자는 '자네'나 '그대'처럼 인칭대명사로 쓰이거나 '~로써'나 '~하면서'와 같은 접속사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하지만 而자가 부수 역할을 할 때는 여전히 '턱수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而(이, 능)는 ①말을 잇다 ②같다 ③너, 자네, 그대 ④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⑤만약(萬若), 만일 ⑥뿐, 따름 ⑦그리고 ⑧~로서, ~에 ⑨~하면서 ⑩그러나, 그런데도, 그리고 ⓐ능(能)히(능) ⓑ재능(才能), 능력(能力)(능)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30세를 일컬는 말을 이립(而立), 이제 와서를 일컫는 말을 이금(而今), 지금부터를 일컫는 말을 이후(而後), 그러나 또는 그러고 나서를 이르는 말을 연이(然而), 이로부터 앞으로 차후라는 말을 이금이후(而今以後), 온화한 낯빛을 이르는 말을 이강지색(而康之色), 목이 말라야 비로소 샘을 판다는 뜻으로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일이 지나간 뒤에는 아무리 서둘러 봐도 아무 소용이 없음 또는 자기가 급해야 서둘러서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갈이천정(渴而穿井),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아주 다른 것을 이르는 말을 사이비(似而非), 공경하되 가까이하지는 아니함 또는 겉으로는 공경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꺼리어 멀리함을 이르는 말을 경이원지(敬而遠之), 뾰족한 송곳 끝이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는 뜻으로 뛰어나고 훌륭한 재능이 밖으로 드러남을 이르는 말을 영탈이출(穎脫而出),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웠다는 뜻으로 마음을 편안히 하고 잠잘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고침이와(高枕而臥), 형체를 초월한 영역에 관한 과학이라는 뜻으로 철학을 일컫는 말을 형이상학(形而上學),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등에 쓰인다.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를 이르는 말을 무원고립(無援孤立),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무궁무진(無窮無盡),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능(無所不能), 못 할 일이 없음 또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엇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불통지(無不通知),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기를 일컫는 말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버지도 임금도 없다는 뜻으로 어버이도 임금도 모르는 난신적자 곧 행동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부무군(無父無君),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러움을 일컫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자기에게 관계가 있건 없건 무슨 일이고 함부로 나서서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불간섭(無不干涉),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몹시 고집을 부려 어찌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가내하(無可奈何),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용지물(無用之物) 등에 쓰인다.
▶️ 禮(예도 례/예)는 ❶형성문자로 豊(례)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보일 시(示=礻; 보이다, 신)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신에게 바치기 위해 그릇 위에 제사 음식을 가득 담은 모양의 뜻을 가진 豊(풍, 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제사를 풍성하게 차려 놓고 예의를 다하였다 하여 예도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禮자는 '예절'이나 '예물', '의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禮자는 示(보일 시)자와 豊(예도 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豊자는 그릇에 곡식이 가득 담겨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예도'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도'라는 뜻은 豊자가 먼저 쓰였었다. 고대에는 추수가 끝나면 신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때 수확한 곡식을 그릇에 가득 담아 올렸는데, 豊자는 바로 그러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豊자가 '풍성하다'나 '풍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示자를 더한 禮자가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禮(례)는 ①예도(禮度) ②예절(禮節) ③절(남에게 공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혀 하는 인사) ④인사 ⑤예물(禮物) ⑥의식(儀式) ⑦책의 이름(=예기禮記) ⑧경전(經典)의 이름 ⑨단술(=감주), 감주(甘酒: 엿기름을 우린 물에 밥알을 넣어 식혜처럼 삭혀서 끓인 음식) ⑩예우(禮遇)하다 ⑪신을 공경(恭敬)하다 ⑫절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예의에 관한 모든 질서나 절차를 예절(禮節), 사회 생활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손하며 삼가는 말과 몸가짐을 예의(禮儀), 예로써 정중히 맞음을 예우(禮遇), 예법에 관한 글을 예문(禮文), 예로써 인사차 방문함을 예방(禮訪), 존경하여 찬탄함을 예찬(禮讚), 예법과 음악을 예악(禮樂), 예법을 자세히 알고 그대로 지키는 사람 또는 그러한 집안을 예가(禮家), 사례의 뜻으로 주는 물건을 예물(禮物), 예법을 따라 베푸는 식으로 결혼의 예를 올리는 의식을 예식(禮式), 예로써 정중히 맞음을 예대(禮待), 예법으로써 그릇된 행동을 막음을 예방(禮防), 예절과 의리를 예의(禮義), 혼인의 의례를 혼례(婚禮), 스무살이 되어 남자는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찌고 어른이 되던 예식을 관례(冠禮), 예의에 벗어나는 짓을 함을 결례(缺禮), 볼품없는 예물이란 뜻으로 사례로 주는 약간의 돈이나 물품을 박례(薄禮), 장사지내는 예절을 장례(葬禮), 예법에 따라 조심성 있게 몸가짐을 바로함을 약례(約禮), 예의가 없음을 무례(無禮), 아내를 맞는 예를 취례(娶禮), 언행이나 금품으로써 상대방에게 고마운 뜻을 나타내는 인사를 사례(謝禮),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를 경례(敬禮), 말이나 동작 또는 물건으로 남에게서 받은 예를 다시 되갚는 일을 답례(答禮), 예절과 의리와 청렴한 마음과 부끄러워 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을 예의염치(禮義廉恥), 예의와 음악이 깨지고 무너졌다는 뜻으로 세상이 어지러움을 이르는 말을 예괴악붕(禮壞樂崩), 예의가 지나치면 도리어 사이가 멀어짐을 일컫는 말을 예승즉이(禮勝則離), 예의를 숭상하며 잘 지키는 나라를 일컫는 말을 예의지국(禮儀之國), 예의가 너무 까다로우면 오히려 혼란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예번즉란(禮煩則亂), 예의는 서로 왕래하며 교제하는 것을 중히 여김을 일컫는 말을 예상왕래(禮尙往來),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말을 예불가폐(禮不可廢)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