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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보~ 저 왔어요, 배고프죠? 금방 저녁 할게요”
아내가 돌아왔다. 현관너머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 아직 재웅은 방안에 있었다.
재웅이 문을 열고 나가 인사를 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손님이 와계셨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왕 이렇게 오셨는데, 저녁이나..”
“됐어. 바쁜 일있다고 먼저 간데. 잘가”
하진은 황급히 재웅을 현관으로 내보냈다.
이제 영영 보지 못할 그의 눈동자, 까만 머리칼이 흩날리는 걸 뒤로 한 채 문을 잠궜다.
철컥-
다음날, 하진과 재웅은 마주쳤다.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먼저 입을 연건 재웅이었다.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서, 오늘이 마지막이야”
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하진은 재웅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게 무슨소리..”
그리고 재웅의 손에 들린 흰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사직서.
“그만..두려는거야?”
“말했잖아, 이제 앞으로 나타나지 않겠다고”
“그건..!”
하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재웅을 이끌어 휴게실로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휴게실 안.
하진은 다짜고짜 재웅의 사직서를 뺏어들고는 찢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냐는, 얼굴의 재웅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너 제정신이야? 세영씨는 어쩌려고 그래, 한 가정의 가장이 맘대로 이래도 되는거냐고!”
“너랑 상관없지 않나”
“나..난.. 세영씨가 걱정되서..”
“내가 사라지길 바라면서, 이런 참견은 그만둬. 네가 이러면…사라질 수가 없게 되잖아”
재웅은 하진을 그대로 스쳐 지나갔고, 하진은 자신의 손에 들린 찢겨진 사직서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터덜터덜- 발을 내딛는 걸음에 힘이 없다. 재웅이 앞으로 자신에게 얽히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극단적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하고 싶진 않았다. 괜히 자신 때문에 그러는가 싶어 하진은 마음이 불편했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어두웠다. 또 장을 보러간건가 싶어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냈다.
역시 문자 1통이 와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부재중 통화는 없었다.
[엄마가 음식 좀 싸준다고 해서, 희민이랑 같이 친정에 다녀올게요. 저녁은 차려놨으니까 꼭 먹고]
운전을 할 수 있는 지라 아내는 자주 친정에 다녀오곤 했었다.
근데 희민이까지 데려가다니, 뭐 집에 아무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래도 보통, 내가 집에 오거나 할때 희민이를 나한테 맡기고 가곤 했었는데.
아무리 베이비시트에 앉혔어도 운전하는데 희민이를 혼자 두기엔 불안하니까 말이야.
식탁으로 가 아내가 차려놓은 저녁을 먹었다. 다 먹은뒤 씻고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뭔가 꺼림칙한 기운이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고 한 시선이 자신의 온 몸을 훑는 느낌.
그리고 허벅지 안 쪽으로 느껴지는 손길. 세세하면서도 끈적한 그 손길은 주요부위만은 건드리려 하지 않은채
주변만 계속 맴돌았다. 희롱당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하지만 저항은 커녕 오히려 하진은 애가 탔고,
점점 가빠져 오는 숨에 눈을 떴다.
“...”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1시를 넘겼다. 꿈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야한 꿈을 꾼적이 있었던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잔뜩 부풀어져 있는게 보였다. 한심했다.
아무리 하지 않은게 오래 되었다고 해서 이런 꿈이나 꾸다니.
재웅과 관계를 끊은지도 꽤 되었고, 아내와도 안 한지 꽤 되었다.
재웅과 관계를 했단 죄책감 때문인지 아내와 관계를 갖기가 쉽진 않았다.
둘째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다음, 다음으로 미루다보니 벌써 몇 주가 지났다.
한숨을 쉬며 소파에서 일어나 텔레비전을 켰다. 고요하기만 하던 집안이 시끌씨끌해지고,
그리고 식탁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 통화 18건. 문자 10건.
“뭐지..?”
이 시간에, 이렇게나 많이 연락이 올데 라곤 없을텐데. 하진은 불안한 마음에 통화목록을 열려는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뜨는 장모님.
“장모..”
-이사위!! 어디서 뭘 하는거야?! 전화를 왜 이리 안 받아..!!
잔뜩 격양된 목소리와, 그리고.. 울고계신다.
“장모님, 무슨 일..!”
-사고가 났어, 우리 딸이... 희민이가!
"거기가 어디예요?!!"
앞뒤 말이 들리지 않았다. 장모님이 말해주는 병원만이 머리에 울렸다.
옷을 갈아입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슬리퍼를 끌고 나와 차에 올랐다.
하진은 정신이 없었다. 이러다 자기가 사고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턱대고 밟기 시작했다.
“장모님!!”
하진은 헐레벌떡 병원으로 뛰어들어왔다. 수술실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보였다.
하진을 보더니, 장모님은 왜 이제야 왔냐면서 타박하기 시작했다.
“어떻게..어떻게 된거에요?!!”
하진에 물음에도 그저 울기만 하는 장모님이었다. 그런 장모님을 진정시키는 장인어른.
침착한척 보이지만 장인어른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교통..사고야. 우리 집으로 오려던 중에, 어떤 차가 갑자기 끼어들었나봐. 그걸 피하려다가 사고가 난거 같은데...”
“수술은..수술은 잘 될거래요?!!”
“그게.. 둘 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의사도 장담은..”
털썩- 주저 앉았다. 교통사고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고,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닥쳐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하진은 갑자기 두려워졌다.
자신만이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그 두려움. 공포.
아직 수술중이었다. 희망을 놓아선 안됐다. 하지만 자꾸만 드는 어두운 생각이 온몸을 휘어감았다.
지이잉-지이이잉- 다소 잠들기 이른 시간이었지만, 재웅과 세영은 침대에 있었다.
“당신, 핸드폰”
아직 잠이 들지 않은 세영이 재웅을 흔들었다. 하지만 재웅은 어느새 깊이 잠이 든건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재웅의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들었다.
이하진.
세글자가 보였다. 하필이면 왜, 이 늦은 시간에 이 사람이. 나의 남편에게 전화를 거는 것일까.
나는 종료버튼을 누르고, 통화목록에서 그의 목록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전원을 꺼버렸다.
온 몸에 힘이 풀린 하진을 휴게실에 데려다 준 장인어른은, 안쓰럽게 하진을 내려다 보았다.
옷가지도 제대로 입지 않은채, 신발 마저도 슬리퍼. 게다가 한쪽은 어딜 갔는지 맨발은 흙투성이에 상처까지 보인다.
“수술실앞은 우리가 지키고 있을테니..여기서 진정 좀 하고 있게나”
휴게실에 혼자 남겨진 하진은 더더욱 두려움이 엄습했다. 의지 할 곳이 필요했다.
이 와중에 생각나는건, 한 사람. 한재웅밖에 없었다.
이러면 안되는건데. 애써 끊어내고 밀어냈는데. 이제와서? 내가 힘드니까, 의자하고 싶으니까,
이제와서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건. 나라는 인간은..너무.. 최악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손은 한재웅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통화를 눌렀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애써 참으려 입술을 깨물어봤지만,
수술실에 누워있을 자신의 아내와 딸아이를 생각하니 너무나 무서웠다.
재웅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통화를 걸 수가 없었다.
“하진아..하진아!”
눈을 뜨니 병실이었다. 그리고 앞엔 주환의 얼굴이 보였다.
“여..여긴..어디야? 넌 왜..”
“네가.. 어제 전화했잖아”
“아...”
내가 그랬었나. 난 분명 재웅에게 전화를 한 기억밖에는...
“아! 아내는?!우리딸은?!!”
하진은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도 신으려 하지 않은채 병실을 뛰쳐나갔다.
그런 하진을 붙잡아 다시 병실 침대에 눕히는 주환.
“하진아, 내 말 잘들어”
“이거놔! 아내랑 딸 어딨어? 응? 수술은 잘 끝난거야?!!”
주환은 아무말없이 하진을 내려다봤다. 말을 잇지 못하는 주환의 표정을 보니 하진은 알 것 같았다.
창밖은 지금 해가 중천이다. 수술은 끝나고 벌써 끝났을 시간.
주환은 자신에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마..말도 안돼...아..아니지..?”
“수술중에.. 둘 다..”
“아니라고!!!!!”
주환을 밀치고 다시 침대에서 내려오는 하진은 바닥에 주저 앉았다. 병실문으로 달려나갈 수가 없었다.
엉엉- 통곡하며 바닥을 기었다. 숨을 쉴수가 없었다. 시야가 뿌애져서 앞이 보이지도 않았고,
병실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장모님과 장인어른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흐아!!흐..흐아악!!!”
그대로 또, 정신을 놓아버린 것 같다.
두 번째로 눈을 뜬 곳은, 집의 안방이었다. 하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기댄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여..여보..희민아..어딨어?”
인정해야될 사실임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하진은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바닥에 널부러져있는 리모컨을 밟아 텔레비전이 켜졌다. 현재시각은 아침 9시, 그리고 날짜는.
자신이 병원에 간 날부터 3일이나 지나있었다.
철컥- 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주환의 모습이 보였다.
“하진아”
“뭐야.. 왜 아무도 없어.. 나.. 난 왜 여기있는거지? 분명 병원에 있었잖아..”
“너.. 계속 잠들어있었어”
“하...”
“힘들겠지만.. 장례식은.. 2일뒤에..”
장례식.
그 세글자가 몸서리치게 와닿았다.
“정말..죽은거야?..아내가.. 딸이.. 죽었어?”
그렇다면, 나도 같이 죽어버려야하지 않을까.
“하진아..괜찮은거야? 너 며칠새 아무것도 안먹고..”
“나도.. 죽어야..”
“바보같은 소리하지마! 어서 일어나. 밥 부터 좀먹어”
“지금.. 밥 같은게 넘어가게 생겼어?!”
얼마나 울었는지 목소리가 쩌억쩌억 갈라지며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게, 너무나 역겹다.
“웁..!”
“하진아!”
화장실에 뛰쳐들어갔다. 변기에 머리를 박고 구역질을 했다. 아무것도 먹은 게 없어서 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속안에 뭔가 가득 차 있는 느낌에 개워내지 않으면 안 될것같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내 속엔 무언가 가득 차있었다.
첫댓글 헉..갑자기 무슨 일이..ㅠㅡㅠ
ㅠㅠ읽어주셔서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