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럼버스 (1451-1506)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난 콜럼버스는 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지구는 구형이며, 서쪽으로 항해하면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포로투갈 왕에게 탐험을 간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에스파냐로 가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1492년 8월 3일에 제1회 항해를 시작하여, 10월 12일에 현재의 바하며 제도의 어느 섬에 도착하여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세주'라는 뜻)라고 이름지었다. 그는 이 곳이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였다. 귀국 후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된 그는 17척에 1500명의 대선단(대부분 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이었다)을 이끌고 2차 항해를 떠났다. 그는 그곳에 여왕의 이름을 딴 이사벨라 시를 건설하는 한편, 인디언들을 동원하여 금을 채굴하였다. 그러나 금의 산출량이 보잘 것 없자, 항해자들은 인디언을 살육하고 노예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황금 대신 노예가 본국으로 보내졌고, 콜럼버스는 문책을 당하였다. 3차, 4차, 항해도 별 소득이 없었으며, 1504년 이사벨라 여왕이 죽은 후 콜럼버스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여, 초라한 모습으로 잊혀진 인물이 되어 죽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도라고 믿었다.(오늘날 서인도 제도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가 발견한 서인도 항로를 계기로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인디언의 수난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다
정화 (鄭和)
중국 명나라의 환관 ·무장(武將).
별칭 : 법명 복선(福善), 삼보태감(三保太監)
국적 : 중국 명
활동분야 : 정치, 군사
출생지 : 중국 윈난성(雲南省) 쿤양(毘陽)
남해(南海) 원정의 총지휘관. 본성 마(馬)씨. 법명 복선(福善). 삼보태감(三保太監)이라 불린다. 1382년 윈난이 명나라에 정복되자 명나라 군대에 체포되어 연왕(燕王) 주태(朱)를 섬겼다. 1399∼1402년 정난(靖難)의 변 때에 연왕을따라 무공을 세웠고, 연왕이 건문제(建文帝)의 뒤를 이어 황제[永樂帝]에 즉위한 뒤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영락제의 명을 받아 전후 7회에 걸쳐 대선단(大船團)을 지휘하여 동남아시아에서 서남아시아에 이르는 30여 국에 원정하여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고 무역상의 실리를 획득하였다.
제1차 원정 때에는 대선 62척에 장병 2만 7800여 명이 분승하였고, 제7차 원정 때에는 2만 7550명이 참가하는, 큰 규모의 원정대였다. 이 원정으로 중국인의 남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동남아시아 각지에서의 화교(華僑)들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이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섰다.
정화가 이끈 대선단은 상하이 서북쪽에 있는 쑤저우 항에서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여 푸저우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동북쪽의 계절풍을 기다렸다가 남해를 향해 출발하였다.동북쪽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은 10월 이후였기 때문에 푸저우에서의 출발은 겨울에 이루어졌다.
한편 쑤저우 항은 원나라 이후 해군의 근거지였고 국제 무역항이기도 하였다.또 푸저우는 선박의 기항지로서 알려져 있었다.
제1회 항해에서는 인도까지 도달하였다
제1회 원정에서는 참파(현재의 베트남 중부), 자바 섬 및 팔렘방 등의 수마트라 섬 각지(인도네시아), 말라카(말레이시아), 실론(스리랑카)을 거쳐 인도 서쪽 기슭 캘커타 까지 도달하고, 이들 각지에 상륙을 기념하는 석비를세우고 귀국하였다.귀국하는 배에는 이들 각지에서 명나라로 가는 조공 사절이 동행하였다.
제1회 기항지인 참파는 현재의 베트남 중부에 있었다. 베트남 북부는 교지 지나라고 불려, 당시는 명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그래서 정화는 다른 나라에 있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제2의 기항지인 자바는 예로부터 중국과 교섭하고 있었고, 조미료나 음식물 보존에 사용하는 후추, 1년에 두 번 거두는 벼 등의 산물이 풍요로운 나라였다.자바 인들은 정화 일행이 중국에서 가지고 온 청화(靑花) 자기, 사향,비즈(장식용 작은 구슬) 등을 기꺼이 사 주었다.당시 자바 섬에 있던 마자파히트 왕조는 인도네시아섬의 대부분을 영유하고 수준 높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그 때까지의 힌두교나 불교를 대신하여 이슬람교도 전파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정화 일행은 자바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건에 휘말렸다.당시 자바에서는 마자파히트 왕조의 동왕과 서왕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싸움에 진 동왕이 목숨을 잃었다.우연히 동왕이 지배하던 곳에 있던 정화 일행도 싸움에 말려들어 170명의 병사를 잃었다.정화는 서왕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내고 사죄의 사절과 함께 귀국하였다.이러한 일이 계기가 되어 마자파히트 왕조는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에서도 정화는 한 사건에 휘말렸다.당시 팔렘방에는 광둥과 그밖의 지역에서 온 중국인이 많았다.화교라고 불리는 그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통과하는 무역선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해적질을 하고 있었다.다른 한 그룹으로부터 지원을 요청받은 정화는 그것에 응하여 해적 패거리 5000여 명을 토벌하고 그 대장을 생포하였다.벌을 받기 위해 정화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온 해적 대장은 영락제에 의해 사형을 당했다.이렇게 하여 팔렘방 지방의 치안이 회복되고 무역의 안전이 보증되었다.
정화의 대선단을 보고 캘커타 사람들은 놀랐다. 그보다 1세기 후인 1498년에 희망봉을 돌아 찾아온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의 선단은 겨우 3척이고, 기함 산 가브리엘 호도 120t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당시 캘커타 국왕은 불교를 믿고 소와 코끼리를 숭배하였으며, 국사는 두 사람의 두목에게 맏겨 놓고 있었다.정화 일행은 캘커타 사람들과 상품을 거래하였다.중국 사람들은 베와 생사를, 캘커타 상인들은 후추ㆍ보석ㆍ산호 등을 팔았다.상인들은 정확히 계약서를 썼고, 나중에라도 그 계약서를 어기는 일은 없었다.계산이 잘못되는 일도 없었다고 한다.
각국과 통상 관계를 맺은 제2회 항해
제2회 항해에서는 자바ㆍ시암(타이)ㆍ캘커타ㆍ코친(인도)으로 가고, 돌아오는길에는 실론(스리랑카)에 들렀다.참파에서 서남쪽을 향해 7일 낮과 밤을 항해하여 시암 항에 도착하고, 거기에서 메남 강을 거슬러 올라가 도읍지 아유타야에 도착했다. 이 곳에 있는 왕궁은 대단히 호사스러운 것이었다.당시 아유타야 왕조의 인타라지아 1세는 즉위 전에 난징을 방문한 일이 있고, 계속하여 조공 관계를 유지할 것을 약속했다.코친은 캘커타보다 약간 남쪽에 있는 인도 서쪽 기슭의 도시이다.국내에 이슬람 교도가 상당히 있었지만 국왕은 불교를 믿었다.엄중한 카스트 제도가 행해지고, 조미료인 후추의 산지였다.정화의 제2회 항해에 대해서는 문헌적 기록이 거의 없다.그러나 1911년에 실론의 가레라는 곳에서 하나의 비석이 발견되었다.그것은 한문ㆍ타미르 어ㆍ페르시아 어의 3개국어로 쓰여져 있었다.그 중 타미르 어는 현지어이고, 또 페르시아어는 당시의 국제어였다.이 비석은 현재 콜롬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정화는 그 비석에 평안한 항해에 대해 감사하고, 장래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불사에 공양했다고 써 놓았다.
위험한 전투를 수반한 제3회 항해
제3회 항해에서는 제2회와 거의 같은 항로를 더듬어 자카르타ㆍ자바ㆍ말라카ㆍ수마트라ㆍ실론ㆍ쿠이론(인도)ㆍ코친 및 캘커타에 들렀다.당시의 말라카는 북쪽에서는 시암, 남쪽에서는 자바의 마자파히트 국왕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이것에 대항하기 위해 말라카는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이 요청에 따라 명나라는 정화를 사절로 하여 말라카를 명나라의 보호국으로 할 것을 약속했다.그래서 시암으로부터의 침입이 없어지고, 말라카는 급속히 국력을 회복하여 말레이 반도 대부분과 수마트라 섬의 동쪽 기슭을 영유하는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이후 말라카는 명나라의 조공국이 되고,1511년에 포르투갈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기까지 그 관계가 계속되었다.
실론의 이름난 산물은 용정향이었다.그것은 향유고래의 체내에서 생기는 일종의 병적인 분비물이었다.중국 사람들은 그 기묘한 형태와 색깔, 멋진 향에서 이것을 용의 침이 굳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향료·화장품ㆍ약품으로 귀하게 사용했던 것이다.당시의 실론은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중국으로 가는 도중 정화가 실론에 들를 것을 전해 들은 국왕은 금은 보화를 헌상한다고 하고, 5만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선대를 공격할 계략을 짰다.그것을 알아차린 정화는 2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왕성을 공격하여, 국왕과 그 가족을 붙잡아 명나라에 복속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바다를 건너 기린을 가져온 제4회 항해
제4회 항해에서는 캘커타에서 더 북서로 올라가 호르무즈까지 원정하였다. 정화 일행이 갔던 장소로는 이 호르무즈가 가장 서쪽 땅이다. 기뻐한 호르무즈 왕은 명나라 왕에게 보내는 헌상품으로 사자ㆍ기린ㆍ아라비아 말 그리고 페르시아산 진주를 배에 실어 보냈다. 수마트라에서 본대와 헤어진 별대는 몰디브(인도양 몰디브 군도)를 거쳐 아프리카 대륙 동쪽 기슭의 모간디슈ㆍ브라바ㆍ마린디를 방문하고, 북상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아덴과 즈파르를 거쳐 호르무즈로 가서 본대보다 약 1년 늦게 귀국하였다. 별대가 방문한 나라에서도 초대에 응해 조공 사절이 중국을 방문하였다.수마트라에서도 정화는 한 사건에 말려들었다. 수마트라 왕이 이웃 나라의 나쿠르 왕에게 공격을 받고 전투 중에 독화살을 맞아 세상을 떠났다.
국왕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으나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가 없었다. 왕비는 ‘남편의 원수를 갚고 국토를 회복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은 그의 아내가 되고, 그는 이 나라의 왕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약속하였다. 나이가 든 한 사람의 어부가 나타나 멋지게 국왕의 원수를 갚았다.약속대로 왕비는 그와 결혼하고 그를 노왕이라 부르며 국정을 일임하였다. 그런데 어렸던 선왕의 아들이 성인이 되어 부하와 함께 의붓아버지인 노왕을 죽이고 왕위를 이었다. 이렇게 하여 선왕의 아들과 노왕의 동생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이 때 정화는 선왕의 아들을 도와 그를 왕위에 앉혔다. 정화에게 감사한 새로운 왕은 명나라와의 조공 관계를 계속할 것을 약속했다.
경험을 쌓아 효과적으로 이루어진 제5ㆍ6회 항해
제5회 항해의 항로는 제4회 때의 항로와 거의 같았다. 즉 정화가 이끄는 본대는 호르무즈까지, 별대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 기슭 및 아라비아 반도까지 갔다. 전회의 항해에서 명나라 왕에게 헌상한 기린과 그 밖의 희귀한 동물을 명나라 왕이 대단히 좋아했다는 말을 들은 여러 나라의 왕이 사자ㆍ기린ㆍ아라비아 말ㆍ얼룩말ㆍ낙타ㆍ타조 등을 헌상하였다.이 가운데 중국인이 가장 좋아한 것은 기린이다.
제6회 항해에서 정화의 본대가 어디까지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호르무즈까지 갔다는 설과 수마트라ㆍ시암까지밖에 가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다.그러나 별대 쪽은 지금까지대로 아프리카 동쪽 기슭에서 페르시아 만까지갔다.아프리카 동쪽 기슭의 산물 중에서 중국인이 특히 흥미를 가진 것은 유향이었다.그것은 이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얻어지는 수지 향료로서, 중국인은 이것을 향료및 화장품으로 귀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제6회와 제7회 항해 사이의 영락 22년(1424) 1월부터 8월까지 영락제의 명령을 받은 정화는 팔렘방으로 갔다. 팔렘방의 장관이 죽은 후에 그 아들과 딸 사이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는데, 아들 쪽이 이겨서 아버지의 관직을 잇고 싶다고 요청해 온 것이다. 그것을 승인한다는 영락제의 말을 그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이 항해는 소규모였기 때문에 정화의 대항해 중에는 꼽지 않는다. 이 항해에서 정화가 돌아오기 직전인 7월 말에 영락제가 죽고 아들 홍희제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홍희제는 1년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인 선덕제가 뒤를 이었다.
정화의 마지막 항해가 된 제7회 항해
홍희제는 많은 경비가 든다는 이유로 정화의 대항해에 반대하였다.그러나 선덕제는 할아버지의 일을 높이 평가했고, 그 선덕제 밑에서 제7회 항해가 이루어졌다.이 항해 에서도 정화의 본대는 호르무즈까지 가고, 별대는 아프리카 동쪽 기슭과 페르시아 만까지 갔다. 별대 중 일곱 사람이 이슬람교의 성지인 메카(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항해에는 없었던 일이다.
메카에 있는 이슬람 사원인 카바 신전에 대해 그들은 다음처럼 기록하였다. 이 신전에는 성벽을 에워싸는 466개의 문이 있다.문 양쪽에는 백옥으로 된 기둥이 세워져 있고, 기둥의 수는 467개이다. 앞에 99개, 뒤에 101개, 왼쪽에 132개, 오른쪽에 135개이다.’또 ‘메카 서쪽으로 하루 여정 거리에 메지나가 있다. 성인 마호메트의 묘는이 성 안에 있다.’ 고도 기록하였다. 제7회 항해에서 돌아와 얼마 되지 않은 1434년에 정화는 난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개척한 정화의 공적 북방의 실크로드에 견주는 ‘바다의 실크로드’ 또는 ‘도자기의 길’이라 불리는 남해 항로를 개척하여 인도양을 건너 페르샤만과 동북 아프리카까지 진출하면서 각국에 명 성조의 조칙을 전달하고, 때로는 전쟁을 하면서 까지 중국에 대한 조공 관계를 유지시켰으며 중국인들의 활발한 해외진출을 촉진시켰다.
정화의 원정대에 동행한 중국인 이슬람교도 마환(馬歡)은 아시아 대항해시대’의 증언으로 이 항해기록을 남겼다. 항해하는 중의 진기한 견문에 대한 상세한 “下西洋“이라는 이 기록은 지리지(地理誌)로도 가치의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 다른 인물인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嵯勝覽)>, 공진(鞏珍)의 <서양 번국지(西洋番國志)> 등의 견문기는 중국인의 남지나에 대한 지식을 급속히 높여 주어 남해 지방의 화교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또 이들 견문기 덕택에 정화의 항해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고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 견문록>과 나란히 유럽 인들에게 동양으로의 호기심을 낳게 하였다
정화의 해양 개척정신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정화의 원정으로 중국은 세계의 강대국이 되었으나 정화함대를 끝으로 바다를 포기하였기 때문에 그 뒤 중국은 서양제국주의 세력이 바다를 통하여 밀려 들어와 시련과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정화의 남해 원정으로 중국요리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흔히 아는 중국요리중에 상어지느러미가 요리용으로 문헌에 나오기는 명나라 때이고 정화(鄭和)장군이 인도양에 나갔을 때 상어지느러미를 얻어 영락(永樂)황제에게 바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