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9일.수요일
파토
천년 고찰(아니지만 이래야 멋있으니 패스) 조계사(曹溪寺).
지난 주, 종로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는 조계종의 직할 사찰이자 촛불의 성지로 불렸던 이곳에, 붉은 색으로 떡칠을 한 수백의 인파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긴급 제보가 들어왔다. 비밀리에 입수한 참가자들의 면면을 보니 과연 우려할 집단들, 가히 화제의 친북인명사전에 속해야 마땅할 좌익혁명 급진좌파 세력들이 아닌가?
바로 이 기회다. 어차피 명박의 가공할 삽질 앞에 진보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 그럴 거면 차라리 나도 더 망가지기 전에 특종 터뜨리고 드보르작 선생처럼 급 전향해서 보수 우익에 백기 투항하는 거다.
누가 아냐… 나름 언론인이라고 조중동에서 자리라도 하나 줄지.
그런 계산으로 12월 6일 일요일 오전, 엄동설한의 찬바람을 뚫고 무거운 엉덩이를 짊어진 채 조계산으로 잠입해 들어간 위원… 과연, 먼 발치에서 아래와 같은 긴박한 대치 상황을 목도하고야 만다.
그렇다. 퍼런색 누비 파카로 무장하고 쇠파이프마저 든 전경 비스무리한 남정네들과 흰 헬멧을 쓴 쌍팔년도 백골단으로 보이는 무리. 그리고 이 일촉즉발의 상황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기자들… 가히 혈겁이 벌어지기 직전의 순간이 아닌가? 신성한 조계사 경내에서 이런 일이...
심지어 곳곳에는 이미 정체 불명의 붉은 물체들이 산발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먼 발치에서 그것은 마치 피로 범벅이 된 좌익 혁명분자들의 말로처럼 처참하게만 보였다. 용기를 내고 한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특종 사진을 찍어야 한다. 비싼 값에 팔아먹자. 난 딴지일보가 아니다, 오늘부터 조중동이다…
하지만 너무도 처참한 광경에 눈을 질끈 감고 붉은 물체 쪽으로 셔터만을 눌러 대고는 급히 자리를 옮긴 위원… 잠시 후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실눈을 뜨고 LCD 창에 찍힌 것을 들여다보았다.
이기 뭠미…?
그리고는 고개를 든 위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이 거대한 현수막이었다.
글타… 이것이 바로 수백 명의 빨갱이, 아니 민주시민이 조계사 마당에 모여서 벌인 회합의 정체였던 거다.
진알시(진실을 알리는 시민), 촛불나누기, 여성시민광장, 노영동(노무현과 영원한 동행),공공운수연맹, 전국교직원노조서울지부, 언론노조, 2010연대, 국민참여당, 시민주권모임, 바보상조회, 대경 아고라, 한반도 사랑의 연탄나눔, 민주언론시민연합, 문함대, 수수팥떡, 민주전역시민회, 민주통합민주행동,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캠페인), 경향신문, 한겨레, 시사인, 미디어 오늘…
여기에 강남, 관악, 부천동작, 송파, 성남, 수원, 안산시흥, 은평, 의정부, 속초, 천안의 촛불 모임들, 전주, 영등포, 광주, 양주, 익산, 안양, 진주, 경주의 진알시.
그리고 Daum의 3대 여성 카페로 50만 대군을 거느린 막강 파워의 ’여성삼국’. 쌍코, 소울드레서, 화장발.
이 많은 모임들에 대해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고 위원이 앞으로 하나씩 디비줄 생각이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시민단체와 시민모임, 다음카페, 노조, 언론사, 정당 등등 어울리는 듯도 하고 안 어울리는 듯도 한 이 많은 단체들이 하나의 숭고하고 위대한 목적 하에 모였다는 것이다.
바로 김장.
….머 이 정도면 설레발 떨 만큼 떨었고 독자 열분들도 충분히 낚였지 싶으니, 이제부터 조끔 진지 모드로 가자꾸나.
여하튼 조계사에서 열린 이번 김장 행사는 수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대성황을 이뤘다는 말씀이다. 참여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과장 좀 보태서 민주 진영이 총집결했으니 말이다.
그럼 이 행사의 의의는 뭐냐? 일단은 ‘불우 이웃’(이 표현 무지 싫지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이번만 그냥 쓴다)을 위한 김치 담그는 거다. 김장 행사 하면 자칫 김치를 앞세운 정치집회 내지는 특정 정치인의 PR 행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들 하겠지만 요 건의 경우는 진짜로 김장이 되게 중요한 목적이었다.
왜냐. 바로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복지 예산에서 가카가 삭감한 내용들
- 장애아 무상보육 지원금 : 50억 삭감
- 보육시설 확충비용 : 104억 삭감.
- 연탄 보조금 : 전액 삭감
- 서울시 독거노인 주말 도시락 보조금 : 2억 전액 삭감
- 기초생활 보장 지원 대상자 월 수급비 : 36만원에서 9만원으로 삭감 (이외에도 많지만 일단 요정도만)
힘들고 외롭고 지친 이웃들에게 갈 이 피 같은 돈을 빼돌려서 어디에 쓰려 하는지는 다들 잘 아시니 설명한들 입 아프다.
따라서 이날 담은 김치는 아래와 같은 곳들로 가게 된다(이 시점에서는 이미 배달 완료).
- 서울과 전주 등 각 지역 차상위층 아이들 공부방
- 대구 및 곳곳의 장애인 시설
- 부산 등 여기저기의 기초생활 수급자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 가구 등등등
당근… 김치 5천 포기로 이 모든 분들의 배고픔과 추위가 해결될 리는 없다. 그러나 어려운 이웃의 밥과 생명보다 건설동지들 배불려 줄 삽질이 더 중요하다는 가카와 그 일당에게서 받은 설움과 배신감, 그것만큼이라도 조금 덜어드려 보자는 거다.
그리고 또 하나의 취지는 당근 뜻이 맞는 친구들이 함께 모이자는 것. 정치 토론도 좋고 진보의 연대를 위한 회의도 좋지만 한편 소박한 맘으로 이렇게 만나서 같이 뭘 해 보는 거다. 일단 몸과 맘이 가까워져야 동질감이던 신뢰감이던 동지적 연대던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거다. 특히 그것이 외로운 이웃을 돕는 일이라면 이 얼마나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