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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집 묘 및 신도비(부여 향토유적 50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삼학사 중의 한 분인 윤집선생 부자 묘역 뒷편에서 내려다 본 모습. 사진 우측이 윤집선생 묘입니다. |
윤집(尹集, 1606~163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병자호란 때 청과의 화의를 반대한 3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백(成伯),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 증조는 윤우신(尹又新), 조부는 윤섬(尹暹), 아버지는 현감 윤형갑(尹衡甲), 어머니는 춘천부사 황치경(黃致敬)의 따님 창원 황씨이며, 형이 남양부사 계(棨)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죽자 형과 함께 공부했다. |
▲ 윤집선생 묘역을 우측으로 오르면 신도비를 볼 수 있습니다. |
▲ 묘역 하단에 위치한 후손 묘역 전후경 |
1631년(인조 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이조정랑·부교리 등을 지냈다. 1636년 교리로 있을 때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며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과 함께 사신을 죽이자고 주장했으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던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
▲ 좌측 봉분이 윤집선생 묘, 우측 봉분이 아들인 윤이선 묘 |
그러나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 항복을 하며 화의가 성립되고, 청나라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자 오달제와 함께 소를 올려 스스로 척화론자로 나서 봉림대군(鳳林大君)·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청나라에 잡혀갔다. 1637년 4월 심양(瀋陽)에 도착한 뒤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심양성 서문(西門) 밖에서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 |
▲ 윤집선생 묘역 전경. 1701년(숙종 27)에 세워졌다는 묘갈(墓碣) |
광주(廣州) 절현사(節顯祠), 강화 충렬사(忠烈祠), 고령 운천서원(雲川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선생의 부인인 안동 김씨는 당시 척화파(斥和派)의 거두인 예조판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조카딸이다. |
▲ 윤집 선생과 정부인 안동권씨 합장묘이나 삼학사들은 시신이 없으니 이 묘역 역시 단소입니다. |
묘소 바로 아래에 197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고 옆 마을에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다. 윤집은 청나라로 압송되어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심문하면서 척화(斥和)를 제창한 사람을 대라고 하자,"죽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내 머리를 이고 왔으니 잘라야 할 것이면 즉시 자를 일이요 다른 말을 말라"고 하였다. |
▲ 윤집선생 묘역 후경과 윤집선생 묘역에서 바라 본 아들 묘역 |
뒷날 효종 임금은 윤집의 가문에 대하여 "할아버지 윤섬, 큰손자 윤계, 작은 손자 윤집은 삼절(三節)이니 참으로 귀하구나"하고 충절을 기렸다. |
▲ 윤집선생 아들인 윤이선(尹以宣) 묘 |
▲ 윤이선 묘역에서 바라 본 윤집선생 묘역 |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 삼학사와 60만 조선 인질의 억울한 혼백은 어디에…심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입력 : 2010.10.28 16:15 조선 백성의 깊은 상처 숨겨진 요령성 심양중국 요령성(遼寧省) 심양시(沈陽市) 중심가에서 20여㎞ 떨어진 화평구(和平區) 경새로(競賽路)에는 3년제 직업대학인 '요령발해전수학원(遼寧渤海專修學院)'이 있다. 지난 1992년 설립된 이 대학 교정에는 다른 대학에서 보기 힘든 '삼학사 유적비'가 서 있다. 삼학사(三學士)란 병자호란 때 청(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분을 말한다. '삼학사 유적비'의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당시 청 태종은 비록 삼학사를 죽였지만 그들의 높은 절개를 기리고 백성들이 본받게 하기 위해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리고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삼한'은 조선을, '산두'는 태산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절개가 뛰어난 인물, 즉 삼학사를 칭송한 말이다.
◆후손들이 살려낸 삼학사의 정신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가운데 1만3000명의 병력으로 저항하던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병사와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화친파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1월 30일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三拜九叩頭)'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하게 된다.
비석은 두 조각이 나 혼하((渾河)에 버려져 소실되고 만 것이다. 훗날 이를 알고 비석을 찾아나선 요령대학의 천문갑 교수[훗날 발해학원을 세웠으나 2009년 위암으로 별세]는 중국인의 집 주춧돌로 쓰이고 있는 비석을 발견하고 당시로서는 거액인 5000위안을 주고 구입하였다가, 지난 2005년 한국의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 등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학 구내에 원비문은 보관하고, 이를 모조한 비석을 세운 것이다. 똑같은 비석이 지난 2005년 독립기념관에도 세워져 만주를 떠돌던 삼학사의 혼백은 37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안식하게 됐다.
또 왕의 부식을 조달한 나만갑이 기록한 '남한일기(南韓日記)'에도 '뒷날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명이나 되는데 몽고 군대에서 포로가 된 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청은 당시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은 명(明)을 치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많은 병력과 노동력이 필요해 이토록 많은 인질을 잡아간 것으로 보인다.
한 70대 주민은 "60년대까지도 이 주변은 움푹 파인 땅이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도로가 생겨 그 흔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 나라 지도부의 무능으로 졸지에 노예로 전락한 조선의 백성들은 억울한 삶을 이국땅에서 마감했으나, 지금 이들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심양 서탑거리는 오늘도 한국인으로 붐빈다. |
윤집선생 묘역 위치도 |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내산면 온해리 산19-50 화살표 ↑ 위의 산자락에 공터같이 보이는 곳이 윤집선생 묘역 |
지도 좌측 상단의 화살표 위치에 윤집선생 묘역이 있습니다. 부여백제휴게소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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