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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글 종류
어떤 대상을 탐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우선 ‘종류’를 헤아린다. ‘종류’는 효용이 큰 정보다. 그 대상이 ‘무엇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를 살펴 전체 윤곽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부 사항을 따지면 대상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해’, ‘서해’, ‘태평양’, ‘대서양’ 따위 이름들은 넓고 넓은 바다를 질서 있게 인식하려고 일정 기준에 따라 선(線)을 그어 놓은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바닷길을 기억하고 헤쳐 나간다. 글 종류를 헤아리는 목적도 이와 같다. 세상에 글은 넘쳐나게 많다. 글 세계도 바다처럼 하염없이 넓고 깊다. 이 바다를 헤쳐 나가려고 ‘종류’를 생각한다.
1. 기준과 갈래
종류를 나누려면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먼저, 허구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모든 글을 예술문과 비예술문으로 나눈다. 예술문도 비예술문도 다 글이다. 그러나 글쓰기 방식과 목적이 퍽 다르다. 예술문은 시든 소설이든 글쓴이가 만드는 사건과 감정이 알맹이를 이룬다. 반면 비예술문은 실제 대상을 보고 생각한 것이 내용이 된다.
다음, 글에 운율에 배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예술문과 비예술문을 각각 '운문과 산문'으로 나눈다. 운문과 산문이다. 모든 글은 운문 아니면 산문이다. 예술문에서는 시가 운문이고 소설과 희곡이 산문이다. 비예술문에 운문은 그리 많지 않다. 엄밀히 따지면 글이라 할 수 없는 격언과 속담, 각종 표어, 일부 광고문 따위가 운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산문이다. 우리 주위에 운문보다 산문이 훨씬 많고, 그래서 우리는 산문을 좀 더 많이 읽는 듯하다. 초점을 ‘비예술문-산문’에 맞춰 다시 종류를 헤아려 보자.
이번에는 '객관성과 주관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대상과 주제를 다루면서 글쓴이가 객관성에 따르느냐 주관성에 따르느냐에 따라 설명문, 논증문, 감상문… 이렇게 세 가지로 ‘비예술문-산문’을 나눈다. 설명문은 객관성을, 논증문은 주관성과 객관성을, 감상문은 주관성을 좇는 글이다. 지금까지 주장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글 종류
1. 예술문 - ① 운문 - 시
② 산문 - 소설, 희곡
2. 비예술문 - ① 운문 - 격언, 속담, 표어, 광고문
② 산문 - 설명문, 논증문, 감상문
글을 쓰기 전에 자기 경험 내용에 어떤 뜻이 어려 있으니 어떤 갈래에 실어야 적당한지를 먼저 생각한다. 그때 이러한 분류법이 글쓰기 방향을 잡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분류법이 절대성에 따르므로 모든 글이 이 안목에만 따라 갈리는 것은 아니다. 쌀은 쌀이고 보리는 보리이듯, 감상문과 설명문과 논증문으로만 모든 글이 또렷이 나뉘어 그밖에 다른 글은 없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 4분법(예술문, 설명문, 논증문, 감상문)은 글 세계가 어떤 체계로 되어 있는가를 전체에서 헤아리는 잣대일 뿐이다. '글과 글쓰기'라는 인간 활동을 이해하는 한 도구이다. 이보다 좀 더 유효한 기준과 안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2. 설명문
설명문은 물건, 장소, 사실, 사건, 학술이론, 예술작품 따위 우리를 둘러싼 사물과 현상에 어린 뜻과 속성을 알리는 글이다. 설명문은 설명을 주요 기술 방식으로 하며 일정 내용을 정확히 알리고 이해시키려 쓴다. 따라서 글쓴이 개인이 지닌 감정, 주장, 의견 들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원칙이며,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조리 정연하고 간결하면서도 알기 쉽게 써야 한다.
구청, 동사무소, 국민연금관리공단, 선거사무소 따위 국가 기관에서 주민에게 보내는 고지서와 통지서를 비롯한 각종 공문서가 설명문을 대표한다. 학교에서 학부형에게 보내는 알림장, 제품사용설명서, 관광안내문, 신문 기사문(記事文), 실험․관찰․조사보고서 들이 우리 가까이에 있는 설명문이다. 여기에 이력서, 해설 중심으로 쓴 가벼운 서평 따위도 설명문 범주에 속하며, 초중고 학교에서 학생이 교재로 쓰는 교과서와 백과사전도 설명문으로 엮는다.
한 국민, 시민, 구민으로서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이어가려면 늘 다른 이와 소통해야 하기에 우리는 싫든 좋든 설명문을 자주 읽는다. 그래서 설명문은 실생활과 아주 밀접하며, 이 때문에 설명문은 객관성을 토대와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객관성이란 ‘1+1=2’처럼 옳고 그름이 또렷하여 누구든 인정해야 하는 사실만을 고집하는 개념이 아니다. 설명문이라고 해서 늘 100% 객관성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설명문에도 글쓴이가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개인 기호와 의견이 조금 섞일 수 있다. 살아갈 방향을 결정할 때도 그렇지만, 정신 산물인 글을 칼로 베듯 완벽하게 경계를 지어 쓰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점은 전체 내용을 가르는 중심이 주관성에 있느냐 객관성에 있느냐이다. 설명문을 쓸 때 글쓴이는 자기 취향이나 의견을 드러내려는 욕심을 버리고 객관 된 자세로 어떤 사항을 알리고 이해시키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원칙이다. 다음 예문을 살펴보자.
예문 1)
조리방법
1. 끓는 물 550cc(큰 컵으로 3컵) 정도에
면과 스프, 후레이크를 넣고 약 3-4분간
끓이면 삼양라면 특유의 맛으로 조리됩니다.
2. 식성에 따라 김치, 계란, 마늘, 파 등을
넣어 드시면 더욱 맛이 좋습니다.
※조리 시 안전에 유의하세요.
※나트륨(식염) 섭취를 조절하기 위하여 기호에 따라
적정량의 스프를 첨가하여 조리하십시오.
* 유통기한: 전면 또는 후면표기일까지
예문 2)
대행지역 쓰레기 봉투(50L)
- 생활계폐기물 -
1. 음식물 쓰레기는 음식물 전용 봉투에, 재활용품은
품목별로 분리 배출하여 주십시오.
2. 재활용품 및 음식물쓰레기를 이 봉투에 혼합하여
배출할 시 2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합니다.
3.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할 시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4. 이 봉투는 성북구 (주)태안환경에서 청소하는 지역
에서만 사용하여야 합니다.
예문 1)은 라면을 끓일 때 알아두면 유익할 몇 가지 사항을 알린다. 예문 2)는 가정에서 쓰레기봉투를 쓸 때 꼭 지켜야 할 규칙을 알린다. 두 글 다 우리 생활과 아주 가까운 실용문이다. 문장에 숫자를 매겨 도표 식으로 서술했고 조각 글을 모아 놓은 듯해 이글들을 두고 우리가 흔히 읽는 ‘글 한 편’이라고 보기에 조금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처음-중간-끝’이라는 구조가 어려 있으니 엄연히 글은 글이다. 꼭 필요한 정보만을 전하려다 보니 이렇게 썼을 뿐이다.
어떤 이는 세상에 이른바 ‘100% 설명문’은 없다고 주장한다. 글은 사람이 쓰는 것이니 어떤 글이든 어느 구석엔 글쓴이 개인 생각이 스며든다 한다. 일 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위 예문들은 짧고 또렷하게 일정사실만을 서술한 것이다. ‘100% 설명문’으로 여길 만하다.
다만, 예문 1)에서 2항을 두고 조금 달리 생각할 수 있다. ‘맛이 좋습니다.’ 라고 한 서술은 어디까지나 개인 의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성에 따라-넣어 드시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으니 전체로 객관성에 따라 서술했다 규정해도 틀리지 않다. 글 끝에 예를 들어 ‘소비자의 입맛과 건강을 돌보는 마음으로 제품을 만듭니다.’ 따위 문장을 더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100% 설명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글은 신문기사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매일 신문을 본다. 기사문은 우리와 친숙한 설명문이다.
예문 3)
적당히 살찐 여성, 우울증 덜 걸린다/ 김현지 기자
한림대 교수팀 밝혀 “발병위험 정상체중보다 0.7배 줄어”
보통 ‘살집이 넉넉한 사람들은 태평하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적당히 살이 찐 여성들이 우울증에 덜 걸린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림대 성심병원 가정의학과 조정진 교수팀이 전국 329개 회사의 20∼60세 직장인 8121명(남성 5231명, 여성 2890명)을 임의 표본 추출해 비만과 우울증과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경도비만(BMI·체질량지수 25∼30) 여성은 정상체중군(BMI 18.5∼24.9)과 비교해 우울증 위험이 0.7배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경도비만 전 단계인 정상체중 및 과체중군(18.5∼24.9)에서는 BMI가 1씩 증가할수록 우울증 위험이 0.93배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과 달리 남성에게서는 BMI와 우울증 간 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 BMI는 체중을 신장의 제곱으로 나눈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 비만기’에서 BMI 18.5 이하는 저체중, 18.5∼22.9는 정상(표준)체중, 23.0∼24.9는 과체중, 25.0∼29.9는 경도비만, 30 이상은 고도비만이다. 일반적으로 정상체중과 과체중(18.5∼24.9)이면 건강한 체격으로 본다.
반면 저체중(BMI 18.5 이하)과 고도비만(BMI 30 이상)에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우울증 위험이 높아졌다. 저체중인 여성은 정상체중 여성에 비해 우울증 위험이 1.42배, 남성은 정상체중 남성에 비해 1.3배 증가했다. 또 고도비만인 여성은 정상체중 여성에 비해 1.47배, 남성은 정상체중 남성에 비해 1.79배 증가했다.
조정진 교수는 “흔히 비만이 정신건강상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고도비만이 아닌 경우 비만이 우울증 위험을 높인다고만 볼 수 없다”며 “한국인의 경우 마른 체형보다는 다소 통통해 보이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체형에 대한 자기 만족도가 높을 수 있고, 성격도 유연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한국어판 ‘역학연구용 우울척도(CES-D)’를 이용한 설문지 조사와 건강진단의 신체측정결과 자료를 분석해 이루어졌다. 조정진 교수는 이 보고서를 지난달 14∼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16차 유럽비만학회에서 ‘한국의 직장인에서 비만과 우울의 관련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동아일보, 2008. 06. 09)
다음 예문은 주제 폭이 조금 넓다.
예문 4)
1966년 美 ‘미란다 원칙’ 판결
에르네스토 미란다는 멕시코계 미국인이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추악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이름은‘인권의 대명사’로 길이 남아 있다.
미란다는 1963년 3월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시의 한 극장 앞에서 18세 소녀를 유괴해 들판으로 끌고 가 강간했다. 경찰은 당시 21세인 그를 납치 강간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서로 붙들려간 그는 피해 소녀로부터 범인으로 지목받는다. 2명의 경찰이 그를 조사했다. 변호사는 선임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란다는 무죄를 주장하며 완강하게 버텼다. 하지만 2시간의 경찰 심문 끝에 그는 손을 들고 만다. 범행자백자술서를 쓰고 서명도 했다.
재판이 시작됐다. 미란다는 갑자기 말을 바꾼다.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강요된 자백에 따라 진술서를 억지로 썼다고 주장했다. 재판정은 술렁거렸다. 그러나 법원은 미란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범죄사실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애리조나주 법원은 그에게 ‘최저 20년 최고 3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미란다는 애리조나주법원에 상고했다. 주대법원의 판결도 마찬가지였다. 애리조나주대법원은 원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미국자유시민연맹’은 연방대법원으로까지 이 사건을 끌고 갔다. 1966년 6월 13일 미연방대법원은 미란다의 손을 들어주는 극적인 판결을 내린다. 연방대법관 9명 가운데 4명은 미란다의 유죄를 주장했다. 반면 5명은 무죄라는 미란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아도 될 권리(미국 헌법 제5조)와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미국 헌법 제6조)를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이 판결로 그는 석방됐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기본 권리가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말한 것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질문하기 전에 당신은 변호사와 상의할 권리가 있습니다.”
경찰이 피의자를 연행할 때 반드시 알려야 하는 ‘미란다의 원칙’은 이렇게 탄생했다.
피의자의 인권에 대한 중대한 판결을 만들어낸 미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동거 여인의 증언으로 다시 유죄가 확정돼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72년 가석방됐다가 4년 뒤인 1976년 술집에서 싸움을 하다가 죽었다. (‘책갈피 속의 오늘’, 동아일보, 2008. 06. 13)
이 글은 ‘미란다 원칙’이 생겨난 과정을 설명한다. 주로 서사 방식으로써 ‘미란다’라는 사람이 저지른 범행을 서술했다.
설명문은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따위 여러 방면에 걸친 지식을 일러준다. 초중고 학생이 읽는 교과서는 거의 다 설명문이고, 대학생이 읽는 개론서도 설명문으로 엮은 것이 퍽 많다. 이러한 책들 속에 들어 있는 지식은 삶에 유용한 기초 정보다. 그러므로 설명문을 쓸 때에는 쓰기 전에 내용이 올바르고 정확한지 철저히 살펴야 한다. 또, 읽는 이가 어른인지 아이인지 학생인지 주부인지 따위를 따져 수준에 맞게 질과 양을 조절해야 한다.
다음 예문은 약간 다른 관점에서 읽어보자. 설명문인지 아닌지 따져보자.
예문 5)
소개팅에서 재미있게 어필하는 방법/문창혁(젝시라이터)
도대체 어떻게?
재미있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작정하고 웃긴 얘기를 하기보다는 상황 자체에서 재치를 발휘하여 그녀가 살짝 웃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녀가 늦게 온다고 문자를 보내면 답문으로 ‘지하철에서 뛰세요.^^’ 라든지 ‘지하철 밀어보세요^^’하는 문자를 보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서 길을 걸을 때도 그녀의 키를 재면서 “이야 우리 키는 벌써 커플 키네요. 하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긴장을 완화하는 방법이다.
상황을 활용하되 능청스럽게
상황을 활용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그녀와 초밥 집에 갔다면 마늘양념을 그릇에 담아주자. 그녀가 젓가락으로 먹으려고 하면 당신도 젓가락질을 하다가 그녀의 마늘을 뺏어보자. 귀엽게 “그 마늘이 더 맛있어 보여서요. 하하” 하면서 능청맞게 행동한다면 어이없는 행동에 그녀도 웃게 될 것이 분명하다.
돈가스 집에 갔는데 그녀는 치킨 가스 당신은 그냥 돈가스를 시킨다면 “하나 먹어 봐도 될까요?” 하면서 하나를 먹으면서 이야기해보자. “맛있네요. 치킨가스가 더 맛있어요. 바꿔 먹어요. 하하” 하면서 능청맞게 행동해보자.
그녀가 무언가를 집으려고 할 때 당신은 그녀의 손을 잡아보자. “아, 이 손이 왜 거기로 갔지? 나쁜 손 에잇 하하” 하면서 웃어보자.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그녀가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 히틀러 식으로 손을 들어 보자. 그녀는 반드시 웃게 될 것이다.
대부분 남자들은 자기가 운동하는 것을 자랑하려고 가슴이나 팔뚝을 만져보게 하는데 그러한 방법보다 “아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요.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진 것 같아요. 한번 만져보세요.” 라면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유도해 보자.
음식점에 갔을 때 그녀에게 국이나 그러한 것을 집어주다가 손가락이 들어가면 “양념이 더 되어서 맛있을 거예요. 하하” 하면서 “죄송해요 제가 먹을게요.” 한다면 당신을 귀엽게 볼 것이다.
소개팅에서 너무 주접을 부리거나 말이 많거나 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긴장하거나 말이 없어도 안 된다. 다만 상황에서 재치를 발휘하여 그녀를 몇 번은 웃게 만들어야 더 어필할 수 있는 것이다.
자, 소개팅에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면 재미있게 어필해보자.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설명문'이니 '감상문'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목적은 넓디넓은 글 바다를 효과 있게 가늠보아 글을 이해하는 길을 넓히는 데 있다. 따라서 이 글이 설명문인지 감상문인지 기어이 가려내어 못을 박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읽는 이 각자가 세운 기준에 따라 글에 어린 성격을 여러 측면에서 제 나름대로 헤아려 규정하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결혼 행사를 알리는 청첩장은 일시와 장소 따위 객관 사실을 설명하려고 쓴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누구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계획을 전하는 것을 고유 기능과 목적으로 삼는다. 이렇게 보면 청첩장은 실용문이요 설명문이다. 그러나 청첩장에는 대개 가벼운 인사말과 더불어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사랑으로 이제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꾸미려 합니다. 부디 오셔서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따위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신랑신부가 지닌 각오를 함께 싣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청첩장은 순수 설명문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굳이 설명문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자기소개서를 살펴보아도 그렇다. 자기소개서란 글쓴이가 지닌 환경과 성장과정, 이제까지 쌓은 경력 따위를 숨기거나 부풀리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글이다. 실용문이면서 설명문을 대표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포부와 감성은 물론 자신이 지닌 장점과 단점, 성공과 실패를 쓰면서 어느 부분에서는 자기에게 도움이 되도록 내용을 살짝 윤색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또 주관이니 객관이니 설명문이니 감상문이니 하면서 끝까지 따져 결판을 내야 할 필요는 없다. 설명문으로서 객관 사실을 알리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되, 글쓴이 개인이 지닌 뜻과 마음을 거기에 조금 더했다고… 그렇게 읽는 이 나름대로 전체 성격을 이해하고 규정하면 된다. 정부고위 관리가 발표하는 담화문에도 주관과 객관이 섞여 있기 십상이다. 새로운 제도나 규칙 따위 국민에게 알려야 하는 객관 사실을 먼저 쓰고, 이어 제도 시행을 앞두고 동감과 협조를 호소하는 문장을 적어 넣는다. 이 글을 읽을 때에도 넓은 안목으로써 융통성 있게 글에 어린 중심 성격을 헤아리면 된다.
다음 글을 읽고 종류를 헤아려 보자.
[만물상] '19禁' 가요
김태익 논설위원/조선일보/2011. 08. 25.
1963년 도민호라는 가수가 부른 '월급을 올려주세요'란 노래가 화제가 됐다. "이것 참 미안하지만/월급을 올려주세요 박사장/황소같은 자식놈이 여덟명인데/물가는 비싸지고 살아가기 힘드니 어찌합니까/…" 그 전해 출범한 방송윤리위원회에서 한창 인기인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 삼았다. '박사장'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황소'는 공화당을 가리키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월급을…'은 방송윤리위가 결정한 첫 번째 금지곡이 됐다.
대중가요사(史)를 통틀어 최초 금지곡은 1930년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였다.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月色)만 고요해/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나라 잃은 백성의 서글프고 쓸쓸한 심정을 담은 노래였다. 일제는 이 노래가 반일 의식을 선동한다 해 작사·작곡자를 잡아들이고 노래를 금지시켰다.
원래 금지곡 판정이라는 게 '엿장수 맘대로'다. 70년대 신중현 작곡 '거짓말이야'는 국민에게 불신감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미치겠구나'는 사회를 불순하게 비꼰다는 이유로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 이장희의 '그건 너'는 권력자들이 TV에서 자꾸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라며 손가락질하는 걸 보고 불쾌해하는 바람에 전파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한대수가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라고 하자 권력은 "지금은 행복하지 않으냐. 행복한 나라가 북한을 가리키는 것 아니냐"며 꼬투리를 잡았다.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최근 가사에 술·담배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간 대중가요에 잇달아 '19금(禁)' 판정을 내리는 데 대해 뒷말이 많다. "어제 소주를 잔뜩 마시고 나는…"(장기하와얼굴들), "술 한잔을 다 같이 들이킬 게…"(2PM) 같은 가사를 문제 삼아 '청소년 유해' 판정을 내리는 식이다. 한 연예기획사가 여성가족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자 법원은 어제 "술은 마약류 등과 달리 노래 가사에 문구가 포함돼 있다고 해서 유해성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동양에선 예로부터 시(詩)는 곧 노래였다. 시선(詩仙) 이백은 "술 한 말에 시 100편을 짓는다"고 했다. 단지 술에 관한 내용이 들어갔다고 해롭다고 한다면 술을 소재로 한 이백의 주옥같은 시들도 19세 이하에겐 읽히지 말아야 할까. 예나 지금이나 금지돼야 할 건 행정 관청의 닫혀 있고 굳어 있는 사고방식이다.
3. 논증문(論證文)
살다보면 내 일이든 남 일이든, 개인사에 얽힌 것이든 공동체에 이어진 것이든 수많은 문제에 부딪힌다. 이때 문제를 지켜만 보고 알고 지내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주장을 펼치고 나아가 다른 이들이 이에 따르도록 해야 할 때가 있다. 논증문은 제 나름대로 세상사를 해석하고 판단한 끝에 얻은 의견과 주장을 내세우되, 객관성 어린 근거로써 상대가 이에 동의․동감하도록 이끌려 쓰는 글이다.
그래서 논증문은 ‘주장+근거'라는 틀로 짠다. 이는 다른 글과 또렷이 다른, 논증문에 어린 특성이며 본질이다. 객관 정보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는 설명문과 이점에서 근본이 다르다. ‘주장+근거'라는 틀… 이 요소가 논증문에서 핵심이라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한다.
논증문은 네 가지 문장쓰기 방식 가운데 ‘논증’을 중심으로 하여 쓰며 객관으로써 주관을 밝히고자 하는 글이므로 첫째,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특히 주장과 근거 사이에 논리가 정연하여 조리가 바로 서야 한다. 조리란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국어사전)를 이르는 말로서 논증문만 아니라 모든 글에서 제대로 세우고 지켜야 할 미덕이요 자질이다 논증문을 쓸 때 더욱 엄밀히 따져야 한다. 읽는 이가 생각을 바꾸도록 유도하려면 서술 내용이 앞뒤가 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둘째, 주장하는 내용이 강하게 드러나야 한다. 논증문에서는 주장이 바로 주제다. 주장을 목표로 하고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당연히 글쓴이가 지닌 판단, 신념, 의지 따위를 또렷하게 내놓아야 한다. 셋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이유)가 확실해야 한다. 근거가 흐릿하면 글쓴이가 펴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효과어린 근거가 논증문에서 성패를 가른다. 넷째, 박사학위논문 같은 학술논문이 아니라면 되도록 쉬운 문장을 써서 읽는 이에게 친숙하게 다가가야 바람직하다.
논설문과 각종 평론, 석박사 학위논문을 비롯한 학술논문 따위가 다 논증문이다. 논설문은 다시 첫째, 신문 사설, 시평(時評), 단평과 같이 시사성을 띤 문제를 다루는 글과 둘째, 일반교양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랑, 행복 따위에 얽힌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사설은 주로 신문과 잡지에 실린다. 일반인을 독자로 삼기에 전문성과 학술성이 덜하고 글쓴이가 지닌 주관이 끼어드는 경우가 많다. 반면 사랑과 행복, 자연 따위를 논한 글과 각종 평론, 학술 논문은 수준 높은 학식과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학술논문은 따로 정해진 형식체계와 규칙이 있어 다른 논증문보다 더욱 엄정한 객관성에 따른다.
먼저 사설 한 편을 예문으로 읽고 논증문이 어떤 글인지 개념을 세우면서 실제 쓰기 과정을 헤아려 보자.
예문 6)
학교 서열화가 부른 불길한 미래의 전조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가 학생의 성적에 따라 차별적으로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성적 우수자에겐 별도의 자율학습 공간을 배정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저녁 배식에서도 일부 차별을 뒀다는 것이다.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서라거나, 학습 분위기 유지 차원이라는 등 학교의 변명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단지 시험성적만으로 학교가 학생을 차별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다.
문제는 이 학교의 사례가 앞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될 학생 인권 파괴를 경고하는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새 정부 들어 각 시·도 교육청은 진단평가라는 이름으로 일제고사를 실시하기 시작했고, 일부에선 학교별 혹은 개인별 성적을 배포했다. 이에 따라 시·도 혹은 전국 단위의 학교 서열화는 시간문제가 됐다. 이에 앞서 서울 등 일부 시·도 교육청은 학교 선택제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학교와 교사의 책임감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낳을 결과는 불 보듯 자명하다. 학교 관리자는 자신의 학교가 상위 서열에 오르도록 교사들을 다그칠 것이고, 교사는 학생들을 들들 볶게 된다. 결국 들볶임의 종착지는 학생이다. 그리고 들볶는 방법 가운데 가장 손쉬운 것이 성적에 따른 차별이다.
학교 서열화를 앞두고 각 학교는 이미 방과후 학교를 특기 적성 활동에서 교과 학습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다. 한 시간이라도 문제풀이 연습을 시켜 학교 전체의 성적을 올리겠다는 취지다. 그나마 조금씩 자리 잡아 가던 특기 적성 교육은 이제 다시 설자리를 잃을 게 분명하다. 영전이나 승진은커녕 자칫 무능력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교장․교감에게, 한가로이 아이들 적성을 발굴하고 고민을 상담하며 진로를 모색하도록 ‘지도편달’을 요구하긴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나 나름의 잠재력과 능력을 갖고 있는 만큼 특정 기준에 따라 사람을 서열화해서는 안 되며, 학교는 학생들의 자질과 능력을 발굴해 계발하는 게 기본이다. 아이들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게 교육이기 때문이다. 단지 시험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받은 모멸감과 좌절감은 평생 씻기지 않는다. 이렇게 받은 상처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훼손시켜,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펼치는 것을 방해한다. 교육이 앞장서 아이들의 날개를 꺾어선 안 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먼저 학교 서열화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 (한겨레신문, 2008. 04. 07)
네 번째 문단에서 글쓴이는 ‘무엇보다 먼저 학교 서열화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글쓴이가 내놓은 주장이요 핵심내용이며 주제다. 이 주장을 펼치려고 글쓴이는 첫 문단에서, 경기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성적에 따라 학생을 차별대우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어 둘째와 셋째 문단에서, 학교서열화를 부추기는 정책과 그에 맞물린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조목조목 지적한다. 그 내용은 성적에 따른 급식 차별, 일제고사 실시, 학교별과 개인별 성적표 배포, 방과후 학교 운영 취지가 변질하는 현상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과 현상 때문에 학생들이 ‘들볶임’을 당할 것이며, 특기 적성 교육은 졸아들고 교장, 교감 같은 교육 주체가 제대로 된 교육을 펼쳐야 하는 고유 의무를 저버릴 것이라고 내다본다. 사태에 어린 의미를 파헤쳐 진단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진단 자체가 이미 학교서열화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지만, 글쓴이는 이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또렷하고 직접성 있는 근거를 댔다. 사람이란 누구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을 계발하도록 도와 ‘아이들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 바로 교육인데, 성적을 구실 삼아 차별대우를 하면 아이들이 모멸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결국 꿈과 희망을 잃게 된다고 말한다. 교육을 이루는 기본 이념과 원리를 밝혀 근본에서 현상을 비판하며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이 글은 단락이 네 개다. 글쓴이는 먼저 비판대상인 현상을 설명하고 이어 그에 어린 의미를 가늠 본 뒤 근거를 들어 주장을 펼쳤다. 일간지에 실린 사설이기에 이 글은 다른 논증문에 비해 분량이 적고 반박 논리도 간단하다. 그러나 보다시피 주장과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확실하기에 전형 된 논증문이다.
신문사설은 우리 생활 현장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논증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설이 다 이처럼 ‘주장+근거’라는 논증 구조를 알맞게 지니지는 않았다. 사설이라고 해서 논증문이 갖추어야 할 구조에 항상 충실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논증문이 어떤 글인지 또렷이 새겨보자는 뜻에서 다음 예문을 읽어 보자.
예문 7)
저격수로 나선 문화부장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산하 기관장 ‘물갈이 압박’이 점입가경이다. 유 장관은 지난 12일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문화인을 자처하는 기관장들의 자존심을 뭉개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발언이었다. 그러다가 이제 아예 기관장의 이름을 거론하며 문제가 있으니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15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끝까지 자리에 연연해한다면 재임 기간 어떤 문제를 야기시켰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 장관이 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문제란 것이 나라의 문화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사퇴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 이전에 국민 앞에 낱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정도에 지나쳐 법에 저촉될 정도로 심각하다면 수사를 의뢰하여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런 압박에 굴복하여 사퇴한다면 이들 기관장은 국민들에게 문제가 있는 인물로 비쳐질 것이다.
문화부 장관이 왜 산하기관장 교체의 저격수가 되었는지, 그의 입에서 문향(文香)이 아닌 독설이 뿜어 나오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정권교체 후 챙겨줄 사람은 많은데 자리가 없으니 그 자리를 마련하라는 것 아닌가.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당에서 먼저 터뜨리고 청와대에서 이를 뒷받침하고 유 장관이 총대를 멘 셈이다. 유 장관은 또 “(서울)시장이 바뀌자 나도 서울문화재단 대표에서 물러났다”고 했다. 그것이 소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소신을 들이대며 다른 사람을 압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 ‘문화단체장 밀어내기’는 아직도 우리 문화계가 정치권의 자리나 마련해주는 비루한 처지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돌격형 문화장관’의 행보가 보기에 민망하다. (사설/경향신문, 2008. 03. 17)
예문3)도 사회현상을 주제로 삼았고, ‘논평’이라고 글쓴이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주장+근거’라는 틀과 그리 가깝지 않다. 글이 아주 길다. 살펴보기 편하도록 문단마다 번호를 주었다.
예문 8)
6월의 광장을 딛고 나아가는 2008년 촛불항쟁
김종엽(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1. 사회는 종종 자신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는지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사회는 종종 스스로에게 놀란다. 이제는 '촛불문화제'가 아니라 '2008년 촛불항쟁'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이 사건도 그런 것에 속한다.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역사적 사건의 참여자인 동시에 관찰자인데, 그들은 모두 자신의 소박한 행동이 장엄한 촛불 물결과 동일한 실체라는 사실에 경탄한다.
2. 지난 한달 동안 거듭해서 스스로를 초월하며 발전해온 2008년 촛불항쟁의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도 정리해 말하자면 현재의 상황은 후진기어를 넣고 역진하는 '불도저'를 시민들이 촛불을 밝혀 막아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적 정부 아래서는 민주화가 밥 먹여주냐는 냉소가 흘렀다. 하지만 마치 사장이 구내식당에 납품될 쇠고기를 수의계약 하듯이 미국에 간 대통령이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개방했을 때, 시민들은 민주화의 역진이 밥상 자체를 위협한다는 것을 명료하게 알게 되었다. 미국산 쇠고기 개방은 더불어 영어몰입교육에서부터 4·15 교육규제 철폐, '고소영 강부자' 내각, 대운하 추진 같은 선행하던 사건들 그리고 수돗물과 건강보험을 비롯한 각종 민영화 같은 다가올 사건들의 의미 또한 또렷하게 해주었다. 시민들로서는 적어도 역전 불가능한 지점을 지정해줄 필요를 느꼈고,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스스로 촛불을 들 수밖에 없었다.
3. 생각해보면 87년 체제를 통해서 시민들은 대의제가 작동 불능이나 오작동 상태일 때마다 그리고 87년 민주화의 성과가 무화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직접민주주의적 행동을 개시했다. 1996년 겨울 노동법파동 때 그랬고, 2000년 총선연대의 활동이 그랬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시위가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촛불항쟁은 87년 체제를 통해서 반복되어온 시민의 직접민주주의적 개입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촛불항쟁은 반복을 상회하는 혁신과 변화의 징후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사태의 추이를 되짚어보자.
4. 4월 17일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되었을 때만 해도 협상의 의미는 불명료했다. 하지만 송기호, 박상표, 우석균 같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사회적 계몽이 시작되었다. 축산포드주의에 기반을 둔 쇠고기산업의 이윤추구가 얼마나 추악한지, 정부가 얼마나 몽매한 협상을 했는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후 인간광우병을 피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지독한 강박증적인 주의력을 요구하며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가 속속 드러났다. 그때 이미 쇠고기 문제는 논쟁의 국면을 지났다. 이어진 수많은 TV토론은 이명박정부를 수호하려고 나선 인물들의 논리가 얼마나 가관인가를 보여주는 구경거리였을 뿐이었으며, 정부 관계자나 그들을 옹호하는 학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몇 년 전 황우석 박사가 갔던 길을 뒤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5. 인상적인 동시에 새로운 현상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 계몽의 확산 속도와 조직화의 힘이었다. 지식인과 전문가, 비판적인 언론매체, 인터넷 까페와 블로그 그리고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휴대전화와 디지털 카메라의 협력 아래 진행된 이런 사회적 계몽은 의학과 국제법과 국제경제학을 넘나들며 관료적 레드 테이프와 보수언론의 담론 조작, 사이비 전문가들의 요설을 남김없이 격파했다. MBC 신경민 앵커의 말처럼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시민 되기가 쉽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 일을 능히 해냈다.
6. 계몽과정의 양식과 속도만이 새로운 것이 아니고 행동의 차원에서도 새로움은 나타난다. 사실이 하나씩 규명될 때마다 사람들의 분노는 커져갔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행동이 중요하다. 이 행동이라는 핵심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여학생들이었다. 정치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있다고 추정된 존재가 정치의 전면에 불쑥 출현한 것이다. 이전에 쓴 글에서 나는 이들이 지닌 세대론적 함의를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런 세대론적 함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보인 모습이다.
7. 그들은 참 스스럼없고 재기발랄한 표어들을 들고 나섰는데, 그중엔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당돌하고도 엄중한 표어도 있었다. 나는 이 표어가 촛불항쟁의 새로움의 한 차원을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표어에는 주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의미심장하게도 남한 정부수립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면에서 생채기진 분단국가의 수립이었지만, 어쨌거나 정부수립은 식민지 아래서 살아온 민중이 국가시민으로 거듭난 경험이었다. 하지만 뒤이어진 전쟁과 독재정권으로 인해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피해자 심리를 가지게 되었다. 거의 원초적이라고 할 만한 이 피해자 심리가 이들에겐 씻은 듯이 없다. 그들은 진정으로 주인으로서 말하고 있거니와 이것이야말로 촛불항쟁이 보여준 최고의 새로움이다.
8. 그런 의미에서 촛불항쟁을 '국민 MT'라고 부른 역사학자 한홍구는 정곡을 찌른 것 같다. 계속되는 집회 속에서 주인임을 자각할 필요조차 없이 이미 주인으로 발언하는 청소년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주인됨의 몸짓과 언어를 습득하는 동시에 주인이 되어 있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항쟁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공동체의 멤버십 트레이닝이라 할 수 있다. 한겨레 기획위원 홍세화가 몇 년 전부터 끈기 있게 외쳐온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지금 집회현장에서 노래로 울려 퍼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노래는 질적 비약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홍세화의 말은 주장이고 요청이었지만 지금 불리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확증된 사실의 선포이고 주인의 자유로운 읊조림이다. 87년 헌법이 추상적으로 기재한 헌법 제1조가 비로소 사람들의 육체와 목소리에 현존하게 된 것이고, 체제의 지향점이 마침내 자기완성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촛불항쟁이 6·10항쟁 21주년과 접속한 것은 자신과의 조우인 동시에 나선형의 상승,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9. 너무도 인상적인 이런 주인됨의 양태, 주권자의 모습을 추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살수차를 혼자 막고 서서 "경찰이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면 안 되잖아요."라고 말하는 여고생,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표어를 들고 경찰 앞에 서 있는 한 노인, 불법시위를 운운하는 경찰의 선무방송에 대해 "너희가 불법이다."라고 말하는 시위군중은 실정법을 압도하는 법 정초적 발언, 주권자의 목소리이다.
10. 촛불항쟁에 흐르고 있는 주인됨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항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태도가 권위주의적 정부의 폭력에 대한 모든 공포를 깨끗이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전경이 사람들을 체포하면 그것을 '닭장차 투어'쯤으로 여기는 것, 바리케이드 쳐진 전경버스 위에 전경이 보이면 "노래해"를 외치고 물대포에 "온수"를 요청하는 것 뒤에는 전경 대다수가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이해심과 그들을 측은히 여기는 주인의 마음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의 권위주의적 폭력은 이제 사실적으로 발생한다고 해도 규범적으로 가능성의 경계 저편으로 내몰린 셈이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선 주부들의 모습, 아이들을 목말 태우고 행진하는 아빠들의 모습은 그 명백한 증거이다. 그들의 태도는 아이의 목숨까지 담보한 위험한 투쟁에 임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공포가 소멸한 광장에서 역사적 순간을 자녀와 함께하려는 이들의 모습이다.
11. 공포가 사라진 곳에서 풍자의 자기표현적 시학이 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위현장과 인터넷을 채우고 있는 시민들의 말들은 수사학 사전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만해서 시민 전체의 카피라이터화, 시인화, '진중권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더러는 "명박아 미국에서 얼마 받고 알바하니" 같은 거친 조롱도 있지만, 판소리의 전통에 닿아 있는 멋진 것도 있다. "이름은 명박, 별명은 땅박, 관상은 쥐박 … 생각은 천박, 정신은 띨박, 철학은 척박, 언행은 경박 … 인심은 야박, 의리는 깜박 … 공무원은 타박, 기관장은 압박, 서민은 핍박 … 경제는 쪽박, 전망은 희박 … 운하는 강박, 정치는 도박, 정책은 엇박, 변명은 또박, 구속은 임박, 탄핵은 촉박."
12. 풍자의 시학 속에서 새벽을 넘기곤 하는 집회현장이 난장의 형태를 띠는 것은 또한 당연하다. 더러는 서고, 더러는 앉고, 더러는 노래하고, 더러는 술 마시고, 더러는 구호를 외친다. 한쪽에서는 중고생 밴드가 사람들과 어울려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를 노래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경버스를 두들기거나 "영차영차" 밀고 있다. 그 안에는 사회적 투쟁에서 흔히 발견되는 심각함 대신 유쾌함이 흐른다. 해방과정 자체가 해방적이어서 혁명과 축제가 직접적으로 동일시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13. 확실히 전경버스와 시위대중이 맞닿는 경계면에는 어떤 과잉이 있다. 거기에서는 밧줄도 등장했고 몽둥이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 몽둥이 옆에는 현장채증을 시도하는 경찰 카메라에 물총을 쏘는 재기발랄함이 공존하고 있다. 사실 전경버스 몇 대를 끌어낸다고 청와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다. 더러 다혈질인 사람들에게 이런 장면은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전경차를 끌어내려는 사람들은 시골장터의 차력사처럼도 보였다. 그것은 시위에 활력과 초점을 부여하는 이벤트 같은 것이다. 이 말은 밧줄로 전경버스를 끌어내려고 하고 전경버스에 기어오르는 사람들의 행동이 시늉일 뿐이라는 것이 아니다. 전경들을 뚫고 청와대로 가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표현적이지도 않고 몰입을 이끌 수도 없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는 희망과 우려, 분노와 자제의 긴장이 어린다. 그럼에도 두드러지는 것은 시위대의 폭력이 아니라 겁먹은 전경들의 폭력이며, 시위대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는 "될 때까지 모이자"는 단호한 느긋함이다.
14. "될 때까지 모이자." 이 말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상상(특히 이명박정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항쟁의 지속성의 원천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항쟁에 참여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들 내가 안 가면 다른 사람이 갈 것을 믿고 있고, 시간이 있으면 시청 앞에 나가고 있다. 그래서 전경들은 피로에 찌들어갈지언정 릴레이하고 있는 항쟁의 참여자들에게는 피로감이 없다. 그래서 지치지도 지칠 수도 없는 시민들은 긴 시간을 지나 6·10과 만났고, 6·10을 넘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15. 이 항쟁의 공간은 정부와 시민 간의 협상공간이 아니다. 시민들은 지금 주권자로서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협상은 미국하고만 가능하며 그것도 재협상의 형태로만 가능할 뿐인데도, 여전히 대통령은 국민들의 염장을 지르는 말을 하거나 "자율규제" "인적 쇄신" "유류세 환급" 같은 동문서답을 거듭하고 있다. "땅 파지 말고 귀를 파라"는 표어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도 몰래 대운하사업을 추진했으며, MB맨들은 언론사를 장악하고 공기업 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국가라는 여물통을 차지하고 관직과 공직이라는 사료에 코를 처박고 있는 30개월 넘은 소들의 꼴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는 '명박산성'을 세워봐야 촛불이 꺼지기는커녕 더 높은 '시민산성'이 세워질 뿐이다.
16. 지난 대선을 경유하며 87년 체제와 민주화의 시효만료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한편에는 민주화가 끝나고 선진화가 시작되었다는 우파적 판본이, 다른 한편에는 87년 체제가 신자유주의적 97년 체제로 전환되었다는 좌파적 판본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촛불항쟁은 그런 주장들을 기각하고 있다. 87년 체제의 극복과 민주화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으며, 오직 민주화에 뒤이은 감수성의 혁신에 힘입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17. 이렇게 스스로를 초월해가는 촛불항쟁이 어디서 멈출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명박정부가 바리케이드 친 전경버스와 컨테이너박스 뒤에 웅크리고 앉아 시민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점을 초과해갈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언젠가 이 국민적 원탁이 접히고 일상의 시간이 되돌아올 것이다. 사회는 다시 이해관계의 선을 따라 분열과 갈등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리에 선 모든 이들과 그들을 인터넷TV 중계로 바라본 이들 모두의 기억들이 존속할 것이며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인터넷 주부카페가 주도한 조중동에 대한 광고투쟁 같은 다양한 투쟁방식들도 남을 것이다. 잘 작동하지 않은 대의제를 개선하려는 작업도 이어질 것이다. 항쟁을 통해 확인된 공공성에 대한 합의도 남을 것이다.
18. 그렇게 일상을 정지시켰던 이 비일상의 시간은 되돌아올 일상의 경계를 재확정할 것이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금을 다시 그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 사회는 항쟁 이후에 전혀 다른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촛불항쟁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고대 아테네의 민주적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했던 펠로폰네소스전쟁 전몰자 추도연설문의 한 구절을 바친다. "앞으로의 시대는 우리에게 놀랄 것입니다. 마치 오늘의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놀라워하듯이……." (창비주간논평, 2008. 06. 11)
2008년 봄에 정부는 주요 경제 정책으로서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국민 가운데 많은 이가 이를 반대하여 전국에서 촛불집회를 열었다. 글쓴이는 이 현상을 주제로 다루면서 집회에 어린 성격과 의미를 살폈다. 이 글은 단락이 모두 열여덟 개다. 먼저 단락을 따라가면서 내용을 정리하고, 이 책에서 세운 기준에 비추어 이 글을 논증문으로 볼 수 있는지 따져 보자.
1: 촛불집회는 항쟁이라고 불릴 만큼 놀라운 사회변화현상이다.
2: 촛불집회는 민주주의가 후진하는 현상을 단호하게 거부한다는 의미를 띤다.
3. 촛불집회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으로서 87년 항쟁과 궤를 같이 하지만 그를 웃도는 새로운 특성이 어려 있다.
4~5. 쇠고기 협상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폐단과 허구성, 위험성을 밝히는 계몽 속도와 조직화는 새롭고 놀랍다.
6~7. 특히 젊은 세대가 보여준 주인의식은 지난날에 입은, 반민주주의 역사에 따른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고 있어 크게 주목을 끈다.
8. 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국민 전체는 헌법 제1조를 참답게 실현하고 있다.
9. 이러한 주인의식에 따른 시위 행동은 실정법에 앞선 법 정초 발언이다.
10. 주인의식은 권위주의 정부가 저지르는 폭력에 따른 공포심을 모두 없애버렸다.
11~13. 풍자시학과 난장에서 느낄 수 있는 유쾌함, 재기발랄하면서도 단호한 느긋함을 공포가 사라진 시위현장 곳곳에서 엿볼 수 있다.
14. 이러한 양상에는 ‘될 때가지 모인다는’, 지속성과 피로회복성이 깃든 참여정신이 깔려 있다.
15. 촛불 집회 장소는 주권자인 국민이 명령을 하는 곳인데, 정부는 아직도 올바로 대응하지 않고 있으며 이 때문에 국민은 계속 저항할 것이다.
16. 87년 상황과 민주 과정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촛불항쟁을 통해 자기 힘으 로써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17~18. 이번 촛불 집회를 끝마치고 모두 일상으로 돌아가도 여러 가지 투쟁 양상은 오랫동 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기억은 우리 일상과 현재와 미래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우리는 신문과 잡지에서 논증문을 자주 읽는다. 특히 신문은 많은 사람이 보는 공공 매체다. 어떤 문제를 다루든 간에 엄정한 객관성에 서서 의견을 내놓아야 하며, 주장할 때는 반드시 정당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로써 뒷받침해야 한다. 이것이 사설이 갖추어야 할 표준 덕목이다. 여러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을 어기는 예를 현실에서 자주 본다. 다음 예문들이 그렇다. 이 글들은 신문에 실려 있지만 예문 2), 3)과 또 다른 차원에서 논증문이 갖추어야 할 바탕과 멀다. 글쓴이들은 처음부터 공공성이란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역시 논증문이 어떤 글인지, 어떤 정신으로 논증문을 써야 하는지 또렷하게 알고자 살핀다.
예문 9)
고대 교우회의 빗나간 동문사랑
한국 사회엔 3대‘패밀리’가 있다고 한다.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 고려대 교우회가 그것이다. 굳이 서양 마피아에나 어울리는 ‘패밀리’ 호칭을 쓰는 이유는 결속력, 목표의식, 실행력이 다른 집단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한국에서 패밀리의 원조는 티케이(대구·경북)라고 해야 할 것이다. 티케이는 경부축 중심의 개발 과정에서 경제적 부를 쌓았고, 박정희 쿠데타 이래 30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정치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호남향우회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또 결속력이 강하다는 점에서 티케이와 비교된다. 그러나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된 호남인들이 살아남고자, 혹은 최소한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결속이라는 점에선, 지배블록 티케이와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해병전우회도 사실 결속력만 강할 뿐 다른 패밀리와 성격이 다르다. 이들을 움직이는 건 정치·경제적 동인이 아니다. 이들을 묶어주는 건 험한 군 경험뿐이다.
그런 점에서 티케이와 가장 닮은 건 고대 교우회다. 다른 대학은 동창회 혹은 동문회라고 하지만, 고대는 특별히 교우회라는 이름을 쓴다. ‘같은 학교의 우애 있는 친구’라는 뜻이다. 단순한 동문이 아니라 형제급 동문인 것이다. 그러니 결속력은 강할 수밖에. 게다가 고대 출신은 대한민국 3대 학벌을 형성하고 있다. 입법부나 행정부 사법부는 물론 웬만한 회사에도 고대 교우회가 꾸려져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막강 권력인맥이 형제급의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패거리로선 전성기의 티케이가 부럽지 않다.
그럼에도 고대 교우회는 권력을 계속 더 확대하려 한다. 더 많은 명망가를 확충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넓히고, 각종 행사를 통해 결속을 도모하고, 그 인맥을 통해 교우의 출세를 돕는다. 6개월짜리 최고위 과정만 밟아도 교우로 인정하는 건 그 일환이다. 자연자원 정책과정을 수료했을 뿐인 심형래씨는 ‘세계로 뻗어가는 자랑스런 심 교우’다.
그런 고대 교우회가 이명박 교우의 당선 이후 ‘승리의 새벽’을 구가하고 있다. 창립 100돌을 맞아 펴낸 교우회 100년사에 실린, ‘명’비어천가는 압권이었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문장은 한 오라기 지성의 흔적마저 지워 버렸다. 광신적 찬양과 선동이 넘치던 그 자리의 주인공은 이 당선인이었다.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그가 느낀 건 자부심일까 두려움일까. (사설/한겨레신문 2008. 1.8)
이렇게 개인감정을 오물 버리듯 쏟아내는 꼴은 공동체 화합이라는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고, 문화와 문명을 일구는 핵심 요소인 논증 자세와 아예 거리가 멀다. 자기 뜻을 이런 식으로 펼치다 보면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막게 된다. 또 헐뜯기는 헐뜯기를 불러와 같은 꼴을 지닌 글이 맞받아 나타날 것이 뻔하다. 다음 글이 맞받아치기가 어떤 것인지 전형을 아주 잘 보여준다.
예문 10)
마피아 본색/강병태 수석논설위원
마피아는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 섬의 100여 지역 범죄집단, 이른바 패밀리들이 만든 느슨한 비밀결사를 일컫는다. 저들끼리는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라고 부른다.
‘our thing’ 또는 ‘same thing’이란 뜻이라니, 우리 편 또는 같은 편이라는 말인 듯하다. 이들이 널리 알려진 것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동부 이탈리아 이민사회에 다시 뿌리내린 데 따른 것이다. 마피아 패밀리들은 온갖 범죄영역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공권력을 제치고 대신하는 노릇까지 한다.
이런 마피아의 본디 특색과 정체, 뭉뚱그려 본색에 관한 온라인 백과 Wikipedia의 풀이가 흥미롭다. 국가권력이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데서 비롯된 사회현상 또는 문화이다.
이때 마피아는 그저 범죄조직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의 조정자, 나아가 보호자를 자임하는 의식과 태도를 의미한다. 그 바탕은 과장된 자부심과 명예의식, 심지어 사회적 책임감이다. 공조직을 포함한 특정집단을 마피아로 부르는 것이 악의만은 아닌 것과 통한다.
낡은 상식을 얘기한 것은 ‘고대교우회의 마피아 본색’이란 지난 주 한겨레신문 사설이 황당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음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해외 동포사회에서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 고대교우회의 유난한 결속력을 우스개 삼아 마피아에 빗댄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교우회가 펴낸 ‘100년사’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한껏 칭송하고, 그가 참석한 새해인사 모임이 ‘요란뻑적’ 했다고 해서 마치 국가권력 찬탈을 도모한 대역무도한 집단인양 매도한 것은 우습고도 개탄스럽다. 신문의 기본을 내팽개치고 짓밟은 난동, 난설(亂說)이다.
나는 ‘원조 패밀리’라는 TK출신에 고려대를 나왔다. 또 연락장교로 해병 빨간 명찰을 단 적이 있어 애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느 연분도 한겨레 사설이 떠든 ‘결속력, 목표의식, 실행력’으로 수많은 ‘형제급 동문’의 출세를 돕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TK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 고대교우회 등으로 엇갈렸다 다시 만나기를 거듭하는 거대한 사회집단을 협소한 패밀리, 패거리의 틀에 얽어 넣는 것은 도착(倒錯)이고 착란이다.
악에 받친 듯한 말투와 해괴한 논리로 스스로 패거리 본색을 드러낸 것은 무너진 전선을 다시 형성하려는 시도일 수 있겠다. 그러나 전에도 지적했듯, 수구 ‘찌라시’를 욕하다 선동 ‘삐라’로 전락하는 것은 보기 딱하다. (한국일보)
예문 9)와 10)는 어떤 흥미를 이끌어내고는 있다. 거칠 것 없이 서로 치고 받는 말버릇들이 퍽 희한하고 재미있다. 읽어 보니 마음 한 편이 시원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래서 논증문이 아니다.
이제 논증문이 지녀야 할 바탕을 잘 갖춘 예문을 보자.
예문 11)
삼성 비자금 의혹,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하승수(제주대 법학부 교수, 변호사)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 비자금 및 변칙증여를 둘러싼 의혹이 점점 커지고 있다. 어제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이용철 변호사가 삼성 측에서 돈을 받았다가 돌려준 적이 있다는 폭로도 나왔다. 아마 웬만한 국가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민주주의의 위기'임이 선포되었을 것이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 그 나라를 규정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그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처음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있은 후,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데에 있다. 폭로 직후에는 검찰도 금융감독원도 꿈쩍하지 않았다. 특검을 하느니 마느니 정치권에서 논란을 벌이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시간이 흘러가면 누구에게 유리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조직적인 불법을 저지른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대책을 수립하고 증거를 폐기하기에 충분하다.
지금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청와대는 뜬금없는 이유를 들어 특별검사제 도입을 막기에 급급한 모양이다. 많은 정치인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검을 들고 나온 일부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다른 속셈이 있거나, 무능하거나, 순진하거나 셋 중 하나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특검 도입 논의가 결국 좌초된다면, 상대측에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되고만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을 보면, 역시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인 것이 분명하다.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비리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비리의 실체가 드러나기는 쉽지 않다. 진실이 밝혀지려면 최소한 두 가지 장벽을 넘어야 한다. 첫 번째 장벽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관료, 검찰 중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반발, 물타기, 로비 등을 통해 실체 규명을 방해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리의 실체가 쉽게 드러날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두 번째 장벽은 여론을 왜곡하려는 시도이다. 이미 경제신문들은 경제위기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보수언론들의 물타기뿐만 아니라, 내부고발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부족도 여론이 왜곡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더구나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집단들은 가능한 한 김용철 변호사 개인의 인격이나 사생활 문제로 초점을 돌리려는 여론왜곡을 끊임없이 시도할 것이다. 이미 그런 움직임들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인 ‘삼성 비자금과 회장일가의 불법’이라는 핵심은 흐려지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어떻게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시민단체를 비롯한 양심적 세력은 어떤 요구를 해야 할 것인가?
우선 검찰에 마지막 기회를 주어야 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검찰의 신뢰성이 의심받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검찰이 수사하게 해야 한다. 지금 검찰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검찰총장 후보자, 대검 중수부장이 의혹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 내부에서도 진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도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서 검찰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흐름이 있을 것으로 본다. 검찰조직이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지금은 어느 정도의 실체규명 없이는 검찰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조직이 살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수사의지는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특별검사가 신도 아니고, 특별검사제가 만능도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삼성일가를 둘러싼 의혹을 조사할 수 있는 인적 역량을 가진 집단은 검찰뿐이다. 따라서 지금은 검찰이 구성한 특별수사본부가 제대로 수사하도록 지켜보고 감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검찰의 수사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검찰조직의 상층 수뇌부가 의혹을 받고 있고, 수사가 시작되면 검찰조직이 외압이나 로비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특별검사의 도입이 필요해질 수 있다.
문제는 어떤 내용의 특별검사제인가이다. 지금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도로는 삼성일가를 둘러싼 불법의혹을 규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청와대에서는 수사기간 200일이 너무 길다고 했다는데, 한심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불법행위가 자행되었다면, 그리고 철저하게 증거를 은폐해왔다면, 그런 사건을 수사하는 특별검사에게는 수사시한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사실이라면, 200일 안에 조직적인 은폐를 뚫고 진실을 밝히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비자금 규모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고 로비의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이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 아닌가? 따라서 특별검사의 수사기간에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수사대상도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
지금은 한 국가의 정치·사법·행정체계가 뒤흔들렸고, 최소한의 신뢰조차 무너진 상황이다. 그런데 수사기간에 제한을 두고 대상을 축소하려 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는가?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비리의혹(부동산투기, 직원해고, 정보 불법이용, 성추문)을 수사하기 위해 특별검사가 5년 동안 수사하도록 허용했다. 이란 콘트라사건에 대해서는 특별검사가 무려 7년에 걸쳐 수사를 했다. 그런데 국가의 근간을 뒤흔든 불법의혹이 제기되는 마당에 수사기간을 제한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리고 특별검사를 추천하는 것도 대법원장이나 대한변호사협회가 아닌 객관적인 주체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를 징계하려는 논의가 있었던 대한변호사협회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추천 주체가 되기 어렵다. 대법원장도 객관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특검을 도입하려면 제대로 도입해야 한다.
이번에 드러난 문제는 삼성일가의 문제지만, 대한민국의 기득권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재벌―관료―정치―언론의 유착에 의해 형성된 기득권연합의 실체가 이번에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혹을 규명하고 기득권구조를 감시, 견제, 해체할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가이다.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하에 광범위한 운동이 전개되지 않으면, 누가 수사하든 끊임없이 수사는 흔들릴 것이고, 진실은 어둠 속에 파묻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번에 제기된 의혹을 규명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삼성공화국이 아닌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따라서 진실이 드러나고 실체가 규명될 때까지 우리 사회의 양심 있는 이들은 용기 있는 작은 행동을 주저하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든 자신이 살아가는 작은 공간에서부터든, 의혹 규명을 요구하는 양심의 목소리가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만이 '양심과 영혼조차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정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길이다. (창비주간논평, 2007.11.20)
이 글에 담긴 주제도 우리 사회를 이룬 뿌리에 닿아 있다. 한때 매우 큰 충격을 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제다. 글쓴이는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되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상황을 살피는포괄 능력을 보여준다. 그 덕분에 이 글에는 논증문이 갖추어야 할 기본 필수 덕목인 ‘주장+근거’ 구조가 퍽 또렷하다.
4. 감상문
우리 정신(精神) 구조를 헤아리는 것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살피는 한 방법이다. 그 가운데 정신이 ‘이성과 감성’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이분법은 가장 간단한 안목이다. 감상문(感想文)은 이성과 감성 가운데 감성에 초점을 맞추는 글이다. 어떤 사물, 상황, 사건을 겪은 뒤 우러난 감정(感情) 내용을 쓴다. 여기서 '감정 내용’이란 희로애락을 비롯한 갖가지 좋고 나쁜 기분과 취향, 정서 그리고 그에 따른 판단과 깨달음 따위를 말한다.
감상문에서 글쓴이는 대상에 어린 속성 자체를 알리는 데 매달리지 않는다. 대상을 두고 시시비비를 따지며 이치와 논리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자기 느낌에 주의를 쏟는다. 설명문에서 글쓴이는 자기 취향을 버려야 한다. 논증문에서는 자기 신념, 의견, 판단을 남들 앞에 세우려고 감정을 억제한다. 그러나 감상문에서는 자기감정에 충실하면 되고 그래야 한다. 그래서 감상문을 읽으면 글쓴이가 지닌 기질, 성격, 생활상 따위를 직접 엿볼 수 있고, 그 덕에 읽는 이는 새로운 인격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 즐거움이 감상문에 깃는 미덕이며 의의다. 감상문은 한마디로 주관성과 개인성을 바탕으로 쓰는 글이다.
감상문이라 하면 어떤 구체 대상을 다루는 글로만 여기는 사람이 많다. 책, 영화, 연극, 만화, 회화, 조각, 음악, 운동경기, 명승지, 여행지 따위를 읽고 보고 듣고 난 뒤 느낀 것을 적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감상문을 대표하는 갈래로 흔히 ‘독후감’을 꼽는데, 우리가 어릴 때 자주 읽고 직접 써보았다.
이제 감상문을 좀 더 넓은 뜻으로 새긴다. 감상문은 단지 특정 대상만을 좇는 글이 아니다. 그것까지 포함하여 살면서 겪은 모든 일에 따른 감정 내용과 깨우침을 담아내는 글이다. 이렇게 헤아리면 감상문은 범위가 퍽 넓어진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생활현장에서 날마다 마주치는 온갖 크고 작은 일에 배어드는 감정과 정서,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역사와 풍습과 요즘 큰 관심을 끄는 시사(時事) 문제들에 따른 감회와 반성 들이 모두 감상문을 쓰는 소재와 주제다. 각종 통지서와 결혼청첩장 따위 객관 사실을 알리는 설명문과 논증문을 뺀 나머지 글들… 독후감을 비롯해 편지와 일기, 기행문, 수필, 에세이 들이 다 감상문이다.
이 가운데 ‘수필’이니 ‘에세이’니 하는 낱말을 자세히 살펴보자. 뜻을 또렷하게 규정, 통일하지 않아 퍽 혼란스럽다. 어떤 이는 ‘감상문’이 ‘수필’보다 뜻이 넓다 여겨 수필이 감상문에 속한다고 한다. 어떤 이는 그 반대로 생각하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운데 감상문과 수필은 수준이 퍽 다른 글이라 보고 많은 이가 이렇게 주장한다. ‘감상문은 일반 대중이 쓰는 글이다. 내용과 형식이 대개 쉽고 평범하다. 수필에는 감상문에서 보기 힘든 뛰어난 문학 기교와 의장(意匠)이 배어 있다. 또 인생을 통찰하는 자세가 깊다.’ 결국 수필은 직업 문인 또는 문장력을 잘 갖춘 사람이 쓰며 감상문에 비해 수준이 높고 훨씬 정제된 글이라는 것이다. 수필은 시나 소설보다 일반 대중에 더 가깝고 친숙하여 누구나 쓸 수 있다 수필 이론서에서는 흔히 말하지만, ‘수필’ 하면 역시 아무나 쓸 수 없고 내용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야 한다고 여긴다. 우리 모두 알게 모르게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곁에 놓인 수필들을 보면 사실 그렇지 않다. 일반인이 쓴 감상문과 또렷이 구별해야 할 만큼 생각이 깊고 체험이 짙으며 문학성을 두루 갖춘 글도 물론 많다. 그러나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가벼운 어조와 평범한 솜씨로써 다룬 글이 더 많다. 이러한 글은 말만 수필이지 감상문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할 수 없고 구별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무엇이 ‘뛰어난 문학 기교’이며 ‘의장’인지 어느 정도가 되어야 ‘깊은 통찰력’인지 객관성 있게 갈라줄 기준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며 ‘뛰어난 것’과 ‘깊은 것’을 가르는 안목과 가치관은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수필'과 '감상문'을 또렷하게 나눌 객관 기준은 실제 어디에도 없다.
'수필'과 '감상문'은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수필’은 ‘감상문’을 달리 이르는 낱말일 뿐이다. ‘에세이’도 이와 마찬가지다. 수필이든 에세이든 감상문이든 모두 자기주장을 객관 논리로써 밝히려는 논증문이 아니고 객관 정보를 생명으로 삼는 설명문은 더욱 아니다. 사물을 보고 상황을 겪은 뒤 감정(感情) 내용을 쓰는 글이다.
논설문이요 평론이라 하며 내놓았지만 ‘주장+근거’ 구조에 따른 논리성은 약하고 글쓴이 개인 감상을 적잖이 드러낸 글이 더러 있다. 이러한 글은 논리를 품고 있되 내용은 사물과 삶에 얽힌 개인 정서에 닿아있다. 어떤 이는 이러한 글까지 모두 감상문에 넣고자 한다. 그 반대로, 감상문이라 발표했지만 대상에 어린 의미나 가치를 논리로써 따지는 내용이 짙은 글도 있다. 이러한 글은 감상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가 또 있기 마련이다.
사람이 무엇을 감상한다는 것은 무릇 느낌과 판단이 어우러지는 행위 과정이다. 칼로 긋듯 느낌과 판단을 따로 나누어 여기까지는 느낌이고 여기까지는 판단이라 하기 어렵다. 가치판단과 평, 감상은 한데 이어진 정신활동이기에 함께 드러나고 표현되기 일쑤다. 논증문 속에 감상 요소가 감상문 속에 논증 요소가 더러 섞이고, 그래서 감상문인지 논증문인지 또렷하게 구별하기가 가끔 어렵다.
일정한 체계로써 글을 크게 가름하려는 뜻과 목적이 중요하다. 글이 전체에서 어디에 뿌리와 중심을 두고 있는가를 살피는 태도가 필요하다. 설명문은 객관성에 따라 사실과 정보를 알린다. 논증문은 주관어린 신념을 객관성 어린 방법으로 펼친다. 이와 달리, 삶에 스민 정서를 주로 쓰는 글이 ‘감상문’이다. 글을 이루는 기둥이 설명인지 논증인지 감상인지에 따라 종류를 규정한 뒤, 어떤 글은 좀 더 감상 요소가 짙고 어떤 글은 감상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지성과 논리가 돋보인다는 따위로 이해하는 것이 알맞다.
감상문은 감성 세계를 다루기에 폭과 깊이가 하염없이 넓고 깊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개성이 살아가는가. 일상을 다루어 자잘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사회전반 흐름과 사건에 반응한 무거운 담론도 있고, 인생에서 궁극이 되는 의미 따위를 파고든 심각한 글도 있다. 감성에만 온전히 기대는가 하면, 지성과 논리를 토대로 감성을 세우기도 한다. 일상어만으로 소박하게 글을 엮기도 하고 짙은 문학 표현을 좇기도 한다. 이 가운데 글 중심을 감성에 두었다면 모두 감상문이다. 첫 번째 예문은 ‘생활감상문’을 보이는 전형이라 할 만하다.
예문 12)
애저찜(꿩고기, 닭고기, 두부 등에 파, 마늘, 후추와 같은 양념을 하여 반쯤 볶은 것을 내장을 뺀 어린 돼지의 뱃속에 넣고 실로 꿰맨 후 푹 찐 보양 음식)/채만식
며칠 전 광주까지 갔다가…….
아침에 여관집 마당으로 도야지 새끼가 조막만씩 한 몸이 두 마리 꼴꼴 돌아다니는 것을, 조曺가,
“흥, 남의 회만 건드리는구나!”
하는 소리를 듣고 그럴 성해서 웃었더니 마침 조가 설두(앞장서서 일을 주선함)한 애저찜의 대접을 받았다.
겨우 젖이 떨어졌을까 말까 한 도야지 새끼를 속만 긁어내고 통으로 푹신 고아 육개장 하듯이 펴서 국물을 먹는데,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입을 대기는 비로소 처음이고, 처음이라 그런지 좀 애색(마음이 애처롭고 안타까웠다)했다.
하기야 연계軟鷄찜을 먹는 일을 생각하면 도야지 새끼를 통으로 삶아 먹는다고 별반 애색할 것은 없는 노릇이다.
또, 우리가 일상 흔연히 감식을 하는 계란이며 우유며 어란魚卵 이며 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천하 잔인스런 짓이요, 하필 애저찜만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원숭이를 꽁꽁 묶어 불 달군 가마솥 위에 달아 매놓고는 줄을 누꿔(‘늦추다’의 경기도 사투리) 발바닥을 지지고지지고 한다 치면 요놈이 약이 있는 대로 죄다 머리로 오른다든지? 할 때에 청룡도로 목을 뎅겅 잘라 가지고는 골을 뽑아 지져 먹는다는 원뇌탕猿腦湯이란 것에 비하면 애저찜쯤은 오히려 부처님의 요리라고 할 것이다.
그렇건만 역시 처음이라 그랬던지 비위에 잘 받지를 않는데, 아 그러자 아침에 여관집 마당으로, 산 채 꼴꼴거리면서 돌아다니던 도야지 새끼가 눈에 밟혀, 하면서 일변 또 간밤에 애기 기생이 한 놈 불려 와서는 노래를 한답시고 애를 써 쌓는다 시달림을 받는다 하는 게, 문득 애저찜이라는 것을 연상케 하던 일이 생각이 나 하는 통에 고만 비위가 역하여 웬만큼 젓가락을 놓았었다.
맛은 그러나 일종 별미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고, 그 중에도 술안주로는 썩 되었고, 다만 너무 기름진 게 나 같은 체질에는 맞지 않을 성불렀다.
동행 중 최 박사 역시 지방질은 많이 받지 않는 모양, 조금 하다가 말았지만 신 변호사는 근일에야 맛을 들였다면서 고기는 물론 뼈까지 쪼옥쪽 빨아먹고 그 뱉은 뼈가 앞에 수북한 데에 한바탕 놀림거리가 되었다.
아무튼 다시 보장하거니와 술안주로는 천하일품이니, 일찍이 맛보아 보지 못한 문단 주호酒豪는 모름지기 전남全南으로 한바탕 애저찜 원정을 가볼 것이다. (‘박문’, 1940. 4.)
‘애저찜’이라는 요리를 앞에 두고 글쓴이는 애처롭고 안타깝다. ‘애저찜’이란 젖먹이 돼지를 인정사정없이 통째로 잡아먹는 요리인데, 아침에 종종거리던 새끼돼지들이 눈에 밟힌 것이다. 연계찜이나 계란, 우유, 어란 따위가 다 어린 생명을 노리지 않느냐 따져 보고, ‘원뇌탕’이라는 몇 배 더 잔인한 요리를 떠올려 억지로 비위를 맞춰볼까 한다. 그러나 전날 밤에 보았던 애기기생이 생각나 그만 입맛을 잃고 만다. 동정과 연민이 애틋한 이 대목에서 읽는 이는 마음이 끌린다.
그렇지만 글쓴이는 이러한 인정주의를 끝가지 밀고 나가 예를 들어 휴머니즘 따위 일정 사상을 논하는 수준에서 주제를 무겁게 하지는 않았다. 가여운 존재를 어여삐 보는 마음이 적잖지만 그저 덤덤하게 이모저모 애저찜을 설명하고, 아무튼 좋은 안주니 한번 맛보시라 문단 주호들에게 권했다. 이밖에 이색 풍물이 엿보여 재미있고 원뇌탕과 비교하여 애저찜을 ‘부처님의 요리’라고 갖다 붙인 말솜씨가 우습지만, 결국 지역 특산 요리를 소개하는 것에서 글이 시작하여 끝났다. 주제가 가볍다고 평한다.
어떤 이들은 이 가벼움을 깊이가 없어 가치가 적다고 가볍게 여긴다. 우리 사람이 지닌 감상 세계는 참 넓고 깊다고 했다. 일상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삶이란 일상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때, 일상에서 건져 올리는 생활이야기는 소중하다. 가벼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무거운 이야기가 서며, 가볍기에 우리 모두 동감할 수 있어 귀하다.
다음은 홍매(중국 남송, 1123~1202)가 저서「용제수필」에 남긴 글이다. 이 책으로써 ‘수필’이라는 용어가 세상에 처음 나왔다.
예문 13)
축복과 저주/홍매
축복과 저주라는 말은 일반 사람이 어떤 일이나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하여 마음을 표현할 때 쓴다. 만일 한 사람이 바르지 못한 일을 너무 많이 하면, 뭇 사람들은 그를 저주하고 욕한다. 아무리 유명한 무당이나 점술가가 축복을 내리고 기도를 해주어도 그 사람은 무력할 정도로 저주와 욕을 먹는다. 또 만약 그가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축복을 받게 되면, 자기를 축복해준 사람들이 열심히 축복해 주지 않았다고 원망하기도 한다. 이거야말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야기 두 가지를 말해 본다.
춘추시대의 일이다. 제나라 군주인 경공이 몹쓸 병에 걸렸다. 그러자 대신인 양구거가 그에게 간하기를, 이런 병에 걸린 것은 축복과 기도를 맡은 관리가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영이라는 대신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안영이 말했다.
“만약 축복이 사람에 이롭다면 사람이 신령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반대로 저주를 받게 되면 사람이 신령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말 아닌가? 그것은 사람에게 해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네. 요섭(지금의 산동성 묘성) 동쪽과 고(지금의 산동성 평읍현) 서쪽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리 군주를 저주하는 사람이 많은데, 기도관이 전력투구하여 군주를 위해 축복하고 기도한다고 하세. 그렇다고 그가 어떻게 수만 명의 저주를 막아낼 수 있겠소이까? 따라서 주군의 병은 결코 관리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따라서 그를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네.”
진국의 중행인이 멸망할 위급 사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태축(복을 비는 관리)을 궁내로 불러들여 죄를 추궁했다.
“네가 짐을 위해 축원을 할 때 계율을 존중하지 않아 지금 이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으니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 신하 축간이 그 말이 잘못되었다고 여겨 태축을 위해 변론을 하였다.
“지금 호화스런 마차와 배를 제작하느라 주공께서 백성에게 부과한 세금이 하늘까지 껑충 뛰어올라 백성의 원망이 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주공을 저주하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만일 축복과 기도가 나라에 이롭다고 한다면 저주는 당연히 나라에 해로울 것입니다. 설사 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 축복과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그가 어떻게 나라 전체 백성의 저주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백성이 저주하면 나라의 생존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니 어찌 축복과 기도를 관장하는 사람에게 죄가 있겠습니까?”
글쓴이 홍매는 정치가다. 아주 오랫동안 관직에 몸담아 수많은 일을 겪고 여러 느낌을 그때그때 기록했다가 나중에 이를 집대성하여「용제수필」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글은 예문 1)과 다르다. 자잘한 일상사에 얽힌 가볍고 소박한 심회가 아니라 사건과 상황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린다. 단순한 감상에 그치지 않고 이치를 따져 정도를 밝힌 것이다. 예문 1)보다 내용이 무겁다 할 만하다.
그러나, 축복과 저주를 제대로 새기지 못하는 행위를 평하여 ‘이거야말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첫 문단에서 말했다. 이는 사건과 경우를 논리에 따라 살펴 주장과 근거를 밝히는 자세가 아니며, 객관 사실을 알리려고 하는 태도도 아니다. 글쓴이 개인감정을 드러낸 문장이다. 그런데 이 ‘한 문장’은 비록 한 문장이지만 밑에 서술한 내용을 규정하고 포괄한다. 결국, 이치를 따지는 내용이 조금 무겁지만 전체에서 이 글은 예문 1)과 마찬가지로 감상을 적은 글이다.
이 글을 놓고 무겁다느니 가볍다느니 하면서 글 종류를 가르는 차원에서 예문 1)과 구별할 필요는 없다. 가볍고 무겁고를 따질 기준이 자로 잰 듯 또렷할 수 없고, 글쓴이가 ‘웃기는 이야기 두 가지’라고 스스로 밝혔듯 서술 중심을 감성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다음 예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문 14)
운은 가끔 이성의 움직임과 같다/몽테뉴 (프랑스, 1533~1592)
운의 줏대 없는 온갖 움직임은 우리에게 여러 종류의 모습을 보여 준다. 다음과 같은 것보다 더 명백하게 정의로운 행동이 또 있는가? 드 발란티노아 공작은 추밀경 아드리앙 드 코르네트를 독살하려고 결심하고, 그의 부친인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 바리칸에 있는 그의 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가면서 앞서 독약을 넣은 포도주 몇 병을 보내 놓고, 요리사를 시켜서 그것을 조심스레 보관하라고 명령하였다. 교황이 아들보다 먼저 와서 마실 것을 청하자 요리사는 이 포도주가 호의로 보내온 것인 줄로만 알고, 그것을 교황에게 내주었다. 그리고 공작이 마침 간식 시간에 도착해서 자기가 보낸 포도주는 잘 보관하고 있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그 술을 마셨다.
그래서 그 부친은 그로 인해 급사하였고, 아들은 오랫동안 병석에서 고생하다가 더 나쁜 운명을 당하도록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운명이 꼭 알맞은 때에 우리에게 농간을 부린다.
당시 드 방도므 대군의 기수이던 데스트레 경과 다스코 공작의 부관이던 드 리크 경은 각기 당파가 달랐지만, 둘 다 풍그젤라(푸크롤르) 경의 누이에게 청혼했는데(이런 일은 국경 지방의 이웃 간에 자주 있는 일이다), 드 리크 경이 승리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결혼식 날, 아직 신부와 동침하기도 전에 신부를 위해 창을 하나 꺾고 올 생각이 나서 생 토메르 근처로 싸움을 걸러 나갔다. 그러나 전력이 더 강한 데스트레 경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딱하게도 신부는
한두 겨울의 긴긴 밤이
그들 사랑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전에
신랑의 포옹에서 강제로 떨어지게 되어 (카툴루스)
그녀 자신이 예절을 갖춰서 그에게 남편을 돌려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다. 일은 그대로 되었다. 프랑스의 귀족은 결코 부인들의 요청을 거절하는 일이 없었다.
다음과 같은 것은 교묘한 운명이라고 보이지 않는가? 헬레나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노플 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수백 년 뒤에 헬레나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는 이 제국의 막을 내렸다.
어느 때는 운은 즐겨 기적과 솜씨를 다툰다.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클로비스 왕이 앙굴레므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성벽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저절로 무너졌다고 한다. 그리고 부셰가 다른 작가로부터 인용하는 말에 의하면, 로베르 왕은 한 도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포위진에서 빠져 나와 오를레앙에 가서 생 테냥의 축제를 엄숙하게 진행하고 있자니, 그가 신앙의 절차를 올리고 있을 때에 미사가 진행되는 어느 시각에 이르자, 포위된 도시의 성벽이 아무 힘도 없이 무너져 사라졌다고 한다.
우리 군대가 밀라노를 공격하였을 때에는 일이 거꾸로 되었다. 렌조 부대장이 우리 편을 들어 어로나 시를 포위 공격하며 성벽의 커다란 벽면 밑에 지뢰를 묻어 폭발시켰더니, 성벽은 갑자기 커다란 덩어리로 쳐들렸다가 똑바로 제자리에 내려앉아서, 포위당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탈도 없었다.
어떤 때는 운은 약이 된다. 페레스의 자손은 가슴에 농양을 앓다가 의사들도 손을 들었다. 죽어서라도 고통을 없앨 생각으로 그는 적국의 밀집 부대 속으로 정신없이 돌격해서 몸을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는데, 결국 몸속의 종기가 터져서 병이 나았다.
화가 프로토게네스의 경우에는 운이 그의 기술적 지식보다 더 기술적이지 아니었던가? 그는 피로해서 기진맥진한 개를 그리면서 그가 만족할 만큼 완성해 놓았는데, 단지 개거품만은 자기 소원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울화가 치밀어 모두 지워 버릴 작정으로, 여러 물감이 배어 있는 해면을 그림에다 집어던졌다. 그랬는데 운 좋게도 그 던진 것이 개의 입에 맞아 완성하지 못하던 것을 완성해 주었다.
운은 어느 때는 우리의 생각을 교정해 주는 것이 아닐까? 영국의 여왕 이자벨은 자기 남편에 대항해서 싸우는 아들을 지원하려고 군대를 거느리고 젤란드에서 자기 왕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을 때에, 만약 그녀가 예정했던 대로 항구에 도착했더라면 패망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적군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은 그녀의 뜻과는 반대의 다른 곳으로 그녀를 밀어다 놓았기 때문에, 그녀는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옛 사람은 돌을 집어 개를 후려갈긴 것이 그의 계모를 죽게 했다.
한데 그는―
우연은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일을 결정한다. (메난데르)
운은 우리보다 더 나은 의견을 가졌다고 하는 이 시구를 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이케데스는 두 병사를 부추겨서 아드라나에 체류하고 있는 티몰레온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들은 티몰레온이 희생을 바치는 시간을 거사의 시작으로 정했다. 그리고 군중 속에 섞여 들어 그들이 적당한 기회가 왔다고 서로 눈짓하고 있을 때에, 갑자기 제삼자가 튀어나와서 칼을 휘둘러 그들 중 하나의 머리를 쳐서 쓰러뜨리고 달아났다. 그의 공범자는 사건이 발각되어 자기도 잡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제단으로 달려가서, 사실을 모두 대겠으니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이렇게 그가 음모의 전말을 진술하고 있는 동안에 제삼자가 잡혀왔다. 군중들이 이자를 살인범이라고 잡아서 군중 속으로 떠밀며, 티몰레온과 이 군중들 중의 유력자가 있는 곳으로 끌고 왔다. 거기서 그는 살려 달라고 고함지르며, 자기는 부친의 살해범을 정당하게 죽인 것이라고 말했다. 마침 운 좋게 그 자리에 있던 증인들에 의해서, 지금 부친의 원수를 갚은 것이라는 그의 사연이 입증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고 그것으로 시칠리아 인들의 어버이인 티몰레온의 죽음을 면하게 했다고 10아티가 미나에의 상금을 받았다. 이처럼 운은 그 규정으로 인간 예지의 법칙을 초월하고 있다.
끝으로 하나, 이 사실을 보면 운은 은총과 호의와 특수한 경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이그나티우스 부자는 로마의 삼두 집정관들의 체포령을 받고 서로 생명을 자기들끼리의 손에 넘겨줌으로써 폭군들의 잔인성을 헛되게 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들은 서로 칼을 빼들고 대들었다. 칼날은 끝이 서서 똑같이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아름다운 애정의 영광으로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팔에 남은 힘으로, 상처에서 칼을 뽑아내고 나서 그 상태로 서로 어찌도 굳게 껴안고 있었던지, 사형 집행인들은 그들의 머리를 한 칼로 쳐서 베었으나 몸은 한 모양으로 껴안은 부자는 상처에 상처를 맞대고 피와 생명의 나머지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이 글은 ‘에세이’ 원조인 몽테뉴(프랑스, 1533~1592)가 펴낸 저서「Les Essais」에 실려 있다. 몽테뉴가 ‘에세이’라는 말을 세상에서 처음 썼다. 몽테뉴도 홍매와 마찬가지로 일생 동안 겪은 여러 일과 감회를 그때그때 적어 놓은 뒤 나중에 책 한 권으로 묶어 냈다. 그것이 바로「Les Essais」이다. 흔히 ’수상록‘이라고 번역한다.
다음 예문은 신문에 실린 것이다.
예문 15)
[女談餘談] ‘평평한 세계’ 재미없다/박상숙(미래생활부 기자)
청계천에 물길이 다시 뚫린 덕택에 주변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거 저녁이나 주말이면 공동화 현상을 겪던 이곳에 이제 늘 사람이 북적댄다.
달갑잖은 변화도 있다. 사람이 모이니 각종 상업시설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다국적 커피 체인의 청계천 ‘점령’은 너무하다 싶다. 그 회사의 지점 소개 약도를 보니 청계천 일대의 종로와 광화문에 자리잡은 매장만 무려 10군데 가까이 된다.
세계화의 폐해 가운데 하나가 각국의 도시들이 개성을 잃고 똑같아진다는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얼마 전 일본 도쿄를 다녀왔다. 6년만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둔 당시는 첫 방문이라 그랬을지 모르지만 엇비슷해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도쿄의 새로운 명소로 꼽히는 오모테산도에 들렀다. 낯선 곳이 주는 설렘설렘, 흥분은 없었다.
한국에서 뻔질나게 드나들던 커피숍이 거기에 있었고, 서울 거리에서도 익숙한 해외 명품 매장들의 똑같은 간판에 질렸다. 세계가 평평해지면서 마냥 평범해지고 있는 듯하다. 집 떠나온 두려움과 함께 색다른 맛과 멋을 발견할 모험의 기회도 사라졌다.
지난해 서울신문이 베트남에서 주최한 한국영화제에 참석했던 박찬욱 감독에게 하노이의 인상을 물었다.“너무 시끄럽고 복잡하고 약간은 지저분하고, 음…, 그래서 아주 좋네요!”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상기된 얼굴로 호텔을 총총 빠져 나가던 모습이 선하다. 그땐 몰랐다. 미숙하고 서투른 도시의 매력을. 세계화의 미명 하에 도시가 온통 똑같은 얼굴을 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지루해지겠는가. 새로운 만남을 갖고 싶은데 영화 ‘매트릭스’에서 복제를 거듭하는 ‘스미스 요원’만 만나게 되는 기분 아닐까.
서울도 대대적인 ‘성형수술’에 들어갔다. 매끈하고 세련된 모습을 갖기 위해 고유의 흔적과 주름살을 몽땅 지우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촛불시위’가 가장 큰 구경거리요, 추억거리가 되지 않으란 법도 없다.
(서울신문, 2008. 06. 08)
글쓴이는 세계 곳곳 도시를 둘러보고 난 뒤 느낌을 적었다. 서울과 도쿄 그리고 하노이까지… 세 도시 모두 고유한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세계화가 일으킨 변화가 모든 것을 똑같게 만들었고 개성이 사라졌다 했다. 기자가 쓴 글이라 얼핏 취재 보고서로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글쓴이는 대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각 도시가 획일화 된 길을 걷는 현상을 본 뒤 가진 감상과 평을 더했다.
다음 글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을 보고 감상을 적은 것이다. 글쓴이 마음이 퍽 깊고 또렷하게 울린다.
예문 16)
나의 엉터리 소설 이야기/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나는 좀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는데, 가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면서 그의 삶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한다. 가령 운전할 때나 음식점에서 누구를 기다릴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창밖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의 외모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무엇 하는 사람일까, 왜 지금 저기에 있을까, 열심히 상상의 날개를 편다. 조금 독특하게 보인다거나 색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거나 할 때면 내 상상력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발동한다.
어렸을 때 셜록 홈스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다. 아마도 그때 이런 버릇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창작에 대한 내 호기심일 수 있다. 유학 시절 꽤 유명한 소설가에게서 소설작법을 수강했는데 소설의 소재를 찾는 방법 중 하나로, 길에서 재미있는 사연을 가진 듯 보이는 사람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라고 했다. 행동, 말투, 그가 만나는 사람을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펴면 저녁때쯤 소설 한 권을 쓸 만한 충분한 자료가 생긴다는 말이다.
소설 쓰는 일은 오래전에 포기했지만, 난 아직도 사람을 보면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 상상하는 버릇을 그대로 갖고 있다. 얼마 전 인터넷에는 ‘하수구에서 검거된 절도범’이라는 기사가 떠돌았다. 벌거벗은 초로의 남자가 하수구 안에서 하반신이 물에 잠긴 채 겁에 질린 얼굴로 있는 사진과 함께였다.
57세의 남자가 서울 노원구 중계동 어느 병원에서 여자의 핸드백을 빼앗은 뒤, 사람들이 옷을 잡아당기자 옷을 다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하수관으로 도망쳤고, 그 안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차가운 구정물 속에 무려 5시간 동안 있다가 ‘하수관 검사 로봇’까지 동원한 경찰에 붙잡혔다는 기사였다. 체포될 때 남자는 심각한 저체온증으로 몸을 심하게 떨면서도 훔친 핸드백을 움켜쥐고 반항했다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초범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못 말리는 내 상상력이 발동했다.
“그 남자는 한때는 꽤 잘나가는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했지만 외환위기 때 파산하고 집도 공장도 모두 잃었다. 그의 인생은 눈 깜짝할 새 파멸로 치달았다. 자연스럽게 친구도 친척도 멀어지고 이젠 노모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지하 셋방에서 산다. 이전에 그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을러서, 약지 못해서, 허황된 꿈을 꾸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 뿐, 열심히 노력하면 가난하게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깔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신용불량자가 된 건 벌써 오래전, 올해는 경기가 너무 나빠 노점을 해도 하루 5000원 벌이가 힘들었고 전세금이 너무 올라 그나마 살던 곳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암 선고를 받았다. 항암치료 한 번 받을 때마다 30만 원이 든다. 도합 16번을 받아야 하는 항암치료를 네 번 받고 중단한 상태였다.
오늘 아침 아내는 더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꼭 한 번만이라도 항암치료를 더 받게 하고 싶었다. 아내가 다니던 병원에서 서성이는데 어떤 여자의 핸드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있을 돈, 그 돈이면 한 번쯤 더 항암치료를 받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그 백을 낚아챘다. 사람들이 옷을 잡자 엉겁결에 옷을 벗고 뛰었고, 당황한 나머지 하수구로 뛰어들었다. 깜깜한 하수구 속에서 길을 잃고 그는 지옥을 경험했다. 혹독한 추위, 인간으로서의 비애, 죽음보다 더 괴로운 공포. 경찰이 그를 찾았을 때 그는 거의 실신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은 핸드백과 그 안의 돈뿐.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그는 핸드백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생계형 절도가 외환위기 때 13만 건이었는데 지금은 19만 건이라고 한다. 지난번 울산에서는 냉장고 위의 당근 두 개를 훔치다가 붙잡힌 남자가 있었다. 특별사면이다 뭐다 하여 큰 죄를 지은 부자가 활보하는 세상에 핸드백 훔치고 하수구로 도망갔다 잡힌 도둑이 자꾸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단지 사실무근 엉터리 소설뿐인데…. (동아일보, 2007년 2월 12일)
사회문제를 다루는 글은 자칫 딱딱해지기 쉽다. 글쓴이는 심각한 사회 문제를 따뜻한 마음씨와 상상력이라는 개성으로써 부드럽게 버무려냈다. 문제의식과 감정이 조화를 잘 이뤄 보기 드물게 향기가 높다.
아래 글은 이제까지 본 글 가운데 주제 폭이 가장 넓다. 인생 전체에 걸친 문제를 두고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도 마음씨가 소박하다.
예문17)
내 발 밑의 행복/학생 글
행복이란 사전적 의미로 욕구가 충족되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행복의 의미를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줄 것입니다.
나는 가끔 예쁜 옷과 명품 가방과 구두, 반짝이는 액세서리 등등 원하는 것은 모든 가질 수 있는 화려한 재벌 집안의 딸, 가난하지만 활기차게 살아가다 백마 탄 왕자를 만나게 되는 드라마 속의 발랄한 여 주인공,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에 지성까지 겸비하여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연예인의 모습 등에 나를 겹쳐 보곤 합니다.
이때 나는 나도 모르게 행복을 느끼지만 이러한 행복은 비눗방울처럼 너무나도 쉽게 사라집니다. 상상의 나라에서 현실로 돌아온 나는 현실과의 괴리로 나 자신을 탓하고 불행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행복의 잣대를 남에게 맞추는 순간 불행은 시작됩니다. 행복을 생각해 보면서 그 동안 이런 욕심에 가려 있어 잊어가던 작은 행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친한 친구들과의 진솔한 만남, 맛있는 음식을 먹기 직전, 용돈 받는 날,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날, 뜻밖의 휴강, 예쁜 학용품을 살 때, 따뜻한 옛 추억을 생각할 때 등등… 이때 내 얼굴에는 웃음이 번지고 콧노래가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커서 눈에 잘 띠는 행복과 작아서 자세히 보지 않고는 볼 수 없는 행복 말입니다. 두 가지 행복의 차이는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있습니다. 커다란 행복은 모두가 누리기에는 부족하지만, 작은 행복은 우리가 가까운 곳을 눈여겨본다면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돈과 명예와 지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만능주의 시대에서 물질 충족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시선을 앞으로만 고정시킵니다.
하지만 행복은 자기 발밑에 있다고 합니다. 비록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지만 작은 행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고, 이 시대에서 느끼는 불행을 이 행복이 위로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행복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떤 다른 느낌을 발견합니다. 이 작은 행복이 바로 내게 용기를 준다는 것입니다. 자신감 없이 살아오던 나에게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또 하고 싶게 만드는 뜨거운 마음을 줍니다.
행복은 각자에게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만족에 그 초점이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작은 행복이지만 만족할 줄 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글은 행복론이다. 사람이 무엇을 얻어야 행복할까,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진정 잘 사는 것인가 물었다. 작은 것에 만족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글쓴이는 믿는다. 외부에 눈을 맞추면 불행해지니 내 주위에 놓인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자기 경험을 근거로 펼쳐낸 주장이 퍽 소중하다.
마지막 예문은 퍽 뛰어난 문장력과 짙은 서정이 어우러진 글이다.
예문 18)
오월/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에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
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
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
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놓고, 나
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
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
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