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2025년 1월 29일
마태 6:19-21, 25-34. 1고린 15:51-58
우리에게 생명을 이어주신 조상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은 대부분 이미 우리 곁을 떠나가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그분의 흔적이 우리 삶 안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이렇게 모인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가 사는 삶 가운데 돌아가신 분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대를 이어 우리에게 피와 생명을 주셨고 그렇기에, 그분들로 인해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우리 곁을 떠나신 분들과 아직도 어떤 끈과 같은 관계로 연결되어 있고, 계속해서 그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이별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 기억 속에 살아 계시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하느님 안에서 편안히 안식하고 계시고,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새삼스럽게 그분들을 기억하고, 함께 기도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에서는 명절은 물론 돌아가신 기일에 추모 성찬례와 기도를 바치는 범위를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분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추모하고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늘 살아 있다는 의미도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우리 곁을 떠난 부모, 가족과 친척을 떠올리며 기도합니다. 돌아가신 분들도 인간으로서는 연약함을 지녔고, 비정하고 힘든 세상을 각자 사셨습니다. 좋은 기억만 있으면 좋았을 텐데, 좋지 않았던 일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 안에 그분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걱정만 한다고 목숨을 늘릴 수는 없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고 전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은총을 체험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의 이치에 너무 근심 걱정으로 억눌려 살지 말자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삶의 원천은 걱정과 근심이 아니라 기쁨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매우 중요한 메시지이고 가르침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많은 세상이지만 혹시 우리가 그 걱정과 불안의 노예가 되어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추상적일 것 같은 감사와 찬양이, 눈앞에 있는 현실의 걱정과 근심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확신이 있기에 이렇게 함께 모여 같은 지향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도 내 마음대로만 살았던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자녀를 둔 부모가 자기 위주로만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자녀의 생명이 자랍니다. 자기 위주로만 살았다면 그 자녀의 삶과 미래는 뻔했을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신을 죽였고, 참았기에 오늘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노쇠한 부모를 둔 자녀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지 않습니다. 그런 자식을 패륜이라고 부릅니다. 마땅한 인류의 보편적 의무조차 행하지 않음에 대한 질책입니다.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배우려는 제자에게 그런 스승은 스승이 아니라 삶의 걸림돌일 뿐입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가 또한 그러합니다. 자신의 것만 추구하면 고귀한 헌신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성직자의 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것은 자기 한 몸 편하게 살면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닥친 작은 고통을 이겨 내면서 마침내 이루어낸 일들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수고로움으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오늘을 이룬 것입니다. 이를 망각하면 세상에 온전히 적응하며 살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의 ‘나’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계와 관계가 이어졌는지 새삼스럽게 돌아보고 감사하는 날이 오늘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일에 너무 붙들리지 말고 감사함으로 살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는 귀한 교훈입니다. 많은 역경이 있더라도 부모라는 그 한 가지 이유로 어려움이 있어도 자녀를 키웠고, 자녀들은 그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서툴러서 이러한 표현을 자주 하지는 못하지만, 이 모두가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자비라고 고백하는 날이 또한 오늘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살아생전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보게 됩니다.
그분은 자유로운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고독하고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셨지만, 무책임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 앞에 무책임한 부모 없듯이 항상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부모와 같은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하느님은 항상 벌주시고 인간에게 책임을 지우는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낡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하느님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모이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언제나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사는 사람이 의로운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다른 이들을 섬기셨듯이 이러한 자비는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그분의 섬김을 배워 따라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나 하나의 질고에 너무 얽매이고 붙들리면 이런 섬김의 삶을 종종 잊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집안의 어른들을 기억하면서,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고 넘쳐흐르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더욱 은혜를 체험하며 각자의 처소에서 오늘을 있게 해 주신 분들께 감사하고 서로가 늘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귀한 시간이 바로 오늘입니다.
올 한 해도 기억 가운데 서로의 건강과 평화가 넘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