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에서 온 편지 ?___박정자
인도네시아의 축제, 독립기념일과 르바란
박정자
안녕하십니까. 박정자입니다. 또 한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 산천에는 여전히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기를 순환하면서 나지막한 자리에서 뿌리를 이어가고 있겠지요. 계절의 변화가 없는 이곳의 꽃들은 대부분 큰 나무에서 핍니다. 이 꽃은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상으로 치장한 반면에 향기가 없습니다. 종류도 그리 많지 않아서 언제나 그 꽃이 그 꽃 같은 느낌입니다. 나는 집 근처나 거리에서 늘 보는 꽃들이 지루할 때면 식물원엘 갑니다. 이곳 ‘보고르식물원’은 생태계의 보고寶庫이고 인도네시아의 자랑입니다. 열대의 숲을 걷다가 돌아오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집니다. 공기뿌리를 땅으로 내리고 있는 우람한 벤자민 나무를 지나 부채처럼 펼친 잎으로 방향을 알려주는 야자수과의 나그네나무를 돌면 어린왕자의 별에서 쫓겨난 바오밥나무 한 그루가 아직도 뿌리를 소혹성 B612 쪽으로 뻗고 있는 안쓰러운 모습이 보입니다. ‘붕아 방까이Bunga Bangkai’는 냄새가 지독한 꽃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습니다. ‘Bunga Bangkai’라는 말은 ‘시체꽃’이라는 뜻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꽃으로도 유명합니다. 3~4년에 한 번, 잠깐 피었다가 지는 이 괴상한 꽃도 보고르식물원에 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감 있고 아기자기한 꽃들을 생각하다가 보고르식물원으로 빠져버렸습니다. 어느새 인도네시아 사람이 다 되었나 봅니다.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보고르식물원 풍경을 담아 보내드리겠습니다.
머지않아 8월이 오면 인도네시아는 두 개의 큰 축일을 동시에 맞습니다. 독립기념일과 르바란입니다. 오늘은 축제이야기입니다.
■300여 종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독립기념일
처음 인도네시아에 와서 독립기념일을 맞는 한국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합니다. 한국의 독립기념일은 8월 15일인데 이 나라의 독립기념일은 8월 17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두고 그때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연합군의 승전 소식이 배를 타고 건너오느라 늦어진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독립선언이 늦어진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개시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위장구호를 앞세워 부족한 군수물자와 전쟁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국가들을 침략합니다. 당시 350여 년의 네덜란드 식민통치에 치를 떨고 있던 수카르노와 하타 등 인도네시아의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무력을 이용하여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들과 협력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일본은 야욕을 숨긴 채 인도네시아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고, 일본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는 결국 항복을 하게 됩니다.
그 후, 점차 패전으로 치달은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선심정책을 펴며 패전을 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 일환으로 1945년 3월, 62명의 온건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을 모아 일본인 스스로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해줍니다. 그들이 온건중도파를 선택한 이유는 젊은 세대보다 구시대 지도자들이 다루기 쉬우리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정세가 급물살처럼 변하자 온건파인 수카르노와 하타는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남방군사령부의 데라우치 사령관을 찾아가 자국의 독립을 보장받습니다. 요즘 독립선언이 늦은 이유에 대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처럼 교통편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인지 그들은 예정일보다 훨씬 늦은 14일 밤에야 자카르타로 귀환하게 됩니다. 바로 그 다음 날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아시아 다른 국가들은 모두 독립을 하게 되는데, 정작 일본인들에 의해 독립을 보장 받아온 그들은 어떻게 독립된 정부를 세워야할지 몰라 허둥대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자신들에게 독립이 찾아올 줄 예측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젊은 민족지도자들은 자체적 독립을 주장하며 격렬한 어조의 독립선언문을 써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수카르노와 하타는 일본을 자극할 경우 아직 국내에 남아 있는 일본군 잔류세력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로 간단한 성명조의 독립선언문을 고집합니다. 결국 1945년 8월 17일 아침, 수카르노는 자카르타에 있는 자기 집 밖에서 일부 지인들과 몇몇 시민들만 참석한 가운데 아주 조촐하게 독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갑니다.
우리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 선언문에 의해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권리 이양 등 제반 문제는 양심적으로 가능한 한 신속하게 처리될 것입니다.
아무리 조촐한 자리였다고 할지라도 길고 긴 식민역사(1602~1945)를 청산하는 그들로써는 얼마나 벅찬 감격의 순간이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 후에도 인도네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며 다시 돌아온 네덜란드 때문에 몇 년을 더 유혈전쟁에 휩싸여야 했던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독립은 참으로 위대하고 숭고한 의미입니다. 독립국가에서 수카르노와 하타 두 사람은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지냈습니다. 인도네시아 국제공항의 이름도 수카르노-하타공항입니다.
인도네시아에는 독립을 기념하는 조각과 동상 등 많은 상징물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스광장에 세워진 독립기념탑과 가루다로 표상된 군장입니다. 독립의 상징이며 인도네시아의 심장인 독립기념탑은 높이가 132미터로 상단부에는 시내를 한눈에 조망하는 전망대가 있고 하단부는 독립기념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탑의 받침대 가로/세로 길이가 45미터, 상단과 하단의 8개 모서리, 17개의 계단과 꼭대기에 설치된 금동 횃불의 길이가 17미터. 이곳에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과 하타 부통령이 선언했던 ‘독립선언문’이 소장되어 있고 선언 당시 음성도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 신성한 전설 속의 새, 인도네시아를 상징하는 군장 ‘가루다Garuda’는 45개의 목깃털과 17개의 날개깃털, 그리고 8개의 꼬리깃털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 독립기념일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은 참으로 성대하고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집니다. 평소에 한없이 밀리던 도심은 한산하고 동네는 축제와 함성과 땀으로 뒤범벅됩니다. 동네 입구마다 현수막과 기념탑을 세우고 각종 경기와 노래경연으로 떠들썩합니다. 껍질 벗긴 나무에 기름을 발라 높이 세워 놓고, 꼭대기에 게양된 국기 ‘메라뿌티Merah Putih’를 먼저 낚아채는 팀이 이기는 ‘삐낭나무타기’는 가장 인기가 좋은 경기입니다. 맨발로 나무를 타고 오르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너무나 아슬아슬해서 가슴을 조이게 할 뿐만 아니라 이긴 팀은 나무에 걸린 생필품을 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00여 종족과 언어, 1,700여 개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며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항상 현실로 재현될 것처럼 보입니다. 단일민족이라고 민족의 순수성과 자긍심을 배우며 자란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축제가 너무 요란하다고 말하면서 내심 부럽습니다. 우리는 아직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으니까요.
■혈육 간의 정겨운 축제 르바란
르바란Lebaran은 또 하나 그들의 대축제일입니다. 이슬람력에 따라 매년 보름정도 앞당겨지는 르바란은 종교적인 날입니다. 올해는 8월 30~31일이 르바란입니다. 인구의 약 90%가 무슬림인 인도네시아에서 종교적인 날이니 얼마나 큰 행사인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무슬림들은 르바란을 맞기 위한 선행의식으로 라마단Lamadan이라는 금식기간을 갖습니다. 이 기간, 한 달 동안 해 뜨는 시각부터 해지는 시각까지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고행을 합니다. 어린이나 노약자, 환자는 예외입니다. 최근 이슬람사회에서는 금식기간의 부작용과 사회문제를 여러 분야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르바란이라는 의미에서만 본다면 이 금식기간을 통해 고통을 견디어 낸 자신을 확인하고 가진 것을 나누면서 진정한 재생의 의미로 승화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작용에 대한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권에서 라마단은 중요한 종교적 의무이며 절제하고 엄수해야 할 명절로 지켜지고 있습니다.
라마단이 끝날 무렵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너스를 받아 고향에 돌아와 있습니다. 명절의 귀향을 ‘무딕Mudik’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못지않게 부모님이나 고향을 찾아가는 대이동입니다. 도로는 차량의 홍수를 이루고 교통사정에 따라 몇 시간,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고단한 여정이지만 부모, 형제에게 줄 선물꾸러미를 들고 즐겁게 떠나는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볍습니다. 그러나 물밀듯이 밀려드는 귀향객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수송차량 때문에 고향에 가지 못하고 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방송에 나오기도 합니다. 며칠씩 역에서 지내게 되더라도 고향엘 다녀오려는 그들의 결심은 참으로 애틋합니다.
라마단이 끝나고 르바란이 시작되는 오후 6시경부터는 폭죽을 터뜨리고 경적을 울리기 시작합니다. 젊은이, 늙은이,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거리로 몰려나오는 것이지요. ‘고행의 기간이 끝났으니 금식을 마치고 마음껏 즐기세’ 하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이슬람 최고의 명절이 시작된 것입니다.
축제로 들뜬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남자들은 ‘뻬찌Peci’라는 모자를 쓰고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새 옷으로 단장하고 사원이나 야외운동장에 모여 기도를 합니다. 기도가 끝나면 끄투팟Ketupat이라고 하는 음식을 먹으며 아이들에게 선물이나 용돈을 주고 묘지에 참배를 가는 풍경이 우리나라 명절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날 먹는 끄투팟이라는 특별한 음식 역시 팜이파리로 만든 주머니에 쌀을 넣어 익혀 먹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송편 같은 음식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Selamat Idul Fitri, Mohon maaf lahir dan batin!(르바란을 축하드리며,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객지에서 돌아온 일가친척들이 오랜만에 만나 서로 용서의 의식을 하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그리웠던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일 년 중 가장 따뜻한 시간입니다.
독립기념일이 거국적인 단합의 축제라면 르바란은 소망과 사랑을 나누는 혈육 간의 정겨운 축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대사가 그렇고 명절 풍습이 그렇고,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비행기를 7시간이나 타고 건너다니는 먼 나라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나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이곳 대사관 주도로 ‘한국문화원’이 개원됐습니다. 한글강습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민간차원의 ‘한·인니문화연구원’이 개원준비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곳은 한국 사람들에게 인도네시아 문화를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최근 포스코가 이곳 제철회사와 합작설립을 하여 공사가 한창이고, 롯데와 호남석유화학, 비씨카드 등 대기업이 앞다투어 인도네시아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채선당’, ‘잉크천국’과 같은 국내의 프랜차이즈도 적극 편승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늘고 그에 따라 교민 수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교민사회를 이루고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교류의 공간이 국가와 민간 차원에서 동시에 열린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화는 사람이 피워내는 삶의 꽃입니다. 인도네시아의 강렬한 색상과 한국의 깊고 은은한 향기가 조화롭게 뿌리내린 세상을 꿈꾸어봅니다. 다시 뵙겠습니다.
박정자 / 1957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으며 1991년 등단했다. 시집 『그는 물가에 있다』 외 6권이 있고, 현재 인도네시아에 살며 교민지 『한인뉴스』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