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 [萬愚節, April Fools' Day, Le premier d'avril, poisson d'avril] 만우절의 유래 = 16세기까지 프랑스의 설은 율리우스력에 의해 3월 25~4월 1일이었다. 이때를 새해로 잡은 이유는 따뜻한 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156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 1502~1585))가 그레고리력을 서방 세계에 가져오고, 샤를 9세(Charles IX, 1550~1574)가 역법의 변화를 공포하면서(1564년?) 새해 시작이 1월 1일로 바뀐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잘 몰랐던 사람은 4월 1일을 설로 생각해 설 행사를 벌이다 놀림감이 된다. 그 이후에도 4월 1일에 새해 선물인 것처럼 가짜 선물을 보내면서 가볍게 장난 치는 일을 즐겼고 가짜 신년행사나 선물에 깜박 속은 사람을 4월 바보(April fool)라고 부르게 되면서 에이프릴풀스데이(April Fool’s Day)가 가볍게 유행한다. 만우절의 유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유럽의 설은 1월 1일이 아니었다. 1월 1일이 설로 바뀐 것은 그레고리력의 보급 이후부터다. 이전까지는 각 지역 별로 설이 각기 달랐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설날 기준이 달랐다. 옛날 사람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정월이 설이 될 특별한 이유가 없다. 뭔가 특별한 일이 없는 달이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나라의 설은 동지다. 밤이 가장 긴 날을 기준으로 잡은 것인데 이런 식으로 잡는 것이 설날 기준으로 적합하다. 프랑스의 옛설이 만우절로 남은 것처럼, 동지가 설이었던 흔적은 지금도 여러 풍습에 남아있다. 동지 팥죽은 가장 대표적인 흔적이다. 동지가 설날이므로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붉은 팥으로 팥죽을 해먹은 것이다. 이를 통해 일년 동안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1964년] 3분폭리사건 전모 판명(총판매 249억881만원, 소득 25억 4436만원 세금부과 8억 8115만원) 밀가루ㆍ설탕ㆍ시멘트, 이른바 3분 산업과 관계된 기업들이 가격조작과 세금포탈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묵인해 주는 대가로 공화당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1964년 1월 15일 군정이 끝나고 민정이 실시되면서 야당 원내교섭단체였던 삼민회 소속의 유창열 의원이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민주당 유창열 의원은 군정 당시의 경제비리를 파헤치기 위해「특정 재벌의 국민경제 파괴 반민족행위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10여명의 동료의원들의 동의를 얻어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2월 1일 특별위원회 구성에 동의했던 의원들이 갑자기 발뺌을 하였다. 재벌과 관료들의 로비가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러자 민주당은 2월 5일 국회 제10차 본회의에「특별국정감사 실시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하는 한편, 3분 폭리와 관련된 업자들과 관리들의 결탁, 그리고 대국회 무마공작 등에 대해 폭로하였다. 하지만 결의안은 공화당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으며, 진상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의원들과 삼성재벌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밀가루, 설탕, 시멘트는 모두 국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품목이었는데, 이들은 1963년의 식량파동을 계기로 폭리를 취함으로써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1964년에는 전년도의 대흉작으로 쌀값이 가마당 4천 원대로 뛰어오르고, 그 이전 쌀 한 가마당 여섯 포대 꼴이었던 밀가루가 4대 1의 비율로 바뀌었다. 당시 밀가루 값은 정부 고시가격이 포대 당 370원 이었는데, 시중 가격은 1천 2백 원까지 올랐다. 따라서 제분업자는 이것으로 약 43억 원이라는 막대한 폭리를 취했다. 삼분 가운데 밀가루나 시멘트 같이 가격통제와 생필품으로 규제를 받지 않았던 설탕은 일반의 기호식품과 부식, 그리고 분식장려 덕분에 당시 수요가 한창 급증했다. 그런데 설탕은 도매값이 1962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근당 35원 55전에서 98원까지 올랐고, 1963년 초에는 포당 1천2백 원에도 살 수가 없는 품절상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당업체는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당시 제당업체는 둘 뿐이었고, 그 중 삼성계열인 제일제당이 60% 이상을 점유했다. 삼성재벌의 제일제당은 15억원 이상의 부당 폭리를 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사건으로 삼성의 부도덕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1963년에 시멘트 품귀현상이 일어나면서 당시 국내 시멘트를 담당하고 있던 동양시멘트와 대한양회는 10억원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이렇듯 3분 폭리가 사회문제로 등장했으나 정부의 세무조사는 미온적이었다. 관련회사 18개에 대해 추징한 세액이 3천8백3십만원, 부과금이 3백9십만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국민들의 의혹과 분노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998] 개신교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 별세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가 1998년 4월 1일 별세했다. 김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뒤를 이을 한국개신교의 리더 중 한 명으로 꼽혔던 인물이다. 호주 선교사로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조부 김선명 전도사, 부친 김희용 목사의 신앙을 물려받으며 성장했다. 1942년 경남 진주에서 7남매중의 장남으로 태어나 진주고 졸업 후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피츠버그 신학대학원을 거쳐 밴더빌트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연세대에서 잠시 강의를 하다 1981년 언더우드 목사가 세운 새문안교회의 제4대 목사로 부임했다. 안창호, 백낙준 등 한국의 대표적 인물을 배출한 개신교 예장통합의 대표적인 교회에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시무하게 된 그는 '화합과 일치'를 목회의 이념으로 내세워 교회내외로부터 높은 신망을 받았다. 또한 도덕의 몰락 등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바탕으로 해결책을 제시한 신문 칼럼은 개신교인 뿐 아니라 타종교인에도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1983년 당시 국회의원이던 황산성씨와의 재혼은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계속된 투병 중에도 집필활동을 그치지 않아, 1998년 1월에는 '내가 너와 함께 한다', '하나님과 씨름하다' 등의 설교집을 냈다. 또 목요일 정오예배 등 직장인을 상대로 한 선교 아이디어를 개발해 도심선교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8년] 향토예비군 창설
← 1968년 4월 1일 개최된 서울특별시 향토예비군 창설식 모습 우리나라 국방 사상 민방위의 새기틀을 마련하는 향토방위군 창설식이 1968년 4월 1일 오후2시 대전 공설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서 박대통령을 비롯한 시민 약 15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됐다. 같은 해 1월 21일 청와대에 무장공비가 급습하고 이어 23일 미국 정보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게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정부는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예비역 장병들을 조직, 평시에는 사회생활을 하고 유사시에는 향토방위를 전담할 비 정규군 조직 예비군인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향토예비군의 건군정신은 우리의 생명ㆍ우리의 단란한 가정 그리고 내 고장ㆍ내 직장을 ‘내 힘’으로 지킨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바로 이것이 진정한 향토애이며 조국애의 구현인 동시에 우리의 국방철학이었다. 향토예비군의 임무는 ‘첫째, 국가비상사태하에서 현역군부대의 역할을 대신하다. 둘째, 무장공비 침투지역에서의 무장공비를 소멸한다. 셋째, 경찰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는 무장소요를 진압한다.’ 등이었다.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예비군이나 직장예비군으로 편성하며 향토예비군에 관한 사항은 국방부장관이 관장하도록 했다.
[1873년] 라흐마니노프 Sergey (Vasilyevich) Rachmaninoff 출생 1873년 4월 1일 태어남 / 1943년 3월 28일 죽음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 낭만주의 전통의 마지막 대작곡가로 불리는 음악가이며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이다. 러시아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 시절이던 1891년에 첫번째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다. 1897년 첫 교향곡을 작곡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2년 이상 작곡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심리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의 도움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1901년에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만든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했고, 이 곡을 달 박사에게 바쳤다. 이때부터 그는 1917년 파리로 망명하기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그는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널리 알려진〈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1934)은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만년에 들어 스탈린이 그를 1급 예술가로 대우하는 조건으로 귀국을 권유했으나 돌아가지 않고 결국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음악은 19세기 러시아 음악의 서구적인 모스크바 악파의 정통을 이어받아 풍부한 선율과 애수를 띤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김성수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동아일보>는 같은 해 3월 5일 창간된 <조선일보>와 함께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허가한 민간지 발행의 신호탄이었다. <동아일보>는 김성수·송진우 등이 주도한 언론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사상과 <매일신보> 편집장 이상협, <평양일일신문> 주간 장덕준, 오사카[大阪] <아사히 신문 朝日新聞> 기자 진학문 등이 추진한 민간신문 창간운동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창간호는 대표 김성수, 사장 박영효, 편집감독에 양기탁·유근, 주간 장덕수, 편집국장 이상협의 체제였고, 이후 김성수·송진우·이승훈·백관수 등이 사장을 역임했다.
[2004년] 경부고속철도 1단계 개통 운행개시 2004년 4월1일 고속철도 시대가 열린 이래 우리나라는 시간의 벽을 넘는 경험을 했다. KTX가 서울과 부산 사이를 2시간 40분 만에 주파해 단일 생활권의 개념을 중부 지역에서 남부지역까지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물류의 중심인 경부선을 이처럼 빠른 속도로 오갈 수 있게 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혁명적 변화라 할 수 있다. 현재 대구 이남 지역에서는 2010년 경부고속철도 2단계 개통을 맞추기 위해 한국철도시설공단 영남지역본부와 시공사, 감리단이 혼연일체가 되어 불철주야 땀을 흘리고 있다. 지난 도롱뇽 소송의 고등법원 승소 이후 그동안 미뤄져 왔던 공사가 재개되면서, 먼지가 쌓여가던 공사 장비들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지난 1992년 공사가 시작된 경부고속철도는 2004년 4월 1일 대구까지의 신선 건설을 마치고 1단계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개통은 아니다. 아직 2단계 공사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한 고속철도의 묘미를 맛보지 못한 것이다.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2단계 구간은 대전·대구 도심구간 신선의 지상화 건설과 대구~경주~부산을 잇는 구간을 건설하는 것으로 2010년까지 완전 개통될 예정이다. 1단계 구간을 합쳐 전체 구간의 연장은 총 4백12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중간 정차 하지 않고 내달릴 경우 1시간 56분이 걸린다. 어떤 악천후 속에서도 문제없이 달릴 수 있는 꿈의 교통수단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1967년] 구로공단 준공 “바로 이곳에서 ‘난쏘공’(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약칭)이 시작되었다.” 작가 조세희는 2004년 11월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노동문학 강연을 마친 뒤 이렇게 말했다. 정작 그 스테디셀러에서 공간적 배경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그늘, 부자와 빈자의 극명한 대비가 존재했던 1970년대의 상징이 구로공단임은 누구나 눈치 챌 수 있었다.
구로공단은 1967년 4월 1일 준공됐다. 정식 명칭은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제1단지. 60만 평 땅에 수출 입국의 사명을 띠고 조성된 한국 최초의 공단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허허벌판을 불도저로 밀어붙인다고 수출 공장이 되겠냐며 의심한 사람도 많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며 뿌듯해 했다. 구로공단의 주력 산업은 섬유와 봉제 가발 등 경공업이었다. 근로자의 절반 이상은 여성이었다. 남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 상경한 10대 후반의 ‘누이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군 일등공신인 셈이다. 이들은 2.5평짜리 판잣집이 빼곡한 이른바 ‘벌집’에 기거하며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했다. ‘공순이’라는 비웃음을 감내하며 고향 집에 월급을 부쳤고,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야학을 찾아 졸린 눈을 치켜떴다. 설과 추석 때면 가리봉 오거리에 줄줄이 늘어섰던 ‘귀향 버스’, 소녀의 감수성을 수줍게 분출했던 ‘음악다방’. 이들이 창출한 문화들은 1970년대의 아이콘이 됐다. 구로공단은 대학생들의 의식화 현장이기도 했다. 1970년대 후반 운동권 학생들은 위장 취업을 통해 스스로 ‘시다’가 되고 기계공이 되어 노동운동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표적 여성 노동운동가인 심상정(민주노동당) 의원도 그들 중 한 명. 이문열은 소설 ‘구로 아리랑’에서 대학생과 여공의 교감과, 이를 대하는 공권력의 냉혹함을 담담하게 그렸다. 구로공단은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이름이 바뀌면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굴뚝산업은 중국 등지로 떠나고 정보통신 벤처기업들이 들어섰다. 음울한 이미지를 벗으려 했음인지 지하철역 이름에서도 ‘공단’은 지워졌다. 도시의 변신이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의 억척스러운 누이들을 기리는 무엇인가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 /김준석 기자/
[1963년] 한국-페루, 국교수립
페루는 한국과 1963년 4월 공사급 국교수립에 합의하고, 이듬해 대사급으로 승격 합의한 뒤, 1971년 8월 리마에 주(駐)페루 한국 상주대사관이 설치되었다. 이어 1974년 통상협정을 시작으로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1981), 사증면제협정(1982), 문화협정(1983), 투자보장협정(1993) 등을 체결한 상태다. 페루는 원칙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중립 불간섭 태도를 견지하면서 남북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는 한편, 한국의 경제 발전 경험을 중시해 상호보완적 경제·기술 협력을 희망하고 있으며, 페루의 각종 개발사업에도 한국이 참여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1982년 3월 페루의 하비에르 알바 오르란디니 상원의장이 한국을 방문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김상협(金相浹) 국무총리가 페루를 방문하고, 1993년 후지모리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한 뒤, 1996년 9월 김영삼 대통령이 국빈 방문하면서 양국 관계가 긴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99년에도 138명의 민간무역협력 사절단이 페루를 방문하였다. 경제협력도 활발해 1970년 페루에 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의연금으로 1만 달러를 전달한 이후 경운기·불도저·트럭·텔레비전·재봉틀·냉장고·자전거·경찰순찰차·자동차를 비롯해 각종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복구비를 지원해 왔으며, 페루는 6·25전쟁 중 5만 8천 달러의 긴급구호금을 한국에 제공한 바 있다.
[1960년] 최초의 기상위성 타이로스 1호 발사 기상관측을 주목적으로 설계하여 발사되는 기상위성은 단기예보에 필요한 저기압 또는 전선 등의 정확한 위치와 크기 등을 파악하며, 지구로부터 우주공간으로 복사되는 복사에너지, 지구와 대기가 반사하는 태양광선의 반사량, 대기권 밖의 태양에너지 등을 관측한다. 기상위성은 극궤도기상위성과 정지기상위성 등의 두 종류로 나눈다. 이 중 극궤도 기상위성은 850 km 고도에서 지구의 남북을 회전하면서 실시간적으로 관측한 기상자료를 이용국에 제공해 주는 위성으로, 타이로스(TIROS:Television and Infrared Observation Satellite)가 대표적인 예이다. 정지기상위성은 적도 상공 약 3만 5800 km 고도에 위치하며, 이 고도상에서는 지구의 자전속도와 같은 속도로 운동하기 때문에 지구와의 상대적인 위치가 변하지 않으므로 일정한 지역에 대한 관측을 많이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GMS-3(Geostationary Meteorological Satellite-3)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개발한 타이로스는 최초의 기상위성으로, 텔레비전 카메라와 적외검지기(赤外檢知器)를 이용해서 지표면을 관측하였다. 즉, 주반구(晝半球)는 텔레비전으로 촬영하고, 야반구(夜半球)는 적외검지기로 지표면에서의 적외복사를 측정하여, 지표면의 구름의 분포를 식별하였다. 이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소속으로, 대기권 밖의 평화이용을 목적으로 하는 실용위성이었다. 1960년 4월 1일 케이프커내버럴기지에서 타이로스 1호가 발사되어, 78일간 발신하여 사진을 찍었으나, 카메라 축이 지구자기장의 영향을 받아 흔들렸기 때문에 그 사진을 일기도 위에 대응시킬 수 없었다. 그 해 11월 1일 2호를 발사했는데, 이것은 성능이 매우 좋아서 1년 동안 발신을 계속하였다.
[1932년] 교육자 하경근 河璟根 출생 1932. 4. 1 경남 진주~. 1956년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정외과를 거쳐 1958년 같은 대학 대학원을 수료했고, 1960년 미국 사우스메소디스트대학과 1962년 미국 워싱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1969년 중앙대에서 정치학박사학위, 1989년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9년부터 1992년 현재까지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지내고 있으며, 1972년 중앙대 정경대학장, 1973년 국제정치학회 회장, 1981~89년 중앙대 제3세계문제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1982년 중앙대에서 신문방송대학원장과 1984년 부총장 및 외국어대학장, 같은 해 총장서리, 1987년 부총장, 1989~92년 총장으로 있었으며, 1996년 현재 민주당 소속 15대 국회의원이다. 저서로 〈후진국정치론〉·〈제3세계정치론〉·〈아프리카 정치론〉·〈현대중동정치론〉 등이 있다.
[1922년] 화학자 최상업 崔相嶪 출생 1922. 4. 1 평남 평원~. 1945년에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화학과를 졸업한 후, 1956년에 미국 퍼듀대학교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45~60년 서울대학교 전임강사·조교수·부교수를 지냈으며, 1960년 문교부 기술교육국 국장, 원자력연구소 소장, 1961년에 연세대학교, 미국 보스턴대학교, 한양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6~88년에 서강대학교 이공대학 교수, 1968~74년에 서강대 대학원장, 1973~79년에 동(同)대학교 부총장, 1985년 아시아 화학연합회장을 지냈다. 현재 서강대 명예교수, 화학부문을 대표하는 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1981년에 11대 국회의원(민정당 전국구)을 지냈다. 녹조근정훈장(綠條勤政勳章),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주요저서로는 〈일반화학〉이 있으며, 번역서로 〈핵화학 및 방사화학〉·〈물리화학〉 등이 있다.
[1962년]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The Asian and Oceanic Postal Union, AOPU] 발족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AOPU) 창설 제1주년을 기념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4월 1일에 아시아, 대양주의 지도 및 AOPU를 표시한 봉투를 도안으로 하여 4원권 우표를 발행한다. AOPU는 아시아, 대양주의 여러나라 간에 단일 우편지역을 형성하여 협약 체결국가 간의 우편관계를 확장, 촉진하고 개선하여 우편업무의 분야에서 협조를 증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기구는 우리나라와 필리핀이 창설을 제안하고, 필리핀 정부가 18개국을 초청한 바 한국, 중화민국, 일본, 말라야 타일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동 초청을 수락하여 8개국이 1961. 1. 10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11차에 걸쳐 AOPU 협약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마닐라 우편회의라 하며 동회의에서 AOPU가 탄생되었고 비준된 전문 24조의 협약은 1962. 4. 1 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현재 정회원국은 한국, 중화민국, 필리핀, 타일란드, 일본, 라오스, 인도네시아, 호주 등이다." (우표발행안내)
[1955년] 김일성, 조선로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서 4월 테제 발표 '모든 힘을 조국의 통일독립과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4월 테제에서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은 남북이 통일되어 전국적으로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될 때까지 북한에서 사회주의 기초건설과업을 철저히 수행하는 것이 남한 민중의 투쟁을 추동하는 힘이 되며, 조국통일을 쟁취하는데 결정적인 역량이 된다고 주장. 이 테제는 1) 조선혁명의 기본임무로서 미제 침략세력과 그 동맹자인 남한의 지주, 예속 자본가, 친일친미파 타도를 통한 조국의 민주주의적 통일과 완전한 민족독립 달성 2) 인민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 경제형태의 확대, 강화를 제시 본디 4월테제(April Theses)란 1917년 러시아혁명 기간중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귀국한 V.I.레닌이 발표한 혁명전술을 말하는데, 3월혁명 후의 혼란한 정치 정세의 분석과 혁명의 예견 및 그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기본적인 전술을 나타낸 것이다. /naver
[1883년] 미국의 영화배우 체이니(Chaney, Lon, 1883~1930) 출생
본명은 Alonso Chaney.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 불렸으며 무성영화시대 소름 끼치는 성격묘사의 1인자였다. 귀머거리에 벙어리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체이니는 어렸을 때 무언극을 배웠다. 그는 형이 이끄는 순회 쇼에서 소품·운송·제작을 맡고 배우로 출연했다. 엑스트라와 단역배우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해 〈악마 모건의 여자 Hell Morgan's Girl〉(1917)에서 비중있는 조연을 맡았다. 2년 후 그는 〈기적의 사나이 The Miracle Man〉(1919)에 출연하여 스타가 되었다. 그후 10년간 영화계의 가장 훌륭한 성격배우로서 명성을 얻었다. 토드 브라우닝이 감독한 작품에 자주 출연했으며, 〈형벌 The Penalty〉(1920)에서는 다리가 없는 암흑가의 두목 역,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rtre Dame〉(1923)에서는 꼽추 콰지모도 역,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1925)에서는 파리 오페라단의 비밀통로를 자주 출입하는 얼굴에 무서운 흉터를 가진 음악가 역, 〈심야의 런던 London After Midnight〉(1927)에서는 경위와 흡혈귀의 이중역 등을 맡았다. 또한 〈그 말을 누가 믿나 Tell It to the Marines〉(1927)·〈도시가 잠잘 때 While the City Sleeps〉(1928)·〈천둥 Thunder〉(1929)에서도 빼어난 연기를 보여 찬사를 받았다. 그의 아들 론 체이니 2세(1907~73, 본명은 크레이턴 체이니)도 여러 편의 공포영화에 출현했다.
[1948년] 소련, 육상 수송 저지로 베를린 봉쇄 시작 1948년 3월 서방국가들은 그들이 점령한 독일 지역을 하나의 경제단위로 통합시키기로 결정하자, 소련은 이에 대한 항의로서 연합국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또한 당시 서베를린 내에 새로운 독일 마르크화가 도입되자, 소련은 이를 동독통화(東獨通貨)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마침내 소련은 베를린과 서방측 점령지구간의 모든 육로 ·수로를 봉쇄하였다. 7월 1일 소련은 ‘베를린에 대한 4개국 통치는 종식되었고, 서방 연합국들은 더 이상 베를린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보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6월 26일부터 미국 ·영국은 생필품을 베를린에 공수(空輸)하였다. 7월 중순 동베를린 내의 소련점령군은 40개 사단으로 증강되고, 연합군 지역에는 8개 사단만이 남았다. 7월 말 3개 대대의 미전략폭격기들이 영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파견되어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다. 연료 ·전기가 극도로 부족한 상황 속에서, 서베를린은 11개월 동안 서방측에 의한 공수조치로 연명하였다. 1949년 5월 4일 소련은 결국 봉쇄를 해제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 이유는 연합국들이 동독 교통 ·통신시설에 보복조치를 취하였고, 특히 동유럽권의 모든 전략수출품에 대하여 서방측이 수입금지를 단행하였기 때문이었다.
[1942년] 중앙선(청량리-경주) 개통
중앙선(中央線)은 서울(청량리역)∼경주시 경주역을 잇는 철도선으로, 길이 연장 382.7 km. 1939년 4월 청량리(淸凉里)∼양평(楊平) 구간이 개통되고 1940년에는 양평∼원주(原州) 구간이, 1942년 4월 1일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양평·원주·제천(堤川)·영주(榮州)·안동(安東)을 지나 영천(永川)에서 대구선(大邱線)과 접속하며 경주까지 이르는 간선철도이다. 경부선(京釜線)에 이은 한국 제2의 종관철도로, 연선(沿線) 일대의 광산 ·농산 및 임산 개발을 목적으로 부설되었으며, 영서(嶺西) 내륙지방의 개발에 크게 이바지했다. 더욱이 충북선(忠北線)과 태백선(太白線)이 제천에서 교차하고, 경북선(慶北線)과 영동선(嶺東線)이 영주에서 교차하여 경부선과도 직접 연결되고, 차령산맥(車嶺山脈)을 넘기 위한 치악산(雉岳山)의 금대(金垈)터널과 소백산맥(小白山脈)을 넘기 위한 죽령(竹嶺)터널 등의 루프식 터널(Loop Tunnel)이 있다.
[1919년] 유관순,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투옥됨
가족을 따라 지령리교회를 다니던 유관순(柳寬順, 1904~1920)이 13세 때 서울 이화학당의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한 것은 여성 선교사인 샤프 앨리스(한국명 사애리시·史愛理施)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충청도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열성을 바치던 사애리시 부인은 총명했던 유관순과 사촌언니 유예도를 이화학당에 보냈다. 3년 만에 보통과를 졸업한 유관순은 1918년 4월 고등과에 진학하였고, 학교 옆 정동제일교회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의 선배들은 1학년생을 배제했지만 유관순은 담장을 넘어서 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유관순은 친구들에게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고향에 내려가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고, 헤어지면서 “독립된 뒤에 만나자”고 다짐했다. ‘칙칙폭폭’하는 기차소리도 ‘대한독립’으로 들린다고 말할 정도로 독립 열망을 품었던 유관순은 고향에 돌아와 천안 일대의 만세 시위 준비에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시위 때 유관순은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부모님을 현장에서 잃고 본인과 오빠, 작은 아버지가 투옥되었다. 이듬해 3·1운동 1주년 기념 옥중 시위까지 주도했던 그였지만, 3년 형을 견디지 못하고 1920년 9월 28일 고문 후유증으로 방광이 파열되고 이를 일제가 방치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1895년] 유길준. 첫 서양견문록 ‘서유견문’ 간행
1895년 일본 도쿄[東京] 교순사에서 단행본으로 펴냈다. 유길준은 1883년(고종 20) 한국 최초의 견미사절단(遣美使節團)인 보빙사(報聘使)의 수원이 되어 미국을 시찰하게 되었다. 일행과 함께 미국의 각 기관을 시찰한 뒤 정사(正使) 민영익(閔泳翊)의 허락으로 유학생으로 남게 되었다.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으로 가 E. S.모스에게 8개월간 개인지도를 받고, 그 부근에 있는 바이필드의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4개월 뒤 갑신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1885년 6월까지 1년간 학교를 다닌 뒤 배를 타고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동남아시아·일본을 거쳐 1885년 12월 16일 인천에 도착했다. 그러나 체포되어 처음에는 포도대장 한규설(韓圭卨) 집에, 뒤에는 서울의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으로 옮겨 7년간 연금생활을 했다. 그동안 〈서유견문 西遊見聞〉의 원고를 썼고, 1895년에 활자화되었다. 1892년 11월에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 었다. 전2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서양의 역사·지리·산업·정치·풍속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국한문혼용체로 근대 언문일치 문장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1865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화학자 지그몬디(Zsigmondy, Richard, 1865~1929) 출생
1865. 4. 1 빈~1929. 9. 23 독일 괴팅겐. 빈 출생. 빈·뮌헨·베를린에서 배웠으며 1890년에 유기화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라츠공업대학 강사와 예나의 쇼트 운트 게노센 유리회사 연구원을 거쳐, 1907∼1929년 괴팅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콜로이드화학의 선구자이며, 특히 1903년에 한외현미경(限外顯微鏡)을 제작하여 처음으로 금·은 등의 콜로이드용액에 대하여 미립자의 직접 관측에 성공하였다. 이 밖에도 분산도가 매우 높은 금 콜로이드의 생성법 확립 등 콜로이드화학의 기초적 연구 업적으로 1925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주요저서로 《Zur Kenntnisse der Kolloide》(1905), 《Lehrbuch der Kolloidchemie》(1920) 등이 있다.
[1852년] 미국의 삽화가, 화가 애비(Abbey, Edwin Austin, 1852~1911) 출생 당대의 가장 뛰어난 삽화가 중 한 사람이다. 뉴욕 시의 하퍼앤드브라더스출판사의 삽화가로 일할 때 로버트 헤릭의 시집에 넣을 삽화자료 수집차 영국에 파견되었다. 그후 올리버 골드스미스와 셰익스피어 작품의 삽화를 그렸다. 전성기에는 대체로 영국에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왕립수채화가협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1883). 1902년에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그의 후기 작품으로는 펜실베이니아 주 해리스버그에 있는 주의회의사당을 비롯하여 여러 공공건물에 그린 장식화와 영국왕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그린 공식적인 회화 등이 있다.
[1837년] 콜롬비아의 시인, 소설가 이사아크스(Isaacs, Jorge, 1837~1895) 출생 대표작 〈마리아Maria〉(1867)는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라틴아메리카 소설 가운데 하나이다. 부유한 영국계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나 매우 우수한 교육을 받았으나 카우카 전쟁(1860~63) 때 대농장이 파괴되어 재산을 잃게 되었다. 1864년 보고타에 정착해 〈시집 Poesías〉이라는 얇은 책을 출간했는데, 이 작품은 적지 않은 주목을 받았다. 1867년에 연애소설 〈마리아〉가 발표되자마자 문단의 인정을 받았으며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작가의 고향 카우카 계곡의 생활을 목가적으로 생생히 묘사한 〈마리아〉는 자전적 성격이 짙은 작품으로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이래로 그는 문필생활과 공직생활을 병행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작품활동을 했지만, 후기 작품들은 그의 첫 두 작품이 세인에게 안겨준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1815년]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Bismarck, Otto Eduard Leopold von, 1815~1898) 출생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독일 통일과 국가 발전에 공적이 있었다.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지방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두 대학에서 공부한 후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다(1836∼1839). 베를린의 3월혁명(1848) 때는 반혁명파로 활약했고 보수당 창립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혁명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1851∼1859)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에 부임하였다. 그는 독일의 통일방식에 대해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갖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였다. 1848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그는 러시아 주재대사(1859), 프랑스 주재대사(1862)가 되면서 안목이 넓어졌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였을 때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취임 첫 연설에서 이른바 ‘철혈정책(鐵血政策)’ 즉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여 의회와 대립한 채 군비확장을 강행하였다. 결국 1864년, 1866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결성하였고, 나아가 1870∼1871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1871년 독일제국 총리가 되어 1890년까지 이 지위를 독점하였다. 경제면에서 그는 보호관세정책을 써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정치면에서는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그는 통일 후 외교면에서 유럽의 평화유지에 진력하였으며, 3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동맹, 3국동맹, 이중보호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투르크전쟁(1877) 후에는, 베를린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는데, 특히 남독일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하여 1872년 이후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여 왔으나 실패하였고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진압법(1878)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講壇)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 등의 사회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세력은 증가하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원래 현상유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확장하여 아프리카에 토고 ·카메룬(1884), 독일령 동(東)아프리카(1885) 등을 경영하였다. 그의 집권 아래 독일 공업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하였으므로, 비스마르크시대 말기에는 그의 평화정책에 반대하는 제국주의자가 늘어갔다. 18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비스마르크는 곧 그와 충돌, 1890년에 사직하였다. 그의 《회상록 Gedanken und Erinnerungen》(3권, 1898∼1919)은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1786년] 영국의 풍속화가 멀레디(Mulready, William, 1786~1863) 출생 1786. 4. 1 아일랜드 클레어 에니스~1863. 7. 7 영국 런던. 전원 생활을 묘사한 그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한 영국 오두막의 실내 Interior of an English Cottage〉(1828)이다. 멀레디는 1800년에 런던에 있는 왕립 아카데미 부설학교에 들어갔다. 1804년에 그는 첫번째 개인전을 시작으로 연달아 성공적인 개인전을 열었다. 1816년에 그는 왕립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다. 한편 1805년에 발표된 데이비드 윌키의 작품들을 시작으로, 자연주의적이고 감상적인 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들이 차츰 유행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거장들의 그림을 좋아하는 영국 황태자의 취향이 뒷받침해준 이 유행은 조슈아 레이놀즈 경이 가르친 엄격한 전통주의에 대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멀레디는 재빨리 이러한 경향에 편승했다. 처음에는 그가 본보기로 삼은 네덜란드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황토색을 이용해 불투명한 그림을 그렸지만 후에, 특히 1830년 이후에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효과에 치중했다. 멀레디는 이론 연구와 동화집의 삽화, 그리고, 최초의 1페니짜리 우편봉투를 도안한(1840) 것으로도 유명하다.
[1730년] 스위스의 작가, 번역가, 화가 게스너(Gessner, Salomon) 출생 1730. 4. 1 취리히~1788. 3. 2 취리히. 목가적인 주제와 로코코 문체를 구사한 문학작품들로 유럽 전역에 알려져 있다. 게스너는 시의회 의원이자 산림감독원이었다. 또 대규모 출판사를 경영하며 손수 제작한 뛰어난 에칭 삽화들이 든 자신의 책들을 펴냈다. 목가적 산문 〈이딜렌 Idyllen〉(1756~72)과 서사시 〈아벨의 죽음 Der Tod Abels〉(1758)이 가장 유명하며, 이 작품들을 통해 그는 로코코 문학사조의 가장 탁월하고 대표적인 작가로 부각되었다. 목가시들은 웨일스어·라틴어·히브리어 등 20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특히 영역본은 판을 거듭하였고, 윌터 스콧 경, 바이런 경, 워즈워스 등 낭만주의 작가들의 격찬을 받았다. 게스너는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의 목가시 일부와 프랑스 작가 드니 디드로의 이야기 두 편을 번역했다. 마지막 작품집은 1841년 취리히에서 출판되었다.
[1929년] 소설가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출생
밀란 쿤데라(1929년 4월 1일 ~ )는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의 소설가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체코가 소련군에 점령 당한 후 시민권을 박탈 당해,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이후 1989년 체코 민주화 이후 본국으로 임시 귀국하였다.
쿤데라의 삶 그는 상당히 기품 있는 집안에서 루드빅 쿤데라(1891년~1971년)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드빅 쿤데라는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1854년~1928년)의 문하생이었으며, 체코의 주요한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1948년에서 1961년 사이에는 브르노 뮤지컬 아카데미의 수장이었다. 쿤데라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나중에는 그 역시 음악학을 공부했다. 이러한 음악적 배경은 그의 작품의 근간이 된다. 심지어 그는 악상 기호를 텍스트 속에 그려 넣기도 했다. 1948년, 그는 브르노에서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다. 그는 찰스 대학교(Cahrles University)의 예술학부에서 문학과 미학을 공부했으나, 두 학기만에 프라하의 공연예술 아카데미의 영화학부로 옮겼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영화 기획과 희곡 창작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1950년에, 그는 잠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학업을 중단 당했다. 1952년 졸업 후에, 영화 아카데미에서 세계 문학을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다. 쿤데라는 민주주의의 체코슬로바크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 속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젊은이의 사상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50년, 그와 얀 트레풀카(Jan Trefulka)라고 하는 체코의 작가는 "반공산당 활동"이라는 죄목으로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다. 트리펄카는 이 사건을 그의 중편소설 《그들에게 내린 행복》(1962)에 묘사했다. 밀란 쿤데라 역시 이 사건을 《농담》(1967)에서 메인 테마로 사용하였다. 1956년에 밀란 쿤데라는 공산당에 재입당한다. 1970년, 그는 또 다시 당에서 추방 당했다. 쿤데라는 1968년 체코의 예술가이자 작가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과 함께 프라하의 봄에 참여하였다. 밀란 쿤데라는 1975년부터 프랑스에 살고 있으며, 1981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땄다.
작품 활동 쿤데라의 첫 번째 소설 《농담》에서는 사회주의 체제의 전체주의적 특질에 대한 풍자적 내용이 담겨있다. 그의 이와 같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1968년 소비에트 연방이 그의 고향을 점령한 이후 쿤데라는 곧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며 얼마간 그의 집필 활동이 금지되었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그는 《웃음과 망각의 책》(1979)을 썼다. 《웃음과 망각의 책은 》은 다양한 방법으로 소비에트 체제에 저항하고 있는 체코 시민들의 이야기이다. 1984년,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개인의 개인의 운명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리고 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사는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반복과 경험, 시험과 실패의 가능성조차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1988년, 미국의 영화감독 필립 카프만(Philip Kaufman)은 이 작품을 영화화했다. 1990년, 쿤데라는 이 소설을 재발간 하기에 이른다. 체코에서 쿤데라가 집필한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은, 그의 어떤 작품보다 세계주의적이며, 철학적(조금 정치적이기도 하다)이다. 쿤데라는 자신을 정치적 혹은 반체제적 작가가 아니라 순수한 작가로서 보아달라고 누차 강조했다. 정치적 코멘트는 (특히 웃음과 망각에 관한 책에서부터) 광의의 철학적 테마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쿤데라 소설의 스타일은 철학적 여담(餘談)의 얽힘이자, 무질(Musil)의 소설과 니체의 산문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쿤데라의 소설적 기법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나 아담 더웰(Adam Thirlwell)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차용되었다. 쿤데라는 소설적 영감을 보카치오나 라블레뿐만 아니라 스턴, 디드로, 무질, 곰브로비치, 브로흐, 카프카, 하이데거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얻었다. 또한 그는 체코 전통 음악이나 바르톡·야나체크와 같은 사람들의 음악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때문에 그는 자신의 첫 소설 농담에 음표를 그려넣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쉰베르크의 무조성 개념을 도입했다. 정치적인 확장으로도 나아갔다(향수 (소설)). 원본을 비롯한 모든 쿤데라의 저서는 프랑스에 있다.
그밖에 2004 광주대학교 이사장 김인곤 전 의원 투신자살 2004 한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공식 발효 2003 이라크에 잡힌 미국 여군 ‘린치 일병 구하기’ 전격작전 2003 서동구 KBS사장, 청와대 “인사 불개입” 주장과 배치 파문 2003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서울 상암동 축구경기장서 공연 2003 홍콩배우 장국영 투신자살 2001 한국-유럽연합(EU) 기본협력협정 발효 2001 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 체포 2001 미군 해군 정찰기, 중국군 전투기와 충돌해 중국 하이난섬에 비상착륙 1999 시내전화 경쟁체제 돌입 1998 대만, 경제부 국제무역국 대표단 서울 도착(1992년 한국과의 외교관계 단절 후 첫 공식대표단) 1996 대전지역 대상으로 초고속 정보화 시범사업 개시 1991 제47차 ESCAP 총회 서울서 개막 1991 강원도 명주군서 2~3세기 원삼국 집단집터 발굴 1988 서울 천호대교서 버스추락(19명 사망, 35명 중경상) 1983 1억원 올림픽복권 발행 1982 정부 유아교육 진흥계획 확정 1982 조치훈 명인 본인방 십단위 차지로 일본 바둑계 3관왕에 오름 1982 레이건 미국 대통령 소련의 핵 동결제안 거부 1981 최초의 애국가 가사 발견(1940년 이전 추정) 1981 퐁세 프랑스 외무장관 방한 1981 한국, 체코-폴란드와 국제전화 개통 1980 독립문 이전 복원 공사 완료 1979 이란 회교공화국 선포 1973 주민세 신설 1972 대구경제신문 자진 폐간 1971 사병 계급장 전면 변경 1970 포항종합제철 공장 착공 1969 소련 잠수함 북해 출현 1969 중국 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대회 개막 1956 애국복권 판매 시작 1955 키프로스섬에 반영국 폭동 1953 장준하, 사상계 창간 1953 국립 부산대학교 개설 1949 호국군사령부 창설 1947 그리스의 왕 게오르기오스 2세 사망 1946 차량 우측통행제 실시 1941 생활필수물자통제령 공포 1940 조선무선통신학교 개교(민간통신사 양성) 1938 일본, 국가총동원법 공포 1938 보통학교를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개칭 1937 조선일보사 월간 소년 창간 1937 미얀마(버마) 인도서 독립 1933 나치 유태인 배척운동 시작 1929 여의도 비행장 개장 1926 경성제국대학교 개교(의학부-법문학부) 192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 카를1세 사망 1920 동아일보-시사신보 창간 1919 경성철도학교 개교 1916 경성 상설소방대 조직 1913 컨베이어 시스템 도입한 포드 ‘모델 T’ 생산 1912 여객운임, 원거리체감법을 거리비례법으로 개정 1909 민적법(현행 호적법의 효시) 시행 1908 한국 표준자오선 처음 도입. 127도 30분으로 시작 1908 부산과 신의주간의 급행열차 융희호 운행 1901 라울의 법칙을 공식화한 프랑스의 화학자 라울 사망 1868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 출생 1694 노론에 의해 남인 몰락(갑술환국) 996 고려성종 15년 철전 주조. 우리나라 동전의 효시
갑술환국 조선조 숙종은 현종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초비(初妃)는 영돈녕부사 김만기(金萬基)의 딸인 인경왕후(仁敬王后),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인현왕후(仁顯王后), 제2계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金柱臣)의 딸인 인원왕후(仁元王后)이다. 1667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674년 8월 즉위했다. 숙종 초기 집권층이었던 남인은 병권의 장악과 서인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어, 허적(許積)을 중심으로 한 탁남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숙종은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외척을 기용하는 한편 서인을 재등용하고자 했다. 1680년(숙종 6) 복선군(福善君)과 탁남의 영수인 허적의 서자 허견(許堅) 등이 역모했다는 고변이 있자 이를 계기로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그러나 서인계열은 남인의 숙청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고, 1689년 희빈 장씨(禧嬪張氏) 소생 왕자(뒤의 경종)의 세자책봉에 반대하다가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기사환국[己巳換局]). 남인은 이후 정국을 이끌면서 1694년에는 서인이 인현왕후 복위를 도모하려 했다는 고변을 하고 옥사를 일으켰다(갑술옥사).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은 인현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비한 것을 후회한다는 전지(傳旨)를 내려 소론정권을 성립하게 하고 남인의 다수를 명의죄인(名儀罪人)이라 하여 중앙정계에서 몰아냈다(甲戌換局). 그 뒤 정국은 서인 내의 노론·소론 사이에 정권을 둘러싼 각축이 벌어지면서 노론 일당전제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노론·소론 당쟁의 핵심은 희빈 장씨의 처벌문제 및 장씨 소생의 세자와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문제였다. 숙종은 노론의 주장을 받아들여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한편, 1717년에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