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의 아침 공기는 유럽의 어느 계절보다 더 깊고, 더 고요한 숨을 품고 있었습니다.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호수에 도착한 그날도 그랬습니다. 잔잔한 물결 위로 구름이 천천히 지나가고, 호수 한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작은 섬과 그 위의 성모 마리아 승천성당이 마치 동화 속 삽화처럼 조용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 사람은 묘한 감정에 잠깁니다. 오래전 호수의 신이 살았다는 듯한 전설이 떠오르고, 수천 년의 시간이 잔잔하게 쌓여 있는 듯한 고요함이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립니다.
■ 호수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느리게 걷기’의 시작
블레드 호수를 한 바퀴 천천히 걸어보면, 사람은 어느 순간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에 젖습니다.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는 귓가를 지나고, 수면은 바람 한 점에도 빛을 바꾸어 보여줍니다. 사진으로는 담지 못할 그 은근한 색감이 여행자의 마음을 비워내기 시작하지요.
나는 호숫가 작은 벤치에 앉아 오래도록 바라봤습니다. 물 위에 비친 성당의 실루엣은 바람이 올 때마다 흔들렸지만, 그 흔들림조차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인생처럼. 흐르는 순간을 완벽히 잡아둘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매 순간이 더 소중해진다는 걸 호수는 조용히 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 작은 배 한 척이 삶을 건네주는 풍경
블레드 호수에는 플레트나(Pletna)라 불리는 나무 노젓는 배가 있습니다. 정부의 허가를 받은 몇몇 뱃사공만이 그 배를 모을 수 있는데, 그들은 오늘도 호수 한가운데 섬으로 여행자들을 태워 나릅니다. 노가 물살을 가를 때마다 잔잔한 파문이 퍼지고, 배는 그 물결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집니다.
배가 섬에 닿을 때쯤, 뱃사공은 묵묵히 닻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배에서 내려주지요. 그런 배를 타다 보면 여행이란 결국 ‘누군가의 손길로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힘으로만 도착할 수 없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 사랑을 품고 99계단을 오른다는 것
섬에 내리면 성당까지 이어지는 99개의 돌계단이 기다립니다. 슬로베니아에서는 결혼한 신랑이 신부를 안고 이 계단을 올라가면 평생 사랑이 영원하다는 전통이 있습니다. 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누군가는 사랑을 다짐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인생의 첫 순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한 발씩 내딛는 일이 중요합니다.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고, 숨을 고르며 인생의 한 장면을 온전히 바라보는 일. 계단 위에서 바라본 호수는 더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풍경 속에 작은 나의 삶도 잠시나마 잔잔히 가라앉는 듯했습니다.
성당 안에는 사랑을 상징하는 종이 하나 있습니다. 소원을 담아 그 종을 울리면 영원한 사랑이 내려온다는 전설. 나는 종을 울리며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사랑’을 조용히 빌었습니다. 나이 들어가는 삶의 굴곡 속에서도 나를 지키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를.
■ 김일성의 이야기가 남긴 묘한 여운
블레드 호수에는 김일성이 티토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왔다가 이곳에서 며칠 머물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독립국이자 비동맹의 상징이었던 유고슬라비아와 북한의 낯선 만남이 이 평화로운 호수와 겹쳐지면, 역사는 언제나 풍경을 넘어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조용한 호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오히려 그 대비가 여행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한 시대의 정치가가 머물렀던 자리 위에서 오늘의 여행자는 평온을 즐기고, 사랑을 빌고, 삶을 되돌아보니 말입니다.
■ 호수가 주는 마지막 메시지
해 질 무렵, 호수는 더 고요해지고 색감은 짙어집니다. 핑크빛, 회백빛, 짙은 청록빛이 순식간에 변하며 수면 위에서 춤추듯 흘러갑니다. 그 순간, 누구나 자신만의 기억과 마음 한 조각을 꺼내어 호수 위에 올려놓게 됩니다.
블레드 호수는 단지 예쁜 풍경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한층 더 깊게 끌어당기는 ‘느림의 세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곳을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지도 모릅니다.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한 걸음씩.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평온 속에서,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
블레드 호수는 그런 의미에서, 발칸 반도의 가장 부드럽고 아름다운 쉼표 같은 장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