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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1-19. 2019년 비전교회 추수감사. 2019. 11. 17.
오늘이 추수감사절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성패가 대단한 일과 대단한 사건을 통해서 갈리기도 합니다만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갈릴 때도 많이 있습니다. 조그만 실수가 큰 길을 막을 수 있고, 선한 작은 것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은 그 기준이 대단한 것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으로 갈립니다. 그 것은 우리 입술에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입에서 감사라는 말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삶은 하향곡선을 그리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감사라는 말을 입에 자주 올리면 올릴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윤택해지고 우리의 지경 또한 넓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1년의 감사절을 지킬까요? 왜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고통가운데 조그마한 수확 앞에 감사를 드렸을까요? 감사 때문에 미국이 세계 속에 열강이 되고, 감사 때문에 위대한 민족이 됩니다. 감사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되고, 감사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관계도 서로에게 감사를 하느냐? 에 따라 관계가 깊어지고 친밀하게 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감사가 그 만큼 중요합니다. 대상 17;16-27. 다윗의 감사가 나옵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데 감사의 이유를 대략 5가지를 말합니다. 먼저는 양을 치는 목동에서 부르시고, 기름을 부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다윗의 삶을 주시고 자기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난 10년 이상 어려운 순간들을 이겨내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더욱이 내일과 미래를 바라보면서 소망 가운데 오늘 감사를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것이 다윗의 감사의 삶입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2019년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 추수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지난 1년 동안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무엇에 감사를 드립니까? 복 주신 것을 감사합니까? 지키신 것 때문에 감사하십니까? 은혜 베푸신 것 때문에 감사를 하십니까? 아니면 나의 삶에 부요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 때문에 마음과 신앙의 삶이 그렇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휴리탄들이 드렸던 고난 속에서 겨우 살아남고 겨우 삶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 것처럼 그 감사가 신앙 가운데 있습니까? 여러분, 감사가 우리의 삶을 바꿉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예배가 우리를 복되게 하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계시지만, 열매가 없는 것 때문에 한 숨이 나오지만 아픔과 고통 가운데에도 길이 있으면 괜찮은데 길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도 이 시간 감사로 소망의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를 다시 돌아보시고 은혜와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1. 오늘 누가복음17;11-19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예루살렘을 가시는데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한센씨 병에 걸린 사람들 10명을 만납니다.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마을은 위험한 곳입니다. 서로 경계를 하잖아요. 원래 그 두 지방 사람들은 서로 적대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계에서 자주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두 지방 사람들은 같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고 12족장의 후손들입니다. 영광스러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싸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거쳐 오면서 두 지역 사람들은 서로를 향하여 반목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북쪽은 사마리아, 남쪽은 예루살렘을 기준한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아무도 살기 원치 않는 그 경계마을을 은신처로 삼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한센씨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한센씨병에 걸리면 한 공동체에서 같이 살 수가 없고, 격리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공동체를 떠나고 가족들과 고향을 떠납니다. 제사장으로부터 추방을 받고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마을로 찾아 왔습니다. 갈릴리에서도 오고 사마리아에서도 왔습니다. 그런데 몸이 정상일 때는 서로 반목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딱한 처지가 되면서 서로 같은 질병과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누가 찾아주는 사람 없이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 때문에 그들은 차이를 넘어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에 대한 소문입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전하시며, 여러 가지 질병을 말씀 한 마디로 고친다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가졌다는 소식입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지나갑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한센씨 병자들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헛소문이겠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보나마나 그렇지, 한 두 번이냐? 그렇지만 그 중에 10명은 움직이었습니다. 병에서 해방되기를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물어볼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정한 사람은 사람들과 접촉이 금지됐고, 제사장에게 고발이 됩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누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나가는 예수님 일행을 만나게 되고 멀찍이서 소리를 쳤습니다. 마음도 멀고 거리도 멀고 소망도 먼 멀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멀리는 이들의 한계와 간절함이 동시에 담겨있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우리는 문둥병 때문에 죽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를 고쳐 주세요! 저희 소원을 들어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이들의 호소는 예수님의 일행을 멈추게 했습니다,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봤습니다. 순간 예수님이 앞으로 나오시면서 이들의 담을 제거하시고, 간격을 없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구약 레위기의 규정에 따라 문둥병에서 치유된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 됐습니다. 완치되었음을 증명해 주어야만 그 사람은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고 예배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는 말씀은 치료되었으니 확인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몰라도 치료되고 회복되기를 간절하게 사모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압니다.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몸에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상당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회복이 되고 치료가 되어야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치료가 되고 뜻을 이루어야 움직입니다. 그런데 10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치료가 되고 회복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니요? 되물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서 어떤 강한 힘을 느꼈고 치료하심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대로 있는 모습이지만 진심으로 느켰고, 믿음과 확신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열 사람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약속이나 한 듯이 제사장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이는 확신이 없이는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걷다가 한 사람이 얼핏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랍니다. 흉한 피부가 어린아이처럼 깨끗해지고. 고름이 흐르고 피가 줄줄 흐르던 흉측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희고 말끔한 얼굴이 되었습니다. 열 명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서로를 살펴보면서 치료된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여러분, 회복이 되고 치료를 받고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말씀 가운데 이루어질 것을 확실히 믿고 행동하시고, 말씀을 의지하고 시작하시면 행동하는 도중에, 가는 도중에 회복이 되고 치료가 되고,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에는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에게 확인 받으러 가는 도중에 나았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부터 확인을 받고 그들은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빨리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었고, 공동체에 가고 싶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은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가면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주님! 회복시키시고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족에게로 돌아 갈 수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 앞으로 가서 그 분 앞에 엎드리고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제가 나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 돌리러 온 사람은 이 이방 사람 하나 밖에 없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고, 나머지 아홉은 갈릴리에 사는 유대 사람이었습니다.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이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2. 여러분, 내 자신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예전에 아름다운 공동체에서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어느 덧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몸과 마음과 신앙이 무너지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은 아닙니까? 그런데 그토록 열망했던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그 열 사람 중 하나였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홉 명의 유대인들처럼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먼저 가족들을 찾아갔을까요,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예수님을 찾아가 감사 드렸을까요? 이 말씀에 나오는 비율, 9:1의 비율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열에 여덟, 아홉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두고 즐기는 데 더 빠릅니다. 감사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 굳어져 있어서 웬만한 일로 감사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이 우리의 능력 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여러분, 감사를 잊지는 않으셨습니까? 감사 속에는 위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왜 감사를 생활화해야 될까요? 감사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믿음의 행위이고 믿음의 시작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영광은 믿음이 있어야 봅니다. 꿈을 이룸은 믿음으로 됩니다. 비전과 소망도 믿음으로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감사가 믿음의 시작이라니까요? 감사에서 믿음으로 연결이 되고 믿음은 영광을 안겨줍니다. 감사는 감사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3. 그러면 감사로부터 주어지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늘 유대인 문둥병자 아홉 명과 사마리아 문둥병자 한 사람이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열 명 다 자기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은 똑같았고, 다시 태어난 삶과 새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있게 하신 예수님에게 감사를 표현한 사람은 단 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감사를 생략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오늘 말씀 끝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러분, 감사가 믿음의 행위이고, 감사가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감사를 믿음의 행위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136편에 1절에서 26절까지 매 절마다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감사하고, 하나님 홀로 기사를 일으키신 것을 감사하고, 창조하신 것을 감사하고, 모든 것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고, 기적을 일으켜 건너가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구원하신 것을 감사하고, 통과하신 것을 감사하고, 예비하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지난 기간 동안과 오늘에 동안 감사하십니까? 무슨 일이든지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외치면 감사의 습관이 생깁니다. 그 습관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금처럼 될 수 있는 은혜가 되었다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괴롭히고 나를 방해하는 사람이 바꾸어집니다. 반응을 해야 재미가 있는데 감사를 하니까? 스스로 물러납니다. 그리고 감사는 나의 내일과 미래를 열어줍니다. 내 심령에 감사가 일어나면 내 자신도 모르게 마음과 사고와 믿음과 신뢰가 바뀌고 변화되고 결국 내 인생의 시온의 대로가 됩니다. 누구에게 감사를 해야 될까요?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표현을 해야 합니다. 모든 관계된 사람에게 감사를 해야 합니다.
3-1. 먼저 주님에 대한 감사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우울하고도 재미없고 권태로운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오늘 이 사마리아 한센병자에게서 무엇을 봅니까? 무엇을 가지고 왔나요? 병을 고쳐줬다고 선물을 가져왔나요? 돈을 가져왔습니까? 맨 몸으로 나왔어요. 고쳐주신 건강한 몸으로 나왔습니다. 감사한 마음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 그것 하나를 원하십니다. 오늘 추수감사절로 모였습니다. 감사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거둔 열매가 이 사마리아 사람보다 못한가요? 오늘 무엇을 가지고 나오셨고, 무엇으로 감사를 하시나요?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사1;11에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와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3-14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 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이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들의 드림에 감사가 빠지고 믿음의 양심이 빠지고 신앙의 순종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모두 빠진 채 그냥 드렸습니다. 여러분! 감사가 빠진 예물, 감사가 빠진 헌신입니다. 진심으로, 신앙으로, 믿음으로 감사를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사람에게 감사입니다. 가족과 지체와 친구와 부모와 교회와 지도자와 목사와 교우들에 대한 감사,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때를 따라 공급과 인도와 이끄심을 까마귀를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관계를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감사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신앙이 돈독해 질수록 하나님께만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까마귀도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양식도 하나님이 주셨고, 사람도 하나님이 붙여 주셨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면 2% 부족한 것이 됩니다. 나를 이끌어 준 사람, 나를 도와준 사람, 나에게 길을 열어준 사람 그 사람에게 감사를 해야 합니다. 이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감사입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그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고 인디언들을 초청하고 축복하고 감사를 했습니다. 이 것이 미국을 미국 되게 하는 기초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감사를 표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3. 그런데 감사는 감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사가 믿음의 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는 다른 것에 연결이 되고 축복과 연결이 되고 은혜와 연결이 됩니다. 이렇게 감사를 표현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감사하는 사람에겐 상상치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도리를 다 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감사는 당연히 해야 될 것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감사하는 사람에겐 놀랍게도 더 감사할 일이 만들어집니다. 오늘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온 것은 다른 의도가 아닙니다. 너무 감사해서 주님께 감사하다는 그 한 마디 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뜻밖의 선물이 주어집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오늘 이 말씀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를 믿음의 행위로 보셨습니다. 그는 감사를 통해서 인생의 궁극적인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 한 마디를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인생은 갈립니다. 주님께서 열 명을 치유해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그 저주의 병에서 낫게 하신 것입니까?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와서 감사하다는 그 한 마디면 다시 엄청난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었는데 9/10가 그 대열에서 탈락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은 질병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을 찾았고, 나머지 아홉은 몸은 나았지만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감사는 가래로도 못 막을 것을 호미로 막는 것이 됩니다. 감사는 사탄도 물러나고 나쁜 인간관계도 떠나갑니다. 빌립보서 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여러분, 기도도 간구도 우리의 소원도 비전도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감사가 빠지면 안 됩니다. 감사가 믿음의 행위입니다. 감사가 열매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절에 다시 한 번 감사를 회복하시고 하나님께나 이웃에게나 그 감사를 표현하세요. 감사가 늘 넘쳐 나서 다윗과 같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통과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난이 밀려올 때, 그들은 동일하게 믿음의 눈으로 고난을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이 끝이 아니고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난은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필수 과정이요, 더 좋은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은 무엇에 대하여 감사를 하시나요? 마음의 장벽이 있고 이루지 못함의 장벽이 있습니까? 열매가 없습니까? 삶의 전쟁이 만들어 낸 담장과 편견과 차별의 담장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이 있습니까? 아니면 잘 이루어지고 목표한 그 무엇이 만들어지고 지금 너무나 기쁨이 넘치십니까? 이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눈물과 고통만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과 기쁨도 지나갑니다. 나에게 주어진 내 영광도 지나갑니다. 다 지나갑니다.
어느 날 이스라엘의 다윗 왕이 궁중의 보석세공사를 불러 지시를 내렸답니다. 내가 항상 지니고 다닐 만한 반지를 하나 만들고 그 반지에 글귀를 새겨 넣으라. 내가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위대한 일을 이루었을 때 그 글귀를 보고 우쭐해 하지 않고 겸손해질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견디기 힘든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주는 글귀여야 한다. 보석세공사는 최선을 다해 최고의 반지를 만들었지만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글귀를 새겨야 다윗 왕의 마음에 들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지혜롭다는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습니다. 한참을 생각하던 솔로몬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써넣으세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보석세공사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솔로몬이 다시 말했다. 승리의 순간에 이 글귀를 보면 자만심이 가라앉게 될 것이고, 만약 절망에 빠졌다면 이내 표정이 밝아지고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이 문장을 보고 랜터 윌슨 스미스 라는 사람이 시를 지었습니다. 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라
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네 삶에 밀려와 마음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네 눈에서 영원히 앗아갈 때면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끝없이 힘든 일들이 네 감사의 노래를 멈추게 하고 기도하기에도 너무 지칠 때면 이 진실의 말로 하여금 네 마음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고 힘겨운 하루의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잘됨이 너에게 미소 짓고 하루하루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근심 걱정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의 기쁨에 젖어 안식하지 않도록 이 말을 깊이 생각하고 가슴에 품어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너의 진실한 노력이 명예와 영광 그리고 지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네게 가져와 웃음을 선사할 때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지속될 일도, 가장 웅대한 일도 지상에서 잠깐 스쳐가는 한순간에 불과함을 기억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데 여러분, 지나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슬픔도 감사 기쁨도 감사가 되면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 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나가지 않습니다.
어제 그저께 일인데 제가 모든 분들에게 보내드린 내용이지만 이 내용을 제 카톡에 올릴 때와 점검할 때와 다시 읽을 때에 눈에서 흐르는 눈물 때문에 항공기 안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수하물 카드도 적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형빈이가 한숨을 이리저리 쉬면서도 이 아픔을 감사하려고 한 말과 신앙으로 해석하려는 모습과 내용과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픈 엄마와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서 해석하고 혼자 감당하려고 한 모습 때문입니다. 하지만 밤늦게 다시 찾은 그으름과 냄새와 이리저리 마구 흩어져있는 병원에서 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이야기 때문에 이 사실을 다 알게 되었고 그 내용을 엄마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부탁에도 제가 집에 와서 다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사선을 넘으면서 다짐한 말 때문입니다. 제가 보내드린 멜의 내용을 다시 읽습니다.
할렐루야!!! 오하요오 고자이 마스. 오늘도 새로운 새날 새 아침으로 눈을 뜨게 하시고 생명을 연장 시켜 주시니 진심으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히메지 비전교회의 우리 교우들과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는 한국과 일본의 모든 분들에게 마음 다하여 감사를 드리며 소식을 전합니다요. 저는 목요일과 금요일 치과에서 임프란트와 발치와 또다른 치료를 받았습니다요.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들어가서 2019년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감사예배 앞에 주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또한 마음 다하여 온 맘과 정성 다하여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보다도 지금까지 비전 교회와 울 교우들을 인도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동행하시며 복을 주신 은혜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15일 어제. 금요일 오후 1시20분에 한국 에서 발생한 서울 강남 서초동 대형 화재 사건 속에 울 아들 때문입니다. 연세 이형빈 가정의학과 병원을 개원해서 2년 3달 동안 주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온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제 상가 지하에서 불이 나서 계단과 통로가 막힌 가운데 병원 2층에 갖혀서 간호사 2분과 세무사 한 분과 울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계단과 통로에 연기와 가스로 퇴로가 없었는데 그래서 모든 약품 냉장고와 탕비실을 치우고 조금 큰 샷시 창문을 띁어 내고 그 화염 속에서도 차분하게 간호사와 세무사와 울 아들이 소방관이 설치를 해준 사다리를 타고 탈출을 했습니다. 세무사는 먼저 2층에서 뛰어내리고 간호사가 계단으로 내려 간다는 것을 겨우 달래서 불안하지만 함께 탈출 할 수 있게한 이유입니다. 병원이 조금 피해를 당하고 여러 가지 일과 울 아들 본인이 직접 놀라고 두렵고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었던 그리고 책임감 앞에서 감당해야하는 일과 함께 얼마동안 진료를 못하게 된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인명 피해가 없도록 지켜주신 주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울 형빈이의 고백입니다. 저희는 이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놀랍겠습니까요?
간호사와 환자분들이 없었다는 것이. 그리고 점심 시간이기 때문에 울 형빈이가 없었다면 두분 간호사 분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은 울 아들이 병원의 시설 점검과 다시 개원하는 마음으로 준비를 해야 하겠지만 이만한 것이 얼마나 은혜입니까요? 이런 어려움과 사건과 정리를 뒤로하며 울 형빈이에게만 맡기고 울 집사람과 저는 선교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도와주지 못하고 떠나는 이 아침에 제 마음이 너무 괴롭고 너무 아픕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습니다요. 괴롭습니다요. 어찌해야 할까요? 저와 울 집사람은 공항에 데려다 주고 떠나는 아들의 뒷 모습만 바라봅니다. 측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울 집사람이 공항 안으로 들어 가는 모습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밤이 새도록 병원에서 가져온 가스가 벤 모든 세탁물을 돌리고 말려서 대강 정리해서 형빈이 혼자에게 맡기고 부탁했습니다. 힘내라고 그리고 이 것 또한 은혜위에 은혜에 대한 더 깊은 감사를 드리라고 말만 하면서 안아주지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주님 앞에 코람데오 할 수 있을까요? 일본을 위한 선교와 울 교우들과 일본 분들을 위하여 영혼 사랑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주님의 마음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울 교우들을 위하여 주어진 삶을 살며 이 영혼들을 사랑해야 하는 자리가 목사. 사모의 자리인가 봅니다. 그래서 울 교우들을 위하여 어제까지 준비한 90키로가 넘는 모시 가래떡과 아로나아 가래떡과 그 유명한 모시 찹쌀 떡 40키로와 김치와 간식과 한국음식을 준비한 5개의 가방과 함께 항공기에 몸을 맡겼습니다.
이렇게 맡기신 울 교우들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합니다. 이는 제가 수시로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상황과 어떠한 조건에서도 울 교우들을 사랑하고 세워가고 만들겠다고 한 약속의 내용인데 세상의 어두움이 저를 테스팅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하는 것입니다. 주님. 지금도 바라보고 계시지만 보시옵소서. 지금도 지키시고 계시지만 지켜 주시옵소서. 지금도 은혜로 복을 주시지만 모든 분들에게 크고 놀라운 복을 주시옵소서. 특히 혼자 내버려 두고 온 울 아들과 딸을 지켜 주옵소서. 연세 이형빈 가정의학과 병원의 일들이 잘 정리가 되고 다시 주님 주신 은혜의 제 자리를 찾게하시옵소서. 그 마음과 신앙과 믿음을 확정하시옵소서. 지금 여러 가지 생각과 마음들이 필림처럼 돌아가지만 그래서 더욱 2019 추수 감사예배가 은혜위에 은혜가 넘칠 것 같습니다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감사절 설교의 타이틀을 5일 전에 주보로 준비하고 치료를 위하여 한국에 나왔었는데 그대로 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모든 목사님과 저를 아시는 모든 주의 귀한 분들에게 잠시나마저의 마음을 전합니다. 히메지 비전교회와 교우들을 제몸과 같이 섬기며 기도하는 이상열이 이 아침에 올립니다. 2019. 11. 16일 항공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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